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4월 조선의용대 주력이 화북으로 떠난 뒤 김원봉은 민족혁명당 제5기 제4차 당중앙회를 열어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김두봉은 조선의용대 본부가 광복군에 편입되는 것을 반대하다가 41년 가을 중경에서 태항산으로 떠나 그 다음 해 4월에 도착하였다. 김원봉은 더 이상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장악할 수 없음을 깨닫고 조선의용대 본부를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시키고 군무부장에 취임하였다. 이로써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공산주의 진영으로 본부는 민족주의 진영으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이는 참으로 뼈아픈 결별이었다.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화북조선청년연합회는 1942년 7월에 태항산 장하 기슭에서 2차 대표대회를 열고 이름을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개칭하였다. 산하 무장부대인 의용대의 이름도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바꾸었다. 김두봉이 주석으로 중앙상임위원에 무정, 최창익, 채국번, 이유민, 김학무, 박효삼, 김창만이 뽑혔다. 박효삼이 군사부장, 무정이 일본점령지역 공작위원회 회장이 되었다.
화북조선독립동맹 북만주특별위원회는 본부를 산서성 동욕촌에 두고 산하에 진서북, 진찰기, 연안 등 약간의 분맹을 두었다. 이들은 줄기차게 일본의 점령지역과 미점령지역에 공작원을 파견하여 분맹을 세워 선전활동을 강화하며 반일통일전선을 광범위하게 구축하였다. 동북만주로 파송된 이상조는 화북조선독립동맹 북만주특별위원회를 세워 연수, 바얀 등지에서 유격구를 창건하고 항일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였으며 김창만과 문정일은 점령구인 북평, 천진, 할빈, 서울 등 일본군의 점령구에 분맹을 세웠다. 당시 만주와 산동, 산서, 화북 등지의 도시에는 독립동맹의 지하공작대가 있었다.
화북조선독립동맹은 태항산 근거지에 무정을 교장으로 하고 김학무를 교무주임으로 하는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를 세워 조직적으로 맑스-레닌주의와 군사지식을 학습시켜 많은 조선족 정치, 군사 인재를 양성하였다. 1943년에는 군사인재를 심도 있게 양육하기 위해 12월에 학교 이름을 조선혁명군정학교로 바꾸고 군사와 정치 두 과목을 설치하고 학생들의 수준에 따라 대를 편성하여 집중적으로 학습을 시켰다. 김두봉이 교장, 박일우가 부교장, 주덕해가 총무과장을 맡았다. 조선독립동맹과 의용군의 본부를 연안의 근교지 라가평으로 옮긴 후 라가평에서도 조선혁명군정학교가 진행되었는데 주덕해, 전우, 장복 등의 맹원들이 개교 준비를 맡았다.
화북조선독립동맹은 일제나 친일파가 경영하는 공장과 광산 등에서도 선전공작을 벌였다. 당산제강소, 승홍밀광산, 대동에서 당고에 이른 철도 부설 현장의 노동자들을 훈련시켜 선전공작에 종사하게 만들었다. 해방구의 조선독립동맹에서는 황무지개간에 참가하는 외 병원, 상점, 이발소, 방사공장, 화물점, 운수대, 타면소 등을 경영하였으며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운영비를 해결하였다.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는 박효삼이 지대장을 맡고 팔로군과 함께 적후에 가서 정치공세를 벌이는 일을 주로 담당하였다. 평한철도와 등포철도 일대에서 화북지대의 적후선전공작은 부족한 한어로 열정적으로 선전한 일로 주민들에게 크게 공감을 얻어 유명해졌다. 또한 일본 군인들을 향한 선전활동도 뛰어나 일본인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조선 적을 가진 군인들로 하여금 부대에서 이탈하도록 선동하였다. 이들의 활동으로 조선 군인들이 끊임없이 팔로군과 조선의용군 쪽으로 넘어왔다. 기열로변구의 조선독립동맹은 1943년에 숫자가 200여명으로 대폭 늘어났고 그들이 팔로군과 함께 유격전을 벌여 일본군 속에 있는 조선인 군인 150여 명을 포로로 잡기도 하였다.
조선의용군
1944년 초에 태항산 근거지에 있던 조선독립동맹 본부와 의용군 화북지대는 본부를 연안으로 옮겨갔다. 이때로부터 화북조선독립동맹은 조선독립동맹으로 개칭하고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도 조선의용군으로 고쳤다. 김두봉이 조선독립동맹 주석으로 뽑혔고 최창익, 한빈이 부주석이 되고 무정이 조선의용군 사령관이 되고 박효삼, 박일우가 부사령관이 되었다.
독립동맹의 강령의 골격은 반일통일전선을 구축해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고 종국에는 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는 것이었으며 독립을 위해 중국공산당과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인 사이의 항일 민족전선을 확대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독립동맹의 핵심 인물은 무정, 한빈, 최창익은 모두다 공산주의자였지만 강령에 공산주의를 담지 않았다. 9)
이런 기본 방침으로 조선독립동맹에 다양한 세력이 참여를 하였으며 훗날에 이들은 연안파로 불려진다. 당시 조선의용군의 숫자는 500여 명의 규모로 알려졌다. 의용군의 구성을 살펴보면
첫째 중국공산당 소속의 조선인으로 무정, 박일우, 이유민, 정율성, 진광화 등 20여 명이다. 중심인물은 무정이며 이들이 화북에서 조선청년연합회 창설을 주도하였다.
