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창작교실 8기-후 9차시 합평작 (10월 14일 용)
글의 표현과 문체
---------------------------
척독尺牘과 소품小品
척독은 서간(書簡)을 뜻한다.
고대 중국에서 길이 1척(약 30cm) 되는 나무의 토막(簡牘, 木簡)을 척독이라 한다.
서사(書寫)용재로 사용하였던 것에서 시작되어 종이의 서간까지도 가리키게 되었다.
소품은 어떤 형식을 갖추지 아니하고 자유로운 필치로
일상생활에서 보고 느낀 것을 간단하게 적은 글이다.
소품의 미학적 가치는 ‘얽매임으로부터의 해방’과 ‘무한의 자유로움’에 있다. 아무런 목적과 이유 없이 그냥 감정이 일어나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생각이 움직이는 대로 붓끝을 따라 써 내려가면 된다. 한 줄만 써도 괜찮고, 열 줄을 써도 좋고, 백 줄을 써도 상관없다. “네 멋대로 쓰면 될 뿐이다.”
글을 쓸 때 경계해야 할 해로운 적은 얽매임과 구속이다. 만약 누군가 그 얽매임과 구속 가운데 가장 큰 해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검열’이다.” 스스로를 얽어매고 구속하는 것보다 더 심한 해악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글을 쓸 때 가장 이로운 벗이 무엇인지는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바로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이다.
참고할 만한 문학정신은 『생활의 발견』의 저자 린위탕(林語堂)이 1930년대 초에 한 말이다.“소품문은 원래 일정한 범위가 없다. 자신의 의론(議論)을 펼쳐도 좋고, 감정(感情)을 풀어도 좋고, 인정(人情)을 묘사해도 좋고, 세태(世態)를 표현해도 좋다. 사소하고 잡다한 것은 물론이고 하늘로부터 땅 끝까지 무엇이든 글로 옮겨 적을 수 있다.
”만약 글이 갖추어야 할 형식과 내용 혹은 분량과 구성에 지나치게 얽매인 나머지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지금 당장 소품문을 써보라. 잡감(雜感)을 써도 소품문이 되고, 편지를 써도 소품문이 되고, 신변잡기를 써도 소품문이 되고, 일기를 써도 소품문이 된다. 심지어 메모와 낙서까지도 소품문이 될 수 있다.
이수광과 이익이 본래 저서의 출간에 뜻을 두지 않고 하루하루 써놓은 글을 훗날 모아 엮은 책이 『지봉유설』과 『성호사설』이고, 이덕무가 일상생활 속의 주관적인 감성과 생각을 마음 내키는 대로 써놓았다가 모아 엮은 것이 이덕무의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였다. 아무런 목적 없이 자연스럽게 자기만의 감성과 생각을 글로 쓰는 것. 이 정신만 잃지 않으면 된다.
습작품 첨삭
1. 선물 / 이태령
1. 아들이 군에 가게 되어 초등학교때 이후로 처음 위문편지를 쓰게 되었다. 나랑 남편은 아들에게 하루에 한 통 이상 애인을 대신해 좋은 글과 그림이 담긴 글을 보냈다. 훈련소 기간동안 힘들더라도 잘 견뎌내고 좀 더 편한 자대배치를 기원하는 마음을 꾹꾹 눌러담아 인터넷편지를 보냈다. 아들은 논산 훈련소를 거쳐 후반기교육도 잘 마치고 조금 수월해 보이는 부대에 안착하게 되었다.
2.아들에게 편지를 적다보니 문득 수십년도 더 된 위문편지 썼던 기억이 났다. 나의 성장기동안 많은 영향을 미쳤던 참 특별하고도 오래된 국군아저씨와의 편지였다.
3.마당 한켠에 놓여진 리어카에 앉아있는 여자 아이가 있었다. 여름날의 땡볕만큼이나 아이의 대낮은 지루하고 길었다. 부모님은 모두 들로 나가셨다. 그 아이는 나무대문을 할 일없이 바라보며 우체부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4.국민학교 2학년 쯤이었을 것이다. 담임선생님께서는 국군장병에게 편지를 쓰도록 하셨고, 나의 첫 위문편지는 해군아저씨에게 가게 되었다. 위문편지를 쓴 친구는 나말고도 더 있었다. 여러학생들이 편지를 단체로 보냈을텐데 답장을 받았다는 다른 이야기는 기억에 없다. 나는 기대도 안한 국군아저씨로부터 답장을 받아 기분이 좋아서 읽고 또 읽었다.
5.내 기억으로 국민학교 2학년 겨울에 처음 쓴 편지는 국민학교 졸업때까지 띄엄띄엄 계속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분은 내게 영아 라고 애칭을 부르며 다정다감한 편지답장을 써주었다. 나는 친구들과 다투고 속상했던 일도 숨김없이 적어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애의 소소한 이야기도 참 성의껏 읽어주고 답장해줬다는 생각이 든다.
