외동읍 머리모양 ‘하이까래’에 얽힌 사연들
(작성중 : 머리 시리즈 2회)
그동안 정부당국과 합동으로 ‘지방의원의 참고도서’를 집필하느라 몰두하다보니 향우회 카페에 들려볼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너무 오래 들리지 못하고, 방을 비워둔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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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는 ‘하이까래’라는 헤어스타일이 있었다. 표준어로는 ‘하이칼라’라는 말이었다. ‘하이칼라(high collar)’라는 말은 물론 영어인데, 경상도(慶尙道)지방에는 일본에서 들어 온 일본식(日本式) 영어발음 ‘하이까라(ハイカラ)’가 변해 ‘하이까래’가 되었다.
이하에서는 표준어(標準語)인 ‘하이칼라’로 통일한다. 동양의 경우 한 때 ‘하이칼라’라는 말은 서구적(西歐的)인 것을 총칭(總稱)하던 용어이기도 했었다.
1950년대의 하이칼라
(미국하원 의원들 ; 이승만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먼저 ‘하이칼라’라는 두발(頭髮) 형태가 나타난 유래를 잠시 살펴본다. ‘하이칼라’라는 말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16세기 전에 생긴 말이다. 서기 496년 영국인들이 단지 목에 생긴 연주창(連珠瘡)을 감추기 위해 상의(上衣)의 ‘칼라(옷깃)’를 올린 것이 시초가 된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이 동양(東洋)으로 전파되면서 이외로 ‘멋쟁이’라는 의미의 ‘fashionable’이라는 표현으로 변질(變質)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옛적 영국에는 ‘연주창(連珠瘡)’이 크게 번창했는데, 그 당시 영국인(英國人)들에게 유행하던 ‘연주창’은 여러 개의 작은 감자를 목에 쑤셔 박은 것처럼 튀어나와 그것을 감추려고 ‘옷깃(collar)’을 잔뜩 높여야 했는데, 그것이 ‘하이칼라’의 원조(元祖)가 되어 버렸다.
제1공화국 당시의 하이칼라 국회의원들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는 장면)
여기에서 말하는 연주창(連珠瘡)이란 목에 생긴 여러 개의 멍울이 헐어 터져서 생긴 부스럼, 곧 결핵성 림프샘염을 말한다. 연주(連珠)라고도 한다.
지금도 영국 등지에는 승마복(乘馬服)을 입은 얼굴이 창백한 사내가 ‘하이칼라’로 옷을 입은 그림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당시의 서구 문명이 동진(東進)하면서 아시아에도 이 ‘하이칼라’라는 말이 들어와 생활전반에 유행하기도 했었다.
동양(東洋)에서 처음 유행한 때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일본(日本)의 ‘메이지’ 시대였다. 당시 일본에는 서구지역을 다녀 온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이들은 서구적(西歐的)인 옷차림을 하고 멋을 부리는 일이 많았다.
제2공화국 하이칼라 관료들(장면 내각)
일본에서의 외래어(外來語) ‘하이까라(ハイカラ)’라는 말은 당시의 이런 사람들을 조롱(操弄)하는 의미에서 사용된 말로, ‘마이니치’신문의 기자(記者)인 ‘이시카와 한잔’이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하이칼라’라는 말은 앞서 말한 대로 서양인(西洋人)들의 와이셔츠 등의 옷에 붙어 있는 ‘깃(칼라-collar)’을 의미하는 말로, 동양인(東洋人)들의 옷이 깃이 낮은데 비해 ‘하이칼라’는 넥타이나 ‘스카프’ 등을 맬 수 있도록 높게 만들어져 있었다.
당시에 서구지역(西歐地域)을 다녀 온 일본인(日本人)들은 상당한 상류층이었으며, 이들 사이에 서구적인 복식이 유행했고, 이 서구적인 복식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 바로 높게 세운 ‘하이칼라’였다.
하이칼라 복식
(바티칸 시티 근위대)
그리고 이렇게 높게 ‘칼라’를 세운 옷을 입은 사람들을 비꼬는 의미에서 그런 옷을 입은 사람들을 ‘하이칼라’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다.
이후 ‘하이칼라’라는 말은 더욱 널리 통용(通用)되어 나중에는 복장 뿐 아니라 서구식의 머리 모양이나 멋을 부리는 사람, 또는 서구식(西歐式) 사상을 갖고 있거나 서구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비아냥거리는 말로도 쓰이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어사전(國語辭典)에서도 이에 영향을 받아 ‘하이칼라’는 ①취향(趣向)이 새롭거나 서양식(西洋式) 유행을 따르는 일, 또는 그 사람. ②(전통적 머리 모양에 대하여) 머리털의 밑만 깎고, 윗부분은 남겨서 기르는 서양식 남자의 머리 모양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윤보선 대통령과 하이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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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잠시 우리나라에 ‘하이칼라’ 헤어스타일이 보급(普及)된 시기와 그 시절의 상황(狀況)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회원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전통사회에서는 유교사상(儒敎思想)에 입각하여 머리털은 신체와 함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그것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孝)의 시작이라는 인식하에 장발(長髮)이 보편화되었다.
고종황제의 하이칼라
그러나 근대 시민사회로의 전환기인 1895년 11월에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면서부터 두발(頭髮)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었다.
이때 단발령을 발포(發布)한 고종(高宗)은 스스로 머리를 잘라 시범을 보였으나, 일부 대신과 유학자들은 단발령에 항의하는 상소(上訴)를 올리며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뒤에는 온 나라에 단발(短髮)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인 1920년대 두발의 모습이 급속히 변화된 것은 일본으로 유학 간 유학생(留學生)들이 돌아와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유행을 선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전통적(傳統的)인 머리 모양에서 서구의 짧은 머리 모습으로 변화되면서 사회적 수요에 따라 이발사가 등장하고, 이용소(理容所)가 대두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1895년에 발포한 단발령의 내막을 좀 더 살펴본다. 옛날 우리나라 남자들은 총각(總角) 시절에는 머리를 땋아 내렸고, 결혼(結婚)한 사람은 상투를 틀어 올렸다. 이발이 필요 없던 시절의 얘기다.
