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일 (토) 촬영
경의중앙선 금릉역에서 10시 30분에 모이기로 한 오늘은 파평 윤씨 묘역을 답사하기로 한 날입니다.
금릉역에 모인 12명은 오전 10시 45분에
금릉역을 나와 바로 우측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71번 버스를 타고(78번 85번 등등도 감)
2정거장 째인
외동 교차로 정류장에서 하차했습니다.
하차한 후,
새로 개설된 도로 아래에 있는 당하동 지하차도로 나가니.
바로 재실이 보였습니다. 예전에 비해 접근성이 많이 좋아졌네요.
재실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묘가 보이는 산으로 올랐습니다.
파평 윤씨의 재실인 교하향사(交河鄕祠)입니다.
교하향사에서는
15세손 정정공 윤번, 16세손 양평공 윤사흔, 17세손 공양공 윤계겸, 18세손 윤욱, 19세손 정평공 윤지임 5분의 신주를 모셨습니다.
파평 윤씨 정정공파 묘역 / 경기도 기념물 제182호, 파주시 당하동 산 4 - 20 외
이곳 파주시 당하동, 와동동, 다율동, 일대의 파평 윤씨 정정공파 교하종중의 선산에는 정정공 윤번을 중시조로 하는 정정공파의 묘역
약 600 여기가 조성되어 있다. 이 묘역은 조선시대의 묘역이 한 종중에 의해 연대별로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묘역의 역사적 계기성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이곳 일대가 택지 개발 지구로 지정되어 문화재 훼손의 위기가 있자
정정공파 교하 종중에서 묘역을 보존하기 위해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 신청해 이것이 받아들여져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의 묘역에 조성되어 있는 묘제 및 석물, 각종 묘비 등은 조선 초기에서 후기까지의 시대별 특징과 함께 역사적, 묘제적, 미술사적,
복식사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분묘의 특징을 한곳에서 관찰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전기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의 아버지 파평 부원군 정정공 윤번(尹璠, 1384~1448)과
조선 중기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의 아버지 파원 부원군 정헌공 윤여필(尹汝弼, 1466~1555),
중종의 둘째 계비인 문정왕후의 아버지 파산부원군 정평공 윤지임(尹之任, 1475~1534) 묘 등 부원군 묘 3기와
정승 묘소 7기, 판서 묘소 8기, 승지 묘소 12기, 참판 묘소 30기 등이 이 일대에 산재하고 있다.
이 외에도 여러 관직의 벼슬을 지낸 인물의 묘역이 수백 기에 달해 조선시대 관직의 일면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이다. - 현지 설명문 -
재실 뒤 산으로 오르면 바로 큰 비가 보이는데,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아버지인 윤지임의 신도비입니다.
중시조인 윤번은 인천 이씨 이문화(李文和)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윤사분(尹士昐), 윤사윤(尹士昀), 윤사흔(尹士昕) 세 아들을 두었는데,
셋째 아들인 윤사흔의 증손이 윤지임입니다.
셋째 아들 윤사흔의 가계도.
(16대) 윤사흔 - (17대) 윤계겸 - (18대) 윤 욱 - (19대) 윤지임 - (20대) 윤원개, 윤원량, 윤원필, 윤원로, 윤원형(소윤). 문정왕후
둘째 아들 윤사윤의 가계도.
(16대) 윤사윤 - (17대) 윤 보 - (18대) 윤여필 - (19대) 윤임(대윤), 장경왕후, - (20대) 윤흥인, 윤흥의, 윤흥례, 윤흥지, 윤흥신, 윤흥충.
신도비 바로 뒤에 있는 이 묘는 윤지임의 묘가 아니고 윤지임의 셋째 아들 윤원필의 묘입니다.
윤원필의 묘 앞에 있는 화려한 대리석 향로석입니다.
윤원필의 묘에서 본 재실인 교하향사(交河鄕祠) 입니다.
윤원필의 묘표입니다. 오랜 세월 지내다 보니 글자는 물론 없어져 버렸고 비도 부러질 지경이네요.
옆에 새로운 비를 세웠습니다.
윤지임의 셋째 아들 윤원필의 묘에서 해설을 하는 경대장님.
윤원필의 묘비와 향로석.
윤지임 묘역
윤지임(尹之任, 1474~1534)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아버지이다.
1514년에 딸이 중종의 계비로 간택되어 중종의 장인으로서 파산부원군에 봉해졌다. 봉분은 쌍분으로 전성부부인 이씨와의 합장묘이다.
