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四十 章 개방내부의 첩자
제갈금은 급히 변명했다.
『하형, 내 그런 의도가 아니니 절대로 오해는 하지 마시오.』
하서인이 꾸짖었다.
『당신은 더 말할 것 없소.』
제갈금은 다급해졌다.
『하형, 당신도 알다시피 내게는 처자식이 있소. 게다가 아이는 이제 젖먹이라오.』
하서인은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아혈을 짚었다.
『제갈형, 내 아까도 말했지만 당신은 죽지 않을 것이오. 기껏해야 며칠 동안 고생을 할 뿐이니 마음을 놓으시오.』
그는 그 말을 한 뒤 몸을 돌리고 지하실에서 나가 나무판대기를 닫았다. 제갈금은 끝없는 암흑 속에 던져져 있었다. 그는 뻣뻣하게 누워서 자기가 겪은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정말 후회막급이었다.
'만약 내가 당시 일시적인 충동으로 아이를 잡아 큰 공을 세우려고 서두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지금과 같은 처지에 떨어져서 목숨을 잃을 걱정까지 하겠는가?'
어떤 사람이라도 잘못을 저지른 후에야 후회해 마지않으며 자기의 잘못된 계산을 한탄하며 울상을 짓기 마련이었다. 제갈금도 바로 이와같이 끊임없이 후회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그는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상처를 건드리게 되어 그만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깨어났다. 그제서야 그는 자기의 아혈이 이미 풀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눈을 떠보니 몸집이 큼직한 중년의 거지 한 사람이 눈앞에 서 있었고 석실에는 어느 결에 희미한 기름등이 켜져 있었다.
그 중년의 거지는 냉랭히 그를 내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밥을 가져왔으니 먹도록 하시오!』
제갈금은 물었다.
『지금 시각이 몇 점이나 되었소?』
그 중년 거지는 대답했다.
『날이 어두워진 지 오래 되었소.』
제갈금은 한 가지 사실을 머리에 떠올리고 물었다.
『당신네들의 두 분 장로는 돌아오셨소?』
중년의 거지는 조용하게 되물었다.
『당신은 왜 그것을 묻소?』
제갈금은 염려스럽다는 태도로 말했다.
『나는 그들이 걱정되어서 묻는거요. 말을 들으니 그분들은 몸에 중상을 입었다고 하던데……』
그 중년의 거지는 안색이 일변해서 다짜고짜 발을 뻗어 그를 걷어찼다. 그 발길질은 정확하게 그의 오른쪽 옆구리를 걷어찼고 제갈금의 갈비뼈 한 대가 부러져 나갔다. 제갈금은 악! 하고 크게 부르짖었다.
『당신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요?』
그 거지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으르릉 거렸다.
『또 다시 소리 지르면 내 너의 늑골마저 분질러 놓고 말리라.』
제갈금은 매섭게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당신과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당신은 어째서 나를 이렇게 못살게 구는거요?』
그 중년 거지는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흥! 만약에 너희들과 같은 나쁜 놈의 자식들이 없었다면 두 분 장로께서 어찌 그토록 심한 중상을 입었겠느냐?』
제갈금은 이빨을 깨물고 고통을 참으며 물었다.
『그들은…… 그들 두 분 장로는 그래 무사하시오?』
그 거지는 매섭게 말했다.
『만약 그분들이 돌아가신다면 나는 즉시 너를 때려죽여버리고 말 것이다.』
제갈금은 그제서야 천지이로가 이미 구원을 받아 되돌아온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고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더 말했다가 그 거지가 다시 그에게 발길질이라도 해오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때 다른 거지가 위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허득승(許得勝), 자네는 거기서 뭣 하는가? 빨리 올라오지 않고.』
허득승은 대답했다.
『곧 올라가네.』
그는 제갈금을 한번 노려보더니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다시 나무판대기를 덮었다. 제갈금은 벽을 짚고 앉아서 이를 갈았다.
