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생 역사학자로 이름은 무함마드 깐수(Muhammad Kansu). 필리핀인 아버지와 레바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 모국어는 아랍어이다. 원래 국적은 필리핀이었으나 7살 때 레바논으로 건너가 현지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1]
1984년 말레이시아 말레이대에서 있던 중 「동아시아에로의 이슬람 문화 전파사」를 주제로 학위논문을 준비하다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한국에 처음 입국했다. 1984년 4월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공부하다가 그해 9월 단국대학교 사학과 박사 과정에 입학해 1989년 9월 <신라와 아랍·이슬람 제국 관계사 연구>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사실 한국과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으로 인연이 있다고는 볼 수 없는 사람이지만, 한국에서 박사 과정을 할 수 있도록 단국대 측에서 배려를 많이 해 주었고 좋은 사람들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눌러앉게 되었다.
동서 문명 교류사와 실크로드학의 권위자로 1990년 단국대 사학과 초빙교수, 1994년에는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서 문화 교류사에 대한 강의를 계속했다. 80년대부터 KBS 3(지금의 EBS) 등의 교양 역사 프로에 고정 자문 위원으로 활약했고 이후 신문에 사설도 게재하고 저술 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국내 문명 교류사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1990년부터는 한국외대 동시통역대학원에도 출강하였다. 그러면서도 매우 연구를 열심히 해서, 항상 밤 늦게까지 연구실에 남아 공부하였다. 논문. RISS에 깐수로 검색해보면 꽤 많이 나온다.
워낙 유명한 연구자이다 보니 그의 글이 1991년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도 실렸다. '스승은 제자가 자신의 업적을 능가했을 때 보람을 느낀다'는 내용의 수필이다.
아랍어, 필리핀어, 한국어, 영어 외에도 불어, 독일어, 일본어, 한문까지 구사할 정도로 어학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한국어를 처음 배운 게 1984년 연세대 어학당에서였는데 불과 5년 만에 박사 학위를 취득할 정도로 한국어를 잘 했다. 말투가 어눌해서 외국인 티를 숨길 수는 없지만 그건 당연한 거고...
매주 금요일[2]마다 기도를 드리는 등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였고[3], 레바논과 한국이 축구경기를 할 때는 늘 레바논을 응원했으며, 미국과 이라크가 전쟁을 할 때에는 미국에 비판적인 글을 신문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학생들에 따르면 깐수 교수는 "된장국까지 좋아할 정도로 한국을 사랑하시는 사람"이라고 다들 생각했다고 한다. 아내와는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아랍어 통역을 하다가 만난 인연으로 1988년 11월 결혼했는데, 당시 깐수는 42세, 아내는 26세였으며 아내는 서울시내 종합병원 간호사로 재직하던 사람이었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다.
1992년 인터뷰에서 귀화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그는 『내가 귀화하면 「20세기 처용」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며 크게 웃었다.
그를 처음 만난 한국인은 그의 완벽한 한국어 구사와 거침없는 매너에 그가 외국인임을 눈치채지 못하기 십상이다. 콧수염을 기르기는 했지만 한국 남성의 평균신장과 몸무게를 벗어나지 않는 그의 체구와. 「튀지않는」 피부색, 평범한 의상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는 못한다. 게다가 고향을 충청도쯤으로 짐작케 하는 구수한 말투와 소탈한 웃음은 그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이유들이다.
1992년 중앙일보
성품도 선량한 사람으로, 사학과 석사 과정 대학원생은 "성격이 밝고 쾌활해 학생들에게 인기있는 외국인 선생님이었다"고 평하였다. 이웃들은 "자상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교수"라고 평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체는 중국 조선족 2세 출신의 북한 간첩 '정수일' (鄭守一)이었다.
기존에 알려진 이름, 나이, 국적, 종교, 출신지, 경력, 모국어, 구사 가능한 외국어, 학력, 기혼 여부 및 자녀 유무까지 모두 거짓이었다.
