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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길교회(서울 광진구);서울 개혁교회, 개혁장로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Son jae ik
좋은 설교란
본문이 말하는바에 충실한 설교입니다.
아무리 감동(은혜가 아닌 감동)을 주는 설교라 해도
본문의 원래 의미에서 벗어나면 안됩니다.
구약의 경우 그런 실수를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본문에 충실하되, 설교의 스타일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구속사적 설교,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구약과 신약을 넘나드는 설교 등등.
최근 고통이라는 주제의 연속설교를 하면서
욥기를 다뤘습니다.
욥기의 마지막 부분을 다루면서
다양한 설교 스타일을 담아봤습니다.
제가 평소 추구하던 설교 스타일의 상당히 많은 요소가 담긴 설교입니다.
- 구약은 신약을 통해 해석한다
- 구약은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 모든 복음설교는 성찬과 연결시킬 수 있다. 성찬은 복음의 모든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 비회심자를 복음으로 초청한다.
위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설교를 오랜만에 하게 되었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욥의 인내와 주께서 주신 결말 (약 5:11; 욥 42:7-17)
(↓) 설교본문낭독: 야고보서 5:11; 욥기 42:7-17
(↓) 설교: 욥의 인내와 주께서 주신 결말
서론
성경의 통일성
성경은 66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이 39권, 신약이 27권입니다. 이 66권은 약 35명의 서로 다른 사람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즉 1명이 아닌 여러 사람이 쓴 책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래서 66권이지만 사실상 한 권입니다. 35명의 저자가 기록했지만, 사실상 한 명의 저자입니다. 바로 성령 하나님 한 분이 이 책의 저자이십니다.
성령님께서는 당신의 영감을 통해 이 두꺼운 책의 통일성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기록이 요한계시록에 인용되기도 하며, 시편의 말씀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언급되기도 합니다. 어떤 문장이 그대로 인용되기도 하지만, 문장은 조금 다르지만 전반적인 교훈이 인용되기도 합니다. 반면 먼 훗날 신약에 기록될 이야기가 구약에 미리 암시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춰져 있고, 구약은 신약을 통해 밝히 드러난다”(Novum Testamentum in Vetere latet, Vetus in Novo patet = The Old Testament is patent in the New Testament and The New Testament is latent in the Old Testament)[1] 실제로 우리는 신약에서 구약의 흔적을 발견하고, 구약에서 신약의 가능성을 엿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오늘 읽은 두 본문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가르치는 욥기
오늘 읽은 말씀에서 야고보는 욥기에 대해 말합니다.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욥기와 야고보서는 저자가 다릅니다. 쓰여진 시기도 다릅니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이기에 야고보는 욥기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욥기의 이야기를 해석해 줍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욥기와 관련해서 두 가지를 말합니다. 바로 ‘욥의 인내’와 ‘주께서 주신 결말’입니다. 자세히 보면 두 주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욥’입니다. 하나는 ‘주’입니다. 욥은 인내했고, 하나님은 욥에게 결말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야고보가 말하는 이 두 가지는 정확하게 무엇이며, 왜 이 두 가지를 말하는 것일까요?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I. 욥의 인내
먼저 ‘욥의 인내’에 대해 살펴봅시다.
욥의 고통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 중에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있기에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욥은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아들이 7명이요, 딸이 3명입니다. 양이 7,000마리, 낙타가 3,000마리, 소가 500겨리, 암나귀가 500마리, 종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개역한글) “그는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였습니다”(쉬운성경), “그 사람은 동방인들 가운데 가장 큰 부자였다”(천주교 성경)라고 말씀합니다. 자녀에 있어서, 재산에 있어서, 명예에 있어서 남부러울 것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재산도 잃고, 자녀도 잃습니다. 그와 동시에 명예도 잃었습니다. 유명한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죠.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다.’ 돈과 명예를 잃으므로 많은 것을 잃었던 욥, 결국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종기가 나서 건강까지 잃었으니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종기가 났다고 하니 몸에 뾰두라지 몇 개 났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너무 가려워서 계속 긁어야 했고, 온몸에 피가 났으며, 손독이 올라서 피부가 악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처음 찾아왔을 때, 멀리서 보면 그가 욥인지 누구인지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2:12). 병이라는 게 치료를 하지 못하면 계속 심해지지요. 이후에 욥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 말하는 내용을 보면 그가 얼마나 그 고통이 심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7:4-5에 보면 “(4)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5)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라고 말합니다. 너무 가려우니까 잠을 못 잔 것입니다. 7:14에는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다보니 악몽을 꿨다는 것입니다. 19:20에 보면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 뿐이로구나”라고 말하고, 30:17에서는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라고 말합니다.
