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4일 (금) 촬영,
하얀 채송화.
삼각지 역 12번 출입구
바로 옆에 전쟁기념관 정문이 있습니다.
형제의 상.
내부입니다.
모임 시간보다 일찍 나와서
주변을 돌아보았습니다.
이 작품, '분수대 원형에 새겨진 얼굴상'은 전쟁기념관을 방문한 관람객들을 촬영하여 조각한 작품이랍니다. 2003년 3월, 청동, 작가 김한철.
전쟁기념관 앞 분수.
수련.
전쟁기념관 본관
하.... 크긴 크다.
광개토대왕릉비 복제품.
*현재 비의 위치 -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높이 - 6.39m, * 4면에 1,770여 글자가 새겨져 있음.
*비의 모형은 실물과 같은 크기이며, 1992년에 설치하였음. *비문의 번역은 2005년에 관련 학자의 자문을 받아 이루어졌음.
414년 고구려의 19대 왕인 광개토대왕(374~413, 재위 391~413)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들 장수왕(394~491, 재위 413~491)이
세운 비이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에 세워진 것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비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비문에는 고구려 건국설화 등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대왕의 업적 등이 적혀 있다.
광개토대왕이 한반도에 침입한 왜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1면 9행의 신묘년조(辛卯年條)는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잘못 해석되기도 하였다.
이 비는 자료가 부족한 한국 고대사의 비밀을 밝히는 열쇠가 되는 유물로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특히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잘못된 것임을 역사적으로 증명해 주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 현지 설명문 -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마스코트.
B- 52D 폭격기(스트라토포트레스) /길이 x 폭 x 높이. 47.7m x 56.4m x 14.7m. 중량 83.250kg
미국 보잉(Boeing) 사가 핵 폭격기로 개발해 1955년에 배치된 장거리 아음속(음속 이하) 제트 전략 폭격기이다.
이후 기체를 개조해 108발의 재래식 폭탄을 탑재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융단 폭격이 가능해졌다. 특히 베트남전쟁 당시 라인베이커 II
작전에서는 1만 5,000여 톤의 폭탄을 투하하였고, 후방의 50구경 4연장 기관총으로 MiG-21 2대를 격추시키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B-52는 A~H형(8종)으로 구분되며, 총 744대가 생산되었다.
A~F형은 2013년까지 모두 퇴역했지만, H형은 1961년부터 생산된 102대 중 현재 70여 대가 여전히 운용되고 있다.
참수리 357호 정 재현품( 진품은 평택 기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오늘 강연하실 분이 2002년 6월 30일 연평도 NLL(북방한계선)을 넘은 북한 경비정으로부터 집중 사격을 당해 중상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당시 참수리호의 부정장이었던 현 보훈부 차관인 이희완 님입니다.
당시 정장인 윤영하 소령을 비롯해 6명이 전사하셨는데, 보상금 얼마나 받으셨는지 알고 계시나요.
법적 근거 미비를 이유로 전사와 순직을 구분하지 않고 단순히 공무상 사망자 사망보상금으로 일괄 적용 월 보수액의 36배만 지급했다고
합니다. 박동혁 병장은 약 3,000만 원, 윤영하 소령은 약 6,500만 원을 보상받았다는데, 적당했던 건가요.
희생자의 장례식 날 대통령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과 함께 축구를 보며 박수를 치고 웃고 있었는데, 지금처럼 탄핵하자는 국민도 없었습니다.
교전 수칙에 먼저 총 쏘지 말라고 해서 침범하는 걸 알면서도 총도 못 쏘고 .....
전쟁기념관 안에서 모였습니다.
권오돈 회장님이 오늘 특별히 해설을 해주실 선생님을 소개했습니다.
신무일 선생님.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의 남침 모의 "이들이 무력남침을 결정했다!!"
1949년부터 김일성은 소련의 최고지도자인 스탈린에게 남한 침략을 승인해 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미국과의 충돌을 원치 않았던 스탈린은 남한이 먼저 공격해 올 경우에만 반격할 수 있다고 김일성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소련의 원폭 실험 성공, 중국 대륙의 공산화 등 국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스탈린도 입장을 바꾸었고,
1950년 3월 말부터 한 달간 김일성과의 3차례 회담을 통해 남침 전쟁을 승인하였다.
