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길 금릉 옛길 12Km 풍무역~운양역
일시: 2022년11월13일 일요일 흐림 동행: 김헌영 원의연
개관 김포의 지명은 고구려 장수왕(475년)때 “신성한 포구마을”이라는 의미로 黔浦라고 불렸다. 이후 통일신라 경덕왕은 757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며 흔히 사용하지 않고 어려운 한자인 “黔”보다 일반적이고 좋은 의미의 한자인 “金”이 쓰이면서 지금의 金浦가 되었다. 다른 지명으로 金陵으로도 불리기도 하였는데, 금릉은 김포의 대표 문화유산인 김포 장릉과 김포의 500년 중심지였던 관아가 있었던 의미를 담고 있다. 금릉 옛길은 김포 장릉과 김포향교의 옛스러움을 볼 수 있다(가이드북)
김포가 변했다 서울이 반했다
동선 풍무역→새장터공원→승가대 고개→공동묘지→章陵(원릉)→김포시청→重峯 趙憲동상→김포향교→우리병원→홍예교→걸포중앙공원→서촌교→계양천산책로→수문→김포아트빌리지→모담산→운양역
栗原九曲 序詩- 重峯 趙憲(1544~1592)
天成老嶽비精靈: 하늘이 만든 老城山에 정령이 숨어 있으며 嶽下泉流步步淸: 산 아래 샘물 흘러 한결같이 맑아라 行到栗原奇勝處: 율원의 기이하고 아름다운 곳에 도달하니 武夷須續棹歌聲: 모름지기 무이구곡의 노 젖는 노랫소리 이어지네 • 老城山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과 안성시 일죽면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310m의 나즈막한 야산이다.
어제 오후 늦게부터 밤사이 겨울비가 세차게 쏟아져 낙엽들이 몸살을 앓고 떨어져 落花가 되어 배수구를 막으니 민초들은 서둘러 낙엽을 제거했고 우리들은 강화 가는길 2코스인 금릉 옛길을 걸으려고 동행들과 9시30분 풍무역 2번 출구에서 반가운 손목을 잡았다 금릉은 김포시의 옛 이름이다
풍무역은 김포철도 GoldLine에 있고 5호선 김포공항역에서 김포 양촌역까지 路線으로 앞으로는 김포로 5호선 전철이 연장 운행될 것이다
9시41분에 트레킹에 들어가서 2번 출구에서 직진하다가 횡단보도를 건너 다시 횡단보도늘 건너니 소공원이 나왔고 좌틀하니 센트럴푸르지오 아파트 앞을 통과하니 새장터공원이 나왔고 공원으로 진입하니 경기둘레길 57코스와 공유하고 오르막을 오르니 고개로 승가대 고갯길이다 하지만 둘레둘레 김포 승가대학교(불교)를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고 공원묘지가 우측에 있다 고갯마루에서 내려오니 우측으로 먼 발치에 실낙원장례식장이 보였다 그리고 곧 광해군의 동생 정원군 묘지가 있는 장릉산(150.3m) 울타리(철조망)가 있고 철조망을 끼고 길이있다
• 김포 장릉산 둘레길(3.6km) 김포 장릉입구~매표소~장릉 경계 철조망 따라서~장릉산공원~숲길(순환)도로 ~ 계단오름~고려공원(묘지)~산길~외곽으로 나와서 금정사& 승가대학~다시 숲길 진입~장릉공단~장릉입구
장릉 입구에 스탬프함이 있고 장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정원군과 인헌왕후의 묘다
• 章陵 조선 14대 선조의 5남이자 16대 인조의 아버지로 생전에 받은 군호는 定遠君이고 추존된 묘호는 元宗으로 부인은 仁獻王后다 처음에는 남양주 금곡에 있다가 이곳으로 이장하여 육경원이라 했다가 흥경원으로 부르다가 장릉이 되었는데 蓮池가 있고 볼거리가 많다
영월에 있는 壯陵은 端宗의 묘호이고 파주에 있는 仁祖의 무덤도 똑같이 長陵으로 사적 제203호다
