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0. 9. 2. 16:38
■ 이필완(李弼完)
[생졸년] 1697년(숙종 23) ∼ 1785년(정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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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를 겸전 한 유복자 이필완
31世 이필완『李弼完,1697년(숙종 23)∼1785년(정조 9)』은 조선후기의 효자로.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무오사화(1498) 때, 난을 피해 제주도에 입도한 상서공 후 25世 장사랑(裝仕郞) 이희관(李希寬)의 6대손이다. 그는 제주도(濟州道) 한림읍(翰林邑) 대림리(大林里)에서 1697년(숙종 23) 3월 19일 유복자로 태어났다.
독자인 그는 제주(濟州) 기관(記官: 옛 관청의 하급관리)을 지냈으며 백세가 되신 어머니 고(高)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한성부 좌윤겸 오위도총부 부총관(嘉善大夫 漢城府左尹兼五衛都總府副總管)을 지낸 아버지 이세훈(李世薰)의 제사를 예법에 따라 정성껏 지내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무덤 앞에 여막을 짓고 살며 제사를 모셨다.
어머니가 생전에 소고기를 드시지 아니하여 제사에서도 꼭 꿩과 닭고기만 사용하였는데, 하루는 제사에 쓸 꿩고기를 구하지 못하여 걱정하고 있었는데, 매가 꿩을 잡아 묘 앞에 떨어뜨려 주어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1776년(영조 52) 3월 이필완의 나이 80이 되던 해 영조대왕이 승하했다. 그는 석 달 동안이나 쇠마(衰麻, 상복)를 벗지 않고 소식(蔬食: 채소 반찬뿐인 음식)하였으며 왕릉을 조성하는 능역(陵役)에 나가 흙짐을 져 날랐다.
이러한 사실들을 1781년(정조 5) 선산 구미 봉곡리 출신 제주 순무어사 박천형(朴天衡,1737~?)에 의하여 조정에 알려져 효자로 포양(襃揚)되었고, 1862년(철종 13) 임금으로부터 예조참판에 증직 되고,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그의 아버지와 조부는 물론 그 증조까지 벼슬이 추증되었다.
배위 정부인 울산이씨(配位貞夫人蔚山李氏)와의 사이에 8남매(아들 6. 딸 2)를 두었다.
오늘날 제주시 애월읍(涯月邑) 금성리(錦成里) 상동(上洞) 입구에 그의 충효비가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제주충효열지 ◇증보탐라지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忠孝嘉善大夫李公弼完之閭(충효가선대부이공필완지려)
제주시 애월읍 금성리 이필완 효자비 / ⓒ하늘타리 정원
이필완 효자비는 151cm 높이의 비각에 보존되고 있는데 높이 86cm, 너비 윗부분 54.5cm, 아랫부분 53.5cm, 두께 윗부분 24cm, 아랫부분 23cm이다.
비 앞면에 < 충효가선대부이공필완지려(忠孝嘉善大夫李公弼完之閭)>라고 새겨 있고, 뒤쪽에 < 동치원년정월 일(同治元年正月 日)> 그 옆으로 < 일구육오년삼월 일 중수(一九六五年三月 日 重竪)>라 새겨져 있다. 1862년(철종 13년) 1월에 정려비를 세우고 1965년 3월에 보수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탐라기년에 보면 이필완은 제주목 우면 입석촌(立石村, 지금의 대림리) 사람으로 1697년(숙종 23년) 3월 19일 이세훈(李世薰)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유복자(遺腹子)였다.
그는 아버지 장사를 지내지 못한 것을 늘 안타까워 하다가 성장한 후 추복(追服)하여 제를 지냈으며 좋은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아버지 묘소에 제사지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무덤 앞에 여막을 짓고 살며 제사를 지냈다. 평소에 짐승 고기(또는 쇠고기)를 먹지 않았으므로 꿩이나 닭을 구하여 제물로 썼다.
그러다가 어느 제삿날에는 꿩도 닭도 구하지 못하여 고민하다가 어머니 무덤을 찾아갔다. 그러자 난데없이 매 한 마리가 꿩 한 마리를 차고 날아와 떨어뜨리고 갔다. 그는 그 꿩을 가지고 돌아와 그 날 밤 제사에 썼다.
1776년(영조 52) 3월 이필완이 나이 80이 되던 해 영조대왕이 승하했다. 그는 석 달 동안이나 쇠마(衰麻, 상복)를 벗지 않고 소식(蔬食: 채소 반찬뿐인 음식)하였으며 능역(陵役)에 나가 흙짐을 져 날랐다. 그의 이와 같은 충효심이 알려졌으므로 1781년(정조 5) 제주안핵겸순무어사(濟州按覈兼巡撫御使) 박천형(朴天衡, 1737~?)에 의해 효자로 포양(襃揚)되었다.
1785년(정조 9)에 사망하였고, 예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1862년(철종 13) 1월 제주목사 신종익(申從翼,1797~?)에 의해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금성리 상동의 입구에 ‘충효가선대부 이공필완지려(忠孝嘉善大夫 李公弼完之閭)’라는 충효비가 세워지고 예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이필완 효자비가 있는 곳은 이 마을의 비석거리로서 이필완효자비 외에도 다음과 같은 비석들이 있다.
【忠孝宋擎天義明仁明三父子之閭】【通政大夫高廷彦 忠孝烈張氏之閭】【金海后人金昌白妻 孝烈晋州姜氏之閭】【處士高永雲妻孝烈梁氏之閭】【軍警忠魂碑】
출처 : 제주환경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