스탈린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 중국 공산당 주석인 마오쩌둥의 동의를 받도록 조건을 달았다.
1950년 5월 13일 마오쩌둥을 방문한 김일성은 스탈린과 합의한 내용을 보고하고 협력을 요청하였다.
마오쩌둥은 앞서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소련과 북한의 지원을 받은 바 있었기 때문에 동의하고 미군이 참전할 경우 지원을 약속하였다.
M-72 모터사이클.
1941년 소련에서 독일의 BMW R71을 카피하여 개발한 군용 오토바이로 사이드카(Side Car)라는 1인용 보조좌석을 부착해
기관총을 거치하여 지휘, 정찰, 연락 등의 임무에 사용하였다. 동부 산악지역에서는 고속 기동부대로서 운용되었다.
82mm 박격포
미군의 81mm 박격포를 모방한 소련제 박격포.
포신에 강선(鋼線)이 없으며, 포 받침이 원형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자체 포탄은 물론 미군의 81mm 박격포 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37mm 고사포 M -1939
1939년 소련에서 생산한 대공포로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도입하여 사용하였다. 가벼운 4륜 포가(砲架)에 설치되어 있고,
원추형 소염기(消焰機)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공군 지원에 대비해 대공방어용으로 지원되었다.
포탄을 안고 적진에 뛰어든 육탄 10용사
송악산 전투는 1949년 5월 3일 북한군이 송악산의 국군 진지를 기습해 점령하면서 발생하였다.
개성 북쪽에 위치한 송악산은 개성을 지키기 위해 절대 잃어선 안될 곳이었다. 국군은 진지를 되찾기 위해 반격했으나
북한군의 기관총 사격으로 더 이상 공격할 수 없었다. 이에 서부덕 이등상사 등 10명이 특공대로 지원하여
81mm 박격포탄을 안고 직접 북한군의 기관총 진지에 돌진해 자폭하였고, 국군은 진지를 되찾을 수 있었다.
정부는 산화한 10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려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소위 서부덕, 전남 광산군 출신. 상사 박창근, 전남 완도군 출신, 상사 윤승원, 경기도 화성군 출신, 상사 윤옥춘, 충남 홍성군 출신.
상사 황금재, 전북 익산시 출신. 상사 오제룡, 전북 전주시 출신. 상사 이희복, 경기도 화성군 출신. 상사 김종해, 경기도 화성군 출신.
상사 양용순, 함북 경원군 출신. 상사 박평서, 전남 나주군 출신.
좌로부터
심일,沈鎰 소령 (1923. 6.5~1951. 1.26)
함남 단천 출생, 육사 제8기로 임관. 1950년 6월 25일 제6사단 7연대 대전차포 소대장으로서 춘천 전투 시 적 탱크형 자주포에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육탄으로 공격하여 2대를 격파함으로써 적을 지연시켰으며 다음 해 1월 영월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계급 특진과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김용배,金龍培 준장(1921.4.17~1951,7.2)
경북 문경 출생, 육사 제5기로 임관. 1950년 6월 제6사단 7연대 대대장으로 춘천 전투 및 음성 전투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여 지연작전을
성공시켰다. 1951년 제7사단 연대장으로서 군량리(軍糧里)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계급 특진과 함께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김풍익,金豊益 중령(1921.8.6~1950.6.26)
충남 예산 출생. 육사 특7기로 임관. 1950년 6월 26일 포병대 대장으로서 의정부 전투에서 구형의 105미리 곡사포 부대를 진두지휘하였다.
적의 정예 제2사단 T-34 전차를 직접 조준사격으로 격파, 지연작전에 크게 기여하였지만 적 전차포의 집중사격에 6번 포대 포병들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장세풍,蔣世豊 중령(1922.10.16~1950.6.26)
황해 송화 출생. 육사 제5기로 임관. 1950년 6월 26일 포병 포대장으로서 제2교도대대 대대장 김풍익의 휘하에서 의정부 전투를 맞았다.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105미리 곡사포를 근거리에서 직접 겨냥하여 격파하다가 적 전차의 포탄에 맞아 현장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피난 가는 사람들.
북한군의 공격으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다.
북한군은 서울을 1차 목표로 개성 - 김포, 개성 - 문산, 동두천, 포천 - 의정부, 춘천, 홍천 - 수원 등 4개 방향에서 공격해 왔다.