1934년 11월 12일 (85세) 중국 지린성 옌지(길림성 연길)에서 중국 조선족 2세로 태어나고 자랐다. 중국 조선족 최초의 고급중학인 연길고급중학(현 룡정고급중학)에 입학해서 역시 조선족 학교 졸업생으로는 최초로 베이징대학 아랍어과에 입학했다. 수석으로 졸업한 이후에는 중국 정부 국비장학생 1호가 되어 1955년~1958년 이집트 카이로 대학교 아랍어문학과에서 공부했다. 1958년에서 1963년 사이에는 주 모로코 중공 대사관에서 2등 서기관[5]으로 활동했다.[6]
모로코 국왕과 중국 고위직 사이의 통역을 맡았던 사진도 남아 있다. 엘리트 코스였고, 그 스스로도 그대로 살아간다면 부와 명예를 동시에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1963년 6월에 북한 국적으로 귀화하게 되었다. 당초 중국 내 소수민족 차별에 실망하여 귀화했다고 알려졌으나, 본인은 2018년 신간 문명의 요람 아프리카 가출판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민족주의를 자각한 뒤에 조국 통일에 기여하고자 내린 결심이었다고 밝혔다.# 본인은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토종 조선인이었던 부모의 영향으로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중국 외무부장 천이 (1901-1972)와 대판 싸우고도 북한으로의 귀화를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에 끝내 총리 저우언라이에게 편지로 탄원해서 북한 국적으로 귀화한다. 문화대혁명을 피해 북한으로 도망갔던 조선족들은 대부분 종파 분자로 몰려서 숙청당했는데, 정수일은 저우언라이가 공식 발급한 허가증을 받고 귀화한 덕분에 이후 살벌한 숙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때 저우언라이도 정수일과 같은 엘리트 인재가 떠나는 게 아까워서 직접 여성을 소개해 줄 테니 결혼해서 중국에 남아달라고 권유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북한으로 가게 된다. 쉽게 비유하자면 소수민족 출신 일개 5급 공무원이 본국으로 가기 위해 자진 사표를 냈는데 외교부 장관이 거절하는 바람에 격하게 싸우고, 국무총리가 편지를 보내어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직해서 귀화한 셈이라는 점에서 이 사람이 얼마나 비범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북한으로 귀화한 후 1974년까지 평양 국제관계대학 교수와 평양외국어대 동방학부 아랍어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아랍어과 학과장까지 맡았다. 정수일은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 회의를 품어 넘어온 북한에서 자신을 일개 어학 교수로 대접하며 매주 1, 2일씩 막노동을 강요하고 매주 25시간, 강의 외의 아랍어 방송으로 자신을 혹사시키는 것에 힘들어 했으며, 심지어 평형감각을 상실하는 귀의 미로염(전정신경염)을 앓았다고 한다. 1963년 9월 8일자 로동신문에는 아랍 대표단 방북 시 김일성의 통역을 맡는 사진이 보도되기도 했다.
평양외국어대 아랍어 교수로 재직하던 중 정수일 교수의 해박한 언어 구사 능력과 이국적인 느낌의 외모[7]에 관심을 가진 조선로동당에 의해서, 1974년 9월부터 4년 5개월에 걸쳐 간첩 교육을 받으면서 남파 간첩으로 변신하게 된다.
1979년 1월 공작금 1만 달러를 가지고 "레바논 국적을 취득해 남한에 잠입해 주요 정세정보를 수집하라"라는 지령을 받았고 '이철수'라는 이름으로 평양을 출발하여 당시 전쟁으로 국내 사정이 혼란스러운 레바논 베이루트로 향했다. 친북단체인 '레바논 조선친선협회'와 북한 대사관의 도움으로, 1979년 11월 '무함마드 깐수'[8]란 이름으로 레바논 국적을 취득했다.
하지만 레바논 국적으로는 남한에서의 활동이 힘들다는 판단 하에 튀니지에 입국해 튀니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사회 경제 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기회를 모색하였다. 튀니지는 호적관계법이 잘 정비되어 있어 국적을 취득하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말레이 대학 이슬람 아카데미 강사(1982.7)를 거치는 등 호주, 파푸아뉴기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국적 취득 기회를 모색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1983년 4월 필리핀에 입국, 1984년 2월에 필리핀 아버지와 레바논 어머니 사이의 아들인 '무하마드 깐수'로 국적을 세탁해 한국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1984년 연세대 어학당에 들어와서 한국어를 배운 것도 당연히 전혀 배울 필요 없는데 위장을 위해서 배우는 척 한 것이다.
사실 더 일찍 잡힐 수도 있었다. 1984년 5월에 방을 구할 때 한국의 화폐 단위를 원화가 아닌 구 화폐 "환"으로 착각하여 용산구 한남동의 복덕방 주인에게 의심을 샀고, 은연 중에도 북한 사투리가 강하고 연락처가 없다는 점에서 위화감을 느낀 복덕방 주인이 신고를 했으나 국내 이슬람 지도자들이 신원 보증을 해줘서 풀려났다. 이 사실은 수사 기록에도 남지 않은 채 오랫 동안 잊혀졌고, '깐수'가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본 복덕방 주인은 그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고 한다.
