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날짜 : 2019년 10월 27일(일)
구간 : 장충단공원 ~ (한양도성) ~ 남소문 터 ~ 국립극장 ~ (한양도성) ~ 남산 팔각정(국사당 터) ~ 조선신궁 터~ 백범광장 ~ 숭의여자대학교(경성신사 터) ~ 기억의터(총감부 터) ~ 서울 유스호스텔(옛 중앙정보부 터) ~ 충무로역
소요시간 : 약 7시간(09시 ~ 16시, 점심 도시락 식사시간 포함)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6번출구에서 시작한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유정(惟政) 사명대사상(像)이 있다
이 동상은 임진왜란때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활약한 사명대사(四溟大師)의 활약상을 기리기 위해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1968년 5월 12일 건립한 것이다
계단을 내려서면
장충단공원이다
장충단공원 (서울시 중구 동호로 261, 장충동2가 197-34)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 때 순국한 충신, 열사들 을 제사하기 위해 1900년 9월 대한제국 고종이 ‘장충단’이라는 사당을 설치한 데서 비롯되었다
고종은 어영청의 분소로 서울의 남쪽을 지키는 남소영 (南小營) 자리에 장충단을 짓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했다
처음에는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 영관 염도희, 영관 이경호를 주신으로 제향하고, 김홍제, 이학승, 이종구 등 장병들을 배향했으나, 다음해 궁내부 대신 이경직 을 비롯하여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 죽은 문신들도 포함하였다
그러나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의 세력이 강성해지면 서 1908년 제사는 중단되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살해되었을 때 거국적인 국민추도대회라는 행사가 장충단에서 열렸다
국민대추도회 추진 세력들은 장충단에 이토의 사당을 짓고 추모제를 지냈다
경술국치(1910년) 후인 1919년에는 장충단 일대에 벚나무를 심어 일본식 공원이 조성되었다
창경궁과 유사하게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가 위락 시설로 바뀌었다
일본은 공원에 상하이사변 때 사망한 일본군 육탄 3용사의 동상을 세웠고,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절인 박문사도 1932년 인근에 세워졌다
(일본 육탄3용사는 조작되었음이 75년 후인 2007년 7월 13일자 <아사하신문>에 의하여 밝혀졌다 - 기사를 쓴 특파원은 현장에 가지도 않았으며, 전선에서 돌아온 어느 장교의 이야기만으로 꾸며낸 미담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내무성 자료에 따르면 일본 군부는 단순한 사고사를 대대적인 선전전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결국 임무수행도 하지 못한 병사를 영웅으로 만들어 상징화한 셈이다 : 유영호 저,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250페이지 부분발췌)
해방 후 일본 군인들의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되었으 나, 한국 전쟁으로 사당의 부속건물이 파괴되었다
1959년 청계천이 복개되자 수표교를 철거하여 이곳으로 옮겼으며, 1969년에는 영빈관 내에 있던 장충단비를 수표교 옆으로 옮겼다
장충단의 처음 위치(현 신라호텔 - 영빈관)는 유실 되었다
대한제국을 지키다 죽은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지어졌으나, 일제에 의해 훼손된 장충단은 해방이후 제일먼저 복원되어야 했으나,박정희 장군의 등장으로 복원은 고사하고 장충단지역은 황폐화 된다
장충단터의 공원용지를 해제하여 지금의 호텔신라가 들어선 것은 태평세계로 위장되어 특권시대를 여는 정경유착의 시발점이 장충단 터의 훼손이었다
♤ 장충단비 (서울시 중구 동호로 257-10, 장충동2가 197)
장충단비는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을 새긴 비로 1900년(광무 4) 고종의 명에 의해 장충단을 지을 때 비도 함께 세워 놓았다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석을 얹은 간략한 형식이다
앞면에 새긴 "奬忠壇"이란 전서(篆書) 제목은 뒤에 순종(재위 1907∼1910)이 된 황태자의 예필(睿筆) 이며, 뒷면에 새긴 비문은 당시 육군부장(陸軍副將) 이던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짓고 썼다
일제는 1910년 경술국치 후 이 비를 뽑아 버렸으며, 1920년대 후반부터는 여러 시설들을 마구 설치하여 '장충단공원'이라 이름 붙였다
광복 후 일제가 세웠던 건물을 모두 헐면서, 비도 다시 찾아 세우게 되었고, 1969년 지금의 자리인 수표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서쪽에 옮겨 세웠다
(1969년 7월 5일 신라호텔 영빈관 정문 오른쪽 비탈 에서 순종의 친필이 새겨진 장충단비裝忠壇碑를 발견했다)