원래의 석물로는 묘표 1기, 혼유석 2기, 장명등 1기, 망주석 2기, 문석인 2기, 묘역 하단에 신도비 1기가 있으며 계체석이 2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쌍분의 중앙 앞쪽에 있는 묘표는 이수, 비신, 방부의 형태로, 이수와 비신이 하나의 대리석으로 제작되어 비대에 꽂아 세우는 구조이다.
이수의 전면에는 두 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입에 물고 다투는 형상이 조각되어 있고 이수의 후면에는 한 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는 형상이다. 이 형상은 이무기가 여의주를 얻음으로써 용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독특한 표현방식이다.
묘역 하단 약 30m 지점에는 신도비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수와 비신이 하나의 대리석으로 제작되어 방부인 비대에 꽂아 세우는 구조이다.
이수에는 앞뒷면 모두 두 마리의 이무기가 화염이 달린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다투는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 현지 설명문 -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아버지 윤지임의 묘역입니다.
윤지임 묘의 향로석과 상석 그리고 묘표.
윤지임 묘의 묘표 전면입니다. 두 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입에 물고 다투는 형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새로 세운 정평공 윤지임의 신도비명.
증 순충적덕보조공신대광보국숭록댑의정부영의정겸영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행보국숭록대부영 돈녕부사겸
오위도총부도총관 파산부원군 증휘정평윤공휘지임 지묘. 배 전성부대부인 전의 이씨 합폄
윤지임 묘 앞에 있는 문석인입니다.
윤지임의 묘역에서 해설하는 경대장님.
윤지임 묘역의 후경입니다.
화사석 4면에 창을 둔 장명등.
회장님의 해설 시간도 있었습니다.
2002년에 도굴되었었던 윤지임 묘의 후경.
윤지임 묘를 나와서, 7년 전 이곳 묘역 답사를 나왔다가 윤회의 묘(尹繪, 윤원필의 3남)를 발견하고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소개되었던
구슬을 삼킨 거위 이야기의 윤회가 이곳에 묻힌 윤회인 줄 알고 기뻐했는데, 알고 보니 동명이인인 윤회(尹淮, 1380~1436)였었다는
김현아 선생의 이야기 따라 윤회 묘를 찾아 나섰는데,
가시 덤불로 길이 막혀 돌아 나왔습니다. 이곳에는 엉겅퀴 꽃들이 많이 피어 있었습니다.
곧이어 소윤의 대표인 윤원형의 묘를 찾아 갔습니다.
윤원형의 묘 뒤에 작은 봉분 앞에는 '초계정씨난정지묘'라 새긴 묘비가 서 있습니다.
윤원형과 그의 처 정난정의 묘.
윤원형과 정난정의 악행은 이갑우 선생의 자료를 읽어 보시기를 권하며, 설명은 생략합니다.
윤원형의 묘에 비를 세울 수 있게 해준 이완용도 나쁘다고 그레넹. ㅎㅎㅎ
윤번의 셋째 아들 윤사흔의 신도비입니다.
윤사흔은 윤지임의 고조할아버지입니다. 윤지임은 윤원개, 윤원량, 윤원필, 윤원로, 윤원형(소윤)과 문정왕후의 아버지입니다.
윤사흔 묘 및 신도비.
양평공 윤사흔(襄平公 尹士昕, 1422~1485)은 윤번의 셋째 아들이자 정희왕후의 동생으로 자는 필보(弼甫)이다.
1483년 파천 부원군에 봉해졌다. 봉분은 1기로 원래의 석물로는 모표 1기, 상석 1기, 장명등 1기, 문석인 2기, 계체석이 남아있으며,
묘역 입구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는 화관석(花冠石), 비신(碑身), 비대(碑臺)로 구성되어 있는데,
덮개돌 부분인 화관석에 연꽃잎을 형상화하였고 비대의 상단에는 연꽃잎을 새겨 연꽃이 위로 향한 모양을 형상화하였다.
특히 비신의 좌우 측면에는 연꽃봉오리 2개와 연잎 1개 그리고 연꽃 줄기 문양을 양각으로 생동감 있게 조각하여 놓은 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화관식 양식의 비는 고려 시대까지 나타나지 않다가 조선시대 초기에 등장하여 16세기 전반까지 유행하고 사라져가던 조선 초기
석비의 독특한 양식으로 윤사흔 신도비는 현존하는 화관석 양식의 석비 중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 현지 설명문 -
비신의 좌우 측면에 연꽃봉오리 2개와 연잎 1개 그리고 연꽃 줄기 문양을 양각으로 생동감 있게 조각하여 놓은 모습.
우측면.
화려한 양식의 화관석의 앞면.
