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죽어감에 대하여
임종을 앞둔 환자를 돕는 문제는 비단 의사나 간호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가족, 모든 사람들의 문제다. 왜냐하면 우리는 조만간 가족 중에서 가까운 사람이 집안에서 죽음을 앞둔 경우를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기 환자를 돌보는데 가장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말기 환자들의 요구와 기대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죽음을 앞둔 말기 환자의 욕구를 열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보자.
(1) 첫째로 환자는 옆에 친구가 가까이 있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둘째로 환자는 자기 결정을 갖기 원한다. 개인적인 자율성과 자유를 갖기 원한다는 것이다. (3) 셋째로 환자는 인간 성장을 위한 요구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인 삶과 성장에 대해 격려받기를 원한다. (4) 넷째로 환자는 죽는 행위의 주인공으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 원한다. (5) 다섯째로 환자는 자신의 병에 대해서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6) 여섯째로 환자는 품위 있게 위엄성을 가지고 죽기 원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생명의 연장, 인위적 생명의 연장 방법은 원하지 않는다. (7) 일곱째로 환자는 자기의 전 생애를 돌아보는 하나의 정신 요법을 원한다. (8) 여덟째로 환자는 고통을 통제할 수 있기를 원한다. (9) 아홉째로 환자는 유머나 웃음을 갖기 원한다. (10) 마지막 열 번째로 환자는 죽음 후의 영생에 대해 알기 원한다.
그러면 이 열 가지 사항을 하나씩 설명해보자.
(1) 첫 번째로 환자가 옆에 친구나 가족이 있기를 원하는 것에 대해서 말해보자.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 조사를 했는데, 말기 환자들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가 뭐냐고 했더니, 사람들에게서 버림을 받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말기 환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 혼자 버려진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을 자기 혼자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감정과 더불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호소한다. 말기 환자의 경우 다른 어느 때보다 사람들과 접촉하고 옆에 누가 있기를 원하는데, 그럴수록 의사나 간호사들은 별로 잘 찾아가지 않는다. 의사나 간호사들은 환자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는 대신 가끔 찾아가서 한다는 말이 ‘오늘은 안색이 좋다’와 같은 말만 하고 병실을 나간다.
일본에서 간호협회 사람들과 간호사들이 이야기 하는 가운데, 의사들이 말기 환자들을 방문하면 몇 분이나 걸리느냐고 물어보니까 몇 분이 뭐냐 몇 초 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한다. 어떤 간호사가 말하기를 그렇게 짧게 머무는 이유는 환자가 ‘내가 지금 암에 걸렸습니까’와 같은 질문을 말할까봐 황급히 달아난다는 것이다. 또 간호사들 자신도 흔히 환자의 말동무가 되고 친구가 되기보다는 그저 필요한 약간의 치료만 해주고 그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 조사를 했는데 환자가 필요할 때 불을 켜면 복도에 불이 들어와서 간호사를 부르게 했다. 그리곤 간호사가 몇 분 동안이나 병실에 있는가를 조사한 것이다. 그런데 결과가 재미있게 나왔다. 비교적 건강한 환자가 부르면 간호사가 얼른 뛰어가는데, 죽음에 임박한 말기 환자가 부르면 뭔가 바쁜 일이 있는 것처럼 꾸물대더라는 것이다. 조사가 끝난 다음에 간호사들과 직접 평가를 하는데 그 이야기를 했더니 간호사들은 강하게 부정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환자를 똑같이 대하지 절대로 차별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간호사들은 분명 말기 환자들을 대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데 그것은 자신 역시 죽음을 직면하기가 두려워서 될 수 있는 대로 기피하는 것이다.
물론 한국의 간호사들은 빨리 달려갈 줄로 생각한다. 이와 같이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의사나 간호사나 가까운 가족이나 친지들이 환자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이전에는 환자들은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평안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지금은 환자들이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아주 무시무시한 기계가 조작되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요즘은 가족이나 친지들이 환자가 입원한 병원의 비인간적인 최첨단 기계로 둘러싸인 곳에서 환자를 육체적으로만 돌보게 하고 그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정신적인 영적인 요구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경에서 있었던 일인데 어떤 환자를 방문하면서 그의 가장 친한 세 명의 친구에게 환자를 방문하러 같이 가자고 했더니 세 명 다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들은 그만큼 죽음을 두려워했던 것이고, 그 때 그 환자는 사망하기 얼마 전이었다. 일본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부모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자녀들이 마지막 임종이 가까운 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부모는 평생 동안 자녀를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했는데 부모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자녀들은 그것을 오히려 회피한다면 말이 되는가?
