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오릉 종합안내도
동구릉에 이어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조선왕릉군인
고양 서오릉에 관한
안내문
고양 서오릉(高陽 西五陵)
조선시대 왕가의 무덤. 1970년 5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크기 : 면적 1,829,792㎡
1970년 5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龍頭洞)에 있다. 서오릉은 풍수적(風水的)인 길지(吉地)에 왕실의 족분(族墳)을 이룬 것인데, 경릉(敬陵)·창릉(昌陵)·익릉(翼陵)·명릉(明陵)·홍릉(弘陵)의 5능을 일컫는다. 이곳에는 5능 외에 명종(明宗)의 첫째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순창원(順昌園)이 있고, 숙종(肅宗)의 후궁 장희빈(張禧嬪)의 대빈묘(大嬪墓)가 이장되어 있으며,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소유 영빈 이씨의 묘소인 수경원(綏慶園)도 1969년 연세대학교 교정에서 서오릉으로 천장되었다.
⑴ 경릉:세조(世祖)의 세자 장(璋:德宗)과 그 비(妃)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의 능이다. 능제(陵制)는 좌측이 왕, 우측이 비의 동원이강식(同原異岡式)으로 왕우비좌(王右妃左)의 일반 상례와 반대되고 있다. 이는 왕비가 생전에 덕종의 추존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기에 능제도 왕릉 형식을 갖추었으나, 왕은 당초 세자로 돌아갔으므로 세자묘대로 두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덕종(德宗)
조선 세조의 아들이며 성종의 아버지. 자 원명(原明). 초명 숭(崇). 이름 장(暲). 성종(成宗)의 아버지. 비(妃)는 좌의정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이다. 1445년(세종 27) 도원군(桃源君)에 봉해지고, 1455년(세조 1)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하기 전에 20세의 나이로 죽었다. 능은 고양에 있는 경릉(敬陵)이며, 1471년(성종 2)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昭惠王后)
조선 성종의 어머니이다. 부녀자의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하여 편찬한《여훈(女訓)》을 남겨 조선시대 남존여비 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출생-사망 : 1437 ~ 1504
본관 : 청주(淸州)
주요저서 : 《여훈(女訓)》
본관 청주(淸州)이며 성은 한(韓)씨이다. 부친은 조선 초 명나라를 배경으로 막강한 세도가였던 한확(韓確:1403~1456)이다. 남편은 세조의 째 아들 덕종이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1455년(세조1)에 남편이 세자로 책봉되고 한씨는 수빈(粹嬪)으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1457년(세조3)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자 시동생인 예종이 즉위했다. 예종 또한 즉위 1년 2개월 만에 죽자 자신의 아들 성종이 즉위하여 실권을 장악하였다. 1471년(성종 2)에 세자로 죽은 남편 덕종은 왕으로 추존되고 자신은 인수왕비에 진책(進冊)되었다.
불교를 독실히 믿었으며, 불경에 조예가 깊어 범(梵) ·한(漢) ·국(國) 3자체(三字體)로 쓴 불경과 부녀자의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하여 편찬한 《여훈(女訓)》을 남겼는데 그 내용은 아내는 남편을 하늘로 떠받들어 공경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이후 조선시대의 남존여비 사상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아들 성종이 여색을 탐하기가 심해 왕비 윤씨와 갈등을 빚자 윤씨를 폐비시켜 사사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을 아들 성종과 함께 주도하였다. 성종이 죽고 즉위한 손자 연산군이 생모 윤비(尹妃)가 모함 당하여 폐위 ·사사(賜死)된 사실을 알고 이를 보복하니 병상에 있던 대비 소혜왕후가 크게 꾸짖자 연산군은 머리로 대비를 들이받았으며 얼마 후 소혜왕후는 숨을 거뒀다. 소생으로는 성종 ·월산대군(月山大君) ·명숙공주(明淑公主)가 있었으며, 능은 경릉(敬陵)이다.
⑵ 창릉:덕종의 아우인 예종(睿宗)과 그 계비(繼妃)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의 능이다. 왕릉·왕비릉이 동원이강식을 이루고 있고, 그 석물(石物) 배치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전통적인 예에 따르고 있으며, 석물의 양식상 특이한 것이 있다면 고석(鼓石)의 무늬와 석난간 대석주 주두양식(石欄干 大石柱 柱頭樣式)이다.
예종(睿宗)
조선 제8대 왕(재위 1468∼1469)으로 재위 13개월 만에 죽었다. 재위 중 직전수조법(職田收租法)을 제정하여 둔전(屯田)의 민경(民耕)을 허락하였다.
출생-사망 : 1450 ~ 1469
재위기간 : 1468년~1469년
가족관계 : 왕비 장순왕후(章順王后), 안순왕후(安順王后), 아버지 세조(世祖), 어머니 정희왕후(貞熹王后),
휘(諱) 황(晄). 자 명조(明照:初字 平南). 시호 양도(襄悼). 1450년(세종 32년) 수양대군(세조)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다가 첫째아들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사망하자 1457년(세조 3)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468년에 즉위하였으나 재위 13개월 만에 사망했다. 첫번째 부인으로 한명회의 딸인 한씨를 맞이했으나 첫 원자를 출산하고 사망했으며, 얼마후 원자마저 사망하였다. 둘째부인으로 한백륜(韓伯倫)의 딸을 둘째부인(안순왕후 安順王后)으로 맞이하였다.
재위 중 직전수조법(職田收租法)을 제정하여 둔전(屯田)의 민경(民耕)을 허락하였다. 또한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무관이자 병조판서였던 남이(南怡)를 겸사복장으로 강등시키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단행했다. 하지만 남이와 강순(康純) 등이 연루된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이들을 처형하였고 이를 남이의 옥사(獄事)라 불렀다. 그외 민수(閔粹)의 사옥(史獄) 등이 있다. 예종은 비록 어린 나이에 등극하였지만 법치주의에 입각한 강력한 왕권을 만들고자 매우 엄격한 통치를 지향했으며 선왕의 치적에 힘입은 훈구파 세력과 대립하여 개혁정책을 펼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런 그의 의도는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를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견제를 받았으며 더구나 모친인 정희왕후 마저 예종을 지지하지 않았다. 원손으로 제안대군을 두었으나 어린나이 때문에 예종을 이어 왕위에 오르지 못했고 의경세자의 아들 자을산군(성종)이 보위에 올랐다. 갑작스러운 예종의 죽음을 두고 훈구파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능은 경기 고양시 덕양구에 소재하는 창릉(昌陵)이다.
안순왕후(安順王后)
조선 제8대 왕 예종의 계비이다. 세자빈이 죽은 후 소훈의 내명부 직품을 받고 세자를 섬기다가 1468년 예종이 즉위한 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471년 인혜대비에 봉해졌고, 1497년에 명의대비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 제안대군과 현숙공주가 있다.
출생-사망 : 1445? ~ 1498
본관 : 청주(淸州)
별칭 : 인혜대비(仁惠大妃), 명의대비(明懿大妃)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시호는 안순(安順)이다. 청주부원군 한백륜(韓伯倫)의 딸이다. 원래는 한명회(韓明澮)의 딸이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1461년(세조 7) 죽었으므로, 동궁에 간택되어 들어가 소훈(昭訓)의 내명부 직품을 받고 세자를 섬겼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이듬해 예종이 병사하자 25세의 나이로 청상이 되었다.
1471년(성종 2) 인혜대비(仁惠大妃)에 봉해졌다. 조정 정치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를 감쌌다. 1497년(연산군 3)에 명의대비(明懿大妃)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 제안대군(齊安大君)과 현숙공주(顯肅公主)가 있다.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龍頭洞) 서오릉(西五陵)에 있는 창릉(昌陵)에 예종과 함께 안장되었다.
⑶ 익릉:숙종왕비(肅宗王妃)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의 능이다. 능제(陵制)는 기본적으로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르면서 부분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좇고 있다. 능표(陵表)는 송시열(宋時烈)이 찬(撰)했고 심익현(沈益顯)이 글씨를 썼다.
인경왕후(仁敬王后)
조선 제19대 숙종의 비. 1671년 세자빈에 책봉되고, 1674년 숙종의 즉위와 함께 왕비에 진봉되었다. 두 딸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고 인경왕후도 천연두에 걸려 일찍 사망했다.
출생-사망 : 1661 ~ 1680
본관 : 광산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성은 김씨(金氏)이다. 광성부원군(光成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로 출생하였다. 1671년(현종 12)에 숙종의 세자빈에 책봉되고, 1674년 숙종의 즉위와 함께 왕비에 진봉되었다. 두 딸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고 인경왕후도 20세에 천연두가 발병하여 일찍 사망하였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내 익릉(翼陵)이다. 1713년(숙종 39) 광렬(光烈), 1722년(경종 2) 효장명현(孝莊明顯), 1753년(영조 29) 선목(宣穆), 1776년 혜성(惠聖)의 존호가 각각 추상(追上)되었다.
⑷ 명릉:숙종(肅宗)과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의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분(雙墳)으로 조영(造營)되고 인원왕후 능이 우측에 있어 좌측이 숙종의 능과 동원이강의 배치로 된 형식이다. 명릉은 조선의 능제상(陵制上)에 한 시기를 이루었으니 즉 그 제도는 《속오례의 산릉의(續五禮儀山陵儀)》의 골자가 되었고 조선 후기 치장(治葬)의 근간이 된 《상례보편 산릉의(喪禮補編山陵儀)》의 기초를 이루었다.
숙종(肅宗)
조선 제19대 왕. 대동법을 전국에 실시하여 실효를 거두었으며 임진왜란 · 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토지사업을 추진해 완결을 보았다. 주전을 본격적으로 실시해 상평통보를 주조, 중앙관청 및 지방관청 등에 통용하도록 했다. 영토 회복 운동을 전개했고 금위영을 추가로 설치하여 5영체제를 완결했다.
출생-사망 : 1661 ~ 1720
재위기간 : 1674년 ~ 1720년
본관 : 전주
본명 : 이순(李焞)
가족관계 : 왕비 인경왕후(仁敬王后), 인현왕후(仁顯王后), 인원왕후(仁元王后), 아버지 현종(顯宗), 어머니 명성왕후(明聖王后),
자 명보(明譜), 휘 순(焞), 현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이며 비는 김만기(金萬基)의 딸 인경왕후(仁敬王后)이다. 계비는 민유중(閔維重)의 딸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계비는 김주신(金柱臣)의 딸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1667년(현종 8)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14세 때 조선왕조 19대 임금에 즉위하였다. 인경왕후 김씨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고, 희빈 장씨에게선 두 아들을 두었다. 또한 숙빈 최씨에게서는 세명의 아들을 두었고 명빈 박씨에게서는 1명의 아들(연령군)을 두었다.
