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륵사와 여주8경
[신륵사(神勒寺)는 봉미산 기슭에 위치한 여주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오랜 역사와 웅장한 규모,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자 경기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사찰은 산속에 짓는 경우가 많은데 보기 드물게 남한강이 바라보이는 강변에 세워졌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기 나옹선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조선 성종 3년(1472)에는 세종대왕릉인 영릉의 원찰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가 원찰로서의 의미가 약해진 뒤 다시 신륵사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벽돌로 쌓은 다층전탑이 있어 벽절로 불리기도 했다.
경내에는 보물 8점, 유형문화재 4점, 문화재자료 4점 등 다수의 문화재가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자 지공, 나옹, 무학 3화상의 영정을 모셔놓은 [조사당]과 극락보전 앞 흰 대리석을 재료로 사용한 [다층석탑], 신륵사 동남쪽 강가 동산 위에 우뚝 세워진 현존하는 유일의 고려전탑인 [다층전탑], 고려 말의 승려 보제존자 나옹의 묘탑과 영정을 모신 진당(眞堂)을 조성한 내력을 적은 비인 [보제존자 석종비] 등이 있다.
신륵사는 수많은 문화재만큼이나 사찰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품고 있어 구석구석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여주시에서는 신륵사에 문화관광해설사를 배치해 방문객 편의를 돕고 있으므로 여주시 종합관광안내소에 전화상담 후 일정을 조율하여 방문하면 좋다.
여주IC, 서여주IC에서 차량으로 약 13분 소요된다. 신륵사 주변은 국민관광지로 개발되어 인근에 맛집이 많고 국내 최대 규모의 도자기 전문 쇼핑몰이 있는 여주도자세상, 황포돛배 유람선 등과도 가깝다.]
신륵사 일주문
신륵사 템플스테이
아띠 다원
신륵사 불이문
[불이문~세심정] 구간
탐방로 도중의
누각
세심정과
그 뒤로 보이는 범종각
신륵사
보호수 은행나무
보호수 은행나무에 관한
안내문
구룡루
신륵사 다층전탑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驪州 神勒寺 多層塼塔)
보물 제226호(1963년 1월 21일 지정)
수량 1기
시대 고려시대
관리 신륵사
주소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천송동, 신륵사)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驪州 神勒寺 多層塼塔)은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다층전탑이다. 다른 명칭으로 벽탑, 나옹탑, 동대탑이 있다. 현존 유일한 고려시대 전탑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26호로 지정되었다.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높이는 약 9.4m이다.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이 전탑은 모든 형태가 전통의 전탑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어, 중국으로부터 전래한 새로운 양식을 따라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에 사용된 장대석 중 최하단의 중간 돌과 제2단의 아래 돌은 다른 부재보다 높은 돌을 사용했다.
신라시대의 전탑이 거의 간격을 두지 않고 벽돌을 쌓은 데 비하여, 이 전탑은 벽돌 사이를 넓게 떼어서 면토를 바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탑의 건립 연대
탑의 북쪽에 수리할 때 세운 '신륵사동대탑수리비'가 존재한다.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탑을 해체하고 수리하여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 내용
인근에 위치한 '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는 다층전탑의 수리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이 비석의 내용을 보면, 전탑의 유래와 구성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다층 전탑은 '나옹탑'이라고 불리었으며, 이는 전탑과 나옹 선사와 관련이 있음을 암시. 나옹 선사는 5월 15일에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신륵사의 연혁을 기록한 탑지가 봉안되어 있다. 기단 하부에 사리를 봉안했다.
이 전탑은 건립 이래 3차례에 걸쳐 수리되었다.
이 전탑의 정식 명칭은 원래 '신륵사 동대탑(神勒寺 東臺塔)'이었다.
탑의 지정학적 위치와 의의
이 탑은 나옹 선사의 다비식 이후에 사리를 안치하기 위한 구조물로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전탑의 건립 위치로서 바로 아래에 한강이 굽어보이는 암석 위를 택한 것은 신라시대 이래 고려시대에 걸쳐 유행하던 특수한 점지 경향의 유풍이라고 할 수 있다.]
신륵사 다층전탑에 관한
안내문
신륵사 다층전탑
강월헌
신륵사 대장각기비
신륵사 대장각기비에 관한
안내문
강월헌
구룡루에서 바라본
심검당
구룡루에서 바라본
극락보전
구룡루에서 바라본
적묵당
신륵사 다층석탑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驪州 神勒寺 多層石塔)은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에 있는 다층석탑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올려져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 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돌의 재질, 조각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 다층석탑에 관한
안내문
극락보전의 내부 모습
향나무(좌)와 조사당(우)
조사당
[여주 신륵사 조사당(驪州 神勒寺 祖師堂)은 경기도 여주시 천송동, 신륵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있는 조선시대의 절로, 원래는 신라시대에 지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조사당은 절에서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건물로, 신륵사 조사당에는 불단 뒷벽 중앙에 지공을, 그 좌우에는 무학과 나옹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조선 전기 예종 때 지은 것으로 보이며, 낮은 기단 위에 앞면 1칸·옆면 2칸으로 세웠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러한 구조를 다포 양식이라 한다. 앞면은 6짝의 문을 달아 모두 개방할 수 있게 하고, 옆면은 앞 1칸만 문을 달아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조선 전기의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규모는 작지만 균형이 잘 잡힌 아담한 건물이다.]
명부전
명부전에 관한
안내문
봉송각
봉송각에 관한
안내문
명부전 앞에서 바라본
조사당
삼성각
삼성각에 관한
안내문
신륵사 조사당의
내부 모습
신륵사 조사당에 관한
안내문
조사당에 보존되어 있는
신륵사 삼화상진영에 관한
안내문
[3화상은
중앙의 지공화상,
그 오른쪽의 나옹화상,
그리고 왼쪽의 무학대사이다.]
[나옹(懶翁) (1320년-1376년)
목차
1. 개요
2. 생애
3. 관련 문서
1. 개요
고려 말기의 선승(禪僧). 공민왕(恭愍王)의 두번째 왕사였다. 고려 말의 선풍(禪風)을 진작시킨 인물로 손꼽히며 지공(指空) · 무학(無學)과 함께 고려 말 3대 고승으로 손꼽힌다.
2. 생애
나옹은 충숙왕 7년(1320)에 태어났다. 나옹의 속성은 아(牙), 속명은 원혜(元惠)이다. 아버지는 고려의 하급 관료로, 나옹 또한 어린 시절에는 부유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게 살았던 듯하다. 승려가 된 뒤 사용한 법명은 혜근(惠勤)이고 법호가 나옹(懶翁)인데, 흔히 '나옹화상' 또는 '나옹선사'란 호칭으로 알려졌다.
나옹이 아직 7살이던 충숙왕 13년(1326) 3월에 인도 승려 지공(指空, 1300-63)이 원나라를 거쳐 고려로 왔는데, 회암사를 보고는 "산수(山水)의 형세가 인도의 날란다 사원과 비슷하구나!" 하며 중창했다고 한다. 지공은 당시 고려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어서 부처나 다름없는 고승으로 추앙받았다. 지공은 회암사뿐만 아니라 법기보살의 성지로 알려진 금강산을 참배하고 그 외에도 고려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임금부터 백성들까지 온갖 사람들이 몰려와 그의 설법을 듣고 무생계(無生戒)를 받았다. 지공은 고려에서 2년 6개월을 보내고는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는데, 나옹 또한 지공에게서 무생계를 받았다.
나옹은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21살이 되는 충혜왕 복위 1년(1340)에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에 있는 요연선사(了然禪師)의 문하에서 출가하였다. 충목왕 즉위년(1344, 25세)에 양주의 회암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나옹은 고려 불교계에서 크게 추앙받은 지공대사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충목왕 3년(1347, 28세)에 원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지공은 연도(오늘날 북경)의 법원사(法源寺)에 있었는데, 나옹은 지공을 찾아가 그의 문하가 되어 가르침을 받았다. 나옹은 지공의 제자가 되었지만 법원사에만 머물지 않고 원나라를 돌아다니다가 중국의 다른 고승들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스승은 분명 지공이었다.
나옹이 원나라에 머물던 시절에 자초(自超)라는 승려를 만나 제자로 거두었는데, 자초가 바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친구이자 조선왕조의 유일한 왕사가 된 무학이었다. 무학은 지공과도 만나서 다시 그 문하에 들어갔다고 하므로, 무학의 사승관계가 좀 꼬였다. 여말선초 불교계에서는 지공과 나옹의 영향력이 너무나 컸기에, 무학은 스스로를 지공과 나옹의 법맥을 이은 자로 자신을 내세웠다.
1356년(37세)에 원나라 혜종이 나옹을 불러 광제선사(廣濟禪寺)의 주지를 맡겼다고 하므로, 당시 원나라 불교계에서도 나옹에게 명성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나옹은 얼마 안 있어 주지 직을 내려놓았다. 무학은 이 무렵에 고려로 돌아갔고, 나옹 또한 스승 지공과 상담한 뒤 1358년(39세)에 귀국하였다. 귀국하기 전에 스승 지공은 나옹에게 회암사에서 불법을 일으키라는 유지를 남겼다. 공민왕 9년(1359)에 오대산에 들어갔다는데, 이듬해(1361)에 공민왕이 나옹을 불러 법문을 듣고 황해도의 신광사(神光寺) 주지로 임명했다.