말기 환자가 옆에 누가 있어주기를 원할 때 옆에 있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 갈 때 그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옆에 가까운 사람이 같이 있어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기 환자는 마지막에 가서 버림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과 지역 사회의 공동체로부터 아낌을 받는 존재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물론 환자 자신도 마지막 순간에 버림받을까 그리고 고독에 대해서 너무 큰 두려움을 갖지 말아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 죽어가는 환자들과 여러 날 여러 시간을 보낸 경험을 많이 했는데, 그저 마지막 순간에 옆에 같이 있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독일에서 학생일 때 죽어가는 말기 환자를 돌보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환자는 동독에서 넘어온 피난민이었고 따라서 아무 친척도 가족도 없었다. 마지막 세 시간 동안 나는 퍽 당황했다. 무엇에 대해 이 환자와 대화를 할까? 일기에 대해서, 정치에 대해서, 스포츠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야 될까 하는 데에 무척 당혹스럽게 느꼈다. 결국 우리는 같이 기도를 했고 기도하는 동안에 이 환자는 숨을 거두었다. 이 세 시간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게 있어서는 가장 긴 시간이었고 가장 귀중한 시간이었다. 이 세 시간동안 나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생각했고, 죽음의 철학에 대해 연구할 것을 결심했다. 우리는 내가 환자를 위해 무엇을 하나 생각을 하지만 때로 우리는 환자로부터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2) 두 번째로 환자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자기가 결정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개인적인 자유와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을 말한다. 많은 철학자가 말하기를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사는 방식을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자기 결정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면 의사나 간호사는 죽어가는 말기 환자에게 그들의 자기 결정의 능력과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경계선을 긋기가 어렵고, 또 특히 말기 환자의 경우는 자기 결정의 능력과 힘이 점점 약화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단순한 지침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인식을 하자는 것이다. 흔히 환자를 접하는 의사나 주변 사람들의 태도는 환자의 결정권을 무시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대신 결정하고자 하는 것일 때가 많다. 그래서 말기 환자들이 공통적으로 자신이 개인적으로 결정을 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게 된다. 생각이 혼란스럽고 스스로에 대해 의심이 생기고 또 일반적으로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감정이 생겨 환자로 하여금 모든 것을 전문가에게 맡긴다는 소극적인 자세로 갈 수 있다.
조사를 해 보면 사람들이 제일 존경하는 직업은 의사라고 한다. 의사에 대해 존경심을 갖게 되기 때문에 일단 환자가 되면 모든 것을 지나치게 의사에게 의존하게 된다. 물론 의사를 존경하고 의지하는 것은 좋지만 환자가 자기 결정의 능력까지 상실할 정도가 되면 좀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흔히 의사나 간호사들은 죽음에 대해 무언가를 결정할 때 환자의 의사를 충분히 존중하지 않거나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해버리는 일이 있다. 이러한 절차에 대해서 환자들은 별로 불평하지 않고 또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능률적이기 때문에 흔히 이렇게 하고 만다. 만일 자기 결정이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가치라면 단순히 시간을 절약하고 효율적이라는 이유만으로 환자와의 협의 없이 의사나 스텝들이 일방적으로 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환자의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오히려 환자가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결정권을 가질 수 있도록 권장하고 그렇게 분위기와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환자가 그러한 능력이 있는 한 환자로 하여금 자기 결정과 자기 일을 스스로가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과잉 봉사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환자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까지도 다 해주는 것으로 미국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예를 들어보자. 말기 환자 중에는 손이 불편해서 옷을 입을 때 단추를 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을 옆에서 보고 얼른 ‘내가 해 줄게요’ 하면서 해 주면 물론 돌보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 간단할 것이다. 그러나 이 환자에게는 시간이 몇 배가 더 걸리더라도 자기가 혼자 직접 단추구명을 하나라도 끼면 거기에서 나도 할 수 있다 하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작정 대신해주게 되면 그것은 환자로부터 자유와 권리를 빼앗는 결과가 되고 만다. 그래서 과잉봉사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간호하는 사람은 친절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 주고 싶어서 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한편으로 환자가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3) 셋째로 환자들은 비록 말기 환자라도 인격적인 성장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환자가 적극적으로 살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인간은 역동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무언가를 향해서 나아가고 성장을 한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죽어가는 말기 환자에게 인간적인 성장을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관한 것이다.
