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성리학의 발달
김 집 28세, 김 규 28세, 김 반 28세, 김문서 22세
28세 신독재 휘 집(양간공파‧의정공파)
1574년(선조8)-1656(효종8) 조선 중기 문신, 후연, 자는 사강, 호는 신독재,
시호는 문경공 아버지는 문원공 장생,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창녕 조씨.
6세 때 이미 글을 읽고 작문을 하였다. 선조 15년
천곡 송상현과 귀봉 송익필에 수학하고,
1586년 모친상에 집상을 하다가 병을 얻었다.
1591년(선조25) 진사시 2등 합격, 이듬해 4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부친을 모시고 연산에 왔다.
광해 3년 헌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23년(인조1) 인조반정 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6품관으로 특진하여
5월에 부여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학행을 일으키고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인조 12년 선공감 첨정, 사헌부 지평, 동 14년 사헌부 장평, 종친부 전첨, 집의‧
부호군 ‧군자감정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37년(인조15) 적이 물러난 후 도성에 들어가 임금을 위안하고 돌아왔다.
집의에 두 번이나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인조 17년 5월에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에 경연참찬관을
겸하라고 하여 수차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여 경연에 입시하였다.
우부승지에 임명되어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6월에 호군으로 바꾸어 연산에 돌아왔다.
7월, 12월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출사치 않았으니
다시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643년(인조21) 의례문해를 교정하고 원손보양관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8월에 공조참의, 10월에 좌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45년(인조23) 10월에 동궁을 보좌하라는 논지가 있자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11월에 사양하는 글을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이듬해 3번이나 사직들을 올렸다.
인조 25년 세자시강원 찬선에 제수되었으나 사양, 이듬해 특명으로
찬선에 부름을 받았다. 11월에 사직을 간청하여 허락을 얻고
12월에 부친이 저술한「상례비요」를 다시 간행하였다.
1649년 정월 공조 참의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였고
5월에 인조가 승하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자 특명으로 부름을 받아
6월에 상경하니 왕이 식량을 하사하였다.
가선대부 예조참판에 특별히 임명되었으나 4차례나 사양하여 뜻을 얻었으나
바로 공조참판에 제수하니 또 사양하는 글과 함께「상례이동」과
「시무 7조」를 올리니 왕이 탄복하여 그 소장을 옆에 두었다.
왕명을 받아 소학의 주(註)와 중용의 구두(句讀)를 교정하였다.
7월, 9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사양,
9월에 왕이 의식을 버리고 공조참판에 제수하였다.
10월에 상소를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경연에 참가하여 중용을 강술하고「인심도심설」에 대해
임금에게 말씀드렸다.
11월에 귀향을 간청하니 대신, 홍문관, 성균관생들까지
글을 올려 청원하였으나 뜻을 굽히지 않아,
승지 익희(조카)로 하여금 설득하여 왕명을 따르게 하였다.
대사헌, 자헌대부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3번 상소,
3번 대면하여 사양하였다.
12월에 왕의 간청에 못 이겨 조정에 시무하였다.
효종 2년에 왕의 간청에 따라 인물을 전형 선발하는 일을 주관하였으나
재상과 뜻이 맞지 않았다. 상소하여 스스로 탄핵하고 물러났다.
왕의 거듭된 부름과 대신과 대학 유생들의 소환상소에 겨우 응하고
4월에 호분위 사직에 제수되었다.
5월 인조의 연제사에 올라갔다가 사양하는 글을 올렸고,
11월에 대사헌 제수를 사양하였다.
효종 3년 두 번이나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송시열과 서신으로「극상변복지제」를 논하였다.
이듬해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사양, 숭정대부로 승진되었으나 사양,
상소를 운허받지 못하고 이듬해 판중추부사(무임소장관)에 제수되었다.
1655년(효종7)「의례경전」11권을 해석하였다.
벼슬에 물러나기를 상소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조정의 중대 논의가 있으면 왕이 낭관을 보내어 자문을 구하였다.
1656년(효종8) 윤 5월 13일에 별세하니 왕이 부음을 듣고
“김집은 유림의 영수이고 조정에서도 중망이 있었도다.” 고
말씀하시며 특별대우로 장사를 치르도록 하였다.
장사 지내는 날 선비들이 사방에서 모여와 눈물로 조곡하고
“이제 도학은 없어졌다.”고 한탄하였다.
