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저술한 박은식(1859~1925) 답③
제시된 역사서의 서문에 나타난 '통사(痛史)'라는 핵심어를 통해 이 역사서가 "한국통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통사"는 박은식이 저술한 역사서입니다.
박은식은 독립 협회, 신민회, 서북 학회 등에서 애국 계몽 운동을 폈으며,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의 주필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명학에 토대를 둔 '유교구신론'을 발표하여 유교 개혁을 주장하였고, 장지연 등과 대동교를 창건하였으며, 최남선 등과 조선 광문회를 설립해 고전을 정리하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1911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대한 민국 임시 정부 건립에 참여하였으며, 1925년에 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는 역사를 중요시하여 민족 영웅전을 저술하고 독립운동사를 정리하였습니다. 망명 후 만주에서 1년간 머물며 "동명성왕실기", "발해태조건국지", "명림답부전", "천개소문전" 등 건국 영웅과 구국 영웅과 관련한 저술에 집중하였어요. 이후 상하이에서 "안중근전", "한국통사(韓國痛史, 1915),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1920)를 집필하여 간행하였습니다.
"한국통사"는 단군~국권 피탈 이전까지를 3편으로 구성하였는데, 특히 1864~1911년까지의 시기에 중점을 두어 일제 침략에 따른 국권 피탈 과정을 서술하였어요. 서문에서 '나라는 형체(形)라서 멸(멸망)할 수 있으나, 역사는 정신(魂)이기 때문에 멸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우리의 민족 정신을 ‘혼’으로 파악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의 독립 정신을 정리하였습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 항일 무장 투쟁까지의 한국 민족의 독립 투쟁사를 3·1운동을 중심으로 서술한 역사서입니다.
① 일제가 만든 조선사 편수회에 참여한 한국인으로는 이완용, 최남선, 이병도 등입니다.
② 일제가 청구 학회를 설립해 한국사를 왜곡하는 활동을 펴자 손진태는 이병도 등과 함께 실증주의 사학을 바탕으로 하는
진단 학회를 설립해 이에 대항하였습니다.
③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여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의 항일 무장 투쟁까지 우리 민족의 독립
투쟁사를 서술하였습니다.
④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1908)을 연재하여 왕조 사관과 사대주의를 비판하면서 민족 중심의 자주적 역사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⑤ 백남운은 사회 경제 사학을 발전시켜 조선사회경제사를 저술하여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인 발전 법칙에 입각하여
발전하였음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학에서 내세운 한국사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박은식과 신채호
구분 | 박은식 | 신채호 |
국권피탈 이전 | • 근대 계몽 사학 성립에 기여 • 조선 광문회 설립 → 민족 고전 정리 • 유교 구신론 제기 → 실천적인 유교 정신 강조 | • 근대 계몽 사학 성립에 기여 • 각종 위인전 저술 •「독사신론」 저술 → 민족주의 사학의 연구 방향 제시 |
식민 통치기 | • 대한민국 임시 정부 2대 대통령 •「한국통사」 저술 → 일제의 침략 과정 폭로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저술 → 독립 운동 과정 정리 | • 국민 대표 회의 소집 주장 • ‘조선 혁명 선언’ 작성 → 민중의 직접 혁명 강조 •「조선 상고사」 저술 → 단군~ 삼국 시대 서술,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파악 •「조선사 연구초」→ 서경 천도 운동을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으로 평가 |
한 말~일제 강점기 역사 연구
민족주의 사학 | ① 특징 ◦ 민족 정신 강조 ◦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한국사의 주체적 발전을 강조 ② 학자 ◦ 박은식 - 근대사 연구에 노력 - 역사는 신(神 ; 정신)이요, 나라는 형(形 ; 형체)이라고 강조 - <한국통사>: 단군~국권 피탈, 특히 1864~1911년까지의 일본의 조 선 침략을 집중 서술(국혼을 강조, 아픈 역사를 통해 교훈을 배우자) - <한국독립운동지혈사>: 갑신정변~1920년까지의 일제 침략에 대한 한민족의 독립 운동 서술 - ‘민족 혼’ 강조 ◦ 신채호 - 고대사 연구에 노력 - <민족주의 역사학의 기반 확립 - <조선상고사> :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인식 - <조선사연구초> :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높이 평가 - <독사신론> : 삼한정통론에서 벗어나 고대사의 체계를 정립 - '낭가 사상' 강조 ◦ 정인보 - 근대사 연구에 치중 -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관 가장 잘 계승 - <조선사연구> : 실학 연구에 노력 - 5천년 간의 ‘조선의 얼’ 강조 ◦ 문일평 - 근대사 연구에 노력 - <한미 50년사> : 개항 이후 역사 연구 - ‘조선심’ 강조 ◦ 최남선 - <조선역사>, <고사통>, <아시조선> 저술 - 불함 문화권 주장 |
실증주의 사학 | ① 특징 ◦ 역사적 사실의 객관성 강조 ◦ 사실 그대로의 역사 강조 ◦ 문헌 고증을 통한 역사 연구 ② 진단학회 결성 ◦ 일제의 청구 학회를 중심으로 한 왜곡된 한국사 연구에 반발하여 조직 ◦ 1934년 조직하여 1942년 일제에 의해 해체 ③ 학자 : 이병도, 김상기, 신석호, 이윤재, 조윤제, 손진태 등 |
사회 경제 사학 | ① 특징 ◦ 일제의 경제학자들이 우리 역사의 후진성과 정체성을 강조한데 반발 ◦ 유물론적 변증법에 의한 역사 연구 강조 ◦ 세계사적 역사 발전 단계설을 우리 역사에 적용함 ◦ 일제가 주장하는 한국사의 특수성론을 배척하고 보편사의 이론 적용 ② 학자 ◦ 백남운 - 유물 사관의 입장에서 한국사를 체계화함 - <조선사회경제사>, <조선봉건사회경제사> 저술 ◦ 기타 - 김석형, 이청원, 박극채 |
신민족주의 사학 | ① 특징 ◦ 민족 단결과 자주 민족 국가 건설을 강조 ◦ 개방적, 세계적, 평등적(균등적) 민족주의 강조 ② 학자 ◦ 손진태: <조선민족사개론>, <국사대요>, <한국민족문화의 연구> 저술 민족 사관에 대한 비판과 극복 ◦ 안재홍: <조선상고사감> 저술,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주장 정인보와 함께 조선학 운동 참가 |
유사 기출문제
박은식
24회 고급 42번 문제
42. 박은식(1859~1925)의 활동 답①
문제에 역사서 제목이 제시되지 않았다면, 3점 배점을 줄 수 있는 문제지만, "한국통사"를 제시하였네요. "한국통사"는 박은식이 저술한 대표적인 역사서입니다.
