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제사 – 곤밥에 궤기국 / 강 서
한국인만큼 제사나 명절에 열성인 민족이 또 있을까. 정작 공자의 나라인 중국은 우리만큼 요란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도 소박하게 명절을 지내고 있다. 공자의 아버지는 70세에 공자를 낳아서 아들이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공자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효에 대한 갈망이 많았을 것 같다.
조선에 제사가 들어오면서 사대부가만 지내던 것이 평민에게까지 그 풍속이 전해져 지금에 이르렀다.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삼 년 상을 모셨는데 부모의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시묘살이한 이들도 있지 않은가.
중국 송나라의 학자 주희가 가정에서 행해지던 예절을 모아서 만든 책 『가례』(家禮) 가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가문에 따라 변형되어 지금까지 제사와 차례 문화가 마치 우리 전통인 것처럼 지내고 있다. 주희가 1200년대에 사망했으니, 그가 죽고 나서 800년 넘게 그가 남긴 예법이 중국도 아닌 한국에서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예학자 이동후는 “제사를 지내는 까닭은 돌아가신 조상을 공경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또 가족과 집안의 공동체 의식을 부여해 화목과 단합을 하게 만든다.”라고 했다. 덧없는 인생을 살고 세상을 떠나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고인에겐 후손의 존경과 기림이 필요하다.
인간이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조상이나 위대한 사람을 그리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그 혼령이 제사음식을 흠향하고 그 대가로 복을 내려주기를 기원해서일까. 아마 두 가지 모두 해당할 것이다. 예를 들어 충무공을 기리는 제사를 지냄은 그의 공훈을 기억하고 죽어서도 우리나라를 지켜 주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이능화는 『조선여속고』에서 한국 사람들이 후사를 얻는데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가 하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 조선 사람은 아들을 연이어 낳고자 하는데 아들이 없으면 축첩을 해서라도 아들 얻기를 바란다. 여자로서 아들을 낳지 못하면 병이라 하였고, 일곱 가지 죄의 하나 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유교의 근본숭상제도인 조상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내는 일을 가장 높게 여기기 때문이었다. 조상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부모의 노후를 위해 아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제주의 여러 마을에는 자식을 얻기 위한 당이 있다. 제주시 동광양의 미륵보살물할망당, 와산의 불돗당, 함덕의 서물한집, 김녕의 서문하르방당 등이 대표적이다. 소문난 당에 심방을 대동하여 가거나 혼자 가서 예를 행하면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심방을 불러 치르는 불도맞이굿은 자식을 얻기 위한 개별의례로 행하는 굿이다. 불도는 산신이며 아이의 잉태, 출산을 관장하는 신이므로 불도맞이를 하면 자식을 낳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제주시 이도이동 동광양에 있는 ‘웨새미’라는 샘물에 미륵 석상이 있었는데, 이 신은 웨새미라는 샘의 수신(水神)인 동시에, 아기를 점지해 주는 ‘생불할망’인 산신이다. 이 신에게 기원할 때는 “수덕좋은 웨새미 물할마님, 이 자손을 좋게 해여 줍서. 엇인(없는) 애기도 내와줍서. 엇인 멩(命)도 이어줍서. 엇인 복도 재겨줍서(쌓아 줍서).” 라고 빈다. 미륵불은 현재 사라졌지만 이 모든 것이 후사를 이어주고 제사를 지내줄 아들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자녀를 갖고 싶은 마음으로 행하는 주술 의례도 많은데, 아이를 많이 낳은 여인의 속옷을 빌려 입거나 훔쳐 입는다. 아들을 낳은 집에 쳐 놓은 금줄을 훔쳐다가 잘 모시는 경우도 있다. 또 아기 낳은 집의 삼승할망상에 올려둔 쌀을 훔쳐다가 이레 동안 비는 풍습도 있다. 이것은 유사는 유사를 낳는다는 유감주술에 근거한다. 한동안 제주가 신혼여행지로 주목받을 때, 돌하르방의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퍼져 제주의 많은 돌하르방 코가 수난 당하던 때가 있었다.
