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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 언어의 행간을 밟고 징검징검 시를 찾아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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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 작품. 스크랩 오윤의 판화 몇 점
칼바도스 추천 0 조회 61 10.06.02 21: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오윤(吳潤.1946.4.13∼1986.7.5)

 

 

 

   조각가ㆍ판화가. 부산광역시 동래구 출생. 소설가 오영수(吳永壽)의 아들. 서울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거쳐 1971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1969년 서울대학교 조소과 4학년 때 임세택ㆍ오경환과 함께 3명이 1980년대 민족ㆍ민중 미술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현실동인]을 결성하여 전시회를 준비했으나, 재직교수들과 관계기관이 문제를 삼아 열지 못했다. 이 당시 그는 이동주의 조선조 속화와 실경산수에 대한 민족주의적 입장의 새로운 해석과 멕시코 벽화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현실동인 전시회가 실패한 이후 학업을 중단하고 경주에 머무르며 벽돌공장을 운영했다.

   한편 미술관과 유적들을 돌아보면서 한국의 전통조각, 회화를 서양미술의 기준으로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을 깊이 깨닫게 된다. 그 뒤 테라코타에 관심을 가졌고, 그러한 인연으로 상업은행 구의동 지점과 동대문 지점에 부조벽화를 제작했다. 1975년 결혼했으며 이 무렵부터 책의 표지를 위해 제작하는 목판화 작업을 시작했다.

   1979년 '현실과 발언' 발기 준비모임에 참가함으로써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현실과 발언' 초기의 그림 가운데 <지옥도>(1980) <사상체질도>(1983) 등은 불화(佛畵)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도시문명의 문제점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시도한 것이며, 당시의 기존미술과는 다른 파격성으로 인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원귀도(寃鬼圖)>(1984)와 같은 역사해석을 담아낸 기념비적인 작품을 포함한 몇몇 유화물을 그렸다.

   그러나 그의 주작업은 목판화였으며, <소리꾼>(1985) <길노래>(1985) 등은 민중들의 삶에 내포된 해학과 소박성, 한(恨)과 신명 그리고 농축된 생명력을 표현한 작품으로 이후 민족ㆍ민중 미술운동의 목판화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80년대 이후에는 목판화에 전념해 창작 춤판 <강쟁이 다리쟁이> <도라지꽃> 등의 포스터와 <민족의 노래, 통일의 노래> 출판기념회장 걸개그림을 제작하였고, 현실과 발언 창립전(1980), 새로운 구상화가 11인전(1981), 시대정신전(1984∼1985), 삶의 미술전(1984), 40대 22인전(1986) 등의 전시회를 통해 한국 민중판화ㆍ민중예술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1985년 간경화 증세로 병원에 입원한 후 죽기 직전인 그해 5월 30일에서 6월 9일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시회를 가졌다. 

   그는 인간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복잡하지 않고 단순 명쾌하게 표현함으로써 민중판화를 '민족미술 또는 민족문화라는 넓은 영역으로 이끌어 간 예술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작품】<헐벗은 사람들>(1972) <기마전>(1974) <지옥도>(1980) <사상체질도>(1983) <징>(1985) <도깨비>(1985) <소리꾼>(1985) <길노래>(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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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6월 21일 금요일, 우리 이웃의 모습을 질박하게 담아낸 오윤의 10주기를 맞이해 학고재와 스페이스 서울에서 판화및 자료 전시회를 가졌다. 제가 글을 쓰려고,고민을 하다..하다..자료를 찾던중에 서울의대 간호대 연건교지에 실렸던 내용을 그대로 인용 합니다.

 

그의 10주기를 맞으며

자료인용 : 오윤 10주기추모 판화전작집 '오윤, 동네사람 세상사람'이며, 필자는 유홍준(미술평론가, 현 문화재청장)

 

아무렇게나 빗은 곱슬머리에 깡마른 몸매, 날카로운 듯하면서도 어진 눈매와 잔잔한 미소, 어지간히 적은 말수이지만 뼈있는 농담 한마디로 자기주장을 말하던 오윤(吳潤)은 80년대 우리 미술계 변혁의 한복판에서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던 작가였다.

