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인문학기행 답사기
김경식(시인.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총장)
■ 상주의 역사와 답사지의 의미
상주시 지역은 삼한시대에 사벌국(沙伐國)이라는 작은 왕국이 있던 곳이다.
3세기 중엽에는 신라의 세력권에 포함되어 사벌주, 상주(尙州) 등의 지명을 얻었다. 757년(경덕왕16)에 10군(郡), 3현(縣)을 관할하였는데, 오늘날의 광역자치단체 정도의 영역이다. 고려시대에 전국에 8곳의 목을 선정하여 설치할 당시에 상주목으로 승격되었는데, 7개의 속군(屬郡)과 18개의 속현(屬縣)을 거느린 대읍이었다.
941년(고려 태조23년)에 사벌을 상주로 개명하고, 983년(고려 성종2년)에 전국을 목(牧)으로 나눌 때에 상주목(尙州牧)을 설치했다.
상주목 영역은 문경, 용궁, 보은, 함창, 영동, 가은, 선산, 군위 등이며,
목(牧) 책임자는 사법권과 행정권, 병마권을 행사 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했다.
995년(성종14년) 전국을 10도로 나눌 때에 경상도(慶尙道) 명칭이 처음 사용되었다.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지명 앞 자를 따온 합자가 경상도(慶尙道)다.
조선이 건국 될 때에 관찰사영이 경주에서 상주로 옮겨와 경상도의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임진왜란 기간이었던 1596년(선조29년)에 관찰사영이 대구로 옮겨가면서 퇴락하기 시작했다. 1896년에 도제가 실시되면서 경북에 소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주시는 경북의 서북쪽 내륙에 있는 고을로 도시와 농촌이 혼재한 지역이다. 북쪽으로는 소백산맥이 병풍처럼 서 있고, 동쪽으로 구미시와 의성군, 서쪽은 보은군, 옥천군, 괴산군, 남쪽에는 김천시와 영동군, 북쪽으로는 문경시와 예천군에 인접하고 있다. '삼백(三白)의 고장'이라는 별칭이 붙은 상주는 쌀, 곶감, 명주가 유명하다. 특히 곶감은 전국 생산량의 60%이상을 생산하는 상주의 대표적인 농산물이다.
전사벌왕릉(傳沙伐王陵)은 사벌면 화달리에 있는 후사벌국왕이자 상산 박씨의 시조 박언창의 묘소이다.
낙동강은 푸근하고 넉넉한 어머니의 품 같은 민족의 강이다.
평화롭게 흐르는 상주의 낙동강변에 동쪽 절벽이고, 경치가 좋으며, 역사의 숨결이 머문 곳이 경천대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숲길을 지나 강변에 서 있는 경천대는 옛날부터 상주 고을의 명소였다. 임진왜란 때는 육지의 이순신 장군이라고 했던 정기룡(1562~1622) 장군이 훈련을 하던 곳이다. 또한 우담 채득기(1605~1646) 선생이 모든 관직을 버리고 처사로 살았던 곳이다. 채득기 선생은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갈 때 함께 동행 했던 분이다.
조각공원과 최인호 작가의 소설 <상도>를 드라마로 제작할 때, 이곳을 무대로 했던 곳이기에 문학적인 분위기도 느껴볼 수 있다.
남장사는 상주 4장사(尙州 四長寺, 북장사, 갑장사, 승장사 )중의 한 곳이다.830년(흥덕왕 5년) 진감국사가 개창하여 최초로 시무하던 역사 깊은 사찰이다.진감국사는 중국 종남산에서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한 노래 불교음악인 범패를 배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남장사에 보급하였다.
상주의 대표적 서원은 도남서원이다. 포은 정몽주,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선생, 서애 유성룡 등을 선양하는 서원이다. 도남서원은 영남의 명문 서원으로서 수백 년 동안 추로지향의 고을, 상주의 자존심이었다.
■ 남장사
상주시에서 보은 방향으로 4km 지점에 해발 728m의 노악산이 있다.
이 산은 상주의 진산으로 갑장산, 천봉산과 함께 상주 삼악으로 불리며,
역사가 오래된 남장사와 북장사를 담고 있다.
남장사는 832년 진감국사가 창건하여 첫 사찰명은 장백사였다.
진감국사(774년~850년)는 신라의 승려로 전주 출신이다. 시호가 진감(眞鑑)이며, 속성은 최씨이다.
