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1762년, 젊어서 참선 · 간경해도 늙어서는 염불, 용담 대선사
영조 38년(1762)
「지리산 천은사 용담 대선사 행장(智異山泉隱寺龍潭大禪師行狀)」,
『조선불교통사』
『용담집(龍潭集)』, 불교 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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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조관대사 행장(龍潭慥冠大師行狀)」, 불교사(佛敎社)
『불교(佛敎)』 제43호, 1927년.
문인 혜암 윤장이 짓다(門人 惠菴玧藏 撰)
화상의 법명은 조관慥冠, 자는 무회無懷, 용담은 그의 호이다. 속성은 김씨로 남원 사람이다. 어머니는 서씨인데 꿈에 한 마리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임신하였다. 강희 경진년(1700) 4월 8일에 태어났다. 생김새가 신령하게 빼어났고 기세가 높고 재빨랐다.
9세에 배우기 시작하여 눈으로 한 번 보면 모두 외우고, 15세 이전에 유학의 학업을 모두 마쳤다. 이 무렵 시문을 짓고 노는 곳에 들어가 날마다 일과로 삼으니 마을에서는 신동이라 불렀다.
16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며 삼년상을 마친 뒤 세상이 덧없음을 보고 출가를 깊이 생각하였다.
19세에 출가하고자 어머님께 청하자, 모친은 말릴 수 없음을 알고 허락하였다. 마침내 감로사(현재 구례 천은사) 상흡尙洽 장로에게 나아가 머리 깎고 대허당大虛堂 취간就侃 대덕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고향 유생들이 이 말을 듣고 한숨 쉬며 이르기를, “호랑이가 빈 숲속에 들어갔으니 앞으로 큰 울부짖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22세에 화엄사로 가서 처음으로 상월霜月(1687~1767) 대사를 뵈었다. 대사는 한눈에 그릇이 깊음을 알았다. 수년 동안 그 문하에 있다가 영호남의 20개 절을 두루 돌아다녔다. 참례한 유명한 스님으로는 영해影海 · 낙암洛菴 · 설봉雪峯 · 남악南岳 · 회암晦庵 · 호암虎巖 같은 여러 큰 화상이다. 선과 교는 신묘에 이르지 못함이 없어 이르는 곳마다 의심을 제거하니 이름을 크게 드러났다. 이를 가리켜 “사향노루가 봄날 산을 지나가면 향내를 덮기 어렵다”라고 하는 것이다. (대사는) 행각을 모두 마치고 오로지 (회광) 반조返照를 자신의 업으로 삼고, 붓과 벼루를 돌 위에 깨서 없애 버렸다.
견성암見性庵에서 『대승기신론』을 읽던 어느 날 밤 홀연히 모든 붇다의 가르침이 오로지 이것 하나에 있음을 깨닫고 신령한 마음이 훤히 열렸다. 날이 밝자 여러 경전을 손 가는 대로 잡고 사려보니 과연 말들이 모두 한밤중에 깨달은 바와 같았다. 3일이 지나 꿈속에 신동이 나타나 책 1상자와 종이 10장을 높이 들어 화상에게 주었다. 종이에는 ’진곡震谷‘이라 쓰였는데, 그것은 그가 동방에서 크게 떨칠 것을 징험하는 뜻이다. 화상이 스스로 깨달은 후 더욱 (지혜가) 밝고 환해져 이에 휘장을 걷어 올리고 배우러 오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작은 것을 얻는 데 만족하지 않고 더욱 앞으로 나아갈 것을 구하였다.
호남에 명진당 수일守一 대가사 있었는데, 곧 월저의 첫째 제자로 종안宗眼이 명백하고 사고가 높고 빼어나 말에는 울림이 있었고, 글에 날카로움을 간직한 분이었다. 스님은 그 말을 듣고서 빨리 가 뵙고 싶었는데 명진 (대사) 역시 스님의 기풍을 듣고는 먼저 대사를 찾아왔다. (명진) 대사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마침 저의 숙원이었습니다” 하고는 이렇게 물었다.
“연화장은 모든 곳에 두루 있었는데, 천당과 지옥은 어디 있습니까?”
노스님이 대답했다.
“회주 소가 풀을 먹었는데, 익주 말이 배가 터졌구나”
또 물었다.