『내가 죽지만 않는다면 이 아픔을 반드시 되돌려 줄 것이다. 허득승, 너는 나를 잘 기억해둬야 할 것이다.』
그는 중얼중얼 욕지거리를 하면서 식합을 열었다. 열고 보니 그 안에는 한 그릇의 쌀밥과 한 움큼의 채소 반찬이 들어 있었다. 그는 줄곧 잘 먹으며 살아온 편이어서 이같은 채소 반찬을 보고 식욕이 당길 리가 없었다. 그는 한번 바라보았을 뿐 다시 누워버리고 말았다. 한잠 푹 잤기 때문에 잠은 오지 않았다. 그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모서리의 거미줄을 세어보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다가 진기를 끌어올리고 운기행공을 해보려고 작정했다. 그는 천천히 진기를 끌어올려 보았다. 그러자 오른쪽 옆구리에 잇따라 격렬한 고통이 찾아들어서 근본적으로 운기행공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고 운기행공을 포기하려 했을 때 위에서 갑자기 두 마디의 짧은 신음소리가 나고 곧이어 두 사람이 땅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퍽이나 의아하게 생각하고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나무판대기가 젖혀지면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 그 사람의 움직임은 매우 빨랐다. 제갈금은 겨우 눈을 한번 깜박였을 뿐인데 그 사람은 어느덧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제갈금은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체구가 매우 우람했으며 몸에 황갈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위에는 모자를 쓰고 있었고 얼굴을 한 조각의 검은 베로 가리고 있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 사람은 형형한 안광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제갈금, 노부가 너를 구하러 왔다.』
제갈금은 그의 음성을 듣자 하마터면 펄쩍 뛰어 일어날 뻔했다.
『당신은 바로……』
복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한 음성으로 재빨리 속삭였다.
『그렇다. 나는 바로 개방의 철표이니라.』
제갈금은 속으로 놀람과 의혹을 크게 느끼게 되어서 말을 더듬거렸다.
『당신은 나를 죽이겠다고 으르딱딱거리지 않았소? 그런데 어째서……』
철표는 그 말을 다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너는 무엇 때문이냐고 귀찮게 물을 필요가 없다. 이것만 보면 자연 알게 되지.』
그는 옷자락을 들췄다. 그러자 그 안쪽에 걸치고 있는 것은 이리기우고 저리 기운 헌옷이었다. 그는 그 헌옷 아래쪽에서 한 조각의 목패(木牌)를 꺼냈다. 제갈금은 그 목패에 화인(火印)이 찍혀있고 화인 가운데에 금빛의 귀신머리(鬼頭)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이 바로 무정산에서 신분을 표시하는 귀면부(鬼面符)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귀면부의 금빛 귀신머리는 바로 철표의 신분이 매우 높아서 적어도 당주 이상 급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제갈금은 개방의 장법이라는 신분을 지닌 사람이 놀랍게도 무정산의 당주급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게 대체 어찌된……』
철표는 목패를 다시 집어넣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노부의 무정산에서의 공식 지위는 호법이다. 그러나 기실에 있어서는 객경(客卿)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내가 너를 구하고 구하지 않는 것은 완전히 나의 뜻에 달려 있다.』
제갈금은 그가 어째서 또 그같은 말을 하는지 몰라 어리벙벙해졌다.
『철호법, 어르신께서는 지위가 무엇이든 간에 소인을 좀 구해주십시오.』
철표는 넌즈시 말했다.
『노부가 너를 구하는데는 반드시 타합해야 할 조건이 있다.』
제갈금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무슨 조건이오? 어르신께서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제자가 행할 수 있는 일이라면 힘을 다하겠소이다.』
철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너는 너 자신의 목숨이 삼천 냥 은자만큼의 값어치가 나간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느냐?』
제갈금은 그가 이같은 말을 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다시 어리둥절해졌다.
『물론…… 사람의 목숨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지요.』
철표는 말했다.
『으음, 그렇게 알고 있다면 되었다. 그럼 노부가 너를 구해줄 것이니 너는 더도 말고 삼천 냥의 은자를 내놓도록 해라. 우리는 정찰로 거래하는 주의이니 이것은 깎을 수 없는 금액이다.』
제갈금은 침을 삼켰다.
『하지만……』
철표는 냉소했다.
『흐흠, 하지만 뭐냐? 싫다는 것이냐?』
제갈금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올시다. 제자는 조금 놀래서 그랬지요. 그리고 제자는 현재 그토록 많은 돈을 준비해 놓지 못했답니다.』
철표는 말했다.
『네놈은 아마도 노부가 네놈에게 은자를 요구한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게 될까봐 내가 두려워하는 줄 아는 것 같은데 천만의 말씀이다. 노산주 역시 나의 이러한 습관을 잘 알고 인정하고 있다.』
제갈금이 여전히 잘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세상에는 명예나 지위를 탐하는 사람, 어여쁜 계집을 주어야 움직이는 사람…… 이렇게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다. 그중에는 노부는 오직 은자를 모으는 재미로 살고 은자만이 노부를 움직일 수 있다. 노부가 무정산의 객경이 되어 산주를 위해 일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거래관계이니 한가지 일을 할 때마다 나는 그 일의 값어치를 따져 노산주에게서 듬뿍듬뿍 은자를 받는다. 은자가 오고가지 않을 경우 노부 또한 태산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너는 노부의 솔직하고 담백한 철학이 포함하고 있는 깊은 뜻을 알겠느냐?』
제갈금은 귀신에 홀린 듯한 상판대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철호법, 저를 구해주시기만 한다면 제자는 반드시 삼천 냥의 은자를 구해서 어르신께 드리도록 하지요.』
철표는 무거운 어조로 다짐했다.
