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가능한가? 두 요한의 질문과 답변
이사 41,13-20; 마태 11,11-15 /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2023.12.14
오늘 교회가 기리는 인물은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입니다. 그는 체험과 식별과 실천의 영성으로 성인품에 오른 후에 신앙의 신비를 꿰뚫어 본 신비가요 교회학자로 인정받은 인물입니다.
16세기 중반 그가 태어난 스페인은 전 지구에 걸쳐 세력을 넓힌 최초의 근대적 제국이었고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황금기를 누렸습니다. 그 시기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대항해 시대를 열고 대범선으로 대서양을 누비며 남북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고, 인도양에도 진출하여 인도의 고아와 중국의 마카오 그리고 필리핀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물자를 교역함으로써 동서양의 문물을 실어 나르는 번영을 구가했습니다.
‘총과 균과 쇠’(Jared Mason Diamond)로 아즈텍, 잉카, 마야 문명을 무너뜨리는 한편 식민지로 삼은 필리핀에도 무기로 겁박하여 강제로 개종시켰습니다. 필리핀을 정복한 후에는 멕시코로 가는 태평양 항로까지 개척함으로써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대양함대 건설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한때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통합한 이베리아 제국은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오늘날에도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은 23개국에 이르며 그 인구는 5억 명 가까이 됩니다.
하지만 양지를 비추는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음지의 그늘은 짙고 어두운 법이어서, 식민지 경영으로 인한 수탈과 막대한 은의 유입으로 그 당시 왕실과 귀족들은 어마어마한 부와 사치를 누릴 수 있었으나 식민모국의 백성들과 식민지의 백성들은 그만큼 비참한 가난에 허덕여야 했습니다. 최초의 근세인으로 평가받는 세르반테스가 풍자소설 ‘돈 키호테’를 쓴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주인공인 기사 키호테는 평범한 시골 처녀 알돈자를 고귀한 신분의 둘시네아로 알아보고 열렬히 구애를 하는 허황되고 비현실적으로 처신하는 우스꽝스런 인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세르반테스는 당시 스페인 왕실의 타락과 이를 꾸짖지 못하고 편승하는 교회의 제도 권력을 ‘풍차’로 묘사하고, 중세 봉건적 가치관에 젖어서 현실을 보지 못하는 이들을 ‘알돈자’로 묘사하는 동시에 이 ‘알돈자’야말로 근대적 가치관으로 각성해야 할 ‘둘시네아’라고 상상하면서, 스스로 돈 키호테가 되어 당대 가톨릭 신앙인들을 향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십자가의 요한 사제는 ‘둘시네아’처럼 시대의 명암을 꿰뚫어볼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 제국의 풍요로움 속에서도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을 체험했는데, 이 체험은 그가 수도 사제가 된 후 아빌라의 데레사 수녀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추진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습니다. ‘가르멜의 산길’, ‘영혼의 어두운 밤’, ‘영혼의 노래’ 등 그가 제국이 빚어내던 시대적 상황과의 모순은 물론 교회 내부적으로도 귀족 신분을 유지하며 수도생활을 하려던 세속화된 동료들의 질시와 박해 속에서 식별해 낸 사색은 그를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로 만들었고 그 작품들을 영성 신학의 고전으로 인정받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체험을 영적으로 식별하는 그 과정이 그야말로 십자가 투성이의 길이었기에 ‘십자가의 요한’으로 불리었던 그는 한 마디로, 그는 중세 스페인의 엘리야 예언자였고, 근세를 개척한 ‘둘시네아’였습니다. 시대가 화려하면서도 내적으로 공허했기에 자신이 겪어야 했던 가난한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사색은 그만큼 깊어졌을 터입니다.
주어진 체험을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식별하여 한 번 거르고, 다시 교회가 전해준 신앙의 해석으로 또 한 번 걸른 다음에, 몸소 자신이 삶에서 실천함으로써 그 식별된 깨달음을 정화시키는 사색이 가르멜 영성입니다. 이 마지막의 정화 과정에서 자신이 겪게 되는 십자가는 체험을 영성으로 승화시키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가르멜 영성의 이 3단계 식별과정은 근세 이후 가톨릭교회가 벌어져가기만 하던 빈부격차 속에서 갈수록 세속화되어 하느님을 잊어버려 가던 세상을 향하여 가톨릭 사회교리를 반포하게 된 영성적 원리와 상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18세기에 이미 성인품에 오른 그를 20세기에 들어서 비오 11세가 다시 위대한 교회학자로 공인한 배경입니다. 이 ‘체험-식별-실천’의 영성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 쇄신의 노선을 확정하는 데 사상적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사회 현실을 바라보되 가능한 한 객관적 사실을 토대로 그러나 하느님의 눈으로 관찰하는 것이 그 첫 단계입니다. 이 관찰 단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법적 방법론을 응용하여 ‘신학대전’이라는 역저를 쓴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현대 가톨릭사상을 확립란 평신도 신학자 쟈크 마리탱(1882~1973)의 네오 토미즘이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긍정적인 진보이고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 부정적인 퇴보인가를 사색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모인 5천여 명의 주교들과 이들을 보좌한 신학자들은 현대 사회의 현실을 관찰하여 모두 16개 문헌으로 시대의 징표를 식별해 냄으로써 교회 쇄신의 노선을 집대성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관찰된 선과 악 가운데에서 악을 물리칠 수 있는 선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교회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그 두 번째 단계입니다. 무릇 모든 악은 개별적이든 구조적이든 선의 결핍에서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교회의 윤리적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판단된 공동선의 과제에 대하여 누가 누구와 연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 실천할 것인지를 숙고해서 사도직 활동으로 지속하는 것이 그 세 번째 단계입니다. 정확한 목표를 향해서, 연대할 수 있는 이들과 할 수 있는 만큼만 조금씩 그러나 포기함이 없이 대를 이어서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사도직 활동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성 요한 23세 교황은 공의회를 소집한 직후, 미국과 소련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치달을 뻔 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에 회칙 ‘지상의 평화’를 반포함으로써 평화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전해준 바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길어 올린 가르멜 영성에 따라서 세계의 냉전 구도를 관찰하였고, 복음적 안목으로 식별해 냈으며, 항구적인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사도직을 실천하도록 가톨릭 신자들은 물론 선의의 모든 이들에게 촉구하였습니다.