1984년 6월부터 단파라디오[9]를 이용해 1996년 7월까지 161차례에 걸쳐 북한의 지령을 수신했다. 한국에 와 있는 동안 상부에서는 구체적인 첩보 활동을 요구했고, 그는 월간 잡지에 나온 '신상옥 · 최은희의 최근 소재지', '클린턴의 방한', '남조선 학생 운동권의 최근 동향'[10], '최신형 전차 생산 및 첨단 첩보기 도입' 같은 기사들을 편집, 분석하여 중국 베이징 시와 선양으로 보냈다. 1987년 2월부터 1995년까지 4차례 밀입북하여 김일성 부자 충성 맹세문과 "조국 통일상"을 수상하고, 단파수신기, 암호표, 독약앰풀, 공작금 19,000달러 등을 받기도 했다. 흔히 생각하는 첩보 방식과 비교하면 원시적인 행위였지만, 어쨌든 이 방법은 굉장히 안전했다. 1996년 2월까지는 암호 편지를 이용해 약 75회 정보를 보냈고 안기부에서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겉으로는 영어로 쓴 편지지이지만, 뒷면에 특수 잉크로 정보 보고문이 작성되어 있었다. 이 잉크는 작성 뒤 20분 정도 지나면 육안으로 절대 확인할 수 없으며, 특수 약품 처리를 해야 글씨가 나타난다.
그러다 1996년 3월부터 팩스로 전송 수단을 바꾸는 바람에 잡혔다. 1996년 3월 안기부는 도청을 통해 '서울 시내 특급 호텔 비즈니스센터 팩스'를 통해 남한의 군사정치정보가 외국으로 전송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팩스의 수신지는 북경 주재 북한대사관이었다.
그래서 안기부는 시내 각 호텔 근처에 CCTV를 설치해 감시했고, 그 결과 아랍계로 보이는 사람이 비즈니스센터를 이용해 특정시간대에 북경으로 팩스를 전송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안기부는 몽타주를 만들어 시내 각 호텔에 돌리면서 신고를 부탁했고, 결국 1996년 7월 호텔에서 팩스를 발송하려고 시도하던 중 호텔직원 김모 양(26)이 팩스 고장을 가장해 전송을 지연시키면서 간첩신고를 해서 그를 체포하게 된 것이다.
훗날 재판 과정에서 공개된 바에 따르면 첩보 내용만 보면 북쪽에서 도움이 될 만한 가치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판결문에도 그런 점이 반영되어 구형인 사형에서 12년형으로 선고되었다. 사실 그가 보낸 잡지나 신문 기사 따위는 정보분석자의 손을 거쳐 유용한 정보로 사용할 수 있으나, 그런 것들은 일본 혹은 제3국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획득은 어렵지 않아서 북한한테는 있으나 마나한 정보원이었다. 인간 정보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아무래도 대학 교수보다는 군 간부나 고위 공무원 같은 사람들이 훨씬 유용하다.
그의 위장이 철저하다 보니 아내조차도 정수일이 검거되기 전까지는 그가 간첩인 줄 전혀 몰랐는데, 잠꼬대도 아랍어로 했다고 한다.[11] 그리고 철저히 정치적 발언을 입에 담지 않았으며, 가끔 가다 무슬림들의 생활방식을 따르는 코스프레까지 하는 등 정말 철저했다. 또한, 교수로 활동할 당시 학생들의 말에 의하면 한국과 아랍권 국가가 축구경기를 할 때면 늘 아랍국가를 응원했다고. 교수 임용을 할 때도 신원조회 절차가 있었지만 워낙 치밀하게 위장해놔서 걸리지 않았다. 이슬람 사원에서 수많은 아랍인을 만났을 텐데도 들키지 않았다.
심지어 남한에서 한 결혼이 초혼도 아니었고 북한에 아내와 세 딸이 있었다. "간첩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이 알고 있었나?"라는 질문에 북한의 조강지처 이야기부터 먼저 꺼냈다. 당시 정수일이 62세로, 아내 박광숙(61, 당시 평양 모란봉극장 안무지도자), 장녀 정미란(33, 김일성종합대학 프랑스과 졸업 후 당시 평양시당 선전국 홍보원), 차녀 정달미(31, 김일성종합대학 문학과 졸업 후 중앙통신사 기자), 삼녀 정소나(30, 평양무역대 졸업 후 당시 무역회사 근무) 가족이 북한에 있었다.
처음에는 무하마드 깐수라고 극구 주장하다가 안기부 수사관이 서류상 고향인 필리핀 민다나오 섬 사투리를 물어보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후 그가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판단한 듯 자백하기 시작했다.
서류상 국적이 필리핀이었으므로 정수일은 국제법 상 국외추방을 요구할 수 있었다. 처음에 그가 수감된 곳도 구치소가 아니라 출입국 관리법과 관세법 위반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출국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자기의 국적은 분명히 '북조선'임을 밝혔다. 체포되었을 당시에는 약간 어수룩한 한국어를 쓰던 외국인으로 행세 중이었는데, 체포된 이후부터는 취조부터 재판까지 아주 멀쩡한 한국어를 구사해서 간첩혐의를 수사하던 담당자들을 놀라게 했다. 결국 재판에서는 사형을 구형받았다.
