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불화는 죽은 이의 영혼을 극락세계로 보내는 영가천도 때 봉안된 감로도로서 1907년 강재희(姜在喜)의 시주에 의해 강문환(姜文煥)·김종성·원일상의 감동(監董)으로 편수(片手) 보암 긍법(普庵肯法), 편수(片手) 두흠(斗欽), 금어(金魚) 혜과 봉감(慧果奉鑑), 계은 봉법(繼恩鳳法), 범화 정운(梵華禎雲), 금운 정기(錦雲定基), 운호 재오(雲湖在悟), 재원(在元), 상은, 상오(尙旿), 기정, 법연(法演), 범천(梵天), 행언, 현상, 종민, 원상 등이 그린 것이다. 가로 261.0cm, 세로 157.5cm에 달하는 화면의 하단에는 아귀 2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그 위로는 많은 음식과 공양물이 차려진 제단과 칠여래(七如來)가 표현되어 있다. 가로로 긴 화면의 상단에는 칠여래가 합장을 한 채 나란히 서 있으며, 좌측에는 아미타삼존과 아난ㆍ가섭존자, 왕후장상(王侯將相), 선왕선후(先王先后),북채를 든 뇌신(雷神), 우측에는 지장보살과 인로왕보살 등이 구름 위에 서 있다. 칠여래의 아래로는 제단의 좌우에 높은 기둥을 세운 후 남무백억화신불(南無百億化身佛; 석가모니), 남무청정법신불(南無淸淨法身佛; 비로자나), 남무원만보신불(南無圓滿報身佛: 노사나)의 삼신불번(三身佛幡)을 늘어뜨리고 갖가지 꽃과 공양물을 가득 배설하였는데 바람에 휘날리는 삼신번이 현장감을 준다. 또 제단 위에는 대황제폐하, 황태자폐하, 영친왕전하, 의친왕전하 등을 적은 위패 모양의 불전패가 놓여 있다. 제단으로 이르는 돌계단 아래 좌우에 놓인 커다란 화병 안에는 붉은색과 흰색의 모란이 가득 꽂혀있어 화려하게 치장된 당시 제단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으며, 제단의 우측에는 흰 천막을 치고 스님들이 나란히 모여 앉아 독경하는 모습과 스님들이 큰북과 바라 등을 두드리며 의식을 집전하는 모습, 승무를 추는 모습, 커다란 공양물을 머리에 이거나 들고서 제단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등이 표현되었다. 화면의 하단 중앙에는 서로 마주보고 꿇어앉은 한 쌍의 아귀가 크게 그려져 있다. 화염이 뿜어져 나오는 입과 가는 목, 불룩한 배 등 아귀의 특징을 잘 묘사하고 있으나 얼굴표정 등에서 다소 희화적이다. 아귀의 좌우로는 수목으로 분리된 화면 속에 한복 입은 남녀들이 춤을 추거나 싸우는 장면, 대장간에서 일하는 장면, 악사들의 반주에 맞춰 광대가 거꾸로 서는 묘기를 부리고 초랭이가 부채를 들고 춤추는 장면, 죽방울 놀이 하는 장면, 무당이 굿하는 장면 등 세속의 다양한 장면들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는데, 음식을 먹거나 술을 받는 모습, 물건을 파는 모습 등은 당시 장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듯하다. 여기에 표현된 풍속장면들은 주로 장례나 영가천도 등의 행사와 관련된 장면을 중심으로 표현되어, 수륙화로서의 감로도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화면 우측으로는 뇌신을 표현한 화염 아래로 우산을 쓴 인물과 뱀에게 쫓기는 장면 등《법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의 구제난(救濟難) 장면과 더불어 농사짓는 모습, 공부하는 모습, 병자를 진료하는 모습, 소고 등을 갖고 무리지어 노는 모습, 일하러 가거나 장터에 가는 모습 등의 다양한 일상생활과 죄인들을 벌하는 모습, 전쟁장면 등을 표현하였다. 채색은 전체적으로 적색과 황색, 흰색, 청록색 등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분홍색과 청회색, 금박, 금니 등도 함께 사용되었다. 금박과 금니는 칠여래의 신광을 비롯하여 화면 부분 부분에 사용되어 화려하면서도 호화로운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은 수락산 흥국사 감로도(1868년), 개운사 감로도(1883년), 봉은사 감로도(1892년) 등 서울, 경기지역의 19, 20세기에 제작된 감로도의 도상과 동일한 도상을 취하고 있는 작품이다. 전체적인 구도 표현에 있어서 다소 번잡스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화면은 산수와 구름으로 잘 경계 지워져 있고, 풍속화적인 면이 충실하게 묘사되었다. 인물들의 형태감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필치가 안정되고 다양한 색감에 의한 충실한 풍속 묘사 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장경