평범한 삶을 살다 간 조상을 위한 제사는 조상이 있으므로 해서 내가 있음을 다시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더불어 후손을 보호해 주고 복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릴 때 제상 앞에서 비념하며 중얼중얼하던 어른들을 보았다. 가족이 아프거나 시험을 보는 자손이 있을 때, 또는 큰일을 앞두었을 때 제사 방에 들어가 비손을 하는 것이다.
제 의식은 유교뿐 아니라 많은 종교에서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가톨릭의 미사도 예수님의 탄생과 고난, 죽음과 부활 등을 재현하는 제사이다. 불교의 49재도 사전적 의미에서는 유교적 조상숭배와 불교의 윤회사상이 절충된 것이라고 본다.
‘무아설’에 따르면 ‘개인의 생전 행위 자체에 대한 업보는 그 사람 개인에 한정되며 자손이나 그 누구에게도 전가될 수 없으며 전가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교 사상은 49일 동안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하여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여 제를 올리면 죽은 부모나 조상이 후예들의 공덕에 힘입어 보다 좋은 곳에 인간으로 태어나고, 또한 조상의 혼령이 후손들에게 복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무아설과는 다른 육도 사상적 해석에 따르면 삼악도(지옥도·아귀도·축생도)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7일씩 7주간 비는 행위가 49재라는 설도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천국과 지옥을 가기 전에 후손들이 고인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주고 경을 읽으며 기도를 해주는 기간이다.
인간은 구약 시대에도 하느님께 제사를 바쳤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을 받았다. 먼 길을 걸어 아들을 번제로 바치려는 순간 “그 아이를 다치게 하지 말라.”라는 말이 들려왔다. 가시덤불에 걸린 양을 대신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은 묶어서 장작 위에 뉘어 놓은 아들을 살리고 양을 제물로 바쳤다. 하느님은 그의 믿음을 시험해 보려고 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제는 조상을 위한 제사나 명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명절은 전국의 고속도로가 막히고 자동차 정체가 넘쳐난다. 여성의 입장에서 때로는 얼굴도 모르는 남편의 조상님을 위해 종일토록 전을 부치고 동동거려야 한다. 거기에다 고부갈등이 있으면 최악이다. 명절이 지나면 이혼율이 높아진다는 뉴스도 어제오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여행을 가거나 호텔에서 휴가를 즐기는 이가 많다는 뉴스를 접한다. 명절이 끝나면 홈쇼핑 방송에서는 고생한 아내에게 보석을 선물하라 하고, 고급 모피를 사주라고 부추긴다. 그만큼 우리 생활에 제사와 명절은 깊게 파고든 일상이다.
가장 큰 불효는 후손이 없음이요, 또 하나는 후손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함이라, 후손 잇기와 제사는 뿌리 깊은 유산이 되어 한국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양자 들이는 풍습은 거의 사라졌다. 그만큼 제사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얼마 전 성인 10명 중 6명은 제사나 명절을 지내지 않겠다고 하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우리는 현재 조선 오백 년 골수에 박힌 이념이 희석되어 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옛날엔 딸만 있는 집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시각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느 집은 아들을 두 명이나 두었지만, 나이 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제사나 명절을 지내지 못하게 되었다. 음식을 만들 여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들 둘의 가정도 이혼으로 해체되어 제사나 명절은 자연히 없어져 버렸다. 명절날에 늙은 아버지와 아들은 티비만 봤다고 한다. 현대 시대를 실감 나게 하는 얘기다.
제사는 어릴 때부터 보아왔다. 친척 집에 제사를 지내러 가기도 하고 그들이 우리 집에 오기도 했다. 외할아버지 제삿날에는 영정 사진을 보면서 생전 그분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떠올린다. 할아버지는 호열자에 나의 외할머니를 잃고 재취하셨다. 그 할머니는 자식도 낳아보지 못하고 재산만 늘리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세 분의 외삼촌을 낳아주신 할머니를 맞아들이셨다.