『내 너를 위해 경고하는데 행여 내 돈 삼천 냥을 떼먹을 생각일랑 말아라. 나는 내가 받을 은자라면 지옥까지 쫓아가서라도 받아내는 사람이니까 괜한 생각일랑 먹지 않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니라.』
제갈금은 황급히 변명했다.
『어르신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제자의 목숨을 어르신께서 구해주신다면 삼천 냥 은자쯤이야 뭐가 대수롭겠습니까?』
이때 그는 속으로 철표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어쩌면 철표가 우연히 귀면부 목패를 손에 넣게 되었고 그걸로 자기를 속여서 모든 정보를 털어놓도록 하려는 술수가 아닌가 하고 지레짐작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찌됐든 간에 이 자가 나를 데리고 분타로 돌아가게 된다면 총순사께서 그곳에 계시니 쉽사리 도망치지는 못할 것이다.'
철표는 한참 생각해 보더니 물었다.
『노산주께서 지금 분타에 와 계신가?』
제갈금은 속으로 생각했다.
'과연 내 짐작이 틀림이 없구나. 이 자가 마각을 드러내는구나.'
이같은 생각을 머릿속에 굴리면서 얼굴에는 공경하는 빛을 띄우고 그는 대답했다.
『호법께 말씀드리지요. 노산주께서는 분타로 오시지 않았소이다. 다만 성총순사께서는 오늘 이른 아침에 분타에 도착하셨지요.』
철표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알고보니 그 역시 산을 내려왔군. 그 양반이 이곳에 와있다면 일은 더욱더 처리하기 쉽지.』
그는 허리를 구부리고 제갈금을 등에 업었다.
『상처는 괜찮으냐?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절대 소리를 지르면 안된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제갈금은 고분고분 대답했다.
『제자 알고 있습니다.』
철표는 그를 업고 지하실을 나가서 발로 나무판대기를 닫았다. 제갈금은 이때 석실에 세 명의 거지가 이리 저리 쓰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두 눈을 꼭 감고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철표가 번개와 같이 이 석실로 달려들어 왔고 그들이 전혀 반항할 틈도 없이 혈도를 짚힌 것이 틀림이 없어 보였다. 제갈금의 시선이 쓰러져 있는 그 허득승이라 불리는 중년 거지에게로 머물렀다. 그는 불현듯 조금전 허득승에 당한 모욕을 떠올리고 대뜸 한가닥 노기가 마음속으로부터 끓어오르게 되었다.
『호법어르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무슨 일인가?』
제갈금은 분노에 차서 말했다.
『만약에 저 허득승이라는 거지 녀석을 죽여주신다면 제자는 어른신께 오백 냥의 은자를 더 보태드리겠소이다.』
철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흥! 너는 잘못 알고 있다. 노부는 직업적인 살수(殺手)가 아니기 때문에 은자를 위해서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제갈금은 말했다.
『철호법, 어른신께서는 은자를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하신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니 제자를 대신해서 저 자를 죽여주신다면 제자는 어르신께 사천 냥의 은자를 드리겠습니다.』
철표는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축하한다. 쓸데없는 소리를 두 번씩이나 반복함으로써 너의 몸값은 일천 냥이 오르게 되었다. 이제 너는 은자 사천 냥 값어치가 나가는 몸이 된 것이다.』
제갈금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철표는 아예 그를 땅바닥에 내려놓더니 차갑게 말했다.
『너는 쓰잘데 없는 소리를 더욱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해라. 노부가 받아낼 은자 또한 천천히 올리겠다.』
제갈금은 의아해서 물었다.
『어째서…… 어째서 제자의 몸값이 자꾸 올라가게 됩니까?』
철표는 자상하게 설명했다.
『네놈이 한 마디씩 쓸데없는 말을 더 할 때마다 우리들은 그만큼 지체하게 되고, 그만큼 지체하게 되면 또 그만큼 더 위험이 따르게 되니 노부는 물론 그 위험에 해당하는 만큼 은자를 올려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철호법, 그렇다면 어서 갑시다.』
철표는 냉랭히 그를 한번 바라보았다.