흔히 말기 환자를 대할 때 인생의 내리막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단정해 버리기 쉽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죽음을 앞둔 장엄한 과정을 밟고 있는 환자가 사실은 적극적으로 삶을 영위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 우리가 저 사람은 이제 끝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보통 말기 환자를 대할 때 자연스럽게 죽도록 내버려 두자고 생각하기 쉬운데 말기 환자에 대해서는 그가 어쩔 수 없이 취하게 되는 소극적인 자세와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을 조정하고자 하는 집념이 좋은 균형을 이루게 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독일어에서는 죽는다는 표현이 동물에게 쓰는 말과 인간에게 쓰는 말이 다른데, 동물의 경우에는 그냥 죽어서 꺼져 없어지는 것이지만 사람인 경우에는 육체적으로는 죽지만 정신적으로는 하늘로 올라간다는 동사를 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24세 된 죽어가는 동경대학 학생에게 ‘당신은 젊은 나이에 죽어가지만 건강한 사람이 알지 못하는 뭔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겠느냐’라며 강연을 부탁하니까 기꺼이 승낙했다. 그는 850명이나 모인 모임에 와서 마지막으로 강연을 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때 그 학생은 ‘나는 행복하다. 이렇게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어떤 것이든 내 경험을 말해줄 수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죽는 순간까지 죽어가는 사람들은 뭔가 자기 자신이 유용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 것이다.
나는 수백 명의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 중에는 동물처럼 발버둥치며 죽는 사람이 있었지만, 죽으면서 성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내가 뉴욕에서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분은 아주 희극적으로 돌아가셨다. 그 분은 나이가 90세였고 여러 명의 자녀를 키웠는데 돌아가시기 3시간 전에 모든 가족들을 다 모았다. 장남이 신부였는데 ‘이제 어머니는 의식도 없고 말씀도 없으시니까 우리 마지막 예배를 봅시다.’하고 말했다.
그 예배를 끝내니까 어머니가 갑자기 깨어나셔서 술을 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모두 놀랐지만 환자가 원하기 때문에 위스키를 한 잔 드렸더니 여기에 얼음도 하나 넣어달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 다음에 이제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했다. 아들은 놀래서 ‘의사가 그러는데 절대로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그랬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의사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어가고 있지 않니?’라고 하시며 달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고 나서 ‘나는 천당에 간다. 잘 있어라.’ 하며 숨을 거뒀다. 이 할머니는 평소에 술을 좋아하거나 담배를 피우는 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자녀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좋은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걸로 안다. 이 어머니는 마지막 세 시간동안 자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남겼는데 그것은 사랑이었다. 웃음을 통해서 사랑을 보여주었다.
한국에 있는 죽음 관련 단체에도 죽어 가는 사람이 자기 죽음을 적극적으로 인도하고 또 그러한 과정 중에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좋겠다. 물론 이 어머니처럼 술 마시고 담배 피우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환자 특유의 방법으로 자기의 죽음 자체를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직면해서 행동할 수 있게 도와주라는 것이다.
이제는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다섯 가지 죽음의 과정에 대해서 다시 한번 말해보자.
말기 환자들은 처음에는 부정을 한다. 그러다 두 번째로는 노여움을 갖게 되고 이 단계가 지나면 세 번째로는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가 하면서 그 방법을 찾고자 몸부림친다. 그러다 그것마저 안 되면 그 다음에는 침울의 상태로 들어간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이 되면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해서 다섯 가지 단계가 되는 것이다. 물론 죽음에 대한 태도는 사람마다 각기 다르고 문화권마다 다를 수 있다. 나는 여기다 희망의 단계를 하나 더 추가한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경우에 죽음을 모든 생애의 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으로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죽어감에 대하여2
(4) 네 번째로 환자는 자신이 죽는다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 그리고 주인공의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도와야 한다.
