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 二 章 大 血 步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대륙을 추풍으로 흔들 때...
중원의 판도는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토록 막강하던 삼패천의 조직은 균열이 가고 있었다. 그 균열은 하부조직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확대일로를 걸었으며, 일단 한 번 금이 가기 시작한 다음에는 강한 불신(不信)과 회의(懷疑),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동요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삼패천을 떠받친 것은 바로 삼패의 정립이다. 그런데 그중 이패(二覇)가 쓰러짐으로써 사실상 삼패의 영향력은 크게 흔들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삼패천을 동요하게 한 것은 바로 일지겁천 조황백의 폐관이었다.
그는 백일간의 폐관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그 백일(百日)이 지나는 사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소문(所聞).
소문이란 아편처럼 퍼진다.
더욱이 그것이 어떤 심약한 구석을 찌르는 것 일수록 그 소문은 빠른 속도 로 감염되어 귀에서 귀로, 그리고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첫 번째 소문은 조황백에 관한 것이다.
---- 조황백은 두 아우가 죽은 후 겁이 나 숨어 버렸다. 그는 자신의 수하 들을 버리고 영원히 변방으로 달아나 버린 것이다!
두 번째 소문!
그것은 더욱 더 삼패천의 조직을 동요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 삼패천을 세운 조씨 삼형제는 반역자(叛逆者)다! 대명조정(大明朝廷) 에서 곧 삼패천을 역도로 단정, 하인을 막론하고 구족(九族)을 멸하라는 명 령을 내릴 것이다!
세 번째 소문은 가뜩이나 흔들리는 삼패천을 결정적으로 동요케 만들었다.
그것은 짧은 시간에 막강 삼패천을 뿌리째 흔들어 버린 계기가 되었다.
---- 조황백은 죽었다. 그의 시신은 옥문관에서 발견되었다!
소문... 소문... 소문...!
삼패천은 가을 바람이 차가와 질 무렵에는 이미 과거의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천하 곳곳에 퍼져 있던 삼패의 하부조직은 하나하나 분쇄되어 갔다.
그것은 이제껏 봉문하고 있던 구파일방이 봉문을 풀고 일제히 단결하여 상 호 유기적인 조직력을 펴며 공세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삼패천의 수하들이 갈 곳은 없었다.
그들은 투항을 하거나 아니면 협공을 당해 곳곳에서 쓰러져 가고.
삼패천이라는 막강한 위용을 자랑하던 과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신화의 탄생은 짧았으나 그 신화가 무너지는 시간은 더욱 짧았다.
인생무상이라고 하던가?
그토록 강호천지를 핏빛 선풍으로 몰아넣었던 삼패의 신화도 이제는 퇴색한 전설이 되어 버렸을 뿐이다.
도도히 흐르는 황하...
황하의 강상에 한 척의 배가 떠있다.
뱃전에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네 명의 미녀들이 수수로운 표정으로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성녀(四聖女).
그렇다.
바로 궁단향, 방의경, 화안봉, 단리사영 등이었다.
그녀들의 얼굴에는 근심과 우려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문득 방의경이 입을 열었다.
"향매. 어찌된 거지? 어찌하여 그분은 나오지 않는 거지?"
궁단향은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광명비전을 얻는데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릴 줄은 몰랐어요. 그분이 일단 수궁으로 들어가신 이상에는 아무도 언제 나오실지 몰라요."
화안봉이 시선을 돌리더니 저 멀리 보이는 수채를 바라보았다.
"향매. 이상한 것은 조황백도 마찬가지야. 그는 삼패천이 궤멸되어 가는데도 어찌하여 출관하지 않는 걸까?"
단리사영이 차갑게 말했다.
그녀의 배는 눈에 띄게 불러 있었다.
"설사 그가 출관한다 해도 사정은 옛날 같지 않을 걸."
그러나 궁단향의 안색은 어둡기만 했다.
"그렇지 않아요. 언니. 매번 말하지만 삼패천은 황백 한 사람을 가리키는 거에요.
비록 그동안 방언니와 여러 언니들... 그리고 구파일방의 힘을 합 해 삼패의 조직을 무너뜨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황백이 쓰러지지 않는 한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에요."
"...!"
세 여인은 그 말에 몸을 떨었다.
지난 몇 달여 간 얼마나 고심하여 삼패천을 무너뜨리는 데 공을 들였던가? 비록 영수를 잃은 삼패천이었으나 그들의 힘은 놀라운 것이었다.