『제갈금, 똑똑히 기억해 두어라. 이제 나는 사천 냥의 은자를 받아야 한다.』
제갈금은 자기가 한 마디 더 함으로서 그가 또 은자를 올리게 될까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철표는 그를 업고서 석실을 나서게 되었고 몸을 날리더니 높은 담장을 넘어 순식간에 십여 장이나 달려갔다. 때는 이미 어두운 밤이었다. 낮에도 조용하던 작은 거리에는 한 사람의 행인도 보기가 어려웠다.
철표는 발걸음을 약간 늦추고 물었다.
『제갈금, 너는 너의 쌀가게로 가겠느냐, 아니면 노최기약행으로 가겠느냐?』
제갈금은 대답했다.
『총순사가 분타에 계시니 역시 분타로 가시지요.』
철표는 응낙하고 몸을 날려서 지붕위로 올라갔다. 그는 한줄 한줄의 연이어진 지붕을 타고 급히 달려갔다.
제갈금은 철표의 등에 엎드려 있으니 귓가로 휙휙 공기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시선이 미치는 곳에 지붕이 눈 아래서 스칠 듯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때서야 그는 철표의 무공에 탄복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고 속으로 약간 초조하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철표의 신분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성총순사를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철표와 비교해서 어느 쪽이 무공이 더 높은지 알지를 못했다.
그가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있을 때 철표가 급히 달리던 몸을 우뚝 세웠다. 철표는 지붕위에 서서 거리 맞은편의 노최기약행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갈금, 너희 분타에 누가 죽었느냐?』
제갈금은 대답했다.
『우리 큰형이 어제 죽었소이다.』
철표는 뜻밖이라는 듯 그 말을 받았다.
『아! 그는 병이 들어 죽은 것이냐?』
제갈금이 대답했다.
『둘째 형의 말을 들으니까 큰형은 본 산의 규칙을 어긴 끝에 자살해서 죽었다고 했소이다.』
철표는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흥! 너희들은 이제 천서사호가 되었구나. 그 별호가 다시 천서삼호가 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유의하도록 해라.』
제갈금은 한 모금의 침을 삼켰다.
『사천 냥의 은자는 제가 우리 둘째 형을 만나게 되면 부탁드려서 즉시 어르신께 넘겨드리게 될 것입니다.』
철표는 물었다.
『너희 둘째 형은 어디에 있느냐?』
제갈금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는 지금 아마 내청에 있을 겁니다.』
철표는 몸을 날려서 그 길다란 거리를 가로지르게 되었는데 두 번 몸을 날리더니 어느덧 지붕을 가로질러서 화원 옆에 이르게 되었다.
그가 막 아래로 뛰어내리려 했을 때 한 사람의 그림자가 마치 유령처럼 지붕위로 뛰어오르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그 사람은 체중이 없는 바람처럼 몸짓이 빨랐고 발끝이 처마 끝을 가볍게 딛는 순간, 어떤 공격자세를 취하는 것도 아닌데 한가닥의 강대한 기세가 어느덧 철표의 전신을 뒤덮어오는 것이었다.
철표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똑똑히 보기도 전에 그와같은 기세에 밀려 일장 밖으로 급히 물러나야 했다. 그의 발이 뒤로 미끌어지다가 막 제대로 지붕을 밟고 서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다시 그림자처럼 스르르 다가왔다. 철표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두 팔을 떨치며 몸을 허공으로 솟구쳐 올리고 비스듬히 화원 안쪽으로 뛰어내렸다.
그의 반응은 매우 빠른 편이었으며 그와같이 번쩍 몸을 날리는 기세는 마치 번갯불과 같았다. 그러나 그가 막 땅바닥에 발을 딛게 되었을 때 어느덧 그 사람이 자기 앞 얼마 되지 않는 곳에 가만히 서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이때에야 철표는 집안에서 비춰 나오는 희미한 등불빛 아래 그 사람의 얼굴모습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는 선기를 이미 제압당한 상태였다. 만약에 그 사람이 손을 들어 공격해오게 된다면 아마도 상처를 입기 전에는 입을 열고 말할 기회도 가질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황급히 소리쳤다.
『총순사! 나요, 납니다.』
그 사람은 과연 적군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으며 성총순사의 신분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철표의 말을 듣고 가만히 물었다.
『나라는 사람이 누구요?』
철표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소제는 개방의 철표올시다.』
그리고 그는 복면을 한 검은 베조각을 벗었다.
적군은 그를 한번 바라보더니 조용히 물었다.
『부패(符牌)는?』
철표는 허리춤을 뒤져 귀면부를 꺼내 쳐들어 보였다. 남삼객 적군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천천히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노제, 어째서 이제야 오는 것이오?』
철표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소제는 오는 길에 사천 냥의 은자를 벌기 위해 조금 늦었소이다.』
적군은 그의 등에 업혀있는 제갈금을 힐끗 바라보더니 물었다.
