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민요에 나타난 숲의 상징성
송홍선
민속식물연구소
Ⅰ. 시작글ː숲의 상징성 파악 중요
옛날 사람들은 숲을 중요시했다. 고대 게르만족 사회에서는 거룩한 숲을 숭배했고, 켈트족 사이에서 승려 계층은 각종 종교 행사를 반드시 떡갈나무숲에서 행했다. 그리고 세계 곳곳의 마을 어귀나 근처에 신성한 숲이 있어 그곳은 정령과 신의 거처가 되고 종교행사의 장소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 사람들은 숲보다 나무를 더 중요시 여기는 습속이 있다. 산림이라 하면 우선 나무를 떠올린다. 숲은 나무 다음이다. 이는 최근 들어 숲의 문화적 가치 인식이 점차 높아지고 있더라도 한 번 주지해야할 일이다.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본다는 속어가 있다. 말을 바꾸면 숲을 보지 않고 나무만 본다는 뜻이다. 이 속어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나라 사람들은 숲보다는 나무를 더 중요시하고 있다. 분명 기하학적 부피로 보면 나무보다는 숲의 가치가 더 중요한데도 말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나무 중심의 시각을 해체하고 숲의 중요성을 강조하자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우리 나라만의 독특한 숲을 가져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필자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숲의 문화적 가치가 제대로 인식되고 이것이 공감대를 형성할 때 비로소 우리 나라만의 독특한 숲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숲의 문화적 가치 인식이 선행돼야 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문화 없이 숲 없고 숲 없이 문화 없다는 웨슬리의 명언이 이를 잘 시사해 주고 있다.
우리 나라의 숲은 단군신화에 나오는 신단수에서 출발한다. 신단수는 우리 민족이 자랑인 전통적인 숲이다. 신성한 숲이다. 당산나무의 숲도 신단수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당산나무의 신성함을 믿었다. 생활의 지주로 삼았다. 생활의 터전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집적돼 온 상징적 대상물이었다.
우리 민족이 숲에 대한 많은 시를 남기고 노래를 불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노래 속에는 우리 민족의 상징성이 숨겨져 있다. 특히 우리 나라 민요에 숲의 상징 이미지가 짙게 깔려 있다. 이를 알아보는 것도 숲의 문화적 가치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것으로 믿는다. 이에 따라 필자는 본 주제의 글을 통해 이를 소개하는 것이다.
덧붙인다면 본 글에서는 시기적으로 민요에 나타난 숲의 상징성 파악이 고찰적인 측면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돼 상징성 설명에만 중점뒀음을 밝혀둔다.
Ⅱ. 몸통글ː민요에 나타난 숲의 상징 이미지
1) 고고한 절개와 영원한 생명력 표상
우리 나라 소나무나 그 숲의 고고한 절개는 노래보다는 시조에서 더욱 강조된다. 예컨대 성삼문(成三問)의 시조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되었다가’가 그것이다. 이 시조에서 소나무는 흰 눈이 천지에 가득할 때에 홀로 푸르리라 했으니 매우 비장한 지조이다.
소나무의 절개는 시조 못지 않게 우리 나라 민요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전라도 지방의 대표적인 민요 ‘육자배기’의 예가 그렇다. 이 민요에서는 유교도입 이래 선비들이 척도로 삼았던 ‘대쪽 같은 절개’도 포함하고 있다.
진국명산(鎭國名山) 만장봉(萬丈峯)이/ 바람이 분다고 쓰러지며/
송죽(松竹) 같은 굳은 절개/ 매맞는다고 훼절(毁節)할까.
전라도 민요 ‘육자배기’
‘대쪽 같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불의나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꼿꼿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육자배기’ 민요에서도 나타났듯이 옛날 선비들은 군자의 취할 바인 ‘대쪽 같은 절개’를 중히 여겼다.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가 피살된 다리를 ‘선죽교(善竹橋)’라고 명명한 것이나 을사조약 때 민영환이 자결한 곳에서 ‘혈죽(血竹)’이 돋았다는 이야기는 절개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대나무는 우리 나라의 여러 곳에서 숲을 이룰 정도로 널리 심겨졌다.