그가 주지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홍건적의 2차 침입이 일어났다.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할 정도로 고려군이 크게 몰렸는데, 나옹은 신광사에 계속 머무르며 절을 불태우려는 홍건적 무리들을 막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절을 지키려는 나옹의 태도에서 고승의 면이 보였는지, 홍건적들도 차마 신광사를 불태우거나 나옹을 해치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후 고려군이 홍건적을 몰아내자 공민왕도 수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런 행적 덕분인지 나옹은 고려에서 고승으로 더욱 이름을 날렸다. 그는 2년간 신광사 주지로 있다가 주지 직을 내려놓고 공민왕 18년(1369, 50세)에는 다시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공민왕 19년(1370, 51세)에는 원나라에서 입적한 지공의 사리가 고려에 이운되었다. 나옹은 이를 계기로 회암사에 지공의 부도탑을 세우고 회암사를 중창하고자 하였다. 공민왕 20년(1371)에는 고려의 왕사로 임명되었고 공민왕으로부터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법호를 받았다.
나옹은 우왕 2년(1376, 57세)에 드디어 회암사 중창공사를 끝내고 낙성식을 열었으나 사대부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이런 비난 때문에 나옹은 유배를 떠났는데 유배길에 병이 나서 오늘날 여주의 신륵사(神勒寺)에 도착한 뒤 입적하였다. 우왕은 나옹에게 선각(禪覺)이라는 시호를 추숭하였다.
여말부터 조선 조에 이르기까지 불교계는 지공과 나옹을 기꺼이 조사(祖師)라고 여겼고, 여기에 무학 또한 조사로 숭앙받았다. 지공과 나옹과 무학을 모두 일컬어 3화상(三和尙)이라고 불렀는데, 특히 16세기 말, 임진왜란 무렵을 즈음하여 3화상(특히 무학)이 민간신앙이나 불교계에서 더 부각되었다. 오늘날 불교의례에서도 3화상을 '증명법사' 역할로 청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나옹은 우리나라의 여러 불교 전설에서, 비록 원효나 도선만큼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신이한 일을 행하는 고승으로 언급되곤 한다. 또한 나옹의 어린 시절을 과장하여 아버지가 관가에 빚을 지고 도주했고 어머니가 혼자 나옹을 낳고는 버렸더니 까치가 날아와 날개로 아기 나옹을 덮어 주었다거나 하는 전설도 전한다. 역사적 인물 나옹을 모르더라도 불교 전설을 많이 아는 사람이라면 '나옹화상'이란 호칭이 친숙해질 정도. 역사책보다는 우리나라의 불교 전설에서 나옹화상이란 이름을 접한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조사당에 보존되어 있는
신륵사 건륭삼십팔년명 동종에 관한
안내문
(좌로부터)
보제존자석종,
보제존자석종비,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보제존자석종,
보제존자석종비,
그리고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에 관한
안내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은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 사찰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종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28호로 지정되었다.
신륵사 뒷편에 모셔져 있는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 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그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이 탑을 세워 두었다.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碑)는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 사찰에 있는 고려시대의 비석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는 고려 말의 승려 보제존자 나옹의 묘탑과 영정을 모신 진당(眞堂)을 조성한 내력을 적은 비다.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말년에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이 절 북쪽 언덕에 종모양의 부도를 세워 그의 사리를 안치라고 이를 계기로 그의 초상을 모실 진당을 짓는 등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다. 비문은 이색(李穡)과 서예가인 한수(韓脩)가 짓고 썼는데 단정한 필치가 돋보인다. 뒷면에는 건립에 참여한 제자와 시주자의 명단, 중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비는 2단의 지대석 위에 연꽃 무늬를 새긴 비좌를 얹어 비몸을 세웠으며 비몸 양옆에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지붕 모양으로 된 개석(石)을 얹었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 말기에 유행한 석비형식으로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도 같은 형식이다.
특징
전체높이 212cm, 비신높이 121cm, 너비 61cm. 지대석과 3단의 장방형 대석 위에 비신을 얹었는데 상단의 대석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양옆에 화강암기둥을 세워 보강하고, 그 위에 목조건물의 공포와 기왓골을 조각한 옥개석을 얹었다. 신라시대 이래로 귀부와 이수를 갖춘 일반화된 석비 형식이 고려 말기에는 대석과 옥개석으로 변형되기 시작하는데, 바로 이 비가 고려 말기의 석비 형식을 잘 보여준다. 글씨는 자경(字徑) 2cm 정도의 해서로 넉넉한 짜임새와 부드러운 필획이면서 흐트러짐이 없다. 비신 위에는 지붕형의 개석을 덮었다. 지붕은 팔작지붕을 모방하였는데, 아주 정교하게 조각되어 기왓골, 공포, 막새기와 등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비는 1379년(고려 우왕 5년)에 세워졌다.
종비 내용
전면에는 나옹선사의 일생·사상·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고, 후면에는 진당시(眞堂詩)와 200여 명의 문도와 추모자의 이름이 해서로 쓰여있다. 특이한 것은 전면 끝부분에 비문을 지은이·글쓴이·새긴이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은이와 글쓴이는 비문 맨 앞쪽에, 건립에 관련된 인물은 후면 음기에 새겨진다. 나옹선사는 교종과 선종으로 나뉘어 싸우던 고려 말의 불교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두 종파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고, 그 사상은 조선 개창의 정신적 지주였던 무학대사에게 이어졌다.
수리 이력
신륵사의 시행된 수리 내역은 '신륵사개와모연문', '여주봉미산보은사중수사적기'등 문헌을 통하여 대체적인 것을 파악할 수는 있으나 보제존자석종비에 관한 수리 기록은 조선시대까지는 보이지 않고 1970년대에 들어서야 찾을 수 있다.
1973년 신륵사 석조문화재 보수 계획을 보면, 조잡한 보호책을 철거하고, 새로 보호책을 설치하고, 안내판을 설치하는 등의 작업이 기록되어 있다.
1979년에도 신륵사에서 석종비에 이르는 곳에 계단을 신설하는 공사를 진행하였다.
2001년 강우 등으로 노출된 기초부분을 보수하는 공사를 진행하였다.
2014년 비석 위의 균류 등을 제거하고, 균열된 곳에 충진재를 넣어 보존하였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鐘 앞 石燈)
건축 유적 문화재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 8각 석등. 보물.
보물(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천송동, 신륵사) / (지번)경기 여주시 천송동 산113-1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1.94m. 고려시대 석등 중 우아한 형태와 장식성이 돋보이는 우수한 작품이다.
석조부도(石造浮屠)의 형식을 모방한 석등으로서, 상대(上臺)·하대(下臺)의 명확한 구별이 없이 한 돌로 구성된 점은 석등이 형식화되는 시대적 추이를 짐작하게 한다.
8각의 지대석 위로 8각의 하대와 복엽복판(複葉覆瓣)의 연꽃을 매우 두껍고 도식적으로 장식하였다. 간주석(竿柱石)은 짧아져 마치 석조부도의 중대(中臺)와 유사하며, 모서리마다 난간형(欄干形)을 장식하였다. 또한, 그 사이 면에는 안상(眼象)과 중앙 화문(花文)을 낮게 부조(浮彫)하였다.
상대는 하대의 연판과 동일한 복엽앙련(複葉仰蓮)을 조각하였고, 그 위에 한단의 낮은 층급과 다시 턱이 높은 층급을 만들어 화사석(火舍石: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을 받쳤다.
이러한 기단 형식은 장흥 보림사 서 승탑(보물, 1963년 지정)의 기단과 매우 흡사하여 주목된다. 상대 위에는 화사석 받침의 표현이 전혀 없이 바로 화사석을 얹어놓았다. 이 화사석은 기타의 부재와 달리 그 재질이 화강암이 아니고, 납석제(蠟石製)인 점이 특이하다.
8면의 면마다 상부를 꽃모양으로 장식한 화창(火窓)을 뚫었고, 각 면의 모서리에는 돌출된 원형기둥과 율동적 형태의 용을 고부조(高浮彫)하였다. 화사석 상부면에도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조각하고 그 아래 기둥 사이 면마다 하강하는 듯한 비천상(飛天像)을 고부조로 장식하였다.
이와 같이 화사석을 납석제로 만들었기 때문에, 섬세한 고부조 장식을 표현하기가 더욱 용이하였다고 생각된다. 화사석 위로는 전각(轉角)이 두꺼운 옥개(屋蓋)가 올려져 있는데, 기왓골의 표현이 없이 각 면의 합각에 우동(隅棟: 옥개석의 귀마루)만을 둥글게 돌출시켰다.
옥개와 한 돌로 이루어진 상부면 중앙에는 복발형(覆鉢形) 장식을 표현하였으며, 그 위로는 2단의 층급을 이룬 뒤 연봉형의 보주(寶珠)를 올려놓았다.
전체적으로 크기가 작으면서도 각 부의 구성이 안정감 있고, 특히 화사석의 화려한 장식미가 돋보이는 작품으로서 고려 말기의 석등형식을 대변하여 주는 귀중한 예이다.