뒷면.
윤사흔의 신도비 위에 있는 윤사흔의 묘역입니다..
묘역의 아래에 있는 이 묘는
윤사흔의 넷째 아들이며 윤원형의 바로 위 형인데 권력 다툼으로 윤원형에게 죽임을 당한 윤원로의 묘입니다.
장명등이 보이는 뒤에 있는 묘는 윤번의 셋째 아들인 윤사흔의 묘이고요.
윤사흔의 묘입니다.
윤사흔은 윤번의 세 아들 중 셋째로 문정왕후를 낳은 윤지임의 증조부입니다.
윤사흔의 묘표.
이 모표처럼 모서리 부분을 각지게 다듬은 형태의 비를 규수(圭首)라고 합니다. 둥근 모양이면 원수(圓首). 직각이면 직수(直首).
새로 만들어 세운 윤사흔의 신도비입니다.
신도비에서 해설 중인 경대장님.
화창이 두 개인 윤사흔 묘의 장명등.
윤사흔 묘의 문석인.
윤사흔 묘역을 나섭니다.
파평 윤씨 묘역 전체를 돌아보려고 하는지, 묘지만 나오면 내려가서 살펴보는 우등생 박명호 선생.
지석묘(고인돌)도 만났습니다.
다율리, 당하리 지석묘 6호 / 경기도 기념물 제129호.
받침돌이 남아 있는 대형의 북방식 지석묘로
동남 - 서북 방향을 장축으로 4100mm x 2400mm 크기의 보존 상태가 양호한 지석묘입니다.
외곽 길로 돌다가, 어렵게 찾은 윤여필의 묘역입니다.
윤여필 묘의 장명등엔 화창이 사방에 다 있네요.
윤여필 묘의 신도비입니다.
윤여필은 윤번의 둘째 아들인 윤사윤의 손자로 윤임과 장경왕후의 아버지입니다.
신도비문.
문석인.
이곳에서는 배 교수가 해설을 했습니다.
깜빡하고 지나쳤던 박명호 선생의 해설도 있었죠.
윤여필 묘역을 나와
이 묘역에서 제일 어른이신 경안택주 안동 권씨 묘역으로 갑니다.
그런데 너무 외곽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어요.
파주시 다율리, 당하리 지석묘군 / 경기도 기념물 제129호.
파주 다율리, 당하리 지석묘군은 1965년 파주시 교하중학교 근처 다율리와 당하리, 교하리가 인접한 구릉지대에서 발굴된 100여기가
넘는 고인돌 무리를 말한다. 지석묘, 즉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 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거대한 바위가 지상에 드러나 있고 그 밑에고임돌(굄돌, 지석), 무덤방(널방, 묘실) 등이 있는 구조로 되어 있는
고인돌은 큰 돌을 괴고 있다는 뜻의 '굄돌'에서 유래된 말이다.
고인돌은 전 세계적으로 약 6만여 기가 분포해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남북한 합쳐 약 3만~4만여기 정도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어 세계에서 가장 조밀한 분포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고인돌은 외형에 따라 널 돌로 지상에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는 탁자식
고인돌과 무덤방을 지하에 만들고 작은 굄돌을 놓은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는 기반식.
고인돌 그리고 지하에 만든 무덤방 위에 바로 덮개돌을 올려놓는 개석식 고인돌로 분류한다.
파주시 다율리, 당하리 지석묘군은 군부대시설물 공사 과정에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파괴된 고인돌 중 일부는 온양 민속박물관 등으로
옮겨 복원되었고, 현재는 20여 기 만이 남아 있으며 그 가운데 상태가 양호한 6기가 기념물(경기도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다율리 고인돌은 훼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정확하게 알기 어려우나 탁자식 고인돌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주변에서 작은 토기 조각들이
발굴되었다.
당하리 고인돌도 역시 훼손이 심하고 대부분 제자리를 벗어나 있으며 개석식 고인돌이다.
주변에서는 간ㄷ골검, 화살촉, 숫돌 등과 청동기시대의 집터가 발굴되었다. 집터 안에서 구멍무늬토기, 민무늬토기, 간돌검, 가락 바퀴 등이
나왔는데, 발견된 유물과 집터는 고인돌을 만든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 현지 설명문 -
너무 외곽으로 돌아가는 것 아닐까? 우리는 내려오는 길로 진로를 바꾸었습니다.
언제 우리가 묘역 밖으로 나갔었나요. "파평 윤씨 교하 종중 묘역 입구"로 들어갑니다. ㅋㅋㅋㅋ
작성자 : 칠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