순수한 자질로 정도를 닦고 학문에 전념하여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정에 의롭게 봉사하였다.
벼슬을 사양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일세의 사표로「성덕군자」라는 호칭을 받았다.
시호는 문경이며 1883년(고종21) 문묘에 종향되고
부여 부산서원을 비롯하여 전국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신독재」집 20권
신독재 문경공 집 휘 신도비명
우리 문원공 사계 선생은 학문이 이루어지고 도가 높아
유학의 종사가 되었다.
또 아들이 그 전통을 이으니 신독재 선생이다.
서제(庶弟) 고(杲)가 남의 무고를 입어 장차 예측하기 어렵게 되었을 때
선생이 대궐에 들어가 아우 참판공「반」과 더불어 대죄하였다.
임금이 말씀하시기를 “고가 진실로 망언을 하였으나
그 부형이 모두 어진고로 특별히 용서한다.”하였다.
상(上)에 이르되 “비록 적도이나 현자를 두려워 할 줄 아니
국가에 유익함이 이와 같다.” 이르고 선생이 상소하여
여가를 빌 때 수묘할 것을 윤허 받았다.
이어 승진하여 이조판서를 삼으니 선생이
3번 상소하고 3번 면고(面告)하여 사양하였다.
임금이 말씀하시되 “더불어 천위(天位)를 같이 하고, 천직을 다스리지 못함은
왕공(王公)이 어진 사람을 높이는 도리가 아니다.”하니
선생이 더욱 감격하여 사은하였다.
본조의 상례는 틀리는 곳이 많으므로 주자의 논설을 상고하여
책 한 권을 만들어 전상하였다.
대개 율곡 선생이 석담에 강도함으로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책임으로 알고 수사 낙건(洙泗洛建:수사는 공자‧맹자이고,
낙양의 정자와 건양의 주자)의 도를 세상에 밝히니,
사계 선생이 순박하고 진실한 공적을 쌓아 그 종통을 얻었다.
선생이 이어서 순수한 자질로 정도를 닦으니 그 도가 이루어졌도다.
총명한 재변은 세상이 능하다 하였네. 기록할 일 없다 마라.
인을 드러내지 않았도다.
이름답다. 선생은 오직 진실을 힘썼도다.
학문이 전일하고 행실이 돈독하며 효도하고 우애하였도다.
노년에 어버이를 모시니 양세가 도학의 종장이다.
태산은 무너졌으나 동량은 남아있네.
학이 깊은 연못에서 우니 옥백(玉帛)이 서로 달리도다.
임금 앞에 계책을 진달하니 순과 우가 주고받던 일이로다.
성상이 보위에 올라 제일 먼저 불렀도다.
정사로 묻고 학문도 물으니 어진 지혜를 아뢰었네.
사람들이 선생이라 하니 참으로 의롭고 어진 분이로다.
장차 왕실을 도와 이 나라 사람을 변화시키려 하였는데
일이 크게 그릇되었다.
향리에 돌아오니 내 마음 누누(가늘고 긴 모양) 하도다.
깊은 못에 임하고 엷은 어름을 밟는 듯
알뜰하고 조심하여 늙어도 쉬지 않았네.
청렴하여 물건을 탐하지 않으며 화하여 법도가 있도다.
이 어찌 이동(異同)이 없으랴만 마침내 흠이 없었도다.
어찌 백년을 살아 우리 후생 일깨워 주지 않는고.
천호산 봉우리가 높이 솟았으니 억만년이 지나도
길이길이 그 영조(瑩조)는 남을 것일세.
문인 우암 송시열 찬략
김 규(槼: 28세)는 신독재가 중형이다.
현종조 경학으로 참봉에 제수되엇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자여 찰방으로 부임하였으나 사직하고 향리로 왔다.
숙종의 특명으로 첨지 중추부사를 제수했으나 바로 물러나왔다
황산(연산)에 살다가 중년에 논산 두개로 복거하여 청복을 누렸다
.
.28세 이조참판 휘 반(양간공파‧의정공파)
1580(선조14)-1640(인조18) 조선중기 문신. 자는 사일. 호는 허주.
아버지는 문원공 장생,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창녕 조씨.
