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용설명서Ⅱ-스물두 번째 이야기 ⑵】
철학으로 묻는 전쟁의 의미
사전事前적 사고思考vs사후事後적 사고思考
팔레스타인을 위한 사전적 사고思考-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이스라엘민족과 팔레스타인 족속을 모두 품은 영토 ‘팔레스타인’은 모두에게 간절하다. 고대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이 있었던 지역을 뜻하지만 동시에 2013년에 수립된 나라. 지역으로서 인정받은 팔레스타인은 세계의 3대 종교인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에서 모두 신성시하는 성지다. 오래전부터 주목받던 성지에는 각 종교의 상징이 보란 듯이 지키고 있는 형국이다. 성지로서 예루살렘이 가지는 상징은 생각보다 깊고 긴 역사를 품고 있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유대와 아랍의 민족운동 진영의 분쟁지로 주목을 받았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이스라엘 간의 오랜 분쟁 중 1993년 평화정착을 위한 기본적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되었고, 2013년에는 팔레스타인국이 수립되어 국가 지위에 대한 인정을 받은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역사적 지명이자, 2013년 1월 이 지역의 일부에서 독립 국가로 수립된 국가의 명칭이기도 하다. 지역으로서의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여러 지역을 포함하면서 대체로 서쪽의 지중해에서 동쪽의 요르단강까지, 북쪽의 이스라엘과 레바논 국경지대에서 남쪽의 가자 지구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킨다. 이 가자지구의 하늘이 붉은 전쟁 빛으로 세계의 주목을 다시 받고 있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말하는 지역으로서 팔레스타인은 7세기 이슬람 제국의 정복 이후 이 지역에서 살아온 아랍 민족의 고향이며, 영토라는 주장이다. 그곳의 주민인 팔레스타인을 뜻하는 히브리어 플레셰('펠리시테인의 땅'이라는 뜻)에서 나온 같은 의미의 그리스어 ‘팔라이스티나’에서 유래되었다. 플레셰는 필리스티아라고도 하는 이집트 북동쪽의 작은 연안 지역을 가리킨다. BC 2세기에는 이전 유대 지역을 포함하는 시리아 주의 남쪽 1/3 지역에 대해 ‘시리아팔라이스티나’라는 명칭으로 로마인들이 부르다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요르단강에서 서쪽으로 지중해 연안에 이르는 영국의 위임통치지역을 가리키는 공식 명칭으로 ‘팔레스타인’이라는 지역 이름이 다시 쓰이게 되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팔레스타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곳이 자치국으로 인정받은 시간은 오래되지 않았다.
1948년 승인을 얻은 이스라엘이 이 지역 영토를 지명 점령하고 독립을 선언하면서 유대와 아랍의 민족운동 진영이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는 분쟁지역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스라엘과의 국경을 경계로 1994년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수립되었고, 2013년에는 팔레스타인국이 수립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 수립에 뒤이어 전쟁이 벌어진 1948∼49년과 종전 직후의 기간 동안, 새로 생겨난 이스라엘 지역을 벗어나 이웃 아랍 국가로 망명해 정착한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인'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또한 6일전쟁 이후 웨스트뱅크, 가자 지구, 동예루살렘 내에서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거나 이웃 국가에 흩어져 있던 아랍인들도 팔레스타인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도 이스라엘 내에서 계속 거주하며 그곳의 시민이 된 아랍인들은 현재 이스라엘 아랍인으로 불리며 복잡한 국경 경계만큼 다양한 인종의 연합체가 공존하는 지역이 되었다. 이곳에서 아랍연맹이 1974년 모로코 리바트 회담에서 인정한 유일한 대표기구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PLO)가 탄생한다.
PLO는 1969년 헌장에서 밝힌 것처럼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제거하고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지역 안에 이슬람교도·그리스도교도·유대교도 각각의 독립국가를 건설할 것을 천명해 왔지만 1988년에 이를 수정 보완하여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위한 2개 국가 수립안(이웃 이스라엘과 공존하게 될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는 안)에 대해 처음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인티파다’의 출현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PLO다. 아랍연맹이 인정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립을 합의를 조율하기 시작하지만 불합리하면서 쉽지 않은 길이었다.