몸의 고통만 심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가 당한 고통으로 인해 그의 주변 사람들이 다 떠났습니다. 19:13-14에 보면 “(13)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 (14)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라고 말하며, 19:19에서는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라고 말합니다.
욥의 인내
우리가 글로 읽고, 설교로 들어서 그렇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런 고통을 우리가 당한다고 할 때, 얼마나 참기가 힘들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하지만, 욥은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참고 견뎠습니다. 즉 인내했습니다.
욥의 불평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되물을지 모르겠습니다. “욥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욥이 불평하는 모습이 여러 번 나오는데요.”라고 말입니다. 물론 맞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으로 인해 괴로워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합니다. 3:24-26에 보면 “(24)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25)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26)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라고 말씀합니다. 7:19에도 보면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라고 하나님을 향해 한탄하는 말을 합니다. 얼핏보면 욥은 인내도 하지만, 불평도 많아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욥이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토로(吐露)하지만, 그의 말에는 결코 하나님에 대한 저주가 없습니다.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자신의 상실감을 하나님께 토로했을 뿐입니다.[2]
사실 욥의 한탄과 토로는 결코 이상한게 아닙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시편에 보면 욥과 같은 토로는 많이 나옵니다. 시편 10: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시편 13:1-2 “(1)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시편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편 44:23-24 “(23)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24)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와 같은 구절들을 보면 하나님을 향한 탄식을 하는 성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욥기나 시편을 통해, 우리가 고통과 절망 가운데 있을 때 그것에 대해 충분히 슬퍼할 수 있음을 봅니다. 욥의 깊은 감정 고백을 통해 우리는 삶의 절망감을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3]
욥, 하나님을 갈망함
욥의 말을 보면 간당간당합니다. 한계를 넘는 듯 마는 듯합니다. 욥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저주하지는 않습니다.[4] 그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지키면서 인내합니다. 비록 그의 말 가운데는 하나님의 지혜를 온전히 깨닫지 못해서 잘못 말하는 것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전반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기 16:19에 보면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라고 말합니다. 욥기 23:3에서는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라고 말합니다.
욥은 자신의 문제가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선물에 의해 해결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기에 소망을 두고 있었습니다.[5] 욥은 하나님의 임재를 더이상 느낄 수 없을 때조차도 하나님이 그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며 버리실 수 없으시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을 고수했습니다.[6] 때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괴로움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역경 속에서 인내하며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야고보의 말
그래서 야고보는 말합니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야고보는 성령 하나님의 영감을 따라 욥의 인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욥기 전반에는 그의 인내가 기록되어 있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II. 주께서 주신 결말
다음으로 ‘주께서 주신 결말’에 대해 살펴봅시다.
욥기를 읽을 때의 느낌
제가 지난 5월 둘째 주부터 지금까지 욥기를 본문으로 여러 차례 설교하고 있는데, 아마 이 기회에 욥기를 다시 한번 읽어 보신 분들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욥기를 읽을 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여기 앉아 계신 분들이 다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개인도 언제 읽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아 이런저런 고통을 경험한 게 많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재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은 욥에게 완전 감정 이입되어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사는 동안에 수많은 인생의 역경을 경험하신 분은 예전에 겪었던 수많은 고생과 수고가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 지나갈 것입니다. 지금 현재 즐겁고 기쁜 분에게는 괜히 우울해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좋은 이야기는 별로 없고 고통당하는 이야기, 부정적인 이야기, 욥과 그 친구들의 논쟁 등으로 인해 읽기가 싫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기의 마지막에 와서는 아마 거의 대부분이 동일한 마음이 들 것입니다. “이야~ 그래 이렇게 해피 엔딩(Happy-Ending)으로 끝나니 얼마나 좋아”라고 말입니다.