즉위한 이듬해 북방의 참략에 대비하기 위해 개성 천마산에 폐허로 남아있는 고려시대 산성인 대흥산성(大興山城)을 다시 축성하여 완성하였고 용강(龍岡)의 황룡산성(黃龍山城)을 재수축하였다. 인조 때 일어났던 병자호란과 같은 혼란을 막기위해 국방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강화도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49곳에 돈대를 쌓았다. 또한 청나라를 의식한 일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산성도 수축(숙종 38년)도 결행하였는데 국방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숙종의 치적으로 평가된다. 또한 군제를 개편하여 금위영(禁衛營)을 창설하여 5군영 체제를 갖추었지만 이는 외척과 서인 세력의 집권 안정화를 위한 정치적 목적이었고 실질적인 조선 군사력 강화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숙종이 집권한 당시 조선의 조정은 예론(禮論)에 치우쳐 논쟁이 분분하였고, 당쟁이 심하여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파쟁이 극심하였다. 1680년 역모사건이 일어나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경신환국)하였으며 이때 기호학파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두고 서인 남인은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세력이 치명상을 입고 실각하자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다시 분파하여 당쟁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의 영향력으로 정계는 경직되었고 주희의 사상을 맹신하지 않는 사상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 숙종은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대립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나라를 병들게 한다고 개탄하였지만 당쟁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숙종은 첫번째 왕비인 인경왕후가 사망하고 둘째 왕비인 인현왕후를 맞았지만 아들을 얻지 못했다. 궁녀 출신인 숙원(淑媛) 장씨(張氏:장희빈)를 총애하여 1688년 소의(昭儀)로 승격시켰으며, 이듬해 장씨에게서 왕자 이윤(李?)을 낳았다. 왕자가 출생한지 3개월 째 명호(名號)를 정하고자 하였는데 왕자의 명호를 정하게되면 세자로 책봉되는 길이기에 송시열을 위시(爲始)한 서인들이 이를 극렬하게 반대하자 송시열 ·김수항(金壽恒) 등 서인의 실세들에게 유배형을 내렸고 결국 송시열은 이 일로 사사되었다. 숙종의 의지대로 왕자의 명호를 정하였고 숙종 사후 경종(景宗 1688~1724)으로 왕위에 올랐다. 또한 왕비 인현왕후를 투기죄로 폐위하자 이를 반대하는 박태보(朴泰輔)·오두인(吳斗寅) 등을 국문하여 유배형에 처하거나 처형하였고, 희빈(禧嬪)으로 승격된 장씨를 1690년에 왕비로 책봉하였다. 이 일로 서인에게 염증을 느낀 숙종이 서인세력을 대거 실각시키고 남인들이 다시 기용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유교의 성인을 모시는 문묘(文廟)에 종사되어 서인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던 이이와 성혼의 위패가 거두어져 출향(黜享)되었다.
그러나 인현왕후 폐위를 인정하지 않고 폐비복위운동을 꾀하는 서인들의 결집하자 우의정 민암 등이 타도하려고 시도하다 서인들의 역공으로 숙빈 최씨를 독살한다는 모함에 걸려 남인들이 대거 실각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숙종은 장희빈보다 궁녀 최씨를 총애하고 있었다. 1694년 숙종은 남인을 추방하고 다시 서인을 등용시키고(갑술환국) 폐비 민씨를 복위시켰다. 이어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1701년에 장씨가 민씨를 무고(誣告)하였다는 죄로 사사(賜死)하였다. 왕의 재위기간은 조선왕조에서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으나 대외적인 전쟁이 없어 사회가 점차 안정기로 접어든 때였다. 선조 때 제기된 대동법(大同法)을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하여 실효를 거두었으며,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토지사업을 추진하여 완결을 보았다. 말년에는 인조 때 소현세자빈 강씨의 억울한 죽음을 측은하게 여겨 강빈을 신원하여 명예를 회복시켰다.
주전(鑄餞)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여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였으며, 중앙관청 및 지방관청 등에서 통용하도록 하였다. 특히 폐한지(廢閑地)로 버려둔 압록강 주변의 무창(茂昌) ·자성(慈城)의 2진(鎭)을 개척하여 영토회복운동을 전개하였고, 1712년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로 하여금 백두산(白頭山) 정상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게 하여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국왕 호위와 수도 방위를 담당하는 금위영(禁衛營)을 추가로 설치하여 5영체제로 개편하였다. 또 재위기간에 왕실의 족보인《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대명집례(大明集禮)》 등이 간행되었고, 법전인《대전속록(大典續錄)》,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이 편찬되었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에 있는 명릉(明陵)이다.
인현왕후(仁顯王后)
조선 제19대 숙종의 계비. 기사환국 때 폐서인이 되었다가 갑술옥사로 다시 왕후로 복위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궁녀가 쓴 소설《인현왕후전》이 전해진다.
출생-사망 : 1667 ~ 1701
본관 : 여흥
별칭 : 존호 효경숙성장순, 휘호 의열정목
출생지 : 한양
성은 민씨(閔氏)이고,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존호(尊號)는 효경숙성장순(孝敬淑聖莊純), 휘호(徽號)는 의열정목(懿烈貞穆)이다. 형조판서 등을 지낸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딸로서 1681년 숙종의 계비(繼妃)가 되었다. 숙종은 세자로 책봉되고 김만기(金萬基)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숙종이 왕으로 등극하자 김씨는 인경왕후(仁敬王后)가 되었다. 하지만 인경왕후가 천연두로 20세에 사망하자 인현왕후가 숙종 비로 간택되었던 것이며 그녀의 나이 15세였다.
인현왕후 민씨의 집안은 서인으로 당시 조정의 실권은 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숙종은 궁녀 장옥정(張氏;희빈 장씨)을 좋아하여 인현왕후 민씨를 멀리하였다. 당시 장옥정은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에 의해 궁에서 쫓겨나 궐밖에서 살고 있었지만 숙종은 항상 장옥정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장옥정은 서인(西人)과 정치적으로 대립세력이었던 남인(南人)에 속했기 때문에 견제를 받아 후궁으로 머물수가 없었다. 하지만 1683년 명성왕후 김씨가 세상을 뜨자 숙종은 1686년 3년 상을 마치고 장옥정을 다시 궁으로 불러 후궁으로 삼았다. 당시 정치적으로는 서인의 영수이자 숙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던 김석주(金錫胄)가 사망하고 민씨의 아버지 민유중도 세상을 뜨자 8년간 집권했던 서인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숙종 또한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진 서인에 염증을 느끼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인을 등용하였다.
1688년 장씨가 왕자 윤(昀;뒷날의 경종)을 낳자 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왕자 윤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던 서인들은 숙청되기 시작했고 이 문제로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西人)이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인현왕후도 폐위(廢位)되어 궁중에서 쫓겨나 서인(庶人)이 되었다. 1693년 궁녀 출신의 최씨가 숙종의 아이를 잉태하자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도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국정을 운영하는 남인에 대한 실망감도 커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1694년 남인이 주도하는 역모사건이 고변되었고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 서인 소론 세력이 다시 정치적 실세로 등용되었으며 그해 4월 마침내 폐서인되었던 민씨도 왕후로 복위하였다. 1701년 사망하였는데 소생이 없었으며, 능은 경기도 고양(高陽)의 명릉(明陵)이다.
인현왕후를 주인공으로 하여 궁녀가 쓴 소설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이 전하는데, 인현왕후를 유교적 덕목과 인품을 갖춘 여인으로 그려내고 있다. 반면 숙종실록에는 희빈장씨가 왕자 윤을 출산하자 이로 인한 시기와 질투로 숙종과 관계가 멀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원왕후(仁元王后)
조선시대 제19대 왕인 숙종의 계비로, 인현왕후가 죽은 후 왕비로 책봉되었다.
출생-사망 : 1687 ~ 1757
본관 : 경주
조선 제19대 왕인 숙종의 계비. 본관 경주(慶州). 성 김(金). 존호(尊號) 혜순자경(惠順慈敬). 휘호(徽號) 정의장목(定懿章穆). 전호(殿號) 효소(孝昭).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주신(柱臣)의 딸. 인현왕후가 죽은 후 1702년(숙종 28)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소생은 없다.
1720년 숙종이 승하하자 대비가 되었고 경종 재위기간 왕세제였던 연잉군(영조)을 지켜주었다. 1724년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가 되었고, 영조와 며느리 정성왕후의 극진한 효도를 받으며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대립이 극도로 격화될 때는 영조의 정비(正妃) 정성왕후 서씨와 함께 두 사람을 중재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정성왕후가 64세로 승하하고 약 한달 후인 1757년 5월 13일 (음력 3월 26일) 창덕궁 영모당에서 69세로 승하했다. 무덤은 서오릉의 하나인 명릉(明陵)에 숙종, 인현왕후와 함께 묻혀있다. 죽은 뒤 영조가 직접 장문의 〈대왕대비행록:大王大妃行錄〉을 만들기도 했다.
⑸ 홍릉:영조 원비(英祖元妃)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의 능이다. 영조는 왕후의 택조(宅兆)를 정하면서 장차 함께 묻히고자 허석(虛石)의 제도를 쓰고 능상석물(陵上石物)은 쌍릉(雙陵)을 예상하여 배치하여 놓고 있다. 현재 홍릉 우측의 공간은 바로 이것으로 영조의 능이 동구릉(東九陵)에 자리잡게 되자 빈 채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 능은 능상설(陵象設)의 제도와 양식은 기본적으로 명릉(明陵)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 장명등(長明燈)·석망주(石望柱) 등에 독특한 양식의 변화를 보이고 있고 난간석주 주두양식(欄干石柱柱頭樣式)이 특이한 것으로 《속오례의(續五禮儀)》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의 제도가 잘 반영되고 있다.]
정성왕후(貞聖王后)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英祖)의 비(妃).
출생-사망 : 1692 ~ 1757
별칭 : 휘호(徽號) 단목장화(端穆章和)
성은 서씨(徐氏)이며 존호(尊號)는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 휘호(徽號)는 단목장화(端穆章和)이다. 달성부원군 서종제(徐宗悌)의 딸로 1692년(숙종18)에 태어났다. 1704년(숙종 30) 연잉군(延仍君)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達城郡夫人)으로 책봉되었고, 1721년(경종 1) 연잉군이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됨에 따라 세제빈(世弟嬪)이 되었다. 1724년 왕세제 연잉군이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으며 이때 영조의 나이는 31세, 정성왕후의 나이는 33세였다. 정성왕후는 당쟁으로 인해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소생까지 없었으나 후궁 영빈 이씨 소생의 사도세자(思悼世子:장헌세자)를 매우 아꼈다.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의 갈등을 풀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중 병을 얻어 창덕궁 관리각(觀理閣)에서 66세로 사망하였다. 능은 경기도 고양(高陽)시 용두동 서오릉 능역(陵域)의 홍릉(弘陵)이다.