6.당시 하사였던 해군아저씨는 군을 제대하면 신학대학을 졸업해서 종교인이 될 꿈을 가지고 있었다. 배를 타고 외국을 다니면서도 노랗고 긴 편지지에 빼곡하게 외국 바다위에서 지내는 소식들과 함께 아름다운 글을 보내주었다. 가끔씩은 외국 야경이 찍힌 엽서도 보내주고 배 위에서 일상도 얘기해주었다.
7.그렇게 제법 오랜 기간 편지는 계속되었다. 고등학생 무렵 그분이 교육전도사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교회로 오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너무나 반가웠지만 선뜻 찾아가지못했다. 어릴 때 친구들과 놀기삼아 다녔던 교회를 그때는 안다니고 있어서인지 걸음이 떨어지지않았다.
8.그분과의 인연은 그러고도 두 번 더 나의 곁을 스쳐갔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교생실습을 갔던 학교에서 우연찮게 그분이 근처 교회에 부담임 목사로 계신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도 많이 반갑고 궁금했지만 찾아가기가 많이 망설여졌다. 그분은 나의 국민학교 어릴때 사진을 보셨지만, 나는 그분의 사진 한장을 받은 게 없어 얼굴도 전혀몰랐다. 단지 편지 속에 쓰여진 글과 시를 읽으며 마음껏 상상하고 언젠가 한번쯤 만나보고싶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근처에 계신 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왠지 직접 만나면 상상속에 모습이 깨질 것 같았다. 세월이 너무 지났기에.
9.그러고 몇 년후 결혼을 했는데, 그분은 또 한번 나의 주변에서 소식을 듣게되었다. 시누님이 다니시는 교회에 부담임목사로 다녀가셨다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10.어린 시절 꼬맹이로만 생각될 나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있고 그분은 멋진 성직자의 모습이 되어계실 것을 상상하니 이번에는 꼭 만나볼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피천득의 수필 인연처럼 만나지 말았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마음속에 남아있는 어린 시절 국군아저씨의 아름다운 추억을 더 오래 행복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11.그분은 나의 성장기에 오랜 시간 보이지 않은 곳에서 하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영향을 주었다. 유년시절을 지루하고 길었던 여름 대낮에도 기다리는 편지가 있어 행복한 시간으로 채울 수 있었다. 꼬박 한 달이 걸려 먼 바다를 건너서 도착한 편지는 나의 성장기를 아름답게 가꿔준 힘이 되었고 기다린 시간에 대한 반감고 소중한 선물이었다.
2. 커피 한 잔에 얽힌 사연 / 임선빈
1. 차가 도착하나 안하나 기다리셨다가 토요일 1시가 다되어 문학관에 도착하면 늘 따뜻한 커피 한잔을 직접 들고 나오시던 관장님 그립습니다.
2. 벌처 4년 전이였나요?. 제가 처음 지인의 안내로 문학관에 등록하러 왔을 때 개인택시를 밖에서 대기하도록 하고 사무실에서 등록하고 있을 때 직원 한 분이 차가 저렇게 오래도록 기다리면 차비가 많이 나오겠는데요. 하며 걱정을 해 주었었지요. 그때 제가 웃으면서 차비는 집에 가서 차 한잔이면 되는데요. 우리 집 아저씨입니다. 하고 대답했었지요. 그 옆에서 말을 듣고 계시던 관장님 먼 길끼지 등록하러 오셨는데 차비는 제가 계산해드려야 겠군요 하시며, 급히 땨뜻한 커피를 들고 나가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3. 관장님과의 이런 인연도 드문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관장님은 성당교리반 담임이셨지요. 연년생인 두 녀석 모두의 인기 있는 임마누엘 담임 선생님 이셨습니다. 또한 제가 존경하는 작은 아버님이 저와 같이 한 사무실에서 근무하시던 분이셨더라구요
4 신문사의 기자로 활동하고 계신 줄 알았는데 어느새 문학관의 초창기 열정적인 관장님으로 벌써 몇 년이 지났나 봐요. 다시 만나 뵈니 반가웠습니다.
5, 처음 등록할 때 택시비 사건이 매주 토요일 택시를 타고 올 때마다 관장님이 따뜻한 커피로 늘 제 차비를 계산해 주시곤 하셨지요. 관장님이 바쁘실 때는 어쩌다 다른 직원분이 차비를 계산해 주시는 날도 있었습니다.
6. 공부는 제가 하는데 이렇게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시고 계시니 아무리 바빠도 결석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필가가 되고, 시인이 되고 할 재능은 없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사람들과 어울리고 강의를 듣는 것만으로도 저는 즐겁고 행복했으니까요.
7. 어느 엄청 바쁘신 토요일인 것 같아요. 창밖을 향해 차를 출발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던 날 수필교수님이 그 장면을 보셨나봐요. 수업시간에 그러시더군요. 관장님은 바쁜 택시를 보고 왜 기다려달라고 하는지 모르겠더라며 너무 친절하신 것 같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관장님과 저와의 사연을 모르시니 당연하신 말씀이시겠지요.
8. 떠나시기 직전 마지막 토요일까지도 떠나시는 것을 제가 모르고 있는 줄 아셨나봐요. 평소 토요일과 마찬가지로 차비를 지불하시던 관장님, 가슴이 찡했습니다.
