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색 입고있어 오해하기 쉬운데 미통당^^이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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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김미애(52·金美愛) 변호사 휴대전화에 장문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보낸 사람은 자유한국당 김세연 의원(부산시당위원장). 김 변호사는 보좌관을 통해 '만나자'던 김 의원 제안을 한 차례 거절한 상황이었다. 김 의원은 직접 문자를 보내 "식사가 안 되면, 차라도 한잔 마시자"고 요구했다. 둘의 만남은 성사됐고, 이 자리에서 김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당이 위기입니다. 나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할아버지의 기업,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시민들이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변호사님처럼 스스로 일어선 분이 정치하셔서 우리 당을 바꿔야 합니다."
김 의원은 왜 그런 문자를 보낸 것이었을까. 일찌감치 고아가 된 소녀. 17세에는 부산 방직공장에서 밤새 실타래를 돌렸던 여공(女工). '짝퉁' 스카프를 팔고 초밥집에서 툭하면 칼에 손을 베이던 20대 시절. 뒤늦게 들어간 야간대학. 5년여간의 사시 준비. 762건의 국선변호를 맡았던 변호사. 결혼한 적 없고, 한 번도 자신의 배 아파 낳은 아이도 없지만, 지금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 김 변호사의 이력서다.
1년 전, 그녀는 아이 셋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엄마가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선거에 나갈 거다. 대한민국을 위해 일할 거야." 아이들 반응은 저마다 달랐다. 당시 19세이던 첫째(작은언니의 아들)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초등학교 6학년 둘째(큰언니의 딸)는 "이모 같은 사람이 정치하는 게 맞아. 근데 이모가 선거에 떨어질까 봐 걱정돼", 직접 입양한 막내인 초등학교 2학년 딸은 "엄마 좋아. 그래도 꼭 나와 놀아줘야 해"라고 했다.
미래통합당 공천을 받아 21대 총선(부산 해운대을)에 나선 '싱글맘' 김미애는 53%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그가 통합당보다는 민주당 후보로 더 어울린다고 했다. 20일, 부산 해운대에서 김 당선자를 만났다.
43세에 아이 셋 키운 싱글맘
인터뷰가 있던 날 아침, 김 당선인은 초등 3학년이 된 막내딸을 깨워 노트북 앞에 앉혔다. 이날은 아이가 온라인으로 등교하는 첫날. 겨우 아이를 앉혀 놓고 당선 인사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는데, 딸에게서 계속 전화가 왔다. '엄마, 안 돼, 모르겠어….'
김 당선인은 방 네 개짜리 아파트에서 아이 셋과 함께 산다. 이날 전화를 건 막내는 2011년 입양해 자신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올렸다. 첫째는 작은 언니의 아들. 막내를 입양한 그해, 언니가 백혈병을 얻어 사망할 무렵 그는 조카의 미성년후견인이 돼 집으로 데려왔다. 처음이 아니었다. 그 3년 전인 2008년 12월에는 큰 언니가 남편의 사망 등 으로 우울증에 걸리자 19개월이던 언니의 딸을 데려와 키웠다(둘째). 세 아이의 성(姓)은 각각 '위' '안' '김'으로 다르지만, 엄마의 이름은 하나다. 김미애다.
―선거 내내 아이들을 등장시키지 않았다.
"아이들의 현재 모습을 공개한 적이 없다. 뒤통수나, 마스크 쓴 모습만 살짝 보였을 뿐이다. 몇 년 전에 KBS '인간극장'에서 우리 가족을 찍고 싶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물론 난 괜찮다. 아이들도 텔레비전에 나가는 거 좋아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직 미성년자라서 진정한 의사라고 보기 어렵다."
―언니들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이도 입양했다.
