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장충체육관 뒷쪽에 한양도성 남산길 구간이 있어 한양도성에 대하여 간단히 알아본다
한양도성
① 축성(築城)
1395년(태조 4) 한양(지금의 서울)을 방위하기 위한 도성을 쌓으려고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정도전에게 명하여 성터의 조사 측정을 실시하였다
이듬해 음력 1월 9일 전국에서 징발한 장정 11만 8천 7백여 명을 동원하여 축성을 시작하였는데, 길이가 9970보(步 : 1보는 6자)이고 높이가 40자 2치인 도성을 97구간으로 나누어 각 구간마다 전자문에 따른 번호를 하늘 천(天) 자부터 조상할 조(弔) 자까지 붙였다
전후 98일 만에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따라 성벽의 축조를 완료하였다
1396년(태조 5) 9월 성문을 모두 완성하였다
정북(正北)쪽에는 숙청문(肅淸門 - 숙정문), 동북 (東北)쪽에는 홍화문(弘化門 - 혜화문), 정동(正東) 쪽에는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남(東南)쪽에는 남소문(南小門), 정남(正南)쪽에는 숭례문(崇禮門), 소북(小北)쪽에는 소덕문(昭德門 - 소의문), 정서(正西)쪽에는 돈의뮨(敦義門), 서북(西北)쪽에는 창의문 (彰義門)을 두었으며, 수문 1소(所 - 이간수문?)를 두었다
② 보수(補修)
1422년(세종4)에 흙으로 쌓은 곳을 모두 돌로 다시 쌓는 등 봉족(奉足)과 잡색(雜色) 32만 2천 4백 명을 동원하여 38일 만에 대대적으로 성곽을 고쳤다
1451년(문종 1)에도 성을 고쳤지만 임진왜란 때 일부가 부서졌다
1616년(광해군 8)에 개수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다시 부서졌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맺은 약조 중에 성벽을 쌓지 않고 보수도 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 부서진 채로 방치되다가, 1704년(숙종 30) 이조판서 이유(李儒) 의 주장으로 5군문(五軍門)의 장정을 동원하여 1711년(숙종 37)까지 수축하였으며, 1743년(영조 19)에 다시 고쳤다
그밖에도 효종·현종·영조·순조 시대에 부분적인 개수를 행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서울의 성곽은 대체로 태조, 세종, 숙종, 순조 때의 것이다
태조 시기에 지어진 성은 자연석을 거칠게 갈아서 사용하였으며, 아래쪽은 큰 돌을 사용하고 위로 갈수록 작은 돌로 축성하였다
세종 시기에 지어진 성은 좀더 직사각형의 모습을 띄고 있으나, 돌과 돌을 갈아 자연스럽게 이으려 하였다
숙종 또는 순조 시기에는 직사각형으로 돌을 잘라서 축성하였다
③ 훼손(毁損)
1907년(고종 44) 6월에는 이완용 등의 주장에 의하 여 도성을 철거하기로 정하였고, 이를 위하여 같은 해 7월 30일에 성벽처리위원회를 마련하였다
1907년 9월부터 숭례문의 북쪽 성벽을 철거하고 남지를 매립하였으며, 1908년 3월에는 흥인지문의 좌우 성벽을 헐었다 (이는 전차 선로의 부설과 관련되 어 있었다)
또 1908년 9월에는 소의문과 숭례문 좌우의 성벽 총 77간을 파괴하였다
일제강점기의 도시계획과 한국전쟁으로 성문과 성벽 이 많이 파괴되었다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의 전차를 부설하면서 서대문과 동대문의 일부를 헐어내었고, 광화문과 용산 사이의 전차를 부설하면서 숭례문 부근을 역시 헐어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산성을 제외한 평지에 있던 성곽은 모두 헐리어 현재의 모습과 같이 되었다
④ 복원(復元)
1974년 박정희대통령의 국방유적 보존 및 정비 지시 에 따라 구자춘 서울시장이 본격적으로 복원사업을 시작하였다
1975년 광희문 문루 복원을 시작으로 훼손된 체성과 여장 복원, 주변 가옥 매입 등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 다