만일 궁단향의 치밀한 작전과, 방의경의 하오문의 다양한 전법, 그리고 정보력이 없었다면 그들을 분쇄하기가 결코 수월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궁단향은 조금도 기뻐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오직 완전한 결말은 종리연이 출관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종리연은 광명비전을 얻기 위해 황하의 수궁으로 들어간 이후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었다.
그가 언제 나올는지, 아니, 설혹 출관한다 해도 이 짧은 시간동안 그가 광명비전을 얼마나 숙달하고 나올지는 그야말로 미지수가 아닌가?
도도히 흘러내리는 강물을 바라보는 네 여인의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다.
문득 궁단향은 수채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열흘... 열흘 후면 아마 조황백은 출관하게 될 거에요... 아아,
그때부터가 정작 더 큰 문제에요."
천하제일의 지녀 궁단향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조황백이 눈을 뜬 것은 그가 선언한 그대로 백 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눈을 떴다.
"...!"
그는 모든 것이 전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완벽한 확신이었다.
(하늘이 나 황백으로 하여금 송조를 재건할 운명을 주었다면 나 하나로서도 충분하다. 당금의 명을 주원장이 세웠듯이 나 역시 황백 하나로서 충분할 것이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낡아 부스러질 것 같은 선조의 곤룡포에 절을 하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
"...?"
황백은 너무나도 조용한 대전의 정적에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천시지청술을 전개한 결과 대전은 물론, 이 삼패천의 수채에는 지금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황백은 눈썹을 떨었다.
(그새...?)
한가닥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있었다. 그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다.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바뀌어져 있었다. 수채의 건물들은 텅 비어 있었다. 수천 명에 달하던 수하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단 한명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황백은 문득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핫핫핫핫...!"
그의 광소는 멀리멀리 퍼져 나가 오십 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바로 그때다.
"폐하..."
어디선가 귀에 익은 가냘픈 여인의 음성이 들리자 그는 부르르 떨었다.
"설화...!"
빙글 돌아섰다.
과연 설화였다.
설화는 일신에 하얀 소복을 입고 한 채의 건물에서부터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황백은 반가왔다.
그는 손을 저었다.
순간 설화는 마치 한 마리의 새인 양 그에게 끌려와 가슴에 안겼다.
막강한 허공섭물진기였다.
"어찌된 거냐?"
그는 설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설화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말했다.
"모두... 갔어요. 지금은 아무도... 없어요."
"허... 헛헛... 그러냐?"
황백은 너털웃음을 쳤다.
그는 가슴을 쭉 폈다.
그리고 도리어 홀가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잘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짐은 혼자가 더 편하다. 껄껄... 뿐만 아니라 짐 혼자만 있어도 삼패천만한 조직을 재건하는 데는 일 년도 걸리지 않 을 것이다."
"..."
"설화. 검을 다오."
설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녀는 어디론가로 가더니 황백이 항상 지니고 다녔던 거검(巨劍) 을 가지고 와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검을 잡은 황백의 두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빛이 흘러 나왔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핫핫...! 누가 짐의 길을 막을 손가?"
그는 설화가 아직 그의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너는 왜 가지 않았느냐?"
설화는 눈을 내리 깔면서 대답했다.
"설화는 폐하의 것이옵니다."
황백의 눈에서 이상한 빛이 일어났다.
"나를 따르겠느냐?"
"폐하가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핫핫핫... 좋다. 나를 따라라!"
황백은 거검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설화는 그의 뒤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서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조황백!
그는 수채의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밖으로 나갔을 때, 수천 명의 무림인들이 도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구파일방을 비롯한 무림고수들이었다.
그들은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조황백! 삼패는 무너졌다... 어서 검을 버리고 투항해라... 무림의 영령들에게 속죄하라...!"
그러나...
황백의 입가에는 비릿한 웃음이 어리고 있었다.
"날 보고 투항하라고? 으핫핫핫... 투항할 것은 너희들이니라!"
순간 그는 설화를 옆구리에 끼었다.
슈욱!
그의 팔척거신이 전광석화처럼 쏘아갔다.
아니, 대붕(大鵬)이 날듯 그는 군웅들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막아라!"
"그는 혼자요! 겁내지 말고 처치..."
그러나 세상에는 불가능한 일이 왕왕 벌어진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황백은 단 일인이었다.
그러나 그 일인의 힘은 수천의 무림고수들은 능가하고 있었다.
콰아아...!
쑤아아앙!
빛!