"엄마가 15세에 돌아가셨다. 20세까지는 엄마가 무덤에서 살아나는 꿈을 꿀 정도로 보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하지 못하면 입양해서라도 아이를 키우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다. 사람들이 나보고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내가 입양 안 했으면, 행복하게 살았을까. 대한민국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모두 가정에서 자라게 해야 한다. 그 어떤 좋은 시설도 엄마·아빠를 대체할 수 없다. 막내에게도 입양을 말해줬다. 내가 너무 원했고, 최고의 선물로 주신 게 너라고. 그래서 지(제)가 최고의 선물인 줄 안다."
―결혼해서 직접 아이를 낳아도 됐을 텐데(웃음).
"나를 좋아하는 남자도 몇 있었다(웃음). 그런데 그분들은 그냥 나를 좋아했던 거지, 내 아이들을 좋아하고, 내가 추구하는 삶을 같이 공유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거 같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태석 신부 같은 사람이다. 남수단의 신발을 신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직접 발을 그려 신발을 만들어주신 그 마음을 사랑한다."
여공에서 초밥집 사장이 되다
"여러분 제가 이곳에 35년 만에 섰습니다. 학교 다닐 버스비도 없었던 17세 김미애가 살기 위해 찾아온 공장입니다."
지난 2일, 김 당선인은 부산 해운대구 반여동에 있는 태광산업 공장 앞에 유세 차량을 세우고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 이날은 21대 총선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어머니를 잃은 소녀 김미애는 1985년 고향 포항을 떠나 부산으로 왔다. 방직공장에 취직해 '공순이'라 놀림당하던 소녀는 35년 후 바로 그곳에서 선거 출정식을 가졌다.
―그때의 소감은.
"꿈 같았다. 그리고 감사했다. 열일곱 살 당시는 정말 우울했다. 당연히 이런 상황은 상상 못 했다."
―어릴 적 삶은 어땠나.
"부모님 고향은 제주인데, 아버지가 배 사업을 하러 포항으로 가셨다. 그런데 사업이 망했다. 차비가 없고, 도시락을 못 싸 굶을 정도로 가난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는 해녀로 생계를 책임지던 엄마가 말기 암 진단을 받았다. 늘 방에 누워 계셨다. 제발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엄마를 리어카에 태우고 30분 거리에서 있는 교회로 갔다. 15세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그가 스무살 즈음 세상을 떠났다.
―1970년대보다는 여성 청소년의 공장 취직이 줄던 시절인데.
"친한 친구 가운데 중학교 졸업 후 부산에 있는 공장에 취업한 애가 있었다. 그 친구가 하루는 주말을 맞아 고향 집에 왔다. 1985년 5월 비가 오는 날, 그 친구를 따라 부산으로 갔다. 당시 부산·경남 공장에는 일자리를 찾아 취업한 친구가 많았다. 기숙사에는 수백 명의 또래 여학생이 있었다. 한 방에는 7~8명 정도가 함께 살았다. 일렬로 누우면 방에 빈틈이 없었다. 근무는 오전(오전 6시~오후 2시), 오후(오후 2~10시), 야간(오후 10시~다음 날 오전 6시) 3교대로 진행됐다. 나는 실이 끊어지면 다시 실을 잇는 작업을 했다. 실타래를 꽂으면 빠르게 회전하기 때문에 새벽에 졸면 곧바로 손이 날아갈 수 있는 작업이었다."
―공장 나와서는 초밥집을 열었다.
"어른이 되면 좋은 일을 하면서 대학도 다니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스무 살이 돼도 그런 삶이 펼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공장을 관두고 일본어를 배웠다. 당시 부산에는 일본인 관광객이 많았다. 이들을 상대로 짝퉁 핸드백이나 스카프를 파는 잡화점에서 일했다. 한 달에 50만원을 벌었는데, 방세·교통비 등을 빼고 25만원가량을 저축했다. 그렇게 3년 만에 1000만원을 모았다. 이후 폼나는 식당을 차리자는 생각에 초밥집을 하게 됐다."
―초밥집은 잘됐나.