흔히 우리는 죽어가는 말기 환자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죽어가는 환자가 우리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과오 중의 하나는 말기 환자는 이제 아무 쓸모가 없고 중요하지 않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말기 환자는 존재 가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고 공동체를 위해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옛날에는 죽음이 요즘처럼 비인간적인 첨단 기계에 둘러싸인 아주 정리된 상태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죽는 사람은 죽는다고 하는 굉장한 사건에서 주인공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졌다. 죽음이라는 것이 단지 본인에게만 하나의 사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주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 주고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반성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중요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죽음은 삶의 의미라든가 시간과 영원의 의미와 같은 깊은 주제들을 깊이 생각하게 해준다. 오늘날의 공동체를 보면 죽음에서 얻을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을 얻지 못하게 한다. 그러니까 삶에서 매우 중요한 기본적인 죽음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어가는 환자로 하여금 소극적으로 그가 그냥 숨이 끊어지게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엄청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앞두고 그것을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근래에는 자기의 신체 장기를 기증하는 예가 많이 있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생시키는데 기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대단히 훌륭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내 자신은 벌써 일본의 케이오 대학 병원 안구은행에 눈을 기증하도록 약속을 했다.
한국의 경우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일본은 불교 신자가 많기 때문에 장기 기증을 잘 하지 않는다. 그런데 천주교나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신학자, 윤리학자, 교회의 성직자들이 모여 이 분야에 대해 오래 연구를 했다. 그 결과 기독교에서는 자신의 신체의 일부를 필요한 사람에게 기증해 주는 것은 아주 아름다운 일이므로 적극 권장되어야 하고 그것은 또 자기와 산 사람과의 연대를 증진시키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일본에만 해도 10만 명의 신장병 환자가 있는데 이들은 일주일에 1회씩 세 시간동안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 중의 반은 신장 이식 수술을 받으면 살아날 수 있는데 주는 사람이 없어서 죽고 만다. 따라서 한국이나 일본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앞으로 적극적으로 이 장기 기증 운동에 나서야 하고 그럼으로써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장기기증 운동은 미국의 제럴드 젤럼스키라고 하는 사람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1975년에 암에 걸린 어린이를 위한 센터를 만들었다. 나는 창시자인 제럴드 젤럼스키를 몇 번 만났는데 굉장히 따뜻한 성품의 사람이었다. 그에 의하면 죽어가는 어린이도 다른 어린이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우면 그것이 바로 자신을 돕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 사람은 전화를 이용해서 암을 앓고 있는 어린이를 다른 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과 통화시켜 주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친구가 되고 서로 격려를 해주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죽어가는 사람을 다른 사람과 만나게 해주면 이것은 중요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마지막 생활을 뜻있고 중요한 시간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5) 다섯 번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말기 환자들은 자신의 병의 진실에 대해서 알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1960년대 미국 의사의 90%는 절대로 자기 환자에게 암이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 주된 이유는 환자로 하여금 계속 희망을 갖게 하고 언젠가는 치료를 통해서 완전히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또 암이라고 말을 하면 그것은 바로 사형 선고나 마찬 가지가 되기 때문에 살고자 하는 마지막 희망을 앗아가는 것이므로 되도록이면 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더 깊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의사들이 환자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 것은 환자를 진실로 위해서가 아니라 의사 자신이 죽음에 대해 공포를 갖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사실 의사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죽음을 더 두려워한다. 내 친구 하나가 암에 걸렸는데 일본 의사에게 ‘내 암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하고 말했더니 ‘현대 의학을 믿으시오’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는 3주 후에 죽었다. 왜 이 의사는 좀 더 신중하게 환자와 대화를 하지 못했을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자신이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의사의 태도가 급변했다. 1977년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의사의 97%가 암환자에 대해서 그 사실을 있는 대로 이야기해 준다고 한다.
왜 미국 의사들의 태도가 급변했을까? 네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 첫째 진실을 안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이고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의 기본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진실을 말해준다는 것은 환자와 의사간의 기본적인 신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환자가 의사를 신뢰하지 못하면 병을 치유하는 데에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세 번째로 환자는 항상 의심이나 감시하는 태도를 갖고 의사는 병에 대해서 자세하게 환자와 의논하거나 물어볼 수 없는 상태가 되면 그것은 결코 환자 자신에게 좋은 것이 아니다. 내가 일본에서 경험한 것인데 남편이 암에 걸려서 죽어 가는데도 불구하고 부인은 나에게 절대로 그 남편에게 사실을 말하지 말고 비밀로 해 달라고 했다. 나중에 그 환자가 죽은 다음에 그의 아들이 나에게 말하기를 ‘하루는 죽기 전에 아버지가 울면서 나는 내가 암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왜 네 어머니는 의사와 짜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그것이 나는 못 견디게 슬프다.’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교육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교육은 바로 삶에 대한 교육이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의사와 환자 사이에 진실로 믿고 대화할 수 있는 것 이러한 것이 모두 죽음 교육에 관련된 것이다.
