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이야기 - 돈되는 영화만들기에 대한 이야기
상상력! 있으면 살아남고 없으면 도태된다
《지난달 개봉한 미국 할리우드 영화 ‘아바타’의 흥행속도가 무섭습니다. ‘타이타닉’을 만든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12년 만에 연출한 이 영화는 6일 현재 10억9874만 달러(약 1조2500억 원)를 벌어들이면서 ‘타이타닉’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에 이어 전 세계 역대 흥행 3위에 올랐습니다. 국내에서도 개봉 21일 만에 관객 700만 명을 넘어섰으며, 조만간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을 제치고 역대 외화 중 최고 흥행기록을 세울 것으로 전망됩니다. 이런 추세라면 국내 개봉 외화론 처음으로 1000만 관객을 넘어서는 흥행신화를 세울 가능성이 높지요.》
사실, 아바타의 내용은 새로울 게 없습니다. 문명세계의 인간이 자연친화적으로 살아가는 원주민들에게 감화돼 그들의 편에 서서 문명사회에 반기를 든다는 줄거리는 ‘늑대와 춤을’(1990년) 같은 수정주의 서부극(백인들의 미국대륙 개척이 원주민인 인디언들에게 문명의 혜택을 가져다주었다는 기존 서부극의 시각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장르로, 서부개척의 본질은 영토확장을 위한 침탈이었다고 보는 새로운 관점의 서부극)에서 익히 보아온 것이지요. 공룡을 모델로 한 듯한 각종 외계생물들은 ‘쥬라기 공원’ 같은 영화에서 본 낯익은 캐릭터이며, 자연은 물론 만물에 영혼이 서려있다는 애니미즘적 세계관은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에서 경험한 바 있지요.하지만, 아바타는 21세기를 빛낸 영화의 목록에 이름을 올릴 공산이 큽니다. 왜냐고요? ‘영화’라고 하는 매체가 가야할 길을 새롭게 제시한 선각자적인 작품이 바로 이 영화이기 때문이지요. 이 영화는 영화를 ‘관람’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으로 확대하는 혁명적인 시도를 했답니다.
[1] 스토리라인
미래. 에너지원이 고갈된 지구는 머나먼 행성 판도라에서 대체 자원을 채굴합니다. 그러나 판도라의 원주민인 ‘나비’족의 방해로 쉽지가 않죠. 이에 인간들은 나비족과 같은 외형을 한 ‘아바타’를 개발합니다. 아바타는 인간의 정신과 연결해 원격조종이 가능토록 만들어진 신개념 생명체이지요.
하반신이 마비된 전직 해병대원 ‘제이크’가 아바타 프로그램에 참여합니다. 아바타를 통해 신체의 자유를 얻게 된 제이크는 명령에 따라 나비족 속으로 침투합니다. 이 과정에서 제이크는 나비족 여전사 ‘네이티리’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함께 전사가 되기 위한 위험하고도 낭만적인 여정을 거칩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자연만물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나비족의 모습에 동화되면서 제이크(의 아바타)는 그만 네이티리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지요.
이윽고 인간은 각종 첨단무기를 앞세워 나비족의 근거지를 습격해오고, 제이크는 나비족과 함께 인간에 맞서 목숨을 건 투쟁을 시작합니다.
[2] 생각 키우기
아바타의 흥행속도가 이토록 빠른 이유는 뭘까요? 3D(입체)상영을 보는 관객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3D상영은 일반 상영보다 2배가량 비싼 관람료를 지불해야 하지만, 관객들은 이 영화를 3D상영으로 보기 위해 지금도 길게 줄을 늘어서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본 총관객의 25%가 3D영화를 본 것으로 집계되며, 3D상영을 통해 벌어들인 수입은 이 영화 전체 흥행수입의 40%에 육박하고 있지요.
특수안경을 착용하는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3D영화에 열광한 것은 이 영화가 처음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영화란 매체가 가야할 미래를 보여준 역사적인 작품으로 기록되리란 평가가 나오고 있는 것이지요.