박은식과 신채호는 민족주의 사관을 대표하는 역사학자이자 항일 독립 운동을 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으니, 두 분의 저술과 활동을 구분해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아두셔야 합니다.
박은식은 일찍이 독립 협회, 신민회, 서북 학회 등에 가입해 애국 계몽 운동을 폈습니다. 또한 황성신문 주필,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담당하는 등 언론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어요.
1909년 양명학에 토대를 둔 '유교구신론'을 발표하여 유교 개혁을 주장하였고, 장지연 등과 대동교를 창건하였으며, 최남선 등과 조선 광문회를 설립해 고전을 정리하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1911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1915년 신규식 등과 동제사를 결성하였습니다. 이후 대한 민국 임시 정부 건립에 참여하였으며,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된 후 1925년에 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그해에 사망하였습니다.
역사와 관련하여서는 "한국통사(단군~국권 피탈 이전까지)",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개항~3·1 운동)"를 저술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규탄하였습니다. 특히, "한국통사" 서문에서 '나라는 형체(形)라서 멸(멸망)할 수 있으나, 역사는 정신(魂)이기 때문에 멸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민족정신을 ‘혼’으로 파악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의 독립 정신을 정리하였습니다.
① 대한 민국 임시 정부 건립에 참여하였으며,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된 후 1925년에 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그해 사망하였어요.
② 박은식(1859~1925)은 조선어 학회 설립(1931) 이전에 사망하였어요.
1921년 주시경의 제자인 임경재, 장지영, 이윤재, 최현배 등의 주도로 조선어 연구회가 창립되었으며, 1931년에는
조선어 학회로 확대 개편되었습니다.
③ 진단 학회는 이병도, 김상기, 손진태 등이 실증적 역사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하였습니다.
이들은 랑케 사학에 영향 받아 문헌 고증 등의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역사를 연구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일제의 어용 역사 단체인 청구 학회의 역사 왜곡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되었고 진단학보를 발간하기도 하였어요.
④ 독사신론은 신채호(1880~1936)가 저술하였습니다.
신채호는 고대사 연구에 주력해 "조선상고사"와 "조선사 연구초"를 저술하여 우리 고대 문화의 우수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였어요. 또한 의열단의 행동 지침이 된 "조선 혁명 선언"을 작성하기도 하였습니다.
⑤ 정인보는 1935년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계기로 안재홍 등과 함께 여유당전서를 교열·간행하는 등 조선학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정인보는 역사에서 조선의 ‘얼’을 강조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9회 고급 46번 문제
46.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집필 목적 답④
박은식(1859~1925)과 신채호(1880~1936)는 다른 점도 많지만 비슷한 활동을 하였다는 점에서 각각 단독 출제되거나 두 분을 비교하는 문제가 출제되니, 두 분의 활동 내용과 역사 저술의 특징 등을 구별하여 알아두세요.
문제에 제시된 가상 인터뷰에 나와 있는 내용 중 "한국통사" 집필, '국혼' 강조를 통해 이 저자가 박은식임을 파악할 수 있어요.
박은식이 1915년에 "한국통사" 집필한 후 1920년에 새로이 저술한 책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입니다.
따라서 (가)에는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강조하려고 한 내용이 들어가야 합니다.
박은식은 독립 협회, 신민회, 서북 학회 등에 가입해 신교육과 사회 개혁, 그리고 대동 사상을 설파하는 애국 계몽 운동을 폈습니다. 특히 애국 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을 연계해야 한다고 점을 일찍부터 주장하기도 했죠.
그리고 황성신문 주필,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담당하며 많은 논문을 게재하는 등 언론 활동을 하였습니다.
일제는 국권을 강탈한 후 황성신문, 서북학회월보를 비롯한 모든 신문과 잡지와 언론기관들을 폐쇄하고, 박은식이 저술한 모든 저서들도 ‘금서(禁書)’로 처리해 발행과 독서를 금지시킵니다.
이에 박은식은 한민족의 ‘국혼(國魂)’이 들어 있는 역사책들이 압수, 소각되어 국민과 다음 세대들이 한국 민족의 역사를 잃어버려 한국인의 긍지와 민족성마저 상실하여 진짜로 멸망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까 우려하였습니다. 그는 “국체(國體)는 비록 망했지만 국혼이 소멸당하지 않으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역사마저 불태워 소멸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탄식하다, 1911년에 만주로 망명하였습니다.