9. 매일 바쁘게 움직이던 사람이 갑자기 쉬게 되면 우울증이 오기 쉽다며 퇴직한 그 이튿날부터 농장에 출톼근 시켜주는 남편, 둠직하게 옆에서 지켜봐주던 아이들이 있었던 저도 바쁘게 살던 직장에서의 그 생활이 퇴직한 것이 한동안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엄마도 옆에 안계신 관장님은 얼마나 허전하실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짠했던 것입니다.
10. 물론 퇴직하시고 나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신다는 이야기도 풍문에 들었습니다. 시간을 허송하지 않고 늘 맡은일에 열정을 쏟으시던 관장님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문학관 2층에서 내려다보면 소매와 바지를 걷고 낮을 들고. 직접 풀을 베시던 그 모습, 오영수선생님의 추모제 때 김민서 선생님이 대신 낭송하시던 그 감성이 풍부하시던 관장님의 추모사도 잊을 수가 없구요. 관장님이 움직이실 때마다 살아 같이 움직이던 문학관의 모습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살아 숨쉬던 활기찬 공간, 겉모습은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관장님이 떠나시고 난 빈 자리가 저에게 너무 크게 와 닿는군요.
11. 매주 토요일 한결같이 태워주는 택시주인도 관장님을 보고 싶어 해요. 무엇을 하시던 건강관리 잘하시구요. 다시 만나는 날 웃으면서 우리 만나요.
3. 신발 한 켤레와 귤 한 봉지 /조정숙
1.“통장님~ 통장님~” 하고 부른다. ‘이 밤에 누굴까?’ 하고 나갔더니 한 달 사이에 몇 번 만난 동네 할머니다. “추운데 밤에 왠일이세요?” 하고 묻자 새 밀차에서 신발 한 켤레와 귤 한 봉지를 꺼내 주었다. “오늘 동사무소에서 미는 차하고 쌀 한 포대하고 김치 한 통 받았어. 그래서 너무 고마워서~ 이거 받아,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눈대중으로 샀어.”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다.
2. 나는 매주 금요일 오전 집 가까이에 있는 보건소에서 봉사를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운동하는 것을 도와준다. 1층에는 작은 도서방이 있어 책을 빌려주고 글을 모르는 어르신들에게 글도 가르친다.
3. 몇 주 전 보건소를 가는데 어르신 한 분이 낡은 유모차에 몸을 엎드려 천천히 가고 있었다. 걷는 것을 힘들어하고 몸이 많이 불편해 보였다. 나는 병원에 가나 보다 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12시쯤 집에 가려고 보건소를 나서는데 아침에 보았던 할머니가 힘겹게 들어왔다. 깜짝 놀라 따뜻한 물을 한 잔 드리고 여기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더니 독감 예방 주사 맞으러 왔단다.
4. 보건소에서는 날짜를 정해 독감예방접종을 무료로 해준다. 접종 날짜를 놓치면 병원에서 예방 주사를 맞아야 한다. 내가 “10월에 예방접종을 끝냈어요, 지금은 병원에서 맞아야 해요.” 했더니 어르신은 예방접종 용지를 못 받았고 접종 날짜도 몰랐는데 이웃 할머니들이 말을 해서 알았다고 했다.
5. 어디 사냐고 물었더니 내가 사는 동네이고 같은 통이다. 처음 보는 분이다. 언제 이사 왔냐고 물었더니 큰아들 집에 있다 얼마 전에 작은아들한테 와서 산다고 했다. 말도 어눌하고 몸이 불편해서 대중교통 탈 엄두를 못 내고, 택시는 돈이 없어 타지 못하고 차로 10분 거리를 3시간을 걸어서 왔다고 했다.
6. 같이 나와 집까지 모셔 드렸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르신은 중풍이 와서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자식이 2남 1녀인데 큰아들은 둘이 벌어 겨우 먹고 살고 있다고 했다. 작은아들은 장애인이고 50세가 다 되어 가는데 결혼을 못하고 벌이도 없다고 했다. 딸이 주는 용돈과 노령연금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집은 단칸방이고 화장실이 밖에 있어 어르신이 살기에 무척 불편해 보였다. 집주인한테 알아보니 집세도 몇 달이나 못 내고 있었다.
7. 동사무소로 가서 복지 사각지대 어르신이 있다고 신고를 했다. 할머니 거주지가 큰아들 집으로 되어 있어 혜택을 볼 수가 없다고 했다. 어르신한테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작은아들 거주지로 전입하라고 했다.
8. 복지사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그 일이 한 달 정도 걸렸는데 오늘 동사무소에서 밀고 다니는 차와 쌀과 부식을 갖다주었던 것이다.
9. 할머니가 추운 날씨에 불편한 몸으로 시장에 가서 내 신을 고르고 귤을 산다고 돌아다녔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다. 신은 왜 샀냐고 했더니 자기 때문에 많이 왔다 갔다 해서 사 주고 싶었다고 했다. 요즘 세상에 자식도 제 살기 바빠 무관심인데 이렇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10. 그 후, 오며 가며 할머니 집에 들려 보았다. 연필심에 침을 묻혀 가며 성경 필사를 하고 계셨다. 왜 이걸 쓰냐고 물었더니 고해성사 하는 마음으로 쓴다고 했다.