아바타가 3D 혁명을 이룬 배경에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경이로운 수준의 영상과 스펙터클이 있었습니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이모션 캡처’라고 명명한 신기술을 선보였는데요. ‘감정(이모션·emotion)까지 잡아낸다’는 뜻을 가진 이모션 캡처는 실제 배우들의 동작을 하나하나 센서로 포착해 이를 컴퓨터그래픽 이미지로 변환하는 기존 ‘모션 캡처’ 기술을 뛰어넘어, 배우의 미세한 얼굴표정까지 모두 잡아내어 사실성을 극대화한 첨단기술이지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영상은 혁명이라 할 만합니다. ‘트랜스포머’가 실사(實寫·카메라로 실제 촬영한 것) 이미지 위에다가 CG로 만든 로봇들의 이미지를 거의 완벽에 가깝게 합성해 ‘새로운 영상세계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아바타는 트랜스포머의 상상력과 기술력을 훌쩍 뛰어넘어버립니다. 이 영화엔 실사와 CG의 구분 자체가 없습니다. 실사로 찍은 인간들의 모습과 CG를 통해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된 나비족 세계의 모습은 경계를 구분 짓기가 불가능합니다.
아! 현실이 가상이요, 가상이 현실인 영화가 탄생한 것이지요.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장자의 ‘제물론’에 등장하는 말로, ‘꿈에 내가 나비가 되어 즐기는데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물아·物我가 한 몸이 된 경지)이 영상을 통해 구현된단 얘깁니다.
완벽에 가까운 영상을 통한 3D혁명으로 이 영화는 그동안 영화란 매체가 맞닥뜨려온 문제와 한계를 뛰어넘을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이 영화는 영화를 단지 ‘관람’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으로 확장했단 얘깁니다. 극장에 가서 입체안경을 끼고 거대한 스크린을 직접 바라보아야만 이 영화를 제대로 즐겼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니 제 아무리 불법다운로드를 받더라도 이 영화의 극장수입에는 악영향을 미칠 수가 없지요(심지어는 불법다운로드를 받아 컴퓨터 모니터로 이 영화를 보고는 ‘와! 이런 영화는 극장에서 3D로 봐야 제 맛이야’라며 외려 극장을 찾는 관객까지 생겨나고 있습니다). 제 아무리 불법다운로드가 기승을 부릴지라도, 그리고 화려한 영상기술을 뽐내는 평면TV들이 생산될지라도 아바타 같은 영화가 나온다면 극장에서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게 아니겠어요?
이런 맥락에서 아바타는 35년 전에 만들어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출세작 ‘죠스’(1975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들려드릴 게요.
1950년대부터 컬러TV가 미국의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했고 70년대에 컬러TV의 인기는 정점에 달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TV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영화를 굳이 극장에서 봐야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어요. 서서히 극장을 찾는 관객의 발길은 뜸해졌고, 극장매출이 줄어들면서 ‘이러다간 영화산업이 고사(枯死)하고 말 것’이란 예측까지 나왔지요.
바로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영화가 바로 죠스입니다. 스필버그 감독은 집체만 한 크기의 식인상어가 해변의 사람들을 마구 잡아먹는 무지막지한 모습을 영상으로 구현해냈어요.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TV에선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스케일과 서스펜스가 영화엔 있다’는 의식을 심어줌으로써 영화가 직면했던 매체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했지요.
어때요. 아바타와 죠스는 비슷한 점이 많지요? 이젠 상상하는 모든 걸 영상으로 표현할 기술력을 인간은 갖게 되었어요. 그래요. 이젠 상상력으로 먹고사는 무서운 시대가 된 거예요. 상상하면 살고 상상하지 못하면 죽는, 그런 시대가 온 거예요.
▶지난 기사와 자세한 설명은 ezstudy.co.kr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동아일보 201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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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이야기 - 다들 극찬하는 '아바타'보면서 꾸벅꾸벅 졸았다는 분도 있고...
세상은 이래서 더 재밌어진다
'엄마가 뿔났다'의 김수현(67) 작가가 29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세계적 흥행작인 '아바타'에 관한 의견을 밝혀 트위터 이용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김 작가는 이날 오전 1시께 "'아바타' 난리도 아닌데 '아바타' 보면서 나는 왜 중간중간 졸았을까. 너무 단순한 이야기는 따분하고, 목침 하나 가로로 코 위에 얹은 우스꽝스런 동물들은 헛웃음 나오게 하고"라는 글을 올렸다.