이조년
이승경
이포
이원구
이직
이제
이사후
이욱
이숭인
이인임
이만년
이인민
이광적
성주이씨 영정 경상북도 유형문화재245호
소 재 지;
경북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19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성주 이씨(星州李氏)의 선조로서 국가에 공헌하였던 열 분의 초상화 13폭이다. 모두 원본을 옮겨 그린 것으로 국가에 공을 세운 공신의 모습이며,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좌상이다. 원래 스물두 분의 초상화가 보존되고 있었으나, 조선 선조 14년(1581) 지금의 벽진면 자산리에 영당·영정을 보관하기 위한 집을 세워 한 곳에 모아 오던 중 임진왜란 때 그 일부를 도둑맞았다. 이 영정(影幀)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초까지 성주이씨의 선조로서 국가에 공헌한 10현(賢)의 영전 13폭이나, 전부 개모(改摹) 또는 중모(重摹)된 공신도상(功臣圖像)으로 당초 제작연대는 미상이다. 이 영정은 원래 22위의 영정이 그의 직계들에 의해 각기 보존되어 오던 것을 선조 14년(1581) 지금의 벽진면 자산리에 재사(齋舍)와 영당(影堂)을 건립하여 한곳에 봉안하여 오던 중 임진왜란을 당하여 일부가 도난된 후 인조 10년(1680) 안산서원(安山書院)으로 사액(賜額)되어 유림에 의해 봉사(奉祀)되어 왔다. 그 후 도난 및 화재의 위험으로 다시 개모하여 안산영당(安山影堂)에 봉안하고, 본 영정은 현장소로 옮겨 봉안(奉安)에 보관하고 있다. 이 영정(影幀)은 이장경(李長庚), 이조년(李兆年), 이승경(李承慶), 이포(李褒), 이원구(李元具), 이제(李濟), 이사후(李師厚), 이욱(李彧), 이숭인(李崇仁), 이인임(李仁任), 이만년(李萬年), 이인민(李仁敏), 이광적(李光迪) 선생의 것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하나 제작연대가 분명하지 않다. 각 영정의 면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이장경(李長庚) 영정:세로 136㎝, 가로 85㎝. 위가 낮은 평정건(平頂巾:각 司의 서리가 쓰던 건)을 쓴 관복상으로서 무릎을 꿇고 탑상(榻床) 위에 앉은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전신상이다. 공수(拱手:두 손을 마주 잡음)자세를 취한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부자연스럽게 드러나 있는데, 얼굴 부분의 가채(加彩)가 심하며 화면이 많이 박락(剝落:쇠·돌 같은 물건이 오래 묵어 긁히고 깍이어서 떨어짐)되어 있다. 성산사(星山祠)에 보존된 초상과 같은 상용형식(像容形式)으로 이루어져 있다.
② 이조년(李兆年) 영정:세로 151, 가로 88㎝. 홍포직령(紅袍直領)을 입고 붉은 세조대(細條帶)를 두르고 교의(交椅:의자)에 앉은 정면상에 가까운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서 오른손은 무릎에 왼손은 교의(交椅) 팔걸이에 기대고 있으며 양손이 표현되어 있다. 교의(交椅)에 깔린 호피와 바닥의 채전(彩氈)은 개모시에 삽입된 것으로 보이며, 성산사에 봉안된 초상의 이모본으로 생각된다.
③④ 이승경(李承慶) 영정:세로 172㎝. 가로 88㎝. 세로 136㎝, 가로 80㎝. 금관조복을 하고 양손을 가슴에 모아 홀을 잡고 있는 전신입상으로서, 두 점이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이 모본에는 바닥에 화문석이 삽입되어 있고, 옷자락 선의 곡선 처리 등 자연스러운 표현이 첨가되었다.