서오릉의 원(園)과 묘(墓)
1. 순창원(順昌園)
서오릉 안에 있는 명종의 장남인 순회세자와 그의 부인 공회빈 윤씨가 안장된 묘소로 서오릉에 있는 묘소 중 수경원과 함께 '원(園)'이라는 칭호를 받은 묘소이다.
순회세자(順懷世子)
출생-사망 : 1551 ~ 1563
자 : 중명
시호 : 순회
본명 : 곤령·부
조선 제13대 왕인 명종의 세자. 자 중명(重明). 이름 곤령(崑齡)·부(순회세자 폰트 이미지 1). 시호 순회(順懷). 1557년(명종 12)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3세로 요절하여 행부호군(行副護軍) 강섬(姜暹)을 주상(主喪)으로 하여 국장을 치르고 경릉(敬陵) 근처에 있는 순창원(順昌園)에 장사를 지냈다.
공회빈윤씨(恭懷嬪尹氏)
조선 제13대 왕 명종의 장자인 순회세자의 세자빈.
출생-사망 : ? ~ 1592
예조판서 윤옥(尹玉)의 딸로 태어나 1559년(명종 14)에 명종의 장자인 순회세자와 가례를 올려 세자빈이 되었다. 순회세자가 1563년(명종 18) 9월 13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한 까닭에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순회세자 사후에 덕빈(德嬪)으로 불리며 30년을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선조 25) 창경궁 통명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적 제198호 서오릉 경내에 있는 순창원(順昌園: 남편인 순회세자와의 합장묘)에 안장되었다.
2. 대빈묘(大嬪墓)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생모인 옥산부대빈 장씨(장희빈)의 묘로, 원래는 경기도 광주군에 있었던 묘소였으나 1969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장되었다. 정비가 아니지만 국왕이 되는 원자를 생산한 후궁은 통상적으로 묘소의 칭호가 '원'이 되어야 하나, 정쟁에 휘말려 사약을 마시고 죽은 희빈 장씨는 본래의 대우를 회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묘'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위치는 경릉 옆쪽 언덕길 올라가는 곳이다. 다른 능과 달리 초라한 모습으로 있는 것도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희빈장씨(禧嬪張氏)
조선 19대 왕 숙종의 빈이며 20대 왕 경종의 생모이다.
출생-사망 : 1659 ~ 1701
본관 : 인동
본명 : 장옥정(張玉貞)
별칭 : 장희빈, 옥산부대빈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이름은 옥정(玉貞)으로 전해진다. 아버지는 역관(譯官) 출신인 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다. 친가와 외가 모두 역관 집안으로 매우 부유한 환경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부인 장응인(張應仁)과 외조부인 윤성립(尹誠立)은 모두 역관으로 벼슬이 정3품과 종4품에 이르렀으며, 당숙인 장현(張炫)은 숙종 때에 역관의 수장인 수역(首譯)을 지냈으며 거부(巨富)로 이름이 높았다.
정확한 시기와 배경은 확인되지 않으나 어린 나이에 나인(內人)으로 뽑혀 입궁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희빈 장씨가 “머리를 따 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와 생활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1680년(숙종 6) 무렵부터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의 총애를 받았으나 숙종의 생모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명으로 궁에서 쫓겨났다. 당시 당숙인 장현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집권한 뒤에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의 심복으로 여겨져 유배되었다.
희빈 장씨는 1683년 명성왕후가 죽은 뒤에야 다시 궁으로 돌아왔으며, 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소의(昭儀)로 승격되었다가 1688년 왕자 윤(昀, 뒷날의 경종)을 낳았고, 이듬해 음력 1월 아들이 원자로 책봉되면서 희빈(禧嬪)이 되었다. 당시 송시열(宋時烈) 등의 서인(西人)은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삼으려는 숙종의 뜻에 반대하다가 정권을 남인(南人)에게 넘겨주었다. 결국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몰락하면서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 민씨가 폐비되고, 희빈 장씨가 1689년(숙종 15) 음력 10월 22일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었고, 희빈 장씨는 그해 음력 4월 12일에 왕후(王后)의 자리에서 쫓겨나 다시 희빈의 작호를 받았다. 그리고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발고로 거처인 취선당(就善堂)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 했다는 혐의를 받아 사사(賜死)되었다. 희빈 장씨는 죽은 뒤에 광주(廣州) 진해촌(眞海村,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 매장되었으나, 1969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西五陵) 경내의 대빈묘(大嬪墓)로 옮겨졌다. 아들인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은 1722년(경종 2) 생모인 희빈 장씨를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하였다.
3. 수경원(綏慶園)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소유 영빈 이씨가 안장된 묘소이다. 원래는 연세대학교 교정에 있었으나, 1969년 서오릉으로 천장했고, 봉분이 있던 자리에는 루스채플이 세워졌다.
영빈 이씨 (暎嬪 李氏)
출생 연도 : 1696년(숙종 22)
사망 연도 : 1764년(영조 40)
본관 : 전의(全義, 지금의 충청남도 연기)
사도세자(思悼世子: 莊獻世子)의 생모이다. 어려서 궁중에 들어가 귀인(貴人)이 되었으며, 1730년(영조 6) 영빈으로 봉해졌다.
영조의 깊은 총애를 받았으며, 4명의 옹주를 낳은 뒤 1735년 원자를 출산하여 후사(後嗣)를 기다리던 영조를 크게 기쁘게 하였다.
1762년 사도세자가 폐위당하는 와중에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1764년에 죽자 영조는 매우 애통해하면서 후궁 제일의 예(禮)로 장례하게 하였고, 이듬해 시호로 의열(義烈)을 추증하면서 친히 선시지례(宣諡之禮)를 행하기도 하였다. 소생으로 사도세자 외에 5명의 옹주가 있었다.
고양 서오릉 관람권
숙종(肅宗)과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의
능인 명릉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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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肅宗)과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의
능인 명릉(明陵)
[정자각에서 바라 보았을 때 우측의 쌍릉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고, 좌측의 단릉이 인원왕후의 능이다.
종합적으로 명릉은 쌍릉과 단릉이 다른 언덕에 위치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같은 능역이지만 각각 다른 능선에 조성한 능)이다.]
명릉의 정자각
명릉 정자각에 있는
진설도와 기신제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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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릉의
(좌로부터)
단릉인 인원왕후의 능, 쌍릉인 숙종의 능, 쌍릉인 인현왕후의 능
[1701년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숙종은 정비 인경왕후의 익릉 옆에 인현왕후의 무덤을 마련하고 그 옆에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마련해 둔다. 그리고 1720년 사망하여 인현왕후 옆에 묻혔다.]
[숙종은 살아생전 총 4명의 왕비를 맞이했다. 그 가운데 장희빈이라 부르는 희빈 장씨는 왕비 자리에 올랐다가 폐위되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3명의 왕비를 두었다. 그리고 이들 4명의 여인들의 무덤은 현재 모두 이 서오릉 내에 존재한다. 정비 인경왕후는 서오릉의 익릉에, 계비인 인현왕후와 인원왕후는 서오릉의 명릉에, 한 때 왕비였던 희빈장씨는 서오릉의 대빈묘에 묻혀 있다.
숙종과 마찬가지로 3명의 왕비를 두었던 중종의 경우 왕과 왕비 3명 모두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에 비하면, 숙종은 복이 많은 남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숙종과 그의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쌍릉과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단릉이 합쳐진
동원이강릉 형태의 능인
명릉(明陵)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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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가 안장된 묘인
수경원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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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의 계급, 능·원·묘
조선 시대 무덤은 무덤 속 주인공의 신분에 따라 능(陵)·원(園)·묘(墓)로 구분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무덤을 말한다. 왕을 생산한 후궁의 무덤도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왕을 낳은 친부모이지만 대원군의 경우는 특이하다. 즉 후일 왕으로 추봉이 되면 능호(陵號)를 사용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묘로 사용한다. 그리고 묘는 능과 원에 해당되지 않는 사대부와 일반 서민의 무덤을 말한다.
능의 형식은 조성 형태에 따라 단릉(單陵)과 쌍릉(雙陵), 삼연릉(三連陵),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같은 능역이지만 각각 다른 능선에 조성한 능), 동원 상하릉(한 언덕에 앞뒤로 왕과 왕비의 능을 조성한 능), 합장릉(合葬陵) 등으로 나뉜다.
건원릉(健元陵 : 태조 이성계의 능), 단종의 장릉, 단종왕비 정순왕후 사릉 등이 대표적인 단릉(單陵)이다.
조선 제3대 왕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인 헌릉(獻陵)은 대표적인 쌍릉(雙陵)이다.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구리동구릉 중 하나인 경릉(景陵)은 조선 제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김씨, 그리고 효정왕후 홍씨의 삼연릉(三連陵)이다. 총 3기의 봉릉이 하나의 언덕에 나란히 배치된 이례적인 사례이다.
남양주에 위치한 조선 7대 왕 세조의 광릉은 하트를 연상시키는 조선 최초의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만들어졌다. 조선 14대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와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인 목릉도 동원이강릉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선조, 가운데 언덕이 의인왕후, 오른쪽 언덕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한 언덕에 앞뒤로 왕과 왕비의 능을 조성한 능)은 조선후기 제20대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의 능인 의릉과 효종(孝宗)과 비(妃)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 : 德水)의 능인 여주 영릉(寧陵)이 대표적이다.
합장릉(合葬陵)으론 최초의 합장릉인 세종대왕의 영릉, 인조의 장릉, 장조(사도세자)의 융릉, 정조의 건릉, 순조의 인릉, 문조(추존)의 수릉, 고종의 홍릉, 순종의 유릉(동봉 삼실의 합장릉) 등을 꼽을 수 있다.
능은 좌향(坐向)을 중요시하는데, 좌(坐)란 혈(穴)의 중심이 되는 곳이고, 좌의 정면이 되는 방향이 향(向)이다. 왕릉의 좌향을 보면 대부분 북에서 남으로 향하고 있다. 능은 산을 등지고[背山] 송림을 배경으로 아래쪽에 동·서·북 3면으로 곡장(曲墻, 또는 곡담)을 둘렀다.
곡장 안에 봉분을 만들고, 봉분의 밑부분에 12각의 병풍석을 둘러 봉분의 토사가 흘러내리는 것을 예방했다. 그리고 봉분 주위를 다시 난간석(欄干石)으로 둘러 보호하였는데, 난간석은 석주(石柱)·죽석(竹石)·동자석주(童子石柱)로 구성되어 있다. 난간석 바깥으로 능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돌호랑이 네 기와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돌양 네 기가 봉분을 호위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봉분 바로 앞에는 상석(床石)이 설치되어 있는데, 상석 아래에는 귀면(鬼面, 귀신 얼굴 모양)을 새긴 고석(鼓石)이 상석을 받치고 있다. 그리고 상석 좌우에는 망주석 한 쌍이, 그보다 조금 낮은 곳에는 장명등이, 그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각각 석마(石馬)를 대동한 채 서 있다.