승려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조실부모하고, 당에 유학하여 창주 신감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810년 숭산 소림사에서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인 구족계를 받고, 종남산에서 도를 닦았다. 830년(흥덕왕5)에 신라로 귀국하여 상주 장백사에서 선(禪)을 설법하였는데 신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남장사란 사찰명은 1186년 각원(覺圓)스님이 현재의 터로 이전하고 불렀다. 1203년(신종6년) 법당을 신축하였고, 1473년(성종4) 중건하였지만 임진왜란 당시에 전소 되어 1635년(인조13) 정수(正修)가 법당 등을 중창했다.
현재 남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다.
1621년(광해군13) 명해(明海) 대사가 영산전(靈山殿)을 신축하였고, 1704년(숙종 30) 진영각(眞影閣)이 지어졌다. 1709년 민세(旻世)가 영산전을 중수하였고, 1761년(영조 37) 상로전(上爐殿)을 신축되었다.
1856년(철종7) 진허 스님이 극락전과 조사각을 중건하였으며, 1867년(고종 4) 응월 스님이 영산전을 중수하였다. 1889년 보광전을 건립되었고 1903년 함월(涵月) 스님이 칠성각을 짓고, 1907년 덕암스님이 염불당을 건립한다.
현존하는 절집으로 극락보전, 영산전, 보광전, 금륜전, 향로전, 진영각, 강당, 일주문, 불이문 등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관음선원과 중고암(中高庵)이 자리잡고 있다.
보광전의 목각탱과 관음선원의 목각탱, 철불좌상은 보물이며, 철불좌상인 비로자나불이 땀을 흘리면 전쟁이 터진다고 믿었다.
응향각 안에는 나옹화상과 휴정 선사 유정 선사를 포함하여 12폭의 조사진영(祖師眞影)이 봉안되어 있다. 남장사는 어산(범패) 불교음악의 최초 전래지로 그 의미가 크다.
작가 성석제의 고향은 상주다.
그의 작품에는 고개가 유독 많이 등장한다. 이런 고개 중에 대표적인 고개가 남장사 가는 길에 있다.
평야지대가 평안의 정서를 지니고 있다면, 고개는 고통을 동반하는 의미를 지닌다.
성석제의 소설<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의 작품의 무대는 아버지와 아들이 남장사의 궁중암 가는 고개를 넘으면서 갈등을 해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인공 부자(夫子)가 고개를 넘으며 갈등을 극복하는 소설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에 등장하는 고개가 바로 이 남장사 궁중암 가는 길에 있다.
어린 시절 그가 자주 들었다는 증조할아버지 이야기도 이 고개 길 위에 서려 있다.
“이제 부자는 큰 고개, 작은 고개를 다시 넘어 돌아오고 있을 것이다. 달이 워낙 밝아서 홰도 필요 없고 남포도 쓸 일 없다. 아들은 앞에서 빈 수레를 끌고 아버지는 곰방대를 빨며 뒤를 따른다. (중략) 월색이 명랑하다. 기러기는 떼 지어 구만 리 장천을 날아가고 어디선가 부엉이가 운다. 백리 길을 쌀 두 가마니를 싣고 가서 장 바닥에 앉았다가 점심 때가 되어서야 임자를 만나 쌀을 팔았다. 보리밥에 된장을 얹고 수건으로 싸맨 도시락을 부자가 마주 앉아 먹고 며칠 뒤 문중 시제에 소용될 물품을 사 들고 오는 길이다. (중략)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생각에 잠겨 길을 걷는다. 부엉이가 운다. 운다.”
-성석제의 소설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중에서
■ 경천대 무우정과 채득기
상주의 으뜸 명승지는 경천대다. 낙동강 변에는 경치 좋은 곳이 많지만 경천대는 경관이 아름다운 곳으로 명성이 높다.
이곳에 있는 무우정은 우담 채득기(1605년~1646년) 선생의 삶이 스며 있는 곳이다.
충북 충주에서 출생하였던 그의 본관은 인천(仁川)이며, 문학과 역학, 천문, 지리, 복서, 병서의 전문가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터지고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주의 무지산(無知山)에 입산하여 두문불출하며 독서에 전력했다.