1930년경 제주의 농촌에서 부인이 없는 생활은 큰 일손과 의지처를 잃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밭도 많았고 큰 배를 부려 원정 물질(해녀가 제주를 떠나 육지나 일본 등지로 돈벌이 가는 일)의 선주가 되시어 일본을 비롯하여 여러 곳을 다녀온 분이시다. 큰외삼촌은 일본에서 대학 공부를 했고, 장손이 서울의 대학에 진학했을 때 송아지를 팔아 학비를 대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사상에 할아버지의 사진과 함께 놓인 할머니 영정 사진들을 보며 그분의 희로애락을 떠올려 본다. 부인을 잃을 때마다 할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남편의 제삿날에 따라오신다고
하여 부인 삼위의 사진을 모셔놓았다.
어릴 때의 기억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소를 여러 마리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꼴밭과 땔감을 위한 소나무밭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꼴밭에서 야생 참외를 덩굴째 걷어다 주셨다. 또 알맹이가 크고 잘 익은 보리수 열매를 가지 채 꺾어서 지게에 얹고 와 우리 형제들을 기쁘게 해주셨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감사의 마음과 그리움이 어우러진다.
제사상을 보면 옆에 ‘안내(安內)상’이 모셔져 있다. 제주의 신화 서사무가인 ‘칠성본풀이’의 안칠성을 위한 상이다. 장설룡 대감과 송설룡 부인의 따님 아기인 칠성신이다. 그 칠성아기씨는 사신(蛇神)인데 딸을 일곱 낳았다. 어미 뱀신은 고방에 좌정해 안칠성(안내할망 또는 안할망)이 되었다. 사람들은 안칠성을 섬겨 제사와 명절날 고방에 가장 큰 항아리 위에 상을 차렸다. 집에 따라서 제사 방에 작은 상을 마련하거나 밑바닥에 진설하기도 한다.
서쪽 편에는 다른 제상이 차려져 있다. ‘문전상’이라고 하는데 제주의 서사무가 ‘문전본풀이’의 일곱째 아들 녹디생이를 위한 상이다. 제주에서는 거의 모든 제례에 ‘문전제’를 지내는데 가내 신(神)들 가운데 가장 으뜸인 신이라 할 수 있다. 제주의 신화가 아직도 생활에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문전신은 문을 지키는 신이며 가택신이다. 신화에서 간악한 노일저대귀일의 꼬임에 빠진 남 선비는 장사밑천을 날리고 그녀와 부부가 된다. 채밥만 얻어먹고 살다 영양실조에 걸린 남 선비는 눈마저 멀게 된다. 노일저대귀일은 남편을 찾아온 여산부인을 주천강 연못에 목욕하러 가자고 꾀어 물에 빠뜨린다. 그리고는 자신이 여산부인 양 남 선비와 함께 제주로 돌아온다.
녹디생이는 “우리 어머님이 맞으면 우리 집을 가르쳐 봅서.”하며 시험한다.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며 찾지 못하자 영리하고 지혜로운 막내아들은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다. 그것을 안 노일저대귀일은 일곱 아들을 죽이려고 여러 가지 꾀를 낸다. 결국 형제들이 달려드니 변소로 달아나다 머리 타래가 디딜판에 감겨 죽게 되었다. 그리하여 변소에 좌정해 ‘측간신’이 되었다.
새마을 운동 당시에 측간 귀신 때문에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적이 있다. 우리 동네 사람 누구도 변소 개량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공무원들은 꽁지가 빠지게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호소해 보았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외삼촌의 말씀에 따르면 실적이 너무 저조하자 하루는 윗선의 한 사람이 농가를 찾았다. 그가 농부에게 이유를 물어보자 변소는 측간 귀신이 있어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동티가 나고 집안에 궂은일이 생길 수 있어서 꺼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고심을 하다가 무릎을 탁 쳤다. 다음날 백지에 붓글씨로 크게 ‘官令(관령)’이라 쓴 것을 변소 돌담에 놓고 그 위에 돌멩이를 얹었다. 그러고 나서 집주인을 설득했다. 관에서 내리는 명령이라 그 누구도 어쩔 수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많은 집이 변소를 계량했고 노일저대귀일 측간신도 어쩌지 못했다.
