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체불 벌써 1조 넘어, 전년 대비 30%↑… ‘상습 체불 사업주’ 엄정 처벌
고용부-법무부, 합동담화문 발표
3년 만에 증가세로 돌아설듯… 영세 기업 근무 노동자 피해 커
4년간 두번 이상 송치 업장 7707곳… 늦게라도 합의 땐 처벌 없어 악용
“상습 체불 사업주 구속 수사 방침”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오른쪽)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임금 체불 근절 담화문 발표를 하고 있다. 김동주 기자
인천에서 대형병원을 운영하던 우모 씨(57)는 올해 3월 말 직원들에게 갑자기 “4일 뒤 병원 문을 닫겠다”고 통보했다. 이후 직원 274명의 두 달 치 월급과 퇴직금 등 임금 28억 원을 지급하지 않은 채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우 씨는 불법 사채를 끌어다 무리하게 병원을 운영하다가 경영이 악화되자 급하게 폐업을 결정한 것이었다.
사건을 담당한 김병곤 고용노동부 인천북부지청 근로감독관은 “병원장의 무책임한 폐업과 임금 체불로 직원들이 심각한 정신적, 금전적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며 “조만간 수사를 마무리하고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국내 임금 체불액이 크게 늘면서 추석 명절을 앞두고 임금이 밀린 근로자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3년간 감소세를 보였던 임금 체불액이 올해 다시 증가하자 이정식 고용부 장관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25일 임금 체불 근절을 위한 공동 담화문을 발표했다.
● 집행유예 중 또 임금 안 준 50대 구속
올해 1∼8월 임금 체불액은 1조1411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8796억 원)보다 29.7% 늘었다. 연간 임금 체불 규모는 2019년 1조7217억 원으로 정점을 찍은 뒤 3년 연속 감소세를 보였지만 올해 다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이 지나면서 기업의 고용이 회복세를 보이던 중에 다시 경기가 꺾이면서 임금 체불이 늘어난 것으로 고용부는 분석했다. 임금 체불이 발생한 사업장의 약 70%는 30인 미만의 소규모 사업장이다. 영세한 회사에서 일하는 취약계층 노동자들의 피해가 크다는 뜻이다.
최근 10년간 매년 1조 원 이상의 임금 체불이 발생하는 가장 큰 원인은 상습적으로 임금을 주지 않는 ‘악덕’ 사업주가 많기 때문이다. 이달 18일 임금 체불 혐의로 구속된 전기업자 A 씨(50)는 2011년부터 임금 체불로 26차례 형사처벌을 받았음에도 또다시 전국 공사 현장 9곳에서 임금 4000여만 원을 체불했다. 이 가운데 건설 일용근로자 12명에 대한 체불액 1900만 원은 A 씨의 집행유예 기간 중 발생했다. 상습적으로 수많은 근로자에게 피해를 준 점이 고려돼 A 씨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이처럼 2019년 이후 4년간 임금 체불 혐의로 2번 이상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된 사업장만 7707곳으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10번 이상 검찰에 송치된 사업장도 22곳에 이른다. 임금 체불 사건은 피해 근로자가 떼인 임금을 돌려받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기기 때문에 사업주가 뒤늦게라도 임금을 주고 근로자와 합의하면 처벌받지 않는다. 문제는 사업주들이 이 같은 조항을 악용해 상습적으로 임금을 주지 않고 버틴다는 점이다.
● 상습 체불 사업주 구속 수사 원칙
최근에는 건설 현장에서 임금 체불이 늘어나는 추세다. 올해 7월 말까지 발생한 임금 체불액 가운데 건설업 비중은 24.3%로, 지난해 같은 기간(21.6%)보다 늘었다. 반면 임금 체불이 가장 많은 제조업의 경우 올해 30.9%로 지난해(33.7%)보다 비중이 줄었다. 고용부 관계자는 “주택시장 침체,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공사비 증가 등의 영향으로 건설업계 임금 체불이 늘고 있다”고 봤다.
올해 고용허가제(E-9 비자)로 입국하는 외국인이 역대 최대인 12만 명으로 예상된다. 늘어난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임금 체불도 증가할 것으로 우려된다. 2019년 이후 매년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임금 체불이 1100억∼1200억 원대 규모로 발생했는데 앞으로 더 늘어날 수 있다.
고용부는 추석을 앞두고 이달 27일까지 임금 체불 예방과 청산 집중 지도 기간을 운영하고 있다. 이 장관은 합동 담화문을 통해 “상습적인 체불 사업주는 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하고, 소액이라도 고의적으로 체불한 사업주는 정식 기소해 ‘벌금만 내면 그만’이라는 인식을 바꾸겠다”고 했다.
하지만 상습 체불 사업주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지 않고서는 임금 체불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이에 고용부는 이번 정기국회에서 상습 체불 사업주에 대한 경제적 제재 확대 등의 입법 논의를 지원할 계획이다.
주애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