인조가 항복하고, 봉림대군과 소현세자가 심양에 볼모로 잡혀 갈 때에 호송의 책임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신병을 핑계로 사절하다가 보은에서 3년 동안 유배살이를 해야 했다.
그러나 유배를 마치고 심양으로 가서 대군들을 잘 모셨다. 이 무렵에 왕을 보필하는 것에 감사하여 봉산곡(鳳山曲)을 지었다. 효종의 총애를 받고, 고국으로 귀환하여 벼슬을 내렸으나 사절하고 낙동강 변에 있는 옥주봉(玉柱峯)에서 살았다. 천대별곡(天臺別曲) 이라고도 부르는 봉산곡(鳳山曲)은 인조를 찬양하고, 자연에 대한 관찰과 감사의 가사로 101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3.4조와 4.4조로 되어 있다. 특히 병자호란이 작품의 배경이며, 내용과 저자가 확실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노라 옥주봉(玉柱峯)아
이거라 경천대(擎天臺)야
요양(療陽) 만리(萬里)길히
머더야 언마 멀며
북관일주년(北舘一周年)이
오래다 한랴마난
상봉산(爽鳳山) 별건곤(別乾坤)을
처엄의 들어올 제
노련(魯連)의 분을 계워
진세(塵世)을 아조 끈코
발없슨 동솟하나
전나귀에 싫어 내여
-채득기 봉산곡 부분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는 가사작품으로서, 그 내용과 작자가 확실하게 전해오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가사문학의 소중한 자료이다. 마치 김상헌의“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시조를 연상하게 하는 작품이다.
봉산곡의 내용은 7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단은 왕명을 받고 감격하여 심양으로 향하면서 은둔지를 그리워하며 자연의 풍광을 노래하고 귀환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제2단은 청나라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생각으로 가득하여 정치를 떠나 산속으로 은둔하여 안빈낙도(安貧樂道)하려는 결의를 담고 있다.
제3단에서는 은둔지의 자연과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했다. 제4단은 은둔지의 가을과 겨울의 아름다운 자연을 표현했다. 제5단에서는 평화롭게 살고 있는 자신의 삶을 표현하였고, 제6단은 조국과 임금을 향한 사랑과 정을 담고 있다.
제7단은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자연으로 회귀하겠다는 신념을 그리고 있다. 돌아오겠다고 읊었다.
특히 심양에서 봉림대군과는 북벌의 밀약을 하기도 했다.
봉림대군은 우담 채득기를 장자방(張子房)과 제갈양(諸葛亮) 같은 사람'이라고 극찬했으며, 강한 신뢰를 주었다.
그럼에도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상주 낙동강변의 경천대의 무우정에 은거하며, 효종의 부름에도 나가지 않고 처사로 살았다.
무우정은 경천대 아래 있는 기묘한 바위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을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성의 뜻으로 자천대(自天臺)라 하였다. 그러나 우담 채득기가 이곳에 터를 잡고 은거하면서 “하늘을 떠받친다”는 의미로 경천대(擎天臺)가 되었다.
경천대 아래로 낙동강이 휘돌아 흘러간다. 이곳은 우담(雩潭)이라는 작은 호수 같은 소(沼)가 있다. 용이 살고 있는 듯하여 이곳 사람들은 용소라 부르기도 했다. 채득기 선생의 호 우담(雩潭)은 이곳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무우정을 세우고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연호 숭정(崇禎)을 잊지 않는다는 다짐으로 경천대에 암벽사이에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이라는 문구을 비문에 새겼다. 청나라에게 저항하는 항청(抗淸) 운동을 하면서 명나라를 흠모하던 것은 당시 대부분 선비들의 자존심이었다.
채득기는 벼슬을 거부하면서 봉화에 운둔했던 처사 두곡 홍우정(洪宇定1593년~1654년)과 친했다.
홍우정은 시인이기도 하였는데 채득기의 삶의 철학에 관하여
수양산 하늘은 백이숙제를 보호할 수 있었네(首陽能保伯夷天),
율리의 초가집은 도연명의 절개를 지키게 했네(栗里自守元亮廬)
라는 시로 우담을 기렸다.
지천(遲川) 최명길(1586~1647)은 무우정의 기문에 다음과 같이 우담 채득기에 관해 써주었다 “한 가지 재능으로 이름 내기를 부끄러워하였던 분이며, 근본과 실학을 중시했다”
청음(淸陰) 김상헌(1570~1652)과 우담 채득기는 심양에서 친밀한 관계였다.