또한 소나무의 절개는 ‘육자배기’ 같은 민요 이외에 ‘애국가’의 ‘남산 위의 저 소나무’와 ‘선구자’의 ‘일송정 푸른 솔’ 등에서 더욱 강조된다. 여기에서 소나무는 시간의 흐름과 불변의 고결한 절개를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소나무는 불변의 영원한 생명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관북지방의 무가 ‘오귀풀이’에 보면 소나무가 불로초를 먹고 늘푸른 영원한 생명력을 지녔다는 내용이 나온다.
금낭당 잣나무 밑에 와/ 불로초를 파보니/
소나무가 다 집어 먹고/ 짓을 남아 지텃구나/
그 때부터 소나무가/ 춘충양절 가더라도/
검고 푸르고 있구나.
무가, 관북지방 민요 ‘오귀풀이’
소나무의 생명력은 우리 나라 민요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독일 민요 ‘아, 소나무야’에서는 영원 불변의 푸르름에 대하여 싱싱함과 변함없는 생명력으로서 칭송하고 있다. 또한 ‘오귀풀이’에 소나무와 함께 나오는 잣나무도 영속성과 생명력, 불변성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다만 영속성보다는 불변성의 관념이 더욱 확대되어 나타난다. 잣나무의 불변성이 함축하는 가장 일반적인 심상의 고결성과 지조는 개인의 소외감을 표출하거나 고매한 인물을 기리는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일찍이 향가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에서는 기파랑의 모습을 ‘아, 잣나무 가지 높아/ 서리 모르실 화랑의 장(長)이여.’라고 예찬하고 있다. 또한 가사 ‘사미인곡’에서도 ‘남산송백수(松柏樹)로 깊은 맹세 지어 두고’라 하여 영속성 내지 불변성을 표상하고 있다.
한편 외국의 민요에는 소나무 · 잣나무 · 대나무 이외에 보리수나무도 생명의 나무로 상징되고 있다. 예를 들면 나무 그늘에서 마음의 안식을 찾으라고 노래하는 독일 민요 ‘보리수’는 꿈과 낭만의 추억, 변화하는 인생 속에서 변하지 않는 원원한 안식처로서 슬픔과 기쁨을 모두 수용하고 따뜻이 감싸는 생명의 나무를 암시하고 있다.
2) 신령스런 마을 숲의 분포사실 고증
마을 숲이란 무엇인가. 우선 궁금한 것부터 알아보자. 마을 숲은 마을 사람들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는 숲이다. 곧, 마을 숲은 마을의 역사 · 문화 · 신앙 등을 바탕으로 이뤄져 마을 사람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성돼 보호 또는 유지돼 온 숲을 뜻한다.
이러한 마을 숲은 소나무 · 버드나무를 비롯해서 느티나무 · 팽나무 · 대나무 · 잣나무 등이 대표적인 수종으로 나타난다. 우리 나라 민요에 등장하는 마을 숲의 주요 수종도 이와 비슷하다.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닐리루 닐리루 닐리루리/ 잠든 소나무 어깨춤추니/
목쉰 까치가 노래하며/ 까욱 까욱 까욱.
강원도 민요 ‘금강산 노래’
경상도 안동 땅에 제비원의 본일더니/ 제비원 솔씨받아 용문산에 던졌더니/
그 솔이 자라 크니 소부동이가 자라난다/ 청장목되고 도리지둥이 되었구나.
무가, 경상도 민요 ‘성주풀이’
앞의 것은 가사로 보아 마을 숲을 설명하기엔 거리가 약간 멀다. 그러나 이 곡은 강원도 금강산의 소나무를 소재로 노래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강원도 지방의 마을 숲이 소나무로 이뤄졌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뒤의 것은 성주신과 소나무씨의 근본이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으로 돼 있다. 이곳에서 솔씨가 생겨나 전국으로 퍼지고 마을의 소나무숲을 형성했을 것이 분명하다.
소나무 이외에 마을 숲의 근간을 이루는 잣나무 · 대나무 · 버드나무 등은 우리의 가락 ‘천안 삼거리’, ‘밀양 아리랑’, ‘울산 아가씨’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천안 삼거리 흥/ 능수나 버들은 흥/ 제 멋에 겨워서 흥/ 축늘어 졌구나 흥.
충청도 민요 ‘천안 삼거리’
대숲이 우거진 영남루에/ 백화(百花)가 난만히 피어 있네.
경상도 민요 ‘밀양 아리랑’
동해라 울산은/ 잣나무 그늘/ 경치도 좋지만/ 인심도 좋구요.