1993년, 이스라엘과 PLO 간에 평화정착을 위한 기본적 합의가 논의되었다. PLO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실제적 권한을 인정한 대신, 이스라엘은 PLO를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해 유일한 대표성을 갖는 단체로 수락했다. 양측은 웨스트뱅크, 가자 지구의 통치권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점진적으로 이양하면서 그 지역 내에 주둔한 이스라엘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키는 5년간의 과도기간을 둔다는 데 합의했다. 이를 통해 1993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되었다. 쉽지 않은 논의 끝에 1996년에는 웨스트뱅크, 가자 지구의 영속적 지위에 관한 협상까지 진전을 보게 된다. 국제적인 공인이 필요했던 팔레스타인의 노력은 계속된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국제적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해 유엔 산하기구인 유네스코에 회원국으로 가입했다(2012). 외적인 성과와는 달리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내의 강경파인 하마스 세력과 협상파인 파타당 세력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내분 수준의 갈등은 골이 깊어지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국가로 국제적 지위를 격상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2012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을 옵서버 국가의 지위로 인정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2013년 1월 3일 138개국의 찬성으로 팔레스타인국으로 인정받으며 수립되었다.
2005년부터 행정수도인 라말라에 대표부를 운영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은 아랍 및 이슬람권 국가들과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적대적 상황이라고 볼 수 있는 이스라엘을 정점으로 하는 외교적 갈등이 다른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모양새다. 그러나 항상 적은 내부의 적이 무서운 법이다.
정치경제적 상황을 주도한 하마스의 등장- 모두의 ‘영토’에 저지른 불씨
팔레스타인국의 정치는 주로 온건파인 ‘파타’와 강경파 ‘하마스’에 의해 주도되고 있지만 이슬람권의 시아파와 기독교도로 구성된 소수 정당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하부조직이었던 하마스는 반 이스라엘과 반 서방의 성향이 강하여 온건파인 파타와 물리적 충돌 주도하는 강경파의 대표이기도 하다. 전쟁을 주도한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이슬람 저항운동 단체를 대표하는 정당이면서 테러 단체이지만 2012년 12월에 팔레스타인 입법평의회에서 거대 야당이면서 다수당으로 권력을 쥐고 있는 정치 세력이다.
하마스 세력에 의해 통치되는 가자 지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하여 파타가 주도하는 팔레스타인국이 통치권을 발휘하고 있어 팔레스타인국은 미국과 이스라엘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다. 온건파 ‘파타’도 느껴지는 세력은 미미하지만 팔레스타인을 위해서 최선의 선택은 아닌 이유도 인티파다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국제 사회에서 경계대상인 팔레스타인이다.
팔레스타인국의 수도는 예루살렘이지만 실질적인 행정수도는 ‘라말라’이다. 이미 예루살렘은 그들에게 치외법권지역처럼 신성시되는 지역이기도 했기에 아랍인과 이스라엘인 누구에게나 ‘영토’였다. 이렇게 중요한 영토를 사이에 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의 전쟁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마스는 결국 그들의 영토에 불씨를 던졌다. 하마스가 벌인 총격전에 가자지구가 다시 국제 사회의 눈과 귀를 집중시켰다.
정치적인 노림수가 있는 하마스의 선제공격은 이스라엘에게는 안식일인 토요일에 선전포고도 없이 자행되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드러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요구와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한 포석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은 협상 카드였다.