정원군은 선조실록에는 “성품이 포악하고 행동이 방탕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과 탄핵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등 임해군과 순화군 못지 않게 행실이 왕족 타이틀이 무색하게 포악했다고 하며 章陵은 왕릉뷰(아파트)로 더 알려젔다
원릉 입구 고개길 “Y”자 갈림길에서 독도에 유의해야 하는데 좌측은 경기둘레길 58코스 방향이고 강화길은 도로를 따라 내리막이다 “효연수문화원” 알림글이 눈에 들고 마을버스가 지나가면서 비행기 소리가 들린다
사거리가 나오고 좌틀하니 김포시청이 있고 시청 안에는 선정비들을 모듬한 곳이 있고 시청 앞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니 김포체육관 시민회관 문화체육공원을 앞을 지나야 하는데 가로수는 메타스퀘어이고 길 건너로 중봉도서관이 있는데 김포에서는 중봉 선생 문화축제가 열린다 Gold Line 사우(김포시청)역이 나왔는데- 사우역은 사우동에 있다
• 사우동 사우동은 마을이 조수가 드나들던 한강변에 위치에 갯벌에 모래가 많이 쌓였다 하여 "모래모퉁이 마을" 이라는 뜻
곧 사우사거리가 나왔고 횡다보도를 건너 직진하여 48번 국도 곁을 걸으면 “돌문마을” 표석을 볼 수 있다
• 돌문마을 본래는 까막골이라고 했는데 옛날에는 소금을 만드는 가마솥이 있어 가마골이라고 하다가 가마골이 막골로 변했고, 왜구 등 외적을 막기 위해 돌문을 세웠다 하여 석문이라 하였다. 마을 앞으로 넓은 들이 있으며 이들은 오리방천을 막아 농토로 개척하여 미맥의 곡창지이며 이모작으로 마늘 주산지를 이루고 있다. 김포평야에서 생산되는 김포 쌀은 잘 알려진 쌀이다
갈림길 중앙에서 중봉 선생(동상)이 손짓을 하니 지나칠 수 없고 동상은 황금색이고 선생은 율원구곡 시를 읊었는데 제1곡 滄江(금천계곡)은-
一曲滄江有小船: 일곡이라 滄江에 작은 배 떠있는데, 發源南嶽作長川: 남쪽 산에서 발원하여 긴 강을 이루었네. 西歸錦麓因歸海: 서쪽으로 錦麓을 돌아 바다로 흘러들어가, 碧浪應通洙泗烟: 푸른 물결 응당 洙泗의 안개와 통하네.
길 건너에 김포북변동우체국이 보이고 잠시 뒤에 골목길로 접어들어야 하는데 “짬봉의 신” 이라 홍보하는 중국 음식점 옆골목 끝에 김포향교가 있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고 강화길은 향교 앞에서 우틀 해야한다
• 율원구곡중 재9곡 三峯(추소리 하류)
九曲三峯對肅然: 구곡이라 三峯을 숙연하게 대하는데 遠山西騖隔南川: 먼 산이 서쪽으로 내달려 남쪽 시내와는 막혔네 騖: 무 巖松溪柳裝新巷: 바위의 소나무 시냇가 버들 새 동네를 단장하니 果是塵寰別箇天: 과연 여기가 속세의 別天地로다 寰: 환 • 栗原九谷은 옥천군에 있다
산책로를 걷는 것이 아니고 타지역을 트레킹하려니 別天地를 걷는 것 같고 보이는 것 마다 새롭고 신기하며 길에는 역사가 숨쉬고 있다 가로수 언저리에는 은행잎이 비바람에 낙화가 되어 소복히 쌓인 샛노란색 모듬이 가슴에 닫는다 김포제일교회 앞을 통과하면서 길 건너 김포성당 알림 표식을 보고 내리막을 걸으니 걸포사거리가 나왔고 우측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서 좌틀하니 좌측은 김포대수로이고 우측은 우리병원이다 암센터를 신축중이다
병원 주자창 앞 좌우로는 詩板이 걸려 있지만 읽어 볼 여유가 없고 홍예교가 나오면 홍예교를 건너 우틀하여야 하고 걸포다목적체육관이 보인다 한 동안 직진하면 대로와 접속되고 횡단보도를 건너서 좌틀하면 걸포중앙공원이다 입구 좌측에 경기옛길 이야기판도 보인다.