병자호란 때에 척화파였던 청음이 심양에서 써 보낸 우담신정기문(雩潭新亭記文)에는
“노중련(魯仲連) 같은 높은 절개는 나를 부끄럽 하였네.
금나라에 굴하지 않고 항거한 호담암(胡澹菴) 같은 기상 또한 대단하였네”라고 썼다.
■ 상주의 문학과 정서
상주는 유구한 역사와 인문학적인 토대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지정학적인 위치로 낙동강이 흐르는 고을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다.
상주가 고향인 최종고(1947~ ) 시인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법학자이며 화가, 시인으로 그의 영역은 넓고도 깊다.
서울법대 교수로 2007년 11월에 발간한 <시 쓰는 법학자>의 첫 페이지에 고향 상주 청리에 관한 정서와 서정이 담겨 있다.
靑上 골짜기로부터
나뭇짐 위에 꽂힌
진달래 꽃다발을 따라
水上 냇가 다릿목까지 날아온
노랑나비 한 마리.
여름 밤 총총한 별 헤아리다
잠이 들던 은모래 밭과
비가 오면 냇물이 불어
낙동강에서 거슬러 오르던 잉어 떼.
西山에서 栗里로
해지는 들녘에 황금빛 이삭과
알알이 벌어지는 밤송이랑
마을마다 피어오르던 저녁연기.
대숲에 흰 눈이 내려쌓이면
참새들도 포근히 깃들이고
긴 겨울밤 가마니를 짜며
한 사발씩 퍼다먹던 물김치.
- 최종고 시인의 시 <청리> 전문
낙동강 상류 상주고을 청리면(靑里面)
물윗마을 수상리(水上里)
교회 있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대구 거쳐 서울에서 법을 공부하여
판검사는 두려워 학자 되려고
독일박사에 모교 교수 33년 과분했다
저술도 많이 하고 강연도 하였으나
언제나 마음엔 허전한 갈증
한 줄기 생수 같은 것 그리웠다
정년 후 ‘선인생(先人生) 후문학파(後文學派)’ 되어
시와 그림, 노래로 뮤즈를 따라 살며
파우스트처럼 실수하면서도 구원되고
지바고처럼 혼미 속에서 시를 남기려 한다
남은 길 구도(求道)의 길 아직 먼데
난제오(亂啼烏)-석양에 우짖는 까마귀들
참 자유를 찾는 길 홀로 가리라
머리 아닌 가슴 사랑 나눠주리라
-최종고 시인의 시 자서시(自敍詩) 전문
상주를 적시면서 흐르는 낙동강 주변에 관한 정서를 박찬선 시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미루나무 가지런히 줄지어 선 강가에는
물속에도 나란히 나무들이 선다.
강물은 저녁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하루 일을 마친 농부의 어깨에는
다래끼가 처져 있다.
침묵으로 흐르는 긴긴 평화
부드러운 물의 눈을 외면할 사람
어디 있을까
새들도 푸른 노래 부르며
숲으로 드는 황혼 무렵
사는 허물 못 벗은 채
홀로 강가에 서면
높고 낮은 산처럼 가슴에 솟는
부끄러운 육신의 앙금
강은 스스로 갈 길 열어
먼 여정에 오르고
나무들도 먼 이별의 손짓을 한다.
-박찬선 시인의 낙동강(1) 전문
상주와 낙동강은 연결시킨 서정이 돋보이는 이 시를 읽으면 강변의 아름다움이
눈에 삼삼하다.
공검지(恭儉池)는 제천 의림지(義林池), 밀양 수산제(守山堤), 김제 벽골제(碧骨堤) 등과 함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저수지다. 상주의 공검지는 현재 저수지의 역할을 못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매우 큰 저주지였다.
작가 성석제는 무명시절에 공검지 주변에 있던 전세 집을 쌀 다섯 말에 임대하고, 첫 장편소설 <왕을 찾아서>을 탈고했다. 그의 대표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와 <본래 면목> 등의 이야기도 상주와 공검지가 작품의 무대이다.
