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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도자기를 굽는 설봉 스님 - 무애원을 찾아
海雲 추천 0 조회 85 07.10.27 18:59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읍에서도 10km 정도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무애원. 인천시 강화군 하점면 소재 무애원(無碍院)은 세상의 어떠한 것에도 머무르지 않고 거침이 없다는 뜻으로 조계종 산하 포교원이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게는 무애원이 도자기를 만드는 곳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원장인 설봉 스님이 이곳에서 도자기를 굽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 기법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개성있는 작품을 창작해 온 스님은 일 년에 서너 차례씩 도자기 전시회를 연다. 

 

설봉 스님은 1995년부터 무애원 입구에 해병대 법당을 운영하면서 군 포교에 진력해 왔다. 천연 유약만을 고집해 온 스님은 1971년 출가하였으며 1979년 목공예 특선을 시작으로 목공예 및 도예작품활동에 매진하면서 전시회 수익금을 군과 대학생 포교 및 소년소녀 가장, 위안부 할머니 등을 돕기 위한 기금으로 보시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강화도는 고대유적지와 역사유물이 많은 문화예술의 고장으로 도자기와 잘 어울리는 지역이다. 동시에 해안지역으로는 최전방에 해당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해병대 등 군부대가 많은 군사지역이기도 하다.

 

연일 장마와 무더위가 계속되는 여름, 잠시 장마가 소강상태를 보인 이날 오전 무애원을 찾았다. 강화대교를 건너가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소나기가 내린다. 그 시각 라디오에서는 오늘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지역은 비가 그치고 특히 서울은 가시거리가 16km가 될 정도로 대기가 맑다는 일기예보를 하고 있다. 요즈음처럼 국지성 호우가 수시로 내려 변덕을 부리는 날씨를 예보하는 것은 기상청으로서도 속수무책인 모양이다.

 

무애원에 도착하니 열린 공간이어서 그런지 입구에는 관리인도 없고 입장료도 물론 없다. 마당으로 들어서니 정면에는 무애원도예박물관, 왼쪽에는 법당, 그리고 오른쪽에는 도자기 작업실과 소장고(所藏庫)가 있다. 그런데 오른쪽의 건물 앞에는 큰돌을 쌓아 벽을 만들었는데 벽면의 돌과 그 앞에는 수많은 도자기를 쌓아 둔 것이 매우 특이하다. 원래 석재공장이었던 장소를 인수해 그 돌을 버리지 않고 활용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전북 진안 소재 마이산의 탑사를 방문하게 되면 이갑룡처사가 평생 쌓았다는 기기묘묘한 돌탑을 보고 입이 벌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애원에 오니 밖에 쌓아놓은 도자기들을 보고는 할말을 잃는다.

 

소장고로 들어가니 그동안 제작한 도예작품들이 가득 전시되어 있다. 도자기에는 문외한이라 이들 작품이 얼마나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설봉스님은 천연유약을 스스로 개발하여 작품을 만들어 우리 도자기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하므로 그 예술적인 가치는 엄청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실물을 보아도 집에 몇 점을 소장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도자기가 많다.

 

 

  

 

 

 

전시장 한 쪽에는 인부 둘이서 도자기를 만들고 있다. 그 중 한 분이 설봉스님인지 아닌지 물어보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도자기에 새겨져 있는 스님의 시가 심금을 울린다. 도자기와 대화를 나누는 도공의 애환과 성직자로서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네가 뭐냐?
흙이 옵니다.
네가 몸을 태워라.
그 아픔을 어찌 하오리까?
아픔마져 태워라.

 

네가 뭐냐?
아직도 흙이더냐?
아니 옵니다.
이제 태워도 타지 않는
물건이 옵니다.

 


전시장을 나와 정면의 박물관으로 들어간다. 입구에는 지난 7월 대구중구 봉산문화원에서 개최된 "해병대 포교기금마련을 위한 설봉스님 도예전"의 안내서가 놓여 있다. 이 안내서에는 "백자앞에서"라는 제목의 스님의 시가 게재되어 있어 여기에 옮겨 적는다.

 

   

 


백자 앞에서

 

이 거친 손으로 내 어이 너를 빚었으랴!
이 어두운 영혼으로 내 어이 너를 구웠으랴!
어둑한 가마속에서 처음 너를 본 순간
내 심장의 박동은 멎었지만
너의 싱싱한 숨소리가 가마속 정적을 깨우고 있었다.
굳은 듯 두 손이
감히 너를 만져 보지도 못하고
넋을 풀어놓고 주저앉아 있을 때
너는 한 점 더러움 모르는 하얀 가슴으로 나를 안고
혼탁한 세상 점잖게 밀치며
가마 밖으로 나왔다.
밤새 심술 부리던 바람도 고개 숙였고
아침햇살도 놀라 너의 넉넉한 어깨 위에서
토닥토닥 뛰었다.
시리도록 하아얀 너의 신비로움에 밀려
하늘도 자꾸만 멀어지기만 하던 날
너는 내가 한 점의 티끌임을 알게 해준
스승일레라.
                            - 설봉합장 -

 

 

지금부터 전시된 작품들을 둘러보기로 하자. 도자기는 모두 설봉스님의 작품이지만 서예와 병풍은 다른 분의 작품도 일부 포함된 모양이다. 항아리, 반야심경 화로, 호리병 등 각양각색으로 만든 도자기들이 방문객들을 무아지경에 빠지게 만든다.

 

 

 

 

 

 

 

 

 

 

 

 

 

 

 

 

 

  

 

 

 

 

 

 

밖으로 나와 왼쪽의 법당 안을 살짝 들어다 보니 너무나도 조촐하고 소박한 모습이 오히려 고개가 숙여진다. 강화를 방문하는 기회가 있을 경우 무애원을 찾아 설봉스님의 작품세계에 빠져보는 것도 매우 뜻 깊은 일일 것이다. (2007. 8. 11).    