경상도 민요 ‘울산 아가씨’
‘천안 삼거리’의 원래 제목은 ‘흥타령’이다. 발생에 관한 색다른 설화가 있으나 이 곡이 처음 생긴 곳은 충청도 천안으로 여기고 있다. 이 노래는 요즈음 흔히 부르는 것과 그보다 훨씬 이전의 민요, 그리고 남도 민요에서 불려지는 것이 있다. ‘밀양 아리랑’은 밀양 부사의 딸인 아랑의 정절을 찬미해 불렀던 경상도 민요이다. 원래 제목은 ‘아랑가’였다고 한다. ‘울산 아가씨’는 울산 아가씨의 소박한 심경을 세마치 장단으로 정곡(情曲)있게 그려내고 있다.
이상과 같은 노래에도 나타났듯이 버드나무는 축 늘어진 모양이 특이해 경관용으로 마을에 심어졌고, 대나무와 잣나무는 수익성을 위해 식재됐다. 내나무밭을 ‘금전(金田)’이라 할 정도로 대나무는 죽세공품 재료와 농업적 가치가 높아 마을 주변에 많이 심어졌으며, 잣나무는 최근 숲 내에 유목으로 군식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잣나무가 조경수로 많이 이용되고 구입이 쉬우며 가격 또한 저렴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말하는 마을 숲은 인위적인 조림으로 출현한 숲이기 때문에 반드시 후계숲이 조성돼야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후계숲은 대부분 지난 50~60년대의 사회와 문화를 토대로 조성됐으나 70년대 이후에 조성된 마을 숲들은 기존의 장수목이 식재된 것이 아니라 아까시나무․은행나무․포플러를 비롯해 복사나무․진달래 등 꽃나무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동구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로 시작되는 ‘과수원길’과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의 ‘고향의 봄’ 등 동요에서도 알 수 있지만 우리 나라 민요 ‘꽃방아 타령’, ‘도라지 처녀’, ‘꽃노래’ 등을 통해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도라지 캐러 간다고/ 요핑게 조핑게 하더니/
대바구니 팽개치고/ 은행나무에 기대 앉아/
버들피리만 부는구나/ 버들피리 부네.
‘도라지 처녀’
이편 저편 홍문(紅門)안에/ 새젓골 취발이란 놈/
귀룽가지 꺾어들고/ 늙은 중 놈 빼어 내고.
양주지방 민요 ‘꽃방아 타령’
무릉도원 복사꽃은/ 이화락이 꽃이로다/
경상도라 함박꽃은/ 동안으로 돌고.
진안지방 민요 ‘꽃노래’
한편 민요에 나타난 마을 숲은 마을의 역사와 함께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토착적 정신문화를 상징하는 대상이 된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의 힘에 의지하고 자연을 신으로 간주해 숭배하는 습속이 있었다. 마을 숲의 나무들을 신령한 신목(神木)으로 여겼던 것이다. 신성한 숭배의 대상이 됐던 것이다.
숲에 숲에 영당 숲에/ 뿌리 없는 나무 섰네/
그 끝에나 여는 열매/ 해도 열도 달도 열고/
가지벌려 열두가지/ 잎은 피어 삼백이됴.
경상도 부요 ‘주머니요’
이 민요는 실용의 주머니를 아름답고 여성답게 만드는데 있어서 부르는 부녀자의 노래이다. 여기에서의 ‘영당 숲’은 신령스러운 숲이다. ‘뿌리 없는 나무’는 영당 숲에 세워진 무속의 나무를 뜻하고 있다.
이 집 짓던 대목(大木)은 어느 대목이 지었노/
각성바지 중에서 그 중에 한 대목이 지었지/
강남서 나온 제비 솔씨 한 되 물어다가/
조선 천지 흩었더니 한 장목이 되었구나.
동래지방 민요 ‘주신풀이’
뫼시어라 뫼시어라/ 수신(樹神)을 뫼시여라/
당상학발 천년수라/ 영웅호걸 뫼시여라/
시중천자 뫼시여라.
전라도 민요 ‘목도 노래’
‘주신풀이’와 ‘목도노래’의 공통점은 집을 나무로 짓는다는 것이다. 앞의 것은 악귀를 진압해 연중 무사하기를 빌기 위해 부르는 노래로, 대목은 지신(地神)을 상징하고 있다. 뒤의 것은 집을 지을 때 성조에 쓰일 나무나 무거운 주춧돌을 운반하면서 부르는 노래로, 신목을 표상하고 있다.