망명 후 만주에서 1년간 머물며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발해태조건국지", "명림답부전", "천개소문전" 등 건국 영웅과 구국 영웅과 관련한 저술에 집중하였습니다. 이때 대종교(大倧敎) 신도가 되기도 하였어요.
이후 상해에서 "안중근전"을 저술하고, 망명 후 꾸준히 집필하던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완성(1914), 간행합니다(1915).
"한국통사"는 단군~국권 피탈 이전까지를 3편으로 구성하였는데, 특히 1864~1911년까지의 시기에 중점을 두어 일제 침략에 따른 국권 피탈 과정을 다룬, 말 그대로 아픈 역사를 서술하였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일제 침략의 잔학성과 간교성을 폭로하며,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아픈 역사를 교훈 삼되, ‘국혼’과 ‘국백(國魄)’을 나누어 일제에게 빼앗긴 것은 ‘국백’뿐이니, ‘국혼’을 잘 유지, 강화해 독립을 쟁취할 것을 강조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책은 간행 직후 중국, 러시아, 미주의 동포는 물론, 국내에도 비밀리에 보급되어 독립 투쟁 정신을 크게 고취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후 독립 활동을 하면서 상해에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집필, 1920년 12월에 간행합니다. 이 책은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 항일 무장 투쟁까지의 한국 민족의 독립 투쟁사를 3·1운동을 중심으로 서술하였습니다. 이 책에서는 일제 침략의 죄상을 비판하고, 3·1운동이 갑신정변 이래의 민족 독립 운동이 민족 내부에 축적되어 봉기한 것임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역사의 대세와 국내 정세는 일제가 패망하도록 변화하고 있으며, 3·1운동을 전환점으로 한민족의 독립 운동이 반드시 독립을 쟁취하도록 전개되고 있다는 독립에 대한 낙관적 견해를 표명하였습니다.
① 신채호의 역사 연구 경향입니다.
그는 고대사 연구에 주력해 "조선상고사"와 "조선사 연구초"를 지어 우리 고대 문화의 우수성과 독자성을 강조했어요.
② 이병도, 손진태 등이 중심이 된 실증 사학의 특징입니다.
이들은 랑케 사학에 영향 받아 문헌 고증 등의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 역사를 연구하려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③ 백남운이 중심이 된 사회 경제 사학의 특징입니다.
1930년대 들어 백남운은 사회 경제 사학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에 입각하여
발전하였음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하였습니다.
④ 박은식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면서 나타내고자 한 내용입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항일 독립 운동 과정을 집필하여 우리나라가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자 하였어요.
⑤ 정인보의 역사 연구 경향입니다.
정인보와 안재홍 등은 정약용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에 “여유당전서”를 교열·간행하는 등 조선학 운동을 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16회 고급 39번 문제
39. 박은식과 신채호의 활동 답④
제시된 사료는 워낙 일반적으로 잘알려진 것이라 한국사 공부를 한 분이면 대부분 알 수 있을 겁니다.
제시된 사료와 관련된 박은식과 신채호하면 개화기 근대 계몽 사학자이자 민족주의 역사학자죠?
따라서 이들과 민족주의 역사학자, 또는 사회 경제 사학자의 저서 내용 중 일부를 사료로 제시하고 역사학의 특징을 비교, 파악하는 문제가 자주 출제됩니다.
그러나 신채호나 박은식은 역사 연구뿐만 아니라 중국에 건너가 독립 운동에서도 크게 활동하였던 분들입니다.
따라서 역사학과 항일 독립 운동 활동을 함께 알아두어야 합니다.
(가)를 보면 '나라는 형체(形)라서 멸(멸망)할 수 있으나, 역사는 정신(魂)이기 때문에 멸할 수 없다'라는 주장이 나와 있으니 박은식의 <한국통사> 서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에는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장이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으니 <조선상고사>의 일부입니다.
박은식과 신채호의 역사 연구의 특징, 역사서는 중요하니 꼭 확실하게 공부해 두고 더 나아가 다양한 활동도 이 기회에 공부해 두세요.
(가) 사료와 관련된 박은식(1859~1925)부터 알아보자구요.
일찍이 독립 협회, 이후 신민회, 서북 학회 등에 가입해 애국 계몽 운동을 폈으며, 황성신문 주필,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담당하는 등 언론 활동을 하였습니다.
1909년 양명학에 토대를 둔 '유교구신론'을 발표하여 유교 개혁을 주장하였고, 장지연 등과 대동교를 창건하였으며, 최남선 등과 조선 광문회를 설립해 고전을 정리하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1911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1915년 신규식 등과 동제사를 결성하였고, 이후 대한 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 1925년에는 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그해에 사망하였습니다.
역사와 관련하여서는 <한국통사(단군~국권 피탈 이전까지)>,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갑신정변~1920년)>를 저술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규탄하였습니다.
특히 우리의 민족 정신을 ‘혼’으로 파악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의 독립 정신을 정리하였습니다.
(나)사료와 관련된 신채호(1880~1936)를 살펴봅시다.
일찍이 독립 협회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황성신문 논설위원, 대한매일신보 주필, 연해주에서 권업회의 기관지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국민 대표 회의에서 창조파(임시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파)로 활동하였으며, 의열단의 요청으로 민중의 직접 혁명을 강조한 '조선 혁명 선언'을 작성하기도 했습니다(1923).