1986년 7월 6일, 그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개인전에서 우리에게 민중적 서정의 영상들을 진한 감동으로 가슴 깊이 새겨주고 예정된 지방순회전도 미처 치르지 못한 상태에서 향년 41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동료 미술인들의 상실감이란…… 그의 사후 열흘 만에 대구에서 열린 추모강연회에서 김윤수 교수는 오윤이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차지할 위치는 우리 문학사에서 신동엽이 차지한 그것과 같은 것인데 그 죽음 또한 비슷하여 60년대 말 채 사십도 못 되는 나이에 신동엽이 세상을 떠났을 때의 허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오윤은 민중미술의 선구적인 작가였으며, 동시에 민중미술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상징적인 작가였다. 1980년대 초 우리 현대사에 민중이라는 역사적이고 실천적인 개념이 사회 각 분야에서 부각되어 민중사학, 민중문학, 민중신학 등이 일어나고 있었을 때 민중미술 또한 진보적이고 젊은 작가들에 의해 제기됐다. 그러나 관념과 논리적 타당성으로서의 민중미술이 아니라 조형의 실체로서의 민중미술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다만 민중성이라는 이름 아래 형식이 난폭해져서는 안될 것이며, 전문성이라는 지식인의 속성에 빠져서 민중적 내용을 상실해서는 안될 것이며, 현실성을 과도하게 드러내면 조형성을 잃을 것이며, 관념에 너무 의존하면 생명력을 잃을 것이라는 부정의 시각들이 팽배해 있었다. 거기에는 올바른 민중미술을 위한 신중한 경계의 뜻도 있었지만 간혹은 민중미술을 배격하는 구실 내지는 트집도 없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오윤의 존재는 참으로 귀한 것이었다. 오윤의 작품 앞에서는 어는 누구도 형식의 난폭성이니, 현실성의 과도한 노출이니, 관념의 도식성이니 하는 우려의 소리가 없었다. 그는 이미 여러 걸음 앞에서 민중미술을 구현하고 있었다. 현실적 소재를 택하지 않고도 현실을 드러냈으며, 아름다운 서정을 노래하면서 힘찬 민중의 심성을 옹골차게 엮어내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오윤의 이러한 성과가 얼마나 장기간의 고뇌와 번민 끝에 얻어낸 것인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민중미술이라는 개념이 미술계의 표면에 나타나기 거?20여년 전, 그는 이미 미술학도 시절부터 민중적 내용과 민족적 형식을 탐구하고 시도해왔던 것이다. 나는 이제 그의 지기의 한 사람으로 그것을 여기에 증언해두고자 하는 것이다.


 

미술학도 시절과 '현실동인전'

 

오윤은 1946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유명한 「갯마을」의 소설과 오영수로 당시 경남여고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의 누님 오숙희 또한 서울대 미대를 나온 화가이고 보니 오윤의 예술적 재능은 내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부산 수성국민학교를 다니면 창밖으로 바다를 내다볼 수 있던 수성동 언덕빼기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오윤은 국민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아버側?『현대문학』 창간 편집인을 맡으면서 이사하게 된 것인데 이후 서울사대부중·고등학교를 다니고 1965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하면서 그의 작가 수업은 시작됐다. 그리고 사실상 작가로서의 경력은 대학 졸업 무렵부터 시작된다.

1969년, 대학 4학년 때 그는 친구 임세택, 후배 오경환 등과 '현실동인전'을 준비했다. 이 동인전은 팜플렛이 제작되고 전시장 예약까지 되어 있었으나 당국의 제재와 교수들의 만류로 자진 철회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이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탄압사례 제1호를 기록하는 사건인 셈이며, 세 사람의 작품이 한 점씩 흑백도판으로 실리고 김지하가 쓴 「현실동인 제1선언」이라는 장문의 리얼리즘론만이 그 증거로 남았을 뿐이다.

 

이 팜플렛에 실린 오윤의 작품 「1960년, 가」는 4·19혁명을 주제로 한 집단 인물상인데 당시 미완성인 상태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하지만 작품의 양식 전체에 멕시코 민족미술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그는 한동안 멕시코의 시케이로스 오르츠코 리베라의 예술에 깊이 심취해 있었으며 훗날까지도 민족적 리얼리즘, 사회적 리얼리즘의 좋은 범본을 여기서 찾고 있었다. 오윤의 작품에서 간결한 인물 표현으로 전형적 인간상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이나 나중에 상업은행 동대문 지점 외벽에 장식한 테라코타 벽화 또한 이 영향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는 오윤이 평론가 김윤수와 시인 김지하로부터 받은 감화와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데, 실제로 그는 진작부터 누님을 통하여 두 선배를 만나게 됐고 그들로부터 끊임없는 영향을 받으며 옆에서 보기에도 부러운 사랑과 기대를 받았다.

 

'현실동인전' 사건 이후 오윤은 사병으로 군에 입대하였다. 그러나 군복무 도중 위궤양 수술을 받고 입대 1년도 못되어 의병 제대를 하게 됐다. 그리고 복학하여 나머지 학업을 채우고 졸업한 것은 1971년이었다.