1975년부터 삼청지구(창의문~숙정문) 복원에 이어 2012년 9월까지 진행된 인왕산 정상 구간까지 총 길이 18,627m 중 69%인 12,771m의 복원작업이 완료되었다
2013년 5월 4일 숭례문 복구 기념식과 함께 숭례문 남동측 광장구간 성벽 복원까지 마무리 되었으며, 앞으로 남산 구간, 시장공관 구간이 추가로 복원될 예정이다
그리고
2012년 11월 23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신청자격 이 부여되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으나, 2017년 3월 21일 다른 나라의 세계유산 도시 성벽과 비교해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 등재 불가 로 결정되면서 사실상 등재가 불가능해졌다
현재 세계유산 2022년 등재를 목표로 자료를 보강하 여 재추진하는 중이다
터벅터벅 도성 바깥길을 걸으며
각자성석을 찾아본다
♤ 각자성석(刻字城石)
성벽을 쌓을 때 돌의 일부에 글자나 기호를 새긴 것을 말하며, 대부분 성벽 축조에 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누가, 언제 쌓았는지 알 수 있는 '공사실명제'라고 할 수 있다)
현재(2015년 기준)까지 한양도성 전 구간에 걸쳐 288개 가 발견되었다
慶山始面(경산시면)
경상도 경산현(현 경북 경산시) 백성들이 담당한 구간의 시점을 표시한 것이다
十三受音始(십삼수음시)
이두식으로 수음(받음 또는 쉼)이라고 불렀는데, 이 각자성석은 13번째 공사구간임을 뜻한다
興海始面(흥해시면)
경상도 흥해군(현 경북 포항시 흥해읍) 백성들이 담당한 구간의 시점을 표시한 것이다
이 외에도 몇 개가 더 있다
성벽길을 따라
예쁜집도 보이고
암문을 지나
도성 안길을 걸어
팔각정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옛 타워호텔)을 지나면 남소문터에 도착합니다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 (옛 남산 타워호텔, 서울시 중구 장충단로 60, 장충동2가 201)
서울에 변변찮은 호텔이 없던 시기(1969년)에 반공대회를 이유로 해외인사들이 찾아오는 것에 대비하여 지어 그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처음엔 6.25 참전 16개국에 한국까지 포함한 총 17개국의 유엔군을 형상화한 17층을 지었으나 (호텔이 완성된 1969년 당시 17층은 서울에서 가정 높은 층이었다) 최근 리모델링하여 19층으로 증축된 상태이다
남소문 터 (서울시 중구 장충동2가 산 5-21)
중구 장충동 장충단공원에서 국립극장 길로 올라가면 한남동으로 통하는 고개가 보인다
그 고개 왼편에 남소문 터라는 표석이 있다
♤ 남소문(南小門)
흥인지문(興仁之門 : 東大門)과 숭례문(崇禮門 : 南大門) 사이에 있는 광희문(속칭 水口門)을 남소문 이라 오인한 예도 있으나 별도로 남소문이 있었다
남소문을 설치한 것은 1457년(세조 3)이며, 새로 이 문을 설치하게 된 것은 한강 나루를 통하여 남쪽으로 가려면 광희문을 통과하게 되는데, 그것은 거리가 멀고 불편하므로 한강 나루터를 도성에서 곧바로 통과하여 나갈 수 있는 문을 하나 새로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가 있었고, 세조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새로 이 문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소문은 설치된 지 12년만인 1469년(예종 1)에 임원준(任元濬) 등의 건의에 의하여 폐지되는데, 그 이유는 실용에 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음양가(陰陽家)에서 손방(巽方 : 正東南方)을 꺼려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문을 설치한 뒤에 의경세자(懿敬世子 : 世祖의 世子)가 사망하여 음양가의 주장이 맞았다는 것이었다