『그 사람은 누구요? 그가 은자 사천 냥의 값이 나간단 말이오?』
철표는 제갈금의 사람값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의 지위나 쓰임새로 따지게 된다면 어쩌면 그만한 값어치가 안 나갈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는 성업 중인 쌀가게의 주인이니까 저는 그만한 값을 마땅히 받아야 하고, 또 그 자신도 기꺼이 내놓겠다고 약조를 했소이다.』
그는 제갈금을 땅에 내려놓고 물었다.
『제갈금, 어떠냐? 내 말이 맞느냐?』
제갈금은 그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그로서는 철표가 은자를 받아내려고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가장 그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일은 성총순사가 철표의 그와같은 요구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제갈금으로서는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어리둥절해졌다가 잠시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네. 이 제자가 우리 둘째형을 만나면 그에게 부탁해서 은자를 내놓겠소이다.』
적군이 물었다.
『자네가 제갈금인가?』
그리고 그는 무덤덤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유의가 이미 사람을 보내 자네를 찾은지 오래되었는데 자네는 어디로 갔었는가?』
제갈금은 포권을 했다.
『제자가 성총순사께 인사를 올립니다. 제자가 허리를 구부리지 못하오니 실례된 행동을 양해해 주십시오.』
적군은 그의 아래위를 한번 훑어보았다.
『자네의 모양을 보니 부상을 입은 것 같은데 혹시 개방의 제자에게 상처를 입은 것인가?』
철표가 옆에서 코웃음치며 입을 열었다.
『흥! 그는 강호에서 설치고 다니면서 싸움께나 해본 인물이라면서 한 어린아이에게 이 모양으로 상처를 입게 되었지 뭡니까? 만약에 사천 냥의 은자가 생기는 문제가 아니었다면 이같은 쓸모없는 물건에 대해서 나는 아는 척도 하지 않았을 것이랍니다.』
적군은 눈빛을 빛내며 한 걸음 다가섰다.
『노제가 말하는 그 어린아이가 혹시 전모백이 아니오?』
철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뭐라고 미처 말을 하기 전에 한 차례 어지러운 발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통로 쪽에서 칠팔 명의 사내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앞장선 사람은 손에 한 자루의 거치도(鋸齒刀)를 들고 있었는데 바로 파산호 팽택호였다.
그는 화원에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크게 한번 소리치더니 몸을 날려 빨간 칠을 한 난간을 뛰어넘어서 화원 안으로 뛰어들었다.
적군은 흉흉하게 달려드는 그를 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팽택호, 자네는 지금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팽택호는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잡고 포권을 했다.
『제자는 사람들을 데리고 당직순찰을 돌고 있습니다.』
적군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자네와 같이 당직을 섰다가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집을 떠 옮겨 가더라도 모를 형편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팽택호는 얼굴을 붉히며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허리를 굽혔다.
『제자가 소홀했으니 아무쪼록 총순사께서 용서해 주십시오.』
거기까지 이야기하다가 그제서야 그는 제갈금이 땅바닥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네째형, 어찌된 일이오?』
적군은 무거운 어조로 일렀다.
『팽택호, 분타주는 어디 있는가?』
팽택호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둘째형은 방안에 있습니다.』
『자네는 제갈금을 데리고 가서 빨리 상처를 치료해 주도록 하게. 그리고 분타주에게 사천 냥의 은자를 가져오라고 하게.』
팽택호는 물었다.
『총순사께서 지금 쓰실 건가요?』
적군은 그 말을 가로챘다.
『노부가 은자를 달래서 지금 어디에 쓰겠는가? 그것은 제갈금이 철호법에게 목숨을 구해준 값으로 주기로 약속한 돈이라네.』
팽택호는 놀란 표정으로 철표를 한번 바라보더니 의아하여 물었다.
『철호법이라구요?』
적군은 싸늘하게 코웃음쳤다.
『흥, 자네는 노부의 말을 듣지 못했는가?』
팽택호는 감히 더 물어보지 못하고 제갈금을 업더니 총총히 부하들을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화원 안은 다시 정적에 뒤덮히게 되었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옴에 따라 매화향기가 그윽하게 풍겼다.
적군은 나직이 기침을 했다.
『노제, 내 방안에는 여자가 있어서 들어오라고 청하지 못하겠구려. 매화향기가 좋으니 우리들은 이곳에서 이야기 합시다!』
철표는 싱긋 웃었다.