하마스가 강경하게 주도하던 테러가 자행되기 전에도 온건파였던 파타 역시 민간인 테러를 빈번하게 일으켰지만 개전 당일 이미 수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하마스의 비인도적인 행태는 세계의 관심보다 비난을 먼저 받아야 했다. 이미 전쟁의 국면은 이스라엘군이 주도하게 되면서 하마스가 자행한 전쟁 피해자들이 속출하게 된다. 점령지를 해방한 이후 이스라엘 정부와 각국 언론이 피해 현황을 조사 중이며, 집계된 피해자들의 숫자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이는 극히 비인도적 전쟁 범죄로 간주된다. 정치적으로 이는 하마스의 도덕성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으며, 이스라엘의 격노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팔레스타인에 대한 전 세계의 동정론도 크게 위축되었다. 아랍권 테러단체들이 벌인 인티파다는 처음부터 불법이었고 막무가내식의 요구를 이어간 폭력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다.
생각이 ‘무력’인 잘못 꿴 단추-첫 번째 인티파다(انتفاضة)
아랍어로 봉기를 뜻하는 ‘인티파다’는 1987년 12월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사람이 몰던 트럭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이 타고 가던 승합차와 충돌해 팔레스타인 노동자 4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주축이 돼 무장봉기는 변변한 무기조차 없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군 병사와 탱크를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수준이었지만 봉기 자체는 이스라엘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 일을 계기로 팔레스타인의 모든 정파와 정당들이 이스라엘군은 점령을 끝내고 팔레스타인을 독립 국가로 인정해 달라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인티파다는 목표지향적이 된다. 정치세력이 불법을 합리화하지만 그들이 행한 것은 테러였다.
이스라엘의 인권단체 비트셀렘B'Tselem에 따르면, 첫 번째 인티파다에서 팔레스타인 사람 1,070명이 살해됐는데 이 가운데 237명은 어린이였다고 한다. 인티파다의 무력 봉기뿐 아니라 대규모 시위, 시민 불복종 운동, 조직적인 파업 등을 주도하며 다양한 형태로 사회의 전역에서 불특정 다수를 향한 조직적인 행태로 벌어졌는데, 국제 사회도 인티파다를 계기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에 주목하게 되면서 이슬람 원리주의를 따르는 무장 정파 ‘하마스’는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는 단체로 설립하게 된다.(1988) 그러나 그들이 투쟁을 하기 위한 재정은 튼튼하지 못했고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에는 처음부터 잘못 둔 무리수였다. 단체가 아니라 지지기반인 팔레스타인 정부의 힘이 미약했다.
팔레스타인국의 경제는 이스라엘 정부에 예속되어 있는 상황이다. 국가 재정의 많은 부분을 미국과 이스라엘의 지원에 의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 일대의 농업과 산업의 기반 시설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국 자체의 경제활동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국민의 실업률은 50%가 넘었고, GDP는 이스라엘의 10% 수준이라고 한다. 이미 경제적인 부국인 이스라엘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팔레스타인의 경제 상황은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얽혀 더 복잡해졌고, 자력으로 풀 수 없을 만큼 두 지역의 갈등의 골은 깊어가고 있다.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 없는 땅에 한 지붕 두 가족은 목숨을 건 전쟁에 돌입했다. 약자라서 물러나거나 강자여서 통치할 수 없는 지정학적인 위치가 가자 지구다.
그들 두 나라의 갈등은 남북으로 나뉜 한반도의 갈등보다 오래된 묵은 역사다. 단순히 두 나라가 합의하거나 논의로 해결할 수 없는 종교적인 문제가 더 큰 이유다. 역사적인 연결고리를 찾아 올라가는 일은 이미 그들이 그 땅에 뿌리를 내린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풀기 어렵고 누군가의 이해와 정치력으로 접근하기 쉽지 않은 그들에게 남은 통곡의 벽처럼 막힌 담이다.
그럼에도 팔레스타인의 강경파 ‘하마스’가 계속 테러를 자행하고 국제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그들의 존재를 상기시키고 이스라엘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이 목적이다. 이미 2023년 가지지구를 포화 속으로 빠뜨리고 이스라엘과의 전면전을 천명함으로써 그들이 원하는 목적을 어느 정도 이룬 것은 맞지만 후 대응은 이제까지 쓰던 방법대로 인질들을 묶어 협상에 이스라엘을 불러들이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인질들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이스라엘은 전쟁을 멈출 수 없다고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진입한 두 나라다.