“이렇게 격식을 넘어 서로 만났지만 단박에 진실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마디 바꾸어 주시길 구합니다.”
“천하 사람들이 의원을 찾아 돼지 왼쪽 허벅지에 뜸을 뜨네.”
(용담) 스님은 여기서 그 깊은 뜻을 알아차리고 가슴속에 승복하였으니, 가히 신비한 의기가 서로 맞아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33세에 곧바로 영원암으로 들어가 “원공(혜원)이 10년간 그림자도 산을 나서지 않겠다’라고 한 서원을 (스스로) 깊이 다짐하였다. 암자 동쪽 귀퉁이에 몸소 흙으로 움집을 만들고, 또 암자의 서쪽 기슭에 하나를 더 세워 가은암佳隱庵이라 하고 마칠 때까지 안식처로 삼았으며, 더욱 스스로 욕망을 눌러 이기는(克己) 공부에 힘썼다.
아! 검이 신령하면 빛을 내고, 과일이 익으면 향내가 날리듯 덕 있는 중과 고결한 선비들이 사방에서 다투어 찾아오니, 가히 해동의 절상회折床會라 할 만하였다. 그러나 대사는 늘 스스로 낮추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으므로 한결같이 거절하였다. 그 앞 5리가 안개 깔린 시장과 같이 붐볐으므로 끝내 해산하기 어려웠다. 무리가 어지럽게 섞여 있어도 스스로 깨달음의 문에 올랐으니 가히 업음(無)에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스님은) 사람들이 이끄는 대로 좇다가 마침내 본래의 다짐을 이루지 못하고, 회문산廻門山 심원사深源寺, 동락산 도림사, 지리산의 여러 암자를 두루 돌아다니며 교화하는 저잣거리를 널리 열었다. 『염송拈頌』을 가르쳐 고승(龍象)을 울타리에 가두고, 원돈圓頓법으로 총림을 확 뒤집어 놓은 것이 20년이 넘었다.
강단에 나아가 설법을 하면 소리가 웅장하게 파도치듯 하였고, 강설은 급히 흐르는 물처럼 거침없었으며 말씀 한마디 글귀 한 구절에 사람들에게 (수행의) 입지立地로 이끌게 하였다. (대사를) 뵌 자와 (대사의 말을) 들은 자는 마치 뼈가 바뀌고 내장을 씻은 듯하였다. 또한 경론 중에 다만 요점과 근본만을 밝혔고, 경전을 꾸미지 않았으며, 늘 방편만 숭상하는 것이야말로 쓸데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꾸짖었다.
기사년(1749) 겨울, 상월 화상으로부터 발우와 가사를 전해 받았고, 이를 앞뒤로 해서 5년간 옆에서 모셔 깨달은 바가 더욱 많았다.
신미년(1751) 봄, 대중에게 “52살이 되기까지 글자 공부만 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라고 말하고, 마침내 게로 율시 한 수를 지었다.
强吐深懷報衆知
깊이 품은 업보 억지로 토해 대중에게 알리노니
講壇虛弄說玄奇
강단에서 거짓으로 놀리고 현묘하다 기이하다 설하였네
看經縱許年靑日
경전을 보는 것도 젊은 날에는 허락되겠지만
念佛偏宜髮白時
머리 희면 도리어 염불이 마땅하네.
生死若非憑聖力
생사를 성인의 힘에 기대지 아니하고
昇沉無計任渠持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버틸 수가 없지.
況復世間頗閙閙
하물며 또 세간이 자못 시끄러우니,
白雲幽谷有歸思
흰 구름 깊은 골짜기로 돌아갈 생각이네.
이런 계를 대중들에게 보이며 강의를 그만두었다.
무인년(1758) 여름, 문도들이 다시 강의 듣기를 청하였으므로, 다시 대암(臺菴)에서 설법 도량을 열었다가 이듬해 겨울 다시 거두면서 율시 한 수를 지었다.
閱經何歲月 경전 본 세월 그 얼마던가.
空費髮邊春 귀밑머리 청춘만 헛되이 보냈네.
托病知人險 사람들 험한 것 알기에 병을 내세우고
藏縱厭世紛 세상 떠들썩한 것 싫어 자취 감춘다.