제향(祭享)을 지내는 건물인 정자각(丁字閣)은 정(丁) 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정자각 뒤에는 제향 후에 축문을 태워 묻는 사각형의 석함(예감이라고도 한다)이 있다. 정자각의 동편에는 능비(陵碑)를 세워 보호하는 비각(碑閣)이 있고, 비각 아래쪽에는 수복방(守僕房)2)이 있다. 정자각 정면으로 참도(參道)가 깔려 있고, 참도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으며, 홍살문 오른쪽에 왕이 능에 제사를 지내러 올 때 홍살문 앞에서 내려 절을 하고 들어갔다는 배위(拜位)가 있다. 홍살문 밖 능역에 있는 재실에 능참봉이 상주했다. 조선 초기 능의 동남향에 신도비를 세웠으나 문종 이후에는 폐지하였다.
원(園)과 종실(宗室) 묘의 경우에는 봉분과 곡장, 상석, 정자각, 재실 등 대부분이 능과 같이 갖추고 있으나 그 규모가 작고, 봉분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대부분 생략되었다. 무인석의 경우 왕릉만이 설치할 수 있었는데, 이는 왕만이 군사를 거느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민묘에 대해 살펴보자.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무덤을 주로 산에 만들었다. 따라서 산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묘역을 조성하는데, 맨 뒤쪽에 왕릉의 곡장에 해당하는 외사성을 두르고 그 안쪽에 다시 내사성을 마련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성은 묘역 전체의 분위기를 아늑하게 함과 동시에 북쪽의 찬 기운을 가리고 좌우측을 북돋우는 (주산(主山)과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를 의미하는) 상징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는 무덤 뒤쪽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이 묘역 쪽으로 흘러드는 것을 막아 봉분의 침식을 방지하는 토목공학적인 효과가 주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조선 중기까지 거의 보이지 않다가 중기 이후부터 등장하였는데, 지방에 따라서는 사성을 하나만 두르거나 설치하지 않는 곳도 있다(일부 지방에서는 새의 날개 모양처럼 생겼다 하여 ‘활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분묘의 형태를 보면, 조선 초기에는 고려 묘제에서 계승된 호석을 두른 직사각형 무덤[方形墳]이 일부 사용되었다. 일반 서민들의 묘는 대개 젖가슴 모양[乳形]이나 움 모양[突形]을 이루는데, 어느 경우나 정면에서 보면 반원형을 띠고 있다. 또 많은 경우 봉분과 사성을 연결하는 용미가 있는데, 이것은 지맥이 무덤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다소 풍수적인) 의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봉분의 앞이나 우측에 묘비를 세우고, 혼유석(魂遊石)3)과 지실(誌室)4)을 마련한다. 그리고 그 앞에 상석과 향로석(香爐石, 향안석(香案石)이라고도 한다)을 놓고, 다시 그 앞에 봉분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한 쌍의 망주석을 세운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경우이며, 일부 경기 지방의 조선 시대 사대부 묘에는 장명등과 동자석, 문인석, 석수 등을 세운 경우도 있다.
묘역을 꾸미는 데 있어 상석의 좌우에 긴 돌[長臺石]을 이용하여 단을 조성하는데, 이 돌을 계체석(階砌石, 제체석(祭砌石)이라고도 한다)이라 부르며, 이를 중심으로 묘역은 계절(階節)과 배계절(拜階節)로 구분된다. 계절은 무덤 앞의 성역(聖域)이고, 배계절은 계절보다 낮은 제를 드리는 곳이다. 이처럼 묘역 안의 계체석은 묘역을 안정감 있게 구분하고 석물의 배치를 용이하게 할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묘역의 역할을 구분하는 기능도 하게 된다.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가 안장된 묘인
수경원(綏慶園)
수경원(綏慶園)의
묘비
숙종왕비(肅宗王妃)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의
단릉(單陵)인 익릉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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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왕비(肅宗王妃)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의
단릉(單陵)인 익릉(翼陵)
익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익릉의 정자각
숙종과의 사이에서 두 딸을 낳았으나
둘 다 일찍 죽었고
본인도 천연두에 걸려
만 19세에 사망한
인경왕후의
단릉인 익릉(翼陵)
익릉(翼陵)의 묘비
익릉(翼陵)의 비문에 관한
번역문
숙종왕비(肅宗王妃)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의
단릉(單陵)인 익릉
조선 제13대 왕 명종의 외아들인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 ~1563)와
부인 공회빈 윤씨(恭懷嬪 尹氏, 1553년~1592년)의
합장무덤인
순창원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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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회세자는 만 12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조선 제13대 왕 명종의 외아들인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 ~1563)와
부인 공회빈 윤씨(恭懷嬪 尹氏, 1553년~1592년)의
합장무덤인
순창원(順昌園)
순창원(順昌園)의
정자각
순창원(順昌園)
순창원(順昌園)
세조(世祖)의 세자 장(璋, 德宗)과
그의 비(妃)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의
동원이강릉인 경릉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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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종은
만 19세의 나이에 왕세자로서 요절했다.]
세조(世祖)의 세자 장(璋, 德宗)과
그의 비(妃)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의
동원이강릉인 경릉(敬陵)
[同原異岡陵은 같은 능역이지만
각각 다른 능선에 조성한 능이다.]
경릉(敬陵)의 정자각
정자각에서 왼쪽에 보이는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 ~ 1504) 한씨(韓氏)의 능
[일반적으로 왕릉은 정자각에서 바라 보았을 때 왼쪽에 왕의 능을, 오른쪽에 왕후의 능을 조성한다. 이와 달리 경릉은 반대로 오른쪽에 왕을 모셨는데, 이는 세상을 떠났을 때 신분의 차이(덕종은 왕세자였고, 소혜왕후는 대왕대비였음)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덕종의 능은 묘의 형태로 조성되었으나, 소혜왕후의 능은 왕릉의 형태로 조성된 사실도 흥미롭다.]
정자각에서 오른쪽에 보이는
1471년(성종 2) 왕으로 추존된 덕종의 능
사망 당시 대왕대비였으므로
왕릉의 형태로 조성된
소혜왕후의 능
사망 당시 왕세자였으므로
묘의 형태로 조성된 덕종의 무덤
경릉의 비석
경릉의 비문에 관한
번역문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 한씨(韓氏)의 능(좌)과
덕종의 능(우)
세조(世祖)의 세자 장(璋, 德宗)과
그 비(妃)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의
동원이강릉인 경릉(敬陵)
숙종의 후궁이자 조선의 제20대 왕 경종의 생모인
옥산부대빈 장씨(장희빈, 1659 ~ 1701)의
묘인 대빈묘(大嬪墓)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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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후궁이자 조선의 제20대 왕 경종의 생모인
옥산부대빈 장씨(장희빈, 1659 ~ 1701)의
묘인 대빈묘(大嬪墓)
[정비가 아니지만 국왕이 되는 원자를 생산한 후궁은 통상적으로 묘소의 칭호가 '원'이 되어야 하나, 정쟁에 휘말려 사약을 마시고 죽은 희빈 장씨는 본래의 대우를 회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묘'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대빈묘~홍릉(弘陵)] 구간
숲길 탐방로
[대빈묘~홍릉(弘陵)] 구간
숲길 탐방로에서 마주친
산비둘기
최장기 재위 조선국왕인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1692~1757) 서씨의
단릉(單陵)인 홍릉(弘陵)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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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1대 왕 영조(1694년~1776년, 재위기간: 1724~1776년)는 재위기간이 무려 51년7개월로 조선왕조 제1의 최장기 재위 국왕이었다.]
[영조는 2명의 왕비와 3명의 후궁을 두었다.]
[영조의 배우자와 자녀와 며느리
정비: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3년 - 1757년), 소생이 없었음
계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1745년 - 1805년), 살아 생전에 자식을 낳지 못했다.
제1후궁: 온희정빈 이씨(溫僖靖嬪 李氏, 1694년 - 1721년 11월 16일) : 추존왕 진종(효장세자)의 어머니이다. 1717년(숙종 43년), 훗날 화억옹주로 추증되는 장녀 향염(香艶)을 낳았으나 1년만에 요절하였고, 1719년(숙종 45년)에는 장남 만복(萬福, 효장세자)을, 다음해에는 차녀 향이(香怡, 화순옹주)를 낳았다.