“내가 죄가 많아 저 자식이 올찮다 아이가, 떨리는 손 운동도 하고~” 글이 삐뚤빼뚤 슬퍼 보였다. 나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만약에 하늘에서 하나님이 부르시면 이 성경 다 쓰시기 전에는 못 간다고 하세요.” 하니까 돋보기 너머로 나를 쳐다보며 웃었다.
“응 그렇게 할게, 내가 저 자식을 두고 어찌 눈을 감겠노?” 아들은 엄마가 자기 걱정하는 게 안쓰러워 엄마 아프지 마시라고 한단다. 두 모자의 애틋한 마음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11. 나는 연말에 주는 시장상, 구청장상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어르신이 주신 신발 한 켤레와 귤 한 봉지의 선물을 받았는데 이 감동스런 선물이 어찌 종이 한 장에 비하리요. 귤은 보관이 안돼서 맛있게 먹었지만 신발은 신발장에 넣어 두었다. 영원히 신지 않을 것이다. 두고두고 보면서 행복해 하고 싶다. 어르신의 건강을 빌며.
4.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 / 김령은 2
1. 선물의 뜻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남에게 어떤 물건을 선사함 또는 그 물건’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처럼 나에게도 선물하면 언제나 내가 아닌 ‘남’이라고 하는 대상을 두고 축하하거나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주는 물건이었다. 이러한 선물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을 돌아보게 한 것은 초등학교 딸아이였다.
2. 오랜만에 짬을 내어 두 딸아이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가게 되었다. 어느 관광지나 그렇듯 방문하는 곳마다 각종 기념품과 특산품을 전시하는 코너가 있기 마련. 아이들은 관광지 그 자체보다 오히려 다양한 종류의 물건들로 눈요기를 할 수 있는 곳에서 이것저것 들여다보고 만져보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평소에도 쇼핑하는 것을 좋아하는 둘째는 나처럼 쇼핑에 관심이 없는 첫째와는 달리 눈을 반짝이며 즐거워했다.
3. 아이들을 따라 가게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나도 어느샌가 바구니에 몇 가지 물건들을 주워 담고 있었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이 물건 저 물건을 들었나 놨다 하던 둘째가 옆에 오더니 바구니 안을 들여다보며 대뜸 물었다.
“엄마, 이거 누구꺼야?”
하기는 둘째가 이렇게 물을 만도 한 것이, 그동안 그녀가 봐 온 엄마는 주로 생필품이 아니면 사지를 않는데, 기념품 가게의 물건들을 골똘히 살피며 바구니에 담는 모습은 딸아이에게 낯설었을 터였다.
“응, 선물하려고”
“누구한테?”
“으음, 나중에 선물할 사람 있으면...”
나의 대답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둘째는 되물었다.
“엄마꺼는?”
“응, 엄마는 괜찮아”
“왜 엄마꺼는 안 사? 나는 내꺼 사는데”
이렇게 내뱉은 딸아이는 엄마의 대답이 못내 석연찮은 모습이었지만 이내 자신의 관심을 끄는 물건이 진열된 코너를 향해 총총히 걸어갔다.
4.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둘째는 제일 먼저 자기가 사 온 물건들을 늘어놓고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그런 그녀와 달리 나는 사 온 물건들을 포장째로 서랍장에 넣었다. 언젠가 선물해야 할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포장한 채로 잘 간수해야 했으니까. 서랍장 문을 닫는 순간 기념품 가게에서 ‘엄마꺼는?’이라고 되물은 둘째의 말이 가슴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5. 가라앉아 있던 앙금이 떠오르며 ‘나에게 나는 무엇인가?’라는 그동안 결코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물음을 스스로를 향해 던지게 된 것은 오랜만에 고향 친구, 그녀를 만나서였다. 각자의 일상 챙기기에 바빠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기까지 차일피일 미뤄왔던 안부를 물으며, 마주하고 앉은 그녀의 모습은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생기가 있었다. ‘그녀의 이런 생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녀의 목소리는 귓전으로 흘리듯 내 눈은 그녀의 모습 구석구석을 훑고 있었다. 골똘히 그녀를 응시하던 내 눈에 그녀의 작은 소품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너, 스카프며 파우치가 참 예쁘다, 선물 받은거니?”
뜬금없이 던진 말에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대꾸하기를,
“응, 선물이긴 한데 누구한테 받은게 아니라, 내가 나에게 사준 선물”이라며 크게 웃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덧붙이기를 갱년기와 함께 불혹의 나이를 넘기면서부터는 한 해를 잘 살아낸 자신에게 고마워하며 그런 자신을 위해 선물을 한다는 것이었다. 6. 그녀와는 아이들도 다 컸으니 이젠 좀 더 자주 만나자는 약속을 뒤로하며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한 번도 나를 위한 선물을 해 볼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친구가 대견했다. 그 순간 오래전 제주도 여행에서 ‘엄마꺼는?’이라고 물었던 둘째 딸아이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리는 듯했다. 다른 사람을 위한 축하와 감사의 선물에는 그렇게도 진심이면서 어쩌면 ‘나’ 자신에게는 이렇게나 무관심했을까. 선물을 받아야 할 때 받지 못했다는 서운함에 마음을 내 주기만 했을 뿐이었다.