서로 계산이 어긋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스라엘은 전쟁을 지속할 명분을 소극적으로나마 이미 그들이 인정한 만큼 세계의 비난이나 우려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출발부터 어긋난 그들의 성지와 생존권을 향한 전쟁은 누구도 비난할 여지가 없는 신념과도 같은 종교적 모습이나 그들이 풀어가는 방법은 역사가 실패한 전쟁이란 물리적인 방법으로 끝을 보려 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잘못 끼운 첫 단추가 시작일지 모르는 그들에게 해법은 있기는 한 것일까. 누구도 대답하기 힘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게 묻는 지청구다.
두 나라가 묶인 같은 과거-끝까지 합의점이 닿을 수 없는 생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의 분쟁은 이미 오래된 역사를 가진다. BC 2000여 년 전 유대인의 조상(히브리족속)인 아브라함이 팔레스타인으로 불리는 가나안 땅의 여러 족속들을 정복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다. 성경에서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여호와)이 주겠다고 한 약속의 땅인 가나안은 신의 약속이었다. 히브리 민족에게 주기로 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가나안인데 이미 아브라함 이전에도 이곳에는 가나안 족속들(팔레스타인으로 추정)은 살고 있던 땅이다.
아브라함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공통의 조상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은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 왕의 시대를 꼽는다. 솔로몬왕의 아비 다윗과 블레셋의 장수 거인 골리앗의 이야기는 이미 많은 문학 이야기와 희곡의 모티브가 되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블레셋 간의 갈등과 민족적 적대감은 성경에도 야곱(훗날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로 불리기 시작함)과 함께 거론되어지는데 사울 왕 시절의 소년 다윗이 밀리고 있던 이스라엘군에 앞서 출정하여 적의 장수였던 블레셋의 골리앗을 꺾으며 이스라엘 족속 쪽으로 힘의 균형추가 옮겨지게 되며 그 후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견제를 받게 된다. 이때부터 이미 팔레스타인 분쟁의 맹아는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밀고 밀리는 전쟁은 그 후로도 승자를 가리는 전쟁은 계속되었다. 이스라엘이 멸망(67년)후 유랑의 세월을 끝내기까지 시간은 길었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는 전쟁은 없다. 이기고 지는 전쟁이 끝나도 모두가 실패자가 되거나 손해를 입는다. 그럼에도 전쟁에서는 승자와 패자를 가리게 된다. 이스라엘이 나라를 다시 세운 것(독립1948)은 예루살렘이 속해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이었다. 팔레스타인들이 유대인들과 동거 후 그들의 지도는 급격하게 달라졌다. 1946년 넓은 영토 팔레스타인 거점이 60여 년이 흐른 2010년 지도를 보면 이스라엘의 거주지로 바뀌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국과 강국들이 벌인 인류의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또 하나의 법칙은 세워졌다.
전쟁의 법칙-전쟁의 무용성을 반증하는 국제법과 약소국의 무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와 비슷한 흐름을 갖고 있는 부분이 많다. 다른 민족이나 나라의 침략이 많았고 식민지배를 받았으며 자의적인 이주가 아니라 강제이주를 당해 세계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독립한 시기도 비슷하다. 그 후로 세계에서 놀랄 정도로 빠르게 세계질서에 편입한 국가가 되었다는 공통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이제 이스라엘이 주도하는 가자지구의 질서가 정착된다면 또 하나의 중심국가로 기능을 발휘할 이스라엘이다. 북한과의 관계가 정리되면 그릴 수 있는 대한민국의 미래다. 그러나 전쟁을 바라보는 세계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고 서방 모두가 이스라엘 편만 든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을 위한 국가가 설립되는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 또는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이 누리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를 침해하는 어떠한 행위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도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영국 <벨푸어 선언> 중에서
밸푸어 선언으로 알려진 이 편지는 사실 대중에 공표한 선언이라기보다는 개인이 개인에게 보낸 편지 형식이었지만, 어쨌든 유대인 국가 건립을 목표로 하는 시온주의 운동에 불을 붙였다. 오랜 세월 나라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며 소수 인종, 소수 민족으로서 박해받던 유대인들은 선조들이 살던 땅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겠다는 꿈을 대영제국과의 약속을 통해 이루고자 했다.