• 걸포중앙공원 중앙공원으로 들어서서 중국 하택시와 자매결연에 따른 기념물이 있다 2009년 희망근로사업 경기도 특수시책으로 글로벌 공원(Global Park) 조성계획에 따라 국제화시대에 자매결연 도시와의 우호협력관계를 증진하고 세계의 다양하고 격조 높은 공원조성으로 볼거리를 제공하고자하여 세웠다
물빛자리 광장을 자니서 김포청년회의소 상징성 조형물을 지나 공원 중앙을 질러가면 어린이 놀이터 등 각종 시설이 꾸며져 있어서 가족나들이 하기 좋은 곳으로 물놀이장도 있다
중앙공원은 김포은하수숲길이고 서촌교 앞이 나오면 서촌교를 건너 바로 우측 둑길로 들어서면 표찰목에 운양역 4.4Km(⌴)
홍예교를 지나서 열방교회로 진행하고 고가 2군데 아래를 통과하여야하고 우측은 계양천 산책로로 어제 폭우로 물은 흙탕물이다 김장들을 하려고 밭에서 배추와 무를 뽑는 모습이 보인다
수문 앞에서 동행들이 기다려 합류하고 좌측으로 빠져나가려니 원 사장이 점심 식사를 하자고 하여 언덕을 오르니 30년 전통 추어탕집과 맞은편에는 경성 집이 있다 김 총무가 뭘 먹겠냐 하길래 경성집으로 들어가서 “직화쭈꾸미 볶음”을 주문했고 보약을 한컵 할가 하다기 남은 거리가 있어서 참는다
점심후 다시 트레킹을 하려니 표찰목에 목적지가 5Km 남았다고 하는데 계양천 입구에서 4.4Km라고 봤는데 한 동안 걸었어도 숫자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났다 원 사장이 스마트폰을 두들겨 3.5Km 남았다고 한다
골목을 빠져나와서 좌틀하여 조금 진행하다가 횡단보도를 건너서 다시 좌틀한다 스탬프함이 현수막에 걸려 잘 보이지 않아서 선두들이 그냥 통과하는 것을 불렀고 잠시 후 김포아트빌리지가 나왔다 김포아트빌리지 입구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장승이 반갑게 인사한다
• 김포아트빌리지 1980년대 서울 북촌과 을지로를 정비 할때에 철거물을 이곳으로 옮겨 한옥을 짓고 문화관광복합공간으로 조성하였는데 “김포 定名 一二六0 紀念碑”표석도 있는데 표석의 내용은 김포의 연표다
산 높이 73.14m의 茅淡山 정상오르는 길은 테크가 설치 되었고 정상에는 배수지와 정자로 된 전망대가 있고 학습놀이장 표찰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길은 산길로 마루금을 밟는 것으로 되어 있고 도토리 나무들의 가랑잎이 수북히 깔려 있고 종종 표찰목이 보인다
모험마당에서 데크 따라 내려와 소로를 만나면 다시 봉긋한 봉우리를 계단따라 올라야 하고 폭포마당 체력마당으로 조금 진행하면 다시 표찰목에 실개울마당이 보이고 홍예교를 건너면 홍예교 밑이 실개천으로 복개되었고 모담산 끝자락 운양로에 곁에 인공폭포가 있다 운양역은 우틀로 900m이고 운양역푸르지오 아파트 앞으로 진행된다
• 모담산둘레길(4.2km) 하늘빛마을-전통마당-모담산팔각정전망대-잔디마당-구름다리-모담산공원관리사무소-한강로사거리-금빛수로5교-금빛수로6교-금빛정원-청송교-청송마을
14시24분에 트레킹을 접으니 점심시간 포함 4시간을 걸었으니 행복한 하루였다 운양역에서 골드라인 타고 김포공항역에서 공항철도로 환승하고 집에 도착히나 16시도 안 되었다 이런 일은 드믄 일로 할멈이 반긴다 다음 3코스는 17일 목요일에 운양역 4번 출구에서 10시에 만나자고 언약을 하였다
• 投金瀨 고려 공민왕 때 형제가 길을 가다가 황금 두 덩어리를 얻어서 나누어 가졌다.陽川江(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공암 진 근처)에 이르러 형제가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별안간 아우가 금 덩어리를 강물에 던졌다.
