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632
■ 2부 장강의 영웅들 (288)
제10권 오월춘추
제 36장 공자(孔子)시대 (10)
마침내 제경공(齊景公)은 그 미인들과 양마 120필을 사신에게 딸려 노(魯)나라로 보냈다.
제(齊)나라 사신은 곡부성 남문에 이르러 두 곳에다 비단 장막을 쳤다.
동쪽 비단 장막에는 120필의 말을 매어두고, 서쪽 비단 장막에는 미인들을 머물게 했다.
그러고는 삼환 중의 한 사람인 계손사(季孫斯)의 집으로 향했다.
그 무렵, 계손사(季孫斯)는 나라가 태평하고 걱정 근심이 사라지자 틈만나면 즐거운 일을
찾고 있었다. 그런 중에 제(齊)나라 사신이 와서 미인 악사들을 바치려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호기심이 일었다."내가 한 번 살펴본 후 주공에게 바칠 것인가 어쩔 것인가를 결정하겠다."
계손사(季孫斯)는 평복으로 갈아입고 몰래 남문 밖으로 나가보았다.
제(齊)나라 사신은 미인들이 공연하는 강악과 강악무를 계손사에게 보여주었다. 음악과
노래와 춤은 황홀했다. 노랫소리는 가는 구름을 멈추게 하고, 춤추는 자태에서는 향기가 일었다.
생전 처음 그런 춤과 음악과 노래를 관람한 계손사(季孫斯)는 정신이 빠졌다.
온몸이 녹는 듯하고, 마음이 산란했다. 시간 가는 줄 몰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이튿날 계손사(季孫斯)는 궁으로 들어가 노정공을 알현하고 제나라에서
미인 80명을 보내왔음을 보고했다. 노정공의 눈빛이 달라졌다.
"제(齊)나라에서 왔다는 그 여악(女樂)들은 지금 어디 있소?"
"남문 밖에 머물고 있습니다. 주공께서 보실 생각이시라면 신이 모시고 가겠습니다.
하지만 주공의 행차가 알려지면 백성들이 불편해할 것이니, 미복으로 가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노정공(魯定公)은 평복으로 갈아입고 계손사와 함께 남문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장막 근처에 이르렀을 때였다.
계손사(季孫斯)는 심복 부하 한 사람을 먼저보내 제(齊)나라 사신에게 귀띔했다.
"우리 주공께서 미복 차림으로 오셨소."제나라 사신은 미인들을 불러놓고 당부했다.
"노(魯)나라 군주가 미복으로 오셨다고 한다. 너희들은 각별히 신경 써서 온갖 재주를
다 보여봐라."제(齊)나라 미인 악사 80명은 더욱 교태스럽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소매가 나부낄 때마다 장막 안에는 무지개가 서는 듯했다.
10대(隊)의 미녀들은 번갈아 등장하여 자신들의 재주를 마음껏 발휘했다.
평생 고루한 음악만 들어오던 노정공(魯定公) 또한 완전히 정신을 빼앗겼다.
궁으로 돌아온 노정공(魯定公)은 그 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미인들의 노래가 귓전에 맴돌고 춤추는 자태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다음날 아침, 노정공(魯定公)은 혹시나 공자가 제나라에서 보내온 선물을 반대할까 두려워
일부러 계손사만을 부르고 제(齊)나라 사신을 맞아들였다. 노정공은 제나라 사신에게
황금 1백 일을 답례로 하사했다. 미인 악사 80명과 말 120필을 접수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노정공(魯定公)은 80명의 여악 중 30명을 계손사에게 내주고 나머지는 내궁에 머물게 했다.
그때부터 노정공과 계손사(季孫斯)는 각기 낮이면 노래와 춤을 즐기고 밤이면 미인들을 끼고
술을 마셨다. 조회를 여는 것이 귀찮아 열흘이 넘도록 정청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 소식이 공자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성질 급한 제자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말했다.
"선생님이여, 이제 노(魯)나라를 떠날 때가 왔나봅니다."공자(孔子)가 대답했다.
"아직 이르다. 며칠 후면 교제(郊祭)를 올리는 날이다. 주공이 교제를 마치고 나서
그 조(胙)를 대부들에게 나누어주면 이는 희망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를 나누어주지 않으면 나는 여기를 떠날 것이다."
교제(郊祭)란 남쪽 교외로 나가 하늘에 올리는 제사를 말한다.
참고로 북쪽 교외로 나가 하늘에 올리는 제사는 사제(社祭)라고 한다.
또 조(胙)는 제사를 지낼 때 쓰이는 고기로서, 제사가 끝나면 군주는 신하들에게
그 고기를 나누어주는 것이 관례였다. 신하들에 대한 존중의 표시다.