7. 하지만 앞으로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선물은 기대를 버리기로 했다. 대신에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을 하기로 했다. 나를 먼저 챙기고 소중히 하는 그녀들처럼 순간순간을 잘 살아낸 그리고 살아갈 나 자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서.
5. 코스모스를 보면 이숙희2
1. 험한 산벼랑에 가녀리게 서 있는 코스모스를 보면 돌아가신 어머니인 듯하다. 어머니는 시집올 때 외할아버지가 당부한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벙어리삼년, 귀머거리삼년, 장님삼년을 잘 지켜야 한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그 말씀을 잘 따르셨다. 우리 뒷집에 오촌 고모님이 사셨는데 “아무래도 올케가 벙어린가 보다.” 하셨다고 한다.
2. 나는 늦둥이라 고모님과도 소통이 안 되었고 어머니도 아무 이야기를 안 해 주셔서 잘 몰랐다. 큰 언니는 어르신들과 나이 차가 없어서 그 분들한테 들었다고 한다. 형제들끼리 모이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우리 어머니 같은 사람 없다면서 항상 우리가 이렇게 무탈하게 사는 것도 어머니의 은공으로 돌렸다. 나는 코스모스를 보면 누가 봐 주던 보지 않던 꿋꿋이 서서 자신의 씨를 떨어뜨려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인 듯하다.
3. 친 할머니는 아버지 일곱 살, 큰고모 세 살이던 해 돌아 가셨다. 할아버지는 새 할머니를 맞으셨다. 새 할머니는 고모 세분 삼촌 한 분을 낳으셨다. 막내고모와 큰언니와는 나이가 비슷했다. 할아버지는 엄하신 분이셨다고 했다. 둘째 고모님은 할아버지 빨리 돌아가시라고 뒤 터 배나무 아래서 곡(에고)를 자주 했다고 한다. 조금 개성이 강한 분이셨던 것 같다.
4. 어머니는 살림을 아주 잘 하셨다고 한다. 가을 추수를 하면 쌀을 균형 있게 잘 나누어서 할아버지 밥상에는 일 년 내내 흰 쌀밥을 올렸다고 했다. 둘째 고모님은 흰 쌀밥 안준다고 밥그릇위에 솔잎을 따서 꽂고 밥을 먹지 않았다고 했다. 이 사실도 뒷집 고모님이 수시로 우리 집에 들락 이면서 본 것을 큰언니한테 애기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평생을 입에 나쁜 말을 담지 않는 외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지키신 분 같다.
5. 어머니는 큰언니를 낳고 오·육 개월 지나서 친정에 갔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처음 맞는 손녀라 너무 좋아서 어르고 달래면서 부채질로 땀띠 날까 큰언니를 잘 보살폈다고 한다. 그런데 둘째고모님이 친정에 왔었다. 조카보고 싶다고 인편으로 연락을 받고 어머니는 큰언니를 업고 산을 두 개 넘어서 집으로 왔다고 한다. 어머니는 큰언니를 둘째 고모와 방에 두고 부엌에서 아침밥을 준비하는데 큰언니가 숨넘어가는 소리로 울어서 방에 들어가니 기어 다니던 큰언니는 손을 화롯불에 짚어 기절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둘째고모는 머리를 빗고 있었다고 한다. 큰언니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큰언니는 왼손 중간세손가락이 없다. 평생을 손을 감추면서 살고 있다. 그렇게 큰 사건도 나는 상세한 내용을 잘 몰랐다. 요즈음 형제들끼리 만나면 큰언니와 둘째언니는 밤새도록 도란도란 책을 쓰고 있다. 글을 쓰면서 생각하니 내가 어렸을 때 큰언니의 손을 흉내 내면서 큰언니에게 상처를 주었다. 얼마나 나를 원망하고 미워했을까? 내일 큰언니한테 전화해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야겠다. 지금까지 나의 잘못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나의 어머니는 확실한 벙어리인 것이 맞다. 들녘에 피어 있는 말 없는 코스모스를 모면 어머니가 속울음을 되 삭이고 있는 것 같다.
6. 옛날에는 걸인들도 많았다. 우리 동네 단골 걸인은 귀준 이라고 남의 부엌아궁이에서 밤을 지새워서 얼굴에는 검정이 항상 묻어있고 옷도 검정 옷이었다. 귀준 이가 오면 어머니는 밥을 굶고 어머니 밥을 모두 주었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보따리장사꾼도 아주 많았다. 방물장수, 새우젓장수, 옷장수...등등 매일 우리 집 사랑방은 손님들이 들락날락했다. 어떻게 그 사람들을 재워주고 먹여주고 하였을까? 살림도 넉넉하지 않았는데, 좁쌀 같은 내 마음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 어머니는 아무 감정도 없는 가느다란 코스모스다.