제1왕녀: 화억옹주(和憶翁主, 1717년 4월 22일 - 1718년 4월 8일)
제1왕자: 진종 행(眞宗 緈, 효장세자(孝章世子), 1719년 2월 15일 - 1728년 11월 16일)
며느리 : 효순소황후 조씨(孝純昭皇后 趙氏, 1716년 1월 8일 - 1751년 12월 30일)
제2왕녀: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년 3월 8일 - 1758년 1월 17일) -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에게 하가
제2후궁: 소유영빈 이씨(昭裕暎嬪 李氏, 1696년 7월 18일 - 1764년 7월 26일)
제3왕녀: 화평옹주(和平翁主, 1727년 4월 27일 - 1748년 6월 24일) -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하가
제4왕녀: 화덕옹주(和德翁主, 1728년 8월 3일 - 1731년 2월 18일) - 조졸
제5왕녀: 옹주(翁主, 1729년 12월 12일 - 1731년 3월 21일) - 조졸
제6왕녀: 옹주(翁主, 1732년 1월 1일 - 1736년 4월 12일) - 조졸
제7왕녀: 화협옹주(和協翁主, 1733년 3월 7일 - 1752년 11월 27일) -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綏)에게 하가
제2왕자: 장조 선(莊祖 愃,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년 1월 21일 - 1762년 윤5월 21일)
며느리 : 헌경의황후 홍씨(獻敬懿皇后 洪氏, 1735년 8월 6일 - 1816년 1월 13일)
손자 : 의소태자 정(懿昭太子 琔,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년 9월 27일 - 1751년 6월 6일) - 조졸
손자 : 정조 선황제 산(正祖 祘, 1752년 10월 28일 - 1800년 8월 18일)
손녀 : 청연공주(淸衍公主, 1754년 7월 14일 - 1821년 6월 9일) - 광은위(光殷尉) 김기성(金基性)에게 하가
손녀 : 청선공주(淸璿公主, 1756년 윤9월 - 1802년 7월 20일) - 홍은위(弘殷尉) 정재화(鄭在化)에게 하가
며느리 : 숙빈 임씨(肅嬪 林氏, 출생 미상 - 1773년)
손자 : 충정공 은언군 인(忠貞公 恩彦君 䄄, 1754년 - 1801년 7월 9일)[13]
손자 : 소민공 은신군 진(昭愍公 恩信君 禛, 1755년 2월 21일 - 1771년 5월 13일)[14] - 조졸
며느리 : 경빈 박씨(景嬪 朴氏, 빙애(彬愛), 출생 미상 - 1761년 1월)[15]
손녀 : 청근옹주(淸瑾翁主, 1758년 - 1835년 9월 1일) - 당은위(塘殷尉) 홍익돈(洪益惇)에게 하가
손자 : 효민공 은전군 찬(孝愍公 恩全君 禶, 1759년 10월 4일 - 1778년 10월 16일)[16]
제9왕녀: 화완옹주(和緩翁主, 1738년 1월 19일 - 1808년 5월 17일) -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에게 하가
제3후궁: 귀인 조씨(貴人 趙氏, 1707년 10월 16일 - 1780년 10월 5일)
제8왕녀: 옹주(翁主, 1735년 9월 19일 - 1736년 9월 3일) - 조졸
제10왕녀: 화유옹주(和柔翁主, 1740년 9월 29일 - 1777년 5월 21일) -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에게 하가
제4후궁: 숙의 문씨(廢 淑儀 文氏, 생년 미상 - 1776년 8월 10일)
제11왕녀: 화령옹주(和寧翁主, 1753년 3월 3일 - 1821년 9월 3일) - 청성위(靑城尉) 심능건(沈能建)에게 하가
제12왕녀: 화길옹주(和吉翁主, 1754년 5월 19일 - 1772년 12월 18일) - 능성위(綾城尉) 구민화(具敏和)에게 하가
제5후궁: 상궁 이씨(尙宮 李氏, 생몰년도 미상)]
최장기 재위 조선국왕인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1692~1757) 서씨의
단릉(單陵)인 홍릉(弘陵)
정성왕후(1692~1757) 서씨의
단릉(單陵)인 홍릉(弘陵)의
정자각
홍릉(弘陵)의 정자각(좌)과
정성왕후(1692~1757) 서씨의 단릉(우)
홍릉(弘陵)의 비석
홍릉(弘陵)의 비문에 관한
번역문
홍릉(弘陵)의 홍살문(좌)과
정자각(우)
영조가 정성왕후와 함께 묻히려고
생전에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었으나
동구릉에 묻히는 바람에
능의 왼쪽 자리가 비어 있는
홍릉(弘陵)
예종(출생-사망 : 1450~1469)과
그 계비(繼妃)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1445 ~ 1498)의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인 창릉에 관한
안내문
[예종은
재위 13개월 만에 만 19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예종과
그 계비(繼妃)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1445 ~ 1498)의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인 창릉(昌陵)
서오릉 영역 안에 조성된
최초의 왕릉인
창릉(昌陵)
예종의 능(좌)과 안순왕후의 능(우)
창릉(昌陵)의 비석
창릉(昌陵)의 비문에 관한
번역문
약 9개월간 왕으로 재위한 제12대 국왕 인종에 이어서
1년2개월로 두번째로 재위기간이 짧았던
조선 제8대 왕 예종(睿宗)의
능
예종이 병사하자
25세의 나이로 청상이 된
안순왕후의
능
예종의 능(좌)과
정자각(중앙)과
안순왕후의 능(우)
창릉(昌陵)에서
이성수
[창릉~재실] 구간
탐방로 주변의
철쭉꽃
재실 앞에 있는
고목
2024년04월26일(금요일) [서울 은평구 수국사 & 고양시 (서오릉&서오릉 역사문화관)] 탐방기 탐방지 : 서울 은평구 수국사 & 고양시 (서오릉&서오릉 역사문화관) [고양 서오릉(高陽 西五陵) 조선시대 왕가의 무덤. 1970년 5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크기 : 면적 1,829,792㎡ 1970년 5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龍頭洞)에 있다. 서오릉은 풍수적(風水的)인 길지(吉地)에 왕실의 족분(族墳)을 이룬 것인데, 경릉(敬陵)·창릉(昌陵)·익릉(翼陵)·명릉(明陵)·홍릉(弘陵)의 5능을 일컫는다. 이곳에는 5능 외에 명종(明宗)의 첫째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순창원(順昌園)이 있고, 숙종(肅宗)의 후궁 장희빈(張禧嬪)의 대빈묘(大嬪墓)가 이장되어 있으며,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소유 영빈 이씨의 묘소인 수경원(綏慶園)도 1969년 연세대학교 교정에서 서오릉으로 천장되었다. ⑴ 경릉:세조(世祖)의 세자 장(璋:德宗)과 그 비(妃)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의 능이다. 능제(陵制)는 좌측이 왕, 우측이 비의 동원이강식(同原異岡式)으로 왕우비좌(王右妃左)의 일반 상례와 반대되고 있다. 이는 왕비가 생전에 덕종의 추존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기에 능제도 왕릉 형식을 갖추었으나, 왕은 당초 세자로 돌아갔으므로 세자묘대로 두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덕종(德宗) 조선 세조의 아들이며 성종의 아버지. 자 원명(原明). 초명 숭(崇). 이름 장(暲). 성종(成宗)의 아버지. 비(妃)는 좌의정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이다. 1445년(세종 27) 도원군(桃源君)에 봉해지고, 1455년(세조 1)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하기 전에 20세의 나이로 죽었다. 능은 고양에 있는 경릉(敬陵)이며, 1471년(성종 2)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昭惠王后) 조선 성종의 어머니이다. 부녀자의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하여 편찬한《여훈(女訓)》을 남겨 조선시대 남존여비 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출생-사망 : 1437 ~ 1504 본관 : 청주(淸州) 주요저서 : 《여훈(女訓)》 본관 청주(淸州)이며 성은 한(韓)씨이다. 부친은 조선 초 명나라를 배경으로 막강한 세도가였던 한확(韓確:1403~1456)이다. 남편은 세조의 째 아들 덕종이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1455년(세조1)에 남편이 세자로 책봉되고 한씨는 수빈(粹嬪)으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1457년(세조3)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자 시동생인 예종이 즉위했다. 예종 또한 즉위 1년 2개월 만에 죽자 자신의 아들 성종이 즉위하여 실권을 장악하였다. 1471년(성종 2)에 세자로 죽은 남편 덕종은 왕으로 추존되고 자신은 인수왕비에 진책(進冊)되었다. 불교를 독실히 믿었으며, 불경에 조예가 깊어 범(梵) ·한(漢) ·국(國) 3자체(三字體)로 쓴 불경과 부녀자의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하여 편찬한 《여훈(女訓)》을 남겼는데 그 내용은 아내는 남편을 하늘로 떠받들어 공경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이후 조선시대의 남존여비 사상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아들 성종이 여색을 탐하기가 심해 왕비 윤씨와 갈등을 빚자 윤씨를 폐비시켜 사사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을 아들 성종과 함께 주도하였다. 성종이 죽고 즉위한 손자 연산군이 생모 윤비(尹妃)가 모함 당하여 폐위 ·사사(賜死)된 사실을 알고 이를 보복하니 병상에 있던 대비 소혜왕후가 크게 꾸짖자 연산군은 머리로 대비를 들이받았으며 얼마 후 소혜왕후는 숨을 거뒀다. 소생으로는 성종 ·월산대군(月山大君) ·명숙공주(明淑公主)가 있었으며, 능은 경릉(敬陵)이다. ⑵ 창릉:덕종의 아우인 예종(睿宗)과 그 계비(繼妃)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의 능이다. 왕릉·왕비릉이 동원이강식을 이루고 있고, 그 석물(石物) 배치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전통적인 예에 따르고 있으며, 석물의 양식상 특이한 것이 있다면 고석(鼓石)의 무늬와 석난간 대석주 주두양식(石欄干 大石柱 柱頭樣式)이다. 예종(睿宗) 조선 제8대 왕(재위 1468∼1469)으로 재위 13개월 만에 죽었다. 재위 중 직전수조법(職田收租法)을 제정하여 둔전(屯田)의 민경(民耕)을 허락하였다. 출생-사망 : 1450 ~ 1469 재위기간 : 1468년~1469년 가족관계 : 왕비 장순왕후(章順王后), 안순왕후(安順王后), 아버지 세조(世祖), 어머니 정희왕후(貞熹王后), 휘(諱) 황(晄). 자 명조(明照:初字 平南). 시호 양도(襄悼). 1450년(세종 32년) 수양대군(세조)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다가 첫째아들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사망하자 1457년(세조 3)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468년에 즉위하였으나 재위 13개월 만에 사망했다. 첫번째 부인으로 한명회의 딸인 한씨를 맞이했으나 첫 원자를 출산하고 사망했으며, 얼마후 원자마저 사망하였다. 둘째부인으로 한백륜(韓伯倫)의 딸을 둘째부인(안순왕후 安順王后)으로 맞이하였다. 재위 중 직전수조법(職田收租法)을 제정하여 둔전(屯田)의 민경(民耕)을 허락하였다. 또한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무관이자 병조판서였던 남이(南怡)를 겸사복장으로 강등시키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단행했다. 하지만 남이와 강순(康純) 등이 연루된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이들을 처형하였고 이를 남이의 옥사(獄事)라 불렀다. 그외 민수(閔粹)의 사옥(史獄) 등이 있다. 예종은 비록 어린 나이에 등극하였지만 법치주의에 입각한 강력한 왕권을 만들고자 매우 엄격한 통치를 지향했으며 선왕의 치적에 힘입은 훈구파 세력과 대립하여 개혁정책을 펼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런 그의 의도는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를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견제를 받았으며 더구나 모친인 정희왕후 마저 예종을 지지하지 않았다. 원손으로 제안대군을 두었으나 어린나이 때문에 예종을 이어 왕위에 오르지 못했고 의경세자의 아들 자을산군(성종)이 보위에 올랐다. 갑작스러운 예종의 죽음을 두고 훈구파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능은 경기 고양시 덕양구에 소재하는 창릉(昌陵)이다. 안순왕후(安順王后) 조선 제8대 왕 예종의 계비이다. 세자빈이 죽은 후 소훈의 내명부 직품을 받고 세자를 섬기다가 1468년 예종이 즉위한 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471년 인혜대비에 봉해졌고, 1497년에 명의대비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 제안대군과 현숙공주가 있다. 