"1994년부터 2년간 정말 열심히 살았다. 내가 주방장, 설거지·청소, 계산대 보는 것까지 혼자 다했다. 아침 7시에 장보고 자정에 문을 닫았다. 한겨울에도 맛을 유지하기 위해 찬물로 초밥을 만들었다. 아직도 손가락에 칼에 벤 자국이 있다. 그렇게 살았더니 손님들이 감동하더라. 돈은 참 잘 벌렸는데, 공허함도 컸다."
―공허라니.
"당시 일반 음식점은 자정까지밖에 영업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자정쯤이 돼서 가게 문을 닫아야 했다. 그 시각 늘 오시던 단골손님 한 분이 밥을 먹고 있었다. 그분이 먹던 음식을 마저 먹고 가겠다고 했다. 나는 가게 문을 닫기 위해 청소를 했고, 그분은 그대로 밥을 먹고 있었다. 그러다 구청 위생과 공무원으로부터 단속을 당했다. 그러더니 자기가 불러주는 대로 종이에 적으라고 하더라. '언제, 남자 손님 한 명이 소주 한 병, 안주 하나 먹고 있었다'는 식이었다. 사실 자체는 맞으니까 그대로 썼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자백하는 일종의 진술서였다. 정말 억울했다. 이중·삼중으로 문 닫은 척 영업하는 유흥업소는 단속 안 하고, 힘없는 할머니나 나처럼 어려운 사람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단속한 것이다. 결국 그 일로 영업정지 1개월을 먹었고, 가게 문을 닫았다. 그런데 10년 후, 변호사가 돼 공적인 자리에 지원하기 위해 범죄경력조회서를 뗀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일로 내가 벌금 30만원을 받은 것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때 경험이 변호사나 정치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나중에 변호사 돼서 내가 부산시 행정심판위원을 했다. 저 사람이 왜 저랬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건의 이면(裏面)을 보려고 애를 썼고, 생계형은 많이 감경(減輕)해 주려고 노력했다."
아이·여성 돌보는 변호사로 변신
1995년 그렇게 초밥집을 접은 후, 이듬해 김미애는 다시 수능 공부를 해서 동아대 법대(야간)에 입학했다.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 이후 5년간 사법시험 준비. 2002년에 합격했다. 그 5년이 가장 행복했다고 했다.
―대학에 들어가 다시 공부를 하게 된 계기는.
"공장 다니고, 초밥집 하면서 세상의 부조리를 봤다. 그래서 변호사를 하자고 생각했다. 대학에 들어가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그 공부할 때가 정말 행복했다. 어릴 적 그렇게 공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돈도 없었고, 도와주는 사람 한 명이 없었다. 그런데 대학 들어가서 공부만 열심히 했더니 모든 게 다 되더라. 공부 열심히 했더니 학교에서 장학금을 줬고, 고시반 입실 시험에 합격하니까 기숙사 방을 주더라. 월세를 아낄 수 있게 된 거다. 거기에 밥도 세끼를 다 줬다. '세상에 이런 데가 어디 있느냐'고 생각했다. 내가 공부한 동아대 도서관은 천국 같은 곳이었다. 구석진 창가에 내가 고정적으로 맡아 놓은 자리가 있었다. 매일 새벽 5시 30분에 앉으면 물소리와 새소리가 들렸다. 맑은 정신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그 고마움 때문에 나는 쓰레기가 보이면 주워 담았고, 칠판도 닦았고, 기숙사 세면장 창문에 붙어 있던 선팅지(햇빛을 막아주는 종이)가 떨어지면 직접 내 돈으로 사서 바르고 그랬다. 변호사가 된 후에 2006년부터 지금까지 모교에 장학금 1억원을 냈다."
―변호사가 된 후에는.
