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소(無名簫)] 각자(各自)의 봄···(22)
그날, 황보산을 마지막 보던 날의 그 순간순간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인양 진우명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진우명이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황보산의 얼굴이 있었다.
그 얼굴은 웃고 있었고, 웃는 채로 말하고 있었다.
"이제 정신을 차렸는가? 정말 사제는 술이 약하군!!"
대답 대신 진우명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의 그 방,
황보미완과 함께 있던 방이 아니었다.
황보산과 술잔을 나누던 그 방이었다.
"작별의 술 한 잔에 이렇게 취해버릴 줄은 정말 몰랐네.
무엇인가? 자네를 이리 취하게 만든 게? 술인가? 작별인가?"
진우명의 시선이 황보산에게 꽂혔다.
"천일취(千日醉)라고 하더군요. 미완누님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완아와 둘째사제는 자네가 내보내지 않았나?"
진우명이 가만히 황보산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대사형?"
황보산이 진우명이 그랬던 것처럼 가만히 진우명을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자넨 방금 나와 마지막 술잔을 나눴네.
이 술잔 이후로는 이제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서로에게 알려주면서 말일세.
그리고 자네는 술이 약한 탓에 그만 쓰러지고 만거네
. 완아가 자네에게 천일취를 먹인 것도
그래서 자네가 쓰러진 것도 아닌 게야.
더더욱이 완아의 방에서 자네와 완아와
함께 있었던 일은 그저 술에 취해 자네가 꾼 꿈인 게지."
황보산을 묵묵히 바라보던 진우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모든 게 그저 제가 술에 취해 꾼 한바탕 꿈이었군요."
"그렇다네. 그저 자네는 이 우형과 작별의 술 한 잔을 나눈 것뿐이지.
이제 우리가 다시 만날 때는 서로를
노리는 적으로서 뿐이라는 걸 알려주는 그 작별의 술 한 잔 말일세."
진우명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황보산에게 엎드려 큰 절을 올렸다.
황보산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잠시 흘렀다. 절을 마친 진우명이 말했다.
"강보에 싸인 절 어쨌든 대사형께선 이렇게 키워 주셨습니다.
그 감사의 절입니다."
"나는 사부님의 제자고, 자넨 사부님의 아들 아닌가.
누구라도 그러했을 일이야. 별로 그렇게 큰 절을 받을 일은 아니지."
"그리고 이 절은 이제 저는 제 스스로의
길을 걷겠다는 다짐의 절이기도 하고요."
"어차피 그 다짐은 우리가 나눈 그 술 한 잔에 담겨있지 않은가?
아무튼 자네의 그 절로 인해 나도 마음이 편해졌네. 내일부터 시도하겠네.
어차피 적이 된 이상에는 자네야말로
제일 먼저 제거해야 할 대상이니까 말일세."
진우명이 휘청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조심스레 그를 지켜보던 당지연이 얼른 진우명을 부축하려하다 손을 멈췄다.
그러기엔 어려운 자리였고 진우명 역시 한 번 휘청했을 뿐
바로 원래의 냉막함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들어왔는지 당연미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걸 진우명이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당연미가 그제서야 사마전에게 보고를 시작했다.
"표면적으로 동정루에 변화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루 쪽과는 달리 기루 쪽은 미묘하게나마
변화가 감지(感知)되고 있다고 합니다.
여지껏 어떤 일에도 전혀 동요가 없었던 동정루란 점을 미루어보면…."
당연미가 고개 돌려 진우명을 한 번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고개 돌려 사마전에게 말했다.
"황보산의 죽음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무명소(無名簫)]311-각자(各自)의 봄···(23)
사마전에게 보고를 마친 후 당연미는 그제서야 당지황의 앞에 가 섰다.
다가오는 당연미를 보며 당지황이 웃고 있었다.
뾰죽 솟은 송곳니가 그의 웃음 때문에 환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럴 듯하다 우리 연미!!"
정말 오랜만에 웃어보는 웃음이라고 생각하며
당지황은 자신과 당문이 늘 자랑스레 생각하는 당연미를 쳐다봤다.
"이게 무슨 꼴이에요? 당문의 화타라고 불리던 분이…."