이밖에도 신목을 상징하는 민요로는 ‘순흥요’와 ‘장승타령’이 있다. ‘은행나무 다시 살아/ 순흥(順興)이 다시 나고/ 순흥 다음에 노산(魯山)이 복위한다.’는 ‘순흥요’는 경상도 순흥부 동쪽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단종이 즉위하던 해에 말라 죽었다. 그후 230년이 지나 신기하게도 은행나무가 다시 싹이 트고 순흥부가 부활됐다는 내용의 민요이다.
그리고 ‘천지만물 생겨날 제 각색 초목이 먼저 나’로 시작되는 ‘장승타령’은 각종 악기나 궁궐의 기둥은 못될 망정 험한 꼴로 길가에 서있는 자신의 신세타령을 한 다음 용서해 주기를 비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이 민요는 나무의 이용을 잘 나타내고 있지만 장승하면 무엇보다도 신격화된 수호신의 상징성이 짙다.
3) 만남의 장소와 마음의 휴식처로 인식
최근 자연휴양림에서 자연학습과 삼림욕을 함께 즐기는 휴양객이 늘고 있다. 혼탁한 공기 속에서 생활하는 도시인들이 맑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숲을 즐겨 찾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오늘날의 도시인이 새롭게 만들어낸 특허 휴양법이 아니다. 선인들이 간헐적으로 이용했던 휴양법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민요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선인들은 가을날의 단풍놀이만을 즐겼던 것이 아니고 신록의 계절엔 숲을 좋아했다고나 할까.
이 산을 넘어갈가/ 저 산을 넘어갈가/
총각낭군 다리고/ 수풀 노름을 갈가.
‘남요(男謠)’
이 민요는 현대적 감각이 풍부한 노래이다. 민요의 소유자가 교양없는 서민층의 남자인 까닭에 그들은 속마음 우러나는대로 기교도 수사도 없이 마음 그대로의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숲을 만남의 장소이자 마음의 휴식처로 여겼던 것이다.
더욱이 숲은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노인들의 놀이터나 휴식처가 되기도 했다. 옛날 노인들의 휴식처였음을 나타내는 민요 속의 숲은 투전(鬪牋)놀이를 할 때 부르는 ‘투전불림’ 노래에서 만날 수 있다.
개발톱 같은 팔자/ 팔자나 한 장 들고 보니/
팔십에 노인이 아홉상좌 거느리고 나무 밑을 걸어간다/
두 눈이 꿈쩍 구자/ 구자나 한 장 들고 보니/
구십에 노인이 팔상좌(八上座)거느리고 나무 밑을 걸어간다.
경상도 민요 ‘투전불림’
이 민요에서는 어느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울창한 숲속을 거닐며 마음의 안정을 바라는 심정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삼림욕의 한 방편으로 숲속을 걸어갔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자연 휴양림을 찾아다니며 삼림욕을 즐기는 도시인들의 습성은 옛 선인들의 관습을 답습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너무 틀에 맞추는 격의 풀이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여기는 편이 좋겠다.
4) 쓰임새도 농토 · 목재 · 연료 등 다양
옛날 사람들은 나무의 이용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숲을 이루는 나무는 지역에 따라 그곳에 알맞는 수종을 많이 싶으면 봄에는 꽃을 볼 수 있고 여름에는 그늘을 즐길 수 있으며 가을에는 열매를 먹을 수 있다고. 또한 그것이 재목이 되고 기기(機器)가 된다고 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숲의 이용적 측면은 농토․휴식․운동, 기능적 측면은 재해방지․목재생산․연료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나무숲의 이용은 우리 나라 민요 ‘모찌는 소리’, ‘나무쪼개는 노래’, ‘나무꾼 노래’ 등에 언급돼 있다. 여기에서는 농토와 목재 그리고 연료의 경우를 예로 든다.
최근에는 골프장과 스키장 등 위락시설이나 농토로 이용하기 위해 산중턱의 숲을 파괴하고 있다. ‘숲은 보호돼야 한다’는 자연보호적 차원에서 본다면 숲의 농토 이용 가치는 줄어들지만 국익에 우선한다면 숲의 농토 이용가치도 중요하게 논할 만하다.
남산 숲에다 새 논을 치고/ 수양산 봇물을 둘러다 대세/
우리 군장들이 허자고 들면/ 태산이라고 문허 내내.