 

그의 졸업작품은 「황토현」이라는 인물 조각상이었다. 석고로 제작하고 거기에 갈색칠을 하여 나무 질감을 낸 이 조각은 힘겨운 등짐을 지고 오금에 힘을 쓰면서 하늘을 향하여 용틀임하는 누드상이다. 그것은 제목이 시사하듯이 동학농민전쟁 때 관군과 맞붙어 첫 승리를 올린 농민군의 감격과 혁명의 의지를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훗날 그의 판화 「새재에서」나 「아라리요」와 비슷한 것으로 나는 당시 그 작품에서 받은 인상이 시케이로스 또는 자드킨의 기념조각처럼 묵직한 힘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오윤이 당시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를 통해 학교에 기증한 것인데, 재료가 석고인지라 야외에 진열하지 못하고 중앙도서관 좁은 로비에 오랫동안 놓여 있어서 대접을 옳게 받지 못했고, 그나마도 서울대가 관악산으로 이사하면서 챙기지 않는 바람에 망실되고 말았다.

 

나는 대학시절의 오윤을 증언할 정도로 친분을 갖고 있지 못했지만 김윤수, 김지하 선배의 소개로 몇차례 만나는 과정에서 내게 인상깊게 남아 있는 것은 전주에 판소리 완창을 보러 간다는 것이었다. 80년대에 들어서면 학생운동권과 재야 지식인 세계에서는 이같은 민중연희를 다같이 공감하게 됐지만 60년대 말에 탈춤·판소리·민속놀이의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그 예술의 의미와 깊이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오윤의 작품 전체에 나타나는 민중연희적 신명과 온정이 흐르는 민중적 심성의 세계는 그가 이 무렵에 이미 깊이 체득하고 있던 것이었다. 훗날 그가 굿에 관한 좌담에 참여하여 일가견을 펼친 일이나 스스로 말하기를 예술가는 무당이어야 한다고 한 것도 이런 체험의 집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전돌공장과 '청년사' 표지화 시절

 

졸업 후 오윤은 경주에서 전돌공장을 차리고 경영함으로써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되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자기 예술에 대한 유효한 구상 기간이기도 했다. 그의 전돌공장은 고촌 윤경렬(古村 尹京烈) 선생의 아들인 친구 윤광주와 함께 시작한 것으로 결국 2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지만 이때 그는 신라 예술의 고전적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깊이 경험하게 됐다. 그가 석굴암 금강역사에 나타난 기(氣)의 표현을 미학적으로 성찰하고 있는 것이나 우리 미술사에 보이는 민족적 특질을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실증으로 말한 것은 모두 경주시절의 소산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상업은행 동대문 지점의 테라코타 벽화를 제작하였으니 그것만으로도 20대에 남 못지않은 창작 체험을 가진 셈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오윤은 이내 벽제로 가서 또다시 전돌공장 일을 하게 된다. 이번에는 건축가 조건영과 상업은행 구의동 지점의 내외벽 부조를 제작하였다. 전돌공장 시절 오윤은 심심풀이에서였는지 아니면 창작 충동이었는지 테라코타 소품을 몇점 제작했다. 그것은 전시회 출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친구 집에 놀러가면서 손이 심심하여 들고간 것들로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박현수 소장) 「호랑이 꼬리를 쥔 여인」(민혜숙 소장)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 소품들 역시 그의 판화세계와 상통하는 예술적 흥취를 지니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기왕이면 이런 테라코타 작품을 좀더 만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아쉬움을 갖게 한다.

 

  1975년 전돌작업을 마친 오윤은 서울 수유리 집으로 돌아와 정착하게 된다. 결혼하여 새 가정을 꾸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 오윤은 특별한 직업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나중에는 선화예고의 미술선생, 서대문 미술학원의 공동운영 등으로 생계를 꾸려갔지만 이때는 특별한 직업이 없었다. 다만 절친했던 후배인 한윤수의 출판사 '청년사'에 나가 표지화 제작을 도와주면서 그럭그럭 살아갔다.

당시 청년사 사무실에 자주 나오던 평론가 최민, 인류학 교수 박현수 등과 교유하는 것이 그의 큰 낙이기도 했는데 이때 그들은 당시 금서였던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憙)의 『임꺽정』을 아주 흥미있게 돌려 읽고 마치 벽초 팬클럽처럼 『임꺽정』의 낱낱 장면들에 나타난 인간의 심성과 민초들의 어진 마음 그리고 토속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언어와 절묘한 심리묘사를 되새기면서 저녁 술자리를 웃음과 이야기로 보내곤 했다. 그때 그는 성이 오가라는 이유로 '개도치'라는 별명을 얻었다. 벽초의 『임꺽정』이 지향한 문학세계는 곧 오윤의 미술세계로 이어졌다.