『총순사께서 풍류를 좋아하셔서 곳곳에 정을 남기는 습관을 바꾸지 않았구려. 축하하오이다.』
적군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대가 은자를 밝히듯이 여자는 나의 기호인데 무슨 축하할 일이란 말이오?』
철표는 헛웃음을 지어보였다.
『총순사께서는 그 연치에 아직도 여인을 탐하시니 보도(寶刀)가 늙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니 어찌 경축할 일이 아니겠소이까?』
적군도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피차 일반이지. 그대가 은자를 목숨처럼 아끼는 습관도 여전하니 나 역시 축하해야겠소.』
이번에는 철표가 반문했다.
『소제에게 또 무슨 축하할 일이 있다는 말씀이오?』
적군은 넌즈시 말했다.
『그대의 돈은 갈수록 새끼를 쳐서 많아지고 있지 않소? 머지않아 그대는 수천만 냥을 지닌 큰 부자가 될 것이 아니겠소. 이 어찌 축하할 일이 아니란 말이오?』
철표는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돈이 걸리지 않으면 움직일 생각이 나지 않으니 이것도 병이라오. 그래서 소제는 이런 고충을 산주께 말씀을 드린 적이 있소이다. 돈을 손에 넣고야 일을 처리하는 이러한 방식도 그분이 친히 허락하셨소이다.』
적군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야 당연하지. 그 일에 대해서 노산주께서 이미 나에게 책임을 지고 일을 처리하라 하셨으니 그만한 값어치가 나가는 일이기만 하다면 언제라도 은자를 지불하겠소이다. 하지만……』
그는 눈가에 한가닥의 노기를 떠올렸다가 즉시 거두며 재차 입을 열었다.
『당신은 지난번에 산으로부터 일만 냥의 은자를 가져갔을 때. 방법을 강구해서 개방의 방주가 되겠노라고 했는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소?』
철표는 되물었다.
『방주는 이미 돌아가셨소. 나의 계획이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총순사도 알고 계실 것이 아니겠소?』
적군은 말했다.
『당신은 방주를 계승할 자신이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지금까지 이어받지를 못하고 있소?』
철표는 답답하다는 듯이 설명을 했다.
『본방에서 새 방주를 추대하고 선출하는 것은 지난날의 예에 따라 반드시, 대리방주가 흩어져있는 모든 장로들을 소집하게 되고 장로대회를 거쳐야만 결정을 내릴 수가 있소이다. 이번 대회는 다음 달에 거행하게 되는데 본방에는 지금 여섯 분의 장로가 있지만 네 분의 장로가 소제를 옹립하도록 할 자신이 있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군은 불쑥 물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당신은 다음 달에 개방의 새 방주가 될 수 있다는 말이오?』
철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제에게 굳이 방주가 되겠다는 뜻은 없지만 노산주께서 반드시 개방을 장악하라 하시니 나로서는 부득이 그렇게 할 수밖에 더 있겠소? 하지만 소제는 그분과 삼년의 기한을 정해 놓고 있소이다. 내가 생각해 볼 때에도 이 삼년의 기한 내에 당신들은 틀림없이 무림을 통일하게 될 것이고 그때 가서야 개방이라는 방파도 없어지고 무정산 휘하로 흡수되고 말겠지요.』
적군은 그 말을 받았다.
『그 점은 나도 알고 있소. 지금의 진행상황으로 볼 때 아마도 삼년까지 걸리지 않고 무림을 통일할 수 있을 것 같소.』
두 사람이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있을 때 유의가 총총히 달려왔다.
적군은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유분타주, 본산의 철호법에게 인사를 드리게.』
유의는 철표에게 포권을 하고 절을 했다.
『유의가 철호법께 인사드립니다.』
철표는 주먹을 쥐어보였다.
『지나치게 예의를 차릴 것 없네.』
유의는 제갈금으로부터 철표에 대한 말을 들었기 때문에 눈에는 자기도 모르게 의혹의 빛을 드러내었다.
적군은 무거운 어조로 당부했다.
『유분타주, 철호법의 신분은 본방의 비밀 가운데 하나이니 아무쪼록 자네는 몇 명의 형제들에게 이 기밀을 누설하지 않도록 당부해 두게. 그렇지 않을 때는 본산의 규칙에 따라 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미리 경고해 두겠네.』
유의는 공경하게 읍했다.
『제자는 형제들에게 분부하겠습니다.』
적군은 물었다.
『사천 냥의 은자는 준비되었는가?』
유의는 품속에서 한 장의 은표(銀票)를 꺼내더니 두 손으로 바쳤다.
『제자는 이미 북경 통보전장(通寶錢莊)의 은표를 가져왔습니다.』
적군은 고개짓 했다.