마침내 교제날이 되었다.노정공과 계손사 등 문무백관은 남쪽 교외로 나가 하늘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노정공(魯定公)은 제사를 지내자마자
부리나케 궁으로 돌아갔다.제(齊)나라에서 바친 미인 악사들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제사를 지낼 때 쓴 '조(胙)'를 신하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잊고 말았다.
제관이 궁으로 들어가 아뢰었다."조(胙)를 나눠주십시오."노정공은 귀찮은 표정으로
아무렇게나 말했다."과인은 바쁘다. 계손사에게 나눠주라고 일러라."
하지만 계손사(季孫斯) 역시 제사가 끝남과 동시에 집으로 돌아가 강악과 강악무를
즐기고 있었다. 결국 조(胙)는 분배되지 않았다.그 날 밤, 공자(孔子)는 길게 탄식했다.
"아, 나의 진리가 세상에 퍼지지 않았구나. 이것이 하늘의 뜻인가?"
다음날 아침, 공자(孔子)는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곡부성을 떠났다.
계손사에게 벼슬하던 자로(子路)와 자유(子有)도 관복을 벗어던지고 스승 공자의 뒤를 따랐다.
공자(孔子)가 노(魯)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가려 한다는 소문은 계손사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는 깜짝 놀라 악사장 기(己)를 보내 공자를 데려오게 했다. 악사장 기가 서둘러 곡부성을 나섰다.
그때 공자(孔子)는 여러 제자들과 함게 북쪽 교외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기(己)가 뒤쫓아가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께서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노나라를 떠나시는 겁니까?"
공자(孔子)가 그윽한 눈길로 기(己)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노래로 대답해도 괜찮겠는가?"
그러고는 그 자리에 앉아 거문고를 타며 노래 한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군주가 여인의 말을 믿으면
군자는 떠나가는도다.
군주가 여인을 가까이하면
사직은 사라지는도다.
이런 그늘 속에서 벗어나 유유자적하며
이렇게 나의 세월을 보내리라.
악사장 기(己)는 공자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다.
그가 성안으로 돌아오자 계손사(季孫斯)가 불러 물었다.
"공자가 뭐라고 하던가?"기가 사실대로 대답하자 계손사는 크게 탄식했다.
"아아, 공자(孔子)는 내가 제나라 무녀(巫女)를 받아들인 것을 책망하고 있구나."
이렇게 공자는 노(魯)나라를 떠나갔다. 이 떠남이 곧 그 유명한 공자의 '천하 역유(歷遊)'다.
이때 공자 나이 56세.따르는 제자가 수십 명에 달했다.
633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633
■ 2부 장강의 영웅들 (289)
제10권 오월춘추
제 37장 오월(吳越) 전쟁 (1)
초(楚)나라를 쳐부순 이후 오왕 합려(闔閭)의 명성과 위엄은 중원에까지 크게 떨쳤다.
합려(闔閭)는 천하가 손안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이제 남은 것은........'
북방의 제(齊)나라와 남쪽의 월(越)나라다.
그 두 나라만 제압하면 오(吳)나라는 명실공히 중원의 3분의 2를 지배하는 패자(覇者)가 되는 것이다.
합려(闔閭)가 제나라를 염두에 둔 것은 다름 아니다.제(齊)나라가 회수(淮水)를 사이에 두고
오(吳)나라 바로 정북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나라만 굴복시키면 황하 근방의 노(魯)나라나
위(衛)나라, 정(鄭)나라 등은 자연 오나라 영향권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생각만 해도 짜릿한 일이었다.
어느 날, 합려(闔閭)는 신임 재상 오자서를 불러 물었다.
"북의 제(齊)나라를 먼저 도모하는 것이 좋겠소. 아니면 남쪽의 월(越)나라를 먼저 평정하는 것이 좋겠소?"
오자서(伍子胥)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긴 끝에 대답했다.
"북입니다."
"어째서 그렇소?"
"남쪽의 월(越)나라는 해안선이 복잡하게 뒤얽힌데다가 산이 가로막혀 있어 일시에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이 곳을 치면 저 곳으로 도망치고, 저 곳을 치면 또 다른 곳으로 도망쳐 좀처럼 굴복시킬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오랜 세월을 두고 야금야금 정복해 들어가야 합니다. 반면........."
북쪽의 제(齊)나라는 임치성을 중심으로 완전히 자리가 잡혀 있다.
백성들도 공실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비록 영토는 넓다고 하나 힘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어
그 중심부만 제압하면 나머지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오자서의 말을 들은 오왕 합려(闔閭)는 공감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어떻게 제나라를 제압하는 것이 좋겠소?"
이번에는 오자서의 대답에 망설임이 없었다.