세계 1차 대전은 전 세계 제국들이 편을 갈라 싸운 전쟁이었고 주요 승전국은 영국과 프랑스, 일본, 미국이었다. 패전국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이었다. 사실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붕괴를 노리고 아랍 지도자들과도 밀약을 맺는데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봉기를 일으키면 전쟁에서 승리한 뒤 아랍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데 힘을 보태겠다는 약속이었다. 갈등 사이에 있는 유대인과 아랍인들 중 한쪽에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셈이다. 먼저 땅 나누기와 선긋기를 시작한 영국이 그린 밑그림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창설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을 통해 승전국들은 패전국의 영토를 어떻게 분할, 통치할지 전리품을 나눠 갖듯 결정한다. 영국이 보호령으로 삼은 땅 중에는 오스만 제국의 치하에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도 포함되었다. 당시 이 지역에 사는 사람 대부분은 아랍인이었고, 90% 이상이 이슬람교를 믿었다. 기독교 신자들과 유대인들도 일부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그렇게 1923년부터 25년간 팔레스타인 지역을 보호령으로 삼은 영국은 밸푸어 선언에서 한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를 거치면서 유대인들이 대거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마찰이 잦아졌고, 영국의 노골적인 유대인 이주 정책에 불만을 품은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무자비하게 진압되기도 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 결과는 영국의 보호령 기간이 끝나기 1년 전인 1947년, 팔레스타인 지역에 사는 유대인의 비중은 전체 인구의 33%까지 늘어나면서 그들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이스라엘이 바라는 신념이 이루어지는 것이 그들이 원하는 궁극적 선일까.
이스라엘도 이번 전쟁에서 막대한 인명 피해를 보았다. 아직 인질 약 200명이 생사조차 불분명한 상태로 붙잡혀 있다고 한다. 하마스에 대한 반격으로 이스라엘은 전쟁 3일 차인 지난 10월 9일부터 가자지구 봉쇄를 선언하며 연료, 수도, 전기 공급을 끊었다. 이 같은 비인도적 처사는 민간인 생명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학살’, ‘집단처벌’이란 비판을 받았다. “전쟁에도 규칙이 있다.”(10월 13일), “하마스의 공격이 진공 상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10월 24일)라는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언급이 대표적이다. 다른 여러 국가도 이스라엘의 민간인 위협을 규탄했으나, 이스라엘은 자국이 본 피해를 호소하며 반박해왔다. 그들의 반박에 HRW의 클라이브 볼드윈 수석법률고문은 “국제인도법은 상대방이 무엇을 했는지와 무관하게 적용된다. ‘상대방이 먼저 공격했다.’는 이유로 내가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공격하거나 집단처벌을 가하는 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가자지구 참상을 규탄하는 중요한 단서는 이스라엘의 수단이 ‘목적에 비해 지나치다’는 것이다. 이는 곧 국제인도법상 ‘비례성의 원칙’을 위반했을 가능성을 지목한다.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많은 민간인 사상자와 파괴 규모를 고려할 때 자발리야 난민촌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습은 전쟁범죄에 해당할 수 있다는 지적은 이스라엘에게 불리한 정황이다. 그러나 여전히 하마스는 국제법을 위반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법해석이 우세하다.
하마스가 아동을 포함한 민간인을 살해한 것은 제네바협약, ICC의 전쟁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에 관한 규정 등 국제법 다수에 저촉된다고 밝혔다. 테러와 불법적인 행위를 행하는 하마스라는 단체가 국제법 적용을 받는 주체인지에 대해선 견해가 갈리기도 한다고 하지만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자체 군사력을 보유한 사실상의 통치자라는 점에서 국제법 준수 의무가 있다.”고 셰퍼 연구원은 유권해석했다. 그렇게 해석뿐이다.