 

 

 

 


<설봉 스님이 걸어온 길>


     ☞필자주 : 이 자료는 무애원 홈페이지에서 인용한 것이다.
                     다소 길지만 관심이 있는 독자들을 위해 여기에 일부를 전재한다.
                     (
http://www.kangwhahiking.com/soulbong/index.html)

 

 

설봉 스님은 출가하기 전 영화사 연출부에서 일했다. 영화를 종합예술이라고 한다. 예술적 감각과 창의력 그리고 번뜩이는 영감이 없다면 버텨내기 어려운 것이 영화계이다. 신상옥 감독 밑에서 오랫동안 일해 왔던 그는 어느 날 영화의 주인공처럼 홀연히 산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았다. 은하사(경남 소재)에서 참선과 공부를 하며 몇 년간을 보낸 뒤 저자거리로 내려와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의 판자촌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포교활동을 위해 기거하던 단칸방을 개방하자 맑디맑은 눈동자를 가진 판자촌 동네 아이들이 몰려왔다. 스님은 외롭고 쓸쓸한 아이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 간식거리와 학용품을 사 주기 위해서였다. 스님은 자주 탁발을 나갔다. 카페의 실내장식을 해 주기도 하고 상가집에 가서 경을 읊기도 했다. 조금씩 모아진 돈으로 어린이 사물놀이패가 구성됐고 그들이 주축이 되어 군부대 위문공연이 여러 차례 펼쳐졌다. 어린이 포교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던 그 즈음 불교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고 뜻 있는 어른들이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신길6동에 있는 한 건물에다 무애원이라는 포교원 간판을 달았다. 무애원이 안정기에 접어들 즈음 그동안 잠들어 있던 예술적 기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스님은 돈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화두에 몰입하듯 목각을 했고 붓글씨를 쓰고 그림도 그렸다. 무애원에 아이들이 점점 더 늘어났다. 부모들은 대개 맞벌이를 했다. 결손 가정 아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한테 남모르게 학비를 지원해 주었다. 스님의 예술적 감각을 눈여겨보아 왔던 한 신도가 어느 날 가마터를 소개했다. 스님은 도자기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도자기를 구워서 팔면 좀더 많은 아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큰 매력이었다. 그렇게 우연찮게 시작된 도자기 작업은 스님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어린이 포교의 선구자 역할을 해 오던 스님은 좀더 도자기다운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작업장을 강화로 옮겼다. 이곳에서 도자기 연구를 하며 틈틈이 군 포교에 시간을 할애했다. 강화에는 해병대원들이 많다. 해병대에서 군복무(해병 129기)를 마친 스님은 해병대 병사들이 남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일요일에 정기법회를 갖는 것으로 시작해서 해마다 여름이면 '이병의 날'을 만들어 수백 명에 이르는 해병대원들에게 휴식 공간과 도자기를 만들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고,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와 해풍 속에 갇혀 있는 해안초소를 돌며 따뜻한 커피와 함께 훈훈한 마음을 배달한다. 해병대원들은 설봉 스님을 스님이라기보다는 '자상한 아버지'로 인식하고 있다.

 

설봉 스님은 8년 전 부도에 직면해 있는 석재공장을 인수했다. 당시 이 터에는 녹슨 기계와 폐석들이 널려 있어서 아주 어수선했다. 스님은 석재공장을 정리할 때 돈을 주어가면서까지 폐석을 버리기보다는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직접 팔을 걷어부치고 폐석을 건물 외벽에 쌓아올렸다. 포크레인이 동원되긴 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폐석쌓기가 끝나자 허름했던 석재공장은 사람들 시선을 잡아끄는, 조형미가 독특하고 이색적인 건물로 바뀌었다. 스님은 이 작업장에서 열심히 도자기를 구워 냈다. 그동안 전국을 무대로 진행된 전시회가 20여 차례나 되어서 스님이 강화군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스님은 날마다 도자기에 조각을 하고 재를 걸러서 새로운 유약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도자기 굽는 일은 우리 것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측면에서 소중하고 의미있는 작업이다. 스님이 빚어낸 도자기들은 지역사회의 정신문화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이 강화군의 자랑거리이고 나아가 우리나라 도자기 발전에 한 축이 될 것으로 믿어진다. 사람들은 무애원이 그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보다 더 기품있고 우아한 도자기가 만들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도자기 작업은 끝이 없다. 잿물과 흙물을 채에 거르느라 스님 손바닥은 페이퍼처럼 거칠고 손등은 소나무 껍질같이 딱딱하다. 수없이 실패를 되풀이하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의지, 그것은 도를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제대로 된 작품 한 점을 건지기 위해 하루하루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스님 뒷모습이 가을빛 산처럼 아름답고 엄숙해 보인다.

 

 


<찾아가는 길>


김포시를 지나 국도 48번 도로를 따라 가다가 강화대교를 건너서 강화읍 쪽으로 직진한다. 강화읍내 번화가를 통과하면 옛 강화성의 서문이 있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우회전한다. 3km 쯤 달리면 하점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회전해서 1km 가면 비구니 사찰인 백련사의 안내 간판을 볼 수 있다. 다시 1km쯤 진행하면 300여 년 된 느티나무를 지나게 되고 500m 전방에 화강암 외벽을 도자기로 장식한 무애원 건물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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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10.28 15:31

    첫댓글 덕분에 잘 보고 시도 가져 갑니다 하하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 07.10.28 16:42

    ()..저도 이뻐서 살짝~~~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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