역사와 관련하여서는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1908)'을 연재하여 왕조 사관과 사대주의를 비판하면서 민족 중심의 자주적 역사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상고사(화랑 정신인 낭가 사상을 강조,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이라고 기술)>, <조선사연구초(단군~삼국 시대 기술,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장'이라 기술)> 등의 저술을 통해 고대사 연구에 주력하였습니다.
ㄱ - 진단 학회는 이병도, 김상기, 손진태 등이 실증적 역사 연구를 목적으로 조직하였습니다.
일제의 어용 역사 단체인 청구 학회의 역사 왜곡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되었고 진단학보를 발간하기도 하였어요.
ㄴ - 박은식은 양명학자로서 실천적인 양명학을 진흥할 것을 주장한 유교구신론을 주장하였습니다.
ㄷ - 사회 경제 사학을 확립한 이는 백남운입니다.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1933)>, <조선봉거사회경제사상(1937)>를 저술하여 사회 경제 사학을 확립하였습니다
사회 경제 사학은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에 입각하여 발전하였음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
성 이론을 반박하였습니다.
ㄹ - 1923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존폐와 활동을 둘러싸고 이를 논의하기 위한 국민 대표 회의가 열립니다.
이때 임시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창조파(신채호, 신숙, 문창범)와 임시 정부를 그대로 두고
조직을 개편하자고 주장하는 개조파(안창호, 여운형, 김동삼)가 대립하였는데, 신채호는 창조파의 입장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ㄹ로 묶인 ④번입니다.
9회 고급 25번 문제
25. 박은식(1859~1925)의 활동 답③
제시된 자료에 '유교의 3대 문제'가 제시되고 '개량 구신의 의견을 바친다'는 내용이 나타나 있네요.
이를 통해 박은식이 주장한 유교 구신론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박은식은 일찍이 독립 협회, 신민회, 서북 학회 등에 가입해 애국 계몽 운동을 폈습니다.
또한 황성신문 주필,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담당하는 등 언론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어요.
1909년 양명학에 토대를 둔 '유교구신론'을 발표하여 유교 개혁을 주장하였고, 장지연 등과 대동교를 창건하였으며, 최남선 등과 조선 광문회를 설립해 고전을 정리하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1911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1915년 신규식 등과 동제사를 결성하였습니다.
이후 대한 민국 임시 정부 건립에 참여하였으며,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된 후 1925년에 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그해에 사망하였습니다.
역사와 관련하여서는 "한국통사(단군~국권 피탈 이전까지)",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갑신정변~1920년)"를 저술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규탄하였습니다.
특히, "한국통사" 서문에서 '나라는 형체(形)라서 멸(멸망)할 수 있으나, 역사는 정신(魂)이기 때문에 멸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민족 정신을 ‘혼’으로 파악하여 그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의 독립 정신을 정리하였습니다.
① 박은식은 안창호, 이승훈 등과 함께 신민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신간회는 1927년에 창립되었는데, 이때는 박은식이 이미 죽은 뒤였습니다.
아직도 신민회, 신간회가 헛갈려 이런 답지에 엮이시면 안됩니다.....^^
② 천도교의 기관지인 만세보는 1906년에 손병희에 의해 창간되었습니다.
③ 일제가 유림계를 친일화하려는 정치 공작을 전개하자 장지연 등과 함께 대동교를 창건하여 이에 맞섰습니다.
대동교는 공자의 대동주의와 맹자의 위민지설(爲民之說), 그리고 양명학의 지행합일적 입장에서 유교를 민중적이고
실천적으로 개혁하려는 것이었습니다.
④ 독사신론은 신채호가 저술하였습니다.
⑤ 불함문화론은 최남선이 주장하였습니다.
8회 고급 44번 문제
44. 일제 강점기 역사 연구 답③
(가)는 '민족혼'을 강조한 민족주의 사학자 박은식의 글입니다
(나)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결과물로 파악한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의 글입니다.
(라)는 ‘조선심’을 강조한 민족주의 사학자 문일평의 글입니다.
그는 언어가 ‘조선심’의 대표임을 강조하였답니다.
(마)는 '조선얼'을 강조한 민족주의 사학자 정인보의 글입니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역사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다)는 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조선사의 세계사적 보편성을 주장하여 식민사관의 정체성론을 비판한 사회 경제 사학자
백남운의 글입니다.
백남운은 우리 민족의 특수성을 부각시켜 민족적 주체성을 강조한 민족주의 사관을 비판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신채호
27회 고급 43번 문제
43. 신채호(1880~1936)의 활동 답⑤
제시된 자료에 있는 '무정부주의', "조선상고사" 연재를 통해 신채호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신채호는 일찍부터 독립 협회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황성신문 논설위원, 대한매일신보 주필, 연해주에서 권업회의 기관지 권업신문의 주필 등 언론 활동도 활발히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필로 활동하던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1908)'을 연재하여 왕조 사관과 사대주의를 비판하면서 민족 중심의 자주적 역사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역사 연구에 힘썼는데, 주로 한국의 고대사 연구에 주력하였습니다. “조선사연구초(1929,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의 일천년대 제일대 사건으로 파악)", "조선상고사(1931,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파악)” 등을 저술합니다. 그러면서 고대사에 살아 숨 쉬는 자주적·주체적인 민족 고유의 사상인 ‘낭가 사상’에 주목해, 이를 되살려 민족 독립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한편, 1920년대에는 해외에서 항일 독립 활동을 활발히 하였으며,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1923년에 개최된 국민대표 회의 당시에 창조파(임시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세력)의 입장을 폈습니다. 그는 이광수, 이승만, 안창호 등이 주장한 자치론, 외교론, 준비론 등을 비판하였으며, 오직 민중의 직접 혁명에 의해서만 일제를 타도하고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그가 적성한 조선 혁명 선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① 안중근은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초대 통감을 지내는 등 일제의 한국 침략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
밀약을 체결하기 위해 중국 하얼빈에 도착하자 그를 사살하였습니다.