측간신이 내리는 동티를 두려워하던 때의 이야기가 또 있다. ‘일제시대에 7월 장마가 끝난 뒤 청결일이라는 날이 있었다. 청결일에는 집안에서 모든 가구를 멍석에 꺼내어 깔아놓고 집 안을 청소하면, 일본 순사가 돌아다니면서 검사를 한다. 그래서 청소가 잘 된 집들은 조그만 쇠로 된 카드를 대문에 붙여서 가구와 집기들을 방안으로 들여놓게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이 관(官)에 해당하는 순사에게 미리 가서 “우리 집에 검사 오거든 ‘왜 화장실을 수리하지 않았느냐?’면서 뺨을 때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그 순사가 그 집에 가서 다른 데는 청결한데 왜 화장실을 수리하지 않았냐고 뺨을 때렸고, “예, 예.”하면서 화장실을 고쳐서 아무런 탈이 없었다는 얘기가 있다.’ 측간신은 잘못하면 동티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또한 측간신은 제사와 관련이 있다.
친척 집의 제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변소를 꼭 거쳐야 했다. 떡 구덕 속의 음식들을 조금씩 떼서 고수레한다. 그렇지 않으면 측간신이 노해서 제사음식을 먹어 체하거나 탈이 나게 한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변소에 갈 때는 가볍게 기침을 하는데 이는 변덕스러운 여성신인 측간신이 놀라는 것을 막기 위한 노크 또는 신호인 것이다.
조상을 잘 섬겨야 자손이 복을 받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보통 나이 든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한다. 제사음식을 풍부하게 장만하는 며느리를 좋게 여기는 어른도 있다. 아마 먹을 게 없었던 시절에 많은 음식은 보기에 흡족했으리라.
같은 제주 지역이라도 제상에 올리는 제물은 지역과 가문에 따라 다르다. 보통 송편과 절편, 침떡(시루떡)과 기름떡 등을 올린다. 이것은 해와 달과 별을 상징한다. 쇠고기와 돼지고기 산적, 마른 생선구이와 두부를 지져 올린다. 메밀묵 대신 두부를 쓰는 것이다. 삼색나물로는 콩나물과 고사리가 기본이고 미나리나 부추를 나물로 올린다.
제주의 제사에서 고사리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사월에서 오월은 제주 사람들이 고사리를 장만해 놓아야 하는 시기이다.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사람들은 산과 들로 고사리를 채취하러 다닌다. 제사나 명절을 지내는 집은 당연히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제사상에 고사리나물이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는 고사리 장마가 오는데 하루 이틀 비가 오고 이삼일 갠다. 고사리가 자라기에 아주 좋은 기후다. 짧게 반복되는 비 오는 날씨에 고사리는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게 자란다. 비가 개면 고사리를 꺾으러 들로 나간다. 아침 일찍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남이 꺾고 지나간 자리에 수확할 게 없다.
옛말에 “고사리 ᄒᆞᆫ 줌이민 식게 멩질 다 ᄒᆞᆫ다.” 라고 했다. 고사리 한 줌이면 제사와 명절을 다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어릴 때도 고사리는 귀하게 쓰였다. 산 자의 음식이 아니라 죽은 자의 음식이었다. 날것을 삶아서 봄볕에 말리면 누가 도둑질이라도 한 것처럼 양이 하찮게 줄어든다. 제사 때 쓰는 고사리는 고운 데서 채취해야 한다. 무덤 위의 것이나 먼지가 많은 길가의 것은 쓰지 않는다.