그러나 일본과 서양문물(西洋文物)이 밀려들어 오면서 개화의 물결이 거세지자 드디어 서기1895년 11월 17일 전국의 남성들에게 모두 상투와 댕기머리를 자르고, 삭발하라는 단발령(斷髮令)이 공포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와 하이칼라들
대한제국(大韓帝國) 고종황제 당시의 김홍집(金弘集) 내각은 을미사변 이후 내정개혁에 주력한다는 명분 아래 조선개국 504년 11월 17일을 건양원년 1월1일자로 음력을 양력(陽曆)으로 개정하는 동시에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그리고 고종(高宗)황제는 단발령에 솔선수범하여 신하인 정병하에게 세자(世子)와 함께 머리를 깎았으며, 내부대신(內部大臣) 유길준은 고시를 내려 관리들이 우선적(優先的)으로 머리를 깎게 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최초의 이발사(理髮師)는 왕실 이발사인 안종호였다. 안종호는 당시 대한제국의 고위관리로 고종황제(高宗皇帝)를 주변에서 보필하던 명문 양반가 출신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내부대신 유길준
이런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우리나라에서 이발을 최초로 시작한 이들과 이발사(理髮師)는 구한말 고관대작(高官大爵) 중 개혁개방을 이끌던 양반들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이발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貴族)의 직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의 단발령(斷髮令)은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그 시행이 여의치 않았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유교(儒敎)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많은 선비들은 “손발을 자를지언정 두발(頭髮)은 자를 수는 없다”고 분개하여 정부가 강행(强行)하려는 단발령에 완강(頑强)하게 저항했었다.
상 투
여기에서는 당시 단발령을 고시하여 그 집행을 밀어붙이던 유길준(兪吉濬)의 생애를 잠시 살펴본다. 한 세기 전 최초의 일본 유학생(留學生)인 유길준이 유학길에 오를 때만 해도 우리나라 선비들의 금의환향(錦衣還鄕)의 지름길은 여전히 과거급제였다.
그리고 1881년과 1883년 두 차례에 걸친 유길준(兪吉濬)의 일본과 미국 유학은 예기치 못한 임오군란(壬午軍亂)과 갑신정변으로 두 번 다 1년 반도 못 돼 끝나 버렸다.
그러나 1884년 미국(美國) 유학 중 찍은 ‘하이칼라’ 머리를 한 유길준의 사진은 전통적(傳統的) 출세의 길을 차버리고 신문명(新文明)을 따라 배우려 한 그의 결심을 손에 잡히게 보여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갑신정변(甲申政變)은 그가 큰 뜻을 제대로 펼치기도 전에 나래를 접게 만들어 버렸다. 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한 청국(淸國)의 ‘원세개’는 조선사람들이 중국의 속박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품지 못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청운의 뜻을 품고 떠난 일본 유학생들이 줄줄이 소환되어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지는 참극(慘劇)이 빚어졌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영어와 국제법에 밝은 인재에 목말랐던 고종은 유길준(兪吉濬)에게 귀국을 명했다.
조선총독부 악질 하이칼라들
그러나 1885년 말 제물포로 돌아온 유길준을 맞은 것은 활짝 열린 등용문(登龍門)이 아니었다. 박해의 손길을 피해 그의 식견을 활용하려 한 고종(高宗)과 측근들이 짜낸 고식책(姑息策 ; 姑息之計 ; 당장의 편한 것만을 택하는 일시적이며 임시변통의 계책을 이르는 말)으로서의 연금이었다.
7년 남짓 궁중(宮中)의 자문에 응하며 권력의 비호(庇護) 아래 간신히 목숨을 이어가면서도 그는 앞서 보고 깨달은 자의 의무를 다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1894년 4월 1일 일본에서 출판된 ‘서유견문(西遊見聞)’은 그러한 그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이 책은 당대 우리나라 사람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수준(認識水準)을 보여주는 대표적 서양 문물 소개서이자 근대화(近代化)의 필요성과 방법을 역설한 개화(開化) 사상서였다.
서유견문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바깥세상을 보는 동포들의 눈이 뜨이고 귀가 터지기를 바라던 그의 소망은 1896년 고종황제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때의 정변으로 유길준은 일본으로 몸을 숨겼으며, 나온 지 채 2년도 못된 망명객의 책은 금서(禁書)가 되고 말았다.
20만 부 이상 팔린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은 일본인(日本人)들을 근대 국민으로 바꾸는 데 이바지했지만, 자비(自費)로 1000부를 찍은 ‘서유견문’은 당대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유학(留學)을 통해 얻은 지식을 동포들의 안목을 넓히는 데 쓰일 수 있도록 부단히 되돌리려 노력했었다.
‘세계대세론(1883)’ ‘중립론(1885)’ ‘노동야학독본(1908)’ 그리고 ‘대한문전(1909)’ 등 그가 남긴 논저들은 일관된 그의 삶을 잘 보여준다.
아관파천(俄館播遷) 당시의 고종
한 시대의 선각자(先覺者)가 되어 민족을 깨우치고자 했던 그가 사망하고부터는 36년에 이르는 일제의 식민통치(植民統治)가 시작되었고, 온 나라의 남자들은 상투를 자르고 ‘하이칼라’ 머리로 단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고혈(膏血)을 착취하던 일제는 전쟁과 수탈의 효율성(效率性)을 높이기 위해 온 나라에 신작로(新作路)를 만들고, ‘공굴다리’를 만들었다.
낙동강 칠백 리 공굴 놓고
하이칼라 잡놈이 왕래한다. |
위의 노래가사는 경남(慶南) 함안지방에서 불리어지던 노래로 낙동강(洛東江)에 콘크리트로 다리를 놓고, 개화 바람에 물들어 ‘하이칼라’ 머리를 한 ‘잡놈’이 쉴 새 없이 오간다는 내용이다.
낙동강 공굴다리
여기에서 말하는 ‘하이칼라 잡놈’은 하이칼라 머리를 한 ‘왜놈’들을 이르기도 하지만, ‘하이칼라’ 머리를 하고, 사치와 향락(享樂), 술과 계집을 탐닉(耽溺)하던 친일파 조선인들을 빗대는 말이기도 하다.
이 땅에 개화(開化) 바람이 불어 닥친 때는 불과 1백 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조선양반의 상징(象徵)이던 상투를 강제로 자른 단발령이 발포(發布)된 때는 1895년 11월의 일이다.
