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꿘안응언’ 음식점에서
통일 궁을 마주보는 곳에 위치한 제법 무게감이 느껴지는 음식점, 아마 나혼자 이곳에 왔다면 지레 겁을 먹고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비싼 포도주만 팔 것 같은 고상한 음식점, ‘꿘안응언 Quan An Ngon’ . 꿘안응언은 베트남어로 '맛있는 집'이란 뜻이다. 메뉴판을 들여다보았지만 봐도 모르겠다. 생소한 음식들은 아닌데 글자 앞에서는 무력해지고 만다. 말 같아서는 지난 번 하노이에서 먹던 돌돌 만 만두 튀긴 것 하고 돼지고기 꼬치 그리고 밥 하면 그만일 것인데 참 답답해진다. 다행히 영어로 주석을 달아 놓아 감을 잡기는 했는데 영 미심쩍다. 머뭇하니 전 선생님이 한국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없는 것으로 골라 주겠다고 한다.
나는 사실 하노이에서도 똑같은 간판 달린 집을 갔었다. 체인점일 것이다. 그때는 베트남을 잘 아는 동생이 알아서 챙겨주었었다. 주요메뉴는 반미 25000동, 베트남 국수 17000-20000동, 3) 분차 18000동, 4) 샐러드 롤 5)바비큐 20000동-55000동, 그밖에 6)시푸드, 7) 각종 디저트, 오기 전 음식 공부도 했건만 막상 닥치면 벙어리 냉가슴이 되고 만다. 실전에 약한 현실, 다음에 베트남에 올 때는 사진 찍은 것을 보여주며 ‘이것 주세요.’ 하고 알려주어야 할 것 같다.
꿘안응언 내부
음식이 나오는 사이 마실 요량으로 우리는 맥주를 주문했다. 전 선생님은 333, D 박사님은 사이공, P 박사님은 타어거, 엉뚱하게도 김 이사님은 소주, 고작 8명인데도 사람들 취향은 이렇게 제각각이다. 그러니 한국 사람들 취향이란 말도 딱히 이것이다 하고 콕 짚어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물며 지구상에서야.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선정한 CNN 방송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궁금하기는 하다.
나야 당연 한국 김치찌개지만, 투표로 정한다면 해보나 마나 인구수 많은 중국음식일 게다. 일본은 껴있는데 아쉽게도 한국 음식은 하나도 없다. 한식의 세계화로 득실할 것 같은데 정녕 아니다. 아시아에서는 태국과 일본 그리고 베트남이 들어가 있다. 이를테면 그리스에 Mendrek 그릭 샐러드, 수블라키, 우조, 치푸로 이탈리아에 피자, 파스타, 카프레제, 판나 코타 우크라이나에 보르쇠, 살로, 고릴카, 바레니키 등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월남 쌈, 반미, 반쎄오, 쌀국수 등 베트남 전통음식을 포함, 재스민 차가 들어가 있다. 다른 품평회에서도 어디서든 베트남은 꼭 들어간다.