"진짜 화타선생도 이건 어쩔 수 없으실 거다. 일단 피해는 당문에서 시작됐지만,
천하가 흡혈귀로 덮이는 것도 시간문제일 게야. 재앙이지 재앙(災殃).
사실 황보산이나 천축 정도는 여기에 비하면 문제도 아닌 게지."
"방법은요?"
"글쎄 그게 별로 신통치가 않더란 말이야.
일단 흡혈귀에게 물렸을 때 피를 섭취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까진
알았는데…
그 대체제(代替濟)가 마땅치가 않더라구.
나는 인면오공의 피로 연명했는데 그것도 피랍시고,
인간으로서보다 흡혈귀로서의 자세가 취해지더라구.
물론 인간의 피를 섭취한 쪽보다는 훨씬 상태가 나은 편이긴 하지만
말이야."
"방법은요?"
자신을 쳐다보며 따지듯 묻는 당연미의 표정을 본 당지황이
좀 전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발견하는 즉시 없애야 해. 그것이 설혹 피를 나눈 형제자매라고 해도.
없애는 방법은 간단하지. 일단 심장을 뽑아내는 거야.
아니면 물에 빠뜨려서 호흡을 못하게 해도 심장이 멈추게 돼서 죽지.
햇빛을 싫어하지만 치명타를 받지는 않아. 기껏해야 화상을 입는 정도인데
, 햇빛 아래에 서면 대단히 불쾌한 기분이 되기 때문에
무릇 흡혈귀가 된 자들은 햇빛 아래 나서질 않아.
피가 아닌 것으로 피를 대신할 수 있는 걸 찾아낸다면,
되돌릴 수가 있을 거다.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그것이 기껏 내가 이 몸이 되고서 찾아낸 방법인 게지. 방법이라고 말하기도 창피한."
당지황이 쓰게 웃음 지으며 이번엔 신지기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기인께서는 저를 모르시겠지만…."
웃으며 신지기인이 말했다.
"십 이년 전 중추절에 옥룡장엘 오셨었지요.
그때 인사를 나눴었고요.
그때 당지황 당주께서는 오늘처럼 그렇게 말씀 하셨지요.
'기인께서는 저를 모르시겠지만….'"
당지황의 얼굴에 감동처럼 웃음이 피어났다.
"아아! 기억해 주시는군요.
그때도 기인께서는 제가 그말을 했을 때 웃으며 말을 자르셨지요.
그러면서 '어찌 당문의 당지황 당주를 모를 수 있겠습니까?
장차 당문에서 화타가 나왔다는 말씀을 들을 분이신데…
.'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제가 당문의 화타라고 불리게 된 데는
사실 그날 신지기인의 그 말씀이 있었던 덕이었지요.
오오! 저를 기억해 주셨군요."
당지연이 한 권의 책을 신지기인에게 내밀며 말했다.
"지황 숙부님께서 흡혈귀에 대해서 쓰신 책이에요.
처음엔 연미 언니에게 전해주라셨는데
역시 기인께서 보시는 게 낫겠다고 그러셨어요."
신지기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받았다.
얼룩덜룩 피가 묻어있는 책자였다.
"고맙소이다.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스스로가 그 늪에 들어가서 조사한 자료이니 이보다 소중한 자료도
없겠지요."
"역시…신지기인이십니다. 오늘 우리 연미도 보고
사마전 맹주님도 뵙고, 또 이렇게 신지기인까지 뵈었으니
살아생전 이렇게 행복한 날도 없었던 것 같소이다."
당지황이 진우명과 당지연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진공. 우리 지연이를 예쁘게 봐주시게."
다시 고개 돌려 당연미를 바라보며 당지황이 말했다.
"지금은 당문이 꼴이 말 아니게 됐지만,
이 숙부는 걱정을 하질 않아.
왜냐면 지금의 당문에는 당연미가 있으니까 말이야.
오늘 이 자리에 서기까지는 참혹한 겨울이었는데, 오늘은 봄이로군."
말과 함께 그의 손이 그의 심장을 찌르고 심장을 꺼내 들었다
. 펄떡거리는 심장을 쥔 채 뭐라고 얘기하려는 듯
보이다 당지황이 무너져 내렸다.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봄을 맞은 꽃처럼 활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