그 뒤 명종·숙종 때에 다시 남소문을 개통하자는 의견이 다시 제기되었으나 풍수금기설(風水禁忌說) 에 의한 반대론에 부딪혀 끝내 개통을 보지 못하였다
1913년 일제가 도로를 개설하며 철거된 것으로 추정 되는데, 이때 고개를 5m 정도 깎아서 문의 주초도남 지 않았다
자유센터 (한국자유총연맹, 서울시 중구 장충단로 72, 장충동2가 201-6)
1954년, 이승만과 장개석에 의해 아시아 반공연맹이 창설되고 이승만은 한국을 반공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이 단체의 본부를 적극적으로 유치하여 자유센터 는 1964년에 완공된다
자유센터의 축대는 한양도성의 돌들을 축대로 사용하고 있다
자유센터의 무거운 지붕은 한양도성을 두 번씩이나 짓이겨버린다
이름과 실제가 다르게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을 짓밟고 일어선 자유센터는 자유는 안중에도 없던 당시 정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과 같게 느껴져 가장 혐오스럽고 추악한 부분이다
결국 1987년 독재정권의 몰락과 80년대 후반부터 몰아친 공산주의체제의 붕괴로 반공을 위해 지어진 자유센터는 본래 용도가 희석되었다
존재 이유를 잃은 건물은 쇠락하기 마련이고 자유센터 는 지금 웨딩홀과 자유총연맹 본부로 사용되고 있다
♤ 한국자유총연맹
대한민국의 법정단체, 국민운동단체로, 본부는 서울시 중구 장충단로 72 자유회관이다
2003년부터 한전산업개발의 지분 51%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2010년 12월 상장공모 당시 20%를 매각해 2017년 3월 현재는 31%의 지분을 갖고 있다
자유총연맹의 설립 근거는 '한국자유총연맹 육성에 관한 법률'이다
이 자유총연맹이란 단체가 종북몰이도 주도하고 관제데모 등의 여론조작을 한 것을 보면 반공을 위해 세워진 단체와 건물이 공산주의와 똑같은 짓을 벌이고 있는게 정말 아이러니하다
국립극장 (서울시 중구 장충단로 59, 장충동2가 산 14-67)
민족예술의 발전과 연극문화의 향상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의 소속기관으로 1991년 2월 1일 발족하였다
♤ 해오름극장
국립극장의 메인 공연장으로 1973년 개장했다
건립 당시의 명칭은 대극장이었으나, 2000년에 현재 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2004년에 대대적인 개축 공사를 거쳐 재개관했으며, 객석 수는 1563석이다
오케스트라 피트와 회전무대, 승강무대 등의 시설도 갖추고 있어 창극 등의 무대 작품 공연장으로도 사용 되고 있다
건설 당시에는 극장 건축 노하우가 부족하던 시절이었 기에 가부키 극장인 일본 국립극장을 본따 만들어졌으 며, 그 때문에 "왜색이 짙다”는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 되기도 했다
또한, 시야가 제한되는 좌석이 많고 현대적인 공연기법을 적용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높았으며, 개축공사에도 불구하고 객석과 로비가 노후화되었다 는 지적까지 겹쳤다
이로 인해 해오름극장은 2015년 전면 개·보수가 결정됐다
♤ 달오름극장
건립 당시의 명칭은 소극장이었으나, 해오름극장과 함께 2000년에 개칭되었다
개축 공사 후 2005년에 재개관했다
객석 수는 427석이며, 국립 예술단체들의 대표 레퍼토리 및 상설 공연, 특히 연극과 창극 전용 극장 으로 사용되고 있다
2014년에 리모델링하여 재개관했다
객석수는 512석으로 변경되었다
♤ 별오름극장
2001년에 현재의 명칭으로 개관했으며, 객석 수는 수납식(지정석으로 운영) 74석과 이동식 30여석 등 총 100여 석이다
무대는 가변식으로, 소규모 창작 혹은 실험적인 무대 예술의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 KB청소년하늘극장
2002년에 개장한 야외 공연장인 하늘극장을, 국민은행의 후원으로 2008년 리모델링을 통해 732 석의 객석을 가진 돔형 공연장으로 새롭게 개관했다