고사리는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봄에 싹을 틔우는 나무나 풀의 순은 세 번 뜯으면 더 이상 싹을 내밀지 않는다고 한다. 힘이 다한 것이다. 하지만 고사리는 꺾어도 꺾어도 아홉 번 열 번을 악착같이 싹이 다시 돋는다. 그래서 “고사리는 아홉 형제다.”라고 한다. 자손이 고사리처럼 끊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사리를 제상에 올리는 것이다.
제사 때 고사리는 나물로도 쓰이지만 전도 지진다. 고사리 전은 달걀물을 풀어 동그랗게 모양을 만든다. 그 위에 삶은 고사리 한두 개를 얹는다. 제사를 흠향하러 온 영혼은 고사리 전을 보따리 삼아 음식을 싸서 가는데 고사리로 묶어 어깨에 짊어지고 간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런 말을 듣고 나서부터 고사리 전은 크게 부친다고 한다.
제주의 제사도 많은 변화를 거쳐 왔다. 1970년대 우리 마을엔 빵집이 없었다. 대신 가정집에서 빵을 만들어 팔았다. 떡 구덕(제물 구덕, 떡을 넣는 바구니)에 탑을 쌓듯이 위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모양으로 빵을 가득 채워 보자기에 싸서 제삿집에 갖고 갔다.
친척이 많은 집은 각기 다른 색의 보자기를 묶은 제물 구덕이 제사 방 안에 가득했다. 비슷비슷한 크기의 바구니이기 때문에 나중에 보자기를 보고 자기 것을 찾아간다. 파제 후 집으로 돌아오면 구덕 속에 제사 집 안주인이 넣은 여러 가지 음식이 들어있어 집에 남아 있는 식구들이 먹을 수 있었다.
1980년대 들면서 제삿집에 갈 때는 많은 이가 음료수 세트를 들고 갔다. 그러던 것이 요즘엔 봉투에 돈을 넣어 제상에 올린다. 이삼만 원부터 십만 원까지 망자와의 관계에 따라 금액은 변한다.
제삿집에선 파제할 시간이 되어 메와 갱이 준비되면 “관세ᄒᆞᆸ서(손 씻음).”라는 말과 함께 제에 참석할 남성들은 손을 씻고 파제 준비를 한다. 제사 방의 문을 열고 한 사람은 들어가 집사가 되어 수저를 밥 위에 꽂기도 하고 술을 따라 바친다. 방 밖에 꿇어앉은 제 보는 사람들은 약 15분 정도 제를 보고 두 번의 절로 마친다. 그러고 나면 나머지 사람들은 나이순으로 절을 한다.
파제 후에 영혼을 따라온 잡신을 위해 제사 음식을 조금씩 떼어 대문 밖 구석이나 지붕에 고수레한다. 방에는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큰 상이 들어간다. 어른들이 둘러앉아 음복을 한다. 식사가 끝나면 제상에 올렸던 갖가지 과일을 후식으로 드린다.
안주인은 친척들이 돌아갈 때 보낼 음식을 싸기에 여념이 없다. 적을 비롯하여 각종 떡, 튀김 등을 골고루 넣고 각자의 손에 들려 보낸다. 노인이 있는 집에만 산적 같은 고기를 보내기도 한다.
요즘 제삿날 손님의 초저녁 식사나 안주를 위해 준비하는 음식은 집마다 다르다. 어떤 곳은 날미역의 떫은맛을 제거하고 데친 성게알이나 해삼을 넣어 국물이 낙낙한 미역무침을 만든다. 해삼 대신 전복을 넣기도 한다. 또 미나리와 오이, 배 등을 넣어 문어나 소라로 회무침을 만들어 상에 낸다.
겨울이면 따끈한 쇠고기뭇국 등을 끓이고 제사상에 괴고 남은 산적이나 전, 잡채를 대접한다. 잡채는 잘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여름 제사에는 자리돔을 식초로 연하게 만든 다음 배와 오이, 미나리와 깻잎 등을 넣어 시원한 자리 회무침을 손님상에 낸다.
