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일 (토) 촬영.
파평 윤씨 정정공파 교하 중종 묘역 약도.
성재암으로 들어갑니다.
성재암은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조상들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세운 파평 윤씨 정정공파의 원당 역할을 한 절입니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봉선사의 말사입니다.
성재암 전경.
극락전.
성재암 표석입니다. 표석 우측에 있는 길로 조금 올라가면
경안택주 안동 권씨의 묘가 있습니다.
묘 앞에는 '경안택주 안동권씨지묘'라고 새긴 묘표와, 고려판도판서 문충공 파평 윤승례 배 경안택주 창령성씨 지위(之位)란 묘표가 있습니다.
이 묘역은 본래는 안동권씨(윤승례의繼室) 의 단독묘로, 석물로는 묘표 1기, 동자석 2기, 망주석 2기만 있었는데,
북쪽(장단 상북면)에 있는 남편 판도공 윤승례(尹承禮)와 첫 부인 경안택주 창령 성씨의 신주가 옮겨오면 비가 하나 더 세워진 것입니다.
윤승례와 창령 성씨의 사이에도 아들이 있었지만
윤승례와 안동 권씨 사이에서 태어난 윤번이 중시조로 오르며, 경안택주 안동 권씨가 이 묘역에서 제일 높은 어른이 되었습니다.
묘 앞에 '경안택주 안동권씨지묘'라고 새긴 묘표와
고려판도판서 문충공 파평 윤승례 배 경안택주 창령 성씨 지위(之位)라고 새긴 비(신위)의 모습입니다.
묘역 아래의 풍경.
묘 앞의 석물들. 상석과 향로석, 장명등이 추가로 세워졌습니다.
묘 뒤에 작은 봉분과 상석이 하나 있는데, 북쪽에 있는 윤승례와 부인 경안택주 창령 성씨를 위한 단이라고 하지만,
산신석이란 설도 있습니다. 작은 봉분 같은 모양은 기가 모이는 곳, 잉(孕) 같기도 하고....
상석 같은 큰 평편한 돌 앞에 향로석 같은 기물이 있는데 방향이 작은 봉분 쪽이 아니라 상석 쪽입니다. 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차례 준비 중.
떡과 편육 약과 사과와 술을 올렸습니다.
오늘 답사 팀원 중,
두 분의 파평 윤씨가
세분의 조상님께 잔을 올렸습니다.
제를 올린 후, 답사팀들도, 간식겸 점심을 먹었습니다.
경안택주 안동권씨지묘를 떠나며,
개망초가 만발한 산길을 따라
하산합니다.
성재암 앞에 감자꽃들이 피었습니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권태응 시인의 '감자꽃'이란 시가 생각났더랬습니다. 그대 생각도.....
성재암을 지나 좌측 언덕으로 오르면 나오는 윤욱(윤사흔의 손자, 윤계겸의 자, 27세에 사망)의 부인 연일 정 씨의 묘입니다.
연일 정 씨의 묘에 있는 향로석이 특별합니다.
향로석 몸통에 구멍을 만들어, 향로석 안에 향을 피울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더 특이한 것은 무인석도 세우고,
신도비 형식으로 묘갈도 세웠다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에 벼슬도 없는 여성의 묘 앞에 신도비를 세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묘 앞에 신도비를 세운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왕족으로 국립묘지에 묻힌 덕흥대원군의 생모이자,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 씨와
한확의 부인이자 인수대비의 모친인 남양 부부인 홍 씨(1410~1456) 묘의 신도비가 그런 경우입니다.
창빈 안 씨는 왕족이고, 남양 부부인 홍 씨는 인수대비의 위세와 명 황제 장모의 신분이므로 신도비 건립을 막을 수는 없었겠죠.
남양 부부인 신도비를 만든 거대한 대리석은
명 황제가 하사한 대리석을 코끼리가 조선까지 운반해온 후 기후와 먹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조선에서 여성의 무덤에 세운 신도비는 남양 부부인의 신도비 외에는 현재까지 발견된 사례가 없습니다.
파평 윤씨 윤욱의 부인인 연일 정씨 무덤의 비는 묘갈입니다.
신도비 형식으로 만든 연일 정씨 묘의 묘갈.
묘갈과 무인석 사이에 묘갈에 새긴 글씨를 새로 새겨 놓은 비가 있습니다. 비 첫 머리에 아래와 같이 새겨 있습니다.
第十八世領相公諱頊培位貞敬夫人延日鄭氏墓碣銘(제18세 영상공 휘 욱 배위 정경부인 연일 정씨 묘갈명)
연일 정씨 묘를 답사 후 바로 위로 나있는 계단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잡초에 묻힌 비탈진 계단은 올라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조심 또 조심.