谷風時至友 골바람은 때맞춰 찾아온 벗
松月自來賓 소나무 달님은 저절로 오는 손님.
定中知己在 선정 속에 마음 알아주는 벗 있으니
於道喜相親 도에서 서로 사귐을 기뻐하노라.
대컨 앞뒤로 대중을 물리고 선정과 자혜를 고루 익힌 것이 자못 옛날 사람과 같았다.
스님의 외모는 크고 뛰어났으며, 성품과 도량이 바다처럼 넓었다. 일을 처리하는 데는 부드러웠고, 대중을 대하는 데는 너그러웠으며 거리낌이 없었다. (학인을 다룰 때) 쥐었다 폈다 하는 기틀의 변화는 누가 능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문하에 노니는 제자들이 있어도 그 담장 안을 엿보지 못했고, 무릇 승속 간에 찾아오는 이들은 물러 나오면서 감탄하며 “소문으로 듣는 것보다 직접 뵈니 곱절로 낫다”라고 하였다.
건륭 임오년(1762) 6월 27일 입적하니, 세수는 63세요 법랍은 44년이었다. 임종 때 시자에게 명하여 한 구절의 게송을 받아 쓰게 하였다.
先登九品蓮臺上 9품 연꽃 자리에 먼저 올라
仰對彌陀舊主人 아미따불 옛 주인 우러러 뵈리라.
그리고 손수 마지막 부탁 글을 썼다.
“사람의 삶이 일어나고 사라짐은 긴 허공에서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아 본디 실체가 없는 것이니, 어찌 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라 여겨 자신도 힘들고 남도 힘들게 하는 지경에 이르면 되겠는가? 길동무들에게 바라노니, 늙은 중과 이별하는 날 곧바로 다비하고 망령되이 부음을 전하여 번거롭게 사람들이 오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비록 제자라고 이야기하는 자들이지만 너희가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전하여 가르치겠는가?
재齋라는 것은 동방의 법식이므로 법식을 따르지 않으면 시빗거리가 된다. 그러니 나눈 재(分齋)는 놀랄 만큼 힘써 지내라. 길동무에게 바라노니, 초사흘을 시작으로 해서 쌀 몇 말로 10일간 이어서 미타불공彌陀佛供을 행하라. 그래야 나눈 재(分齋)를 너무 아껴 지내는 폐단이 없게 될 것이다. 천번 만번 엎드려 바라노니, 이 가운데 만일 눈을 흘기며 어기고 거역하는 자가 있다면 곧 나의 문도가 아니니 세세생생 어찌 대할 인연이 있겠는가? 옛 조사들 가운데서도 강물에 몸을 던지고 개미 밥이 되었던 보기들이 많았다. 각자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라 여기지 말고 오로지 염불에 전념하여(專行念佛) 기댈 곳 없는 나를 구제하라.”
문인들은 마지막 가르침을 한결같이 받들었다.
다비하는 날 밤 신비한 빛이 내원암 하늘에 두루 뻗치니 밖에 있던 사람들이 먼저 보았다. 문인들이 5재齋 지내는 날 저녁에 5과의 사리를 거두었으니 꿈에서 감응한 것이다. 나누어서 세 곳, 곧 머리를 깎은 곳인 감로사甘露寺, 오랫동안 노닐던 파근사 波根寺, 입적한 실상사實相寺에 탑을 세우고 나누어 모셨다.
또 스님께서 읊으신 가송歌頌이 몇 편 있었는데, 일찍이 흩어져 잃어버리고 지금은 겨우 1백 수 남짓 얻어 펴냈다. 그러나 문장은 도인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 무릇 청하는 이가 있으면 유의하지 않고 붓 가는 대로 휘갈겼는데, 형산 사람이 옥으로 까치를 쫓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간혹 음률이 맞지 않은 것도 있었다.
도탑고 가득한 집에서 노닐어 문득 가히 엿볼 수가 없으며, 법의 바다에 잠겼다가 솟아오르는 것과 같으니, 몸을 굽혀 잘 살펴보아도 가히 헤아릴 수 없도다. 사실 보잘것없는 글재주로 쓸 수 있는 바가 아니지만, 영원토록 정하기 위하여 간략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할 뿐이다.