오윤이 『임꺽정』의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인간상은 갖바치였다. 어쩌면 그는 갖바치 같은 인간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윤수가 갖바치의 본명인 양주팔을 ?D르어 오윤을 '양주칠'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그렇게 불러주면 그는 항시 싫지 않은 웃음을 보냈다. 그가 민중미술을 정치적 측면이 아니라 심성의 차원에서 접근하게 된 계기와 훈련은 바로 여기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오윤의 예술세계를 말하면서 『임꺽정』을 말하지 않는 것은 거의 실패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오윤이 청년사 마크 「보리」를 비롯하여 『일하는 아이들』(청년사) 『농민』(청년사) 『암태도』(창작과비평사) 등의 책표지화로 목판화를 제작한 것은 판화가로서 이름을 남기게 되는 전초였다. 본래 그는 조각과 출신으로 언제나 조각을 해보겠다는 의욕을 갖고 있었으나 제작비가 많이 드는 조각을 자력으로 해볼 여력이나 성심이 없었다. 원래 서두르지 않는 성품인데다 다소는 게으름으로 인하여 그는 일에 닥치지 않고는 작업을 하지 않았다. 그런 오윤에게 밀려온 일감은 주로 청년사와 '창작과비평사'의 표지화였으며 그는 이 일을 언제나 목판화로 제작했다. 그의 표지화는 이후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많은 요청을 받게 되었다.


 

'현실과 발언' 시절

 

그러던 오윤이 스스로 침묵을 깨고 본격적으로 미술을 시작하게 된 것은 1980년 '현실과 발언' 창립전 때부터였다. 기존 미술계의 폐쇄적이고 고답적인 행태에 반기를 들고 대담하게 자기선언을 하고 나선 이 소집단 미술운동의 선구는 79년 봄부터 많은 토론을 거쳐 1년 뒤 창립전을 갖게 됐던 것이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오윤은 "억지로라도 해야만 했던 상황이었지만, 그 상황은 필요한 것이고 유익한 것이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현실과 발언' 창립 이후 80년대 미술계의 변혁의 기류는 열화같이 번져나갔고 이 운동이 나중에 민중미술운동으로 발전되기까지 수많은 기획전이 열렸다. 그럴 때마다 오윤은 빼놓을 수 없는 선배화가였다.

해마다 열린 '현실과 발언' 정기전 이외에도 '시대정신전' '삶의 미술전' '봄 판화제' '조각가·화가 19인의 판화전' '40대 22인전' '새 구상화 11인전'……

 

80년대 초 그가 본격적으로 작가활동을 개시하면서 우리에게 보여준 작품들은 판화도 조각도 아닌 유화들이었다. 그의 「마케팅」 씨리즈, 「지옥도」, 「원귀도」 등이 그것인데, 「마케팅」은 희화(戱畵)를 통한 소비사회의 비판을, 「지옥도」는 불화라는 전통양식을 이용한 풍자적 공간구성을, 「원귀도」는 이미지의 장대한 파노라마식 전개를 시도했다. 어느 것이나 오윤 특유의 유머와 패러디와 형상의 힘이 느껴지는 대작들로서 한결같이 기존 따블로 작업의 묵시적 규범을 훨씬 벗어난 것이었다. 그것은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대담한 도전이고 탈피이며 나아가서 자기 제시였다. 오윤은 자신의 이러한 시도가 지닌 속뜻을 '새 구상화 11인전' 때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미술이 어떻게 언어의 기능을 회복하는가 하는 것이 오랜 나의 숙제였다. 따라서 미술사에서, 수많은 미술운동들 속에서 이런 해답을 얻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말 없는 벙어리가 되었다.

시대는 더욱더 복잡하고 분화되면 급변하고 있다. 그 속에는 숱한 모순과 갈등도 있어 사회의 여러가지 문제들을 낳고 있다. 그런데 왜 이러한 것들이 즉각적으로 예술적 표현으로 대치되지 않는가.

왜 우리는 일상의 대화 속에서 쉽게 결론을 끄집어내면서도 그것을 미술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불가능한 것 같이 여기고 있는가.


  

그리고 1983년 무렵부터는 목판화 작업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의 대부분의 판화들은 1985년 작이지만 「할머니」 「애비와 아들」 같은 명작은 오히려 1983년 작이다.