출생-사망 : 1445? ~ 1498 본관 : 청주(淸州) 별칭 : 인혜대비(仁惠大妃), 명의대비(明懿大妃)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시호는 안순(安順)이다. 청주부원군 한백륜(韓伯倫)의 딸이다. 원래는 한명회(韓明澮)의 딸이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1461년(세조 7) 죽었으므로, 동궁에 간택되어 들어가 소훈(昭訓)의 내명부 직품을 받고 세자를 섬겼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이듬해 예종이 병사하자 25세의 나이로 청상이 되었다. 1471년(성종 2) 인혜대비(仁惠大妃)에 봉해졌다. 조정 정치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를 감쌌다. 1497년(연산군 3)에 명의대비(明懿大妃)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 제안대군(齊安大君)과 현숙공주(顯肅公主)가 있다.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龍頭洞) 서오릉(西五陵)에 있는 창릉(昌陵)에 예종과 함께 안장되었다. ⑶ 익릉:숙종왕비(肅宗王妃)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의 능이다. 능제(陵制)는 기본적으로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르면서 부분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좇고 있다. 능표(陵表)는 송시열(宋時烈)이 찬(撰)했고 심익현(沈益顯)이 글씨를 썼다. 인경왕후(仁敬王后) 조선 제19대 숙종의 비. 1671년 세자빈에 책봉되고, 1674년 숙종의 즉위와 함께 왕비에 진봉되었다. 두 딸을 낳았으나 일찍 죽었고 인경왕후도 천연두에 걸려 일찍 사망했다. 출생-사망 : 1661 ~ 1680 본관 : 광산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성은 김씨(金氏)이다. 광성부원군(光成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로 출생하였다. 1671년(현종 12)에 숙종의 세자빈에 책봉되고, 1674년 숙종의 즉위와 함께 왕비에 진봉되었다. 두 딸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고 인경왕후도 20세에 천연두가 발병하여 일찍 사망하였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내 익릉(翼陵)이다. 1713년(숙종 39) 광렬(光烈), 1722년(경종 2) 효장명현(孝莊明顯), 1753년(영조 29) 선목(宣穆), 1776년 혜성(惠聖)의 존호가 각각 추상(追上)되었다. ⑷ 명릉:숙종(肅宗)과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의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분(雙墳)으로 조영(造營)되고 인원왕후 능이 우측에 있어 좌측이 숙종의 능과 동원이강의 배치로 된 형식이다. 명릉은 조선의 능제상(陵制上)에 한 시기를 이루었으니 즉 그 제도는 《속오례의 산릉의(續五禮儀山陵儀)》의 골자가 되었고 조선 후기 치장(治葬)의 근간이 된 《상례보편 산릉의(喪禮補編山陵儀)》의 기초를 이루었다. 숙종(肅宗) 조선 제19대 왕. 대동법을 전국에 실시하여 실효를 거두었으며 임진왜란 · 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토지사업을 추진해 완결을 보았다. 주전을 본격적으로 실시해 상평통보를 주조, 중앙관청 및 지방관청 등에 통용하도록 했다. 영토 회복 운동을 전개했고 금위영을 추가로 설치하여 5영체제를 완결했다. 출생-사망 : 1661 ~ 1720 재위기간 : 1674년 ~ 1720년 본관 : 전주 본명 : 이순(李焞) 가족관계 : 왕비 인경왕후(仁敬王后), 인현왕후(仁顯王后), 인원왕후(仁元王后), 아버지 현종(顯宗), 어머니 명성왕후(明聖王后), 자 명보(明譜), 휘 순(焞), 현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이며 비는 김만기(金萬基)의 딸 인경왕후(仁敬王后)이다. 계비는 민유중(閔維重)의 딸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계비는 김주신(金柱臣)의 딸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1667년(현종 8)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14세 때 조선왕조 19대 임금에 즉위하였다. 인경왕후 김씨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고, 희빈 장씨에게선 두 아들을 두었다. 또한 숙빈 최씨에게서는 세명의 아들을 두었고 명빈 박씨에게서는 1명의 아들(연령군)을 두었다. 즉위한 이듬해 북방의 참략에 대비하기 위해 개성 천마산에 폐허로 남아있는 고려시대 산성인 대흥산성(大興山城)을 다시 축성하여 완성하였고 용강(龍岡)의 황룡산성(黃龍山城)을 재수축하였다. 인조 때 일어났던 병자호란과 같은 혼란을 막기위해 국방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강화도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49곳에 돈대를 쌓았다. 또한 청나라를 의식한 일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산성도 수축(숙종 38년)도 결행하였는데 국방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숙종의 치적으로 평가된다. 또한 군제를 개편하여 금위영(禁衛營)을 창설하여 5군영 체제를 갖추었지만 이는 외척과 서인 세력의 집권 안정화를 위한 정치적 목적이었고 실질적인 조선 군사력 강화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숙종이 집권한 당시 조선의 조정은 예론(禮論)에 치우쳐 논쟁이 분분하였고, 당쟁이 심하여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파쟁이 극심하였다. 1680년 역모사건이 일어나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경신환국)하였으며 이때 기호학파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두고 서인 남인은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세력이 치명상을 입고 실각하자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다시 분파하여 당쟁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의 영향력으로 정계는 경직되었고 주희의 사상을 맹신하지 않는 사상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 숙종은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대립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나라를 병들게 한다고 개탄하였지만 당쟁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숙종은 첫번째 왕비인 인경왕후가 사망하고 둘째 왕비인 인현왕후를 맞았지만 아들을 얻지 못했다. 궁녀 출신인 숙원(淑媛) 장씨(張氏:장희빈)를 총애하여 1688년 소의(昭儀)로 승격시켰으며, 이듬해 장씨에게서 왕자 이윤(李?)을 낳았다. 왕자가 출생한지 3개월 째 명호(名號)를 정하고자 하였는데 왕자의 명호를 정하게되면 세자로 책봉되는 길이기에 송시열을 위시(爲始)한 서인들이 이를 극렬하게 반대하자 송시열 ·김수항(金壽恒) 등 서인의 실세들에게 유배형을 내렸고 결국 송시열은 이 일로 사사되었다. 숙종의 의지대로 왕자의 명호를 정하였고 숙종 사후 경종(景宗 1688~1724)으로 왕위에 올랐다. 또한 왕비 인현왕후를 투기죄로 폐위하자 이를 반대하는 박태보(朴泰輔)·오두인(吳斗寅) 등을 국문하여 유배형에 처하거나 처형하였고, 희빈(禧嬪)으로 승격된 장씨를 1690년에 왕비로 책봉하였다. 이 일로 서인에게 염증을 느낀 숙종이 서인세력을 대거 실각시키고 남인들이 다시 기용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유교의 성인을 모시는 문묘(文廟)에 종사되어 서인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던 이이와 성혼의 위패가 거두어져 출향(黜享)되었다. 그러나 인현왕후 폐위를 인정하지 않고 폐비복위운동을 꾀하는 서인들의 결집하자 우의정 민암 등이 타도하려고 시도하다 서인들의 역공으로 숙빈 최씨를 독살한다는 모함에 걸려 남인들이 대거 실각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숙종은 장희빈보다 궁녀 최씨를 총애하고 있었다. 1694년 숙종은 남인을 추방하고 다시 서인을 등용시키고(갑술환국) 폐비 민씨를 복위시켰다. 이어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1701년에 장씨가 민씨를 무고(誣告)하였다는 죄로 사사(賜死)하였다. 왕의 재위기간은 조선왕조에서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으나 대외적인 전쟁이 없어 사회가 점차 안정기로 접어든 때였다. 선조 때 제기된 대동법(大同法)을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하여 실효를 거두었으며,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토지사업을 추진하여 완결을 보았다. 말년에는 인조 때 소현세자빈 강씨의 억울한 죽음을 측은하게 여겨 강빈을 신원하여 명예를 회복시켰다. 주전(鑄餞)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여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였으며, 중앙관청 및 지방관청 등에서 통용하도록 하였다. 특히 폐한지(廢閑地)로 버려둔 압록강 주변의 무창(茂昌) ·자성(慈城)의 2진(鎭)을 개척하여 영토회복운동을 전개하였고, 1712년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로 하여금 백두산(白頭山) 정상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게 하여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국왕 호위와 수도 방위를 담당하는 금위영(禁衛營)을 추가로 설치하여 5영체제로 개편하였다. 또 재위기간에 왕실의 족보인《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대명집례(大明集禮)》 등이 간행되었고, 법전인《대전속록(大典續錄)》,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이 편찬되었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에 있는 명릉(明陵)이다. 인현왕후(仁顯王后) 조선 제19대 숙종의 계비. 기사환국 때 폐서인이 되었다가 갑술옥사로 다시 왕후로 복위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궁녀가 쓴 소설《인현왕후전》이 전해진다. 출생-사망 : 1667 ~ 1701 본관 : 여흥 별칭 : 존호 효경숙성장순, 휘호 의열정목 출생지 : 한양 성은 민씨(閔氏)이고,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존호(尊號)는 효경숙성장순(孝敬淑聖莊純), 휘호(徽號)는 의열정목(懿烈貞穆)이다. 형조판서 등을 지낸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딸로서 1681년 숙종의 계비(繼妃)가 되었다. 숙종은 세자로 책봉되고 김만기(金萬基)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숙종이 왕으로 등극하자 김씨는 인경왕후(仁敬王后)가 되었다. 하지만 인경왕후가 천연두로 20세에 사망하자 인현왕후가 숙종 비로 간택되었던 것이며 그녀의 나이 15세였다. 인현왕후 민씨의 집안은 서인으로 당시 조정의 실권은 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숙종은 궁녀 장옥정(張氏;희빈 장씨)을 좋아하여 인현왕후 민씨를 멀리하였다. 당시 장옥정은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에 의해 궁에서 쫓겨나 궐밖에서 살고 있었지만 숙종은 항상 장옥정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장옥정은 서인(西人)과 정치적으로 대립세력이었던 남인(南人)에 속했기 때문에 견제를 받아 후궁으로 머물수가 없었다. 하지만 1683년 명성왕후 김씨가 세상을 뜨자 숙종은 1686년 3년 상을 마치고 장옥정을 다시 궁으로 불러 후궁으로 삼았다. 당시 정치적으로는 서인의 영수이자 숙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던 김석주(金錫胄)가 사망하고 민씨의 아버지 민유중도 세상을 뜨자 8년간 집권했던 서인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숙종 또한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진 서인에 염증을 느끼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인을 등용하였다. 