아래에 연일 정 씨의 묘가 보입니다.
쉬었다 가자고요.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한가합니다. 한가한 세월이 얼마나 흘렀으면 돌에도 꽃이 피었을까요? 가슴이 먹먹합니다.
마지막 목표인 윤번의 묘역에 왔습니다.
윤번 묘의 후경입니다. 앞쪽 하늘에 신기루 같은 고층 빌딩들이 무서워 보입니다.
윤번 묘역
정정공 윤번(貞靖公 尹璠,1384~1448)은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자는 온지(溫之)이다. 딸을 수양대군에게
출가시켜 후에 수양대군(세조)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 딸은 정희왕후에 봉해지고 그는 세조의 장인으로서 파평부원군이 되었다.
묘역은 2기로 상단에 윤번의 묘역이 있고, 약 30m 하단에 부인 인천 이씨(1383~1456)의 묘역이 있다.
이처럼 상하로 조성된 부부의 묘의 경우도 합장한 것으로 여기는데,
일반 사대부 묘역보다 훨씬 크게 조성되어 있어 단독장으로 볼 수 있을 만큼 구분되어 있다.
윤번 묘역 봉분은 장대석을 이용한 방형(方形)의 호석(護石)을 두른 방형 봉토분으로, 원래의 석물로는 묘표 1기, 상석 1기, 장명등 1기,
문인석 2기가 있고 계체석(階砌石)이 삼단으로 구분되어 있다. 인천 이씨 묘역의 봉분 역시 장대석을 이용한 방형의 호석을 두른
방형 봉토분인데 장대석을 2단으로 사용하였으며 윤번의 묘역보다 크게 조성하였다. 묘역의 석물은 묘표 1기, 상석 1기, 장명등 1기,
문인석 2기가 있고, 계체석 역시 윤번의 묘역과 같이 3단으로 구분되어 있다.
인천 이씨의 석물들은 대체로 윤번의 묘역에 있는 석물보다 규격 및 조각 기법에 있어서 크고 양질의 석물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윤번의 묘역이 1448년(세종 30)에 예장 후 조성된 반면,
인천 이씨의 묘역은 세조의 등극 이후인 1456년(세조 2) 10월에 예장 후 조성된 것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인천 이씨 묘역에서는 봉분의 전면 호석과 상석 사이에서 석함(石函)과 그 안에 매장되어 있었던 순백자 지석(誌石) 2장 및
청화백자 지석(誌石) 4장이 발견되었는데 인천 이씨의 장례 경위와 생전의 덕행, 가계와 후손들의 현황 등을 적고 있다. 이 묘지가 제작된
경태(景泰) 7년은 1456년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기년명 백자 청화의 제작 시기 중 가장 이른 예로 백자 청화의 개시 시기와 편년에 획기적인
자료로 인정되어 2012년 6월 보물 제1768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 현지 설명문 -
윤번 묘의 좌측면.
윤번 묘의 전면.
묘표와 문석인.
묘표.
새로 세운 묘표.
묘의 우측면.
장명등.
3단의 계체석이 다 보이는 전경.
인천 이씨 묘의 후경.
인천 이씨의 묘입니다. 호석이 2단입니다.
우측 아래에 보이는 비는 윤번의 신도비입니다.
묘의 전면.
묘표와 문석인.
새로 세운 묘표.
상석과 혼유석.
윤번의 신도비.
신도비.
윤번의 장남인 윤사분의 묘입니다. 후손 중에 크게 활약한 분이 없어 쓸쓸해 보입니다.
새로 세운 묘표.
되돌아 올라오며 다시 본 인천 이씨와 윤번의 묘.
윤번의 묘.
윤번 묘의 문석인.
요약
파평 윤씨 정정공파 교하 중종 묘역은 윤승례와 경안택주 안동 권씨 사이에서 태어난 윤번이 인천 이씨를 배필로 맞아 낳은 딸이
수양대군에게 출가해 후에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가 됨으로써 친정인 윤번의 똑똑했던 세 아들 윤사분, 윤사윤, 윤사흔이 출세를 했다.
그중 윤사윤과 윤사흔 가문에서는 왕후까지 나왔다(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와 문정왕후)
번성했던 가문은 대윤과 소윤으로 나뉘어 다투는 바람에 조금 기세가 꺾이기는 했어도 조선의 명문가가 되었다.
묘역이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것은 조상의 공덕이 크기 때문이다.
집으로 가는 길.
옛길로 나왔다가,
길이 없어져,
결국은 와동 교차로 버스 정류장까지 와서,
78번 버스를 탔습니다.
작성자 : 칠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