옛날 제삿집에선 초저녁에 간단하게 먹고 파제 후 음복을 할 때 정식으로 밥과 국을 먹었다. 종갓집 같은 경우 여름에, 너른 마당에 멍석을 서너 개 펴서 앉았다. 집안에도 그득 들어찬 그들을 다 먹이려면 얼마나 많은 음식이 필요했을까.
초저녁에 손님에게 내는 음식은 빈약했다. 콩나물무침 한 접시에 빵이나 떡 하나씩을 주었다. 콩나물도 기르지 못한 집은 늙은 호박을 잘 간수해 두었다가 쪽파를 살짝 곁들인 정갈한 호박 나물을 대접하기도 했다. 상도 없이 바닥에서 먹었다. 그러나 남자 어른들 대접은 달랐다. 술상을 차려야 하므로 적이나 몇 가지 먹을 만한 음식을 내야 했다.
벌써 이십여 년 전이다. 어머니께선 외할아버지 제삿날이 돌아오면 빙떡을 이백 개 이상 만드셨다. 동이는 놋쇠로 만든 제물 담는 용기인데 빵이나 떡을 담는다. 아무 제사 때나 쓰는 것도 아니다. 보통 부모님이나 중요한 어른의 제사 때 사용한다. 동이는 떡 구덕보다 크기 때문에 제물도 많이 들어간다. 제삿집에 갈 때는 가는 대(竹)로 만든 중간 크기의 구덕에 넣어서 지고 간다. 빙떡이 많이 담긴 동이는 무거웠다. 어머니는 동이에 빙떡을 가득 담으셨다. 음식 부조나마 푸짐하게 하고 싶으신 것이다. 나머지는 동네에 늙으신네 계신 집마다 나누어 보내셨다.
우리 집에선 제에 올리는 음식에 고춧가루나 마늘은 사용하지 않았다. 간을 보는 것도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고 어머니께서 주의를 주셨다. 제사에 쓰기 위해 마련한 음식 중에서 윗부분의 것은 절대 먹어서도 안 되었다. 그래서 제상에는 올리지 않지만 음식을 따로 만드는 것이다.
때로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 살아있는 이들의 복을 기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귀신이 어디 있다고, 죽은 조상신이 먹고 가는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어릴 때 어머니에게서 들은 얘기는 희한했다.
동네에 있는 숙이네 집은 할아버지 제사를 맞아 시루떡을 안치고 적을 돌화로에 구워 제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숙이 아버지가 꿈을 꾸었는데 오늘 제사를 지낸 고인이 배고파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이고 아버님. 오늘 제사를 지냈는데 어째서 굶은 모습입니까?”
“네 이놈, 너희 집 올레에 큰 배염이 있어서 나를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내가 제사를 먹지 못하였노라. 왜 배염을 집에 들였느냐?”
“네? 뱀이라뇨. 그런 것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차리겠습니다.”
“아니다. 그 배염이 있는 한 나는 네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밖거리(바깥채)에 예수 믿는 사람이 살면 귀신은 들어가 제물을 먹을 수 없다. 내가 너무 오래 물을 굶었다. 그래서 너희 살림도 나아지지 않는 것이다.”
제사가 끝난 다음 날, 제사떡을 나누며 이 이야기는 동네에 퍼졌고 그것을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잖아도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집 빌려 주기를 꺼렸는데, 그 소문 때문에 그들은 집 얻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성당을 다니는 사람은 제사를 지내는데도 바깥채 빌려주기를 거부했다. 사람들은 예수보다 조상신이 약하기 때문에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제주도 풍습에 ‘까마귀 모른 식게’라는 말이 있다. ‘식게’는 ‘제사’의 제주어이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거나, 외손 봉사나 후손 없이 죽은 아버지 형제의 제사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가까운 친척도 오지 않는 제사로 부모와 자식만 참석하고 조용히 지내는 것이다. 자식은 제물로 부모의 집에 제사를 모시러 갈 때 떡 한 구덕과 술 한 병을 가지고 간다. 제사가 끝나면 간단하게 가까운 이웃과 나눈다.