물론 교과서에 쓰여 있는 대로 단발령은 일본공사(日本公使)의 협박으로 내려졌다. 고종과 황태자(皇太子)가 먼저 상투를 잘랐으니 그 당시 일본의 위협이 얼마나 심각했을까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시의 일본공사
비록 개화의 물결이 시대상황(時代狀況)이라 해도 유생들의 강력한 저항을 무릅쓰고 고종이 칙령(勅令)을 발표한 것은 문화의 침략일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근세민족생활 연구가인 이용선(李鏞善)씨의 ‘조선 최강상인’에 따르면 단발령은 민황후(閔皇后)를 시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의 감정을 폭발시킨 단초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친일내각 김홍집(金弘集) 정부는 ‘개화백성을 만든다’고 단발령을 합리화하려 했지만, 왕궁이 일인 낭인들에 짓밟힌 감정 때문에 의병(義兵)들이 들고 일어나서 난리를 피운 것이다.
왜놈들의 민비 시해장면
단순한 단발령(斷髮令) 반대가 아니라 일본공사의 모의로 술을 퍼마신 왜놈 부랑자(浮浪者)들이 남의 나라 왕궁에 처 들어가 국모(國母)를 시해하여 국부를 검사한 후 석유를 끼얹어 불태워버린 만행(蠻行)을 규탄한 것이다.
1896년 유생(儒生)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 2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왕궁경비대(王宮警備隊)까지 동원했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끝내 김홍집(金弘集) 내각은 붕괴되고 고종은 아라사(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판국에 김홍집, 정병하(鄭秉夏), 어윤중 등은 성난 군중들에게 매를 맞아 죽었고,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임금의 이름으로 내린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에 법 없이도 살 어진 백성들이 왜 이토록 격심(激甚)하게 저항했을까.
상투 자르기
전술한 대로 단발령(斷髮令)보다는 왜놈들이 국모를 시해한 데 대한 분풀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공사(日本公使)가 왕을 협박하여 머리를 깎으라 했으나 왕은 민비(閔妃)의 장사나 치른 뒤에 깎겠노라고 했는데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과 조희연 등 친일파 대신들이 일본군(日本軍)을 끌어다 궁을 포위하고 머리를 깎지 않은 자는 죽이겠다고 협박(脅迫)했기 때문이다.
고종황제(高宗皇帝)가 머리를 자르는 날의 정경이다. 단발을 미루고 있던 고종이 일본공사와 개화파(開化派) 신하들의 압력과 간청이 잇따르자 그들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고종은 장탄식을 하며 정병하(鄭秉夏)를 돌아보며 “경이 짐의 머리를 깎으라”고 했고, 정병하는 가위를 들고 왕의 머리를 깎았다.
순종황제와 하이칼라
황태자(皇太子)의 머리는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이 깎았다. 나라가 이 지경이었으니 의병이 일어나고 쿠데타가 빚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일설에는 고종의 머리를 궁중이발사(宮中理髮師)인 안종호가 잘랐다고도 한다.
이후부터 왕명(王命)인 단발령으로 상투가 잘려 나가니 이발소가 생겨났고, 이발사(理髮師)가 새로운 직업으로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시절 천직으로 불릴만한 이발장이를 높여 ‘이발소 사무원’님이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한성(漢城)과 전국 일원에 이발소가 생겨났지만, 우리네 기계와 기술이 없어 이발업계도 일인과 청국인(淸國人)들이 경쟁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전통적(傳統的)인 ‘갓’과 ‘탕건’을 파는 우리나라 갓 장수들은 장사가 되지 않아 굶어죽을 형편이 되고 말았다.
이발소 사무원님
1901년 인사동에 우리나라 처음으로 동흥(東興)이발소가 문을 열었다. 유양호(柳養鎬)라는 사람이 일본서 이발기를 사오고 전기 안마기까지 비치했었다.
또 농상공부 주사 출신의 양반인 안종호(安宗鎬)도 태성 이발소를 차리고 뒤이어 서너 곳의 이발소가 생겨 장안(長安)에는 ‘하이칼라’ 신사들이 속출했다.
민심은 단발령을 규탄하는 쪽이었지만, 친일파인 일진회원(一進會員)들이 먼저 상투를 자르고 맥고모자를 쓰고 다니며 세상을 뒤집기 시작했다.
그들이 깎은 상투머리를 불태운 냄새가 무려 10리 밖까지 번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유생(儒生)들의 저항은 그치지 않았고, 최익현은 상소문(上疏文)까지 올려 이를 철폐토록 요구했다.
상투머리 자르기
(양복차림에 모자를 눌러쓴 체두관(剃頭官)이 가위로 상투 자르는 모습)
이때 내각(內閣)에서는 최익현(崔益鉉)을 잡아 그의 상투부터 자르라고 호통했지만 ‘목을 치는 것은 좋지만 상투는 못 자른다’고 펄쩍뛰어 끝내 상투를 자르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의 상투는 양반가문의 체통이자 성인의식(成人儀式)의 상징으로 매우 존귀한 의식이었기에 단발령은 그만큼 정치적(政治的) 시위와 저항을 몰고 왔던 것이다.
이때 특기할 것은 독일(獨逸) 상인 세창(世昌)양행측이 단발령 철회를 요청하는 외교적 압력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1896년 2월의 한말(韓末) 외교문서에 ‘독일 영사 그린이 단발령으로 인천항(仁川港) 거간들이 모두 낮에는 문을 잠그고 출입치 않아 상업과 무역(貿易)에 지장이 많다더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세창양행
당시 조선경제(朝鮮經濟)를 손안에 쥐고 있던 세창양행이 독일영사를 움직여 장사가 안되니 단발령(斷髮令)을 거둬 주도록 조선정부에 건의했다는 뜻이다.
일제의 계략에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던 조선조정에서는 서울의 4대문 밖에 순검(巡檢)을 배치하여 상투를 자르지 않는 이는 출입을 금지시키자 장사꾼마저 가위질이 두려워 장날에도 움직이지 않으니 온갖 생필품(生必品)을 파는 독일상인이 죽을 지경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단발령에 대한 저항(抵抗)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경상도(慶尙道) 제일의 거부이던 장길상(張吉相)은 그의 외아들이 서울에 유학하여 상투를 자르자 학비제공을 중단하기도 했었다.
국무회의 하이칼라 머리
그리고 자신의 상투가 잘리자 학원에 기부키로 약속한 기부금도 거부해 버렸다. 세도가 민영익(閔泳翊)의 첫 양자 민정식은 상투를 잘랐다는 이유로 파양(罷養)을 당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러한 시중의 저항과는 상관없이 경상 관찰사로 부임한 박중양(朴重陽)은 영해군을 초도순시하며 기관장들을 관아로 불러들여 일본순사가 가위질을 하도록 꾀를 내어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반면 주미 전권대사 박정양(朴定陽)은 상투에 갓을 쓰고 워싱턴 거리를 활보했었다. 박 대사는 무도회(舞蹈會) 초청을 받아 상투차림으로 춤도 추어 당시 명사댁 따님과 신식(新式) 로맨스를 남기기도 했었다.