무자년(1768) 8월 ○일에 문인 혜암 윤장惠菴玧藏이 삼가 쓰다.
卍 보정의 긴 꼬리말 · 화두 놓고 염불하세 (3)
지금까지 대부분의 비문이나 무덤돌 글은 불자들이 쓰지 않고 이상할 정도로 유학자들에게 부탁해서 쓴 글들이었다. 그러므로 극락 간 사람들의 평소 불교 수행이나 생사의 마지막 순간 일어난 현상에 대해서는 빼먹고나 자세하지 않고 속세의 벼슬이나 본디 모습을 과장하여 묘사하는 현란한 수사들만 가득 차 있어 옥석을 가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러나 이 행장은 대사와 함께 수행한 법제자 혜암 윤장惠菴玧藏이 직접 쓴 비문으로, 아주 이례적인 행장이므로 내용이 사실적이고 알차서 옮기고 읽는 동안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본문에서 보았듯이 용담 스님(1700~1762)은 청허 휴정 → 편양 언기의 법맥을 잇는 고승으로, 상월을 포함해서 세 분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제자인 혜암 윤장에게 법을 전했다. 선승이자 대백강으로 지리산 영원함, 벽송사, 대암암, 화엄사 등에서 강학을 펼쳤다.
이처럼 20년 넘게 『염송拈頌』을 가르쳐 고승(龍象)을 울타리에 가두고, 원돈圓頓법으로 총림을 확 뒤집어 놓았던 용담 스님은 이미 “33세에 영원암으로 들어가 ‘원공(혜원)이 10년간 그림자도 산을 나서지 않겠다’라고 한 서원을 (스스로) 깊이 다짐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는 이때 이미 선교와 함께 염불 수행을 함께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하고, 이런 결심은 당대 최고의 선객이라고 보았던 명진 스님 영향이 컸으리라고 본다. 실제 이런 당시의 수행법은 서산대사의 삼문 일치 사상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데서 그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리고 20년 뒤 명진 스님이 극락으로 가시고, 27년 뒤 스승인 설송당 스님이 염불하며 세상을 뜬 것을 본 용담 스님은 유명세에 밀려 세월을 보내다가 52세가 되는 해에 발표한 게송에는 수행법에 큰 변화가 생겼다. 19세에 출가하여 33년 만에 새로운 출가를 결심한 것이다.
깊이 품은 업보 억지로 토해 대중에게 알리노니
강단에서 거짓으로 놀리고 현묘하다 기이하다 설하였네
경전을 보는 것도 젊은 날에는 허락되겠지만
머리 희면 도리어 염불이 마땅하네.
선과 교에서 신묘에 이를 정도로 못함이 없었고, 강설하면 찾아오는 무리가 많아 선상禪床이 부러질 정도라고 한 고승 대덕이 지난날 강설이 모두 거짓으로 놀린 것이라 고백하고 염불할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쉬운 결정이 아니고, 결정했다고 해도 공개적으로 천명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앞에서 백암당 성총(栢庵 性聰, 1631~1700)에 이어서 조선조에서 두 번째 보는 큰 사건이다.
그리고 완전히 깨우치지 못한 현실을 설명하고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길을 분명하게 밝힌다.
생사를 성인의 힘에 기대지 아니하고
변화무쌍 세상에 대책 없이 놔두면 어찌 되겠는가.
하물며 또 세간은 자못 시끄러우니,
흰 연꽃 깊은 골짜기로 돌아갈 생각이노라.
이는 이론이 아니라 본인이 실제 일생 치열하게 붙들고 늘어졌던 선 수행에서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지 못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대안을 솔직하게 내놓은 것이다. 그리고 대사 스스로 실제로 아미따불 염불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마지막 게송이 있다.
9품 연꽃 자리에 먼저 올라
아미따불 옛 주인 우러러 마주하리라.
그리고 그에 대한 열매(證)가 행장에 잘 기록되어 있다.
다비하는 날 밤 신비한 빛이 내원암 하늘에 두루 뻗치니 밖에 있던 사람들이 먼저 보았다. 문인들이 5재齋 지내는 날 저녁에 5과의 사리를 거두었으니 꿈에서 감응한 것이다.