CNN이 선정한 세계 최고 길거리 음식 도시에는 방콕과 함께 일본의 도쿄, 하와이 호놀룰루,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더반, 미국의 뉴올리언스와 루이지애나 등이 이름을 올렸다. 우리나라 떡볶이가 빠졌으니 믿을 것은 못 된다 싶지만 그래도 조금은 김이 샌다. 2014년도던가 미식가들이 찾는 세계최고 음식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맨 처음 중국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프로그램 흐름은 거의 베트남을 겨냥한다 싶었다. 이 세상 최고의 궁중음악은 바로 베트남의 후에(Hue)라는 것이다. 그들 음식은 거의 예술품이었다. 내가 알기로 베트남 음식점에 앞에 Hue가 붙은 집은 지금도 그 명성을 쳐준다는 말을 들었다. 아무튼 우리만 해도 동네마다 음식성향이 제각각인데 하노이와 호치민 거리로도 1700킬로가 넘는 데 성향이 유사할리 만무다. 베트남식 아침식사
지난 번 하노이 여행 때 가이드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꽤 오랜 기간 베트남에 산 그의 경험에 비추어 일리 있다 싶다. 호치민 사람들과 하노이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 상극에 가깝다고 했다. 통일은 누가 시켰는데 잘 살기는 호치민이 잘 사니 속이 뒤틀린다고 했다. 반대로 호치민 사람들은 하노이 사람들은 괜스레 어깨에 힘주고 다닌다고 비아냥댄다는 것이었다. 실제 호치민은 미국이나 프랑스 영향을 받아 상공업이 발달했고 나름 융통성이 있지만 하노이사람들은 고지식한 점이 많고 중국의 영향으로 괜한 것에 집착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왕 베트남 며느리를 얻으려면 남부 출신을 얻는 게 좋다고도 했다. 고분하고 싹싹하며 양순함이 남부 출신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는 말이고 사람에 따른 것일 테지만 체제에 따른 일면도 없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나는 한다. 공산체제와 자유민주주의, 수 십 년이 지났지만 뿌리 깊은 의식은 쉬이 바뀌지 않는 법이다. 체코 프라하를 갔을 때였다. 체스키 크롬모프를 향하는 버스를 탔었다. 가는 도중 휴게소를 들렸는데 문을 닫아 화장실을 갈 수가 없었다. 다른 곳을 안내해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그는 약속된 장소 아니고는 쉴 수 없노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만 하는 수동적인 의식을 나는 과거 공산치하였던 나라에서 많이 느꼈다. 착실하게 시키는 대로 하고 부지런하니 곧 부강할 것 같은데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자율성의 의미로 크게 받아들인다. 나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사람들을 견주어 생각해보곤 한다. 분명 그들은 차이가 있다. 동네 개도 베트남 개들은 졸졸 바삐 움직이는데 캄보디아 개들은 느릿느릿한 행차다. 개고기를 먹는 베트남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캄보디아 사람들의 차이일 수도 있다.
분명 캄보디아는 비록 가난하지만 개를 먹이로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베트남보다는 순진하고 착한 심성이 작용한다 싶다. 하지만 그들은 동기부여가 없는지 그저 착할 뿐 악착같지는 않다싶다. 나는 그 이유를 배움에서 찾는다. 베트남은 한자문화권으로서 유교의 가르침을 대대로 물려받았지만 인도에 가까운 의식을 갖은 캄보디아 사람들은 한자나 유교 의식이 없는 사람들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대대로 효는 무엇이고 왜 배우고 정진을 해야 하는지 배워왔다. 그들의 효심은 실로 대단하다. 자기 경작 논에 작은 사당을 짓고 부모를 모신다. 풍작을 기원하다는 것인데 자기 생활 속에 부모의 무덤을 두고 사는 그들이니 그 의식은 말하여 무엇 하랴. 그러기에 며느리로는 베트남여인이 최고라는 말도 맞는 말이다.
워낙 기다란 나라, 지리상으로서도 음식이 다르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메콩강 하류에 퍼져 있는 남부지역은 베트남 제일의 곡창지대이다. 음식이 맛은 대체적으로 단데,`양념의 주가 되는 '다레'는 앞에서 서술한 누쿠맘에 라임이나 매운 고춧가루를 섞어 만든 것이다. 중국식 국수를 만들 때에 국수에 섞는 천연 소다수인 '간수이'가 들어간 노란 면이나 튀김면을 볼 수 있는 것도 남부지역이다. 프랑스, 미국, 타이 요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싶다.