『철호법께 드리도록 하게. 이것은 제갈금이 그에게 주기로 개인적으로 약조한 돈이니 공적인 경비에서 충당시킬 수 없는 것일세.』
유의는 공손히 그 한 장의 은표를 철표에게 바쳤고, 철표는 은표를 등불 밑에 한번 비추어 보더니 소중하게 품속에 갈무리했다.
적군은 천천히 물었다.
『유분타주, 분타의 경비는 또 얼마나 남아있는가?』
유의는 대답했다.
『총순사께 알립니다.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본 분타의 각 업소를 통틀어 이만 칠천 냥의 이득을 보았는데, 분타에 종사하는 제자들에게 일년 동안의 삯으로 지출한 육천 냥을 제외하고 이미 일만 오천 냥의 은자를 총타로 보냈으니 지금 본 분타에는 육천 냥의 은자가 남아 있습니다.』
적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육천 냥이면 아마 부족하지 않을 것일세. 유의, 자네는 돈을 준비해 놓도록 하게. 노부가 바로 그 돈을 사용해야겠네.』
유의는 속으로 약간 의혹을 느꼈으나 더 묻지 않고 허리를 구부려 보이고 물러갔다.
적군은 그가 물러가자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노제, 돈은 이미 준비가 되었네. 자네에게는 또 어떤 값이 나갈만한 소식이 있는가?』
철표의 눈이 탐욕으로 번쩍거렸다.
『육천 냥으로는 부족할 것 같소이다.』
적군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노제의 정보가 값어치만 있다면 얼마든지 지불할 수가 있지.』
철표는 혀로 입술을 한 차례 핥았다.
『좋소이다.』
그는 생각을 한번 정리하더니 입을 열었다.
『본방의 두분 주 장로가 돌아왔소이다. 그들의 상처가 중태이기는 하지만 목숨을 잃을 정도는 아니고 기껏해야 삼개월이면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소이다.』
적군은 빙그레 웃었다.
『그들이 낫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쓸모없는 물건들일테니 그 소식은 값어치가 없소.』
철표는 물었다.
『신타 을휴에 관한 일이라면 얼마나 값이 나갈 수 있겠소?』
적군이 값을 매겼다.
『그 정도면 일천 냥의 값어치는 있겠군! 노제는 말해보시오.』
철표는 흥정을 했다.
『소제는 그 소식이 이천 냥의 값어치는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적군은 미소했다.
『우선 말을 해 보시지.』
철표는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그는 본방의 두 분 주장로와 상의를 한 결과 세 가지 결정을 내리게 되었소. 첫째는 각대문파에 통지를 해서 본산에 관한 종지(宗旨)와 노산주의 진정한 모습, 그리고 본산의 야심을 알리는 것이지요.』
적군은 가만히 웃었다.
『호오! 그들이 이미 노산주가 누구인지 알았단 말이오?』
철표가 반문했다.
『그들은 노산주가 바로 검신 남삼객 적군이라고 하더구려. 총순사는 그들의 짐작이 옳다고 생각하시오?』
적군은 웃고만 있었다.
『그건 노부로서도 알 수가 없는 일이지. 나도 지금까지 그 어르신의 참모습을 뵌 적이 없다오. 노제, 두번째의 결정은 무엇이오?』
철표는 그의 눈이나 표정에서 아무것도 잃을 수가 없자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입을 열었다.
『신타 을휴는 이미 한 통의 편지를 써서 사람을 동해로 보냈지요. 동해쌍선에게 급한 일이 있으니 중원으로 와 주십사 하고 청을 드리는 편지 말입니다.』
적군은 안색을 굳혔다.
『그것은 반듯이 놓아야 할 한 수라서 이상하게 여길만한 가치가 없지. 그러나 그 두 늙은이들이 나서게 된다면 꽤나 귀찮은 노릇이 되겠소이다.』
그리고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다시 입을 열고 물었다.
『노제, 세번째 결정은 뭐요?』
철표가 말했다.
『세번째 결정은 결코 중요하다고 할 수 없는데 그것은 전옥린의 아들에 관한 일이라오.』
적군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그들은 그 아이를 어떻게 하기로 결정을 내렸소?』
철표는 한심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들은 아주 황당무계한 결정을 내렸지요. 신타 을휴는 각문 각파와 상의를 해서 모든 문파에서 그 파에 비전되는 절예를 한 가지씩 제공하도록 하고 신타 을휴의 책임아래 그 어린아이에게 그 절예를 모조리 전수하겠다는 것이니, 십년이라는 세월 동안 공을 들여서 천하무적의 무예를 지닌 정파의 고수를 한 명 훈련해 내겠다는 것이라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들로서는 그것이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는 선택이랍니다. 본산에서 대규모 공세를 발동하게 되어서 만약 각대문파에서 저항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십년 후에 전모백의 절예가 연성될 것이니 그 때 가서 그가 흩어져있는 군웅들을 영도하여 본산을 격파하겠다는 계획이지요.』
말을 마치고 철표는 웃었다.