7. 구순을 사시면서 이 십 여년은 도시에 살았다. 도시에서는 그 집이 그 집 같고 노인정에 다니면서 집을 못 찾으면 고마운 택시 기사가 집 앞까지 데려다 준다고 항상 좋은 사람이 많다고 하셨다. 본인의 부끄럼 없는 삶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 같다. 코스모스는 아무리 거친 바람이 불어도 쓰러질 듯 넘어지면서 약한 허리를 다시 곧추 세운다. 어머니도 개미허리로 넘어질 듯 똑 바로 서서 바른 길을 걸어 오셨다. 나는 너무 화려한 꽃보다는 코스모스처럼 자연스럽게 꽃인 듯 잎인 듯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 꽃이 사랑스럽다.
6. 남천 강변을 걸으며 / 정원주
1) 저녁을 먹고 산책길에 나섰다. 내가 걷는 강변길은 봉화산 기슭이 양팔을 쫘악 펼치고 있는 구간에서부터 화장산이 말없이 굽어보고 있는 제1 남천교 아래 징검다리가 놓인 그 부근까지이다. 징검다리가 끝나는 건너편에 친정집이 있다. 50여 년 전에는 높다란 방천 둑길이었다.
2) 유난히 비가 잦은 올해, 불어난 강물 소리 때문이었을까? 남천 강변을 따라 조성된 이 길을 걷노라니,넓적한 반석위로 쏴-쏴 하는 물소리 넘출넘출 거린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물소리 속으로 친정 부모님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먹먹하게 한다. 굽이쳐 흐르는 강물소리가 그리움으로 휘감겨 온다.
3) 열일곱 살의 고집으로 온 집안을 뒤집어 놓았던 부모님과의 갈등!
내 삶의 길을 똑바로 걷게 하려고 무던히도 애간장을 태우셨던 두 분이셨다.
4) 육 남매의 맏이였던 나는 어려운 집안 형편을 생각해서 실업계고등학교를 선택했었다. 졸업하고 빨리 취직을 해서 다섯 명의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겠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5) 그러나 한 학기도 못 채우고 심한 혼란에 빠졌다. 처음에는 주산과 부기 과목에 호기심이 생겨 누구보다도 먼저 도전해서 급수를 땄고,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시골 학교와는 달리 열 반이 넘는 큰 학교에 오면 경쟁할 친구도 많고 새로운 것을 다양하게 배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컸었다. 게다가 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최고로 인기 있는 취업자리가 은행이었다. 내 삶의 목표도 거기에 맞춰져 있었다. 그런데 실업계 수업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참으로 난감했다. 더욱이 여자는 결혼을 하게 되면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평생직장을 가져야만 동생들 뒷바라지도 하고 부모님 용돈도 드릴 수 있을 텐데, 꿈이 휘청거렸다. 진로를 잘못 선택했다는 당혹감을 미룰 수가 없었다.
6) 더 늦기 전에 용기를 내기로 했다. 부모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떨리는 목소리로 고민을 털어놓았다. 두 눈을 꽉 감은 채 말이 없으셨던 아버지.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 삶의 방향을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선택한 길은 책임을 져야 하고 신중하게 검토하라고 타이르셨다.
7) 1학기말 시험을 가까스로 치르고 난 7월 초여름 저녁이었다. 저녁상을 물리기를 기다렸다가 전학 갈 결심을 굽히지 않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노발대발하셨다.
“인문계로 전학 보내 주면 너 또 대학 보내 달라고 고집 피울 거 아니가?”
“너만 공부시키란 말이가? 네 동생들은 다 어쩌란 말이고?”
벼락 치듯이 꾸짖는 고함 소리에 나는 완전 죄인이 되어 고개를 떨구었다.
8) 그만큼 타일렀으면 알아 들어야지. 부모는 안중에도 없고 어째 너 생각만 하노. 어마이가 돼 갖고 딸 교육을 어째 시켰길래 정신상태가 저 모양이냐고, 죄 없는 엄마를 몰아붙였다. 불호령이 엄마에게로 향하는 순간 나는 벌떡 일어섰다. ‘정신상태’라는 말에 정신줄을 놓아 버렸던 모양이었다. 방안에 걸어두었던 교복 윗도리와 치마를 들고 나와서 현관문 밖으로 내팽개쳤다. 책가방에서 쏟아져 나온 주산을 내동댕이쳐 버리고 부기 문제집도 좌악 찢어 버렸다. 울부짖으며 말리는 동생들의 팔을 뿌리치며 집을 나왔다. 강물에 빠져 죽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던 것 같다.
9) 방천 둑길을 따라 정신없이 걸었다. 출렁출렁 흘러가는 강물 위로 휘영청 달이 밝았고 노란 꽃무리가 흐드르지게 피어 있어 더욱 서러웠다.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를 풍기던 그 꽃이름이 달맞이꽃이었음을 그때는 몰랐었다.
10) 부모님은 큰집 문제로 늘 다투셨다. 건넌방 책상에 앉아 눈물 콧물 적시며 엿들었던 싸움 원인은 해결할 방법도 없었고 부모님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다만, 가난한 환경이 지긋지긋했다.