전라도 민요 ‘모찌는 소리’
산중턱에 논을 만든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그러나 ‘모찌는 소리’의 민요에서처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으면 가능하다. 태산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농토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숲의 훼손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 민요는 옛날 산중턱의 숲이 농토로 이용됐음을 입증하고 있다. 숲을 이루는 나무는 목재로 이용하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현재도 다를 바가 없다. 목재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숲속으로 들어가 나무를 베어내야 했다. 옛날 사람들은 나무하러가거나 나무를 베면서 흥에 겨운 실천의 노래를 불렀다. 이상의 ‘나무꾼 노래’와 ‘낭깨는 소리’등이 좋은 예이다.
가세 가세 나무 가세/ 깊은 산에 나무 가세/
우두락 뚝딱 나무가세.
전북 장수지방 민요 ‘나무꾼 노래’
동무야 나무 가세/ 배아파서 못가겠네/
무슨 배 업배/ 무슨 업 솔업/무슨 솔 다박솔/
무슨 다박 천지다박/ 무슨 천지 골천지/ 무슨 골 명지골/
무슨 명지 당명지/ 무슨 당 서낭당/ 무슨 서낭 국서낭.
‘꼬리따기 노래’
요산 중에 놀던 낭아/ 와삭 파삭 깨어지라/
한 번 찍건 그믓나곡/ 두 번 찍건 둘이 되라/
세 번 찍건 세가지 되곡/ 펀질펀질 벌러져라.
제주도 노동요 ‘낭깨는 소리’
그리고 나무를 베어다가 가공하고 나면 집을 짓는데 유용하게 썼다. 숲에서 베어낸 나무가 모두 목재로 이용된 건 아니다. 크고 질이 좋은 나무가 좋은 재료로 사용됐다. 강원도의 구전 민요나 경북지방 노동요 ‘나무쪼개는 노래’를 들어보면 이해가 간다.
어떤 나무는 팔자가 좋아 기둥이 되고/
어떤 것은 팔자가 나빠서 똥가래가 된다.
강원도 구전 민요
시렁 시렁 톱질이야/ 이 낭구를 베어다가/
우리 부모 자는 방에/ 춥지 않게 불을 넣어.
울진지방 노동요 ‘나무쪼개는 노래’
이같은 민요에서 보더라도 집을 지을 때 쓰지 못하는 숲 속의 나무는 온갖 민구를 만들거나 연료로 쓰일 수밖에 없었다.
5) 울창한 숲속 아름다운 강산을 나타내
우리 나라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신단수(神檀樹)는 식물학상의 어떤 나무로 생각해 박달나무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박달나무가 맞건 틀리건 신단수를 믿는다면 당시의 태백산에는 나무숲이 울창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신화에 따르면 하느님의 아들 환웅(桓雄)은 이 숲속 아래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고 일렀다. 환웅과 웅녀는 이 숲속에서 단군을 낳고 살았다.
이렇듯 울창한 숲은 우리 만족의 생활터전이었다. 인간 생명의 원천이었다. 본질적인 우리 민족의 고향인 것이다. 또한 숲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의 주체였다. 바람 소리가 있고 산새들의 지저귐이 어우러진 숲, 진달래꽃 · 복사꽃이 핀 뒷동산의 꽃숲은 아름다움 그 자체일 뿐이다.
두견이 운다/ 뒷동산/
송림 속에/ 두견이 운다.
경기도 민요 ‘는실 타령’
이 강산 삼천리 봄들었네/ 푸른 것은 버들이요/
누른 것은 꾀꼬리라/ 황금같은 꾀꼬리는 푸른 숲으로 날아 들고.
경기도 민요 ‘창부 타령’
양류청청 늘어진 가지/ 꾀꼴새가 아름답다.
에라 좋다 더덤석 안고서/ 흥흥 요것이 내사랑.
신민요 ‘양류가’
‘는실 타령’은 경기도 지방에서 불려지던 민요로 ‘는실’이라는 말 그대로 흥이 절로나는 노래이며, ‘창부 타령’은 굿12거리중 11번째로 노랫말과 함께 무당소리가 대중화된 것이 특징이다. ‘양류가’는 황해도 민요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황해도 민요의 특색인 괴롭고 아픈 소리와는 많은 차이가 난다. 가사가 말해주듯 남녀의 정감어린 사랑을 굿거리 장단으로 나타내고 있다.