지붕 일부가 자동으로 열리고 닫혀 자연 채광이 가능 하고, 날씨에 관계없이 안정적인 공연이 가능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극장은 1949년 10월에 문교부 에서 국립극장운영위원회를 조직하고 초대 국립극장 장에 유치진(柳致眞)을 임명하였고, 같은 해 말에 1,997석의 구 부민관(府民館: 현 서울시의회 의사당) 건물을 국립극장으로 확정하였다
♤ 부민관 터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125, 태평로 1가 60-1)
본래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덕안궁이 있던 곳이다
경성부는 경성에 대규모의 문화전당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1930년대 초반부터 구상했던 부립극장인 부민관을 건립했다
당시 경성전기회사는 서울의 전기사업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1933년 경성전기주식회사가 100만원을 기부하여 1,486평의 부지를 마련하여 1934년 7월 30일에 기공, 1935년 12월 10일 완공되었다
이 부민관 건물은 해방 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이 접수 하여 사용하다가 1949년에 서울시 소유로 되었고, 1950년 1월에는 국립극장으로 지정되었으나 동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사용이 일시 중지되었다
서울 수복 후 국회의사당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는데 (1954년 ~ 1975년)
이곳은 제헌국회 출범, 초대 대통령 선출, 사사오입 파동, 3선 개헌, 유신헌법 등 한국의 의회민주주의가 왜곡되고 질곡에 빠지는 초유의 사건의 중심에 있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1975년 9월 1일 여의도에 새 국회의사당을 신축하여 이전함으로써 잠시 시민회관으로 사용하였다
1975년 태평로의 확장으로 건물이 축소되었으며 이듬해 세종문화회관이 신축되자 별관으로 사용되었 다(1975년 ~ 1990년)
1991년 지방자치제가 30년만에 부활되면서 서울시의회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부민관 폭탄의거
1945년 서울 부민관(府民館)에서 친일단체 대의당 (大義黨)이 개최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장에, 조문기(趙文紀) 등 애국 의사들이 폭탄을 설치, 일제 고위간부와 친일 민족반역자들의 제거를 기도한 의거이다
일제말기에 부민관은 일제의 전쟁독려를 위한 정치집회를 위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다
(모윤숙과 이광수는 부민관에서 일제의 전쟁에 협력하라는 연설을 하였다)
경성부민관 폭탄의거를 주도한 조문기·유만수·우동학 ·강윤국 등 당시 20세 안팎의 열혈청년들은 1945년 5월 서울 관수동 13번지 유만수의 집에서 대한애국 청년당을 결성하고 항일투쟁의 기회를 엿보았다
1945년 7월 24일 저녁 경성부민관에서 친일파 거두 인 대의당의 박춘금(朴春琴) 일당이 주최하는 아세아 민족분격대회가 열린다는 보도가 나오자, 조문기 등은 비밀회합을 갖고 대회장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유만수가 수색변전소 공사장 발파 인부로 침투해 빼낸 다이너마이트로 사제폭탄 두 개를 만들어 대회 전날 밤 대회장 뒤편 화장실 쪽에 설치하였다
폭탄은 대회 당일인 7월 24일 밤 9시경 박춘금이 시국강연을 위해 등단하고 얼마 뒤에 터졌고, 그것으 로 대회는 중단되고 말았다
경성부민관 폭탄의거는 해방을 한 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시기에 꺾일 줄 모르는 민족의 독립의지를 안팎에 떨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