1605(선조39)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2등 9인으로 합격하고
1623(인조2) 인조반정후 이조의 추천으로 빙고 별제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다.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상감을 모시고 공주로 피난하여
공주에서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바로 성균관 전적을 제수 받고
형조 좌랑을 거쳐 예조로 옮겨 사관으로 기사관을 겸하였다.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부교리에 승진되었다.
1625년 헌납‧직강을 거쳐 교리가 되었는데 그때 대사헌이
혼조의 척신사객이므로 탄핵하다가 면직되었다. 다시 헌납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그 뒤 교리, 이조 좌랑, 정랑이 되었다.
사간원 집의 외 4종류의 벼슬을 거처 세자시강원 보덕과
홍문관 전한이 되었다.
인조 11년 장악원정과 도감을 겸하였다. 통정대부로 승진되어 대사관,
동부좌우승지를 거쳐 형조 참판이 되었다.
인조 14년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치 않았다가 다시
대사간으로 부임할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모시고 화친을 반대하였다.
가선대부로 승진되었다.
예조 병조참판 대사성, 부제학 대사성을 거쳐 한성우윤,
이조참판, 동지성균관사가 되었다.
이때 아우 고가 남의 무고로 의금부에 토옥 되었는데 궐문 밖에서 대죄하니,
임금이 무고함을 알고 석방해 주었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궁중에서 오락이 심함으로
「인군이 정무를 마친 후에는 반드시 경사에 유념하여 흥망의 자취를
근본으로 치정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평소에 화기가 가득하나 일의 시비에 있어서는 의연히 분발하여
외세에 흔들리지 않고 바른 말로 간사한 것을 물리쳤다.
정사(靖社) 영사(寧社)의 원종훈에 책록되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에 추증.
이조참판 증 영의정 반 신도비명
공의 휘는 반이요, 자는 사일이니 사계 선생의 제자다.
공은 선조 경진년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영리하여 황강공(계휘; 조부)이 어루 만지며
“이 아이가 반드시 우리 집을 일으킬 것이다” 라고 하더니
점점 자람에 탁연히 조성하여 신독재 집(형)과 함께 쌍벽을 이루었다.
갑자년 이괄의 반란에 상감이 공주로 파천 할 때에 공이
어가를 따라 공주에 있으면서, 정시 3인으로 뽑혔고
옥당에 들어가 여러 요직을 거쳐 병조참판 대사관이 되었다.
동부승지에서 형조로 옮겨 병자호란 때 적병이 갑자기 몰려와
상감이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성이 위급할 때 공이 임금께 아뢰어
수레를 타고 성에 올라 친히 독전하며 삼벽제장과 힘껏 싸웠다.
공의 아들 익희가 독전어사로 남성을 지키는데 공이 가로되「
“우리는 직책에 죽어야 할 것인데
다만 명백하게 의(義)를 얻기 위하여 이 마음을 밝혀야 한다.” 고
하였다. 한편에서는 임금에게 적의 진영에 가서 화친을 청하라고 권하나,
정온이 홀로 반대하여 죽기를 맹세하고 공의 의견과 같이 시종 변치 않았으나
화친은 이루어졌다.
한가로운 시간에 강론할 때 시전 운한장(雲漢章)을 인용하여
깨우침이 간절하니 상감이 감동하여 다 가납하고, 대사헌에 옮겼다.
경진(1640)년 4월에 돌아가시다.
명하노니,
선조가 나라를 다스릴 때 군현이 천양하였으니 우계 율곡의 도학이요,
황강의 문장이로다.
연원히 흘러내려 사계(사계선생)를 보았고, 형제가(반과집) 가풍을 이었도다.
세상에 나가면 쓰여 견줄만한 사람이 없었다.
가난한 때를(병자호란) 만나 행한 도가 더욱 굳었도다.
난리에 임금을 모실 적에 대의가 일월같이 빛났고,
간사함을 우정에 빛인 듯 밝아 음사가 스스로 나타나네.
임금의 은정이 두터웠고 선비의 중망이 모였도다.
사헌부의 수반이요, 이조의 차석이다.
중도에 밝은 자취 천리에 빠른 걸음이었도다.
저 오래된 수풀 속의 융성한 무덤인데,
선인의 도움으로 현당(무덤)이 편안하네.
돌을 깎아 새김에 조금도 꾸밈없다.
내후천년(來後千年)에 군자는 반드시 공경하리.
청음 김상헌 찬
광산김씨약사, 광산김씨사.
2023년, 6월,편집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