조성연대는 보제존자가 신륵사에서 입적한 뒤 부도를 세웠던 1397년에 함께 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보제존자석종에 관한
안내문
신륵사 다층전탑(좌)과 강월헌(우)
신륵사 삼층석탑
신륵사 삼층석탑에 관한
안내문
강월헌
강월헌에서 바라본
썬밸리호텔
강월헌에서 바라본
남한강
신륵사 전경
범종각
신륵사 관광단지 주차장
여주역 앞의 조형물
2024년04월14일(일요일) 경기도 여주시 [북성산&충희공 이인손 묘&세종대왕릉&효종대왕릉&대로사&영월루&여주 박물관&신륵사] 탐방기 산 : 경기도 여주시 [북성산&충희공 이인손 묘&세종대왕릉&효종대왕릉&대로사&영월루&여주 박물관&신륵사] 산행코스: [ 세종대왕릉역 1번 출구~(1.6km)~인도카레~(1.6km)~북성산 전망대~(0.2km)~북성산 정상~(2.7km)~충희공 이인손 묘~(3.5km)~세종대왕역사문화관~세종대왕릉&효종대왕릉(탐방 이동거리 2.9km)~효종대왕릉 입구 주차장~(3.4km)~대로사~(1.6km)~영월근린공원(공원 탐방 이동거리 1.0km)~(1.2km)~여주 박물관~(0.4km)~신륵황포돛배선착장~(0.4km)~여주 신륵사 일주문~(신륵사 탐방 이동거리 2.0km)~(0.7km)~GS25 여주신륵사점~(3.7km)~여주역 1번 출구 ] (총 26.9km) 일시 : 2024년04월14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여주시 세종대왕면 : 최저기온 11도C, 최고기온 29도C]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 (총 산행시간 8시간25분 소요) * 08:12~10:09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신사역으로 가서 신분당선으로 1차 환승하여 판교역으로 간 후 경강선으로 2차 환승하여 세종대왕릉역으로 이동 [1시간57분 소요] * 10:09~10:12 경기 여주시 세종대왕면 양화로 877 번지에 있는 세종대왕릉역 1번 출구로 나옴 [3분] * 10:12~10:34 경기 여주시 세종대왕면 양화로 877 번지에 있는 세종대왕릉역 1번 출구에서 탐방출발하여 경기 여주시 세종대왕면 새미실2길 40 1층에 있는 인도카레로 이동 [인도카레는 여주의 유일한 인도 커리 전문점으로서 숨은 맛집이다. 메뉴 치킨 커리(2인 이상) : 치느님과 커리가 만나다! 구성: 커리, 난1장, 밥, 샐러드 [1인당 14,000원] 포크 커리(2인 이상) : 돼지고기, 몰디브 피쉬가 들어간 스리랑카식 커리! 구성: 커리, 난1장, 밥, 샐러드 [1인당 15,000원] 버섯 커리(2인 이상) : 향긋한 버섯이 가득한 버섯 커리! 구성: 커리, 난1장, 밥, 샐러드 [1인당 14,000원] 새우 커리(2인 이상) 새우 커리(2인 이상) : 오동통한 새우가 듬뿍 들어간 커리! 구성: 커리, 난1장, 밥, 샐러드 [1인당 15,000원] 양고기 커리(2인 이상) : 양고기 향이 부담스러운 분도 즐기기 좋은 램을 넣었다! 구성: 커리, 난1장, 밥, 샐러드 [1인당 15,500원] 소고기 커리(2인 이상) : 소고기가 들어가 더욱 부드러운 커리! 구성: 커리, 난1장, 밥, 샐러드 [1인당 16,000원] 무알콜 모히토 : 직접 기른 애플 민트와 함께 시원하게 즐기는 모히또! 여름 한정 메뉴입니다. [5,000원] 알콜 모히토 : 직접 기른 애플 민트와 함께 시원하게 즐기는 모히또! 여름 한정 메뉴 [7,000원] 라씨(요거트) : 달콤한 루바브 잼이 들어간 인도 전통 요거트! 커리를 드시고 난 뒤에 먹는 디저트, 라씨 [5,000원] * 10:34~11:09 북성산 전망대로 이동 * 11:09~11:12 북성산 전망대에서 조망 풍경을 사진촬영 * 11:12~11:15 북성산(257.6m) 정상으로 이동 [여주 북성산성(驪州 北城山城) :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신지리(新池里)에 있는 산성. ‘신지리성지(新池里城址)’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조선시대의 지리지·읍지 대부분에 ‘유고성지(有古城址)’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는 폐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42년에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科)〉를 편찬할 때 조사가 이루어졌고 이후 부분적으로 조사가 진행되었다. 석축식 산성으로, 세종대왕면 신지리와 여주읍 월송리 경계의 북성산(275m) 정상부에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어 고려시대까지 이용한 성곽으로 추정된다. 남북 방향으로 긴 장타원형에 남고북저(南高北低), 동고서저(東高西低)의 형태를 하고 있다. 전체 길이는 약 1,150m이지만 대부분의 성벽은 붕괴되었고 길이 10m가 남아 있다. 현재는 성벽을 따라 군 참호가 조성되었다. 성 안에는 치성 4개소, 건물터 3개소, 우물터 1개소 등이 확인되었다. 북서쪽 평탄지에 있는 타원형 우물터는 남북길이 3.8m, 동서길이 2.7m이다.] * 11:15~11:25 북성산 정상에서 간식 [북성산 정상은 군사시설이 차지하고 있어서 출입금지 지역이다.] * 11:25~12:06 경기 여주시 세종대왕면 신지리 236-3 번지에 있는 충희공 이인손 묘로 이동 * 12:06~12:12 충희공 이인손 묘를 사진촬영 [이인손(李仁孫)의 묘(墓)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신지리에 있는 조선 세조 때의 문신 이인손(李仁孫)의 묘. 원래는 왕대리에 있었으나 영릉이 옮겨지면서 지금의 자리인 새미실마을 북쪽의 북성산 줄기로 이장하였다. 이인손(1395~1463)은 사헌부감찰·형조좌랑·대사헌 등을 역임하였고 세조의 즉위 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다. 이후 판중추부사와 우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부인 노씨(盧氏)와의 합장묘로 조성되었다. 봉분 주위로 문인석,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고석(鼓石),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고 본래부터 있던 것은 문인석 1쌍뿐이다. 문인석은 복두공복을 착용했고 긁히고 깎이어 떨어진 부분이 많다. 묘역의 오른쪽 아래에 있는 묘표는 높이 169cm이며 대리석으로 만든 비신 앞면에 피장자의 신원을 기록했다. 음기는 서거정(徐居正)이 지었으며 심하게 마모되었다. 15세기 후반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廣州) 李씨 이인손(李仁孫)의 묘(墓)가 세종대왕릉이 된 사연 ‘영녕릉(英寧陵)’ 중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세종대왕과 정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최초이며 하나의 봉분 아래 현실을 둘로 둔 형태로 조성되었다. 동쪽은 왕후의 무덤이며 서쪽 방은 왕이 살아있을 때 미리 마련한 수릉(壽陵)이다. 처음 강남구 내곡동에 위치한 헌·인릉 안 세종대왕릉을 1469년(예종 1)에 경기도 여주로 옮겨올 때 봉분 내부를 석실에서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조성하였고, 석물 중 망주석, 장명등, 석수, 석인은 단릉처럼 배치하였으나 혼유석만 2개를 설치하여 ‘합장릉’임을 나타내었다. 영릉은 조선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는 능으로, 무덤 배치는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제도를 따랐다. 봉분 둘레에는 난간석을 두르고 횡석주를 받치고 있는 동자석주(童子石柱)에 한자로 12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다. 무엇보다 세종대왕릉의 위치는,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주산인 칭성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으로 청룡과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세종대왕은 부왕인 태종의 무덤 곁에 있기를 원했고 승하 후 그의 유언에 따라 선왕이 잠들어있는 헌릉 서쪽에 묻혔었다. 그러나 최양선은 세종대왕릉을 옮기지 않으면 ‘절사손장사(후사가 끊기고 장자가 일찍 죽는다)’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문종과 단종, 의경세자(세조의 장남이며 성종의 아버지, 덕종추존)가 요절하자 적장자가 이어지지 않는 데 불안을 느낀 왕실에서는 예종 때 영릉을 지금의 여주로 옮기게 된다. ‘모란꽃봉오리 형상’의 명당과 세종대왕릉 세종대왕의 장남인 문종과 장조카 단종에 이어 제7대 왕위를 계승한 세조는 장남인 의경세자가 일찍 죽자 신숙주, 한명회, 서거정 등을 시켜 영릉의 개장을 논의케 하였다. 그러나 서거정은 “천장을 하는 것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자가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며 이장을 반대하여 옮기지 못했다. 그러나 세조가 승하한 뒤 예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영릉의 천장 문제가 거론되었고, 예종은 1468년 노사신(盧思愼, 1427~1498), 임원준(任元濬, 1423~1500),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등을 파견해 여러 지역과 지리를 답사하도록 하였다. 그중 경기도 광주와 이천을 거쳐 여주를 답사하게 된 신하들은, 산천이 수려하고 강물이 맑은 여주 북성산에 올라 풍수지리를 살폈다. 지세가 수려하고 모란꽃봉오리 형상의 명당이지만 이미 세조 때 대제학을 지낸 이계전(李季甸, 1404~1459)과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 1395~1463)의 묘가 있는 곳이라 쉽사리 결정을 하지 못했다. 다만 한양으로 돌아와 예종에게 “이계전의 무덤이 있는 곳이 자손이 번성하고 왕조가 흥할 땅이라며 왕릉을 모실 장소로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고 보고하였다. 이후 예종은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이인손의 맏아들 이극배(李克培, 1422~1495)를 불러 무덤 자리를 비워 달라는 뜻을 비쳤고, 이에 이극배는 가문과 상의한 후 무덤 자리를 내놓았다. 예종은 이에 대한 사례로 이극배를 의정부 우참찬(정2품)으로 승진시키고 세종대왕릉을 지금의 자리로 이장해 소헌왕후와 합장릉을 이루었다. 또한 이극배의 집안에서도 이장을 위해 산소를 허물고 유해를 발굴하다 보니 “이 자리에서 연을 날리어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바람에 날리어 연이 떨어지는 곳에 묘를 옮기어 모셔라”는 예언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예언서대로 연을 바람에 날리어 서쪽으로 3.927km(10리) 밖으로 떨어진 자리에 이장을 하였다. 이후 자손이 번성하여 마을 이름을 연주리로 명명하였다. ‘연이 떨어진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로 인해 ‘세종대왕릉을 여주 영릉 자리로 이장하였기에 조선왕조가 100년은 더 연장되었다’는 의미의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는 속설이 회자되었다. 영릉의 형국은 신하가 부복한 형상으로 북성산의 산세가 영릉을 향하여 북으로 달리다가 다시 한줄기 봉우리가 솟으면서 남으로 머리를 돌려 주산(主山)인 칭성산을 감싸고 끊어진 형세를 이루어 마치 꽃봉오리를 에워 싼 듯한 ‘모란반개형(牡丹半開形)’의 명당이다.] * 12:12~12:56 경기 여주시 세종대왕면 영릉로 269-10 번지에 있는 세종대왕역사문화관으로 이동 [세종대왕역사문화관(世宗大王歷史文化館) 요약 : 대한민국 경기도 여주시에 위치한 국립 역사문화관. 