“낼 하르방 식게 먹으레 갈거여.” 라는 말에서 내일은 할아버지 제삿날이라는 말보다 먹는다는 것에 더 의미를 둔 것처럼 보인다. 아녀자들이 보통 하는 말 중에 “메틀 후제 먹을 일 싯저.” 하는 말은 며칠 후에 먹을 일이 있다는 말인데 제사가 있다는 말이다. 이 말에서도 제사라는 것보다 먹는다는 행위에 더 초점이 맞춰진 것처럼 느껴진다. 옛날에는 먹을 것이 없어 제삿날이 되어서나 곤밥(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음식이 귀했기 때문에 말도 이렇게 만들어진 것일까.
겡거리는 우럭이나 도미 등 싱싱한 생선을 썼는데 가시를 쳐내어 미역을 넣어 끓였다. 이것을 궤깃국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궤깃국은 쇠고기국이 아닌 생선국을 말함이었다. 요즘은 쇠고기로 겡을 끓여도 어른들이 말없이 봐주신다.
“식게칩 아이 몹씬다.”라는 말은 40대 이상의 제주인이면 많은 이가 경험했을 말이다. 누구네 집이 오늘 제사라는 것은 아이들이 더 잘 안다. 며칠 전부터 친구가 자랑하기 때문이다. 제삿집 아이가 떡을 들고 우쭐거리며 나타나면 한 귀퉁이라도 떼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동네 아이들은 더 친하게 굴었다.
떡 가진 아이가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자리를 옮기면 아이들은 몰려다니며 긴 꼬리를 만들었다. 침을 꿀꺽 삼키게 하는 붉은 팥을 넣은 떡은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금방 쪄낸 따뜻한 떡은 얼마나 먹음직스러운가.
어머니는 제사가 돌아오면 ‘제숙’이라 하여 배 가른 생선 여러 마리를 미리 말려 두셨다. 마른 생선은 보리 항아리 속에 간수해 두신다. 귀한 음식이라며 상어적도 꼭 만드셨다. 결혼 후 시댁의 제사상에 건 삼치의 가운데 가시를 제거하고 알맞게 썰어서 양념에 재어 어적으로 쓰는 것을 보게 되었다. 상어처럼 비싸지 않으면서도 담백한 맛의 삼치적은 마음에 쏙 들었다.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한다하는 집도 상어적은 세는 거 아니가.”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최고로 친다는 것이다.
결혼 전 어머니가 제사를 지낼 때 빠지지 않는 게 메밀묵이었다. 고운 메밀쌀을 준비해서 물에 치대어 묵을 만들었는데 시댁의 제사상에는 메밀묵 대신 두부를 지져 올렸다. 두부는 소금을 뿌려 수분을 제거하고 팬에 부쳐 노릇노릇하게 지져 냈다. 그래서 집마다 제사를 준비하는 사람에 따라 제상의 음식은 조금씩 달리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모슬포 쪽에서는 방어를 시들시들 말렸다가 어적을 만들기도 한다. 알맞게 썰어서 갖은양념을 하고 기름 두른 팬에서 구워낸다. 가지런히 꿰어진 방어적 굽는 냄새는 입맛을 돋운다. 제주는 바다가 인접하여 있으므로 싱싱한 해산물로 만든 어적의 종류가 많다.
집안에 따라 뿔소라를 익혀 양념하여 적꽂이에 꿰서 지져낸다. 요즘은 전복으로 적을 만들기도 한다. 여름 제사에는 양념한 한치를 통째로 굽는데 양옆으로 칼집을 넣어 뒤틀리지 않게 가운데 꼬지를 꽂아 지진다. 고소하고 담백한 맛을 위해 너무 오래 익히지 않아야 한다. 문어는 ‘문게적’으로 불린다. 익힌 문어는 먹음직한 붉은색으로 변하는데 썰어서 양념하여 적꼬지에 꿴다. 한치적과 소라적, 문어적 등이 인기가 좋다.
