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성(洪州城) - 신대철
큰 느릅나무 아래 성벽 소로를 끼고 가다 둥글게 돌아가는 길모퉁이에서
좁은 골목으로 비좁게 접어들면 뒤꼍이 환히 트이는 남향집,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590번지, 나는 성 밑 남문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돌과 나무와 벙어리, 깨어진 머리
그때의 성은 지워져 있고
열세 살 되던 해, 겨울,
나는 처음으로 성에 올랐습니다,
아버지가 대서방에 들어가신 줄 모르고 기댈 데 없는 느티나무 근처를 기웃거리다
얼어붙은 길 끝까지 걸어 우연히 성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눈덩이를 굴려 온 아이들은 성 위에 눈사람을 세우고, 밀어 보고, 갑자기 무서워했습니다,
살 끝을 찾아 찌르는 눈보라, 홍주천으로 뻗은 길은 눈을 들쓰고 잠겨 있었습니다,
언 길바닥을 뒤따라오신 아버지는 성의 내력을 물으시고는 국모 시해, 단발령, 을사보호조약,
그리고 창의군의 구국 운동을 단숨에 말씀해 주셨습니다,
안병찬 의사가 칼로 스스로 목을 찌르고 목에 괸 피로 창호지에 쓴 혈서를
떨면서 듣고 있는 동안 성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고,
눈 속으로 사라진 행인들이 눈발에 비칠 때마다
홍주천에 버려졌던 혼들이 소리 없이 헤매는 듯했습니다,
<지사는 구렁에 빠질 각오 잊지 않고
용사는 목숨 바칠 각오 잊지 않네
차라리 머리 없는 귀신이 되지
머리 깎은 사람은 되지 않으리>1)
물은 물대로, 나는 나대로 흘렀습니다, 반 고비 넘어 물과 합류하였습니다,
자연스레 굽을 대로 굽은 길을 떠돌다 모듬내,2) 하우개3) 기슭을 스칠 때
한번 소용돌이치고 굽이쳐 보고 싶었지만 굽은 길은 굽은 길,
곧은 길마저 저절로 굽이굽이 흘렀습니다,
칠갑산 점심골 남의 땅에 얹혀 살면서 성을 향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드나드는 아저씨가 민종식 의병대장이 살던 집에 살기 때문이었을까요,
범람하는 급류를 타고 사행천을 돌아 나왔습니다,
천장리 작은 골짜기 둔덕에 버티고 있던, 수없이 두리번거리고 망설여야 문이 열리던 고택,
구석구석에 나뒹구는 화약통엔 울분이 그대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 속에 들어가면 이 땅을 위해 매순간 절명(絶命)했던 얼굴 하나 하나
살아 움직이는 홍주성이 보였습니다,
김복한 홍건 이상린 송병직 안병찬 이설 김덕진 민종식 박윤식 안창식 안병림 안항식 이규하 이세영 이식 임승주
임한주 채광묵 채규대 이종응 이두종 이봉승 이재근 유진모 박봉진 박춘장 조항교 신영균 남사원 이천근 유치방
김연하 임헌시 최인원 박용근 김광우 조희수 정재호 황영수 박창로 정인희 곽한일
어느새 나는 살아 움직이는 성 바로 밑에 이르렀습니다,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590번지, 남문동엔 바람 불고, 눈발 날리고,
나는 맨땅에 높이도 깊이도 없는 발자국을 찍어 보고 문지르고 다시 성을 바라봅니다,
바라볼수록 두근거리는 가슴 속에는
성 밑에 오두막에
푹 엎어져 살던 이들
돌 하나 쌓으면 피붙이 흩어지고
돌 하나 쌓으면 땅 흔들리고
구르고 구르는
돌, 돌, 돌
돌 구르는 소리 맥박을 뒤흔듭니다.
1) 1896년 12월 4일, 창의대장이 되기로 한 관찰사 이승우가 변절하여 김복한과 이설을 잡아 가두자
안병찬이 관문을 부수고 들어가다 붙잡혔다.
안병찬은 차고 있던 칼로 자문(自刎)하였지만 죽진 않았고,
목에 괸 피로 창호지에 혈서를 써서 이승우에게 보냈다. 인용된 글은 혈서의 일부이다.
2) 1906년 3월 17일, 병오 1차 홍주 의병이 왜군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인 곳이다.
민종식 의병대장이 이끈 3천여 의병들이 모듬내(합천, 현재 청양군 화성면 산정리)에서
전열을 가다듬던 중 정예 왜군의 기습을 받아 격전을 벌였는데,
전투경험이 부족한 데다 무기까지 부족하여 패퇴했다.
3) 병오 의병 첫 주둔지. 행정 구역상으로는 홍성군 홍성읍 옥암리에 속한다.
원래 고개 이름은 하우고개(夏牛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