둘째 만주 출신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동자공산대학을 거쳐 연안에 온 사람들로 방호산, 이권무, 주덕해, 진반수, 임해, 이림 등 10여 명이다.
셋째 조선의용대 출신으로 박효삼, 김학무, 김창만, 호철명, 윤공흠, 문정일, 왕자인, 이익성, 주혁, 강진세 등 50여 명이다.
넷째는 조선공산당 출신으로 최창익, 한빈, 허정숙, 김명시, 이화림, 안병진 등 20여 명이다.
어쨌든 조선독립동맹은 연안 인근에서 새로 모집된 80여 명이 참가하게 되어 연안에 머무는 조선독립동맹 관계자는 200여 명에 이르렀고 각 지역에 파견되어 선전, 공작 활동하는 사람들 약 300명을 더하면 500여 명의 규모가 되었다.
연안으로 이동한 조선의용군은 나가평마을에 본부를 두었다. 무정은 조선의용군 사령관인 동시에 팔로군의 포병사령관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라가평의 조선혁명군정학교가 사령부 구실을 하였다.
조선의용군은 라가평의 병력 외에도 산동성에 이익성, 산서성에 김세광, 동북만주에 이상조가 이끄는 독립동맹 분맹이 있었으며 그들은 일본군에 종군한 조선인 병사들을 초모해 조선의용군의 병력을 증강하며 정보수집활동을 하였다.
1943년 6월 일본군이 태항산에 일대에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자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함께 곳곳에서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 때 중국공산당지도부는 조선의용군에게 연안으로 이동을 명하였다. 추후 중국공산혁명 성공 후에 조선에서도 공산주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조선의용군을 보호해야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소수의 무리인 조선의용군을 비교적 안전한 지역으로 보내려고 했다는 해석이 우세하다. 그리하여 연안에 도착한 조선의용군의 주요 임무는 선전 활동과 일본군 점령지구에서 조직 공작을 하며 황무지를 개간하여 자력갱생을 도모하는 것과 공산주의 이론을 학습하는 것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였다. 조선의용군 각 부대들은 팔로군과 신사군에 편성되어 일본군의 투항을 접수하고 일본군과 위만군의 잔여세력을 소탕하며 일본군 점령지역에 사는 조선인들의 생명의 안전 보호에 즉각적으로 대처하였다.
8월 11일 팔로군 총사령부 주덕은 연안총부 제6호 명령을 발표하여 조선의용군사령부는 “즉시 산하의 각 부대를 통솔하여 팔로군 및 원 동북군 각 부대들과 함께 동북으로 진군하여 일본군과 위만군을 소멸하라”고 명령하였다. 12일에 기열료변구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부대는 팔로군을 따라 동북에로 진군하였다. 연안에 있던 조선독립동맹총맹과 조선의용군사령부 및 산하의 부대들은 9월 초에 연안을 떠나 동북으로 진군하였다.10) 다음은 연안총부명령 제6호이다.
연안총부명령 제6호
(신화사 연안 12일발 급전)
연안총부명령 제6호
중국 및 조선 경내에 진군하여 싸우는 쏘련 붉은 군대에 배합하고 조선인민을 해방하기 위하여 나는 지금 화북에서 대일작전을 벌리고 있는 조선의용대 사령원 무정, 부사령원 박효삼, 박일우에게 즉시 소속부대를 통솔하여 팔로군 및 원 동북군 X부대와 함께 동북으로 출병하며 적과 괴로군을 소멸함돠 아울러 동북의 조선인민을 조직하여 조선을 해방하는 임무를 완수할 것을 명한다.
총사령 주덕
중화민국 34년 8월 11일 12시
(연안 ❮해방일보❯ 1945년 8월 12일) 11)
조선의용군은 팔로군 총사령 주덕의 전보를 받고 동북으로 달려가며 해방된 조국 조선에 입국할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조선은 이미 조선인 부대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남한에서 임정요인들이 개인의 자격으로 입국이 허락된 것처럼 북한에서도 무장 독립운동가들은 환영받지 못하였다.
동북조선의용군
3부로 계속됨
2022년 4월 27일 올림
우담초라하니
미주
9) 안문석저, ⌜무정평전⌟ 95쪽, 일조각, 2019
10) 양수천, 차철구 외 다수,⌜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562쪽, 연변인민출판사, 2009
11) 최삼룡편, ⌜승리의 기록⌟, 41쪽, 연변인민출판사, 2015
참고서적
양수천, 차철구 외 다수,⌜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연변인민출판사, 2009
안문석저, ⌜무정평전⌟, 일조각, 2019
최삼룡편, ⌜승리의 기록⌟,연변인민출판사, 2015
김삼웅저 ⌜약산 김원봉평전⌟, 시대의 창, 2016
박영실 저, ⌜8월 종파사건⌟, 백년동안, 2014
정길현 저 ⌜미국의 6 • 25 전쟁사⌟, 북코리아, 2015,
김영범 저, ⌜윤세주⌟, 역사공간, 2013
감양주 편 ⌜항일투쟁반세기⌟, 료년민족풀판사, 1995
브루스 커밍스 저, 김동노 외 다수 번역 ⌜브루스 커밍스 한국현대사⌟, 창비, 2019
강준만 저, ⌜한국현대사 산책 2권⌟, 인물과 사상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