김포비행장과 서울의 주요 시설에 대한 폭격도 감행하였다.
군 수뇌부는 급히 후방의 사단들을 출동시키는 등 모든 병력을 동원해 서울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투기와 T-34 전차 등 최신 무기를 앞세운 북한군의 집중 공격에 서울 북쪽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말았다.
동해안에서 북한군은 양양, 강릉 방향에 대한 공격과 해상을 통한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북한군의 해상침투 부대 일부가 부산으로 향하였으나,
대한 해협에서 국군의 백두산함에 의해 침몰됨으로써 후방이 위협받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백두산함 3인치 함포.
백두산함에 장착했던 장비와 같은 종류의 함포. 1949년 10월 최초로 백두산함을 구입했을 때는 무장이 없었으므로 3개월의 항해를 거쳐
1950년 1월 하와이로 이동한 뒤 육군용의 3인치 주포와 포탄 100발을 구입하여 장착하였다.
백두산함의 승무원들은 열악한 재정 문제로 인해 개전 전까지 실탄 사격훈련은 거의 하지 못하였으나, 대한 해협 전투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적선에 접근해 포격전을 벌인 결과 북한군 무장 수송선을 격침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백두산함 (PC - 701)
해군 장병의 성금과 정부의 지원금 6만 달러를 모아 1949년 10월 미국에서 구입한 450톤 급 초계정으로 한국 최초의 전투함이다.
대한해협 전투를 시작으로 서해안 봉쇄작전, 인천상륙작전 등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1959년 7월에 퇴역하였다.
백두산호 아래의 선박은 북한군의 무장 수송선입니다.
무장수송선을 격침시켜 부산항을 지켜낸 해군의 활약.
북한 해군은 개전 당일 무장병력을 부산에 상륙시켜 국군을 배후에서 위협하고, 차후 있을 미군의 지원을 차단하려 하였다.
그러나 한국 해군의 유일한 전함 백두산함이 대한 해협에서 600명의 병력이 승선한 북한 수송선을 격침시킴으로써
부산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다. 한국 해군은 옥계, 삼척에 상륙을 시도하는 적의 선단도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옹진반도의 제17연대를 철수시키고, 한국은행에서 보관 중이던 금괴와 은괴를 수송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M16A1 반궤도 장갑차.
미국이 대공 고사포를 운용하기 위해 개발한 차량. 앞쪽은 바퀴로, 뒤쪽은 궤도로 되어 있어 일반 도로에서는 궤도 차량보다 빠르고,
야지에서는 일반 차량보다 돌파 능력이 뛰어나다. 6,25전쟁 시 미군 고사포 부대에서 운용하였으며,
국군은 1954년 미군으로부터 인수하였다.
피로 물든 낙동강, 후퇴는 곧 죽음이다.
낙동강 방어선은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총 연장 길이 240km 구간을 미군 3개 사단이, 왜관-영덕까지 120km 구간을
국군 5개 사단이 담당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연결된 방어선을 구축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북한군을 막아내게 되었다.
북한군은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14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그리하여 8월 5일부터 진행된 낙동강 방어전투에서는 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국가의 운명을 건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북한군은 최후 발악으로 9월 공세를 감행하여, 영산, 다부동, 영천, 안강, 포항까지 점령하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은 우세한 공군력과 지상화력으로 북한군의 8월 공세와 9월 공세를 막아내면서 낙동강 교두보를 확보하고,
전세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낙동강 방어전투는 군인, 경찰, 학생, 노무자, 여성들도 참전한 국민 총력전이었다.
"전쟁과 여교사, 지상군 최초의 승전보, 동락리 전투"
1950년 7월 6일 북한군이 충북 음성군을 점령했을 때, 미처 피난 가지 못한 19세의 김재옥 선생이 동락 초등학교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국군이 멀리 후퇴했다고 적을 안심시킨 뒤, 이 사실을 국군에게 알리기 위하여 몰래 학교를 빠져나왔다.
국군의 행방을 찾아 험한 산을 넘은 그녀는 644고지를 방어하러 가던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제2대대와 마주쳤다.