장편 2편과 단편 10편 이상은 상주에서 살았던 경험과 인연으로 결실을 보았던 작품들이다. 그가 쓴 소설의 대부분이 상주와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15세까지 이곳에서 살았다는 고향의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경상도 사투리가 진하게 담겨있는 있는 소설 <저기가 도남이다>를 읽다보면, 그의 문학적인 표현력과 상주에 살았던 유년을 상상 할 수 있게 만든다.
“즈가 바로 도남이라. 저재작년에 우얜기 비가 바가지로 퍼붓디 니리더이 집 뒤에서 계곡물이 벌떡 인나선 거 맨구로 쳐들어온께 마구에서 자불고 있던 소가 마카 떠니리 간 기라. 내가 오도바이 주타고 오십 리를 쪼치가이, 도남서 소를 건지내 놨네. 토깨이 맨구로 눈이 똥그라이 생긴 사람이. 고마워여, 여 소가 바로 우리 소라 이칸께 정그가 있니야 카는 기라. 그래미 여분때이에 서가이고 구깅하던 순깅 보고 심판을 지달라카네. 내가 그래 고마 감을 지러미, 아 이 만니리 소가 술 처먹고 지정한다고 강물에 시엄 처러 들어갔다가 떠니리간께 우리에 있던 소가 마카 떠니리간 기다, 그 귀때기를 보라 카이, 순깅이고 토깨이고 입수바리 띨 생각도 못하는 기라. 봐라, 즈가 바로 그 도남이다이.”
- 소설 성석제<저기가 도남이다> 중에서 인용
■상주와 정기룡 장군
우리 국민들 중에서 임진왜란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당시 영웅은 이순신 장군, 권율 장군, 김시민 장군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숨은 명장들은 많다. 그 중에 한 명이 상주 경천대와 인연을 가지고 있는 정기룡(1562~1622) 장군이다.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년) 음력 4월13일에 일본군 20만 명이 부산진을 함락시키면서 시작되었다.
상주와 충주는 임진왜란 초기에 쉽게 무너졌다. 30일 만에 선조는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던 조선군은 의병의 도움으로 왜적을 물리치는 승전보가 울리기 시작한다.
정기룡 장군은 임진왜란 중에 60여회 왜적과 싸워 전승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경남 하동이다. 본관은 진주였지만 훗날 곤양 정씨(昆陽 鄭氏)의 시조로 모셔졌으며, 호는 매헌(梅軒)이다. 곤양은 현재 사천시의 곤양면이다.
본명은 정무수(鄭茂壽)였는데 정기룡으로 개명하도록 한 것은 선조였다.
1580년(선조13) 고성에서 그는 향시에 합격한다. 1586년(선조 19) 무과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갔다. 그 무렵에 선조는 꿈을 꾼다. 종각에서 잠을 자고 있는 용의 꿈을 꾼 것이다. 꿈에서 깨어난 선조는 신하들에게 종각에 사람이 있으면 궁궐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그가 정무수였는데 무예 시험에도 뛰어난 모습을 보여 합격한다.
선조는 그에게“용이 일어난다” 라는 의미로 기용(起龍)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2년 전이었던 1590년(선조23)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였던 신립(申砬1546년~1592년)의 부하가 되면서 본격적인 무인이 되었다.
정기룡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趙儆, 1541년~ 1609년)의 휘하에서 전쟁터로 진군한다. 돌격장이 된 정기룡은 거창에서 왜적 10여 명을 죽이고, 500여 명을 격퇴시킨다. 금산에서는 조경이 왜적에게 포로가 되자 홀로 적진에 숨어들어 구출한다. 당시의 모습이〈정기룡 신도비명〉에 새겨져 있다.
적의 진중에서 주장을 빼앗아(奪之中堅)
번개같이 돌아왔으니(旋若電馳)
어찌 한의 이광(李廣)만이(漢之飛將)
홀로 용명(勇名)을 떨치겠나(名豈獨專)
옛날 조자룡(趙子龍)의 그 싸움(子龍昨戰)
그 담력 견줄 만했으니(其膽可肩)
어찌 용맹스럽다 하지 않으리요마는(不寧其勇)
의리 또한 누가 앞서겠는가(義孰與先)
-송자대전권 164, 통제사 정공(鄭公) 신도비명
정기룡은 김성일(金誠一1538~1593)의 추천으로 임시로 상주판관이 되어 되었는데, 그때 상주성을 탈환한다. 진주성에도 파견되어 김시민(1554~1592 장군의 휘하에서 진주성 전투에도 참전한다.