『소제는 옆에서 들으면서도 그들의 그 결정이 매우 황당무계하다고 생각했소.』
적군은 싸늘히 코웃음쳤다.
『노제는 그래 그것이 황당무계한 결정이라고 생각하시오?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그들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인 것 같소.』
철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뭐라구요?』
적군은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노산주의 말씀에 의하면 전모백이란 아이는 백 년에 한번도 만나보기 힘든 기재라고 했소이다. 그 아이는 겨우 이틀만에 양심신공을 연성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온몸에 있는 혈도의 위치를 자연스럽게 바꿀 수 있을 정도이니, 자네도 생각해 보시오. 만약에 기인 을휴가 십년이라는 세월 동안 공을 들여 그를 훈련하게 된다면 훗날 그들의 계획대로 전모백이 나서게 되었을 때, 본산에 또 그 누가 있어서 그에게 대항할 수 있겠소?』
철표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총순사, 그 어린아이가 정말 그토록 무서운 존재라는 말씀이오?』
적군의 눈빛은 자못 심각했다.
『신타 을휴와 동해의 그 두 늙은 땡초가 나서는데 대하여 본산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소. 우리는 그들의 실력을 계산하고 있으니 자연 대비할 수 있게 되어 그들은 대세에 어떤 작용도 일으키지 못할테니까 말이오. 그러나 전모백은 그 성취를 예상할 수 없는 존재이니 본산에서 만약 그를 거두어서 우리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반드시 그를 죽여야 할 것이오!』
철표는 아연해서 두려운 듯이 적군을 바라보았다.
적군은 잘라 말했다.
『노부는 오늘밤 바로 가서 그를 사로잡아 무정산으로 데리고 가야겠소. 결코 을휴가 그를 데리고 가도록 버려둘 수는 없소.』
철표는 난처한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지요? 총순사, 이는 정말 소제를 난처하게 하는 일이 아니오?』
적군의 눈빛이 번쩍하고 빛났다.
『노제, 그렇다면 이 일을 자네가 처리하도록 맡기겠으며 보수로 일만 냥의 은자를 계산해 줄 용의가 있소.』
철표는 한참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일은 소제가 할 수가 없소. 만약에 전모백이 무단히 실종될 것 같으면 나의 이중신분이 폭로될 가능성이 매우 커지게 되오. 나로서는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는 않소이다.』
적군은 집요했다.
『그렇다면 이 일은 나에게 맡기도록 하시오. 나는 당신이 혐의를 받지 않도록 안전지책을 강구하겠소.』
철표는 난처한 듯이 말을 더듬거렸다.
『그건…… 그렇지만……』
적군은 선뜻 그 말을 가로막았다.
『나중에 내가 전모백을 사로잡아 오게 되면 내 노제에게 오천 냥의 은자를 드리면 어떻겠소?』
철표는 매우 난처한 듯 말을 하지 못했다.
적군은 힐난하는 어조로 재차 입을 열었다.
『노제, 이번 일에 있어서 그대는 손 한번 쓰지도 않고 앉아서 오천 냥의 은자를 버는데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오?』
철표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하지만 당신들은 방에서 나의 신분을 폭로하면 아니되오. 사실 내가 개방의 방주가 되는 것이 당신들에게도 유리할 것이오.』
적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도 알고 있소. 우리는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을 치는 방책을 강구하여 먼저 당신을 그 자리에서 떠나도록 하겠소. 그런 연후에……』
그는 멀리서 유의가 급히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말을 멈추더니 소리쳤다.
『유분타주! 자네는 거기서 잠깐 기다리게. 노부는 철호법과 잠깐 상의할 일이 있다네.』
유의는 이미 회랑까지 걸어왔으나 그 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그곳에 서서 적군과 철표가 나직이 말을 주고받는 광경을 보고 속으로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가 우선 호기심을 느끼는 것은 철표가 개방에서 그토록 지위가 높은데도 어째서 돈에 매수되어 무정산에 투신했는가 하는 사실이었다.
그가 이런 저런 궁금증에 사로잡혀 있을 때 적군과 철표는 어느덧 어깨를 나란히 하고 유의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적군이 물었다.
『유분타주, 은표는 이미 준비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