장충단비 뒤에는 '第一江山太平世界(제일강산태평세계)'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태평세계비의 건립자 배성관은 나라를 빼앗긴 일제강점기 시절에 우리 문화재를 일본인에게 팔아 넘기고 문화재 도굴까지 하며 부를 축적한 사람으로 한국전쟁시 불행한 가족사(인천 상륙후 유엔군의 서울탈환 폭격때 자녀 6남매가 한자리에서 목숨을 잃는다) 살아 남은 부친 배성관은 후에 '제일강산태평 세계'라는 비석을 세워, 현재 장충단비의 중앙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나 아주 비정상적이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치 않고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위치한 일부 친일파들의 행적과 일맥 상통한다
♤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 (서울시 중구 필동로1길 30, 필동3가 26-1)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국 유림은 파리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제출해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떨친 공헌을 한 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통령희사금과 국민의 성금 등으로 1972년 10월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에 세운 비다
파리 장서사건(유림 독립선언, 제1차 유림단사건)은
1918년 김창숙을 중심으로 한 유림의 인사들이 파리 평화회의에 독립탄원서를 보내다가 발각된 사건으로
3.1 운동 이후 유림의 인사들은 유림이 독립선언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이를 대신하여 파리장서에 서명을 하였다
조선의 유림대표 곽종석·김복한 등 137명이 김창숙의 연락으로 독립탄원서를 작성, 김창숙이 이 탄원서를 가지고 상하이에 가서 파리평화회의에 우송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발각되어 곽종석 이하 대다수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망명하였다
곽종석·하용제·김복한 등은 감옥에서 순국하였고, 그 밖의 사람들도 형에 못 이겨 죽고 또 처형되었다
밀양의 영남루 인근, 정읍의 정읍사공원, 서울의 장충단공원, 거창의 침류정에 파리장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수표교 (서울시 중구 동호로 257-10, 장충동2가 197)
수표교는 만들어질 당시(1420년, 세종 2)는 그 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馬廛橋)라 불리었다
1441년(세종 23) 다리 앞에 개천(開川, 청계천)에 흐르는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水標, 보물 제838호)를 세웠다
다리 아래에 ‘在長通橋東橋西中央立石標刻尺寸之數 凡雨水以知深淺(장통교 동쪽에 있고, 다리 서쪽 중앙에 석표를 세우고, 척촌을 새겨서 무릇 빗물의 깊고 얕은 것을 알았다)’고 기록하였다
그 후 1760년(영조 36)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庚(경)·辰(진)·地(지)·平(평)’이라는 글씨를 새겨 물높이를 4단계로 측정하였다
이 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수표교’라 부르게 되었다
수표교는 6모로 된 큰 다리 기둥에 길게 모진 도리를 얹고 그 사이에 판석(板石)을 깔아 만들었다
아래의 돌기둥이 특이하게 2단을 이루고 있는데, 그 중 윗 단의 돌은 모서리를 물의 흐름과 마주하게 하여 물의 저항을 덜 받도록 하였다
난간에는 연꽃봉오리·연잎 등의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이 다리는 물길을 건너는 통로로서 뿐만 아니라 홍수 의 조절을 위해 수량을 재는 역할을 했던 중요한 다리 로, 영조 36년 대대적인 준설공사를 마치고 다리 동쪽 에 준천사(濬川司)란 관청을 두어 수량의 변화를 한성판윤(漢城判尹)에게 알려 홍수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수표교에 ‘丁亥改造(정해개조)’, ‘戊子禁營改造(무자금영개조)’라 새겨져 있어 준설공사가 끝난 후 영조 43·44년(1767·1768년)에 다리를 다시 설치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원래 이 다리는 청계천 위에 놓여 있었는데,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철거되어 일시 신영동으로 이전 되었다가 1965년에 장충단공원에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물 속에 있던 수표석(보물 제838호)도 함께 장충단 공원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지난날 수표교가 있던 곳은 수표동(手標洞)과 관수동 (觀水洞)이라는 동명과 수표공원이라는 어린이공원 이 있어 그 이름만 전하고 있다
길 건너 신라호텔과 장충체육관입니다
신라호텔은 일제가 장충단 일부를 훼손하고 그 자리에 박문사를 건립했던 곳입니다
박문사 터 (서울시 중구 동호로 249, 장충동2가 202)
장충단은 대한제국의 최초이자 마지막 현충원에 해당한다
일제는 이를 무참히 훼손하고 짓밟아 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한일합방을 주도한 이등박문의 보살사를 짓는다
해군대장 출신의 사이토(齊藤)가 두 번째 조선총독 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정무총감인 고다마(兒玉秀雄) 가 발의했다
1930년 초 사찰 건립을 위한 ‘이토오공 기념회'가 조직되었으며, 조선총독부 직원들을 중심으로 친일파 인 박영효, 윤덕영 등 6명의 조선 귀족도 참여했다