1688년 장씨가 왕자 윤(昀;뒷날의 경종)을 낳자 윤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왕자 윤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던 서인들은 숙청되기 시작했고 이 문제로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서인(西人)이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인현왕후도 폐위(廢位)되어 궁중에서 쫓겨나 서인(庶人)이 되었다. 1693년 궁녀 출신의 최씨가 숙종의 아이를 잉태하자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도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국정을 운영하는 남인에 대한 실망감도 커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1694년 남인이 주도하는 역모사건이 고변되었고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 서인 소론 세력이 다시 정치적 실세로 등용되었으며 그해 4월 마침내 폐서인되었던 민씨도 왕후로 복위하였다. 1701년 사망하였는데 소생이 없었으며, 능은 경기도 고양(高陽)의 명릉(明陵)이다. 인현왕후를 주인공으로 하여 궁녀가 쓴 소설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이 전하는데, 인현왕후를 유교적 덕목과 인품을 갖춘 여인으로 그려내고 있다. 반면 숙종실록에는 희빈장씨가 왕자 윤을 출산하자 이로 인한 시기와 질투로 숙종과 관계가 멀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원왕후(仁元王后) 조선시대 제19대 왕인 숙종의 계비로, 인현왕후가 죽은 후 왕비로 책봉되었다. 출생-사망 : 1687 ~ 1757 본관 : 경주 조선 제19대 왕인 숙종의 계비. 본관 경주(慶州). 성 김(金). 존호(尊號) 혜순자경(惠順慈敬). 휘호(徽號) 정의장목(定懿章穆). 전호(殿號) 효소(孝昭).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주신(柱臣)의 딸. 인현왕후가 죽은 후 1702년(숙종 28)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소생은 없다. 능은 고양의 명릉이다. ⑸ 홍릉:영조 원비(英祖元妃)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의 능이다. 영조는 왕후의 택조(宅兆)를 정하면서 장차 함께 묻히고자 허석(虛石)의 제도를 쓰고 능상석물(陵上石物)은 쌍릉(雙陵)을 예상하여 배치하여 놓고 있다. 현재 홍릉 우측의 공간은 바로 이것으로 영조의 능이 동구릉(東九陵)에 자리잡게 되자 빈 채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 능은 능상설(陵象設)의 제도와 양식은 기본적으로 명릉(明陵)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 장명등(長明燈)·석망주(石望柱) 등에 독특한 양식의 변화를 보이고 있고 난간석주 주두양식(欄干石柱柱頭樣式)이 특이한 것으로 《속오례의(續五禮儀)》와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의 제도가 잘 반영되고 있다.] 정성왕후(貞聖王后)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英祖)의 비(妃). 출생-사망 : 1692 ~ 1757 별칭 : 휘호(徽號) 단목장화(端穆章和) 성은 서씨(徐氏)이며 존호(尊號)는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 휘호(徽號)는 단목장화(端穆章和)이다. 달성부원군 서종제(徐宗悌)의 딸로 1692년(숙종18)에 태어났다. 1704년(숙종 30) 연잉군(延仍君)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達城郡夫人)으로 책봉되었고, 1721년(경종 1) 연잉군이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됨에 따라 세제빈(世弟嬪)이 되었다. 1724년 왕세제 연잉군이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으며 이때 영조의 나이는 31세, 정성왕후의 나이는 33세였다. 정성왕후는 당쟁으로 인해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소생까지 없었으나 후궁 영빈 이씨 소생의 사도세자(思悼世子:장헌세자)를 매우 아꼈다.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의 갈등을 풀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중 병을 얻어 창덕궁 관리각(觀理閣)에서 66세로 사망하였다. 능은 경기도 고양(高陽)시 용두동 서오릉 능역(陵域)의 홍릉(弘陵)이다. 서오릉의 원(園)과 묘(墓) 1. 순창원(順昌園) 서오릉 안에 있는 명종의 장남인 순회세자와 그의 부인 공회빈 윤씨가 안장된 묘소로 서오릉에 있는 묘소 중 수경원과 함께 '원(園)'이라는 칭호를 받은 묘소이다. 순회세자(順懷世子) 출생-사망 : 1551 ~ 1563 자 : 중명 시호 : 순회 본명 : 곤령·부 조선 제13대 왕인 명종의 세자. 자 중명(重明). 이름 곤령(崑齡)·부(순회세자 폰트 이미지 1). 시호 순회(順懷). 1557년(명종 12)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3세로 요절하여 행부호군(行副護軍) 강섬(姜暹)을 주상(主喪)으로 하여 국장을 치르고 경릉(敬陵) 근처에 있는 순창원(順昌園)에 장사를 지냈다. 공회빈윤씨(恭懷嬪尹氏) 조선 제13대 왕 명종의 장자인 순회세자의 세자빈. 출생-사망 : ? ~ 1592 예조판서 윤옥(尹玉)의 딸로 태어나 1559년(명종 14)에 명종의 장자인 순회세자와 가례를 올려 세자빈이 되었다. 순회세자가 1563년(명종 18) 9월 13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한 까닭에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순회세자 사후에 덕빈(德嬪)으로 불리며 30년을 지내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선조 25) 창경궁 통명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적 제198호 서오릉 경내에 있는 순창원(順昌園: 남편인 순회세자와의 합장묘)에 안장되었다. 2. 대빈묘(大嬪墓)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생모인 옥산부대빈 장씨(장희빈)의 묘로, 원래는 경기도 광주군에 있었던 묘소였으나 1969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장되었다. 정비가 아니지만 국왕이 되는 원자를 생산한 후궁은 통상적으로 묘소의 칭호가 '원'이 되어야 하나, 정쟁에 휘말려 사약을 마시고 죽은 희빈 장씨는 본래의 대우를 회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묘'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위치는 경릉 옆쪽 언덕길 올라가는 곳이다. 다른 능과 달리 초라한 모습으로 있는 것도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희빈장씨(禧嬪張氏) 조선 19대 왕 숙종의 빈이며 20대 왕 경종의 생모이다. 출생-사망 : 1659 ~ 1701 본관 : 인동 본명 : 장옥정(張玉貞) 별칭 : 장희빈, 옥산부대빈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이름은 옥정(玉貞)으로 전해진다. 아버지는 역관(譯官) 출신인 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다. 친가와 외가 모두 역관 집안으로 매우 부유한 환경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부인 장응인(張應仁)과 외조부인 윤성립(尹誠立)은 모두 역관으로 벼슬이 정3품과 종4품에 이르렀으며, 당숙인 장현(張炫)은 숙종 때에 역관의 수장인 수역(首譯)을 지냈으며 거부(巨富)로 이름이 높았다. 정확한 시기와 배경은 확인되지 않으나 어린 나이에 나인(內人)으로 뽑혀 입궁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희빈 장씨가 “머리를 따 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와 생활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1680년(숙종 6) 무렵부터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의 총애를 받았으나 숙종의 생모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명으로 궁에서 쫓겨났다. 당시 당숙인 장현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집권한 뒤에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의 심복으로 여겨져 유배되었다. 희빈 장씨는 1683년 명성왕후가 죽은 뒤에야 다시 궁으로 돌아왔으며, 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소의(昭儀)로 승격되었다가 1688년 왕자 윤(昀, 뒷날의 경종)을 낳았고, 이듬해 음력 1월 아들이 원자로 책봉되면서 희빈(禧嬪)이 되었다. 당시 송시열(宋時烈) 등의 서인(西人)은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삼으려는 숙종의 뜻에 반대하다가 정권을 남인(南人)에게 넘겨주었다. 결국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몰락하면서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 민씨가 폐비되고, 희빈 장씨가 1689년(숙종 15) 음력 10월 22일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었고, 희빈 장씨는 그해 음력 4월 12일에 왕후(王后)의 자리에서 쫓겨나 다시 희빈의 작호를 받았다. 그리고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발고로 거처인 취선당(就善堂)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 했다는 혐의를 받아 사사(賜死)되었다. 희빈 장씨는 죽은 뒤에 광주(廣州) 진해촌(眞海村,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 매장되었으나, 1969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西五陵) 경내의 대빈묘(大嬪墓)로 옮겨졌다. 아들인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은 1722년(경종 2) 생모인 희빈 장씨를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하였다. 3. 수경원(綏慶園)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소유 영빈 이씨가 안장된 묘소이다. 원래는 연세대학교 교정에 있었으나, 1969년 서오릉으로 천장했고, 봉분이 있던 자리에는 루스채플이 세워졌다. 영빈 이씨 (暎嬪 李氏) 출생 연도 : 1696년(숙종 22) 사망 연도 : 1764년(영조 40) 본관 : 전의(全義, 지금의 충청남도 연기) 사도세자(思悼世子: 莊獻世子)의 생모이다. 어려서 궁중에 들어가 귀인(貴人)이 되었으며, 1730년(영조 6) 영빈으로 봉해졌다. 영조의 깊은 총애를 받았으며, 4명의 옹주를 낳은 뒤 1735년 원자를 출산하여 후사(後嗣)를 기다리던 영조를 크게 기쁘게 하였다. 1762년 사도세자가 폐위당하는 와중에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1764년에 죽자 영조는 매우 애통해하면서 후궁 제일의 예(禮)로 장례하게 하였고, 이듬해 시호로 의열(義烈)을 추증하면서 친히 선시지례(宣諡之禮)를 행하기도 하였다. 소생으로 사도세자 외에 5명의 옹주가 있었다.] 탐방코스: [구산역 3번 출구~수국사~서오릉 매표소~서오릉 탐방~서오릉 매표소~서오릉 입구 버스 정류장] 탐방일 : 2024년 04월 26일(금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최저기온 10도C, 최고기온 27도C] 탐방코스 및 탐방 지점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2시간34분 소요) 13:43~13:57 구산역 3번 출구에서 탐방출발하여 서울특별시 은평구 구산동 314 번지에 있는 수국사(守國寺)로 이동 13:57~14:07 수국사(守國寺)를 탐방 [수국사(守國寺) 종파 : 대한불교조계종 건립년대 : 1459년 문화재 : 보물 1, 시도유형문화재 6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구산동 314 좌표 북위 37° 36′ 5″ 동경 126° 54′ 1″ 수국사(守國寺)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구산동에 있는 절이다. 원래 평범한 절이었으나 1992년 재건축 이후 사찰 전체가 금박으로 씌워진 황금사찰이 되었다. 수국사는 세조대왕의 큰 아들인 의경세자(懿敬世子)가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덕종으로 추존하고 넋을 위로하고자 1459년(세조 5)에 그의 능 근처에 정인사(正因寺)를 창건하였다. 