그녀는 북한군의 수와 배치상황을 낱낱이 알려 주었고, 제2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다음날 동락 초등학교에서 무질서하게 쉬고 있던
북한군을 기습 공격하여 2천여 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결과, 제7연대는 부대 전체가 1계급 특진하는 영예를 얻었고,
이러한 사연은 훗날 '전장과 여교사'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어머님!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十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저는 二 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저의 고막을 찢어 놓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제 귓속은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님!
괴뢰군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사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님!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저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디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엎디어 이 글을 씁니다.
괴뢰군은 지금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저희들 앞에 도사리고 있는 괴뢰군 수는 너무나 많습니다. 저희들은 겨우 七一 명뿐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 조금은 믐이 진정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님!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이!'하고 부르며 어머님 품에 덜썩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제 손으로 빨아 입었습니다.
비눗 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한 가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어머님이 빨아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제가 빨아 입은 그다지 청결하지 못한 내복의 의미를 말입니다.
그런데 어머님, 저는 그 내복을 갈아입으면서 왜 수의를 문득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어머님!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저희들을 살려두고 그냥은 물러갈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님, 죽음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랑 형제들도 다시 한번 못 만나고 죽을 생각을 하니, 죽음이 약간 두렵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 왜 제가 죽습니까
제가 아니고 제 좌우에 엎디어 있는 학우가 제 대신 죽고 저만 살아가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천주님은 저희 어린 학도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어머님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웬일인지 문득 상추쌈을 개검스럽게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옹달샘의 이가 시리도록 차거운 냉수를 벌컥벌컥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어머님!
놈들이 다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뿔사 안녕이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이따가 또 ...........
1950년 8월 10일 아들 이우근
이 글을 쓴 이우근 학도병은 다음날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하였습니다.
포항여중을 지킨 71명의 학도병.
수도사단장 김석원 준장을 존경하던 학생들을 전쟁이 벌어지자 자발적으로 수도사단에 들어가 학도병 중대로 참전하였다.
김석원 준장이 제3사단장으로 전임되자 그들도 제3사단으로 향하였다.
학도병들이 사단 후방 지휘소가 있는 포항여중에 도착한 것은 8월 9일 무렵이었다. 당시 제3사단은 포위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8월 11일 북한군이 포항여중을 공격하자, 학도병들은 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포항여중에 남았다.
치열한 교전 끝에 포항여중은 결국 북한군에 점령당하였고,
71명의 학도병 중 47명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으로 사단과 포항 시민들은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인천상륙작전.
맥아더 장군은 6월 29일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였다.
인천항은 서울에 인접해 있어 그 중요성이 매우 컸으나, 수로가 좁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여 대규모 함대의 이동이 어려운 조건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를 들어 미 합동참모본부와 극동 해군은 작전을 반대했으나,
맥아더 장군은 전략적, 심리적, 정치적인 이유로 서울을 단시일 내 탈환하기 위해서 인천에 상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합동참모본부는 8월 28일 인천상륙작전인 <크로마이트 작전 계획>을 승인하였다.
9월 12일부터 적을 교란하고 고립시키기 위해 인천과 주요 항구에 폭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7만 5천 명의 상륙 병력을 탑승시킨 261척의 함정이 부산항 및 일본을 출발하였다.
9월 14일 밤 모든 함대가 인천 외항에 집결하였고, 9월 15일 새벽 2시 팔미도 등대가 밝혀지면서 드디어 상륙작전이 결행되었다.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이 일으킨 전쟁.
1949년부터 김일성은 소련의 최고지도자인 스탈린에게 남한 침략을 승인해 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다.
미국과의 충돌을 원치 않았던 스탈린은 남한이 먼저 공격해올 경우에만 반격할 수 있다고 김일성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소련의 원폭 실험 성공, 중국 대륙의 공산화 등 국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스탈린도 입장을 바꾸었고,
1950년 3월 말부터 한 달간 김일성과의 3차례 회담을 통해 남침전쟁을 승인하였다.
스탈린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 중국 공산당 주석인 마오쩌둥의 동의를 받도록 조건을 달았다.
이에 따라 1950년 5월 13일 마오쩌둥을 방문한 김일성은 스탈린과 합의한 내용을 보고하고 협력을 요청했다.
마오쩌둥은 앞서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소련과 북한의 지원을 받은 바 있었기 때문에 결국 동의하고 미군이 참전할 경우 지원을 약속하였다.
