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친구들

칼의 노래(김훈 저)를 읽었습니다. 책에서 이순신은 자기 얘기를 하는 데, 이 소설이 너무 감상적이 아닌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은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더 감상적이 되는 것입니다. 소설보다도... 그래서, 아래 감상문도 좀 감상적일 지 모르겠습니다. ----------------------------------------------------------------- 사람을 만나는 장면이 별로 없다. 다른 사람에 대한 묘사도 별로 없는 데 그중에 여진이라는 관기와 아들 면에 대한 묘사가 꽤 비중있게 다뤄지는 편이다. 내 자신 아들을 둔 아버지이다 보니 그중에 "면"에 대한 묘사와 그가 죽는 장면에 더 공감할 수 있었지만, 영화의 스펙타클한 장면을 보는 듯한 기분 이상은 아니었다. 그 보다...오히려 내게 눈물끝이 슬쩍 솟을 만큼 동감을 만든 장면은 140페이지부터 시작되는 "누린내와 비린내"편 이었다. 배를 새로 만들고 진수시키고 명량 이후의 싸움을 위해서 새 진지에 대한 구상을 하는 장면이었다. 싸움과 사랑도 다른 격렬한 감정의 충돌도 없는 "업무"에 해당하는 일상이 내게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 이유는 이순신의 고민이 내 것과 그나마 유사한 순간이어서 일까? 아니면, 싸움처럼 나와 적의 구분이 분명하고, 처절한 극명의 순간에는 마음에 혼란 없는 평화가 있으며, 오히려 그 싸움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내부의 혼란과 동지 속에서의 외로움을 겪어내야 한다는 것을 조금 이해할 만한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운명"은 "강"이나 "바다"와 같다. 내가 탄 배로 그 강, 그 바다를 지날 때 내가 만나게 되는 폭포, 태풍 같은 어려움은 내가 준비한 것도 아니고 다른 누가 만들어놓은 것도 아니다. 나보다 먼저 그곳에 있었고, 폭포와 태풍은 그 자체로 강과 바다의 다른 모습일 뿐 이다. 힘들고 억울해도 폭포를, 태풍을 원망할 수는 없다. 그곳으로 나아가는 나를 원망해서도 안된다. 내 배는 강을 따라 흘러서 바다에 이르도록 되어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다. 싫어도 받아들여야되는 대상이며, 이 세상의 본질 그 자체다. 나는 분명히 이 세상에 속해있는 것이므로, 내 자유의지란 실은 그 강물 위에서 노를 저어 바위를 피하고 옅은 물을 피해가는 정도이거나 또는 물살이 없는 하구언에서는 물살을 살펴서 물길방향으로 나아가는 정도가 최선일 것이다. 배에서 내리는 것은 내 자유의지가 아니라 내 운명을 포함하는 세상 밖으로 던져지는 것이므로 그것은 한가닥 내 자유의지 마저도 포기되는 자아상실의 극한이므로... 바다 위에 존재해야 하고 배를 타고 있어야 하는 것, 싸움을 걸어오면 싸워야 하는 것... 책에서의 이순신은 스스로를 이런 운명안에 있는 존재로 이해하고 그런 이해가 그가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바탕인 것 같다. 아마 이런 상황은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게도 "칼"은 내가 가진 유일한 것이다. 세상의 물살과 파도가 너무나 컸던 이순신에게 칼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의 정수이고 결연한 의지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순간에도 심지어 내 손에 칼 한자루 없는 순간에도 이순신은 한자루 칼의 예리한 날로 허공을 갈랐고 그 갈라진 한줄기 선으로 꽉막힌 세상의 물길을 만들었다. 칼은 내가 가진 유일한 것이자 나 자신이고, 세상에 포함되어있고 세상이 알고 있지만 결코 "남들의 세상"에서는 범하지 못할 "내 세상"의 것이다. 내 세상의 칼은 다른 세상의 칼로도 이어질 것이다. -------------------------------------------------------------- 역시 좀 감상적인 글이 되었군요. 현실의 아픔을 반영하지 못한다면 이순신 얘기가 아무리 절절해도 감상적일 수 있을만큼 동감하지 못할 겁니다. 때로 이렇게 감상에 빠질 수도 있는 글을 써주는 작가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