네 번째 이유는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환자는 자기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미리 앎으로써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 혹은 미처 하지 못 했던 일들을 할 수 있고 또 남았던 일을 정리할 수 있다. 아울러 남은 생애 동안 자기가 누구와 원한을 산 일이 있으면 화해를 하고 모든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울 수 있고 또 실천할 수 있다.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 사람이 살아오는 동안 신세진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의 표시를 남기는 것이다. 그런 것은 얼마나 보기가 아름다운지 모른다.
미국의 존 웨인이라는 유명한 영화배우가 1979년에 암으로 죽었는데, 그때 의사는 웨인에게 암이라고 말해주었다. 존 웨인은 그 사실을 안 다음에 모든 친지들에게 감사하다는 전화를 하면서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그 때 모금한 돈으로 로스앤젤레스에 존 웨인 암센터를 건립했다. 이런 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암이라는 것을 바로 알린 것과 동시에 그 후에 진심으로 환자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잘 돌보는 간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암환자에게 암이라는 사실을 말해줄 때 어떻게 말해주는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냥 의사가 혼자 가서 불쑥 ‘당신은 불치의 암에 걸렸다. 석 달이나 여섯 달 밖에 살 수가 없다.’ 하고는 바쁘니까 몇 분도 안 되어 나가버린다면 그 환자는 어떻게 될까?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그 환자의 종교에 따라서 목사, 신부, 혹은 이런 것에 대해서 깊은 이해가 있는 자원봉사자가 같이 있으면서 의사가 간 다음에 그 환자에게 정신적인 위로를 주는 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독일에서 나의 누이동생의 남편이 위암으로 죽게 되었을 때 담당 의사는 ‘나는 상담을 잘 할 줄 모르니까 신부님에게 그 사실을 말해달라고 부탁을 하십시오’ 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직접 가보지 못했는데 누이동생의 편지에 의하면 그때부터 신부가 하루에 한 번씩 꼭 와서 20-30분씩 대화를 나누고 위로를 했다고 한다. 이런 경우에는 담당의사와 신부님이 긴밀한 연락을 하고 환자를 위로해준 것이다. 성직자는 의사와 상담을 한 후 의사가 부탁을 하는 경우에만 그 일을 해야 하며 독단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나의 누이동생은 퍽 어려운 결혼생활을 했다. 시어머니가 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게 되어 내 동생은 자신은 이제부터 자유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곧 남편이 암으로 죽게 되었다. 나의 누이는 독실한 신자였고 교회성가대 대원이었는데 남편이 죽은 후 1년 동안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고 한다. 그것은 하느님이 자녀 다섯을 자기에게 맡기고 어떻게 남편을 데려갈 수 있느냐는 원망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1년 동안 노래를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녀를 둔 어머니에게 남편을 잃는다는 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시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는 매우 큰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들었다.
환자에게 병이 중하다는 사실을 말해줄 때 생각해야 할 점이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누가 그 말을 해 줄 것인가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언제 그 환자에게 말할 것인가 이고 세 번째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와 같은 항목이다.
보통은 의사가 하지만 어떤 때는 의사가 그 말을 잘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에는 의사가 아내나 남편, 자식들에게 간접적으로 할 수도 있고 목사나 신부에게 부탁을 할 수도 있다.