많은 전투를 벌이면서 연전연승을 하는 정기룡 장군에 관해'바다의 이순신, 육지의 정기룡‘ 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정기룡에 관한 임진왜란의 업적은 1593년(선조26) 선조가 피난을 떠난지 1년 6개월 후에 한양으로 환도하여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다.
박진은 선조에게 "정기룡(鄭起龍)은 전투할 때 말에서 내려 왜적을 베고는 말을 탔는데 이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조경(趙儆)이 왜적에게 살해될 뻔했다가 기룡이 구출했습니다." 하니, 선조는 "옛날에는 항오(行伍) 가운데에서 발탁해 등용하기도 했다. 정기룡과 같은 사람을 판관(判官) 직위에 두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했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기룡은 젊고 재략(才略)이 있는가 하면 또 목민(牧民)에도 능합니다. 중국 장수를 접대할 적에도 성의를 다해 친히 풀을 베어 오기까지 했습니다. 상주(尙州) 백성들은 대부분 판관(判官)을 목사(牧使)로 승진시키라고 합니다. 이만한 사람은 최근에 보기 드뭅니다." 라고 말했다
-선조실록 권 44, 선조 26년 11월 5일
정기룡은 32세에 상주목사 겸 감사군 대장으로 승진되었다.
1593년(선조 26) 6월, 제2차 진주성싸움이 끝나고는 명나라의 화의 전략으로 소강 상태가 되었다. 유성룡의 추천과 선조의 승인으로 임진왜란의 명장이 될 수 있었다.
"상주 목사 정기룡(鄭起龍)은 인심을 얻었고 또 전투도 잘하니 이제 당상(堂上)에 승진시켜 토포사(討捕使)로 삼아 왜적이 만약 다시 움직이면 상주 낙동강을 막아 지키거나 혹은 물러나 토기(兎機)를 지키게 해야 할 것이며, 왜적이 움직이기 전에 도내에 있는 토적을 잡는 것이 유익할 것 같습니다." 하자 선조는 흡족하게 여겼다.
- 선조실록 권 54, 선조 27년 8월 21일
비변사에서도 역시 정기룡 장군에 관해 언급했다.
경상도의 밀양 이북은 온통 텅 비고 기찰하는 곳이 없어 토적(土賊)이 성행하고 사람들이 통행할 수 없는데 토포(討捕)하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상주목사(尙州牧使) 정기룡(鄭起龍)은 나이는 젊으나 무재가 있고 전부터 많은 군공이 있었으며 또 고을 일을 잘 처리해 아전과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정기룡을 당상관에 올려 토포사(討捕使)란 칭호를 주어서 평시에는 토적을 잡고 왜변이 있을 때는 즉시 이 군사로써 적병의 길을 끊게 하소서.
- 선조실록 권 54, 선조 27년 8월 22일
■ 장지연과 상주
1905년 을사조약은 조선이 외교권을 일제에 빼앗기고, 국제 외교에서 고아로 전락했던 수치스런 조약이었다. 을사늑약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 조약 직후에 민영환 선생이 자결했던 것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다가 부끄러움으로 변한 것을 억제 할 수 없어 백성들의 의식을 각성시키기 위함이었다.
당시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을 게재하여 당시 백성들에게 공분을 느끼게 하였던 분이 상주 출신의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1864∼1921) 선생이다.
호(號)를 위암(韋庵)이라 한 것은 나라(韓)를 빼앗긴 반쪽짜리(韋) 한국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위암은 역사학자, 지리학자, 계몽 운동가였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위암유고(韋菴遺稿), 증보대한강역고(增補大韓疆域考), 대한신지지(大韓新地志), 숭산기(嵩山記), 대동시선(大東詩選) 등이 있다.
장지연은 1898년 독립협회에서 계몽운동을 하면서 남궁억(南宮憶1863~1939)과 유근(柳謹1861~1921) 등과 함께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했다. 월남 이상재(李商在), 우남 이승만(李承晩)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면서 전국적인 인지도를 지녔던 인물이 되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905년 11월 17일 강제적으로 을사조약이 덕수궁 중명전에서 체결되자 11월 20일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오늘 목놓아 우노라’는 내용의 제목으로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라는 사설을 쓰고 게재하였다. 을사늑약은 강제조약이며,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내용과 함께 국민들에게 국권회복을 호소했다. 이 사설로 인해 장지연은 투옥되었고, 황성신문은 무기한 정간되었다.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지난 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 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 즉, 그렇다면 이등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 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參政)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라 말이냐.