스탈린
우리가 핵 개발에 성공하여 미국 내에서는 한국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고,
중국공산당이 승리하여 한국문제에 보다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남침을 적극 추진하기 바란다.
전쟁은 반드시 전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한국군이 제정신 차릴 틈을 절대 허용해선 안 된다.
김일성
남한 측이 수용할 수 없는 '평화통일 방안'을 제의하고 이를 거부하면 전투행위를 개시하여 누가 최초로 전투행동을 시작했는지 진실을
은폐하도록 하겠다. 참고로 우리가 남침하여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 20만 지하당원이 봉기에 참여할 것이다.
"스탈린 동지가 남침에 동의하면서, 최종 결정은 모택동 동지와 협의를 통해 하라고 했다.
마오쩌둥
"조선의 통일은 평화로운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전쟁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작은 영토를 위해
미국은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만약 미군이 참전하면 우리가 지원하겠다."
평양 입성 환영대회 / 작가 신종섭.
1950년 10월 19일 국군이 평양을 탈환한 후 같은 달 30일 평양 시청에서는 이승만 대통령과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 입성 환영대회가 열렸다. 이 작품은 당시 촬영한 사진을 토대로 제작되었다.
통일을 향해 우리는 전진한다. 국군의 38선 돌파.
국군 제3보병사단 제23연대(연대장 김종순 대령)는 국군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하라!"는 명령에 따라
1950년 10월 1일에 최초로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기사문리에서 38도선을 돌파하였다.
이는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을 시작한 지 15일 만이었고, 북한군이 불법 남침한지 97일 만이었다.
압록강 물을 담아온 수통.
중공군의 인해전술.
백마고지 육탄 3용사.
1952년 10월 12일 국군 제9사단 30연대 1대대 1중대 소대장 강승우 중위는 오규봉, 안영권 하사와 함께
중공군의 기관총 진지에 돌진하여 수류탄으로 이를 폭파시키고 산화함으로써
중부전선의 주요 고지인 백마고지를 탈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포병 활동
6,25전쟁 당시 국군 포병부대의 105mm 곡사포 사격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6,25전쟁 발발 당시 북한군은 각종 야포 728문을 보유한데 반해 국군은 105mm 곡사포 91문밖에 보유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면서 국군 보병사단에 105mm 곡사포 3개 대대로 증편되어 막강한 화력을 지원하였다.
무적해병, 無敵海兵 / 도솔산 전투에서 승리한 해병대를 시찰한 이승만 대통령이 하사한 휘호.
신무일 선생님의 특별 해설에 감사를 표하는 권오돈 회장님.
함께해 주신 분들입니다.
도솔산 전투 / 작가 이재호
1951년 6월 해병 제1연대는 북한군 제12사단 및 제32사단이 점령 중이었던 강원도 양구군 칠정리의 도솔산을 혈전 끝에 탈환하였다.
이 전투로 해병 제1연대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무적해병'이라는 휘호를 받았다.
평양 대폭격 작전.
국군과 유엔군은 휴전회담의 조기 타결을 위해 1952년 8월 29일 평양시에 대규모 폭격 작전을 감행하였다.
이 작전에 공군의 F-51D 전투기 36대가 참여하여 평양의 공장지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창도리 보급품 집적소 폭파 작전 / 작가 정재성.
공군은 1951년 10월 11일 최초로 단독 출격 작전을 시작하였다. 이때 F-51D 전투기 편대가 북한군의 주요 도로, 철도, 고사포 진지 등을
파괴하고 철원군 창도리 지역의 보급품 집적소를 폭격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351고지 공군 지원 작전 / 작가 박영식, 기증 예비역 공군 소장 윤응렬
강원도 고성 남쪽 351고지를 지키던 육군 제15사단을 휴전까지 항공지원한 작전이다.
특히 1953년 3월 26일 작전에서는 고지에 접근한 적을 직접 격퇴하여 참여한 조종사들에게 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전쟁기념관 관람을 대충 끝내고 강의에 참석하러 가는 길입니다.
호국추모실.
작성자 : 칠복이
첫댓글 광개토대왕릉비 복제품은 여러 곳에
설치 되어 있는가 봅니다
정성으로 올려 주신 전쟁기념관 견문록
감사히 즐감합니다~~
재밌게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