숲이 있는 곳에 새가 있다라고 하면 제멋대로의 표현일까. 이상의 노래만 생각하면 적어도 그렇다는 것이다. 뻐꾸기 울음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그렇게 믿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들은 딱따구리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도 숲속이라고 말한다.
두견새와 꾀고리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도 숲이 우거진 깊은 산속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경기도 민요의 ‘는실 타령’, ‘창부 타령’, ‘양류가’ 등의 가사를 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울창한 숲속을 이루고 있을 때만 이러한 새들이 보금자리를 틀고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정방산성 초목이 무성한데/ 밤이나 울닭이 낮에 운다/
에 에헤에헤요 어머나 둥둥 내사랑아.
서도민요 ‘긴난봉가’
산천초목이 다 무성한데 나마에/ 에헤 에헤에 구 우후.
경기도 민요 ‘선소리 산타령’
양춘가절에 봄들었구나/ 온갖 잡목이 무성하다/
오다가다 가닥나무/ 가다오다 오동나무/
이 나무 저 나무 노가지 나무/ 왜철쭉 진달래가 만발했는데/
쳐다보니 만학천봉(萬壑千峰)/ 굽어 살피니 백사지(白沙地)로다.
‘배뱅이굿 소리’
울창한 숲속을 노래한 민요로는 이상의 ‘긴난봉가’, ‘선소리 산타령’, ‘배뱅이굿 소리’ 등을 들 수 있다. ‘긴난봉가’는 황해도 지방의 난봉가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자진난봉가’, ‘병신난봉가’, ‘숙천난봉가’, ‘개성난봉가’, ‘사설난봉가’ 등을 파생시킨 원판이다. ‘선소리 산타령’은 본래 사당패(社黨牌) 소리로, 각 지방으로 분산돼 그 지방에 맞는 형식과 특징을 지니고 전하고 있다. ‘배뱅이굿소리’는 서도(西道)소리의 하나로 배뱅이라는 처녀의 죽은 넋을 달래는 구성진 사설이다.
한편 숲은 울창한 이미지를 나타내면서 아름다운 강산을 만든다. 특히 꽃이 핀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지역은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눈꽃이 핀 나무가 있는 산야, 진달래가 붉게 핀 뒷동산, 살구꽃 · 복사꽃이 만발한 동네의 꽃숲은 그 어떤 아름다움과도 견줄 바가 못된다. 이곳에는 고향이 있고 사랑이 있고 그리움이 있다. 얼마나 정겨운 곳인가. 아름다운 곳인가.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러보지 않겠는가.
높은 산과 얕은 산이/ 흰 설모자 쓰고서/
마른 눈은 나무에 앉아/ 꽃이 피었네.
아산지방 민요
청류기생 살구꽃은/ 해를 걸고 휘돌았네/
무릉도원 복사꽃은/ 그물 안에 걸리시네.
‘꽃노래’
만첩의 청산에는 작약화요/ 왜철쭉 질달래야/
이산 저산 만산 중에/ 봉지 봉지 피었구나.
강릉지방 민요 ‘꽃굿노래’
도화의 춘광춘색/ 만화방춘 꽃숲이니/
어화 벗님네야/ 우리 님은 어디갔나.
신민요 ‘신만고강산’
약산에 진달래가/ 제 아무리 고와도/
내 가슴에 피어나는/ 순정만은 못해요.
‘약산진달래’
이화 도화 만발하고/ 행화방초 흩날린다/
우리님은 어디 가고/ 화류(花遊)할 줄 모르나.
경기도 민요 ‘양산도’
6) 가장 한국적인 한(恨)을 상징하기도
한(限)은 가장 한국적인 슬픔의 정서이다. 한의 소극적이고 1차적인 감정은 마음에 맺힌 상처나 탄식 등 정신적 어혈을 체념 속에 묻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한을 무가 · 민요 · 판소리 등 예술활동을 통해 의지적 행동으로 승화시키려 했다. 맺힌 한을 푸는 방법으로 익살과 해학을 이용했다.
따라서 서민들의 일상생활이나 민요 · 판소리 등에는 한과 더불어 해학적 요소가 담겨 있다. 예컨대 탈춤에서 말뚝이와 취발이는 웃음과 해학으로, 굿판에서는 무당이 서러운 푸념과 넋두리로 청중을 울게 만들다가도 이내 익살과 육담으로 웃게 만든다.