김청음(金淸陰)처럼 통곡하여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기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황성신문 2,101호(1905. 11. 20)
1908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으며 그곳에서 해조신문(海潮新聞)의 주필이 되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신문은 폐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하이와 남경 등지를 떠돌면서 국권회복에 전력했다.
고국으로 돌아와서 진주의 경남일보 주필로 근무할 때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절명시(絶命詩)를 게재하였다는 이유로 신문이 정간되기도 했다.
이에 분함을 참으면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고향 상주에 은거했다.
그는 역사와 문학, 지리, 농학의 전문가였으며, 특히 차(茶)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58세 되던 해 분노와 무절제를 술로 녹이다가 그의 몸은 병이 들었다. 그해 늦가을에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묘비에 다른 직함을 쓰지 말고, 오직 숭양산인(嵩陽山人)이라고만 쓰라.”
조국을 빼앗긴 자는 어떤 직함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담긴 유언이었다.
■ 도남서원
조선의 역성혁명과 창건 때의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과 세조의 단종 왕위 찬탈(簒奪)등을 비롯한 많은 정변들은 제 정신을 가진 선비들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아울러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한 권력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웠던 자들은 공신이 되었다. 이들이 훈구파다. 이들의 득세로 향교를 비롯한 공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던 재야 사림들은 자구책으로 자신들이 흠모하는 선각자와 학자들을 제사지내고 합숙하면서 공부하는 공간이 필요했다. 공립이 아닌 오늘날 사립학교의 효시가 되었던 서원의 탄생은 여기에서 부터 출발한다.
대원군의 서원철패 직전까지 상주시에는 18개의 서원이 있었다.
이렇게 많았던 서원 중에서 상주시에서 동쪽으로 10km 지점, 낙동강이 휘돌아 가는 도남마을의 낙동강 기슭에 도남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도남(道南)서원의 이름은 북송의 정자(程子)가 제자 양시(楊時1053~1135)를 고향으로 보낼 때, “우리의 도가 장차 남방에서 행해지리라” 라고 말한 것에 유래한다.
정자(程子) 또는 이정자(二程子)는 송나라 시대의 유학자 정호(程顥1032~1085) 정이(程頤 1033~1107)의 두 형제의 존칭어다.
조선의 유학적 정통성의 전통을 유지하고 지키는 것은 영남 선비들의 자존심이었다. 1605년 5월 경상도 출신 유림 50명이 서원건립을 위해 상주 외남면에 있던 옥성서당에 모여 도남서원의 설립을 논의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도남서원은 1606년(선조39년)정몽주(鄭夢周1337~1392), 김굉필(金宏弼1454~1504), 정여창(鄭汝昌1450~1504), 이언적(李彦迪1491~1553), 이황(李滉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학교의 기능을 위해 설립되었다.
1616년(광해군8) 노수신(盧守愼1515~1590), 유성룡(柳成龍1542~1607), 1635년(인조13) 정경세(鄭經世1563~1633)를 추가적으로 도남서원에 모셨다.
그러나 ‘도남(道南)’이라는 사액서원으로 승격 된 것은 1677년(숙종3)으로 서원이 설립 된지 60년이 지나서였다.
도남서원의 건축물로 사당 도정사(道正祠), 동재인 손학재(遜學齋), 서재인 민구재(敏求齋), 신문(神門)인 입덕문(入德門), 강당인 일관당(一貫堂), 누각인 정허헌(靜虛軒)과 풍우단(風雩壇), 영귀문(詠歸門) 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년)에 강제로 철거되었다가 대부분 최근에 복원되었다. 도남서원의 재산은 전답 3,500평, 임야 2정보 반, 대지 1,000평이 있다.
특히 도남서원이 설립되기 전에 이미 상주지방의 낙강범월유(洛江泛月遊) 시회(詩會)가 열렸다.
1196년에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28세의 젊은 날 낙동강에 배를 타고 시를 지으며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세월이 많이 흐른 19세기 후반 상주 계당(溪唐) 유주목(柳疇睦1813∼1872) 때 까지 이런 모임이 이어졌다고 한다면, 약 700년의 역사를 가진 시회(詩會)였다. 조선 후기에 이 시회로 얻어진 문학적인 자료들의 모아진 곳과 중심무대 도남서원이었을 것이다.