제주는 오래전부터 돼지고기를 많이 사용하여서 그런지 돼지고기 산적이 쇠고기보다 인기가 좋은 것 같다. 제사나 명절을 지내고 나서도 부드럽고 좋은 냄새를 풍기는 돼지고기 산적이 먼저 냉장고에서 사라진다. 쇠고기 산적은 이삼일 간 전자레인지에 몇 번 데웠으므로 한우의 이름이 무색해진다.
몇 년 전, 명절날 음식물 쓰레기를 비우러 갔다가 놀라서 가슴을 누르며 온 적이 있다. 쓰레기통 안에는 적꼬지도 빼지 않은 쇠고기와 돼지고기 산적이 세 꼬지씩 버려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가. 이렇게 멀쩡한 음식을 버린 이는 누구인가.
고향 마을에서 정육점을 경영하는 지인이 한 말을 듣고 놀란 적이 있는데 사실인가 보다. 명절에는 육고기의 적감을 예약 받아 썰어 두었다가 내주는데 요즘은 상에만 올리고 먹지 않는 사람은 한우가 아닌 수입 쇠고기를 주문한다고 했다.
“아니, 얼마나 부자이길래 그래요?”
“그냥 보통 사람이야.”
“진짜예요?”
“진짜야.”
우리 세대는 어린 시절부터 음식을 귀히 여기는 것을 보고 자랐다. 음식을 버리는 것만큼 큰 죄는 없다고 했다. 봄이 되어 김장이 너무 시어지면 씻어 물에 담갔다 갓 잡은 고등어에 지져 먹었다. 그리고 보리밥이 쉬면 쉰다리를 해서 먹었다. 실제로 웬만큼 쉰 것은 탈이 나지 않는다며 아이들에게는 먹이지 않고 어른들이 먹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음식을 버릴 때는 북한 동포 생각도 나고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람이 얼마나 애써야 음식이 입에 들어오는지 알고 있다. 농사도 뙤약볕 아래 김을 매야 하고 곱은 손을 호호 불며 일을 해도 땅은 겨우 평년치의 곡식을 낼까 말까 했다. 잡초는 퇴비가 없어도 무럭무럭 자라지만 보리나 조는 그러지 않았다.
또 생선은 어떤가. 인간이 맨손으로 쉽게 잡을 수 있는 곳에 와서 누워 펄떡이는 물고기가 있던가. 높은 파도와의 싸움이고 인간의 손길을 피하려는 생명체와의 싸움이다. 아무리 풍요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해도 멀쩡한 음식을 버리는 것은 죄악 같이 느껴진다.
요즘 제주인들은 집안에 따라 제사와 명절을 형제가 나누어 지내기도 하고, 조부모와 부모의 제사를 한 날에 지내기도 한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제사의 풍속도 급변했다. 명절이 끝나면 중고 거래 사이트에 제례용 놋그릇을 내놓는 이가 많다. 향로나 향납부터 촛대, 밥그릇 국그릇, 나물 올리는 접시까지 쇠붙이 가격도 안 되게 거래가 되는 것을 보았다. 제기를 보관했던 궤짝까지 함께 거래된다. ‘팔십 세 어머니가 평생 쓰시던 제사용 그릇입니다.’ 또는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어 내놓습니다.’ 라는 문구도 심심찮게 보인다. 나무로 만든 붉은색 제기는 돈도 받지 못한다.
시대가 변해가는 것을 체감한다. 제사음식을 대행해 주는 업체도 많이 생겼다. 떡도 제사가 끝나면 여러 날 냉동고에서 이리저리 치인다. 이렇게 변하는 사이 우리의 마음 또한 옛것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십 년 후, 또는 이십 년 후 제주의 제사 문화가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 알 수 없다.
참고문헌 : 윤용택 『제주도 신구간 풍속 연구』 현승환 『제주인의 일생』
첫댓글 제주문화. 매번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