두 번째로 언제 말해주는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다. 가령 환자가 굉장히 쇠약하다면 조금 더 기다릴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문제로 어떻게 이야기하는 문제이다. 나는 당장에 예수인지 노우인지를 알기 원하는 타입이지만 또 사람에 따라서는 그 자리에서 직선적으로 말하는 것보다는 좀 시간을 두고 때를 봐 가면서 말해주는 경우가 좋을 때도 있다. 그리고 직접적인 방법이 안 좋으면 간접적으로 알릴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환자가 ‘약이 예전에는 효과가 있었는데 요즘에는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아요. 혹시 내가 암이 아닐까요?’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거기에 있던 간호사가 아니라고 말을 할 수도 있지만 ‘글쎄, 암인 경우에 그런 것 같아요’ 하면서 약간은 애매하게 대답을 하여 환자가 감지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
다음 이야기는 미국의 병원에서 있었던 에피소드이다. 암환자가 병실에 들어온 간호사보고 ‘얼마나 걸립니까’ 했다고 한다. 간호사는 그 말이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느냐는 말인 줄 알고 3주라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우물쭈물 하고 지나갔는데 30분 후에 또 얼마나 걸리냐고 환자가 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도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 했는데 그 환자가 하는 말이 ‘점심 먹을 때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웃은 일이 있는데, 너무 알리는 시기를 걱정하다보니까 그 환자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간호사가 지레짐작으로 혼자 고민한 사례가 되는 것이다.
(6) 여섯 번째로 환자는 품위 있게 위엄을 지니고 죽을 권리가 있다.
불필요하게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과히 좋지 않다. 이 주제와 연관해서 안락사 문제에 대해서 말해보자. 지금은 의학이 발달되고 여러 가지 첨단기구들이 발달되어 임의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것이 올바른 행위일까 혹은 단순히 죽는 과정을 연장시키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 논쟁이 많다. 여기서 적극적인 안락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안락사를 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하나의 범죄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로 금지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죽어가는 환자에게 죽음의 과정을 연장시키기 위해 최첨단 의료기구의 사용을 거절할 자유와 권리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때로 의사들은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죽는 과정 자체를 연장시키기 위해 기구를 사용하는데 이렇게 비인간적으로 생명을 연장시키는 행위가 과연 옳은가는 깊게 생각해봐야 한다. 환자가 식물인간이 되어 다시 소생할 가능성이 없고 의식을 다시 찾거나 인간의 자유를 다시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우 인위적으로 기구를 사용해서 단순히 죽는 과정을 연장시키는 것은 오히려 그 환자로 하여금 품위 있게 위엄성을 가지고 죽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1959년에 천주교에서는 보통 수단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 예를 들어 수저로 음식을 먹이는 것은 보통수단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러한 것은 계속 할 수 있지만 비상한 수단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중지한다고 선언했다. 여기에서 비상한 수단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에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겠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비상한 수단은 산소호흡기를 계속 연결한다거나 인공팩 혹은 신장에 어떤 기계를 따로 설치하거나 인공심장과 같은 것을 말한다. 천주교에서는 이러한 비상한 기계를 써서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비상수단 쓰던 것을 중지시키는 것은 소극적인 안락사의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적극적인 안락사라는 것은 환자의 생명을 중단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용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반면에 소극적인 안락사는 괜찮다는 것이다. 그러면 적극적인 안락사와 소극적인 안락사의 구별은 어떻게 하는가. 소극적인 안락사는 자연스럽게 환자로 하여금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억지로 비상수단을 써서 죽는 과정을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소극적인 안락사이다.
(7) 일곱 번째로 환자는 자신의 생을 돌아봄으로써 치료 효과 얻는 것을 원할 수 있다.
이것은 환자에게 화해할 시간을 주고 자기 생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다. 말기 환자들이 받는 고통 중에 많은 것은 과거에 가졌던 인간관계에 대해 크게 후회하는 것인데 특히 가족과의 문제, 인간관계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한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환자들은 특히 죽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는다. 해결되지 않은 인간관계 때문에 계속 고통스러워하는 환자가 용서를 필요로 할 때는 용서를 구하게 하고 화해할 필요가 있을 때는 화해를 하게 하도록 함으로써 편안한 마음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기독교인의 입장으로서는 하느님의 용서함을 받은 후 사람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일이 순서일 것이다.
(8) 여덟 번째 요구는 고통에 대한 통제이다.