그것은 다만 하나의 거대한 빛의 기둥으로 보일 뿐이었다.
빛의 기둥이 수천여 무림인들 사이로 파고 들었다.
그리고 뒤이어 벌어진 것은 무림사 이래 일찍이 없었던 대참살이었다.
오오...
후인(後人)이 있어 당시의 일을 기록하라고 하면 과연 무엇이라 쓸 것인가?
아마도...
그는 붓을 꺾을 것이다.
이날, 정확히 말한다면 무력(武力) 624년... 시월 스무 엿새날... 황하 36채 밖은 시산혈해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피의 폭풍의 시작점에 불과한 일이었다.
황하 36채에서 벌어진 대참사...
세인들은 그 날의 일을 일컬어 지옥대전(地獄大戰)이라 일렀지만, 다만 그 것이 공포의 혈보(血步)의 시작일 줄은 몰랐다.
조황백은 거검을 들고 행진했다.
그가 가는 곳은 어디건 시산혈해를 이루었다.
그는 우회하지 않았다.
어디건 일직선으로 전진했다.
그가 가는 길에 걸리는 문파는 완전히 멸문되고 말았다.
단 일인!
일인의 힘이 이렇게 가공할 줄이야...
그것은 상식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겨울(冬)이 왔다.
중원대륙은 얼어붙고 있었다.
그러나 혹한의 폭풍보다도 더욱 더 대지를 얼어부게 하는 것은 바로 일지겁천 조황백의 피의 행군이었다.
그는 단 일인만으로 중원무림을 뭉개려는 듯 한시도 쉬지않고 행군을 계속 했다.
기이한 것은 그의 곁에는 항상 아름답고 가련해 보이는 소복여인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 여인을 데리고 다니며 혈풍을 일으켰다.
이제까지 그의 손에 무너진 문파의 숫자는 백 여개 파가 넘었으며, 그의 손에 죽음을 당한 무림인의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조황백은 피의 거보를 쉬지 않고 옮기고 있었다.
그가 언제까지... 대체 어디까지 그 혈행을 계속할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무림은 얼어붙었다.
네 여인.
사성(四聖)의 운명을 타고 난 네 명의 여인들은 속속 날아드는 비보(悲報) 를 보고 넋을 잃었다.
종남파(終南派) 전멸...
해남파(海南派) 전멸...
여량파(呂梁派) 전멸...
공동파(공동派) 전멸...
전멸... 전멸... 전멸... 전멸...!
끝없이 날아드는 전서는 피에 젖어 끈적거리는 듯 했다.
믿을 수 없는 한 인간의 행적 뒤에는 이처럼 혹독하고 무시무시한 결과가
이어지고 있었다.
궁단향의 머리카락은 윤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전 지력(智力)을 총동원하여 어떻게든 황백의 혈겁을 막아보고자 하였으나 대책이 없었다.
그의 가공한 무공 앞에서는 만가지 책략과 계교, 그리고 아무리 용맹무쌍한 무림인을 동원해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제 패를 던지지 않는다.
패는 언제부터인가 똑같은 글자만을 내주었기 때문이었다.
---- 대(待).
기다려야 한다는 뜻!
궁단향은 황백의 혈행이 거듭되면 될수록 그에 따라 급격히 머리가 세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방의경, 화안봉, 단리사영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녀들에게는 달리 뾰족한 수가 나지 않고 있었다.
이때 단리사영이 나섰다.
"향매.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야. 이대로 가다가는 전 무림이 그의 손에 완전히 전멸하고 말거야."
"...?"
삼인의 여인이 일제히 단리사영을 보았다.
단리사영의 배는 꽤 불러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전보다 더욱 강해져 있었다.
"나의 몸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고 하니... 일단 그에게 부딪쳐 보는 것이 어떨까?"
"그건 안 돼요."
궁단향이 반대했다.
"비록 언니의 검법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임신 중일 뿐더러... 상세가 완전히 회복되었다고는 할 수 없어요."
단리사영은 미소 지었다.
"향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건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 향매가 비록 지혜롭다 하나 지혜의 한계에 이르면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하늘의 도리 를 지키는 것이야. 우리는 언제까지나 연랑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
단리사영은 말을 마치고 방의경, 화안봉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의 동의를 얻으려는 듯, 방의경과 화안봉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사영언니의 말도 일리가 있어요."
궁단향은 탄식했다.
"아아!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제가 마지막으로 생각을 짜보겠어요."
침묵.
네 여인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