"나는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사람은 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와 관련된 활동을 많이 했다. 소년분류심사원에서 늦게까지 소년범 아이들을 접견했다. 아이들과 말을 좀 더하고 싶은데 접견 시간 다 됐다고 빨리 안 가느냐고 해서 싸운 적도 많았다. 지금도 아이들에 대한 접견 시스템이 어른하고 비교하면 너무나 초라하다. 가난한 소년·여성 등의 변호를 포함해 국선변호만 762건을 하게 됐다."
"왜 그 당에 들어갔느냐" 가장 고통스러워
―삶의 궤적이 보수 정당과는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
"내가 선거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도대체 왜 그 당에 가느냐'는 말을 들을 때였다. 심지어 우리 당에 있는 사람조차도 그렇게 얘기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당에는 어떤 사람들이 들어와야 한다는 것인가. 웰빙하고, 많이 배우고, 부자에 화려한 스펙을 가진 사람이 와야 박수 칠 건가. 나는 당의 강령과 당헌을 모두 읽어봤다. 이 당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어떤 점이 맞았나.
"나는 보수의 가치를 신뢰하고, 자유를 존중한다. 물론 평등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 하지만 열심히 일해서 꿈을 이루고 싶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주는 게 맞는다.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나보고 구질구질하게 살라 하면 나는 못 산다. 열심히 살아서 내가 잘살고, 그걸로 어려운 사람 돕자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데 그들(진보 진영) 가운데 일부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 대해 존중하지 않더라. 뭐하러 그렇게 치열하게 사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명품을 좋아하면서, 아닌 척하는 사람을 봤다. 또 자사고나 특목고 반대하면서 자기 아이들은 거기 보내고, 또 미국 유학도 보낸다. 최강욱 당선인 봐라. 일제 차 렉서스 탄다는데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러면서 자신만 옳은 척 대중을 선동한다. 그런 식으로 사는 게 역겨웠다. 나처럼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이 부자로 살고 싶은 것은 자유다. 박수받을 일이지,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이번에 보수 정당은 왜 참패했나.
"공감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국민은 함께 울어주고, 넘어지면 손잡아서 일으켜 주는 정치를 원하는데, 우리 당의 모습은 폼잡고, 의전 좋아하는 것으로 비쳤다. 1년간 선거 준비하면서 봉사활동을 많이 했는데, 그때 참 힘든 게 있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봉사하기를 원했다. 산불이 났던 운봉산에 직접 올라가서 잔불 정리를 했다. 급식 봉사 가서 식판 나르고, 설거지했다. 그런데 일부는 '별나게 하지 마라'고 하더라. 쓰레기 주우러 가면 열심히 쓰레기 줍는 거 말고, 사람들 쳐다보고 인사하고 하라고 했다. 봉사하러 가서 실제로 열심히 하는 게 별난 거였다. 전부가 그런 건 아니지만 이런 모습이 많았다."
―대한민국에서 사다리가 끊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선거운동 막판, 저녁 시간에 카페나 음식점을 찾아 젊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내 이력을 적힌 명함을 내밀고,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20대를 만나 보니 10명 가운데 9명은 내 말에 공감했다. '정말 힘들 때 꼭 전화하라'고 했다. 20대는 우리 당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좀 더 열심히 이들을 만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들에게 공평한 세상을 만드는 정치를 하겠다. 국회에 들어가면, 로스쿨을 가지 않고도 변호사가 될 수 있도록 '예비시험(일종의 사법시험)'을 도입하는 법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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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수가 나쁘다고 했냐긔, 미통당은 보수가 아니라 수꼴, 친일, 반공 , 극우잖아요...
넘나 그쪽에서 먹힐 스토리 가지고 있어서 소드님들도 같이 아시면 좋을 것 같아 가져왔긔.