이 무렵 80년대 미술이 하나의 문화운동으로 다른 문화패와 연계되는 과정에서 오윤은 남달리 크고 넓은 몫을 하고 있었다. 각종 출판물의 표지화, 삽화 제작도 계속되어 『한국의 민중극』(창작과비평사) 『오적』(동광) 『노동의 새벽』(풀빛) 『남녘땅 뱃노래』(두레) 등 이루 손꼽기 힘들다. 채희완의 탈춤패 '한두레'의 탈을 제작했고, 이애주와 춤패 '신'의 「도라지꽃」 포스터를 그렸다. 백기완 선생의 『민족의 노래, 통일의 노래』 출판기념회장 걸개그림으로 「통일대원도」를 제작했다.

선화예고와 서대문 미술학원에서 생계를 위한 직장생활을 하면서 지난 5, 6년간 그가 적지 않은 예술적 생산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70년대 10년간 벙어리가 되면서 그 잠식기간에 갈고 닦아온 예술적 수련과 고뇌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업에 가속도가 붙을 만한 시점에서 오윤은 병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투병과 양의학 거부

 

오윤이 간경화증으로 고려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은 83년의 일이었다. 당시 담당의사는 이대로 가다가는 1년을 못 넘긴다며 절대 안정과 절대 휴식을 선고했다. 그러나 오윤은 1개월 만에 병원에서 탈출해버렸다. 민간요법과 한방치료로 고치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양의를 거부하고 전통적 방식의 치료를 고집한 것은 그의 작품 경향와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언제부터인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그는 서구식 과학주의에 대해 깊은 회의와 배타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강증산(姜甑山)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참으로 귀하게 쓴 글 「미술적 상상력과 세계의 확대」(『현실과 발언』, 열화당 1985)에서 아주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과학에 대한 신뢰·믿음·확신이 기초되어 있다고 할 정도로 과학은 무한한 발전 가능성과 함께 많은 것을 보여주었고 밝혀주었으며 증명시켰고 또 실현시켰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과학이 과학으로서만 그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과학으로서만 세계를 보게 하려는 과학주의적 사고체계로 변모시켰고, 이러한 현상은 예술의 영역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즉 예술가의 감성이나 상상력마저도 과학주의에 의탁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됨으로써,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고정화시키고 확인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절단해버리는 일을 일삼게 됐다.

그래서 오윤은 예술적 상상력에 대해 새롭고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상상력이란 곧 '세계의 확대'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며, 현대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그리고 문화적인 피폐, 특히 미술에서 그 다양하고 무수한 실험, 전위적인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예술로서의 기능에 실패하고 있는 것은 시각의 단일화, 세계와의 단절, 기계적인 사고 등으로 인한 '세계의 축소'에 있다고 진단한다.

 

오윤의 이러한 문명비판의 시각과 사고는 당시 학계에서 한차례 논의를 일으킨 '신과학운동'과 맥을 같이한다. 카프라(F. Capra)가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에서 이제까지 서구의 과학적인 태도가 데까르뜨, 뉴턴의 정의에 따른 기계적 환원론에 입각해서 여타의 인식태도를 부정했다고 비판하는 반성적 성찰과 같은 문맥이다. 또 이것은 그가 삽화를 그린 김지하의 『남녘땅 뱃노래』에서 차분히 풀어 얘기해준 강증산 사상의 창조적 재해석과 긴밀하게 맥이 닿는다.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시작과 무극대도(無極大道)의 드러냄"을 설파한 그의 예지와 예언에 오윤은 아주 깊이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오윤은 살인기(殺人機)인 양의(洋醫)를 거부하고 활인기(活人機)인 한의(韓醫)에 의탁하게 된 것이다.


 

오윤 판화전과 타계

 

 병원에서 탈출한 뒤 그는 주위의 권고로 진도로 요양을 떠났고, 조금 좋아졌다싶어 서울로 올라왔다가 다시 악화되어 이번에는 강원도 홍천 산골로 요양을 떠났다. 그러던 오윤이 1986년 봄,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이 무렵 80년대 젊은 작가들은 '민족미술협의회'를 발족시키면서 미술운동의 새로운 장을 마련했고, 한편으로는 '그림마당 민'을 개관하면서 전시공간을 확보했다. 전시장 운영을 맡고 있던 김용태와 김정헌은 '그림마당 민'의 첫 개인 초대전으로 오윤 판화전을 기획하여 1986년 5월 30일부터 6월 9일까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개인전이 열렸다.

전시회는 대성공이었다. 그의 판화전은 일주일 연장 전시됐고, 부산·대구·대전 등 지방에서 이 전시회를 유치하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리하여 6월 20일부터 일주일간 부산 공간화랑에서 그의 판화전이 열렸고,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향에서 열리는 자신의 작품전에 참석하고 사흘 후에 돌아왔다. 그리고 열흘 뒤인 7월 6일 오윤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는 민족미술협의회장으로 치러졌고, 장지는 벽제 문봉리 국제공원묘지 한쪽 길가에 마련됐다.