이미 벌어진 전쟁범죄 혐의를 적극적으로 밝히겠다고 나선 ICC의 허무한 외침은 ‘오늘이 마지막 날’이란 생각으로 버티는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허언에 지나지 않거나 법 실행은 너무 멀다. ICC 상설재판소가 지난 21년 동안 내린 유죄판결이 10여 건에 불과하다는 점과 판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은 ‘국제법에 따른 정의’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미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행위는 법을 따지기 전에 반인륜적인 죄악이다. 그렇게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오랜 빛바랜 법언이 오늘날 가자지구에서 또다시 회자되고 있다.
포격이 쏟아진 초기에는 하마스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비례적인 명분으로 이스라엘도 평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폭력적인 공격과 무차별한 공습의 명분과 원인 제공자로 ‘하마스’를 걸고넘어지고 있는 형국은 이제 누구에게 잘못이 더 큰가를 따지는 비례성의 원칙은 넘어섰다. 스스로 법의 무용성을 증명하는 전쟁이다.
에필로그- 필요할 때 잘 써야 하는 사유의 힘
전쟁은 진행될수록 모순덩어리다. 어느 것이 센 창인지 어는 것이 강한 방패인지 모를 참상은 이제 공과 과를 나눌 의미가 없어 보인다. 양보나 타협이나 서로를 위한 협상을 할 대상과 치르는 것은 전쟁이 아니다. 누구도 이긴 것이 아니라 실패하는 전쟁은 공멸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해나 설득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는 전쟁에 돌입한 세계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전장에 선 둘에게 중요한 것은 명분이 아니라 서로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이고 원하는 것을 얻고야 말겠다는 투쟁의 장이 되어버린 전쟁터의 전사들만 있을 뿐이다. 하마스가 들고 나온 협상카드는 결국 인질이라는 악랄한 수였다. 이스라엘의 강력한 대응을 예상 못 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결국 자신들의 수가 먹힐 것이라는 선험적 경험의 수를 생각 없이 쓴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 것이라는 여지껏 제대로 성공한 적도 없는 방법으로 자신들의 요구만 여전한 팔레스타인이다. 이스라엘이 행하는 원론적인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생각하고 일을 시작하는 것은 경험하지 못한 일이 아니라 경험한 일에 대한 복기가 우선이다. 역사서의 전쟁이 가르쳐주는 학습효과는 차고 넘친다. 생각만으로 생각을 막을 수 없듯이 전쟁으로 어떤 전쟁도 막지 못한다. 어느 하나가 느슨해져도 결과는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경험과 생각으로 배우지 못한 지구촌이 뜨거운 학습장이 되었다. 일이 벌어진 후의 생각은 늦은 것 같아도 그렇게 알지 못하고 저지른 일에 대한 반성과 생각은 앞을 위한 추진력을 쌓는 일이다. 후회와 반성은 순서로 오지 않고 언제나 늦지만 후대에 남기는 기록이다. 사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이 중요한 이유다. 생각이 사건 앞에 먼저 오는지, 아니면 생각을 일이 벌어진 뒤에 하는지에 따라 결과는 천양지차다.
그렇게 사람의 생각은 순서가 중요하다. 먼저 생각하고 일을 추진하는 것은 생각의 힘을 빌리는 것이고 일이 벌어진 후의 생각은 더 나은 힘을 비축하는 것이다. 생각은 늘 언제나 잘 써야 하는 인류의 동력이다. 생각으로 생각을 멈출 수 없듯이 전쟁으로 다른 전쟁을 막거나 멈출 수 없다. 그럼에도 인류는 누군가의 습관적인 생각에 인류가 볼모가 되는 전쟁을 반복하고 있다. 오늘도 지구는 나누이고 부서지고 있다. 멀리서 가까이서 들리는 포성은 멈출 수 없는 생각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