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김대건(金大建) 신부(神父)의 활동(活動)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의 제3차 여행
페레올(Ferreol) 주교와 다블뤼(Daveluy) 신부의 조선입국(朝鮮入國)
1.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의 제 3차 여행
① 1844년 말에 페레올(Ferreol) 주교는 밀사(密使) 김(金) 프란치스꼬가 정한 약 속(約束)을 충실하게 따르고자, 조선(朝鮮)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매스트르(Mai -stre) 신부(神父)는 최양업(崔良業) 토마스와 함께 몽고(蒙古)에 남아 있고, 김 대건(金大建) 안드레아는 주교(主敎)와 동행(同行)하였다.
그들은 1845년 1월 1일(양력)에, 조선의 사신일행(使臣一行)이 중국에 가기 위해 국경(國境)을 넘는 바로 그 시기에, 변문(邊門)에 도착하였다. 김(金) 프란 치스꼬는 사신행차(使臣行次)의 수행원(隨行員) 속에 끼어있었는데, 이튿날 밤 몰래 주교(主敎)가 든 주막(酒幕)으로 왔다. 이 용감(勇敢)한 신자를 보자, 페레 올(Ferreol) 주교의 마음은 기뻐 뛰었다. 그는 지금 그의 새로운 고향(故鄕), 그 에게 약속(約束)되었고, 그리고 뚫고 들어가려고 그렇게도 오래 전부터 애써 오 던, 그 땅의 문턱에 와 있는 것이었다(페레올(Ferreol) 주교가 마카오에서 보낸 1845년 5월 25일자서한. APF ⅩⅤⅢ(1846년), P. 77).
② 그러나 지금 당장은 그의 입국(入國)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김(金) 프란치스꼬로부터 들었을 때에는, 그의 기쁨은 곧 슬픔으로 변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중국 과 가장 가까운 관문(關門)인 의주(義州)까지 지장 없이 왔던 7명의 신자 중에서 그곳을 통과(通過)할 수 있었던 사람은 3명뿐이었다. 나머지사람들은 중대한 의 심(疑心)을 받고, 사방에서 군사(軍士)들이 에워싸고서, 교활(狡猾)하고 끈덕진 질문(質問)을 하는 바람에, 주교(主敎)를 위해서 준비되었던 말들과 옷을 가지고, 나라 안으로 급히 서둘러 돌아갔다.
박해(迫害)가 있은 뒤로부터, 조선정부(朝鮮政府)는 선교사(宣敎師)들이 변문 (邊門)을 거쳐 들어왔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 지점에 감시(監視)를 배가(倍加)했 던 것이다. 사신행차(使臣行次)에 소속된 사람이나, 장사꾼의 자격으로 사신행차 를 따라가는 사람은 모두가 의주(義州)에서, 길이 세치, 너비 한 치의 나무쪽에 여행자(旅行者)와 그의 고향(故鄕)의 이름을 적고, 그 밑에 관장(官長)이 수결(手 決)한 것을 통행증(通行證)으로 받아야만 했다.
이 통행증(通行證)은 몹시 난처한 신문(訊問)을 한 뒤에야 내주었고, 중국에서 돌아올 때에는 그것을 내준 관문(關門)의 우두머리에게 되돌려주어야 되는 것이 었다. 군인초소(軍人哨所)가, 긴 국경(國境)에 여기저기 널려있고, 1839년에 사형(死刑)을 당한 프랑스 사람 3명의 신상서(身上書)가 사방에 둘러져 있었다. 외국인(外國人)이 조선(朝鮮)에 잠입(潛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정부가 취한 이 모든 경계조치(境界措置)로 인하여, 지금 당장은 변문(邊門)을 거쳐, 주교(主 敎)를 모셔 들일 수 없게 된 것이다(상게서한(上揭書翰). APF ⅩⅤⅢ, P. 77~79).
③ 육로(陸路)로 갈 수가 없으므로, 페레올(Ferreol) 주교는 바다로 해서 조선(朝鮮) 에 입국(入國)할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이 여행도 육로(陸路) 못지않게 위험(危 險)한 것이었으니, 이 나라의 해안(海岸)은 국경(國境)보다도 더 엄중히 지켜져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어부(漁夫)들은 해안을 떠나 난바다에까지 모험(冒險)을 하지 않고, 또 한 중국인(中國人)과 조선인(朝鮮人) 사이에는 어떠한 통상관계(通商關係)도 없 는 것이다. 만일 두 국민 중의 어떤 사람의 배가 폭풍(暴風)에 밀려 상대편 나 라의 해안(海岸)에 닿게 되면, 난파(難破)한 배의 선장(船長)과 선원(船員)들은 엄중한 감시(監視)아래 수도(首都)로 호송(護送)되어, 각자의 정부(政府)의 손에 넘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연안(中國沿岸)에서 난파(難破)한 조선의 배는 곧 부수어 불살라 버리지만, 중국의 배는 이런 경우 조선정부(朝鮮政府)가 돈을 들여 배를 고친 후, 다시 바다에 보낸다는 차이(差異)가 있다.
④ 이러한 난관(難關)도 페레올(Ferreol) 주교(主敎)의 용기(勇氣)를 꺾을 수는 없었으니, 그는 적어도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부제(副祭)를 받아들이도록 해보겠 다는 약속(約束)을 조선의 밀사(密使)들에게서 받았다.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부제(副祭)가 다행이도 조선(朝鮮)에 잠입(潛入)하게 되면, 바다를 통하여 중국과 연락(連絡)을 취하도록 노력하고, 자신이 배를 타고 주교(主敎)를 모시러 상하이 (上海)에 오기로 되었었다.