결과적인 얘기지만 오윤 판화의 명작들은 거의 다 이 전시회를 위해 준비한 작품들이다. 인체는 가장 "신비로운 기계"라고 했는데, 암환자는 악화일로에 있다가 세상을 떠나기 서너달 전에는 갑자기 건강이 좋아진다고 한다. 아마도 조물주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말미를 주는 것인가 보다. 오윤은 바로 그 동안에 전시회를 위한 제작에 열중했고 그것이 세상을 위해 그가 마지막으로 한 봉사인 셈이었다.

 

장례가 끝나고 사흘 후, 일본 동경도립미술관에서는 일본·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미술가회의(JAALA)가 주관하는 '제3세계 미술전'이 개막됐는데, 그 해의 주제는 '민중의 아시아'였고, 한국의 민중미술이 특별 우대국으로 선정되어 오윤을 비롯한 23명 작가의 60점이 출품됐다. 이것이 그의 사후 첫 단체전 출품이 된 셈이다. 그리고 7월 11일부터 대구 백향화랑에서는 예정대로 그의 판화전이 열렸는데, 그것은 그의 첫 유작전이 되었다. 이 전시기간중 7월 16일에는 김윤수 교수와 필자의 추모강연회가 열렸다. 이것이 오윤의 짧지만은 않은 화력(畵歷)의 전부이다.


 

오윤의 민중미술관

 

 그의 생애를 돌이켜보면, 오윤은 일찍부터 우리 시대 리얼리즘 미술의 실현을 생각하고 있었고, 그의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은 동시대 문학과 사회과학의 성과를 받아들이면서 성숙했던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가 지향하는 예술세계가 궁극적으로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여기서 쉽게 알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고 있던 우리 시대 미술의 이념, 민중미술에 대한 소견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가 동료, 후배들과 민중미술의 당위성이나 실천방법 등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언제나 한켠에 앉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헛소리" "정직해야 돼" "작품에 대해서도 그렇고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고 정직해야 돼" 하는 식으로 뼈있는 말을 내뱉고 마는 것을 경험한 이들이 많다. 그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오윤의 예술세계를 논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즉 그의 민중미술에 대한 태도는 결코 단순논리이거나 도식적인 방식이 아니라는 점과

어느 정도는 관념적 내지는 신비주의에 젖어 있다는 두 측면을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윤의 미술이 보여준 가장 큰 미덕은 우선 그가 선택한 소재들이 누구보다도 민중적이고 민중지향적이었다는 점이다. 간혹 그는 익살과 야유를 즐기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할머니」 「형님」「애비와 아들」「소리꾼」「여공」 같은 평범하고 세속적으로는 별 볼일 없는 인생들의 모습을 잡아냈고, 「귀향」「김장」「날아가는 새」「천렵」 등 일상적인 일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했으며, 「아이들의 노래」「통일대원도」 같이 우리들의 희망을 노래한 것이었다. 그는 「도깨비」 세상의 이야기로써 우리네 일상적 삶의 태도를 은유적으로 그려내기는 했어도 특정한 인물의 특정한 사건을 기념비적인 필치로 그려낸 일이 없었다. 그의 몇 안 되는 조각에 있어서도 이 점은 모두 통하는 얘기다. 

 

 

오윤 작품의 내용에서 이러한 익명성(匿名性)은 그의 아주 중요한 특성이 된다. 그 익명의 주인공들을 민중의 실체라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는데, 여기에서 오윤이 작가로서 민중을 대하는 태도가 좀 특이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민중적 삶의 실상을 그려낸다든지, 또는 그들의 현실적인 과제를 문제로 삼는 작업은 보여준 일이 없다. 그러니까 그는 민중을 위하여, 또는 지식인 위치에서 민중을 이해한다는 시각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다른 민중미술가들과 곧잘 논쟁하는 부분이 바로 이 점인 것이다. 오윤이 작품으로 보여준 주장인즉, 민중의 '심성(心性)'에 다가서는 일이 민중미술가의 더 중요한 자세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민중적 심성에는 그들이 모순된 현실 속에서 받아온 상처와 아픔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만이 지니고 있는 잠재된 힘을 발견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나아가서 민중의 본디 성품을 회복하는 일이 이 시대의 인간, 지식인이건 민중이건 모두의 과제라는 얘기다. 오윤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마치 현대판 『임꺽정』의 주인공들처럼 춤과 소리 같은 민중연희 형태에서 많은 소재를 끄집어내고 있는 것도 단순한 민중적 정서의 환기가 아니라 그 속에 서려 있는 민중적 심성과 본질을 찾아내려는 의지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얘기가 아닌 것이다.