사적 제195호인 조선 제4대 임금 세종의 영릉과 제17대 효종의 영릉과 그들의 업적에 대한 이해를 돕는 자료를 전시한다. 설립연도 : 2017년 규모 : 연면적 11,322㎡ 관람시간 2월~5월, 9월~10월: 오전 9시~오후 6시 6월~8월: 오전 9시~오후 6시 30분 11월~1월: 오전 9시~오후 5시 30분 (관람 마감 1시간 전 입장 마감) 주요소장품 : 문헌 자료, 멀티미디어 자료 휴관일 : 매주 월요일 대한민국 경기도 여주시에 위치한 문화재청 세종대왕유적관리소 산하의 국립 역사문화관으로 2017년 설립되었다. 사적 제195호인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英陵)과 제17대 효종과 비 인선왕후의 쌍릉인 영릉(寧陵) 부근에 위치해 있다. 영릉은 당시 광주(廣州, 오늘날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했으나 1469년(예종 1)에 여주로 천장한 왕릉으로 조선시대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다. 왕릉과 왕비릉이 상하로 조영된 영릉(寧陵)은 1673년(현종 14)에 조성되었으며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 대신 난간석 기둥에 방위를 가리키는 십이지를 문자로 새겨 놓은 왕릉으로 알려져 있다. 연면적 11,322㎡ 규모의 세종대왕역사문화관은 두 영릉을 포함한 조선시대의 왕릉 및 세종과 효종의 업적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3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주요 시설 지상 1층에 위치한 상설전시실은 제1실 민족의 성군 세종대왕, 제2실 북벌의 기상 효종대왕, 그리고 제 1, 2실 사이에 위치한 제3실 세계유산 조선왕릉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실은 “하늘을 열어 백성에게 전하다”, “쉬운 문자로 백성과 소통하다”, “백성과 더불어 우리의 음악을 즐기다”의 3가지 소주제를 통해 세종 시기 과학기술 연구, 천문 관측, 한글 창제, 아악(雅樂) 정비 사업 등을 관련 유물고 다양한 멀티미디어 자료를 통해 소개한다. 제2실은 “북벌을 꿈꾸다”, “서양인이 쓴 최초의 조선 보고서”, “마지막 여정의 기록 국장도감의궤”의 3개 소주제로 이루어졌다. 효종의 청나라 볼모 시기 및 집권 이후 북벌 의지에 대한 소개, 1653년부터 1666년까지 조선에 표류한 네덜란드 상인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1630~1692)이 조선의 지리·풍토·산물·군사·교육·무역에 대한 정보를 담은 기록물인 『하멜표류기』, 외규장각의궤 중 인선왕후의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를 살펴볼 수 있다. 세계유산 조선왕릉 전시실에는 북한 소재 2기를 제외하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40기의 조선왕릉의 공간 구성 및 조성과정에 대한 이해를 돕는 멀티미디어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주요 소장품 전시된 유물 중 2011년 프랑스에서 반환된 외규장각의궤 중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의 『국장도감의궤』는 당시 국장행렬의 규모와 배치를 재구성할 수 있는 주요 유물이다. 부대시설 전시 시설 외에 카페가 마련되어 있다.] * 12:56~14:20 [세종대왕역사문화관~조선 제4대 세종과 그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봉이실합장릉인 영릉(英陵)~조선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무덤으로서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동원상하릉으로 쌍릉 형식인 영릉(寧陵)~효종대왕릉 입구 주차장]의 동선으로 탐방 [세종대왕릉 소재지 : 경기 여주시 세종대왕면 왕대리 901-3 영업시간 : 매일 09:00 - 17:30 11월~1월 / 마감 1시간 전까지 입장 전화번호 : 031-885-3123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1469년(예종1)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종목 사적 제195호(1970년 5월 27일 지정) 수량 2,009,545m2 시대 조선시대 소유 문화재청 주소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영릉로 269-50 (번도리) 좌표 북위 37° 18′ 23″ 동경 127° 36′ 35″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은 대한민국 사적 제195호로, 조선 제4대 세종과 그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능인 영릉(英陵)과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능인 영릉(寧陵)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1970년 5월 27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95호 영릉·녕릉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왕대리에 있다. 두 개의 왕릉은 700m 거리를 두고 있는데, 이를 잇는 오솔길은 짧지만 조붓한 흙길이라 정감이 있고, 숲이 아늑하고 한산해 걷기 좋다. 5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만 산책로로 개방한다. 약간의 오르막과 약간의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이라 가볍게 걸을 만하고, 이리 휘고 저리 돌며 길이 이어져 있다. 영릉(英陵)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세종과 그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봉이실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이다. 영릉(寧陵)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무덤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동원상하릉으로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특징 영릉 전시관의 여러 유물이 다른 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창덕궁 측우대(昌德宮測雨臺): 보물 제844호.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이전 앙부일구(仰釜日晷): 보물 제845호.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전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이 바로 옆에 위치한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과 음이 같아 혼동이 되어서, 효종의 영릉을 녕릉으로 읽기도 한다. 잘 단장된 영릉(英陵)과 달리 바로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릉(寧陵)은 찾는 이가 적어 비교적 조용한 편이다. 관람 안내 관람시간 3월 ~ 10월 매표 : 09:00 ~ 18:00 관람 : 09:00 ~ 18:30 11월 ~ 2월 매표 09:00 ~ 17:00 관람 : 09:00 ~ 17:30 ※휴관일: 매주 월요일 관람요금 구분 개인 단체 대인 (만 19세 이상, 만 64세 이하) 500원 400원 (10인 이상) 소인 (만 7세 이상, 만 18세 이하) 300원 200원 (10인 이상) ※ 카드결제 가능 무료관람 대상자 만6세 이하 어린이 만65세 이상 노인한복을 착용한 자 (신정·설날 및 추석연휴에 한함) 국빈 및 그 수행자 - 외교사절단 및 그 수행자 공무수행을 위하여 출입하는 자 학생인솔 등 교육활동을 위해 입장하는 초·중·고 교원(유치원교사 포함) 장애인복지법상의 장애인 국·공립기관에서 정양 중에 있는 상이군경 국가유공자 등 법령에 의하여 입장료가 면제된 자 기타 문화재청장 또는 당해 유적관리기관의 장이 인정하는 자 둘째·넷째 토요휴업일 소인(여름방학기간 7.21 ~ 8.20 / 겨울방학기간 12.21 ~ 1.31 제외) 관람소요시간 세종 영릉 - 30분 효종 영릉까지 - 1시간 30분(산책로 이용시)] [왕의 숲길이 있는 ‘여주 & 세종대왕릉’ 시사매거진 기사 입력일 : 2020.02.10. 애민정신으로 가열차게 ‘노력하는 천재임금, 세종’ [시사매거진 262호=취재 오경근 칼럼니스트 / 사진 이관우 기자] 햇살이 맑고 차가운 어느 겨울 하루, 우리시대 음유시인 정태춘이 부르는 ‘손님’을 들으며 ‘세종대왕릉(世宗大王陵)’이 위치한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를 찾아간다. ‘갑자기 누구라도 올듯하여 설레임 속에서 기다리는데, 스치는 바람결에 들려오는 외로운 나그네의 노랫소리.’ 그 음이 하도 단조롭고 간략하여 쓸쓸하게 고적감이 드는 ‘왕의 숲길’에서 애민정신으로 가열차게 ‘노력하는 천재임금, 세종’을 기려본다. 이곳은 큰 물줄기를 이루며 좌측 지척으로는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먼 원적산의 정기를 타고 산세가 용의 세력 같이 살아 꿈틀거리는 칭성산(稱城山) 허리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민족의 성군 ‘세종대왕(世宗大王)’과 혁혁한 북벌의 기상 ‘효종대왕(孝宗大王)’이 잠들어 있는 ‘영녕릉(英寧陵)’이 있다. 봄이면 울컥울컥 붉은 울음을 토해내듯 흐드러지게 피는 진달래가 아니어도, 우람하게 듬직한 백년송이 즐비하게 도열해 있어 한번쯤 걸어보고 싶게 만드는 신들의 정원 ‘왕의 숲길’이 포물선을 그리고 있다. (자료:박현주 학예사(문화재청 세종대왕유적관리소)) 근래 세종대왕의 일생과 업적을 소재로 한 영화가 두어 편 개봉되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전 2008년경에도 86부작 드라마 <대왕 세종>과 2011년 24부작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가 제작되어 방송을 종영하기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다시 2019년 송강호 주연의 영화 <나랏말싸미>와 한석규 주연의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가 제작·개봉되었다. 세종대왕의 큰 업적인 ‘한글 창제’와 ‘천문기구 창설’을 중심으로 천민 출신의 괴짜 신미스님과 기생의 아들인 장영실의 인연을 재구성·극화 하였다. 단연 세종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과 측은지심 그리고 옥석을 가려 쓸 줄 아는 인재 등용관을 엿볼 수 있었다. 민족의 성군, 세종대왕 ‘이도’는 누구?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손자이며 제4대째 왕위를 이어받은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50)은 태종 이방원과 정비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휘(살아생전 이름)는 ‘도(祹)’이고 자는 원정(元正)이다. 