② 김구는 임시 정부의 활동이 위축되자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윤봉길 의거 등을 통해 일제의 주요 인물을
제거하는 의열 투쟁을 벌임으로써 임시 정부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③ 김약연은 우리 민족이 많이 이주하여 살던 북간도 용정에 명동 학교를 세워(1908) 민족 교육에 앞장섰습니다.
영화 아리랑을 만든 나운규, 시인 윤동주 등이 이 학교 출신이었어요.
④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독립군 사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대조선 국민군단을 결성하였습니다.
⑤ 신채호는 1923년 김원봉의 요청으로 조선 혁명 선언을 작성하였습니다.
여기에는 폭력 투쟁을 통한 민중 직접 혁명을 추구하는 의열단의 기본 정신이 나타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25회 고급 43번 문제
43. 신채호(1880~1936)의 활동 답⑤
제시된 두번째 자료에 있는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주장, "조선상고사"의 출처를 통해 자료와 관련된 인물은 신채호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신채호는 일찍부터 독립 협회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황성신문 논설위원, 대한매일신보 주필, 연해주에서 권업회의 기관지 권업신문의 주필 등 언론 활동도 활발히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필로 활동하던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1908)'을 연재하여 왕조 사관과 사대주의를 비판하면서 민족 중심의 자주적 역사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역사 연구에 힘썼는데, 주로 한국의 고대사 연구에 주력하였습니다. “조선사연구초(1929,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의 일천년대 제일대 사건으로 파악)", "조선상고사(1931,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파악)” 등을 저술합니다. 그러면서 고대사에 살아 숨 쉬는 자주적·주체적인 민족 고유의 사상인 ‘낭가 사상’에 주목해, 이를 되살려 민족 독립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한편, 1920년대에는 해외에서 항일 독립 활동을 활발히 하였으며, 의열단의 행동 지침이 된 '조선 혁명 선언'을 작성하기도 하였습니다.
①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은 편찬한 것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이를 주도한 인물은 안창호, 이광수, 박은식 등이었습니다.
이 사료집은 파리 강화 회의에 이어 개최되는 국제 연맹 회의에, 한민족의 자주 독립이 역사적으로 마땅한 사실임을
밝히는 한일 관계사를 추적해, 한국 민족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한 자료로 제출할 목적으로 제작되었어요(1919. 9.).
② 민족주의 사학자 정인보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는 1935년에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계기로 안재홍 등과 함께 "여유당전서"를 교열 ·간행하는 등 조선학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③ 손진태, 이병도 등에 대한 설명입니다.
일제가 청구 학회를 설립해 한국사를 왜곡하는 활동을 펴자 손진태는 이병도 등과 함께 실증주의 사학을 바탕으로
하는 진단 학회를 설립해 이에 대항하였어요.
④ 민족주의 사학자인 박은식에 대한 설명입니다.
박은식은 유교 구신론을 제창(1909)하면서 근대 교육과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는 역사 연구에 있어서는 근대사 연구에 주력하였습니다.
⑤ 신채호는 자신이 주필로 활동하던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1908)'을 연재하여 왕조 사관과 사대주의를 비판하면서 민족 중심의 자주적 역사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7회 고급 35번 문제
35. 신채호의 역사 연구 답⑤
한국사능력시험에서 역사학 분야도 빠지지 않고 자주 출제되죠.
고려 시대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명왕편, 조선 건국 초의 역사서 편찬과 그 성격, 조선왕조실록,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역사 연구, 그리고 한말과 일제 강점기의 역사 연구가 출제 포인트입니다.
특히 한말(19세기 말~20세기 초)과 일제 강점기 부분에서 계몽 사학과 민족주의 사학을 연구한 신채호와 박은식의 역사 연구와 활동, 백남운의 사회경제 사학의 특징이 자주 출제되니 잘 알아두세요.
문제에 제시된 "조선상고사"가 누구의 저술인지 알면 이 인물이 누구인지 제시된 내용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이 책을 모르더라도 내용에 나타난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문구를 보면 신채호를 금방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민족주의 역사학자였던 신채호(1880~1936)는 독립 협회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황성신문 논설위원, 대한매일신보 주필, 연해주에서 권업회의 기관지 권업신문의 주필 등 언론 활동도 활발히 하였습니다. 1920년대에는 항일 독립 활동을 활발히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필로 활동하던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1908)'을 연재하여 왕조 사관과 사대주의를 비판하면서 민족 중심의 자주적 역사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역사 연구에 힘썼는데, 주로 한국의 고대사 연구에 주력하였습니다. “조선사연구초(1929,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의 일천년대 제일대 사건으로 파악)", "조선상고사(1931,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파악)” 등을 저술합니다. 그러면서 고대사에 살아 숨 쉬는 자주적·주체적인 민족 고유의 사상인 ‘낭가 사상’에 주목해, 이를 되살려 민족 독립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① 백남운의 사회 경제 사학에 대한 설명입니다.
1930년대에 백남운은 유물 사관에 입각한 사회 경제 사학을 제시하여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에 입각하
여 발전하였음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하였습니다.
② 민족주의 사학자 정인보에 대한 설명입니다.
정인보는 1935년에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계기로 안재홍 등과 함께 "여유당전서"를 교열·간행하는 등 조선학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③ 이병도, 손진태 등에 대한 설명입니다.