⑤ 이포(李褒) 영정:세로 139㎝, 가로 80㎝. 공민왕 때의 인물로서 이조년의 아들이다. 양손으로 염주를 들고 있는 우안팔분면(右顔八分面)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서 교의(交椅)의 호피(虎皮:털이 붙은 범의 가죽)와 바닥의 채전(彩氈)은 후대의 삽입으로 보인다. 성산사본과 같은 형식을 취한 이모본으로 보이나 손에 든 염주, 바닥의 화문석, 족좌대의 표현, 관복 띠의 유무 등 몇 가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⑥ 이원구(李元具) 영정:세로 142㎝, 가로 80㎝. 좌안팔분면(左顔八分面)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서 오른손은 염주를 쥐고 있고, 왼손은 교의(交椅)의 손잡이를 쥐고 있다.
⑦ 이직(李稷) 영정:세로 153.5㎝, 가로 89.5㎝. 공수자세를 취한 우안팔분면(右顔八分面)의 전신교의좌상으로서 연말선초 공신도상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⑧⑨ 이제(李濟) 영정:세로 144.5㎝, 가로 86㎝. 세로 136㎝, 가로 81㎝. 등받이가 없는 길다란 의자에 앉은 의좌상으로서 2점이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⑩⑪ 이사후(李師厚) 영정:세로 159㎝, 세로 87.5㎝. 세로 133㎝, 가로 81㎝. 오사모(烏絲帽)를 쓰고 교의에 앉은 우안구분면(右顔九分面)의 전신교의좌상으로서, 중모본에는 모란꽃 문양의 흉배와 바닥의 화문석이 삽입되어 있다.
⑫ 이욱(李稶) 영정:세로 121㎝, 가로 78㎝. 오사모(烏絲帽)를 쓰고 교의에 앉은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전신교의좌상이나 무릎의 아래 중간 부분 이하는 잘려진 채 표구되어 있다.
⑬ 이숭인(李崇仁) 영정:세로 131㎝, 가로 73㎝. 양손을 드러내고 있는 전신교의좌상으로서 전체 영정 중 채색이 가장 선명하고 진하다. 상용형식이나 화면 좌우에 자찬기(自讚記:제가 한 일을 제가 칭찬하여 쓴 기록)와 화기(畵記)가 묵서로 씌어 있는 점 등 성산사본과 같은 형식이나 인물은 전체적으로 옆으로 퍼져 넓적하게 표현되었고 바닥의 화문석 문양도 간결화되었다.
종 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45호
명 칭
영광 불갑사 장영가진각선사증도가 (靈光佛甲寺藏永嘉眞覺禪師證道歌)
분 류
기록유산 / 전적류/ 목판본/ 사찰본
수량/면적
1책
지 정 일
2001.06.05~2006.04.28
소 재 지
전남 영광군 불갑면 불갑사로 450 (모악리)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불갑사
관 리 자
불갑사
설명
중국 당(唐)나라의 승려 현각(玄覺, 647∼713)이 지은 증도가(證道歌)는 선종(禪宗) 사상을 칠언시(七言詩)로 지은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선 수행의 지침서이다. 고려시대에는 1089년(선종 6)에 보제사(普濟寺)의 요오(了悟)가 사문(沙門) 소충(紹忠)과 선경(善慶) 등과 함께 발원하여 문종비(文宗妃), 숭화궁주(崇化宮主) 김씨 등의 시주로 간행되었다. 영광군 불갑면(佛甲面) 모악리(母岳里)에 있는 불갑사(佛甲寺)는 백제 때 세워진 사찰로 전해진다. 이 불갑사(佛甲寺)에서 발견된 복장본은 간기면이 없으나 조선시대인 1424년(세종 6)에 전라북도고창군문수사(文殊寺)에서 개판된 판본과 동일한 판본이다
◆ 보물 제1470호로 승격지정됨에 따라 지정해제됨.
영광 불갑사 장영가진각선사증도가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45호
명 칭
임계기사(壬癸記事)
분 류
기록유산 /
수량/면적
1책
지정(등록)일
2017.03.31
소 재 지
전북 정읍시 내장산로 370-12 정읍시립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정읍시립박물관
관리자(관리단체)
정읍시립박물관
설명
임계기사(壬癸記事)는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錄)이 전주사고의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겨 수직한 내용을 필사한 책으로, 1592년 6월 22일부터 내장산(內藏山) 용굴암(龍窟庵)과 은봉암(隱峯庵)으로 옮긴 사실과 7월14일에 비래암(飛來庵)으로 다시 옮기는 과정 등 조선왕조실록 보존과정을 상세하게 담고 있다. 세계기록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고문서로서 역사적․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