체포 당시 그는 방대한 자료와 주석을 붙인 《동방교역사(가제)》[12]의 원고 마지막 부분을 정리하던 상태였는데, 검사는 그를 취조하던 도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형이 구형(求刑)된 후 선고 전날, 검사가 압수당한 원고가 저장된 컴퓨터를 가져다 주어, 검사실에서 몇 시간동안 정리하도록 배려해주었다고 한다.
그가 전향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북한의 아내가 받을 고통을 생각해서였다. 남한에서 만난 후처에게도 '나를 잊어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뜻 밖에도 후처는 매달 2번씩 면회를 오면서 편지를 계속 교환했다. 둘의 부부관계는 투옥 이후 새롭게 시작된 것과 다름없었으며 그녀의 지극한 옥바라지에 흔들렸다고 한다. 결국 1996년 11월 전향서를 제출했다.
초기에는 사형이 구형되었다. 그러나 변호인단은 물론 재판부도 그의 사연과 그 동안의 연구 성과, 전향 의사, 그리고 조사 결과 '언론 보도 사실만 북측에 전달했기 때문에 국가 기밀 탐지 혐의가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여 최종적으로는 징역 12년형이 선고되었다.# 이후 2000년 광복절 특사로 4년 만에 출소한 후 2003년에 특별사면 및 복권을 거쳐 학계로 돌아왔다.
체포된 뒤 단국대에서도 극심한 혼란이 있었다. 정수일이 구속되는 바람에 학부와 대학원에 개설된 강좌가 폐강되는 등. 제자 대학원생들이 법정에 방청하러 왔는데, 정수일은 그들을 보고 담당 교수로서의 죄책감에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한다.[13] 단국대 대학원에서는 그의 박사학위를 취소해버렸는데, 무함마드 깐수라는 위장신분으로서 받은 학위였고 시대가 그런 시대였으니 불가피한 처사였다 해도 학문을 평생의 업으로 하여 살아온 뼛속까지 학자인 정수일에겐 가슴아픈 일이었음을 본인은 후일 회고했다.[14]
어학에 대해서도 '한국어 외 6개 언어' (아랍어, 필리핀어, 한국어, 영어, 불어, 독일어, 일본어)는 간첩 활동을 위한 거짓말이었다. 실제로는 조선어-한국어를 제외하면 총 11개 언어[15]를 구사했다. 그러나 러시아어, 중국어 등은 당시 한국의 적국이었으므로 의심을 살까 봐 숨겼다. 그가 옥중 서신으로 밝힌 외국어 습득은 다음과 같다.
번호 | 언어 | 비고 |
2 | 일본어 | 어릴 때부터 시작. (당시 만주국 시절) 수감 중에도 일본 서적을 읽음. |
3 | 중국어 | 고등학교 때 시작. 중국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고위직 통역을 담당할 정도. |
4 | 러시아어 | 고등학교에서 배우고, 대학 교재 원서로 또 배우고 북한 학계에서 러시아어 원전이 보편적이다 보니 연구를 위해 더 배움. |
5 | 영어 | 대학에서 시작. 이집트 유학 중 공용어여서 계속 배움. |
6 | 아랍어 | 전공. 10년간 현지에서 살았고 남북한 모두 대학 교수로서 강의.[16] |
7 | 독일어 | 카이로 대학 유학 시절 아랍어 고전을 연구하다 보니 필요해서 '어느 정도' 익힘. |
8 | 프랑스어 | 중국 외교관으로 구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 모로코 등) 체류 시 업무 목적으로 반드시 필요해서. |
9 | 스페인어 | 중국 외교관으로 모로코 체류 시 스페인[17]과 접할 기회가 많아 취미로 배움. |
10 | 페르시아어 | 이란인과 자주 어울리다 보니 웬만한 대화 가능. |
11 | 마인어 | 말레이시아 대학 교수 재직 시. |
12 | 필리핀어 | 필리핀 국적 취득 목적. |
첫댓글 한국에 간첩이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4.15 부정선거를 봐도 간첩이 핸 짖이고 초불시위 때도 거의가 중국의 유학생과 조선족이 동참해서
인산인해를 이른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ㄷㄷㄷ
"1988년 11월 결혼했는데, 당시 깐수는 42세, 아내는 26세였으며 아내는 서울시내 종합병원 간호사로 재직하던 사람이었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다. 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34년생이니 당시 54세, 아내가 26세면...나이 차이가 무려 28살차이네요..
@벽돌과자 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