 

오윤 판화의 양식적 특성

 

오윤의 예술은 또 형식에 있어서 누구나 부담없이 대할 수 있는 시각적 친숙성이라는 중요한 덕성을 갖추고 있다. 그의 작품을 보면 어떤 특출한 손재주나 눈부시게 희한한 기법의 소유자가 만들어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전문인다운 태(態)를 부리지 않기 때문에 형식이나 기법이 주는 위압감이 없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저런 식으로는 나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 사실은 착각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것이 오윤의 형식에 전문성에 대한 포기 내지는 다소 서툴고 거칠게 방치해도 좋다는 식의 조형적 대결의식의 이완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오윤은 이 간결하면서도 친숙한 형식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누구보다도 장인적인 계산을 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나는 아주 좋은 증거를 갖고 있다.

그의 시신이 놓여 있던 방 한켠에는 수십 권의 스케치북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밤샘을 할 때 나는 직업적인 호기심에서 그중 몇권을 꺼내 보았다. 거기에는 우리가 이미 보아온 목판화의 밑그림과 구상단계의 메모들이 적혀 있었다. 어떤 그림은 인물의 슬쩍 올린 팔놀림을 완성하기까지 수없이 수정한 흔적이 남아 있었고, 어떤 작품에서는 '좀더 단순하게'라고 메모해놓은 것도 있었다. 여기에서 나는 창작과정에 나타나는 그의 끈질긴 조형사고를 읽을 수 있었다.

오윤의 형식이 이처럼 철저한 전문가적 능력과 노력의 결실로 아무나 해낼 수 없는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보통사람들이 누구나 흉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친숙성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알기 쉬운 민중적 조형언어, 민중적 형식을 탐구할 때 가장 먼저,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측면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러면 오윤이 전문가적인 장인 기질을 발휘한 조형방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몇가지 사항으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그의 인물 그림을 중심으로 보면 다분히 전형적이고 도상적(圖像的)으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그의 인물화는 얼굴 표정이나 동작의 한 전형을 포착해내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가 그린 인물의 얼굴들은 한결같이 팔각형의 기본틀 속에서 변형되고 있는데, 이 팔각의 각이 진 선은 그의 작품에서 일차적으로 느껴지는 힘의 요소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여기에 그는 눈매라든지 입부분의 처리 등에 세심한 배려를 가해 그 인물의 현재 표정을 집어넣는다. 동작의 표현에 있어서는 그 인물이 지닌 특정적인 모습을 요약해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것은 동작뿐만 아니라 정지된 상에 있어서도 고개의 방향 또는 시선의 방향으로 몸짓의 뜻을 명확히 해준다. 「보충수업」 같은 작품에 이르면 그 얼굴은 탈화[假面化]했다고 할 정도로 의도적인 과장이 보이지만, 그가 그린 대부분의 인물들은 우리가 흔히 대하고 있고, 대할 수 있는 그런 전형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오윤의 선(線)이 갖고 있는 힘이다. 오윤의 선은 단순히 목판화라는 장르 자체의 특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의 유화작품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얘기인데, 말하자면 조각적인 선이다. 그의 형상은 그려진 것이 아니라 떠내진 것이라고 표현해야 옳다. 묘사된 선이 아니라 마치 바윗덩이나 차돌처럼 부피와 무게조차 느끼게 하는 선인 것이다. 그 점에서 오윤의 조각가적인 기질이 크게 작용했는지도 모르지만, 더 크게는 전통적인 붓의 움직임이 적용된 것 같다. 그의 선에는 굵기와 가늘기의 변화가 구사되고 끊긴 듯 이어지는 여운이 삽입되면서 붓맛과 칼맛이 정확하게 드러나 있어, 그로 인하여 우리는 오윤 작품에서 말할 수 없는 생동감과 강한 힘을 느끼곤 하는 것이다.