그러나 1897년 영국공사로 부임한 민영환(閔泳煥)은 여왕이 상투와 갓을 보고 싶다고 초청했을 때 이미 ‘하이칼라’에 양복(洋服)으로 멋을 내고 있었다고 한다. 불과 1백여년 전 일이지만 부끄럽고 불쾌하고 되씹어 보고 싶은 개화적 이야기들이다.
어쨌든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라는 그 시절 우리 민족의 행동규범은 사라지고, 온 세상은 ‘하이칼라’로 바뀌었고 지금은 노랑머리 천국으로 진화했다. 여기에서 그때 그 시절 민초(民草)들의 애환이 담긴 시중 민요 한 토막을 읊조려 본다.
우리네 부모가 날 기를 때
중서방 주자고 길렀나
호박풍잠에 주먹상투
사대문 바람에 다 떨어진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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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60여 년 전 우리나라 전역에 성업 중이던 이발소(理髮所)의 정경을 잠시 살펴본다. 6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시골서는 이발소라면 개화의 첨단이요. 이발소(理髮所)에 드나든다는 것은 오늘의 골프가 그렇듯이 소박한 사람들의 허영심을 만족시켜주는 이야깃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골 농민들은 택시 한 번 탄 것이 자랑거리가 되곤 했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의 이발소(理髮所)는 시골 사람들의 택시 승차(乘車)보다도 훨씬 더 고귀한 것이었다.
옛적 이발관
이발소(理髮所)의 이름으로서는 ‘문화이발관’ 또는 ‘고등이발관’이 가장 격에 맞는 것이었고, 어느 도시에 가거나 ‘문화이발관’ 하나쯤은 으레 있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이발소에서 깎아 주는 머리모양은 모두 ‘하이칼라’였다.
그 시절 ‘하이칼라’ 머리를 창조하는 예술가(藝術家)에 해당하는 이발사(理髮師)는 자동차 운전사(運轉士)와 더불어 엄청난 인기를 누리기도 했었다.
자기 스스로 하이칼라 머리를 하고 말쑥한 양복차림에 나비넥타이를 맨 불국이발관의 멋쟁이 이발사(理髮師)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보는 듯하다. 이발사의 ‘사’자를 스승(師)로 쓰게 하고, 운전사의 ‘사’자를 선비(士)자로 쓰게 한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었으리라.
이발사
우리나라의 이용사(理容師) 시험제도는 일제시대인 1923년 당시 ‘야마모도’라는 일본인(日本人)이 주동이 되어 최초의 강습회를 시작하여 그해 가을에 최초로 국가가 시행하는 이용사 자격시험(資格試驗)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 당시의 시험출제는 주로 당시 의학박사(醫學博士)인 주방주씨의 저서인 『위생독본』이란 책에서 출제되었으며 생리해부학, 소독법, 전염병학, 면접시험, 실기시험(實技試驗) 등으로 실시되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서울특별시의 이용사(理容師) 시험실시는 1948년 정부수립 이후부터였고, 부산직할시(釜山直轄市)의 시험은 1954년도부터 실시되었다.
이용사 시험
그 후 내무부(內務部) 산하 각 시․도에서는 이․미용사법에 따라서 한국직업 인력관리공단이 보건사회부(保健社會部)에서 제정한 공중위생법에 의거하여 이용사 시험을 실시하고 있다.
해방 전인 일제시대(日帝時代)에는 이용사에 대한 뚜렷한 교육기관이 없었고, 이용사(理容師)들에게 사사해서 기술을 익히고 『위생독본』을 독학으로 공부하여 자격을 취득하거나, 보조원(補助員) 생활로 취득하였다.
해방 후에도 역시 혼란기(混亂期)라 교육기관이 없었으나 6.25사변 후 사회가 급전함에 따라 몇 군데의 학원이 생겨났지만, 체계적(體系的)인 교육기관은 없었다.
이용학원
그 이후 1년제 고등기술학교에 이용과(理容科)를 신설하여 상당수의 이용사(理容師)를 배출했으나, 1970년대부터 장발(長髮)이 유행하자 학생 수가 급격하게 감소되었다가 1990년대에 들어와서 두발형(頭髮形)이 변모되어 가면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제식민지(日帝植民地) 시대의 두발은 성인남성의 경우 양옆과 뒤를 치켜 깎고 윗머리가 10~15cm 정도의 길이인 ‘하이칼라’ 스타일이 보편적(普遍的)이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말기가 되자 일본군국(日本軍國) 당국에 의해 또다시 삭발령(削髮令)이 공포되어 모두 빡빡머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의 풍습은 1970년 당시까지 대부분의 남자어린이들과 남학생들을 빡빡머리를 하고 학교에 다니게 했으며, 소녀들은 단발머리가 주류를 이루었다.
빡빡머리
이후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정부에서 이용(理容)의 정의를 법률에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1986년 제정된 공중위생법(公衆衛生法)에서는 이용업을 ‘손님의 머리카락 및 수염을 깎거나, 다듬는 등의 방법으로 손님의 용모(容貌)를 단정하게 하는 영업’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1960년대 머리 모양의 형태는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가리마를 타는 ‘하이칼라’였고, 다른 하나는 가리마 없이 완전히 뒤로 빗어 넘기는 ‘올백형’이었다.
가리마 없이 빗어 넘기는 ‘올백’머리의 형태는 1950년대 말 중년층 이상에 유행하여 보편화(普遍化)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필자는 1960년대 중반 군복무(軍服務) 중일 때 ‘올백’ 머리를 해본 일이 있었다.
오리바꾸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올백헤어 스타일
‘하이칼라’와 ‘올백’머리는 1970년대 청장년층이 장발(長髮)을 선호하면서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부는 사회적으로 풍기문란(風紀紊亂)이라는 명목 하에 강제로 장발을 단속한 결과 획일화(劃一化)된 문화와 개성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치적(政治的) 상황에 저항하는 의식이 팽배하면서 자신의 두발(頭髮)로 개성을 표현하려는 의지가 장발을 선호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장발의 유행은 이발소(理髮所)의 서비스 형태에도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발소에서는 기계(器械 ; 바리깡)보다는 가위에 의존하여 이발하는 기술이 강화되었고, 기존의 머리 기름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머리 기름이 사라지는 계기(契機)가 되었다.