형이 그 이유를 물으니 아우는 “내가 평소에는 형을 사랑하였으나, 지금 금 덩어리를 나누고 보니 형이 미워 보입니다. 따라서, 이 물건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라 차라리 이것을 강물에 던지고 잊어버리려고 그랬습니다.”고 대답하였다.
형도 “네 말이 과연 옳구나.” 하며 역시 금 덩어리를 강물에 던졌는데, 그 이후 이 강을 投金瀨라고 부르게 되었다(옮김)
• 중봉 조헌의 詩
濯纓先生祠院
百年遺事問悠悠: 백 년 전의 일 묻기가 아득한데 綠竹蒼松繞故丘: 푸른 대나무 푸른 솔 언덕을 덮었네 絶學要須開日月: 끊긴 학문 해와 달이 열리기를 기다려야 할지니 微言非是續陽秋: 성인의 말씀 옳고 그름이 春秋를 이음이라 京生只爲劉哀惜: 京生은 다만 한나라가 쇄함을 애석해 하는데 石氏寧思黨禍謀: 石氏는 어찌 黨禍를 꾀하기 생각하는가 萬古험人眞戱劇: 만고의 간교한 인간들 참으로 장난이 심한데 誦詩懷古淚先流: 시를 읽으며 옛 생각에 눈물이 먼저 흐른다
또 官罷無歸住管山: 벼슬을 떠나 돌아가지 않고 관산(옥천)에 머무르니 鄕關迢遰道途艱: 고향땅 아득히 멀어 가는 길이 험난하네 西亭一過無消息: 서정을 한 번 지나고 소식이 없으니 想認吾耕畿縣間: 내가 경기도 고을 사이에서 농사짓는 줄 아셨으리
樂學拾零 滄浪에 낚시 넣고 釣臺에 앉았으니 落照淸江에 빗소리 더욱 좋아 柳枝에 玉鱗을 꿰어들고 杏花村을 찾으리
平沙에 落雁하고 江村에 日暮로다 漁舡더 도라들고 白鷗 잠든사이 뵌 배에 달 시러 가지고 江亭으로 오노라
금릉 옛길
강화길 2코스로 풍무역에서 운양역까지 12Km
새장터공원에서 승가대 고개를 넘으면
실낙원 묘지들이 있고
章陵은 세계문화유산으로 仁祖의 아버지 정원군과 어머니 인헌왕후의 묘
김포시청 안에는 선정비 모듬이 있고
걸포중안공원은 걸포은하수숲길
서촌교 건너 우틀하면 계양천이 흐르고
김포아트빌리지는 한옥마을
73.14m의 茅淡山은 숲길과 둘레길 있어
운양동 민초들은 산책 등산 운동을 즐기고
김포시는 변했고 서울이 탐내는 곳이다 2022년11월13일 일요일 흐림
重峯 趙憲
池塘에 비 뿌리고 楊柳에 내 끼인 제 沙工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였난고. 夕陽에 무심한 갈며기난 오락가락 하노매.
1544년 김포시 감정동 492번지에서 태어났고, 묘(1592)는 충북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에 있고 충북 기념물 제14호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고
義兵將으로 임진왜란을 예견했고 금산전투에서 700명의 의병과 殉國하니 금산군에 700義塚 있고
옥천군 二止堂에서 장령산 바라보면서 후학들을 양성하며
栗原九曲을 노래를 읋었고
延津江上追陪日: 延津江 가에서 따르며 모시던 날 矗石樓中獨坐時: 촉석루 안에서 홀로 앉아 있을 때 十載風霜愁幾許: 10년 바람 서리 시름은 얼마던가 令人憶者鬢成絲: 옛 추억에 귀밑머리 실같이 세었네
• 칠백의총(사적 제105호) 옥천에서 의병을 모아 왜적을 공격하는데 앞장섰으며,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군僧軍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이어 금산 금성면 의총리에서 의병장으로 700명의 군사로 수만의 왜적과 싸우다 전원 전사하였다. 그 후 선생의 제자들이 700의사들의 유해를 거두어 한곳에 합장하고 칠백의총이라 하였다. 2022년11월13일 일요일 흐림-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