그는 특히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관찰하면서 그 질서정연함에 비해 대조적인 인간 세상의 무법질서를 날카롭게 고발하였습니다. 그리고 우주와 자연의 질서야말로 창조주 하느님의 작품임에 경탄하면서 인간 세상도 이처럼 질서정연해야 함을 역설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피조물이므로 하느님을 닮아야 개인도 행복하고 세상도 평화로울 수 있으며, 그러자면 자유와 권리에 앞서 책임의식과 의무감이 실천되어야 한다고 갈파하였습니다.
평화는 가능한가? ‘평화의 군주’(회칙 지상의 평화‘, 167항. 168-172항 참조)이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몸소 행하신 모범에 따르면 평화는 가능합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기도하다시피, 그분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그리스도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요한 23세가 반포한 저 위대한 회칙의 서문입니다.
1.*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는 모든 시대의 인류가 깊이 갈망하는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질서를 충분히 존중할 때에 비로소 회복될 수 있고 견고해진다.
2. 세상에는 살아 있는 생명과 자연의 힘을 지배하는 놀라운 질서가 있기 때문에 현대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발명이 가능하다. 그리고 자연의 힘을 지배하고, 그 선익을 향유하기 위하여 적당한 도구들을 창조하고, 그런 질서를 발견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위대함의 소산이다.
3. 그러나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발명은 무엇보다도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무한한 위대하심을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시편 저자가 외치듯이 지혜와 선의 귀중한 보화들을 인간에게 풍요롭게 주시려고 우주를 창조하셨다.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시편 8,10). “주님이 하신 일이 많고도 많건마는, 그 모두를 지혜로써 이룩하시었으니, 온 땅에 당신 조물 가득 차 있나이다”(시편 103,24).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대로3) 당신과 비슷하게 지성과 자유 의지를 지닌 인간을 만드시고, 세상의 주인으로 올려놓으신 것이다. 계속하여 시편 저자는 외치고 있다. “당신은 인간을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어주셨나이다.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삼라 만상을 그의 발 아래 두시었으니”(시편 8,6).
4. 그런데 여전히 세상의 완전한 질서를 거스르는 개인들과 국가들 간의 불목이 계속되고 있다. 이에 대한 관계 개선은 무력의 사용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5. 또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내밀한 마음 안에 질서를 새겨주셨는데, 이것이 양심을 일깨우며, 인간은 단순하게 이 양심을 따라야 한다. 인간은 그들 마음속에서 하나의 법이 있다는 것을 안다. 양심이 바로 그 근거가 된다. 이 사실은 달리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느님의 모든 업적은 또한 당신의 무한한 지혜의 반영이기도 하다. 이 반영이 더욱 분명할수록 그만큼 완전성의 정도는 높아지는 것이다.
6. 그러나 가끔 그릇된 견해에서 탈선이 생긴다. 많은 사람들은 정치 공동체와 함께 인간의 관계를 우주의 비이성적인 자연 법칙으로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인간을 다스리는 법은 이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본성 안에 그 법을 새겨주셨는데, 우리는 그 법들을 어디서나 찾아야 한다.
7. 이 법들은 인간이 어떻게 사회 안에서 이웃을 대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국가 구성원과 그 직무의 상호 관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분명하게 지시한다. 또한 이 법들은 어떤 원리들이 국가들의 관계를 통제하는지, 한편으로는 개인들과 국가들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들보다 더 넓은 세계 공동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이런 공동체의 설립은 보편적 공동선의 요구에서 나온다.
교우 여러분! 16세기 스페인에서 활약한 십자가의 성 요한과, 20세기 로마에서 활약한 요한 23세 교황은 다 같이, 높은 창공을 날라 다니면서도 지상 사물을 꿰뚫어보는 독수리의 날카로운 직관력으로 영원한 생명과 파스카 과업을 기록해 놓은 사도 요한을 주보 성인으로 삼은 성인이었습니다.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영성으로 십자가의 신비를 사회교리의 원칙으로 이끌어낸 요한 사제와 이를 적용하여 평화를 위한 사회회칙을 반포하고 현대의 성령강림 사건으로 칭송받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교황을 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