욥기의 결말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십니다. 그러니 아마 그의 종기도 서서히 나았을 것입니다. 가려움이 사라지고, 상처가 낫고, 피부가 정상으로 되돌아왔을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그의 주변사람들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형제와 자매, 이전에 알던 사람들이 와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욥이 그동안 받았던 재앙으로 인하여 함께 슬퍼해 주고 위로합니다. 19:13-14에 보면 “(13)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 (14)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라고 말하며, 19:19에서는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라고 말했는데, 그때의 상황이 다 극복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이전 소유보다 갑절로 주십니다. 2배로 주시는 것이죠. 그 구체적인 내용이 12절에 소개됩니다. 양이 14,000마리가 됩니다. 낙타 6,000이 됩니다. 소가 1,000겨리가 됩니다. 암나귀 500마리가 됩니다. 이 구절을 1:3과 비교해 보면 정확하게 두 배입니다. 1:3에 보면 양이 7,000마리 낙타가 3,000마리, 소가 500겨리, 암나귀가 500마리라고 말씀합니다. 정확하게 갑절이 되었습니다.
42:13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이것 역시 갑절의 축복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의아하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1:2에 보면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20명을 주셔야 갑절이 되는 것 아닙니까? 언뜻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은 그의 10명의 자녀 역시 욥의 자녀이므로 그는 갑절의 자녀의 축복을 얻은 것입니다.[7] 죽은 자녀 10명과 새로 얻은 자녀 10명을 합쳐서 20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에 보면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17절에 보면 나이가 차서 늙어 죽었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차서 늙어서 죽는 것만큼 좋은 결말이 없지요. 이 모든 내용을 보면 욥의 인내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결말을 맺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때 그 결말을 주신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욥에게 재앙을 내린 것은 사탄이었지만, 그것을 회복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욥이 맨 마지막에 얻은 결말은 이런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에 경험한 수많은 고민의 과정들, 욥이 씨름한 주제들, 그것에 대하여 깨달은 것은 그가 주께로부터 받은 결말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욥은 고난 가운데 여전히 존재하고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였으니 그냥 평범하게 살 때에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부분,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고통 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결말을 주신 시점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그에게 이 일을 허락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42:1-6 위에 보면 여러분들 갖고 계신 성경의 소제목에 ‘욥의 회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42:7에서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셨어도 됩니다. 욥이 회개한 직후에 이전 소유보다 갑절로 주셨어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 주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주십니까? 10절을 보시면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했을 때 그의 운명을 바꾸셨습니다.[8] 10절은 이 사실을 아주 명확한 인과관계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힘들 때 찾아와 온갖 지혜로운 말로 힘들게 했던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욥은 자신에 대해 끝없는 비난을 했던 자들에 대해 복수 대신 기도로 되갚아 주었습니다. 결국 욥은 자신의 형제, 자매, 이전에 알던 이들만 아니라, 세 명의 친구들과의 관계도 회복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욥은 중보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욥은 자기가 고통당할 때에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대리자와 중보자를 찾았습니다. 앞서 보았던 16:19에서 “... 나의 중보자가 높은데 계시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욥, 바로 자기가 그의 친구들과 여호와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중보자가 됩니다.[9] 그런 뒤에 하나님은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로 주셨습니다.
욥의 결말, 한 편으로 완전한 건 아닐 수 있습니다. 욥의 슬픔이 다 제거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욥의 몸에는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자식을 잃은 참척(慘慽)의 고통이 남아 있습니다. 친구들의 말을 통해 받은 마음의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욥의 모든 고통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말
그래서 야고보는 말합니다. “너희가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야고보는 성령 하나님의 영감을 따라 주께서 주신 결말에 대해 말합니다. 욥기에는 욥이 당한 고통만 아니라 주께서 그에게 주신 결말이 기록되어 있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III. 야고보가 욥의 인내와 주께서 주신 결말을 말한 이유
왜 이 두 가지를 말할까?
지금까지 우리는 야고보가 5:11에서 말한 두 가지를 보았습니다. 욥의 인내와 주께서 주신 결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살펴보아야 할까요? 설교를 자세히 들으신 분은 오늘 제가 설교의 서론에서 무엇을 살펴보겠다고 했는지 기억하실 것입니다. 저는 “야고보가 말하는 이 두 가지는 정확하게 무엇이며, 왜 이 두 가지를 말하는 것일까요?”라고 했습니다. 그중에 “야고보가 말하는 이 두 가지”에 대해서는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왜 이 두 가지를 말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야고보서의 주제 - 시련, 참음, 인내
야고보서는 흔히 ‘행함 없는 믿음’을 다룬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작년에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느낀 것처럼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서에는 다양한 주제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주제를 꼽으라면, 오히려 “시련을 당할 때”입니다. “고통을 당할 때”입니다.