또한 명나라에서 준 시호는 장헌(莊憲)이고, 조선에서 올린 시호는 ‘영문예무인성명효(英文睿武仁聖明孝)’이며 묘효는 ‘세종’이다. 1397년(태조 6) 4월10일 한성부 준수방에서 ‘정안군’이라 불리던 시절 이방원과 민씨 사이에서 이제(양녕대군)와 이보(효령대군)에 이어 셋째 아들 이도(충녕대군)로 태어났다. 이후 넷째 이종(성녕대군)과 더불어 4남4녀 8남매를 이룬다. 이후 아버지 이방원이 제3대 태종으로 왕위를 계승되자 1408년(태종 8) 2월11일 이도는 충녕군에 봉해지고, 같은 해 2월16일(양력 3월22일)에는 우부대언 심온의 딸과 결혼한다. 바로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 심씨(沈氏)다. 그리고 다시 4년 후인 1412년 5월3일 충녕대군으로 진봉된다. 6년 후인 1418년(태종 18년)에는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됨에 따라 그해 6월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10일(양력 9월18일) 태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의 4대 임금으로 등극한다. 22세 약관의 나이로 즉위하여 치리하는 동안 아버지 태종이 4년간 상왕으로 생존하며 어려운 일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후 세종대왕은 1명의 정비와 9명의 비빈을 두었는데 그중 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와 5명의 비빈에게서 모두 18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낳았다. 모두 22남매다. 장남 이향은 제5대 문종이 되었고, 차남 이유(수양대군)는 조카 단종에 이어 제7대 세조임금으로 등극한다. 그리고 세종대왕의 정비인 소헌왕후는 1450년(세종 32년) 2월17일(양력 4월 8일) 여덟째아들인 이염(영응대군)의 사저 중 동쪽 별궁에서 운명한다. 이러한 세종대왕은 재위기에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국가 전반적으로 기틀이 잡힌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를 배양했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와 제도를 정비했다. <고려사(高麗史)> <속육전(續六典)> <농사직설(農事直說)>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등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을 주도했으며 훈민정음 창제, 농업과 과학기술 발전, 의약기술과 음악, 법제 정리, 공법(公法) 제정 등 많은 사업을 통해 조선의 창업을 확고히 했다. 노력하는 천재대왕, 세종의 ‘업적과 애민정신’ 세종대왕은 1420년(세종 2년) 집현전을 설치하고 황희, 맹사성, 허조 등을 등용해 중앙집권 체제를 왕권과 신권(臣權)이 조화를 이루는 중앙집권 체제를 성립했다. 이어 1436년(세종 18)에는 의정부와 6조의 관계를 정비하였고, 집현전을 왕립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최항 등의 젊은 학자를 등용해 학문진흥을 꾀했다. 1443년(세종 25) 집현전 젊은 학자들이 협력을 받아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였고, 3년간 검증 기간을 거쳐 1446년에 반포한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를 이용하여 유교경서, 의례서, 문학서, 훈민정음 관계서, 지리서, 농서, 역사서, 법률, 천문 등 여러 서적을 출간하여 출판문화의 전성기를 이룬다. 불교정책에는 전통신앙을 소멸시키지는 않고, 부분적 억불정책을 써서 난립하던 종파를 교종(敎宗)과 선종(禪宗) 2종으로 통폐합했다. 또한 사찰은 종단 각 18개 총 36사찰만 인정하고, 도성 안에서의 경행(經行)이나 연등행사 등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말년에 궁중에 내불당을 짓고 승과제도와 경행을 인정하는 등 왕실 불교로 장려하였다. 음악 분야에서는 1425년 관습도감을 설치하고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雅樂)을 정리하게 하여 음악을 장려하였다. 악기도감을 설치하여 많은 아악기들이 제조되었고, 편경과 편종을 대량 생산하게 되었다. 또한 천문 역법 기상 분야에서는 1442년 이천, 장영실이 측우기(測雨器)를 제작하여 농사에 도움을 주었으며 궁중에 과학관인 흠경각(欽敬閣)을 설치해 과학기구를 비치하게 하였다. 천체 관측기구로는 혼천의(渾天儀), 해시계(앙부일구), 물시계(자격루) 등이 발명 제작되었다. 나아가 이순지 등이 천문, 역법, 의상 등에 관한 지식을 종합한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펴냈다. 또한 경제와 사회 분야에서는 1436년 공법상정소를 설치하고 각도의 토지를 3등급으로 나누어 세율을 정했다. 1443년 이를 보강하기 위해 전제상정소를 설치하고 풍작과 흉작에 따라 연분 9등법과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전분 6등법에 의한 수등이척법으로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했다. 전국의 토지를 20년마다 측량하여 양안을 작성케 하는 반면 금속화폐 ‘조선통보’를 주조하였다. 그리고 의창, 의료제도, 금부삼복법을 제정하였고, 노비에 대한 지위 등을 개선하여 사형을 금하였다. 이렇게 세종대왕은 정치, 경제, 국방, 문화 등 다방면에 훌륭한 업적을 남겨 우리 민족을 수준 높게 만들었으며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다졌다. 적절한 억불숭유 정책과 그 외 단군사당 봉사, 삼국의 시조묘 제사 등 민족의 역사와 뿌리를 소중히 여기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아울러 백성을 아끼는 애민정신으로, 백성의 소리를 듣는 데 온 마음으로 전심전력 했다. 여주의 지리적 이점과 왕릉(영릉)이 선택된 배경 ‘영녕릉(英寧陵)’ 중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세종대왕과 정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최초이며 하나의 봉분 아래 현실을 둘로 둔 형태로 조성되었다. 동쪽은 왕후의 무덤이며 서쪽 방은 왕이 살아있을 때 미리 마련한 수릉(壽陵)이다. 처음 강남구 내곡동에 위치한 헌·인릉 안 세종대왕릉을 1469년(예종 1)에 경기도 여주로 옮겨올 때 봉분 내부를 석실에서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조성하였고, 석물 중 망주석, 장명등, 석수, 석인은 단릉처럼 배치하였으나 혼유석만 2개를 설치하여 ‘합장릉’임을 나타내었다. 영릉은 조선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는 능으로, 무덤 배치는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제도를 따랐다. 봉분 둘레에는 난간석을 두르고 횡석주를 받치고 있는 동자석주(童子石柱)에 한자로 12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다. 무엇보다 세종대왕릉의 위치는,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주산인 칭성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으로 청룡과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세종대왕은 부왕인 태종의 무덤 곁에 있기를 원했고 승하 후 그의 유언에 따라 선왕이 잠들어있는 헌릉 서쪽에 묻혔었다. 그러나 최양선은 세종대왕릉을 옮기지 않으면 ‘절사손장사(후사가 끊기고 장자가 일찍 죽는다)’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문종과 단종, 의경세자(세조의 장남이며 성종의 아버지, 덕종추존)가 요절하자 적장자가 이어지지 않는 데 불안을 느낀 왕실에서는 예종 때 영릉을 지금의 여주로 옮기게 된다. ‘모란꽃봉오리 형상’의 명당과 세종대왕릉 세종대왕의 장남인 문종과 장조카 단종에 이어 제7대 왕위를 계승한 세조는 장남인 의경세자가 일찍 죽자 신숙주, 한명회, 서거정 등을 시켜 영릉의 개장을 논의케 하였다. 그러나 서거정은 “천장을 하는 것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자가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며 이장을 반대하여 옮기지 못했다. 그러나 세조가 승하한 뒤 예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영릉의 천장 문제가 거론되었고, 예종은 1468년 노사신(盧思愼, 1427~1498), 임원준(任元濬, 1423~1500), 서거정(徐居正, 1420~1488) 등을 파견해 여러 지역과 지리를 답사하도록 하였다. 그중 경기도 광주와 이천을 거쳐 여주를 답사하게 된 신하들은, 산천이 수려하고 강물이 맑은 여주 북성산에 올라 풍수지리를 살폈다. 지세가 수려하고 모란꽃봉오리 형상의 명당이지만 이미 세조 때 대제학을 지낸 이계전(李季甸, 1404~1459)과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 1395~1463)의 묘가 있는 곳이라 쉽사리 결정을 하지 못했다. 다만 한양으로 돌아와 예종에게 “이계전의 무덤이 있는 곳이 자손이 번성하고 왕조가 흥할 땅이라며 왕릉을 모실 장소로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고 보고하였다. 이후 예종은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이인손의 맏아들 이극배(李克培, 1422~1495)를 불러 무덤 자리를 비워 달라는 뜻을 비쳤고, 이에 이극배는 가문과 상의한 후 무덤 자리를 내놓았다. 예종은 이에 대한 사례로 이극배를 의정부 우참찬(정2품)으로 승진시키고 세종대왕릉을 지금의 자리로 이장해 소헌왕후와 합장릉을 이루었다. 또한 이극배의 집안에서도 이장을 위해 산소를 허물고 유해를 발굴하다보니 “이 자리에서 연을 날리어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바람에 날리어 연이 떨어지는 곳에 묘를 옮기어 모셔라”는 예언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예언서대로 연을 바람에 날리어 서쪽으로 3.927km(10리) 밖으로 떨어진 자리에 이장을 하였다. 이후 자손이 번성하여 마을 이름을 연주리로 명명하였다. ‘연이 떨어진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로 인해 ‘세종대왕릉을 여주 영릉 자리로 이장하였기에 조선왕조가 100년은 더 연장되었다’는 의미의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는 속설이 회자되었다. 영릉의 형국은 신하가 부복한 형상으로 북성산의 산세가 영릉을 향하여 북으로 달리다가 다시 한줄기 봉우리가 솟으면서 남으로 머리를 돌려 주산(主山)인 칭성산을 감싸고 끊어진 형세를 이루어 마치 꽃봉오리를 에워 싼 듯한 ‘모란반개형(牡丹半開形)’의 명당이다. 여흥 민씨의 본적지, 여주의 한국사 여주(驪州市)는 한반도 중앙부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강원도 원주와 충청북도 충주, 남서쪽으로는 이천, 서쪽으로는 광주, 북쪽으로는 양평군과 접경을 이룬다. 무엇보다 여주를 관통하는 남한강의 흐름은 수운에 유리하여 미곡집산지로 발전시켰다. 또한 수도에 있는 정궁이자 법궁인 경복궁과 여주를 잇는 물길이 되어 한양 100리길을 앞당겼다. 