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선수 수급이었다. 애초 기존 6개 구단은 빙그레에 적극적인 선수 지원을 약속했지만, 막상 창단 작업이 진행되자 하나같이 지원에 난색을 표한 것. 기존 구단들도 선수층이 두텁지 못한 실정인데다, 신생구단에 대한 선수 지원이 강제가 아닌 권고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85년 4월말까지 빙그레가 확보한 선수는 고작 8명. 아마야구와의 마찰을 감수하고 영입한 신인 이상군, 민문식, 전대영과 삼성이 지명권을 양보해 데려온 이강돈, 강정길, 그리고 롯데에서 트레이드해온 이석규, 이광길, 김재열이 전부였다. 청백전은커녕 야구에서 필요한 한 팀의 최소 인원 9명도 채우지 못한 것이다.
다급해진 빙그레는 5월 8일과 9일 대전구장에서 ‘신인 선발대회’라는 이름으로 공개 선수모집에 나섰다. 이를 통해 해태 출신 홍순만, 삼미 출신 김호인 등 프로 경력자를 포함한 10여명의 선수를 추가로 확보했다. 그리고 여기에 비교적 선수층이 두터운 편인 삼성에서 시즌 중에 김한근과 박찬을 양도했고, 시즌 뒤에는 김성갑, 성낙수, 황병일까지 내줬다. 다른 구단도 여기에 동참해 롯데는 투수 천창호를, OB도 김우열과 김일중을 빙그레로 보냈다. 해태 역시 팀내에서 자리가 없어진 유승안과 김종윤을 트레이드 형식으로 빙그레에 지원했다. 청보에서는 재계약 협상에 실패한 ‘너구리’ 장명부가 건너왔다. 그리고 그해 신인 드래프트에서는 특급잠수함 한희민과 대졸 포수 최대어인 김상국을 지명해 어렵사리 주황색 유니폼을 입히는데 성공했다. 천신만고 끝에 1군 무대에서 정상적인 경기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수 구성이 완료된 것이다. 그리고 1986년 3월 8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빙그레 이글스의 창단 행사가 열렸다. 프로야구 제 7구단의 공식적인 첫 행보가 시작된 순간이다.
독수리 높이 날다
1986년 4월 1일, 대전구장에서 빙그레의 역사적인 첫 경기가 열렸다. 상대는 MBC 청룡. 경기 내용은 절망과 희망이 교차했다. 개막전 선발로 내보낸 장명부가 5이닝 6실점으로 무너진 것은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6회부터 나온 한희민의 호투는 ‘앞으로’를 기대하게 하기 충분했다. 게다가 빙그레 타자들은 하기룡-김용수-유종겸-오영일-김태원 등 주력 투수를 총동원한 MBC를 상대로 막판 맹추격전을 벌였다. 빙그레로서는 7-8 한 점 차까지 따라붙은 9회말 무사 2, 3루에서 4, 5번 타자가 삼진과 범타로 물러난 것이 아쉬웠다. 1사 2, 3루에서 김상국이 날린 우익수 플라이 때 3루 주자 이군노가 홈에서 태그아웃되며 경기는 그대로 끝났다. |
첫댓글 현재 하위권이지만 언제든지 치고 올라갈 힘이 있는 팀...
후반기에는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예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