④ 민족주의 사학자인 박은식에 대한 설명입니다.
박은식은 유교 구신론을 제창(1909)하면서 근대 교육과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는 역사 연구에 있어서는 근대사 연구에 주력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0회 고급 38번 문제
38. 신채호의 역사 연구 답②
<텬고>, 즉 천고라는 잡지를 누가 간행했는지는 잘 모르죠?
저도 생소하네요.
그러나 옆에 잡지 내용에 '조선 독립의 필요성, 항일 무장 투쟁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는 글을 게재'하였다는 사실에서, 이를 발행한 인물이 항일 무장 투쟁 활동을 하거나 이러한 활동을 강력하게 지지, 후원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사학자 중 이러한 활동을 한 인물은 신채호입니다.
단재 신채호는 사학자이자 독립 운동가, 언론인입니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에 강직한 논설을 실어 독립 정신을 복돋우고, 국권 강탈 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였다가 견해 차이로 탈퇴하고 국민 대표 회의의 소집에,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독립 운동과 국사 연구에 힘쓰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사하였습니다.
특히, 1923년에는 의열단의 독립 운동 이념과 방략을 이론화하여 천명한 <조선 혁명 선언>을 작성하기도 했어요.
① 안재홍에 대한 설명입니다.
광복 후 안재홍, 손진태, 이인영 등의 신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일제 강점기 민족주의 사학을 계승하여 자주적 민족 국
가를 수립하고 민족적 자유와 평등을 실현한다는 입장에서 역사적 사실을 재평가하고 민족사를 체계화하고자 하였습
니다.
③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관을 계승한 정인보에 대한 설명입니다.
④ 실증 사학의 토대를 마련한 이병도, 손진태에 해당하는 설명으로, 이들은 진단 학회를 조직하였어요.
⑤ 박은식에 해당하는 설명이죠.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9회 고급 39번 문제
39.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과 의열단 답⑤
이 문제에 제시된 자료에도 '민중 직접 혁명 수단에 의한 독립'을 주장하고 있죠?
외교론, 준비론(실력 양성 운동) 등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민중 직접 혁명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내걸었던 것은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의 핵심이고, 이를 행동 강령으로 삼아 활동한 단체는 의열단이라는 것은 공식처럼 알아두세요.
위에 문제들을 풀면서 알았다면 금방 파악되고 이제 외워졌을 겁니다.
그럼 이를 지침 삼아 활동한 단체는 의열단이니 의열단에 대한 내용을 답지에서 찾으면 되겠네요.
① 의열단은 만주 지린성에서 창설되었습니다.
중국 관내인 충칭(중경)에서 창설된 것은 한국 광복군입니다(1940).
② 의열단은 코민테른(국제공산주의 조직체)의 지시로 해체된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대중적 정당인 조선 민족 혁명당
(1938)과 그 아래 군사 조직인 조선 의용대(1938)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습니다.
③ 1930년대 초반에 북만주에서 항일 무장 활동을 폈던 한국 독립군에 대한 설명입니다.
지청천이 이끌던 한국 독립군은 중국 호로군과 연합해 한·중 연합 작전을 펼쳐 항일전에서 많은 전과를 거뒀습니다.
④ 김구가 조직한 한인 애국단에 대한 설명입니다.
⑤ 의열단을 이끌던 김원봉은 1920년대 후반부터는 암살이나 파괴 등의 개인 폭력 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무장 투쟁
노선으로 전환합니다.
이에 따라 단원들을 중국의 황푸 군관 학교에 입교시켜 체계적인 군사 교육을 받게 하고, 1930년대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설립하여 군사 훈련을 통해 군사 간부를 양성하였습니다(1932).
조선 혁명 학교는 의열단이 해체되자 함께 없어졌습니다(1935)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2회 1급 34번 문제
34. 조선 혁명 선언(1923)과 의열단 답②
제시된 자료도 잘 알아두세요.
자료에 보면 '민중'이라는 개념이 자주 등장하고 민중을 혁명의 주체로 파악하여 민중의 직접 혁명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이는 신채호가 김원봉의 부탁으로 1923년에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으로, 의열단의 행동 강령과 개인 폭력 투쟁을 통해 민중 직접 혁명을 달성하려는 의열단의 목표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조선 혁명 선언(일명 의열단 선언)'에는 외교론, 자치론, 문화 운동론, 준비론(실력 양성 운동) 등의 입장, 즉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 혁명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내걸었다는 것 알아두세요.
ㄱ - 조선 혁명 선언은 의열단을 조직한 김원봉의 요청으로 신채호가 작성하였습니다.
ㄴ- 의열단은 일제 고관, 매국노, 친일파 등의 처단과 조선 총독부, 동양 척식 주식회사, 경찰서 등 식민 통치 기관의
파괴를 목표로 활동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의열 활동이 최수봉의 밀양 경찰서 폭탄 투척(1920), 김익상의 조선 총독부 폭탄 투척(1921), 김상옥의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1923), 나석주의 동양 척식 주식 회사, 식산 은행 폭탄 투척(1926) 등이 있습니다.
ㄷ - 김구가 조직한 한인 애국단에 대한 설명입니다.
국민 대표 회의 결렬 이후 침체기에 빠진 임시 정부에 활기를 불어 넣기 위해 김구는 1931년 한인 애국단을 결성하
여 의열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ㄹ - 의열단원들은 '공약 10조'를 맹세하고 5가지 부류의 파괴 대상(5파괴)과 7가지 부류의 암살 대상(7가살)을 설정하
고 행동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ㄴ, ㄹ로 묶인 ②번입니다.