이후 "현란한 불꽃놀이도 잠깐이지 좌우간 화려한 화면의 어필만으로는 글쎄올시다. 하하", "남의 잔치 초치는 건 아니고 그냥 나는 그랬다는 얘깁니다", "질문하나 날립니다. 근데 외계행성까지 진출한 터에 지구인들의 우주기지, 비행물체들, 로봇들은 왜 그렇게 둔탁하고 무작스럽게, 촌시럽게 만들었을까요"라는 글을 순차적으로 올렸다.
그는 이어 자신의 팔로어들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판도라 풍경 배경을 뛰어다니는 남녀는 아담과 이브 생각이 나게 했고, 그들 생감새는 모딜리아니 그림이 떠오르게 했고, 익룡타고 날아다니는 건 어떤 영화에선가 봤었고", "모두 마음들이 좋으시군요. 상징성으로 이해한 긍정적인 해석이 많은 거 보니 내가 꼬였나요?"라고도 밝혔다.
김 작가는 28일 MBC TV '100분 토론'에서 '아바타, 영화의 미래인가'를 주제로 토론한 것을 두고 "백분토론까지 하면서 난리길래 여기 나같이 편승 못 하는 사람도 있다, 말하고 싶었습니다. 말의 인플레, 감정의 인플레가 갈수록 심해져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성이 많이 퇴색돼가는 느낌이라서요"라고도 말했다.
그는 이어 정오께 "창작물로서가 아니라 현란한 시각 홀림으로 밖에는..이미 보았던 장면들, 설정들 짜집기를 쓰리디(3D) 기법으로 확대 재탄생시킨 거 아닌가요? 폄하로 몰아붙이지는 마시기를.."라는 말로 '아바타'에 대한 의견을 마무리했다.
ⓒ 연합뉴스 경향닷컴 입력 : 2010년 01월 29일 18:3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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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이야기 - 인류가 영원히 그리워한다는 에덴동산이야기
판도라가 그리운가?
판도라에선 한밤중 풀숲을 지나가면 발자국은 호박 등처럼 환해진다. 벌레와 작은 파충류, 날아다니는 식물의 씨앗은 청명하고 고요한 밤에 갑자기 은은한 등불을 켜고서 연인의 얼굴을 환히 밝힌다. 놀라운 영장류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인류가 오래 원해온 모습대로, 아름답다. 어느 것 하나 조화의 거대한 질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불행을 겪지 않는다.
놀랍게도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연상시키며, 앉은뱅이도 아바타에 들어가면 한순간 벌떡 일어서 뛰어다니는 곳이 바로 판도라이다. 아바타에 들어가라, 걸을 것이다. 아바타에 들어가라, 눈을 뜰 것이다. 이런 구세주의 공식들이 메아리치며, 에덴을 놀이공원화한 판도라의 밤은 황홀하고 깨끗하고, 마침내 성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판도라가 이렇게 행복할 때, 지구에선 정말로 믿기 어려운 신문 기사가 올라온다. 이 영화 속 판도라 행성에 가지 못해서 자살하고 싶은 사람이 생긴단다. 바로 '아바타 우울증'에 감염된 것이다. 완전한 아름다움을 지닌 세계가, 작고 못생겼으며 자신에게 늘 불리한 화폐의 질서를 존중해야 하는 어떤 포유류(인간)가 지구에서 보내는 나날을 참혹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 <아바타>에 대해 우리는 흥행을 목적으로 한 할리우드의 다른 성공작에 대해서처럼 잠깐 동안의 즐거움 외에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아울러 이 영화는 치명적인 단점마저 지니고 있다. 많은 할리우드 영화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구하는 백인 영웅을 등장시켜서 비난받고 있으며, 사이비 교단에서 모시는 우상처럼 신비한 기적을 일으키는 여신 또한 줄거리의 견고함을 깨트리는 한심한 요소로 비춰진다.