" 하늘아래 한 분뿐이신 내 부모가 굶고 계시는 데 어찌 모른 척하며 살 수 있느냐."
" 한 분뿐인 형님을 어찌 원망할 수 있느냐." 는 게 아버지의 지론이셨다. 내 자식 공부시킬 돈도 모자라 피눈물 나게 하면서 두량없이 큰집을 돌보는 건 그만하라고 어머니는 대드셨다. 그럴 때마다 와장창 밥상이 날아갔다.
11)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신조와 사랑과 헌신으로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알게 되면서 나는 일찌감치 철이 들었다. 아니, 두 분의 삶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부모님 노후에 용돈이라도 챙겨드리려면 경제력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만이 확고했다.
12) ‘아버지 제발 전학을 보내 주셔요. 그게 부모님과 동생들을 위하는 길이거든요!’
정신없이 걸으며 중얼거렸다. 걷고 있는 동안 슬픔도, 격분도 사라지고 마음은 평정의 상태로 돌아왔다.
“어디까지 걸어갔다 왔더노. 밤길에 내사마 걱정이 되어 똑 죽겠더라.”
엄마는 징검다리에서 하염없이 앉아 우시고 계셨던 것일까?
내 손을 덥석 잡고 일어서던 눈가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던 그 밤을 잊을 수가 없다.
13) 아버지와 수시로 언쟁을 벌이면서까지 큰딸의 꿈을 지지해 주었던 엄마. 평소에는 너무나 순종적이던 엄마의 모습 어디에 당찬 용기가 숨어 있었던 것일까!
14) 부모 속을 썩여 본 적이 없던 큰딸의 반항에 아버지는 크게 상심을 하셨다. 학교 안 다니겠다며 드러누운 고집통을 일으켜 세운건 아버지 덕분이었다. 졸업하면 꼭 공무원 시험을 쳐서 취직하겠다는 약속을 다짐하는 걸로 전학 수속을 밟아 주었다.
15) 전학을 갔어도 많은 일들로 흔들렸다. 그러나 고3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와 한 약속은 지키기로 했다. 공무원시험 원서를 구하러 친구들과 군청엘 갔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응시할 자격이 되는 데 나는 안된다는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었다. 집에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었다. 친구들에 비해 출생신고가 2년이나 늦은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큰집 오빠들 출생신고를 다해주며 서열을 맞추느라 그랬다는 것이다. 시골학교에서 서울지역 예비고사에 합격한 큰딸을 대학 안 보낼 수 없다고 나선건 아버지셨다.
16) 강물소리를 따라 천천히 걸어본다. 세찬 물방울의 아우성소리는 속울음을 삼키며 걸어왔던 삶의 물살 같다. 그 물길 거스르며 스스로 헤쳐온 길이었다. 부모님의 속을 태우며 내 길을 걸어가고 싶어 무던히도 고집을 부렸던 삶이었다. 이제 고헌산 중턱 문중산에 잠들어 계신 당신들께서 남천 강변을 굽어보며 '그래 그래 애썼다, 잘했다' 라며 다독거려 주실 것만 같은 산책길이다.
7. 수국꽃 같은 이력 / 이애란
1 정원수로 심어 놓은 수국꽃이 활짝 피었다. 그루마다 꽃 색깔이 흰색, 보라색, 분홍색을 띠었다. 수국이 처음 피기 시작할 때는 흰색이지만, 꽃에 포함된 토양의 산도나 환경에 따라 꽃 색깔이 변한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다. 심지어, 한 그루의 수국에서조차 여러 색깔의 꽃을 피운 것을 보고 있으니, 마치 나의 이력을 보는 것만 같았다.
2 대학에서 문헌정보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에 대학도서관의 사서로 일했다. 맡은 일은 자료목록이었다. 사람마다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듯이, 도서관에 있는 책도 저마다 이력이 있는데 그것이 목록 카드였다. 도서관에 있는 책을 이용자가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서명이나 저자 그리고 서가 상의 위치를 알려주는 청구기호가 적혀 있으므로 기본적인 업무였다.
3 목록카드 생산은 산업발달에 따라 큰 변화를 겪었다. 처음에는 가로방에 손글씨로 적어 등사기로 카드를 만들었고, 타자기가 나오면서 타이핑으로 카드를 출력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보급되자 목록 카드는 기계가독형 목록으로 대체되었다. 검색창에 키워드를 입력하면 찾고자 하는 모든 정보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되면서 목록카드와 이것을 배열했던 목록함이 사라졌다. 업무 속에서 사서의 정체성은 강화되었고 경력이 많이 쌓였다.
4 하지만, 세월에 걸맞는 승진이 되지 않았다. 상위직급으로 승진할 수 있는 자리가 사서직렬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보다 뒤에 입사한 행정직렬의 직원이 승급했다. 도서관의 승급 개정이 어렵다고 전하는 담당자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인사 때마다 고통스러웠고 사서직에 대한 회의가 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사권자로부터 ‘행정직렬로 바꾸어 다른 부서로 가면 어떻겠느냐’며 의사를 물었다. 때마침 도서관의 평생교육 관련 주제로 학위 받은 것을 그가 안 것이 계기가 된 듯했다.