이처럼 ‘믿음(信) + 바람(願) + 염불(行) = 극락(證)’ 이라는 과정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극락 간 이야기(往生記)’는 참 보기 힘들다. 이렇게 완전하게 극락 간 이야기를 염불보다는 참선이 더 뛰어나다고 보여 주고 싶은 사람들은 그 장면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구품 연화대 먼저 올라 있을 테니
부디 미타 옛 부처와 마주 보게나.
이것은 항상 참선하라는 말이다. 부지런히 참선해서 뒷날 적멸보궁에서 다시 만나자는 당부 말씀이다.
(「남원 김씨 최고의 인물, 용담선사 조관」 : 『불교 43호』, 1927, 인용)
「촉임종재방도인등유문囑臨終在傍道人等遺文」에서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는 길동무(道友)들에게 두 번 세 번 간곡하게 “초사흘을 시작으로 해서 쌀 몇 말로 10일간 이어서 미타불공彌陀佛供을 행하라” “오로지 염불에 전념하여(專修念佛) 기댈 곳 없는 나를 구제하라” 라고 부탁한 것을 보면, 참선이니 적멸궁이니 하는 해석이 얼마나 잘못 이해했는지 알 수 있다.
이처럼 용담 스님이 법석에 간곡히 읊고, 마지막에 시장에게 글로 남겨 당부하였지만 겉멋에 빠진 불자들은 진심을 흘려보내고 억지로 끌어 붙이면서 마치 스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여 기리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한 고승의 삶과 수행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참선’만 빼어난 수행법이라는 편견 없이 그 고승이 어떻게 수행하고 어떻게 삶을 마무리해 가는지 진실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용담 스님은 그가 지은 시에도 평소 정토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타경』을 써서 가져온 지 상인께 감사하며 드립니다(謝贈知上人書彌陀經來).
幸借吾師手 (행차오사수)
다행히 우리 스님 손 빌려
書來護念經 (서래호념경)
『보살피는 경』을 써서 가져오셨네
誦持應作佛 (송지응작불)
지녀 외우면 마땅히 부처 되니
他日豈忘情 (타일기망정)
훗날 이 정을 어찌 잊으리오!
여기서 『호념경護念經』이란 『작은 아미따경』을 말하는 것으로 경 안에서 붇다가 말하는 경의 이름은 『모든 붇다가 보살피는 경(一切諸佛所護念經)』이다. 그러므로 용담 스님이 이 경을 평소에 많이 염송하였고, 지니고 염송하면 극락 가서 붇다가 된다는 굳은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시다. 그리고 다른 스님이 이 경을 써서 선물한 것을 보면 용담 스님이 정토 수행을 한다는 것이 주변에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여러 제자들에게 길동무라고 하면서 도움 염불(助念)을 부탁한 것도 인상적이다. 그리고 입적한 뒤에도 오로지 미타불공만 하여 염불에 전념해 달라고 신신당부하는 모습에서 첫째, 어떤 경우도 도움 염불이라도 받아 극락 가서 태어나겠다는 강력한 발원을 보여 주고 둘째, 주변 사람들이 이 기회에 염불하여 모두 함께 극락에 가기를 바라는 깊은 뜻이 있다고 하겠다.
용담 스님도 한 생을 걸어 생전에 크게 깨우치려고 피나는 정진을 했지만 결국은 ‘보험’이 필요했고, ‘도로아미따불’을 실행해야 했다. 100만 명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극상근기 사람에나 맞는 수행법이 현실적인 대책이 아님을 깨닫는데 백암당 성총 스님은 50년이 걸렸고, 무용 스님은 34년이 걸렸으며, 용담 스님은 33년이 걸렸다. 용담 스님의 33년 수도가 가져다준 가장 큰 열매는 바로 지속 가능한 수행법을 발견한 것이었다. 극락은 편히 가서 쉬는 곳이 아니다. 싸하세계(娑婆世界)에서 수행하는 과목과 다를 바 없고, 깨달음을 얻겠다는 궁극적인 목표도 같다. 다만 ‘자못 시끄러운’ 싸하세계에서는 6도 윤회를 멈출 수 없으니 미래가 담보되지 않고, 극락에 가면 6도로 다시 떨어지지 않는 아비니바르따니야(不退轉)가 확보되고 최상의 조건에서 끝내 깨달음을 얻게 되니, 극상근기에 들지 못한 범부에게 이보다 더한 목표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즐거움만 있는 곳(極樂)이라 했고, 아무런 위험 없이 편안히 수행할 수 있는(安養) 이라 한 것이다.