중부지역은 대표적인 요리로 '후에'요리가 등장한다. 후에는 한때 베트남의 수도였기 때문에 아직도 그 당시의 격식을 갖춘 궁중요리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지역의 요리 중 특징적인 것은 제육과 콩을 찐 요리인 '가너우 도우'와 봉황 모습으로 차려내는 '포옹황 카이비이', 새우튀김인 '카쿠온 치엔돈' 등의 맛과 생김에 서양인들은 입을 다물지 못한다. 북부지역의 겨울은 점퍼를 입어야 할 정도로 서늘하다 못해 추운 곳이다. 남부보다는 음식이 덜 달고 덜 시면서 간이 약해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요리로는 가느다란 면과 함께 채소로 싸서 먹는 '깨'에다 돼지고기, 새우, 표고 등을 섞어 튀긴 '넴쿠아베'와 게와 뱀장어를 넣고 볶은 잡채인 '멘쿠우 루웅 사오' 등이 있는데 중국과 많이 닮아 있다.
지역과 계절에 따른 음식의 종류가 무궁무진하며 특히 현지의 식재료와 향신료 및 소스 그리고 허브를 이용해 색다른 맛을 낸 음식들이 넘치는 먹거리의 보고, 베트남, 그 다양성은 고사하고 쌀국수, 월남 쌈, 스프링 롤, 하나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나만 무식한 것은 아닌지 같이 간 분한테 우리가 먹은 것을 확인차원에서 물었더니 메일로 이렇게 답이 왔다. “먹은 요리 이름은 모르겠으며 내가 먹지 않은 스프, 게, 새우 구운 것, 닭고기 구이, 삼겹살꼬치 등이 기억납니다.” 나도 딱 그 정도다.
(하노이 스타일 짜조)
바게트. 프랑스의 상징과도 같은 길쭉한 모양의 담백한 빵. 오늘날 베트남 어느 시장에 가나 한 귀퉁이에서 이 빵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파는 이동식 가게를 볼 수 있다. 빵집도 아니고 시장 통에 쌓아놓고 파는 바게트라 하여 우습게 보는 것은 금물이다. 프랑스 본토 바게트의 그저 그런 아류가 절대 아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아주 부드럽다. 서울의 웬만한 빵집에서 파는 바게트보다 훨씬 훌륭하다. 한 개에 100원 이하. 반미는 이 바게트를 이용하여 만든 샌드위치다. 프랑스 식민 시절의 가장 뚜렷한 흔적이기도 하다. 미국에 햄버거가 있다면 베트남에는 맛깔난 동양인 취향의 반미가 있다. 나무그늘 아래, 유리 상자를 얹어놓은 노점, 반미 장수는 친구와 잡담하다가, 허리를 굽히고 발톱을 깎다가, 혹은 샌드위치 재료를 손질하다가 손님이 다가오면 주문을 받는다.
(샌드위치 제조 중)
요리의 기본은 재료의 특징을 이해하고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반미는 한국의 부대찌개가 그런 것처럼 프랑스와 베트남의 절충점을 찾아서 맛의 특징이자 장점으로서 베트남에 귀화한 음식이다. 이해와 균형이 어디 음식뿐이랴. 이 세상의 아름다운 삶은 이해와 균형 속에 있다. 나는 요즘 같은 세상, 정치인보다 요리사가 몇 배 더 평화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길거리에서 반미를 파는 사람이 그 누구 보다 더 현실적으로 서민의 삶을 이해하는 존재들이 아닐까. 베트남을 올 때 우리나라 정치 현실은 암울했다. 소통도 그렇고 서민들을 너무도 도외시하는.
우리는 일어섰다. 전 선생님이 오랜 만에 만난 친구 D박사를 위해 꼭 생맥주를 산다고 했다. 나는 그 가격이 만만치 않으리라 생각했다. 홍콩에서도 마닐라에서도 중국에서도 겪은 일이다. 더운 나라에 사는 그들은 찬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같이 추운 데 사는 사람들은 한낮 더위에 벌덕 증이 일며 한 쪼끼 두 쪼끼 생맥주를 채우는 데 그렇지가 않다. 아마 LIVE라는 특성으로 쉬 상하는 성질도 한 몫 할 거다. 그래서 생맥주는 고급 호텔이나 전용 맥주집에서만 취급을 한다. 역시 그랬다.