우리가 고통이라고 할 때 이것은 전체적 고통, 즉 정신적 고통, 육체적 고통, 사회적 고통, 영적 고통 이 네 가지를 합해서 전체적인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9) 아홉 번째 요구는 환자가 유머와 웃음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인생에 있어서 유머와 웃음은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죽어가는 사람에게도 그것은 역시 필요한 것이다. 유머와 웃음은 말기 환자가 마지막 죽는 과정을 밟을 때 그 사람의 모든 정신건강을 도와주는 가장 귀중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원래 유머라는 말은 라틴말에서 온 말인데 그것은 육체적인 것과 관계가 있다. 나는 유머는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러 가족이나 친지들 친구들과 지내면서 사랑을 표현하기를 원하고 또 그것은 아주 친근한 분위기와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따뜻한 미소로 표현되곤 한다.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귀중한 선물 중의 하나는 웃을 수 있는 능력과 유머라고 생각한다. 신이 이렇게 유머와 웃음을 선물로 주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
우리는 서로 의사소통을 할 때 말로 하는 의사소통보다 80%는 표정과 몸짓으로 하게 된다. 우리는 얼굴 표정 하나로 우리 생각의 많은 것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가 있다. 만일 무표정하게 뻣뻣하게 서 있다면 그것은 전혀 의사소통을 안 하겠다는 뜻일 것이다. 일본에서 중년남성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데 내가 발견한 것은 그들은 의사소통을 잘 못한다는 것이다. 한번은 요꼬하마에 있는 문화회관을 갈 일이 있어서 그곳의 중년남성에게 일본말로 천천히 ‘문화회관이 어디 어디 있습니까?’ 했더니 아주 질겁을 하고 ‘나는 영어를 못해요.’ 하고 도망갔다. 일본의 중년남성의 경우 영어를 한다는 것은 죽음의 공포보다 더한 것 같다.
(10) 열 번째 마지막 욕구는 죽은 후의 세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죽음은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죽어가는 사람이 갖는 죽음에 대한 태도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 내가 그동안 많은 환자들을 접촉한 가운데 발견한 것은 환자에게 가장 큰 희망을 주는 것은 사후의 영원한 세계에 대한 희망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죽은 후에 영원한 세계가 있고 하느님을 만날 뿐만 아니라 먼저간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 친지들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큰 희망을 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열 가지의 환자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요구와 기대에 대해 보았는데 이러한 것을 이해함으로써 많은 환자를 돌보아주는 사람이 어떻게 환자를 대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
끝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말기 환자를 돌보는 가족이나 친지들이 갖는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 환자를 돌보는 사람을 어떻게 돕는가 하는 문제이다. 의사, 간호사, 혹은 사회사업가, 자원봉사자들이 환자를 돌보는데 있어서 그들 자신부터 죽은 후의 세계는 그냥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가 있으며 영생의 시작이라고 스스로가 믿는 것이 중요하다. 아까 유머와 웃음이 환자에게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환자뿐만 아니라 환자를 돌보는 의사, 간호사, 가족, 친지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농담과 유머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농담은 말장난 같이 기술적으로 사람을 웃기는 것일 수 있는데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유머는 사랑의 표현이다. 유머는 따뜻한 감정의 표현이기 때문에 따뜻한 웃음에서 나오는 사랑이 표현이 되는 것이다.
환자도 그렇지만 환자를 돌보는 사람들에게는 스트레스가 굉장히 많다. 늘 긴장되기 때문에 유머와 웃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웃을 수 있다는 것은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이고 그만큼 스트레스를 줄이는데 굉장히 도움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건강한 웃음을 웃는 것은 굉장히 필요한 것이다.
일본에 가면 범죄자를 찾는 사진이 많이 붙어 있는데 내가 유심히 관찰, 조사해 보았더니 한명도 웃는 얼굴이 없었다.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은 범죄자가 되거나 병이 나거나 한다. 미국 텍사스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가 하루에 한 번씩 환자에게 재미있는 농담, 이야기, 우화를 해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병원에 입원한 환자는 다란 병원의 환자보다 훨씬 빨리 퇴원을 했다고 한다. 또 잘 웃지 않는 사람은 암에도 잘 걸린다.
|
작성하신 에 금칙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네이버에서는 서비스 이용자 보호를 위해 금칙어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금칙어란 불법성, 음란성, 욕설로 의심되어
자동으로 등록이 제한된 특정 단어나 URL을 의미합니다.
금칙어를 삭제하신 후 다시 글을 등록하시기 바랍니다.
건전한 인터넷 문화 조성을 위해 회원님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더 궁금하신 사항은 고객센터로 문의하시면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첫댓글 고맙게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