과거 백제 22년(온조왕 40)부터 214년(구수왕 1)까지는 술천성이 있던 군사적 요충지였던 여주는 장수왕 때 고구려의 영토에 속하여 골내근현이 되었다가 신라 진흥왕 때에는 잠시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그리고 660년(무열왕 7) 천녕군(川寧郡)에 술천성을 축조하였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는 황효라 불렸고 기천의 영현으로 되었다. 고려 태조 때 황려현으로 개칭되었다. 1018년(현종 9) 강원도 원주에 이속되었다가 1031년에 다시 경기도로 귀속되었다. 고종 때에 영의로, 충렬왕 때 여흥으로 개명되었다가 다시 군으로 승격되었다. 우왕 때 군에서 부로 승격되어 황려라 불리다가 공양왕 때 다시 여흥군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조선 제3대 태종의 정비인 원경왕후의 내향(본적지)으로 다시 부로 승격되었고 1413년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예종 때 세종대왕의 영릉이 이장되면서 천령현이 폐지되어 ‘여흥’에 병합되면서 목으로 승격되었다. 원경왕후가 ‘여흥 민씨’이고, 고종의 정비인 명성황후가 ‘여흥 민씨’다. 바로 본관 여흥이 여주이다. 1914년 원주군의 지내면과 서면이 편입되어 강천면이 되었고, 주내면이 여주면으로 개칭되었다. 1941년 10월 1일 여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오늘날 ‘여주’라는 지명은 고려시대 황려(黃驪)라는 지명의 누루 황(黃)을 순우리말 ‘느루(늘은, 늘어난)’라는 뜻으로 보고, 검은말 려(驪)의 ‘검’을 순우리말 ‘곰(크다, 미련하다, 웅장한)’에서 파생된 단어(감, 검, 굼, 금)로 보아 “늘은 큰 마을(확장된 큰 고을)”이 아닌가 추측이 된다고 여주문화원에서 발간한 <여주고을 땅 이름의 유래>에서 밝히고 있다. 이 외에 여주에는 세종천문대, 세종국악당, 세종전, 신륵사지, 어우실지, 명성황후 생가와 기념관, 명성황후 조각공원, 목아박물관, 서봉서원, 세계생활도자관, 여주도요단지, 여주박물관, 여주시립폰박물관, 한얼테마박물관, 해여림식물원 등이 있어 두루두루 가족과 함께 관람할 수 있다.] [효종(孝宗) 조선 제17대 왕.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 대군.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8년간 볼모로 소현 세자와 함께 잡혀갔다가 돌아와 소현 세자가 3개월만에 죽자 봉림 대군이 인조 다음 왕인 효종이 되었다. 효종은 왕위에 오른 후 청나라의 볼모 생활로 인한 원한을 풀기 위해 북벌론(北伐論)을 주장하였다. 효종 때 집권한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 서인은 북벌론을 지지하였다. 북벌을 실시하기 위해 어영청을 강화시켰으나 북벌론을 실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서인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효종 때 청의 요청으로 나선 정벌에 두 번씩이나 출병하였다.] * 14:20~15:00 경기 여주시 청심로 113 번지에 있는 대로사(大老祠)로 이동 [강한사(江漢祠) 별칭 : 대로사(大老祠) 대한민국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20호(1972년 5월 4일 지정) 수량 1동 시대 조선시대 주소 경기도 여주시 여주읍 청심로 113 (하리) 좌표 북위 37° 17′ 57″ 동경 127° 37′ 58″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여주 강한사(驪州 江漢祠)는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사당이다. 송시열이 배향되어 있다. 1972년 5월 4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정치가인 우암 송시열의 뜻을 기리고 제사 지내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송시열은 일생을 주자학 연구에 몰두한 대선비로 생원시에 합격하여 영의정까지 지냈다. 정조 9년(1785)에 왕이 김양행에게 사당을 짓게 하고 송시열에 대한 존칭인 '대로(大老)'의 명칭을 붙여 사당 이름을 대로사라고 하였다. 그 뒤 고종 10년(1873) 10월에 강한사라 개칭하였다. 건물은 강당과 사묘, 관리인이 거주하는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교적 간단한 규모이나 배치가 특이하다. 출입문인 장인문이 서쪽으로 나있으며 사묘 또한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것은 영릉(효종의 릉)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철거할 때 송시열을 모시던 44개의 서원이 모두 헐렸으나 오직 대로사만이 강한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남게 되었다.] * 15:00~15:22 경기 여주시 주내로 13 번지에 있는 영월루(迎月樓)로 이동 [영월루(迎月樓)는 신륵사 국민관광지 맞은 편에 위치한 영월근린공원 내에 있는 2층 누각이다. 영월루에서는 남한강의 푸른 물줄기와 멀리 양섬, 강 건너 신륵사의 아름다운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많은 사랑을 받는 곳이다.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영월루의 건축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건물 구조로 볼 때 18세기 말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지붕을 한 2층 누각으로 낮은 기단과 좌우로 기다란 몸체와 치켜서 들린 지붕의 비례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원래 여주군청의 정문이었는데 1925년경 군청 이전 때 당시의 군수였던 신헌수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한편 이곳은 예로부터 당대의 묵객들이 찾아와 시와 풍류를 즐겼던 명소라 한다. 영월루 바로 아래에는 커다란 바위 절벽이 있는데, 바위에는 마암(馬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신라 경덕왕 때 마암 아래 강물에서 황룡마와 여룡마가 나타나 고을 이름을 황려현으로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때문에 이 바위는 마암이 되었다. 여주가 본관으로 여주에서 탄생한 대문호 이규보의 시 중에도 [두 마리의 말이 기이하게 물가에서 나왔다 하여 고을 이름이 황려라네]라는 내용이 있다. 영월근린공원 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탑인 여주 하리 삼층석탑과 다수의 선정비, 불망비, 구휼비와 현충탑, 그리스 참전비 등이 있고 분수와 운동시설, 벤치 등의 휴게시설이 있어 공원을 둘러보며 쉬어가기 좋다.] [여주 창리 삼층석탑(驪州 倉里 三層石塔)은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91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창리지역 과수원 안의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영월루근린공원으로 옮긴 것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형태이나 그 느낌이 독특하다. 아래기단의 4면에는 안상(眼象)이 2개씩 새겨져 있는데, 움푹한 무늬의 바닥선이 꽃모양처럼 솟아올라 있어 당시의 조각기법이 잘 드러나 있다. 기단을 마감하는 맨윗돌에는 엎드린 연꽃 모양의 조각을 둘러 놓았는데, 보기 드문 모습이다. 탑신은 독특한 수법으로 돌을 올려놓고 있다. 즉 1층의 몸돌만 하나의 돌을 사용하였고, 이후 지붕돌부터는 윗층의 몸돌과 하나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모자 형태의 돌 3개를 얹어놓은 듯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3단이며, 추녀는 매우 두껍고 귀퉁이 끝의 들림도 희미하다. 각 부분의 재료가 두툼하여 전체적으로 높아 보이며, 아래기단의 안상이나 3단의 지붕돌 밑면받침 등에서 고려시대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조각수법도 엉성하고 몸돌과 지붕돌을 각 하나의 돌로 쌓는 등 간략한 모습들도 여기저기 보이고 있어 고려 중기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여주 하리 삼층석탑(驪州 下里 三層石塔) 보물 제92호(1963년 1월 21일 지정) 수량 1기 시대 고려시대 소유 국유 주소 경기도 여주시 창동 132 여주 하리 삼층석탑(驪州 下里 三層石塔)은 경기도 여주시 영월루근린공원 내에 있는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92호로 지정되었다. 여주 창리 삼층석탑과 함께 원래는 서로 다른 지역에 있던 석탑이었으나 1958년 현재의 영월근린공원으로 옮겨졌다. 원래는 하리지역의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창리의 3층석탑과 함께 현재의 터로 옮긴 것으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은 4면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기고, 그 윗돌 중앙에 1층 몸돌을 괴기 위한 2단의 테두리 조각을 둘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의 각 면 모서리마다 얕은 기둥 형태의 조각이 나타나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으로,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쪽 귀에서 위로 약하게 솟아있다. 전체적으로 돌을 짜서 올리는 수법의 규칙성을 보이고 온화한 비율감이 느껴져 고려 전기보다는 중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탑을 옮겨 세울 당시, 1층 몸돌에서 독특한 모습의 사리홈이 발견되어 흥미를 끌고 있다. 즉, 몸돌 윗면의 중앙에 높이 3cm의 얇은 띠가 둘러져 있고 그 안으로 2개의 구멍이 파여 있는데, 이와 닿게 되는 지붕돌의 밑면에도 이를 배려한 듯 홈이 깊게 파여져 있다. 이는 몸돌의 윗면에만 깊은 홈을 두어 사리를 담아두는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 정반대의 형태를 하고 있어 특이하다. 현지 안내문 이 석탑은 본래 여주읍 하리지역의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창리의 삼층석탑 (보물 제91호)과 함께 현재의 터로 옮긴 것으로, 1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은 4면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기고, 그 윗돌 중앙에 1층 몸돌을 괴기 위한 2단의 테두리 조각을둘렀다. 탑신은 몸돌과 기둥돌이 각각 하나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의 각 면 모서리마다 얇은 기둥 형태의 조각이 나타나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으로,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쪽 귀에서 위로 약하게 솟아있다. 전체적으로 돌을 짜서 올리는 수법의 규칙성을 보이고 온화한 비율감이 느껴져 고려 전기보다는 중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탑을 옮겨 세울 당시, 1층 몸돌에서 독특한 모습의 사리홈이 발견되어 흥미를 끌고 있다. 