조선이니 클릭 안하셔두 되긔~~
https://news.v.daum.net/v/20200425030231144
첫댓글 보수 좋아하네 ㅋㅋㅋㅋ당강령 ㅋㅋ1도 안지키는데 무슨
과거와 행동은 ㅋㅋㅋ안보냐그ㅏ
그 고생하셨던 노력을 폄하하고 싶진 않지만 가치에 대한 개념정립은 미흡하신거 같긔. 미통이 그 존재하지도 않는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는다고 자유를 소중히하는 당이냐긔 ㅋ 리버럴이 왜 리버럴인데요. 저런 면은 무식하네긔. 한마디로 진보입네 하면서 돈밝히고 잘사는거 꼴베기 싫고 다 도덕적이지 않으면서 도덕적인척 하는게 재수 없어서 똥통에 뛰어드셨단건데 네, 뭐 존중은 하겠지만 즈언혀 공감은 안되네긔. ㅋ 뭔가 올드한 정치관을 갖고 있는거같긔. 삶의 태도는 진보적이신거 같은데 왜그러실까.
진보가 옳고 보수는 그르다, 혹은 그 반대, 이게 아니라 그냥 미통당 짓거리 그 자체를 봐야되는데 그게 안되시는거 같긔. 박그네 좋아하는데 이거저거 주저리 주저리하는거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222222 2020년 마인드 같지가 않긔. 삶은 치열하게 살아오셨는데.. 딱 나는 이렇게해서 성공했는데, 넌 해보기나 해봤어? 묘하게 이런 느낌이 나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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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개천용인거랑 올바른가치관이랑은 전혀 다른얘기긔. 고개를들어 이명박을 보라!!! ㅋㅋㅋ
말만 번지르르 수구꼴통당 들어가면 세종대왕도 안뽑는다긔ㅋ
말은 저렇게 하는데 옷은 이니블루네욬ㅋㅋㅋㅋㅋㅋㅋㅋ 웃기긔 ㅋㅋ 정치혐오 심한 거 같은데 권력욕이 있어서 미통당 들어간걸까여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하네욤
삭제된 댓글 입니다.
22 내가 해봐서 아는데~~~ 이러는거요
33333 주변에 많긔 자수성가하고 나서 부자의 노력에 대한 존중이 없다며.... 자수 성가도 운이 좋고 돈이 아니라도 다른 걸 많이 가져야 한다는 걸 모르는 것 같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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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이명박마인드긔 너네도 노력하면 성공할수 있어 더 노력해봐~이런 마인드여
77 주변에 많이 봤긔. 개천용들이 더 문제긔. 왜 열심히 살아서 성공한 사람들의 몫을 나눠줘야하냐고 생각하더라긔. 진짜 단편적인 사고방식이긔. 철학적 사고의 결핍이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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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오신 삶은 존경스러운데 미통당을 택한 이유가 허허
저분 심정을 이해는 하긔. 실지로 정치적으로는 방향이 같은데 삶 속에서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도 많이 봤었고, 정치적으로 방향이 다른데 저를 보듬어 준 사람도 많더라긔. 저 역시도 내가 민주당을 지지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한다고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는 점은 경계해야한다고 생각했었긔. 저는 대부분은 그저 차선책을 선택했을 뿐이긔. 다행히 민주당 대통령 세분이 대단하신거구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잘 안 믿긔. 진짜 차선책일 뿐이긔. 저분은 아쉽게도 역사관이나 철학이 부족했던거는 같긔. 하지만 부자로 잘살고 싶다란 속물적 욕망을 솔직한 드러낸 점은 진짜 저 당이 욕망을 숨길 생각을 안하는구나 싶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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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읽으면서 도대체 왜 미통당 갔을까 싶었는데 그 당과 맞았다니;;; 롸 ㅋㅋㅋㅋ