사찰의 명칭은 기념회 조직 때부터 이토오의 이름을 따서 박문사(博文寺)로 정해졌다
사찰 이름 앞에 붙이는 산(山) 이름으로는 이토오의 아호인 춘묘(春畝)를 써서 정식 명칭은 ‘춘묘산 박문사'가 됐다
박문사 종파는 이토오가 생전 귀의한 조동종(曹洞宗) 으로 정해졌다
설계는 이등박문공 기념회 공영부에서 완성하였으나 공영부장은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하야시(林茂樹)가 담당하였고, 책임자는 사사 케이이치(笹慶一), 고문 으로는 이토쥬타(伊藤忠太)이었다
공사는 오쿠라쿠미(大倉組)토목주식회사에서 낙찰 받았고, 1931년 6월 5일에 공사에 착수하여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의 총탄에 살해당 한 23주기가 되는 1932년 10월 26일에 낙성식이 실시되었다
일왕이 하사한 은제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향연이 단풍 으로 물든 남산을 배경으로 퍼져나갔다
낙성식에는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 一成)와 이광수, 최린, 윤덕영 등의 친일부역자와 그외 천 여명 이 참석하였다
6개월 뒤에는 고국을 방문한 영친왕 이은 부부가 박문사를 참배했다
1년 뒤 이토 히로부미의 24주기에는 박문비(博文碑) 가 세워졌다
박문사는 장충단과 경희궁 정문을 발아래 두고 배치 됐다
건축 재료도 광화문의 석재를 떼어오고, 경복궁의 선원전에서 목재를 뜯어와 지었다
새문안 서궐(西闕), 즉 경희궁의 정문을 떼어다가 박문사의 정문으로 삼았다
해방이 되어 박문사는 파괴됐다
곧이어 임시정부 요인을 비롯한 각계 인사 수백 명이 장충단에 모여 안중근 동상을 박문사 자리에 건립하기 로 결의했다
그런데 안중근 동상 건립은 지지부진했다
1959년이 되어서야 박문사 터가 아닌 남산 중턱에 세워졌다
박문사 자리에는 1967년 영빈관이 섰다
정부의 영빈관이다가 1973년 기업의 영빈관으로 넘어갔다
박문사는 사라졌지만 그리로 오르는 길고 가파른 돌계단은 남았다
흥화문은 1988년 박문사의 정문을 떠나 경희궁의 정문으로 되돌아갔다
박문사는 사라졌는데 장충단은 복원되지 않았다
계속 공원이었고 참배객 아닌 행락객으로 붐빈다
현재의 영빈관(박문사터) 모습이다
장충체육관 (서울시 중구 동호로 241, 장충동2가 200-102)
1955년 6월 육군체육관으로 출발했다
1959년 8월부터 서울시가 운영을 맡았다
이후 본격적인 경기장으로 개·보수했다
이 건물은 당시 서울특별시의 예산과 국고보조금을 바탕으로 하여 처음에 총자금 9,200만원이 투입되었 으며, 건축가 김정수에 의해 설계되었고, 감리는 미국 의 벡텔사, 그리고 당시 한국 기술 여건상 실현하기 어려웠던 직경 80m 철골 트러스돔(철골트러스 32개, 환상형 트러스 13개)의 구조설계와 건축설계 부분은 미국에서 귀국한 건축가 최종완이 맡아, 삼부토건이 건설한 대한민국 최초의 실내경기장이다
필리핀 엔지니어가 참여했다는 설은 나돌았지만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이에 대한 보충적 의견으로 감리를 맡은 미국의 벡텔 사 아시아 사무소가 당시 필리핀에 있었기 때문에 필리핀인들이 단순노무활동을 하는 등의 보조적 양식 으로 일부 건설에 참여했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으나 근거는 없다
1963년 2월 1일에 개장했고 서울시에서 관리하다가 2007년 2월 1일부터 동원엔터프라이즈에 위탁했고, 리모델링 공사를 하면서 동원과의 계약이 만료됐다
배구, 농구, 종합격투기 등의 스포츠 경기와 콘서트, 마당놀이 등의 문화 공연이 열린다
2009~2010 V-리그부터 프로배구 구단인 GS칼텍스 서울 KIXX (여자뷰)와 서울 우리캐피탈 드림식스 (남자부)의 홈경기장으로 사용되었다
리모델링 후 GS칼텍스는 2014-15시즌 후반기에, 그동안 모기업이 바뀐 서울 우리카드 위비는 2015- 2016시즌부터 다시 홈구장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1989년(13회)과 1992년(16회)에는 장충체육관 에서 MBC 대학가요제가 개최되었다
2012~2013 V-리그 종료 이후 내부 리모델링을 거쳐 2013년에 재개관할 예정이었지만 2014년 8월로 연기된 후, 지붕 보강 및 문화시설 사용까지 추진되면 서 또 다시 완공이 연기되었지만 2015년 1월 17일 재개관하였고, 리모델링과 함께 근처의 동대입구역 연결 통로가 개설되었다
1972년 박정희 정부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를 명분으로 유신헌법을 선포하고 유신헌법 제 35조를 바탕으로 헌법기관인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설치하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유신헌법 제 39조에 근거하여 '무기명 투표에 의한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의 시행 역할까지 담당하게 되는데,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회의장으로서 선거가 치러진 곳이 장충체육관 이었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들의 뜻과 괴리된 선거 방식 과 체육관이라는 비공개적 장소에서 진행된 작태를 비판하며, 이와 같이 체육관에서 간선제로 진행된 선거를 체육관 선거라고 지칭하게 되었다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시절까지 유지되었다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인해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이 개정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