손진태
13회 고급 48번 문제
45. 손진태의 역사 연구 답⑤
오랜만에 역사학에 대한 문제가 출제되었네요.
제시된 글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답지가 있어 1점 배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2점 정도의 배점이 주어져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싶네요.
문제에 제시된 <조선민족사개론>을 저술한 학자는 손진태입니다.
주어진 글에 '민족의 단합은 진정한 신민족주의만 얻을 수 있다'라고 나타나 있듯, 그는 안재홍 등과 함께 신민족주의 사학을 주장한 인물입니다.
1940년대부터 대두되었던 신민족주의 사학은 민족주의 사학, 사회 경제 사학, 실증주의 사학의 장점을 수용하여 역사 연구의 실증적 토대 위에서 민족주의 사학과 사회 경제 사학을 계급을 초월한 민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융합한 것입니다.
신민족주의 사학자들은 광복 이후 좌우간의 갈등으로 인한 혼란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계급 이념 간 대립을 넘어 국민적 사상을 하나로 통합하여 하나의 한민족 공동체를 이뤄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국내적으로는 민족을 구성하는 여러 사회 계층 간의 대립과 반목을 해소하고 대외적으로는 타민족에 대해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배타성을 완화하여 국제적 민족주의로 전향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습니다.
특히, 손진태는 자신이 주창하는 신민족주의의 사학이 기존의 민족주의 사학처럼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개방적, 세계적, 평등적(균등적)임을 강조하였답니다.
① 주어진 자료에 '진정한 민족주의는 민족 전체의 균등한 행복을~'이라는 글에서 파악할 수 있어요.
② 손진태는 실증주의를 주장한 진단학회 창설에 참여하였으며, 6·25 전쟁 초창기인 1950년 9월에 납북되었어요.
③ 신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민족 단결과 자주 민족 국가 건설 및 평등을 강조하였습니다.
④ 손진태는 사학자이면서 민속학자였습니다.
그는 민속학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하여 한국 최초 민속학회지인 <조선민속> 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 민속 설화의 연구> 등 다양한 저서도 남겼어요.
⑤ 조선상고사감은 같은 신민족주의 사학을 연구한 안재홍의 저서입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사관을 전개하였습니다.
안재홍은 1930년대에 정인보 등과 함께 한국학 운동을 주도하며 <여유당전집>을 간행하였으며,
1940년대에는 우리나라 전통 철학을 정리하여 <불함 철학 대전>, <조선 철학> 등을 저술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5회 고급 45번 문제
45. 손진태의 역사 연구 특징 답②
제시된 내용을 주장한 학자는 신민족주의 사학을 편 손진태입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일제가 청구 학회를 설립해 한국사를 왜곡하자, 손진태는 이병도 등과 함께 실증주의 사학을 바탕으로 하는 진단 학회를 설립해 이에 대항하였어요.
ㄴ - 조선상고사는 신채호가 저술한 역사서입니다.
손진태는 조선 민족사 개론, 국사대요 등을 저술하였습니다.
ㄷ - 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역사 서술은 백남운이 중심이 된 사회 경제 사학의 특징입니다.
백남운은 이를 바탕으로 일제 사학자들이 주장한 정체성론을 정면으로 비판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ㄹ로 묶인 ②번입니다.
정인보
26회 고급 45번 문제
45. 조선학 운동의 전개 답③
'다산 서거 99주년 기념 사업 추진을 계기로 안재홍, 정인보, 문일평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의 언어, 역사 문학을 연구하는 활동'이라는 사실을 통해 조선학 운동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다산+조선'을 결합하면 답을 찾기가 쉬워지죠.
1920년대 들어 민족주의 사학은 근대 역사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신채호와 박은식 등은 민족 운동의 일환으로 우리 역사를 연구하였습니다.
민족주의 사학은 1930년대 들어 정인보, 안재홍, 문일평 등으로 계승되었습니다. 정인보는 ‘5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글을 동아일보에 연재하였으며, "조선사 연구" 등을 저술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였어요. 그리고 안재홍과 함께 우리 민족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정약용 연구를 중심으로 한 조선학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전통 사상과 문화 속에서 민족의 고유한 특색을 찾아내어 문화적으로 민족의 주체성을 유지하려는 민족 운동이었습니다. 1930년대 중반 "여유당전서"를 간행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으며 특히, 조선 후기 실학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하였습니다.
① '가갸날'은 오늘날 한글날로, 일제 강점기에 창립된 조선어 연구회가 제정하였습니다.
임경재, 장지영 등은 국어 연구를 위해 조선어 연구회를 창립하였습니다(1921). 이 단체는 한글 연구와 더불어
강습회를 열어 한글 보급에 노력하였습니다. 또, 한글 기념일인 ‘가갸날’을 제정하여 우리말 쓰기를 권장하였고,
한글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여 한글 대중화에 노력하였어요.
② 일제는 조선의 멸망과 일제의 한반도 병합을 정당화하고, 일제의 지배가 우리나라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식민 사관을 만들었습니다.
조선 총독부는 조선사 편수회를 설치해(1925) 식민 사관에 바탕을 둔 조선사를 편찬하여(1936) 한국사를 왜곡, 말살
하였습니다. 또한, 1930년에는 조선사 편수회 간부와 경성 제국 대학 법문학부가 중심이 된 청구 학회를 조직하여
식민 사관을 학문적으로 심화, 발전시켰습니다.