여성의 올백머리
학생들의 두발 형태는 해방 후 초등학교(初等學校)의 경우 짧은 머리와 상고머리가 주류를 형성하였다. 반면에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의 관행인 삭발 형태의 짧은 머리가 일반화(一般化) 되었으며, 점차 앞머리를 약간 기를 수 있는 스포츠형으로 변화한 것이 특징이다.
두발자유화(頭髮自由化)를 요구하는 학생들과 학교 측이 마찰을 일으켰고, 이런 결과 1981년 문교부(文敎部)는 학생의 두발 자유화를 발표하게 되었다.
정보화(情報化) 사회로 진입하는 현 단계에서는 개성을 다양하게 표출하려는 욕구가 반영되어 머리 모양에도 다양성(多樣性)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머리에 부분별로 염색(染色)을 하거나, 단순한 검정색에서 탈피하여 노란색이나 초록색 등으로 염색을 하기도 한다.
노랑머리
머리모양의 변화를 위해 ‘무스’를 사용하는 것이 일상화(日常化)되었으며, 이발기구가 현대화(現代化)된 것도 변화 양상의 한 단면이다.
게다가 이용업(理容業)은 단순히 머리카락을 자르고, 감기고, 수염을 면도하는 실용적 측면의 이용(理容)에서, 점차 헤어패션을 중시하는 헤어스타일리스트 살롱이나, 머리카락의 건강을 관리하는 헤어클리닉 살롱으로 변화되어가는 추세(趨勢)를 보이고 있다.
현재의 이용방법을 크게 나누면, 정발기술(整髮技術)로는 커팅(자르기), 세팅(가다듬기), 샴푸, 트리트먼트, 염색, 가발, 드라이, 퍼머넌트 등이 있다.
염 색
안면기술(顔面技術)로는 면도, 페이셜 마사지, 콧수염 정리 등이 있고, 이들 기술은 패션이나 의료적 요소 이외에 약품, 화장품(化粧品)이나 면도칼, 전기기구 등을 사용하므로 과학적 지식과 위생적(衛生的) 배려가 요구되고 있다.
한편으로 고객(顧客)의 머리 형태를 파악하여 얼굴형과 조화로운 형을 선택하는 것도 이발 기술의 중요 요소(要素)에 속하고 있다.
이발의 순서는 규칙적(規則的)인 형태로 자리한 것은 아니나, 일반적인 순서는 머리 자르기, 면도, 감기, 다듬기의 순으로 진행된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리거나 수건으로 말린다. 면도(面刀) 후 가벼운 마사지가 행해지기도 한다.
면 도
머리형태가 결정되면 자르거나 다듬는 조발(調髮) 과정이 이어지고 염색이나 세발(洗髮), 머리 손질 등을 하게 된다. 나아가 고객의 머리카락의 성질에 따라 세척제(洗滌劑)나 로션 등을 권하고 얼굴, 목, 두피 마사지를 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조발(調髮)’이란 머리를 땋는다는 뜻과 머리를 깎아 다듬는다는 뜻이 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용어로 ‘정발(整髮)’이란 말이 있는데, 정발은 머리를 잘 매만져 다듬는 일 또는 그렇게 한 머리를 말한다. 그리고 ‘정발(淨髮)’은 승려가 삭발(削髮)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조 발
이제 진부(陳腐)한 얘기는 여기에서 줄이고, 이하에서는 필자가 고향에 살고 있을 때 가끔씩 이용했던 불국장 이발관을 잠시 들여다보기로 한다. 지금은 그 미발관의 상호조차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불국이발관’었을 것으로 기억이 되고 있다.
당시에는 지금의 ‘불국사역(佛國寺驛)’은 ‘불국역’이라 했고, 구정리 소재 오일장은 ‘불국장(佛國場)’이라고 부른 것을 감안하면 ‘불국이발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의 이발소(理髮所)도 지금과 비슷하게 주요 영업항목은 조발(調髮)과 세발, 면도였다. 머리 깎고(調髮) 감으면(洗髮) 멋 내기 과정에 들어간다.
불국사역
드라이기가 나오기 전이라 그 시절에는 주로 ‘불고데’를 사용하여 ‘하이칼라’머리를 다듬었다. 난로에 넣은 장작이 알불이 되면 아궁이에 ‘고데기’를 넣어 달군 뒤 찬물이나 물수건에 치직! 소리가 나게 잠깐 식혀 머리 모양을 다듬는다.
머리카락이 ‘고데기’에 눌어붙지 않도록 이발사(理髮師)는 ‘고데기’를 요령껏 흔들며 열 조정을 해주는데, 멋 좀 내려다 이마를 데는 손님들도 한 둘이 아니었다.
가장 돋보이는 작업은 면도(面刀)하는 장면이다. 세숫비누도 아닌 빨래비누를 붓으로 휘저어 희고 고운 거품을 낸 후 귀밑에서 하관을 따라 두텁게 거품을 바른다. 추운 겨울에는 난로연통(煖爐煙筒)에 ‘거품붓’을 문질러 차가운 기운을 덥힌 후에 사용한다.
그 시절 고데기
기다란 재생 타이어 조각을 허리에 차고 면도날을 문질러 가며, 스각스각 면도를 하면, 퍼렇게 면도자국이 드러나는데, 그 모습만으로도 청결(淸潔)한 남성의 상징(象徵)으로 충분했다.
“덥수룩하고 심란하게 생긴 사람이 이발하고 면도하면 말끔한 ‘하이칼라’가 되는데, 이게 예술이 아니면 무엇이 예술인가요.”라며, 입에 거품을 물던 ‘불국이발관’ 이발사(理髮師) 아저씨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훤하다.
당시의 이발소 아저씨는 윗녘에서 피난 나온 사람으로 그 근동(近洞)에서는 유일하게 서울말을 구사하는 사람이어서 이발(理髮)을 하면서 서울말을 배우기도 했었다.
그 시절 이발소
어쨌든 그 시절의 이발관(理髮館)과 ‘하이칼라’는 사람들마다 제법 길쭉한 추억을 담고 있기도 하다.
면장 아저씨의 포마드 바른 올백머리, 면소재지 다방에서 맞선 보느라 모처럼 멋을 낸 ‘시가다’ 아재의 ‘하이칼라’머리, 노랗고 하얀 수건들이 깨끗하게 널려있던 빨랫줄이 흑백영상으로 떠오른다.