■상주와 기독교 선교사
영남지방에 첫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 게일(James Scarta Gale, 1863~1937)이다. 그는 1889년 8월 부산에 주재한 장로교 선교사였다. 북 장로교 선교사인 베어드(Rev. William M. Baird 1862~1931)와 함께 부산 초량교회 설립에 기여했다.
호주 장로교회 소속의 선교사 데이비스(Rev. joseph Hanry Davies, 1856~1890)와 그의 누이 메리 데이비스(Miss Mary Davies)도 1889년 10월2일 부산에 도착하여 선교를 시작한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선교를 시작한지 6개월 만에 천연두와 폐렴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은 호주 장로교회 한국 선교에 오히려 불을 붙인다. 부산을 비롯한 경상도 지역의 선교 동력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인 윌리엄 베어드 부부는 1891년 2월 2일 부산에 도착하여 선교를 시작한다. 그들에 의해 1894년 영남의 최초의 개신교 초량교회가 설립된다. 평양 장대현교회와 같은 해의 창립이었다. 서울의 새문안교회가 1890년에 설립되고, 한강 이남에서는 최초의 교회였다.
경북지방에 장로교가 전래된 것은 부산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던 베어드(Rev. William M. Baird)의 전도여행 덕분이었다. 베어드는 1893년 4월 17일부터 5월 20일까지 1,240리의 대장정 선교를 했다.
베어드 선교사는 1893년 4월 22일에 서경조(徐景祚) 전도사와 대구를 처음으로 방문하고, 3일간을 선교하다가 25일 동명, 상주, 안동, 의성, 신령, 영천, 경주, 울산을 경유하여 선교하였다.
경북지역 최초의 기독교인은 상주 출신의 김재수(金在洙)다.
베어드 선교사는 1893년 4월 27일 상주를 첫 방문하여 선교한다. 마침 이날은 상주의 장날이었다. 경북 최초의 장로 교인이 되었던 김재수(金在洙)를 이곳에서 만났다. 김재수는 심한 종창을 앓았다. 그는 서양 의사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1891년에 걸어서 부산 선교부를 찾아갔던 사람이다. 그곳에서 김재수는 하디 의사를 만나 예수를 믿게 되고 세례를 받았다. 세례교인이 되어 고향 상주로 간 그에게 기다린 것은 문중의 핍박과 심한 따돌림이었다. 이런 핍박의 시기에 구세주를 만났던 것이다. 1894년 베어드 목사를 따라 부산으로 가서 1895년 5월에 아담스 목사의 한국어 선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담스 목사가 1897년 가을에 대구선교지부로 파송될 때 동행하여 남문 안 선교기지에 살았다. 1897년 존슨 의사가 와서 대구남문 안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유일한 한국 출신의 교인이었다. 그는 경북 최초의 목사가 되었는데 개명한 김기원 목사이다.
종창을 앓았던 것이 오히려 경북 신앙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경북 상주 출신으로 일찍 기독교에 입교한 사람은 이희봉(李熙鳳)이다.
그는 1901년 선산 죽원교회(지금의 대원교회)의 조사로 시무하기 시작하여 1915년까지 선산, 김천, 칠곡, 상주 등에서 시무했다. 다른 목회자와 달랐던 것은 경술국치로 조선의 민심이 흉흉하던 1910년 상주서정교회에서 보성의숙을 설립하고 성경을 비롯하여 역사, 지리, 산수 국어 등 을 가르쳤다는 사실이다.
결국 그는 1916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제9회로 졸업하고, 그해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희봉 목사는 상주지방 11개 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1918년 경북 노회장(3~4회)을 역임했다.
상주에 교회가 최초로 설립되던 시기는 1908년 무렵이다. 이것은 문헌에 나와 있는 기록이고, 더 이전부터 지역교회가 존재했을 것이다.
상주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상주교회와 상주시민교회 연혁에는 1900년 5월을 설립되었다고 공개하고 있다. 정씨라는 여인이 상주읍 서성동에 한옥 4칸을 구입하여 성명을 알 수 없는 전도사가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경북 교회사에는 1910년 상주군 상주면에 서정교회(현 상주교회, 상주시민교회)가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