이후 사찰을 현재의 장소로 옮겨 짓고 수국사(守國寺)로 개명하여 왕실의 안녕과 수복을 축원하는 원찰(願刹)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소장 문화재 보물 서울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보물 제1580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서울 수국사 아미타불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2제242호) 서울 수국사 십육나한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43호) 수국사 극락구품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44호) 수국사 감로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45호) 수국사 신중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46호) 수국사 현왕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47호)] 14:07~14:20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번지에 있는 서오릉 매표소로 이동 14:20~14:26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肅宗)(1661∼1720, 재위기간: 1674∼1720[45년10개월로 조선왕조 제2 최장기 재위])과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1667 ~ 1701)와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 ~ 1757)의 능인 명릉(明陵)으로 이동 14:26~14:32 명릉(明陵)을 탐방 [정자각에서 바라 보았을 때 우측의 쌍릉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고, 좌측의 단릉이 인원왕후의 능이다.] 14:32~14:36 조선 제21대 왕 영조(1694년~1776년, 재위기간: 1724~1776년[51년7개월로 조선왕조 제1 최장기 재위])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李氏, 1696년(숙종 22)~1764년(영조 40))의 묘인 수경원(綏慶園)으로 이동 14:36~14:37 수경원(綏慶園)을 사진촬영 [무덤의 계급, 능·원·묘 조선 시대 무덤은 무덤 속 주인공의 신분에 따라 능(陵)·원(園)·묘(墓)로 구분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무덤을 말한다. 왕을 생산한 후궁의 무덤도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왕을 낳은 친부모이지만 대원군의 경우는 특이하다. 즉 후일 왕으로 추봉이 되면 능호(陵號)를 사용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묘로 사용한다. 그리고 묘는 능과 원에 해당되지 않는 사대부와 일반 서민의 무덤을 말한다. 능의 형식은 조성 형태에 따라 단릉(單陵)과 쌍릉(雙陵), 삼연릉(三連陵),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같은 능역이지만 각각 다른 능선에 조성한 능), 합장릉(合葬陵)으로 나뉜다. 능은 좌향(坐向)을 중요시하는데, 좌(坐)란 혈(穴)의 중심이 되는 곳이고, 좌의 정면이 되는 방향이 향(向)이다. 왕릉의 좌향을 보면 대부분 북에서 남으로 향하고 있다. 능은 산을 등지고[背山] 송림을 배경으로 아래쪽에 동·서·북 3면으로 곡장(曲墻, 또는 곡담)을 둘렀다. 곡장 안에 봉분을 만들고, 봉분의 밑부분에 12각의 병풍석을 둘러 봉분의 토사가 흘러내리는 것을 예방했다. 그리고 봉분 주위를 다시 난간석(欄干石)으로 둘러 보호하였는데, 난간석은 석주(石柱)·죽석(竹石)·동자석주(童子石柱)로 구성되어 있다. 난간석 바깥으로 능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돌호랑이 네 기와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돌양 네 기가 봉분을 호위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봉분 바로 앞에는 상석(床石)이 설치되어 있는데, 상석 아래에는 귀면(鬼面, 귀신 얼굴 모양)을 새긴 고석(鼓石)이 상석을 받치고 있다. 그리고 상석 좌우에는 망주석 한 쌍이, 그보다 조금 낮은 곳에는 장명등이, 그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각각 석마(石馬)를 대동한 채 서 있다. 제향(祭享)을 지내는 건물인 정자각(丁字閣)은 정(丁) 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정자각 뒤에는 제향 후에 축문을 태워 묻는 사각형의 석함(예감이라고도 한다)이 있다. 정자각의 동편에는 능비(陵碑)를 세워 보호하는 비각(碑閣)이 있고, 비각 아래쪽에는 수복방(守僕房)2)이 있다. 정자각 정면으로 참도(參道)가 깔려 있고, 참도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으며, 홍살문 오른쪽에 왕이 능에 제사를 지내러 올 때 홍살문 앞에서 내려 절을 하고 들어갔다는 배위(拜位)가 있다. 홍살문 밖 능역에 있는 재실에 능참봉이 상주했다. 조선 초기 능의 동남향에 신도비를 세웠으나 문종 이후에는 폐지하였다. 원(園)과 종실(宗室) 묘의 경우에는 봉분과 곡장, 상석, 정자각, 재실 등 대부분이 능과 같이 갖추고 있으나 그 규모가 작고, 봉분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대부분 생략되었다. 무인석의 경우 왕릉만이 설치할 수 있었는데, 이는 왕만이 군사를 거느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민묘에 대해 살펴보자.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무덤을 주로 산에 만들었다. 따라서 산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묘역을 조성하는데, 맨 뒤쪽에 왕릉의 곡장에 해당하는 외사성을 두르고 그 안쪽에 다시 내사성을 마련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성은 묘역 전체의 분위기를 아늑하게 함과 동시에 북쪽의 찬 기운을 가리고 좌우측을 북돋우는 (주산(主山)과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를 의미하는) 상징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는 무덤 뒤쪽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이 묘역 쪽으로 흘러드는 것을 막아 봉분의 침식을 방지하는 토목공학적인 효과가 주목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조선 중기까지 거의 보이지 않다가 중기 이후부터 등장하였는데, 지방에 따라서는 사성을 하나만 두르거나 설치하지 않는 곳도 있다(일부 지방에서는 새의 날개 모양처럼 생겼다 하여 ‘활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분묘의 형태를 보면, 조선 초기에는 고려 묘제에서 계승된 호석을 두른 직사각형 무덤[方形墳]이 일부 사용되었다. 일반 서민들의 묘는 대개 젖가슴 모양[乳形]이나 움 모양[突形]을 이루는데, 어느 경우나 정면에서 보면 반원형을 띠고 있다. 또 많은 경우 봉분과 사성을 연결하는 용미가 있는데, 이것은 지맥이 무덤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다소 풍수적인) 의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봉분의 앞이나 우측에 묘비를 세우고, 혼유석(魂遊石)3)과 지실(誌室)4)을 마련한다. 그리고 그 앞에 상석과 향로석(香爐石, 향안석(香案石)이라고도 한다)을 놓고, 다시 그 앞에 봉분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한 쌍의 망주석을 세운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경우이며, 일부 경기 지방의 조선 시대 사대부 묘에는 장명등과 동자석, 문인석, 석수 등을 세운 경우도 있다. 묘역을 꾸미는 데 있어 상석의 좌우에 긴 돌[長臺石]을 이용하여 단을 조성하는데, 이 돌을 계체석(階砌石, 제체석(祭砌石)이라고도 한다)이라 부르며, 이를 중심으로 묘역은 계절(階節)과 배계절(拜階節)로 구분된다. 계절은 무덤 앞의 성역(聖域)이고, 배계절은 계절보다 낮은 제를 드리는 곳이다. 이처럼 묘역 안의 계체석은 묘역을 안정감 있게 구분하고 석물의 배치를 용이하게 할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묘역의 역할을 구분하는 기능도 하게 된다.] 14:37~14:39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肅宗)(1661∼1720, 재위기간: 1674∼1720[45년10개월로 조선왕조 제2 최장기 재위]) 비(妃)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光山], 1661년 10월 15일(음력 9월 3일) ~ 1680년 12월 6일(음력 10월 26일))의 단릉(單陵)인 익릉(翼陵)으로 이동 14:39~14:45 익릉(翼陵)을 탐방 14:45~14:48 조선 제13대 왕 명종(明宗)의 외아들인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 ~ 1563)와 부인 공회빈 윤씨(恭懷嬪 尹氏, 1553년 7월 21일(음력 6월 1일[1]) ~ 1592년 4월 4일(음력 3월 3일))의 합장무덤인 순창원(順昌園)으로 이동 14:48~14:51 순창원(順昌園)을 사진촬영 14:51~14:56 1471년(성종 2) 왕으로 추존된 덕종(德宗, 1438 ~ 1457)과 비(妃)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 ~ 1504) 한씨(韓氏)의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같은 능역이지만 각각 다른 능선에 조성한 능)인 경릉(敬陵)으로 이동 14:56~15:04 경릉(敬陵)을 탐방 [일반적으로 왕릉은 정자각에서 바라 보았을 때 왼쪽에 왕의 능을, 오른쪽에 왕후의 능을 조성한다. 이와 달리 경릉은 반대로 오른쪽에 왕을 모셨는데, 이는 세상을 떠났을 때 신분의 차이(덕종은 왕세자였고, 소혜왕후는 대왕대비였음)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덕종의 능은 묘의 형태로 조성되었으나, 소혜왕후의 능은 왕릉의 형태로 조성된 사실도 흥미롭다.] 15:04~15:07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1661∼1720, 재위기간: 1674∼1720[45년10개월로 조선왕조 제2 최장기 재위])의 후궁이자 조선의 제20대 왕 경종의 생모인 옥산부대빈 장씨(장희빈, 1659 ~ 1701)의 묘인 대빈묘(大嬪墓)로 이동 15:07~15:09 대빈묘(大嬪墓)를 사진촬영 [정비가 아니지만 국왕이 되는 원자를 생산한 후궁은 통상적으로 묘소의 칭호가 '원'이 되어야 하나, 정쟁에 휘말려 사약을 마시고 죽은 희빈 장씨는 본래의 대우를 회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묘'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15:09~15:16 조선 제21대 왕 영조(1694년~1776년, 재위기간: 1724~1776년[51년7개월로 조선왕조 제1 최장기 재위])의 원비 정성왕후(1692 ~ 1757) 서씨의 단릉(單陵)인 홍릉(弘陵)으로 이동 15:16~15:23 홍릉(弘陵)을 탐방 [홍릉의 전체적인 배치는 쌍릉 형식이나, 정자각 쪽에서 바라 보았을 때 능의 왼쪽이 비어 있다. 이는 영조가 생전에 정성왕후와 함께 묻히려고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어 비워 두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조의 능이 동구릉의 원릉에 조성되면서 서오릉의 자리는 비어 있게 되었다. 그 배경으로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정순왕후 김씨는 사후 영조의 옆에 안장되는데, 이것이 동구릉 내의 원릉이다.] 15:23~15:26 1471년(성종 2) 왕으로 추존된 덕종의 아우인 조선 제8대 왕 예종(睿宗)(1450 ~ 1469, 재위기간 : 1468년9월~1469년11월[1년2개월로 조선왕조 제2의 최단재위])과 그 계비(繼妃)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1445? ~ 1498)의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같은 능역이지만 각각 다른 능선에 조성한 능)인 창릉(昌陵)으로 이동 15:26~15:39 창릉(昌陵)을 탐방 후 휴식 [창릉은 서오릉 영역 안에 조성된 최초의 왕릉이다. 창릉에 묻힌 예종은 1544년11월부터 1545년7월까지 약 9개월간 왕으로 재위한 제12대 국왕 인종에 이어서 두번째로 재위기간이 짧았던 조선의 왕이다.] 15:39~16:06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번지에 있는 서오릉 매표소로 원점회귀하여 동구릉에 이어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조선왕릉군인 서오릉의 탐방을 완료 16:06~16:07 서오릉 역사문화관으로 이동 16:07~16:14 서오릉 역사문화관을 관람 16:14~16:17 서오릉 입구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탐방을 완료 16:17~16:19 서오릉 입구 버스 정류장에서 구산역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707번 버스 승차 대기 16:19~16:28 707번 버스를 타고 서오릉 입구 버스 정류장에서 구산역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9분 소요] 서울 서오릉 안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