어디 이뿐인가. 입심 좋은 이발사 아저씨의 지칠 줄 모르는 언변(言辯), 꼬마들의 작은 엉덩이를 받쳐주던 널빤지도 추억(追憶) 속에 가물거린다.
그리고 기계충 얘기에서도 얘기했지만, 그 시절 이발소에서 빠뜨릴 수 없던 단골소품은 푸슈킨의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What though life conspireto cheit you)”라는 시였다.
‘사진각구’에 넣어져 전신에 파리똥을 빠글빠글 뒤집어쓰고 있던 그때의 이발소 액자(額字)가 빠뜨린 부분을 완성해 본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슈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은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고야 말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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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는 앞쪽에서 잠시 언급한 장발과 장발단속(長髮團束)에 관한 얘기를 잠시 되씹어 본다. 앞쪽 파일에서도 소개한 대로 ‘가리’는 머리를 짧게 깎는 것이지만, ‘장발(長髮)’은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것이다.
그 시절에 유행했던 장발과 그 장발단속에 얽힌 사연(事緣)들을 앞쪽 파일과는 조금 다른 각도(角度)에서 추억해보기로 한다.
장발단속
1970년대 우리 사회의 진풍경(珍風景)은 장발단속이었다. 1972년 10월 유신 직후부터 정부는 풍기(風紀)를 문란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장발을 하고 다니는 젊은이들을 길거리에서 검거하여 즉석에서 머리를 자르는 진풍경(珍風景)을 연출되었다.
때문에 머리가 긴 젊은이들은 거리를 지날 때 경찰(警察)이 있는지 없는지 사방을 경계하며 다녀야 했고, 혹시 발견되기라도 하면 쫓고 쫓기는 촌극(寸劇)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장발(長髮)뿐 아니라 ‘미니스커트’도 단속의 대상이었다. 무릎으로부터 20cm 이상 올라간 ‘미니스커트’를 입지 못하게 단속(團束)하였다.
1960~70년대는 정부주도(政府主導)의 경제성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개인에 대한 각종 규제가 극심한 시기이기도 했었다.
당시의 장발
이 시기에 1960년대 중반 미국(美國)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번져나간 히피문화가 팝음악과 함께 들어오면서, 장발(長髮)과 미니스커트는 자유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이에 대해 정부는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대표적인 퇴폐풍조(頹廢風潮)로 규정하고 엄중 단속하였다. 경찰(警察官)들은 매일 같이 30cm 짜리 대나무 자를 들고 다니며,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을 골라내어 치마길이를 재느라 부산을 떨곤 했었다.
미니스커트 단속
장발 얘기가 나왔으니 장발과 그 단속(團束)에 얽힌 사연들을 조금 더 보탠다. 장발에 대한 단속기준은 남성에게만 적용되었는데, 남·여의 성별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긴머리, 옆머리가 귀를 덮거나 뒷 머리카락이 옷깃을 덮는 머리, 파마 또는 여자의 단발형태(短髮形態)와 같은 머리가 대상이었다.
장발로 적발되면 대부분 경찰서(警察署)로 연행되어 머리를 깎겠다는 각서를 쓰거나 경찰서(警察署) 구내 이발관에서 머리를 깎은 후 풀려났으며, 머리를 깍지 않고 버틸 경우 즉결재판(卽決裁判)에 넘겨졌다.
장발 단속을 거부한 즉결재판 대기자들
그 당시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한 법률은「경범죄처벌법」이었다. 1973년 이전에는 정부지침(政府指針)에 따라 주먹구구로 장발단속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73년부터는「경범죄처벌법」을 개정하여 함부로 휴지·담배꽁초를 버리거나 침을 뱉는 행위, 술주정행위, 유언비어(流言蜚語) 유포행위, 장발·비천한 복장 착용, 비밀댄스 교습행위 및 그 장소 제공행위, 암표매도행위, 새치기행위, 출입금지구역이나 장소에의 무단출입행위, 폭발물(爆發物)의 조작·장난행위 등이 경범죄(輕犯罪)의 종류에 추가되면서부터 집중적인 단속이 시작되었다.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할 법적근거(法的根據)를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1976년 5월부터는 정부가 “국민의 주체의식을 확립하여 건전한 사회기풍을 정착화”한다는 이유로 장발단속계획(長髮團束計劃)을 수립하여 ‘히피성 장발’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과도(過度)한 장발단속이 국민의 무관심과 이해부족으로 그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공무원(公務員)뿐 아니라 ‘학교, 단체, 기업체, 공장 등 전 조직을 통하여 조직적이고 자율적(自律的)인 지도단속’을 추진하였다.
이 무렵 보건복지부와 각 시·도에서는 요식업조합(料食業組合), 이용조합, 숙박업조합, 다방 및 다과점조합(茶菓店組合)에 공문을 보내어 “남·녀를 구별하기 힘들 정도의 장발”을 한 종업원(從業員)에 대한 장발 정화지시를 내리기도 했었다.
장 발
그러나 당시의 대통령이 시해(弑害)되고 정권이 바뀌자 내무부(內務部)는 ‘장발단속이 청소년들의 자율정신을 저해하는 부작용(副作用)을 낳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장발에 대한 단속중지(團束中止)를 전국 경찰에 지시하였다.
그리고 1988년에 이르러서는「경범죄처벌법(輕犯罪處罰法)」을 개정하면서 “남·녀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긴 머리를 함으로써 좋은 풍속을 해친 남자 또는 점잖지 못한 옷차림을 하거나 장식물(裝飾物)을 달고 다님으로서 좋은 풍속을 해친 사람”을 경범죄(輕犯罪)의 종류에서 제외함으로써 장발이나 미니스커트에 대한 단속 관련 규정도 삭제되었다.
당시의 미니스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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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세계의 이용(理容) 역사를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한다. 인류최초로 등장한 이발(理髮)은 삭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B.C(서기전) 1900년경, 헤브라이(Hebrai)족의 추장(酋長)이 죄인을 처벌할 때 두발(頭髮)을 삭발했고, 그 두발이 자랄 때까지 범인 자신이 죄를 뉘우치며 속죄하던 유래로부터 이용(理容)에 관한 역사는 시작되었다.