즉 몸돌 뒷면의 중앙에 3cm의 얇은 띠가 둘러져 있고 그 안으로 2개의 구멍이 파여있는데, 이와 닿게 되는 지붕돌의 밑면에도 이를 배려한 듯 홈이 깊게 파여져 있다. 이는 몸돌의 윗면에만 깊은 홈을 두어 사리를 담아두는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 정반대의 형태를 하고 있어 특이하다.] 15:22~15:44 여주 마암 각자(驪州 馬巖 刻字)와 영월루와 여주 창리 삼층석탑(驪州 倉里 三層石塔)과 여주 하리 삼층석탑(驪州 下里 三層石塔)을 사진촬영 [여주 마암 각자(驪州 馬巖 刻字) 경기도 여주시의 바위에 새겨진 글씨. 신륵사로 가는 길의 언덕 위 절벽 바위에 ‘馬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조선 후기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바위 위에는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인 임원준(任元濬)이 지은 영월루(迎月樓:경기문화재자료 37)가 있다. 평평한 바위에 크게 세로로 새겨져 있고, 그 위쪽과 왼쪽에 각각 ‘이인응(李寅應)’ ‘…시월(十月) 일각(日刻)’라는 글씨가 있다. 오른쪽에 있는 다른 바위에는 ‘신현태(申鉉泰)’이라는 글씨가 있다. 여주의 대표적 성씨인 여흥민씨(驪興閔氏)는 마암 바위의 구멍에서 시조가 탄생했다 여기고, 신라시대 경덕왕 때 마암 바위 아래 강물에서 황룡마와 여룡마(검은 용마)가 나타나 고을 이름을 황려현(黃驪縣)으로 고쳤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경기도 여주시 상동에 있다.] 15:44~15:57 여주대교를 건너서 경기 여주시 신륵사길 6-12 번지에 있는 여주박물관으로 이동 15:57~16:27 여주박물관을 관람 [1997년 ‘여주군향토사료관’으로 문을 연 여주박물관은 여주의 역사와 민속자료 등을 조사·수집·전시·교육하고, 새로운 학술자료를 발굴하며 여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016년 7월 14일 새롭게 개관한 여마관(신관)의 건립으로 각지에 흩어졌던 여주지역 발굴출토 국가귀속유물을 한자리에 모았다. 여주박물관의 구관인 황마관에는 기획전시실, 류주현 문학전시실, 남한강 수석전시실, 조선왕릉실이 있으며, 신관인 ‘여마관’에는 여주역사실, 카페테리아, 학예연구실, 강의실 등이 있다. 매년 특별기획전 개최, 전통문화교육 운영, 박물관대학 운영 등 여주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다양한 문화 체험 공간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으며, 학술조사연구 및 발굴조사 등 여주 문화재의 발굴 및 보존 전승에도 힘쓰고 있다.] 16:27~16:32 경기 여주시 천송동 575-10 번지에 있는 신륵황포돛배선착장으로 이동 [남한강변에 위치한 여주 황포돛배는 조선시대의 주요 운송수단이었던 황포돛배를 재현한 황포돛배 유람선이다. 조선시대 4대 나루 중 이포나루와 조포나루 2곳이 이곳에 있을 만큼 여주는 번화한 도시였다. 서울과 중부권을 연결하는 수상교통의 중심지인 여주의 역사와 문화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다. 여주에는 황포돛배를 2곳에서 탈 수 있다. 여주시에서 운영하는 세종대왕호와 민간사업자가 운영하는 신륵황포돛단배가 그것이다. 강변 선착장 → 신륵사 → 강변 선착장으로 원점 회귀하는 코스가 있다. 요금과 코스는 같으나 배의 구조에 따른 장단점이 있으므로 각자의 편의에 따라 선택해 이용하면 된다. 경치가 수려해 [여강(驪江)]이라 불릴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감상하며 신륵사와 주변 볼거리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우천 또는 결빙 등 기상악화시 운항이 중지될 수 있기 때문에 방문 전 연락을 해보는 것이 좋다. 또, 선착장에 갈 때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하고, 승선신고서를 작성해야 탑승할 수 있다.] * 16:32~16:37 경기 여주시 천송동 288-53 번지에 있는 신륵사 일주문으로 이동 * 16:37~17:26 [신륵사 일주문~신륵사템플스테이~불이문~세심정(샘물)~보호수 은행나무~구룡루~여주 신륵사 다층전탑~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여주 신륵사 다층석탑~신륵사 극락보전~조사당~명부전~봉송각~삼성각~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강월헌~불이문~신륵사 일주문]의 동선으로 여주 신륵사(神勒寺)를 탐방 [신륵사(神勒寺)는 봉미산 기슭에 위치한 여주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오랜 역사와 웅장한 규모,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자 경기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사찰은 산속에 짓는 경우가 많은데 보기 드물게 남한강이 바라보이는 강변에 세워졌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기 나옹선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조선 성종 3년(1472)에는 세종대왕릉인 영릉의 원찰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가 원찰로서의 의미가 약해진 뒤 다시 신륵사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벽돌로 쌓은 다층전탑이 있어 벽절로 불리기도 했다. 경내에는 보물 8점, 유형문화재 4점, 문화재자료 4점 등 다수의 문화재가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자 지공, 나옹, 무학 3화상의 영정을 모셔놓은 [조사당]과 극락보전 앞 흰 대리석을 재료로 사용한 [다층석탑], 신륵사 동남쪽 강가 동산 위에 우뚝 세워진 현존하는 유일의 고려전탑인 [다층전탑], 고려 말의 승려 보제존자 나옹의 묘탑과 영정을 모신 진당(眞堂)을 조성한 내력을 적은 비인 [보제존자 석종비] 등이 있다. 신륵사는 수많은 문화재만큼이나 사찰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품고 있어 구석구석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여주시에서는 신륵사에 문화관광해설사를 배치해 방문객 편의를 돕고 있으므로 여주시 종합관광안내소에 전화상담 후 일정을 조율하여 방문하면 좋다. 여주IC, 서여주IC에서 차량으로 약 13분 소요된다. 신륵사 주변은 국민관광지로 개발되어 인근에 맛집이 많고 국내 최대 규모의 도자기 전문 쇼핑몰이 있는 여주도자세상, 황포돛배 유람선 등과도 가깝다.] [여주 신륵사 조사당(驪州 神勒寺 祖師堂)은 경기도 여주시 천송동, 신륵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있는 조선시대의 절로, 원래는 신라시대에 지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조사당은 절에서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건물로, 신륵사 조사당에는 불단 뒷벽 중앙에 지공을, 그 좌우에는 무학과 나옹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조선 전기 예종 때 지은 것으로 보이며, 낮은 기단 위에 앞면 1칸·옆면 2칸으로 세웠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러한 구조를 다포 양식이라 한다. 앞면은 6짝의 문을 달아 모두 개방할 수 있게 하고, 옆면은 앞 1칸만 문을 달아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조선 전기의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규모는 작지만 균형이 잘 잡힌 아담한 건물이다.]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驪州 神勒寺 多層石塔)은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에 있는 다층석탑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올려져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 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돌의 재질, 조각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驪州 神勒寺 多層塼塔) 보물 제226호(1963년 1월 21일 지정) 수량 1기 시대 고려시대 관리 신륵사 주소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천송동, 신륵사)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驪州 神勒寺 多層塼塔)은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다층전탑이다. 다른 명칭으로 벽탑, 나옹탑, 동대탑이 있다. 현존 유일한 고려시대 전탑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26호로 지정되었다.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높이는 약 9.4m이다.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이 전탑은 모든 형태가 전통의 전탑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어, 중국으로부터 전래한 새로운 양식을 따라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에 사용된 장대석 중 최하단의 중간 돌과 제2단의 아래 돌은 다른 부재보다 높은 돌을 사용했다. 신라시대의 전탑이 거의 간격을 두지 않고 벽돌을 쌓은 데 비하여, 이 전탑은 벽돌 사이를 넓게 떼어서 면토를 바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탑의 건립 연대 탑의 북쪽에 수리할 때 세운 '신륵사동대탑수리비'가 존재한다.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탑을 해체하고 수리하여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 내용 인근에 위치한 '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는 다층전탑의 수리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이 비석의 내용을 보면, 전탑의 유래와 구성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다층 전탑은 '나옹탑'이라고 불리었으며, 이는 전탑과 나옹 선사와 관련이 있음을 암시. 나옹 선사는 5월 15일에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신륵사의 연혁을 기록한 탑지가 봉안되어 있다. 기단 하부에 사리를 봉안했다. 이 전탑은 건립 이래 3차례에 걸쳐 수리되었다. 이 전탑의 정식 명칭은 원래 '신륵사 동대탑(神勒寺 東臺塔)'이었다. 탑의 지정학적 위치와 의의 이 탑은 나옹 선사의 다비식 이후에 사리를 안치하기 위한 구조물로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전탑의 건립 위치로서 바로 아래에 한강이 굽어보이는 암석 위를 택한 것은 신라시대 이래 고려시대에 걸쳐 유행하던 특수한 점지 경향의 유풍이라고 할 수 있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碑)는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 사찰에 있는 고려시대의 비석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는 고려 말의 승려 보제존자 나옹의 묘탑과 영정을 모신 진당(眞堂)을 조성한 내력을 적은 비다.