가장 한국적인 슬픔의 정서인 한이 노래 등을 통해 승화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을 상징하는 민요 속의 숲을 나열함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송림(松林) 속에 우는 새 처량도 하다/
아랑의 원혼(冤魂)을 네설워 우느냐.
‘밀양 아리랑’
‘밀양 아리랑’은 경상도 민요이나 지금은 전국적으로 불려지는 대중 노래이다. 밀양의 아낙네들은 아랑이 칼에 찔려 죽자 그녀의 정절을 찬미하게 됐고 그때 지어 불렀던 ‘아랑가’가 오늘날의 ‘밀양 아리랑’이 됐다는 것이다. 아랑의 원혼을 서러워 우는 새가 소나무 숲속에 있다는 내용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숲은 한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숲은 한과 약간의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나 매어 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을 이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경기도 민요 ‘노들 강변’
경기도 민요 ‘노들 강변’은 한강의 어제를 회상하고 오늘을 비교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서정시가 어우러진 신민요이다. 당시 강안(江岸)의 버드나무와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인생을 관조(觀照)한 일면을 나타내고 있다. 세상의 한을 물에 띄워 보려는 심정이 담겨 있다.
‘노들 강변’의 ‘노들’은 오늘날 서울의 노량진을 일컫는다. 따라서 요즈음이야 노량진에서 버드나무를 구경할 수 없지만 옛날에는 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음을 이 민요를 통해서 알 수 있기도 하다.
7) 나무를 소재로 한 민요의 예
숲은 나무가 서있는 공간을 뜻한다. 더 나아가서는 숲을 떠받들고 있는 토양 · 물 · 공기 · 식물 등 복잡한 생명체계를 포함하고 있다. 넓은 의미로는 자연이라는 개념과 함께 설명되고 있다. 그렇다고 보면 풀이 우거진 곳이나 온갖 꽃으로 뒤덮인 공간 따위를 모두 숲이라 할 수 있다. 갈대숲도 숲이고 꽃숲도 숲이다.
그러나 숲은 일반적으로 나무가 존재하는 공간을 의미하기 때문에 나무가 없는 숲은 숲이 주는 상징의 이미지를 떨어뜨릴 공산이 크다. 숲은 나무가 존재해야만 적격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무와 관련된 우리 나라 민요를 여기에 소개하는 것이다.
사실 다음에 소개되는 민요도 앞에서 언급하고 있는 민요 속의 숲 상징성에 포함시켜야 하는 당위성은 인정한다. 교육적인 측면 등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그저 참고적으로 따로 구분해 놓은 이유는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가 많이 작용했음을 직고한다. 즉, 이러한 민요들을 모두 상징의 이미지에 포함시텨야 할 의무 따위를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가사의 내용이 숲과는 거리가 먼 나무 그 자체에 한정돼 있고 또한 이러한 노래를 본문의 숲 상징성에 포함시킬 경우 민요의 범주내에서 설명하는 숲의 이미지에 혼란을 초래할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러한 필자의 주관은 다음 기회에 더 조사하고 연구해 체계적으로 정립해 나갈 것을 약속드리며 나무를 소재로 한 민요의 예를 아무런 의미없이 참고적으로 소개할까 한다.