그는 오페라하우스 바로 앞에 LION BREWERY 레스토랑(Cong Truong Lam Son, District 1, Ho Chi Minh. City)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독일 맥주를 취급하는 곳, 자가 생산하는 큰 호프 통이 눈앞에 보였다. 독일 맥주를 바로 현지에서 생생하게 만들어 마신다는 맥주집이다. 500CC 한잔에 우리 돈으로 3천 원, 일반 생맥주로는 우리와 똑같지만 사실은 자가 맥주 집 시세로는 한 잔에 7천원도 넘으니 우리로서는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다. 술을 못하는 나는 근처를 배회했다. 나서자마자 KING 가라오케 간판이 보였다. 아리랑 식당하고 일본 쓰씨 집을 돌아서자 원형 로터리가 눈앞에 보였다. 일본과 한국 사람들이 붐비는 동네란 생각을 했다. 나는 슈퍼에 들어가 혹시 달랏 포도주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달랏에 사는 S박사님이 추천한 달랏 포도주, 포도주는 금고 같은 투명 유리상자안에 열쇠로 채워져 모셔두고 있다. 이곳에서는 비싼 술로 취급되는 것 같았다. 나는 마실 물을 사고 요크루트도 사고 포도주를 사고 만두도 경험 차원에서 하나 샀다. 참 물가가 싼 도시다. 아무리 그래도 5년쯤 지나면 이곳 물가도 달라져 있을 것이다. 내가 북경을 4번 찾았는데 2007년 처음 찾을 때와 2013년도에 갈 때는 거의 두 배 정도 올라 있는 상태였다. 그들의 개발 속도 그러니까 경제 성장률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어느 옛 시절의 사진 한 장 (오페라 하우스))
우리는 다시 호텔을 향했다. 밤에 비치는 오페라 하우스가 격식 갖춘 귀부인의 자태로 우아하게 서 있다.1897년에 건축된 건물로 하얀색의 대리석과 입구를 받치고 있는 두 명의 비너스상이 특징인 이 건물은 과거 이곳 호치민에 거주하던 프랑스 사람들을 위한 오페라 하우스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한때는 일본 점령 하에 육군을 주둔시키기도 했고 일본이 패망한 후에는 다시 프랑스사람들이 되찾았고 1954년 이후는 북베트남에서 철수한 프랑스 사람들의 대피소로 쓰기도 했다하는 팔자 센 건물. 이후 남베트남의 정부 건물 (국회의사당)으로써 사용되다가, 현재는 다시 오페라하우스로 사용되고 있다. 미인박명이라더니 아름다운 자태와는 달리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오페라 하우스가 아닌가 싶다. 호텔로 돌아와 내가 사온 포도주를 모두 모여 마저 마시고 드디어 잠에 든다. 하루가 마치 5일 연장 겹쳐 지난 간 것만 같다. 덕분에 단꿈을 꿀 것 같다. 내일은 또 내일, 꼭두새벽 벤탄 시장에 갈 수나 있으려나. 오늘 사이공의 첫날은 그렇게 내게 꿈같은 달콤함을 남겨주었다.
첫댓글 역사가 나오는 글은 삼가하는 듯 하며 매우 유감... 글 편 수를 줄여서라도 꾸역꾸역 다 읽게 하고 말테다. 아니 내일부터서는 바빠서도 어쩔 수없이 제 때 배달이 어렵지만서도.....그리고 내 강연 때 최소 5명은 찾아왔다는 확신이 든 연후에 마무리 글들을 또 올릴 에정. 아니면 최부 표해록 책 산 인증을 느낀 후....
역사 글 조회수가 최소 50이 안 넘으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내 글에, 그래서 반성하는 차원에서.. 다시 보고 또보고 하여 올리는 글이 자연 줄어들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그런 상황... 오늘은 두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