삭 발
이후 여러 세기 동안에 문화(文化)가 발달되고, 이에 따라 부족 간의 상호 협조로 생활의 향상도 있었지만, 투쟁도 많아 전쟁에서 머리에 부상을 입은 사람들의 두발을 삭발(削髮)하고 치료를 해줬는데, 이때의 이용사(理容師)는 의사(醫師)의 직분을 겸하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의 나폴레옹 제1제정 당시에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사회구조(社會構造)가 복잡해지자 이용원과 병원을 겸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프랑스 최초의 이용사 ‘쟝바버(Jean Barber)’를 통해 병원과 이용원(理容院)을 분리하여 운영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때 프랑스의 유명 기계제작회사 ‘바리캉 미르(Barigancl. mer)’에서는 당시의 이용기구를 ‘바리캉’이란 명칭으로 작명함으로써 세계적(世界的)인 공용어가 되기도 했다.
바리깡(바리캉)
지금까지 이용원(理容院) 입구마다 설치되어 있는 청․홍․백색의 ‘싸인 폴(sign pole)’은 그 당시의 병원(病院) 표시였던 것으로 그 세 가지의 색깔은 정맥, 동맥, 붕대를 의미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울러 이때부터 이용문화가 급진적(急進的)으로 발달하여 이용원의 숫자가 급증하자 ‘싸인폴’은 이용원(理容院) 쪽에서 차지하게 되었고, 이것 역시 전 세계에 보급되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병원은 새로이 적십자(赤十字) 표시를 만들어 이 또한 전 세계가 공통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싸인폴(sign pole)
서양(西洋)의 이용역사를 다른 측면에서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한다. 서양에서의 이용(理容)의 역사는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왕(재위 BC 1728∼BC 1686)이 제정했던 함무라비법전에 ‘이용을 업으로 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보다 좀 더 오래 되었으리라 추측되고 있다.
이 법전(法典)에는 이발사가 의사의 보조자로서 외과수술이나 이(齒)의 치료 따위도 직접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중세(中世)에는 이발사가 상처의 치료나 피를 뽑는 일 등의 일반적인 외과 업무도 겸했다고 하는데, 이를 이발의사(理髮醫師)라고 하였다.
그 후 르네상스 때에는 의학분야(醫學分野)에서도 라틴어 독해력이 중시되고, 라틴어 어학실력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구별이 생겼다. 고대문헌을 이해하는 능력의 중요성(重要性)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이발사
이로부터 라틴어 실력을 갖춘 사람은 의학을 중심으로 의사이발(醫師理髮),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발을 중심으로 하는 이발의사(理髮醫師)라고 부르는 등, 사회적 지위에 차별을 두는 관습이 생겼다.
이용(理容)업무와 의사(醫師)업무가 별도의 전문직으로 확실히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루이 14세(재위 1643∼1715) 시대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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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지난 1950년대 이발소(理髮所)의 바깥풍경을 잠시 구경해 본다. 어느 지방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이발소 출입구 앞에는 앞서 소개한 붉은색과 푸른색, 흰색이 나선형(螺旋形)으로 표시되어 돌아가는 등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를 ‘사인보드’ 또는 ‘사인폴’, ‘싸인폴(sign pole)’, ‘사인볼’, ‘싸인볼(sign ball)’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러왔다. 여기에서는 정식 명칭인 ‘싸인폴(sign pole)’로 통일한다.
‘싸인폴’의 유래를 알아본다. 앞에서도 언급한대로 18세기경까지 유럽에서는 이발사(理髮師)가 외과의사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질병(疾病)에 걸리면 이발소로 가서 치료를 받곤 했었다.
그 당시에 질병치료법(疾病治療法) 가운데 하나가 몸에서 나쁜 피를 빼는 것이었는데, 환자들이 나쁜 피를 빼기 위해서는 피를 빼는 기술을 지닌 이발사(理髮師)에게 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이발사
그래서 당시의 이발사들은 자신이 전문적(專門的)인 의료기술을 지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이를 색깔로 표시했는데, 파란 색은 정맥(靜脈), 빨간 색은 동맥(動脈), 하얀 색은 붕대를 뜻하는 ‘싸인폴’을 만들어 이발소 앞에 내걸었다.
1540년께 프랑스의 ‘메야나킬’이라는 이발사(理髮師)가 둥근 막대기에 이 세 가지 색깔을 칠해 정문에 내걸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세계 공통의 이발소(理髮所) 표시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통의 표시가 유구한 세월을 흘러오면서 지금은 그 이름조차 제법 바뀌어져 있다. 이미용실(理美容室)에 설치한 ‘싸인볼(sign ball)’은 정식 명칭이 ‘싸인폴(sign pole)’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싸인볼’ 또는 ‘사인볼’로 와전(訛傳)되어 있기도 하다.
미용실 싸인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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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이발사(理髮師)는 노동수요와 공급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 편이므로 비교적 안정된 직종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이용업(理容業)은 앞서 소개한 대로 단순히 머리카락을 자르고, 감기고, 수염을 면도하는 실용적(實用的) 측면의 이용(理容)에서, 점차로 헤어패션을 중시하는 헤어스타일리스트 살롱이나, 머리카락의 건강을 관리하는 헤어클리닉 살롱으로 발전해 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의 이용방법을 크게 나누면, 정발기술(整髮技術)로는 커팅(자르기)·세팅(가다듬기)·샴푸·트리트먼트·염색·가발·드라이·퍼머넌트 등이 있고, 안면기술(顔面技術)로는 면도·페이셜마사지(美顔術)·콧수염정리 등이 있다.
헤어살롱
이들 기술은 패션적·정서적(情緖的)·의료적 요소 이외에 약품·화장품이나 면도칼·전기기구 등을 사용하므로 과학적 지식과 위생적(衛生的) 배려도 함께 요구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이용과 미용(美容)이 법률상 하나인 나라와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따로 구별된 나라가 있는데, 세계적(世界的)으로는 이 두 분야가 하나로 통일되어가는 추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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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하이칼라’나 ‘올백’머리를 한 뒤에 바르던 머릿기름 얘기를 소개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올백’은 사투리로 ‘오리바꾸’라고도 했었는데, 이 역시 일본식(日本式) 영어발음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오리바꾸
‘오리바꾸’란 가리마를 타지 않고 앞머리를 모두 뒤로 빗어 넘기는 머리 모양을 말한다. 여성의 경우도 머리칼 모두를 뒤로 넘기면 ‘올백’머리라고 한다.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1950~60년대 멋쟁이 남성들은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는 것이 유행(流行)이었다. 물론 외국영화(外國映畵)의 영향이었다.