산에 올라 산나무/ 들에 내려 배나무/ 봉화둑에 홰나무/
불밝혀라 등나무/ 용춤춰라 용나무/ 십리절반 오리나무/
열의 갑절 스무나무/ 한치라도 백자나무/ 조선에 난 호두나무/
남쪽에난 동백나무/ 푸르러도 단풍나무/ 단풍져도 푸른나무/
소년시절 영감나무/ 평생소녀 대추나무/ 사시사철 사철나무/
대낮에도 밤나무/ 사월파일 느티나무/ 먹기어련 떡갈나무/
휘늘어져 버드나무/ 백양청양 황양나무/ 중기중기 느릅나무/
갈기갈기 가락나무/ 칼로 베어 피나무/ 목에 걸려 가시나무/
속 비고 대나무/ 악스런 아구나무/ 네편 내편 양편나무/
씨름하여 저나무/ 홍두깨 박달나무/ 죽어도 살구나무/
액막이 복사나무/ 동풍에 모기나무/ 덜덜떠는 사시나무/
말라빠진 살대나무/ 오자마자 갓나무/ 하느님께 비자나무/
절에 가서 기구나무/ 송낙 쓰고 상수리나무/ 월궁에 계수나무/
외지게 벚나무/ 굿놀이 사당나무/ 새로 지은 옻나무/
깔고 앉아 구기나무/ 비단같은 전나무/ 버선 끝에 상모나무/
오목다리 오목나무/ 마주섰다 은행나무/ 덥적앉아 줄나무/
입맞췄다 쪽나무/ 입술 같은 앵두나무/ 시집달 때 가마해나무/
방귀 뀌어 뽕나무/ 달고 달아 꿀나무/ 거짓없이 참나무/
그렇다고 치자나무 ······
충청도 민요 ‘나무타령’
너하구 나하구 살구나무/ 바람 솔솔 소나무/
십리 절반 오리나무/ 열아홉에 시무나무/
처녀애기 자장나무/ 밑구녕에 쑥나무 ······
‘나무 노래’
십리밖에 시무나무/ 십리안에 오리나무/ 한다리 절뚝 전나무냐/
마주섰다 은행나무/ 입을 맞춰 쪽나무냐/ 아흔 아홉 백자나무/
방귀 뀌어 뽕나무/ 무안당해 피나무/ 발발 떨어 사시나무/
오줌누어 소태나무/ 낮에 봐도 밤나무냐/ 사시장철 소나무 ······
양주지방 민요 ‘말뚝타령’
오동나무 베자하니/ 요임금의 오현금/ 살고나무 베자하니/
공부인의 강단/ 솔나무 좋다만은/ 진시황의 오태부(우)/
잣나무 좋다마는/ 한고조 덮은 그늘/ 어쥬추(축)슈 애산츈/
홍도나무 사랑옵고/ 유(위)성조우 읍경록(진)/ 버드나무 좋을시고/
밤나무 신쥬가음/ 져나무 돗대재목/ 가사목 단단하나/
배짐끔대 못가음/ 즁나무 오시목과/ 산유자 용목 검패목/
물방긴한 문목/ 화목되기 아갑도다.
‘변강쇠타령’
Ⅲ. 마침글 : 숲의 문화적 가치인식 기대
민요는 가장 폭넓은 서민문학이라고 한다. 민요는 문자가 없었던 때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우리들 가까이에서 정감있게 불려지고 있다. 내용 또한 소박하고 순수하며 자연스럽다.
우리 나라의 민요는 누구에게나 공감을 주고 있으며 서민들의 공명하에서 성장해 왔다. 마음을 읊고 생활을 노래하며 아주 정겨운 벗으로 자라왔다. 그리고 자연과 인정과 생활 속에서 발생하고 성장하고 전승돼 왔다. 따라서 민요 속에는 우리 민족의 생활성 · 사상성 · 민속성 등이 담겨 있다. 우리 나라 민요에 나타난 숲의 상징성도 마찬가지다.
우리 나라 민요에 나타난 숲의 상징성은 인간이나 인간이 만든 문화와 자연 사이의 연속성을 인정하는 표상이 깔려 있다. 즉, 영원한 생명력과 신령스런 힘이 깃든 숲을 숭배하는 것은 한편으로 숲과 인간 사이에 신비한 연관 관계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 최고의 숲은 누가 뭐래도 고고한 절개의 상징인 소나무숲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민요에는 소나무숲의 고고한 절개가 많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 가곡이나 가사 또는 시조 등에 나타나는 소나무의 절개보다 덜하다는 뜻이다. 이는 민요가 서민들의 일상생활에서 불려졌던 것이라고 할 때 서민들이 선비보다 절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으로 간주된다.
또한 민요에 나타난 숲의 특징은 마을 숲의 분포사실 고증이다. 뿐만 아니라 선인들은 숲을 마음의 휴식처로 여김과 아울러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다. 아름다운 산야와 한(恨)의 사상이 깔려 있는 것도 민요에 나타난 숲의 상징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물론 이같은 상징성은 가곡 · 동요 · 가요 · 가사 등 전반적인 노래에 나타난 숲의 이미지를 포괄하지는 않고 있다. 그렇지만 이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고 확신한다. 아무튼 우리 나라 사람들은 단편적이지만 이같은 민요에 나타난 숲의 상징성을 통해 숲의 문화적 가치를 재인식하고 인정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출전=숲과 음악(송홍선, 두솔, 179-192쪽,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