야고보는 첫 부분에 해당하는 1: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시험’(πειρασμός)은 ‘시련’이라고 했습니다. 1:2-8까지 시련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1:12-18에도 시련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3-4를 보시면 시련을 이기는 방법으로 ‘인내’를 말합니다. 1:12에서는 “시험(시련)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합니다. ‘참음’을 말합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5:7-11에서 ‘참음’과 ‘인내’를 말합니다.[10] “(7)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Μακροθυμήσατε)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μακροθυμῶν)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너희도 길이 참고(μακροθυμήσατε)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10)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μακροθυμίας)의 본으로 삼으라 (11)보라 인내하는 자(ὑπομείναντας)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ὑπομονὴν)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이렇게 야고보는 시련과 인내를 말합니다. 야고보의 이런 말씀은 로마서 5:3-4에서 말하는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 가운데 야고보는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본 두 가지를 말합니다. 욥의 인내와 주께서 주신 결말입니다.
야고보가 두 가지를 말한 이유
자, 이제 우리는 야고보가 왜 이 두 가지를 말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시련이 찾아올 때, 우리에게 고통이 찾아올 때, 욥처럼 인내라는 것입니다. 욥의 신앙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또한 욥이 인내한 결과 맞이하게 된 주께서 주신 결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결말을 생각하며 소망을 갖고 살라는 것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IV. 예수 그리스도의 인내와 결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신약 읽기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춰져 있고, 구약은 신약을 통해 밝히 드러난다”라고 했다면,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 욥기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시편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시편이 아닙니다. 성경을 분류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분류법은 유대인들의 구약분류법입니다. 시편은 시편, 잠언, 욥기를 포함하는 시가서, 아가, 룻기, 애가, 전도서, 에스더서를 포함하는 5축(五軸, 다섯 개의 두루마리, Five Rolls),[11]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를 포함하는 역사서를 말합니다. 이 13권을 가리켜서 시편이라고 분류합니다.
그렇다면 욥기에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실제로 욥의 인내와 주께서 주신 결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의 인내
욥의 인내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서도 인내하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 참고 참으셨습니다.
욥이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고 호소하였듯이,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는 절규하셨습니다. 마치 욥이 하나님의 부재(不在)하심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번민한 것처럼, 예수님도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는 것 같은 고통을 입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셨던 예수님은 고통 가운데 자신의 극심한 고통을 표현하셨습니다. 앞서 욥이 하나님을 향해 한탄하는 말을 한 것,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씀드렸죠. 그 말을 들으셨을 때 약간은 갸우뚱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만, 예수님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일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욥은 인내 가운데 참았고, 결국 자기를 향해 온갖 지혜로운 말로 힘들게 했던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었죠(42:10).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에 대하여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욥의 인내를 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인내를 봅니다.
욥이 의인이었고, 욥이 끝까지 범죄하지 않았듯, 예수님은 의인이셨고, 끝까지 범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욥이 까닭없이 당한 고통 가운데 인내하였듯, 예수님도 까닭없이 당한 고통 가운데 인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얻으신 결말
마침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결말을 얻으셨으니, 사도행전 2:24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사도행전 2:33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사도행전 2:36은 말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9-11은 말합니다.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무엇보다 우리 예수님은 죽음 가운데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오르셔서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오른쪽에 앉으셨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결말입니다. 욥이 인내하였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결말을 맛보았듯이, 우리 예수님도 인내하셨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결말을 맛보셨습니다.
성찬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 놓인 성찬상을 보십시오. 이 성찬상은 예수님의 인내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결말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인내하면서 자신의 살을 찢으셨고, 자신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고 마실 빵과 잔은 그분의 인내입니다. 예수님은 인내하였기에 하나님으로부터 결말을 맛보았으니, 그 결말은 바로 이 빵과 잔입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먹고 마실 이 빵과 잔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결말입니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라는 야고보의 말은 이 성찬을 통해 “너희가 예수님의 인내를 들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결말을 보거니와”라는 말로 바뀌어 우리의 눈에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그 인내와 결말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먹고 마시기 위해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V. 적용
성찬회원에게
이 성찬상에 나아오실 모든 여러분들이여~ 우리는 이 세상에서 수많은 고통과 환란과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때마다 그리스도의 인내를 보십시오. 까닭없는 고통 가운데 인내하신 그리스도를 닮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결말을 보십시오.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여러분들이 먹고 마시게 될 빵과 잔을 통해 여러분들이 장차 누리게 될 결말, 바로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생각하십시오.