어쨋든 미통당 ㅋ
당헌이 맞다시면 뭐 그런 사람인거겠긔
인상보니 미통당이넴 얼굴에 여유가 없긔
저런사고방식이 굉장히 위험하긔. 저분이 열심히 살아온 삶, 노력이나 성과를 부정하는건 아니긔. 다만 그 과정에서 사회를어떻게 보느냐의 관점의 문제긔. 내가 이렇게 노력해서 성공햇으니 남들도 노력하면되는 사회를 만들어주자 기회를 주자 이게 정치인이라면 가져야하는 생각인데,
저분은 노력하면 다 되는데 왜안해? 니가 못한건 니가 열심히 안해사야 혹은 노력한사람만이 잘사는게 맞고 그 노력의 대가는 인정해줘야지. 진보가말하는 모두에게 복지, 평등 이런건 허울뿐인거야 노력안하는사람을 위한변명이지 라고하면서 종부세 자사고 특목고 이런거 찬성하면 답없어지긔. 개인의 삶은 존경받으실만 하지만 정치인으로는 아닌거같긔
열심히 살아서 내가 잘살고, 그걸로 어려운 사람 돕자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데 그들(진보 진영) 가운데 일부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 대해 존중하지 않더라. 뭐하러 그렇게 치열하게 사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명품을 좋아하면서, 아닌 척하는 사람을 봤다. 또 자사고나 특목고 반대하면서 자기 아이들은 거기 보내고, 또 미국 유학도 보낸다. 최강욱 당선인 봐라. 일제 차 렉서스 탄다는데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러면서 자신만 옳은 척 대중을 선동한다. —-> 곡해 자가당착이긔. 더민주에서도 열심히 살았으니 누려라고 하긔. 그리고 렉서스 탄다면서 본인민 옳은척한다는 것도 본인 생각 아니긔?
미통당이 보수긔?극좌파 빨갱이 아니냐긔
보수가 아닌데 보수를 찾아 미통당 ㅋㅋㅋ 네 ㅋㅋㅋ 저런 인물이 위험한거같긔 자수성가한 성공한 여성 나는 다 했다 왜 너희는 열심히 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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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휴 울동네긔ㅜㅜ2년전엔 왠일로 정신차렸나싶더니...예
ㅋㅋ 이분.. 어쩌다가 업무적으로 엮였는데 진짜 할말많은데 돈없어서 참긔..
아이쿠. 정치 성향은 달라도 좀 올바른 인간일까 했는데 기대 와장창이긔. 역시 괜히 미통당이 아니네긔.
말이랑 행동이 다른느낌이긔.....
저희 지역구인데 신혼부부랑 애기 많은데 굳이 와서 노래랑 마이크 볼륨 키워가지고 사람들 다 깨우고 선거유세하더라긔. 배려없는 느낌 너무 받아서 저 사람은 안뽑히겠다 했는데 문제는 부산이었던것.....
핑크당 당헌 당규 읽어보면 좋겠죠 당연히. 박근혜 공약은 심지어 민주당, 정의당이랑 비슷한 거 투성이었는데요. 평생 생활전선을 뛰고 현장을 경험해 본 분이, 핑크당의 발자취와 악마적 역사를 보면서도 글로 쓰인 몇줄 보고 나랑 잘 맞다고 입당하는 게 이해가 안 되긔
저런 인생의 이력을 가진 사람이 결국 선택한게 미통당이면 그 사람자체가 뒤틀리고 악에 바친것 같긔...정상적 사고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스탈은 아닌듯요..그냥 자기 열등감을 이겨내려고 아득바득 했을뿐 그 과정중에 성찰은 없었을것 같긔
싸이월드 명언글로 많이 돌던 mcm 회장 김성주때 보던 느낌이네요 ㅋㅋㅋ
2222 어딘가 봤을 듯한 언플 ㅎㅎㅎ
근데 왜 그러고 살긔ㅎ
보수의 가치 ㅋㅋㅋ웃고 갑니다..
당헌 당규만 보고 당의 역사 해온것들은 흐린눈 한거냐긔. 그냥 성공하고 싶었고 기득권 되고 싶었다고 하면 솔직하기라도 하죠.
풉....ㅋㅋㅋㅋ 그러고 간 곳이 미통당이라니 ㅋㅋㅋㅋ
힘들게 살아와서 미통당이라...... 거기까지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