이런 참된 길을 보여 주신 성총 스님과 용담 스님의 뜻을 저버리고 50년간 헤맨 가시밭길을 기리며 다른 길로 가는 후학들은 마치 붇다가 6년 고행을 마치고 그 길을 가지 말라고 가운뎃 길을 가르쳤는데, 일생을 고행만 따르고, 보지 말라는 ‘고행상苦行像’에 열심히 예불하는 안타까운 모습이나 마찬가지다.
현대판 성총 · 용담도 있다. 1994년 6월 1일, 불일회보(조계총림 송광사 발행) 특별초대석에 ‘수행승 중의 수행승, 월인月印 스님’ (법랍 54세, 세속 나이 90세, 1999년 입적) 회견기에서 화두를 타파했지만 염불하는 까닭을 설파하고 있고, 최근 함현 스님이 『머리 한 번 만져 보게나』(도솔천, 2022)를 펴내 ‘화두 놓고 염불하세’를 선언했다. 1970년대 출가해 해인사, 송광사, 백양사, 극락선원, 대승사, 동화사 등에서 정진하고, 조계종 종립 선원 문경 봉암사 주지 소임도 맡았던 대표적인 선승의 ‘선언’이다.
▣ 성인의 자취를 찾아 : 용담 스님 출가한 감로사(현 천은사)와 입적한 실상사
비문을 보면 ❶ 머리를 깎은 곳인 감로사甘露寺, ❷ 오랫동안 노닐던 파근사波根寺, ❸ 입적한 실상사實相寺에 탑을 세우고 나누어 모셨다.
❶ 머리를 깎은 곳인 감로사(甘露寺, 현 구례 천은사)
2022년 5월 4일 답사, 극락 갈 준비를 하고 계시는 은산 스님 (『극락 가는 사람들』) 568쪽)의 안내를 받았다.
천은사 안내문을 보면 현재의 모습은 1773년 불타 버린 것을 혜암 선사가 다시 세운 것이다. 혜암은 바로 용담 스님의 행장을 쓴 상수 제자이다.
혜암은 본전을 극락보전으로 해서 아미따 삼존불을 모시고 절 입구 사천왕각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아미따불의 48가지 큰 바람(大願)을 뜻하는 48계
일주문 옆에 있는 부도지에 「용담대화상 사리탑」이라는 비가 있고, 그 뒤에 「용담당龍潭當」이라는 스님의 집 이름(堂號)이 새겨진 쇠 종鐘 꼴의 탑이 있다. 사리를 살았던 집에 모신다는 개념이다.
비 뒷면을 보면 명나라 연호인 “숭정崇禎” 기원 후 임오년 10월“에 세웠다고 했다. 1636년 후금의 태종이 청나라라고 이름을 바꾸고 조선에 쳐들어와 1637년 조선이 항복한 뒤 같은 해 명나라 연호 사용을 폐지했다. 그러나 이 비문에서는 125년 뒤인 1762년까지도 명나라 연호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❷ 오랫동안 노닐던 파근사波根寺
파근사는 현재 없어졌으나 파근사 터로 추정되는 절터가 보존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사리탑 가운데 혜암당惠菴堂이라 쓰인 탑이 있어 파근사로 보고 있다. 혜암은 바로 용담 스님 행장을 쓴 제자로 천은사를 지금의 모습으로 중창한 스님이다. 아마 용담 스님과 마찬가지로 파근사에 오래 머물렀고, 파근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용담 스님의 행장 내용이나 천은사를 극락보전과 48원을 담은 계단으로 꾸민 것을 보면 혜암 스님도 극락에 갔을 것이 틀림없다고 보지만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따로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 다만 천은사를 오늘의 모습으로 중창한 스님의 사리탑이 깨져 뒹구는 모습을 보며 허무를 느낀다.
❸ 입적한 실상사實相寺
실상사 「용담대화상탑」은 극락전 뒤에 있지만, 담으로 막혀 있어 정문으로 나가서 빙 돌아 찬찬히 찾아보아야 이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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