신자의 삶이란, 성도에게 주어진 인생이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 속에서 인내하며, 주께서 가장 자비하신 분임을 믿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실 결말을 바라보며 우리의 지혜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경륜과 신비를 체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비수찬회원에게
아직 성찬상에 나아오지 못하는 분들이여~ 여러분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고통 당하는 인생들을 위해 친히 고통당하셨고, 살 찢으셨고 피 흘리신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주님은 인간을 대신해 인간을 위하여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직접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는 영생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주실 결말을 믿으십시오.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믿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을 믿고 회개하여 성찬상에 속히 나아올 수 있도록 하십시오.
결론
모든 인생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높고 낮은 길이 있는가 하면, 평탄한 길 혹은 비탈길이나 가파른 길이 있습니다. 냇물을 건너기도 하고 때론 대양을 횡단해야 합니다. 서늘한 낮이 있는가 하면 견디기 힘든 더위도 겪습니다. 무서운 밤이 있고 혹독한 겨울도 있습니다. 단맛도 있지만 쓴맛도 많습니다.
그럴 때에 욥의 인내를 생각합시다. 그리스도의 인내를 생각합시다.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결말을 기억합시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4)
[1] Augustinus, Quaestiones in Heptateuchum, 2. 83.
[2] 권지성, 『특강 욥기』(서울: IVP, 2019), 63.
[3] 권지성, 『특강 욥기』, 64.
[4] C. Bijl, Zo Rijk Als Job (Kampen: Van den Berg, 1987), 신득일 역, 『욥기 강해』(부산: 고신대학교 출판부, 1995, 19962), 62, 78.
[5] David Atkinson, The Message of Job: Suffering and Grace, BST (Leicester: IVP, 1991), 김진우 옮김, 『욥기 강해: 고난과 은혜』(서울: IVP, 1999), 117-118.
[6] Atkinson, 『욥기 강해』, 79.
[7] Cornelis Van der Waal, Sola Scriptures, 명종남 옮김, 『반더발 성경연구 2』(서울: 줄과추, 1997), 57.
[8] Bijl, 『욥기 강해』, 143.
[9] 권지성, 『특강 욥기』, 341.
[10] 일반적으로 ‘참으라’(μακροθυμέω)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하여 가져야 하는 오래 견디는 태도를 가리키며(고전 13:4; 엡 4:2; 살전 5:14), ‘인내’(ὑπομονή)는 우리가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필요한 강하고 단호한 용기를 의미한다(롬 8:25; 고후 1:6; 살후 1:4). 다시 말해, 전자는 인간관계 안에서의 인내를 뜻하고 후자는 상황, 환경, 자신이 지금 처해있는 형편을 염두에 두고 인내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어떤 의미상의 차이도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10절에 있는 선지자들의 오래 참음이 11절에 있는 욥의 인내와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Douglas J. Moo, James, TNTC (Nottingham: IVP, 1985), 이승호 옮김, 『야고보서』,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16 (서울: CLC, 2013), 249; Douglas J. Moo, The Letter of James, PNTC (Grand Rapids: Eerdmans, 2010), 강대이 옮김, 『야고보서』(서울: 부흥과개혁사, 2016), 283.
[11] 시편, 욥기, 잠언 외의 5권의 책(아가, 룻기, 애가, 전도서, 에스더)을 Five Festal Garments (오축)라고 한다. 그 이유는 유대인의 5대 절기마다 읽혀진 책이기 때문이다. 아가서는 유월절에, 룻기서는 오순절에, 애가서는 예루살렘 멸망일, 전도서는 장막절에, 에스더서는 부림절에 읽혔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Barry G. Webb, Five Festal Garments: Christian reflections on the Song of Songs, Ruth, Lamentations, Ecclesiastes and Esther, NSBT 10 (Nottingham: IVP,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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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길교회(서울 광진구);서울 개혁교회, 개혁장로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Son jae ik
첫댓글 그렇습니다. 본문이 말하는바에 충실한 설교가 좋은 설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