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과 남의 일
염혜순
“아휴, 저걸 어쩌지?”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보이스 피싱으로 큰돈을 잃었다는 지인의 전화를 받았다. 평소 그런 말도 안 되는 사기에 절대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았던 옛 동료가 한 순간에 퇴직금을 날렸다. 앞이 깜깜해진 그녀는 쓰러져 누웠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견딜 수 없는 자괴감에 시달리는 그녀 생각에 나 또한 시달렸다.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어리석음이 그렇게 치명적이지 않아서 그저 똑똑한가보다 생각하며 사는 것 같은데 나도 다를 게 없다. 그런 마음이 드니 그녀가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일을 절대로 당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녀인들 자신에게 그런 일이 생길 것을 예측한 적이 있겠는가.
며칠 속이 볶여서 일손을 잡지 못하는 나를 보고 가족들이 던지는 말은 남의 일에 너무 속 끓이지 말라는 것이다. ‘남의 일’이라. 그렇지, 내 돈이 날라 간 것도 아닌데, 분명 내 일은 아닌데. 그래도 내가 너무 잘 알고 아끼는 사람이 당한 일이 어떻게 단순히 남의 일로 만 끝난단 말인가.
도대체 ‘남의 일’과 ‘나의 일’ 사이의 경계는 어디인가? 살다보면 바라보기만 해도 되는 ‘남의 일’과 나를 휩싸고 돌아가 바라만 볼 수 없는 ‘나의 일’ 사이를 수없이 지나간다. 어쩌면 내게 닥쳐오는 나의 일을 감당하느라 남의 일은 무덤덤하게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무 일도 없는 날은 거의 없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라도 쳇바퀴처럼 돌아가며 습관적으로 해야 하는 일도 있고 예기치 못한 일로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나는 대단하지도 않은 나의 일에 갇혀 거의 주변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살아온 것 같다. 그 대단하지도 않아 보이는 일상이 쌓여서 내 어제가 되었으며 사소한 볼일에 나는 내 모든 힘을 쏟아 오늘을 쌓아간다. 사소한 일도 꼭 해야 하는 일이면 큰 일이 되고 그 사소한 큰일이 바로 ‘나의 일’이기 때문에. 세상엔 ‘남의 일’과 ‘나의 일’ 그 두 가지만 있는 듯하다.
참 이상하다. 같은 일도 남이 겪을 때와 내가 겪을 때 그 무게가 그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은. 남의 일일 때는 참 쉬워 보이고 별일 아니게 비치는 일도 막상 나의 일이 되고 보면 결코 만만한 것이 없다. 그때마다 나는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 하며 그 무게에 눌려 일어나려 애쓰는 나를 스스로 일으키려 했다. 정말 세상엔 쉬운 일이란 없다. 뭘 그리 어렵게 생각 하냐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쉽게 가라고 충고를 해도 막상 나의 일은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다.
몇 년 전 삼십대 초반이던 딸애가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처음엔 암 중에 가장 착한 암이니 쉽게 지나갈 거라고 서로 위로했다. 그러나 양쪽 갑상선을 모두 떼어내고 방사능 치료라는 격리의 시간을 두 번이나 겪고도 평생 약을 먹으며 살아야 한다는 결과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 나에게 주변에선 어떻게든 위로를 전하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 위로가 되는 말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아무 말 없이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몇몇 지인의 진심어린 눈빛과 말없는 기도가 가장 마음에 남았다. ‘남의 일’이 그저 지나가는 일이 아닌 ‘나의 일’이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아픔이 또는 기쁨이 내게 들어와 같이 그 일에 빠져 버리는 순간이 아닌가 싶다. 같이 느껴주는 그 진심만이 위로로 남는다.
그녀가 병실에서 내게 전화를 했다. 내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는 그냥 엉엉 울기만 했다. 나는 어떻게 할지 몰라 머리가 하얘지다가 그냥 따라 울어버렸다. 전화기를 사이에 두고 한참을 울고 나니 그녀가 먼저 ‘나 정말 바보 같지?’ 하며 웃는다. 그제 서야 나도 따라 웃으며 밥은 먹었는지 물었다. 밥을 먹어야겠다고 힘없이 말하던 그녀도 가족들을 생각하며 차츰 몸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참 다행이다.
내가 아무리 그녀의 일을 나의 일로 여기며 가슴 아파 한다 해도 나는 타인이다. 나와 타인 사이에는 대신할 수 없는 경계가 있다. 결국 ‘남의 일’로 남아 지켜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저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며 꼭 필요할 때 손잡아주는 그 진심만으로 기도하기로 했다. 섣부른 위로가 오히려 상처가 되거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헛된 기대를 주지 않도록 나를 단속하면서.
첫댓글 '거미와 나' 그리고 '나의 일과 남의 일'을 읽으며 수필의 참 맛을 느낍니다. 쉽지않은 주제를 참 편안하게 풀어내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