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말년에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이 절 북쪽 언덕에 종모양의 부도를 세워 그의 사리를 안치라고 이를 계기로 그의 초상을 모실 진당을 짓는 등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다. 비문은 이색(李穡)과 서예가인 한수(韓脩)가 짓고 썼는데 단정한 필치가 돋보인다. 뒷면에는 건립에 참여한 제자와 시주자의 명단, 중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비는 2단의 지대석 위에 연꽃 무늬를 새긴 비좌를 얹어 비몸을 세웠으며 비몸 양옆에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지붕 모양으로 된 개석(石)을 얹었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 말기에 유행한 석비형식으로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도 같은 형식이다. 특징 전체높이 212cm, 비신높이 121cm, 너비 61cm. 지대석과 3단의 장방형 대석 위에 비신을 얹었는데 상단의 대석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양옆에 화강암기둥을 세워 보강하고, 그 위에 목조건물의 공포와 기왓골을 조각한 옥개석을 얹었다. 신라시대 이래로 귀부와 이수를 갖춘 일반화된 석비 형식이 고려 말기에는 대석과 옥개석으로 변형되기 시작하는데, 바로 이 비가 고려 말기의 석비 형식을 잘 보여준다. 글씨는 자경(字徑) 2cm 정도의 해서로 넉넉한 짜임새와 부드러운 필획이면서 흐트러짐이 없다. 비신 위에는 지붕형의 개석을 덮었다. 지붕은 팔작지붕을 모방하였는데, 아주 정교하게 조각되어 기왓골, 공포, 막새기와 등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비는 1379년(고려 우왕 5년)에 세워졌다. 종비 내용 전면에는 나옹선사의 일생·사상·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고, 후면에는 진당시(眞堂詩)와 200여 명의 문도와 추모자의 이름이 해서로 쓰여있다. 특이한 것은 전면 끝부분에 비문을 지은이·글쓴이·새긴이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은이와 글쓴이는 비문 맨 앞쪽에, 건립에 관련된 인물은 후면 음기에 새겨진다. 나옹선사는 교종과 선종으로 나뉘어 싸우던 고려 말의 불교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두 종파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고, 그 사상은 조선 개창의 정신적 지주였던 무학대사에게 이어졌다. 수리 이력 신륵사의 시행된 수리 내역은 '신륵사개와모연문', '여주봉미산보은사중수사적기'등 문헌을 통하여 대체적인 것을 파악할 수는 있으나 보제존자석종비에 관한 수리 기록은 조선시대까지는 보이지 않고 1970년대에 들어서야 찾을 수 있다. 1973년 신륵사 석조문화재 보수 계획을 보면, 조잡한 보호책을 철거하고, 새로 보호책을 설치하고, 안내판을 설치하는 등의 작업이 기록되어 있다. 1979년에도 신륵사에서 석종비에 이르는 곳에 계단을 신설하는 공사를 진행하였다. 2001년 강우 등으로 노출된 기초부분을 보수하는 공사를 진행하였다. 2014년 비석 위의 균류 등을 제거하고, 균열된 곳에 충진재를 넣어 보존하였다.] [나옹(懶翁) (1320년-1376년) 목차 1. 개요 2. 생애 3. 관련 문서 1. 개요 고려 말기의 선승(禪僧). 공민왕(恭愍王)의 두번째 왕사였다. 고려 말의 선풍(禪風)을 진작시킨 인물로 손꼽히며 지공(指空) · 무학(無學)과 함께 고려 말 3대 고승으로 손꼽힌다. 2. 생애 나옹은 충숙왕 7년(1320)에 태어났다. 나옹의 속성은 아(牙), 속명은 원혜(元惠)이다. 아버지는 고려의 하급 관료로, 나옹 또한 어린 시절에는 부유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게 살았던 듯하다. 승려가 된 뒤 사용한 법명은 혜근(惠勤)이고 법호가 나옹(懶翁)인데, 흔히 '나옹화상' 또는 '나옹선사'란 호칭으로 알려졌다. 나옹이 아직 7살이던 충숙왕 13년(1326) 3월에 인도 승려 지공(指空, 1300-63)이 원나라를 거쳐 고려로 왔는데, 회암사를 보고는 "산수(山水)의 형세가 인도의 날란다 사원과 비슷하구나!" 하며 중창했다고 한다. 지공은 당시 고려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어서 부처나 다름없는 고승으로 추앙받았다. 지공은 회암사뿐만 아니라 법기보살의 성지로 알려진 금강산을 참배하고 그 외에도 고려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임금부터 백성들까지 온갖 사람들이 몰려와 그의 설법을 듣고 무생계(無生戒)를 받았다. 지공은 고려에서 2년 6개월을 보내고는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는데, 나옹 또한 지공에게서 무생계를 받았다. 나옹은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21살이 되는 충혜왕 복위 1년(1340)에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에 있는 요연선사(了然禪師)의 문하에서 출가하였다. 충목왕 즉위년(1344, 25세)에 양주의 회암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나옹은 고려 불교계에서 크게 추앙받은 지공대사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충목왕 3년(1347, 28세)에 원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지공은 연도(오늘날 북경)의 법원사(法源寺)에 있었는데, 나옹은 지공을 찾아가 그의 문하가 되어 가르침을 받았다. 나옹은 지공의 제자가 되었지만 법원사에만 머물지 않고 원나라를 돌아다니다가 중국의 다른 고승들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스승은 분명 지공이었다. 나옹이 원나라에 머물던 시절에 자초(自超)라는 승려를 만나 제자로 거두었는데, 자초가 바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친구이자 조선왕조의 유일한 왕사가 된 무학이었다. 무학은 지공과도 만나서 다시 그 문하에 들어갔다고 하므로, 무학의 사승관계가 좀 꼬였다. 여말선초 불교계에서는 지공과 나옹의 영향력이 너무나 컸기에, 무학은 스스로를 지공과 나옹의 법맥을 이은 자로 자신을 내세웠다. 1356년(37세)에 원나라 혜종이 나옹을 불러 광제선사(廣濟禪寺)의 주지를 맡겼다고 하므로, 당시 원나라 불교계에서도 나옹에게 명성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나옹은 얼마 안 있어 주지 직을 내려놓았다. 무학은 이 무렵에 고려로 돌아갔고, 나옹 또한 스승 지공과 상담한 뒤 1358년(39세)에 귀국하였다. 귀국하기 전에 스승 지공은 나옹에게 회암사에서 불법을 일으키라는 유지를 남겼다. 공민왕 9년(1359)에 오대산에 들어갔다는데, 이듬해(1361)에 공민왕이 나옹을 불러 법문을 듣고 황해도의 신광사(神光寺) 주지로 임명했다. 그가 주지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홍건적의 2차 침입이 일어났다.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할 정도로 고려군이 크게 몰렸는데, 나옹은 신광사에 계속 머무르며 절을 불태우려는 홍건적 무리들을 막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절을 지키려는 나옹의 태도에서 고승의 면이 보였는지, 홍건적들도 차마 신광사를 불태우거나 나옹을 해치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후 고려군이 홍건적을 몰아내자 공민왕도 수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런 행적 덕분인지 나옹은 고려에서 고승으로 더욱 이름을 날렸다. 그는 2년간 신광사 주지로 있다가 주지 직을 내려놓고 공민왕 18년(1369, 50세)에는 다시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공민왕 19년(1370, 51세)에는 원나라에서 입적한 지공의 사리가 고려에 이운되었다. 나옹은 이를 계기로 회암사에 지공의 부도탑을 세우고 회암사를 중창하고자 하였다. 공민왕 20년(1371)에는 고려의 왕사로 임명되었고 공민왕으로부터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법호를 받았다. 나옹은 우왕 2년(1376, 57세)에 드디어 회암사 중창공사를 끝내고 낙성식을 열었으나 사대부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이런 비난 때문에 나옹은 유배를 떠났는데 유배길에 병이 나서 오늘날 여주의 신륵사(神勒寺)에 도착한 뒤 입적하였다. 우왕은 나옹에게 선각(禪覺)이라는 시호를 추숭하였다. 여말부터 조선 조에 이르기까지 불교계는 지공과 나옹을 기꺼이 조사(祖師)라고 여겼고, 여기에 무학 또한 조사로 숭앙받았다. 지공과 나옹과 무학을 모두 일컬어 3화상(三和尙)이라고 불렀는데, 특히 16세기 말, 임진왜란 무렵을 즈음하여 3화상(특히 무학)이 민간신앙이나 불교계에서 더 부각되었다. 오늘날 불교의례에서도 3화상을 '증명법사' 역할로 청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나옹은 우리나라의 여러 불교 전설에서, 비록 원효나 도선만큼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신이한 일을 행하는 고승으로 언급되곤 한다. 또한 나옹의 어린 시절을 과장하여 아버지가 관가에 빚을 지고 도주했고 어머니가 혼자 나옹을 낳고는 버렸더니 까치가 날아와 날개로 아기 나옹을 덮어 주었다거나 하는 전설도 전한다. 역사적 인물 나옹을 모르더라도 불교 전설을 많이 아는 사람이라면 '나옹화상'이란 호칭이 친숙해질 정도. 역사책보다는 우리나라의 불교 전설에서 나옹화상이란 이름을 접한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 17:26~17:37 경기 여주시 신륵로 37에 있는 GS25 여주신륵사점으로 이동 * 17:37~17:48 GS25 여주신륵사점에서 샌드위치와 우유로 간식 * 17:48~18:37 경기 여주시 교동로 80 번지에 있는 여주역 경강선 1번 출구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8:37~18:55 여주역에서 판교역으로 가는 경강선 전철 승차 대기 18:55~20:53 경강선 전철을 타고 여주역에서 판교역으로 가서 신분당선으로 1차 환승하여 신사역으로 간 후 3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연신내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3차 환승하여 구산역으로 이동 [1시간58분 소요] 여주시 [북성산(258m).연설산(202m).연하산(225m). 황학산(173m)] 산행지도 [세종대왕릉역~북성산] 구간 지도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안내도 여주 [대로사&영월근린공원&여주박물관] 위치도 영월루 위치도 여주 신륵사 안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