"제(齊)나라는 최근 동방의 패자로 자처할 만큼 힘이 강대한 나라입니다. 지금은 죽었지만 재상 안영과
사마 전양저로 인해 나라도 안정되었습니다. 힘으로 맞서서는 결코 그들을 제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제나라와 우호를 맺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우호라고?""그렇습니다. 우리 오(吳)나라는 한 면이 바다요, 삼면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 군사가 아무리 용맹하다 하더라도 세 적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초(楚)나라는 우리를 넘보지 못할 것이므로 당분간 안심해도 됩니다.
남은 것은 제나라와 월나라인데, 우리가 제나라와 우호를 맺으면 모든 힘을 남쪽으로
집중시킬 수가 있습니다. 신이 북쪽을 도모하자는 것은 제(齊)나라와 싸우자는 것이 아니라
제나라를 동맹국으로 삼자는 것입니다."
오왕 합려(闔閭)는 비로소 오자서의 말뜻을 알아챘다.
결국 오자서(伍子胥)는 월나라를 평정하여 남쪽 후방을 안정시킨 후 제나라를 길목으로 하여
중원을 제패하자는 것이었다."좋은 계책이오. 그런데 우리는 제(齊)나라와 아무런 교류가 없는데,
어떻게 그들과 우호를 맺는단 말이오?""세자 파(波)가 부인을 잃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왕께서는 세자 파를 언제까지 혼자 놔둘 작정이십니까?""제나라와 혼인을 맺자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제(齊)나라와는 교류가 없지만 사자를 보내어 청혼하면 결코 그들은
우리의 청을 거절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우호를 맺는 첩경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합려(闔閭)는 추진력이 강한 왕이었다. 오자서의 간언을 듣자 즉시 대부 왕손락(王孫駱)을
제나라로 보내어 혼인을 청했다.이 무렵 제경공(齊景公)은 나이가 이미 일흔이 넘었다.
늙고 쇠약해서 과거의 진취적이고 호방한 기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느닷없이 남방 오랑캐인 오(吳)나라가 청혼해오자 당황했다.
예전 같았으면 크게 화를 내며 청혼사를 꾸짖어 쫓아냈겠으나, 지금은 그런 패기가 사라졌다.
더욱이 지금 오(吳)나라는 바야흐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신하들을 불러 물었다."오나라와 혼인하는 것이 어떠한가?"
대부분의 신하들이 침묵하는 중에 총신인 대부 여미(黎彌)가 아뢰었다.
"오(吳)나라는 초나라 수도를 점령할 만큼 강성한 나라입니다. 그들과 우호를 맺는 것이 유리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번 청혼을 거절하면 그들은 필시 대군을 몰고 임치를 향해 쳐들어올 것이 분명합니다."
제경공(齊景公)은 머릿속으로 불타는 임치성의 광경을 그려보았다.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마침 그에게는 열다섯 살이 갓 넘은 어린 딸이 있었다. 늦게 얻은 딸이라 무척 사랑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소강(少姜)이라 불렀다.
제경공(齊景公)은 소강을 오나라로 시집보내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나라에서 온 청혼사를 불러 승낙하는 말을 내렸다.여러 차례 사신이 오간 끝에 마침내
소강(少姜)은 오나라 세자 파(波)에게 시집왔다. 그런데 소강은 나이가 너무 어렸다.
몸도 성숙하지 못했다. 밤이 되면 괴로웠다.소강(少姜)은 풍속과 기후가 다른 낯선 남방 땅의 생활이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었다. 틈만 나면 고국을 생각하며 울었다. 세자 파(波)가 위로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소강은 우울증에 걸려 병석에 눕게 되었다.
오왕 합려(闔閭)는 어린 새 며느리가 불쌍했다.
그녀가 늘 북쪽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고 북문 성루를 개조하여 호화스럽게 장식했다.
성문이름도 '망제문(望齊門)'이라고 고쳤다.소강(少姜)은 매일 망제문 위로 올라가 북쪽 하늘만
바라보았다.그러나 하늘만 쳐다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녀의 슬픔과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쌓여갔다. 병세도 더욱 악화되었다.
끝내 소강(少姜)은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직전 소강은 남편인 세자 파(波)에게 부탁했다.
"제가 죽거든 우산(虞山) 꼭대기에 묻어주십시오."
우산은 오성 근처에 있는 산으로, 소강은 죽어서라도 제(齊)나라 쪽을 바라보고 싶었던 것이다.
소강(少姜)이 죽자 세자 파(波)는 합려의 허락을 받아 그녀를 우산(虞山) 위에 묻었다.
오늘날도 안휘성 상숙현 우산에 올라가면 제녀묘(齊女墓)가 있다. 소강의 무덤이다.
또 그 곁에 망해정(望海亭)이라는 정자가 서 있다.그런데 세자 파(波)는 마음이 무척 여렸다.
소강을 무척 사랑했었던 것이다. 어린 아내가 죽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 또한 병들어 눕고 말았다.
얼마 안되어 세자 파(波)도 소강(少姜)의 뒤를 따라가듯 세상을 떠났다.
63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