요컨대 <아바타>는 영화의 혁명도 아니고 오락의 혁명도 아니고, 더군다나 사상의 혁명도 아니다. 다만 우울증이라는 질병을 가져온 다소 독특한 사건의 주인공으로 기록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모든 질병과 마찬가지로 '아바타 우울증'은, 하나의 질병으로서, 그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인류학적 취향의 영화 <아바타>
<아바타>는 거의 최초로 3D의 위력을 가장 넓은 폭의 대중을 향해 안정적으로 드러낸 영화이긴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SF 발전의 향방을 가늠하게 하는 영화라기보다는, '인류학적 취향'을 지닌 영화다. 사실 <아바타>는 외계가 아니라, 서구 문명에 의해서 오염되지 않은 지구상의 어떤 가상적인 대륙의 원주민을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을 맡고 감독했던 <늑대와 춤을>의 주인공처럼 서구 문명의 사악함에 눈뜬 다음 이국적이며 완벽해 보이기까지 하는 순수한(?) 사회 질서에 동화되는 인물이 바로 <아바타>의 주인공이다. <아바타>의 원주민들을 떠올리며 다음 인용을 읽어보자.
"그들 모두에게서 무한한 친절, 깊은 무관심, 그리고 소박하면서도 매력적인 동물적 만족감을 보게 되며, 이러한 갖가지 감정들이 모인 곳에서 인간적인 애정의 가장 감동적이며 가장 진실된 표현 같은 무엇을 느낀다."
이것은 바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쓴 <슬픈 열대>에 나오는 남비콰라 족에 대한 한 구절이다. 우리는 이상적인 사회를 묘사한 이 구절에 해당하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판도라의 원주민들 속에서 다시 발견한다. 서구 문명은 아담이 낙원에서 쫓겨난 그 기원적인 날부터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향수를 품고서, 온갖 방법을 통해 그 낙원의 향기를 맡아보고자 하였는데, 사실 <아바타>도 그런 서구인의 무의식적 노력의 한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순수한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찬미는 사실 서구인의 '양심의 가책'과 연결되어 있다. <아바타>는 원초적인 사회를 침략하는 서구인의 양심의 가책을 거의 교과서적이라 할 만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판도라 행성의 한 부족이 거주하는 거대한 나무를 최첨단의 온갖 무기를 동원해 마침내 불타오르고 쓰러지게 만드는 장면 말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침략의 대열에서 이탈하는 군인마저 생긴다.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약 서구가 인류학자들을 만들어내었다면, 그것은 서구가 양심의 가책을 몹시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이미지를 다른 사회의 이미지와 비교해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 <아바타>가 '인류학적 취향'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서구 인류학자의 시선을 얼마간 영화 속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와는 전혀 다른 관심과 희망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순수한 사회가 서구의 욕망에 희생되는 모습을 포착하는 시선 말이다. 물론 이런 가책의 시선 자체는 지금에 와서는 실질적인 정치적 위력을 내포하기 보다는, 문화 안에서 소모되는 연극의 한 조미료 같은 것이 되었지만,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서구인들이 자신들의 가책으로부터 면책 받는 교묘한 수단이 되었지만.
과학이 에덴을 돌려준다?
어쨌든 서구 문명에 염증을 느낀 대중은 <아바타>를 통해 에덴과도 같은 순수한 '기원적' 사회를 그리워한다. 이 그리움을 '자신이 지닌 유일한 무기인 화폐'를 통해 충족시키지 못하는 문명인의 어린애 같은 신경질이 바로 아바타 우울증이다(바로 이런 까닭에 인류학자의 속죄와는 별도로 이 우울증은 욕심의 충족을 노리고 있기도 하다).
영화 내재적으로는 어떤가? 어떻게 우울한 앉은뱅이는 기도의 응답을 받은 자처럼 일어서는가? 어떻게 문명의 모든 과오를 잊고서 순수하고 원초적인 사회에서 새 출발을 할 수 있는가?
이 모든 것을 실현시켜주는 근본적인 것은 기적이나 구원 같은 것도 아니며, 어떤 희생이나 봉사 같은 윤리적 덕목, 그리고 이런 것들을 떠받혀줄 만한 어떤 '노력'도 아니며, 간단히 '첨단 과학', 바로 잘 만들어진 인형인 '아바타'이다. 쉽고 거칠게 요약하면 과학이 에덴을 돌려준다는 것이 이 영화의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