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재
장모님 49재를 생전에 다니시던 절에서 지냈다. 대웅전 밖은 한파의 눈보라 날리고 있었다. 추운 법당에서 3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손발이 얼어 저렸다.
절에서의 49재는 처음 참가해봤다. 퍽 인상적이었다. 스님들의 염불은 물론, 태평소, 북, 징, 바라. 구성진 독경 소리와 굿거리의 리듬감과 창 소리들, 바라춤과 연꽃춤, 유교식 제례와 병행되는 모습, 그리고 아미타불, 지장보살, 시왕들, 팔부신장의 불상과 탱화들. 평소 같으면 탱화로만 보며 지나쳤을 것을 구성진 독경가락과 듣자니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마음과 더불어 감동과 전율이 일었다. 불교의식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새삼 실감했다. 죽은 사람을 천도하는 의례지만, 의례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체험하며 산 사람들은 마음을 정리하고, 올바른 삶을 살도록 격려하는 느낌이 들었다.
진도의 씻김굿과 디시래기는 물론 바리데기, 강림도령, 차사 등 무속신화와 죽음의 의례도 그렇다. 종교와 예술의 결정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은 자들의 구원자인 지장보살의 간절한 마음이 새삼 다가왔다.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신장들도 피가 도는 친구들처럼 느껴졌다. 저승의 심판관들인 시왕들은 바른 삶을 이끄는 도덕의 수호자들로 생각되었다. 이승과 저승을 아우르며 이토록 거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로 인생과 우주를 바라보게 하다니, 아름다움을 느꼈다.
공자는 괴력난신의 세계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살아가는 자의 의례를 중시했다. 하지만 그의 현세적 인간중심주의는 스토리와 서사의 힘을 너무 무시했던 것이 아닐까? 무속과 불교가 습합된 죽음의례를 다시 보게 되었다.
너무 추운 날이라 집에 돌아와서는 바로 한숨 잤다. 그리고 일어나 불교의 신들과 신화세계를 다시 공부해보고 싶어 책을 주문했다.
한편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서 내 나름의 천도의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