그때에 페레올(Ferreol) 주교(主敎)는 이런 편지(便紙)를 썼다.
『이제는 변문(邊門)에 머물 필요가 없게 되었으므로, 나는 가슴에 슬픔을 가득 안은 채,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내가 포교지(布敎地)에 들어가는 것이, 지금 당장은 천주의 뜻에 합치(合致)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이내 평온(平 穩)을 되찾았습니다.
천주의 이 뜻이야말로, 온 세상을 회개(悔改)시키는 것보다는, 우리에게는 더 귀중한 것이어야 합니다. 국경(國境)을 떠나기 전에 나는 조선의 사신일행(使臣 一行)을 구성하는 관원(官員)들과 군관(軍官)들이, 내 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 고자 했습니다.
아아, 그대들이 천주의 은혜를 알고, 그대들에게로 오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 지를 안다면, 우리를 악인들 모양으로 배척(排斥)하고, 사형(死刑)에 처하는 대 신에, 하늘에서 보낸 천사(天使)들 모양으로 팔을 벌려 환영할 것이오.』
⑤ 주교(主敎)는 자기 부제(副祭)에게 마지막 지시(指示)를 주고, 그를 천주의 보호 (保護)에 맡기며, 그의 모험적(冒險的) 시도(試圖)를 기다리는 동안, 마카오로 돌 아가기 위해 요동(遼東)으로 배를 타러 갔다.
그는 거기에서 마지막 희망(希望)의 빛을 보았다. 프랑스 군함 함장(艦長)들이 조선(朝鮮)에 가겠다는 희망(希望)을 표시하였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이 계획 (計劃)을 실천(實踐)한다면, 선교사(宣敎師) 1명이 그들과 동행(同行)하여, 마침 내 이 나라에 잠입(潛入)할 수가 있을 것이다.
1840년에 페레올(Ferreol) 주교(主敎)는 마카오에서 달단(韃단)으로 가는데 5 개월 반이 걸렸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여행은 보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영국인(英國人)들이 전쟁(戰爭)으로 인하여, 교통(交通)이 더 잦아지고 용이(容 易)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전쟁에 뒤이어 중국의 교회(敎會)는 자유(自由)의 여명(黎明)이 비침을 보 았다. 프랑스의 전권공사(全權公使) 라그르네(Lagrenee)와 중국황제의 사절(使 節) 기인(Ki-in) 사이에 조인(調印)되고, 1844년 2월에 도광제(道光帝)의 칙령 (勅令)으로 승인(承認)된 조약(條約)에는, 이 후로부터는 그리스도교가 중국에 용 납(容納)될 것이라는 규정(規定)이 있었다(이른바 황포조약(黃埔條約, 광동(廣東)부근 황포(黃埔)에서 조인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리운다).
중국 안에서 교를 전파(傳播)하는 선교사(宣敎師)들의 권리(權利)가 인정되지 는 않았으나, 외국인(外國人) 신부가 감히 국경(國境)을 넘어 들어오면, 그 지방 의 관헌(官憲)이 체포(逮捕)는 하되, 아무런 벌도 주지 않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당사자의 나라의 영사(領事)에게 넘겨주어, 영사로 하여금 벌을 주고 의무 (義務)를 지키도록 시키기로 규정(規定)되어 있었다.
보는 바와 같이 이것은 아직 자유(自由)는 아니었다. 그러나 자유의 새싹이기 는 하였으니, 이 협약(協約)이 극동(極東)의 그리스도교 집단(集團)을 위해, 하나 의 새로운 기원(起源)이었던 것은 확실하며, 따라서 극동(極東)의 그리스도교 집 단은 이 소식(消息)을 크나큰 기쁨으로 맞이하였다.
⑥ 불행이도 중국(中國)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준 관용(寬容)이 중국의 속국(屬國) 이나 조공(朝貢)을 바치는 나라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까지는 적용(適用)되지 않 았다. 그러므로 조선(朝鮮)의 그리스도교 집단의 상태(狀態)에는 아무런 변화(變 化)도 없었다.
한편 페레올(Ferreol) 주교(主敎)는 오래지 않아, 프랑스사람들이 이제는 조선 (朝鮮)에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소식(消息)을 듣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 고 있는 참이었는데, 그때 갑자기 1845년 6월에 뜻밖의 소식(消息)을 받고, 그 의 희망(希望)은 다시 살아났다. 그의 부제(副祭)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가 조 그마한 조선 배를 타고 상해(上海) 근처의 오송(吳淞)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저 나침판 하나만을 가지고, 자신도 선원(船員)들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바 다를 건너왔던 것이다. 그는 주교(主敎)를 찾아 바다로 해서 조국(祖國)으로 모 셔가려고 온 것이었다.
다음에 싣는 편지(便紙) 두 편은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가 마카오 주재(駐 在) 외방전교회 경리부장(外邦傳敎會 經理部長) 리보아(Libois) 신부에게 보낸 것으로, 그의 항해일지(航海日誌) 비슷한 것인데, 그것을 읽으면 이 대담(大膽)한 젊은이가 어떤 위험(危險)과 어떤 난관(難關)을 거쳐, 그의 영웅적(英雄的)인 과 업(課業)을 성취(成就)시켰는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