5 얼떨결에 가겠다고 하고 보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도서관 업무와 다른 생소한 업무를 배워 새로 시작해야 하는 부담 때문이었다. 긴 기간 도서관 업무만 해 왔으므로 익숙한 일을 하는 것이 편한 것은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무엇보다 사서직을 그만둔다는 무거운 마음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한 번도 도서관을 떠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의 시선도 신경이 쓰였다. 그나마 대학들이 도서관에서 일 좀 하는 사서를 본부 부서로 빼 간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것을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6 도서관에서 평생교육원으로 전보되었다. 마치 꺾인 수국 가지가 낯선 토양에 심어진 듯했다. 환경과 풍토에 적응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인계받은 업무를 그대로 따라 했다. 서서히 업무가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의 평생교육 기관들이 교양이나 자격증 강좌를 운영하고 있었고 기관마다 복사한 듯 유사했다. 해야 할 일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대학의 강점인 교수나 실습실을 활용한 프로그램이 빈약했다. 무엇보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참여자의 관심을 끌기가 힘들었다. 과감하게 기관마다 하는 교양강좌는 모두 없앴다. 나뭇가지에 새순을 접붙이듯 기존의 자격강좌들도 대학교수와 관련 실습실을 활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변경했다. 대학이 학위를 주는 기관인 만큼 학점은행제, 기업과 연계한 주부대학, 최고경영자와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7 방학에 운영하는 외국대학과 연계한 교생실습 캠프와 외국인이 운영하는 영어광장 같은 프로그램은 참여자와 함께 온 참관인으로 북적였다. 어느새 사서의 정체성은 색연필 덧칠에 가려지는 도화지마냥 새로 입힌 색깔이 자리를 잡았다.
8 그렇지만 꽃의 색깔이 달라졌다 하여 수국의 가지와 잎의 형태가 달라진 것이 아니듯이 사서의 본성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수국이 뿌리를 내린 산도나 환경에 따라 색을 만들듯이 나도 그랬다. 도서관 업무의 성격이 정적인 데 반해, 동적이었고, 이용자가 주로 학생인데 반해, 지역주민이라는 차이가 있는 여건에 맞추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도서관과 달리 평생교육원은 운영 수지에 매우 민감했다. 관․단체 위탁 사업 운영은 재정의 효자 노릇을 했다. 그래서 사업 선정에 영향을 미치는 평생교육사 1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평생교육원에 오기 전에 취득한 학위와 와서 취득한 1급 평생교육사 자격증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데 좋은 자양분이 되었다. 낯설기만 했던 평생교육원의 업무가 도서관 업무보다 편한 생각을 갖게 한 것은 쌓인 시간이 그렇게 만들었다.
9 어느덧 세월에 걸맞은 승진과 함께 학생생활관으로 부서를 옮겼다. 지금껏 남자만 보냈던 자리였다. 수 천여 명이 입주한 학생들의 의식주를 지원하는 부서인 만큼 크고 작은 안전사고와 생활민원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10 생활관 규칙에 따라 출입문은 자정이 되면 자동으로 잠겼다. 늦게 돌아온 학생들이 1층 화장실 창문을 타고 들어오거나 반대로 나가려고 2층 정도의 높이에서 뛰어내리다 다치는 일이 발생하곤 했다. 남학생과 여학생의 생활하는 공간이 한 건물에 있으므로 이성 간에 방 출입도 막아야 했다. 특히, 외부인 남성이 무단으로 여학생의 생활 공간에 침입하여 문을 두드리는 사건은 형사 문제로 이어지는 곳이었다. 이외에도 공동생활에 따른 소음이나 룸메이트 간의 불화에 따른 상담지도는 도서관이나 평생교육원에서 하는 일과는 달랐다.
11 밤새 아픈 학생은 없었는지, 아침은 먹었는지, 우산은 챙겨 등교했는지, 이런 소소한 일에서부터 학생들이 스스로 식당에서 간단한 음식을 만드는 법과 세탁하는 법을 가리키며 독립성을 키우는 일을 도왔다. 학생들은 여기서 체득한 생활 습관이 자연스럽게 사회생활로 이어지므로 공동생활과 관련된 예절이나 인성교육 같은 자체 교육도 등한시할 수 없었다.
12 운이 좋게도 발령 초기, 학교 당국이나 나 자신까지 염려했던 사고와 민원은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 학생생활관은 만실로 학생들이 북적였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진심‘으로 그들을 돌본 것이 보라색 수국의 꽃말처럼 그들에게 ’진심‘이 통하여 화답한 것 같았다.
13 은퇴가 임박한 어느 날, 평생교육원에 근무하는 직원이 찾아왔다. 퇴직 후에 작은 도서관 종사자를 위한 강좌를 개설할 예정인데 꼭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뿌리가 깊은 사서인지라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강좌 개설에 강사 구하는 것도 일인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수락했다.
14 이제, 분홍색 수국의 꽃말마냥 은퇴 후에도 도서관인으로서 ‘새로운 꿈’을 위해 또 다른 환경에 적응할 준비를 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