셋째, 그의 그림 또는 도상들은 모든 회화적인 중간항이 배제되고, 상징적인 선이나 부호로 형상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몇 개의 예외를 제외하고 오윤 작품에는 배경이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귀향」처럼 배경을 요구하는 작품에서조차도 몇 개의 층을 갖고 있는 중요한 특징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에 대하여 나는 오윤에게 물어볼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 배경에 대신하여 「아라리요」 같은 작품의 굽이치는 구름무늬, 「애비와 아들」에서 위쪽 하늘로 길게 퍼져가는 흰 묘선의 흐름 같은 것이 고구려 고분벽화의 배경처리 방식과 아주 흡사한데 이것 또한 어떤 연관이 있는가에 대해서도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처리 방식이 명쾌하고 즉발적이며 때로는 도전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는 데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오윤이 공간을 경영함에 있어서 네모틀의 윤곽선을 아주 유효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사람들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일정치 않은 굵기의 테두리선이 공간을 감싸주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밀도를 주기 위한 배려만은 아니었다. 「징」에서는 징소리의 파장이 겹겹이 퍼져나가고, 「북」에서는 너무도 세 개 두드려 찢어져나간 모습으로 잡아냈다. 「소리꾼」에서는 손가락질의 방향으로 움푹 파였고, 「춤」에서는 두 손의 뻗침만큼 윤곽선이 들어갔다. 그리고 발꿈치 아래쪽으로는 이 인물들의 무게만큼 테두리가 눌리고 파인 것이다.

오윤은 '기(氣)'의 예술가라고 할 정도로 인물의 리얼리티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기를 살려내는 방식을 모색해왔다. 그는 석굴암의 인왕상이 보여준 기의 리얼리티에 대하여 언급한 적도 있다. 바로 이러한 언뜻 보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한 부호 처리가 그 기를 구체적인 형식으로 유효하게 살려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배경에 삽입한 부호나 선묘의 흐름은 확실히 그 인물이 지닌 '기'의 강도와 발산 방향과 일치하며, 「도깨비」에서는 김이 나오는 모습으로, 「소리꾼」에서는 길게 뻗어 휘어감긴 검은 줄자락으로 퍼지고 있다.

이러한 점들이 전문인으로서 오윤이 구사하고 계산해낸 조형적인 배려였으며, 오윤 예술의 형식적 특징이기도 하다.

 

 


 

그의 신비주의에 대하여

 

 오윤의 삶과 예술을 논하면서 이제 마지막으로 여운처럼 남는 그의 신비주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오윤은 간혹 관념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있다. 그것은 그가 진실된 리얼리스트로서 부족한 면이 있다는 비판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의 작품을 보면 간혹 현실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나 따뜻한 친절성이 아니라, 미래적 삶의 가공치를 향하면서 거기에 못 미치는 세상에 대한 연민의 정에서 나온 작품들이 있다. 도대체 무얼 그린 것인지 알기 힘든 「사상체질도(四象體質圖)」 같은 작품에서는 당혹과 의아심을 표하게도 된다. 「도깨비」 연작도 우리가 웃어넘기는 재미 그 너머에 그가 말하고 있는 무엇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는 좀처럼 그것을 말해주질 않았다. 그러나 그 점은 오윤이 "산업화를 촉진시킨 과학은 인간 사고를 거기에 매몰시켜버린 셈이 됐다. 우리는 과학주의 속에서 잃어버린 것, 잃지 말아야 했을 것들을 되찾아야 한다. 그것은 극단적인 과학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며, 하늘과 말을 나누듯, 모든 자연과 더불어 대화하듯 순수하고 착한 본성으로 인간들이 어울어지는 따뜻함의 회복에 있다"라고 말한 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나는 오윤의 이런 사고와 작품경향이 우리가 지나치게 서구식 합리주의·과학주의 틀 속에 잡혀 사물을 인식하는 태도가 좁아져버렸거나 관념화되었음을 비판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미술적 상상력과 세계의 확대」라는 글을 쓰면서 "상상력이라는 말을 좀더 넓혀서 생각하면 곧 세계의 확대라는 말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세련된 지식인보다 천진스런 민중을 좋아했고, 양의학의 치밀함보다 한의학과 민간요법의 자연스런 처방을 원했고, 벽초의 『임꺽정』에서 넉넉한 인간미를 배우고자 했고, 그런 것을 판화의 세계에 담으면서 우리의 사고와 시각과 서정과 관념을 넓혀가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얘기들을 하다보면 그는 어느 정도는 현실의 앞쪽 아니면 위쪽 어딘가에 자신의 정신적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의 그림 중 일부는 현재형이 아닌 미래형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오윤이 생각한 미래의 상(像)이 무엇인지 전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현세에서 당연히 했어야 할, 또는 살아 있다면 했음직한 한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큰 안타까움을 갖고 있다. 그것은 그의 목판화가 강한 힘을 지니면서도 한편으로는 단편적이고 단순동기적이라는 점이다. 그가 미완성으로 남긴 「원귀도」 같은 파노라마식 공간 구사와 복합된 이미지의 축적 또는 상충되는 영상 대결을 통한 거대한 서사시, 이를테면 신동엽의 『금강』 같은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다. 그것이 오윤의 미완(未完)의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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