③ 정인보는 1935년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계기로 안재홍 등과 함께 여유당전서를 교열·간행하면서 조선학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④ 원각사(1908)는 이인직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 극장으로, 이인직의 ‘은세계’가 신극으로 처음 공연되었어요.
⑤ 1920년대 중반에는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식민지 현실을 고발하고 계급 의식을 고취하는 등 문학의 사회적 참여를
강조하는 신경향파 문학이 대두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8회 고급 42번 문제
42. 조선학 운동의 전개 답②
밑줄 친 ‘조선학 운동’에 대한 내용을 찾는 문제네요.
일제는 1930년대 들어 일제는 조선사 편수회, 청구 학회 등을 일제의 어용 단체를 동원하여 일제의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철저히 왜곡하거나 말살하려고 하였습니다.
일제는 타율성, 정체성, 당파성을 주장하는 식민주의 사관을 앞세워 한국사의 자율성과 독창성을 부정하였죠.
특히, 총독부가 설치한 조선사 편수회는 식민주의 사관을 토대로 조선사를 편찬하여 한국사 왜곡에 앞장섰습니다.
1935년은 정약용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정인보, 안재홍 등이 함께 “여유당전서”를 교열·간행하는 등 조선학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조선학 운동은 우리 민족 문화를 연구하는 활동을 통해 일제의 식민 사관 연구 단체에 대항하는 성격을 가지고 전개되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ㄴ - 조선 광문회는 1910년에 설치되었습니다.
광문회에서는 한국의 고전을 발굴하고 그 가치를 재인식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한국 고전을 간행·보급시키는 한편,
민족 문화와 사상의 기원에 관한 연구에 종사하였습니다.
최남선이 창설하고 박은식 등도 참여하였습니다.
ㄹ - 주시경이 국어문법이라는 문법서를 저술한 것은 1909년의 일입니다.
주시경은 현대문법의 종합적인 체계를 개척하여 ‘한글맞춤법통일안’의 기본 이론을 세웠습니다.
그는 지석영과 함께 최초의 한글 연구 단체인 국문연구소(1907)에서 활동하면서 한글 연구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ㄷ으로 묶인 ②번입니다.
효율적인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부법
카페에서 추천하는 부담 없는 [한권으로 끝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교재로 중요내용을 공부하고
마지막으로 카페에 올려진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문제해설을 꼼꼼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29회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국사사랑방/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국사능력검정시험기출문제/한국사기출문제해설/
한국사능력검정시험난이도/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권으로끝내는한국사능력검정시험
첫댓글 정말 공부해야 할 것이 많군요..단답형 공부만 해봤는데 어렵습니다.ㅠ.ㅠ
한 인물이 시대를 살아온과정 등을 쉽고 확실히 잡아주는것 같아요! 기대되면서 쉽지않을것같아 두렵네요.
키워드는 통사-국혼입니다.
시대별로 쭉 훑는 통사가 아니라
'고통'할 때의 통 자를 썼죠.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명칭이 비슷하니 묶어서 외우면 편하구요.
박은식의 'ㄴ'과
국혼사상의 'ㄴ'을 묶어서 외웠던 기억이 나네요^^
고급을 준비하는 학생으로 문제를 처음 접해보니 많이 어렵네요, 특히 근현대사는 더 열심히 공부해야 겠습니다.ㅜㅜ
확실히 고급 문제는 뭔가 깊이 있게 공부해야 할 것 같네요.
겉핥기 보다는 깊이 공부해야할 것같아요 ㅠ
어렵네요~심도있게 공부해야할거같아요
개굴맘님이 알려주신대로 저도 고통, 지혈 이렇게 외우고 있습니다
컴퓨터로 화면을 보면 한 눈에 안들어오는 거 같아서 인쇄해서 형관펜으로 색칠하며 보고 있는데, 정리를 너무 잘 해 주셔서 감탄하고 갑니다ㅎㅎ
시대상황에 맞게 인물에 대해서 정리를 잘 해주셨네요. 공부양이 방대하네요 열심히하겠습니다
에고 문제들이 어렵네요 ㅠㅠ 관련 문제들을 이렇게 모아보니 더 자세히 알 수 있을것같습니다.
어렵네요 ㅠ 아직 진도도 다 못뻇는데 더 정진해야겠습니다
근현대사가 특히나 약한데 지금 공부만 하다 기출문제를 처음 보니 정말 어렵네요ㅠㅠ 특히 인물과 단체명에 약한것 같아서 이 부분을 더 집중적으로 공부해야 겠어요
우와 관련문제까지 자세하네요 공부하고 다시 풀어봐야겠어요
유사기출까지 있어서 정말 너무 좋습니다. 한국사 열심히 공부하고 싶어요. 암기가 동반이 되어야 겠지만 먼저 이해가 우선이겠죠? 공부방법 깨닫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댓글은
감사합니다....라는 글은 달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문제에 대한 난이도, 자료 등에 대한 느낌이나
개인적인 문제풀이 접근법 등을 달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유의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댓글 단 분은 등업 안됩니다.
댓글 노하우도 참 도움이 되네요. 이 카페 좀더 일찍 알았더라면...ㅠ
이거 언제 왜우나 ㅠ
한국인이라면 한국사!
박은식 신채호 많이 헷갈려는데 조금씩 감이 오네요 ^^;;
해설뿐만아니라 관련있는 문제나 개념까지 알려주시네요~ㅎㅎ 덕분에 해결했어요!! 감사합니당~~
대박~!! 입이 쫙 벌어지네요~!!!
어렵게만 느껴지는 한국사인데 도움많이 받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