그렇게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포마드’라는 머릿기름이었다. 여자들과는 달리 포마드를 바르지 않으면, 올백머리가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무스’라는 것이 있어서 편하게 손에 묻혀서 머리에 바르고 원하는 모양대로 만드는 시대지만, 옛적에는 이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포마드’로 머리모양을 낼 수밖에 없었다.
포마드
그리고 당시의 ‘포마드’는 완전히 기름덩이였다. ‘포마드’를 머리에 바르고 빗으로 계속 빗질을 하면, 머리에 온통 기름이 쫘르르 흐르면서 겨우 머리가 뒤로 넘어 간다.
그것도 모자라 이발사(理髮師)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찍꾸’라는 치약형 ‘포마드’를 머리털 사이사이에 추가로 발라 머리털을 아예 떡으로 만들기도 했었다.
이렇게 떡이 되도록 기름칠을 한 머리는 마치 머리에 식용유(食用油)를 바른 것처럼 끈적끈적 거렸고, 그 짙은 기름 냄새가 사립문에서 아낙들이 밥 짓는 ‘정지깐’까지 스며들어 밥 짓는 아낙들이 사립문까지 뛰어나와 쳐다보다가 시어머니한테 흉을 잡히곤 했었다.
포마드 신사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기름떡칠을 하고, 하루 종일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면, 동네 먼지란 먼지는 다 그 머리에 달라붙어 먼지투성이가 되기 십상이었다.
오일장날 불국장(佛國場)에 있던 불국이발관에서 그런 식으로 이발을 하고 돌아오면, 비포장 7번국도의 왕먼지가 겹겹이 쌓이지만 떡칠을 한 포마드기름이 너무 아까워 머리를 감지도 못하고 며칠을 버티곤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밖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땐 많은 시골 남성들이 농한기(農閑期)를 이용하여 이 포마드를 바르고 외출(外出)을 즐기곤 했었다.
그 시절을 살아온 이들에게 다시 머리에 그 ‘포마드’를 바르고 싶으냐고 물으면, 손을 내저을 분들이 많을 것이라고 본다.
포마드 신랑
당시의 ‘포마드’는 또 극심한 원료난(原料難)과 기술부족으로 외제품이 범람했었고, 모조품과 밀수품(密輸品)이 판을 치기도 했었다.
국내 화장품산업(化粧品産業)은 가마솥에 장작불로 물과 기름을 가열시키며 저어주는 수준의 열악한 상황으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외제 모조품(模造品)과 밀수품을 무너뜨린 것이 1950년대 초 태평양화학공업사의 ‘ABC포마드’였다.
광물성 ‘포마드’가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최초로 향료(香料)를 섞은 식물성 ‘포마드’를 세련된 흰 병에 담은 ‘ABC포마드’는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선수금을 맡기고 줄을 서서 물건을 받아가야 할 정도였다. 가난과 희망이 교차하던 그 시절 ‘ABC포마드’의 향기는 신사(紳士)의 심벌처럼 되었다.
하이카라 포마드
당시 밀수복지(密輸服地)로 만든 말쑥한 세비로나 마카오 신사복(紳士服) 차림에 머리카락을 2:8 비율로 가르고, ABC 포마드 기름으로 잘 빗어 넘긴 ‘하이칼라’머리의 모습은 뭇 여성들의 선망이 되기도 했었다.
1956년 영화 ‘자유부인(自由婦人)’에서 포마드를 발라 ‘올백’으로 머리를 빗어 넘기고 검은 선글라스를 쓴 남자 주인공(主人公) 이민의 모습은 최고 멋쟁이의 상징이었다.
전후(戰後)의 어수선함과 가난, 그래도 그 시절 명동(明洞)거리가 밝고 향기로웠던 것은 이때의 ‘포마드’로 빗어 넘긴 남자들의 번쩍거리는 머릿결이 일조를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자유부인
당시에는 특히 여성화장품(女性化粧品)이 귀했다. 일본에서 들어온 백분, 크림, 향수, 비누 등은 이 땅의 여성들에게 이상향을 심어주는 최대의 키워드였으나, 이 제품은 신여성(新女性)과 상류층 여성을 중심으로 유행했을 뿐, 대부분의 여성은 화장품(化粧品)을 쓸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일제(日帝)에 의해 집안의 놋쇠 숟가락까지 강제 공출(供出)될 정도로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했기 때문이다.
화장품(化粧品)은 대부분 큰 북을 둥둥 울리면서 나타나는 ‘동동 구리무’ 장수나 방물장수에게 집안 어른 몰래 외상으로 사들여 장롱 깊숙이 신주단지 모시듯 모셔놓았다.
1960년대 초반의 2:8 하이칼라와 포마드
(장면 총리의 기자회견장인데, 당시에는 기자는 물론 모든 신사
들이 2:8 하이칼라에 번쩍이는 포마드를 바르고 다녔다. 2:8이란
'가리마'의 한쪽은 80%, 다른 한쪽은 20%로 가른 모양을 말한다)
코티 ‘딱분’이나 ‘구리무’는 콧대 높은 여성들을 한 번에 사로잡을 수 있는 귀하디귀한 물건이었다. 해방의 혼란(混亂)이 채 가시기도 전에 6·25전쟁이 터지자, 생필품(生必品)의 대부분을 미제 구호품과 밀수품에 의존하던 시절이었다.
얘기가 너무 길어져 여기에서도 무조건 파일을 덮어야 할 것 같다. 배경음악을 한곡 게재하고자 아무리 뒤져도 맞는 곡이 없는 것 같다.
때문에 여기에서도 무조건 흘러간 노래로 ‘낙화유수’를 게재하여 음미할까 한다. 오늘은 이미자의 목소리로 음미해 본다.
낙화유수(落花流水)
이미자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 얽어 지은 맹서야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 살이 고개를 넘자
이 강산 흘러가는 흰구름 속에
종달새 울어 울어 춘삼월이냐
홍도화 물에 어린 봄나루에서
행복의 물새 우는 포구로 가자
사람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보내고 가는 것이 풍속이러냐
영춘화 야들 야들 피는 들창에
이 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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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발에 관한 박사가 되는듯 합니다
예사롭게 보아오던 이발관 참 역사가 깊네요
어릴 때 외로웠던 관계로 리발관
리발사와 친하게 지내든 시절
그리고 그 아가씨 생각도 나네요
포마드 기름만 바르고 나가면 그 집 총각 바람났다고 소문나던
시절이 좋았다 생각되네요 좋은 글 감사하오며
내내 건안과 건필을 빕니다.
바리깡으로 머리 팍팍 밀때 생머리 마이 뜯겼지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