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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 가서나마 ‘뭘, 어찌 해볼 거라고..’
크리슈나무르티 : 꺼지지 않는 불꽃,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위하여
-- “미륵(彌勒)”의 시대를 살면서, “내가 안 바뀌면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The fundamental factor of self-deception is this constant desire to be something in this world and in the world hereafter.
인간들이 스스로를 속이는 근원적인 까닭은, 이승에서나 저승 가서거나 간에, 하여튼 그 뭔가라도 되려고 하는 이 끊임없는 욕망 때문입니다.
-- Jiddu Krishnamurti, The First and Last Freedom, 'Self-deception', Chapter 18.
[김기호님이 게시물을 공유했습니다. 2017년 12월 1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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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31] ‘남에게 속는 게’ 아니라 스스로 속이는 거라시니..
욕망의 화신이 되어 물·불 못 가리는 심보에 완전 주눅 들어버린 사람 아니라면, 저런 말씀은 처음 듣는 얘기가 아니겠지요? 수십수백 번 들어봤을 터입니다.
그러나 수천수만 번 들어본 얘기라고 해도, 그게 귀에만 익숙할 뿐, 몸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기는 여전히 마찬가지겠습니다. 말로는 평양에 왜 못 간답니까.
그 끝이 어떻다 해도, 다들 ‘일단, 내 욕망은 채우고 보자.’ 그런 심보라서 말씀이지요. 뻔히 낭떠러지인 줄 알면서도, 기어서라도 꼭 그 쪽 길로 간단 말이지요. 인생, 뻔히 “고해”인 줄 알면서도, 왜 끝까지 “고해”로 살다 가겠단 말일까요? 그거 해결해볼 마음은 먹어도 못 보고, 기껏 ‘자살’이나 꿈꾸고 산단 말이지요?
세상이란, 사회란 꼭 그런 바탕 위에 지어놓은 소위 ‘사상누각’ 아닙니까? 저번에도 드린 말씀입니다만, 그거 바닥 파내고 터다지기 좀 하든지, 무슨 철골을 때려 박든지, 여튼 어떻게 무슨 수를 좀 내봐야지요. 그거 아니면 거창하게 무슨 “인생”이라고 떠벌일 것도 없지 않습니까?
거기서는 ‘돈’으로 ‘명예’로 ‘내노라’ 하는 인간들도 아무 소용없는 겁니다. 심지어 무슨 ‘종교인’ 딱지를 붙이고 다닌다고 뭔가 좀 낫단 말입니까? 그저 ‘익명성’에 기대어, 한세상 온전히 “사랑”으로 살다 가시는 분 아니라면, 저 말씀 제대로 이해한 것도 아니지만 말씀입니다.
‘스스로 매우 찔리기도 하련만..’ 여전히 말로만 주절거리고 있군요. 그러나 달리 뭘 어떻게 더 할 수가 없어서 말씀이지요. 무슨 ‘야간정숙보행’도 아니고, 꼭, 이꼴로 갈 수밖에 없으니, ‘우째, 용빼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니, 당최 뭘 어쩌겠습니까!
부디, ‘왜, 꼭 그런 꼴밖에 못 보이고 있냐?’는 소릴랑 안 해주시길.. 여기까지 그나마 덜 흔들리고 온 거라고나 해주시길.. 과분한 말씀입니다. ‘남에게 속는 게’ 아니라 스스로 속이는 거라시니까, 그나마 뭔가 들킨 기분이 가려질 것도 아니고 말씀입니다.
그래도 ‘뭔가, 어찌 해보려고는 했단 말이냐?’ 그런 허물만은 좀 덮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라서 말씀입니다. 어차피 속고 속이는 거니까요. 다들 스스로 그런다는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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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1] ‘욕망’ 아니면 뭘로 산단 말일까요? “무위자연?”
“눈 뜨고도 코 베이는 세상”으로 됐다고 합니다만, 사실상 ‘지 코 지가 베는 꼴’ 아닙니까? 애지중지, 이 ‘나’라는 게 바로 그 원흉이니까요.
무슨.. 저승씩이나 가서 또 뭘 더 어찌해볼 거라고.. 여기서 다 해버리고 가야지, 거기 가서 무슨 짓을 더 한단 말일까요? 하기사 ‘욕망’이 깔린 일이라니까, 여기서 매양 하던 짓이군요. 평생 찐득하니 배어 있는 ‘습관’을 어쩌겠습니까만. 그걸 글쎄 죽은 뒤에도 또 하겠다고..
인간이라는 게 ‘한평생 스스로 속이며 살다 가는 거’라는 말씀이신데, 우리가 다들 그 “사실”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 걸까요? ‘자기기만’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지 않습니까? 다들 그러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로서는 ‘평생, 그나마 솔직하게 살아왔다’고 앵조가리며 앙탈이라도 부리고 싶은 심정인데 말씀입니다. 우리 사회, “내가 만든 세상”을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꼴 자체가 이미 ‘자기기만’이지요? 더구나 지식인들이라면..
저번에 제목을 이렇게 고쳐봤습니다만, “죽으나 사나 산다는 게 ‘죽을 맛’인데..” 그러니까 다들 저 엄청난 ‘갈등’ 속에서 하염없이 그저 ‘죽을 맛’으로, ‘죽고 싶은 심정’으로 살아들 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자기기만’입니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게 살자고 태어났지, 왜, 죽자고 태어났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사는 게 사는 꼴이 아니며, 기어이 ‘못 죽어’ 산다는 소리나 내지르고 있는 신세들이니, 그냥 “사는 게 죽을 맛”이니, 역시 “자기기만”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그런 거 살짝 더 덮어두자고, 저 장자 ‘호접몽’ 나비꿈 따위나 지어내는 거 아닌지 또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러니까 ‘욕망’ 아니면 ‘스스로 속이지 않는다’는 말씀이지요? ‘속이지 않는다’면 눈앞코앞에 ‘있는 거’ 그대로 제대로 확실하게 보고 거기에 따른 “행동”으로 살아가겠지요. 그런데 다들 그 잘난 소갈머리로 이것저것 ‘없는 거’ 다 지어내 놓고는, 저 멀리 그런 거 따라 꾸역꾸역 ‘못 죽어’ 산다고 사는 거라서 “속임수”다, 그런 말씀도 되겠군요. ‘저승’이라는 거 자체가 이미 저 잘난 주변머리로 얄팍하게 지어낸 거 아니란 말입니까? “그게 왜 꼭 죽어봐야 알 수 있는 거란 말일까요?” ‘죽으면 썩을 살..’ 역시 “속임수”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싶을 뿐입니다. “야, 이넘아! 죽었다가 살아나는 건..” 갑자기 그 얘기 생각이 불쑥..
죽은 사람 그리며 ‘좋은 데 가소서’ 하며 앞뒤 늘어놓는 말도, 그게 참 입에 발린 소리 아니겠습니까? 사실은 ‘있는 지 없는 지 모르는 걸,’ 아니, ‘분명히 없는 걸’ 왜, 꼭, ‘있다!’고 믿어야 한단 말입니까? ‘믿음’이라는 것의 속성이 바로 그런 거라고 해도. 불확실한 거 ‘믿을 거’ 없이 그냥 눈앞코앞에 확실하게 ‘있는 거’ 그거 제대로 보고 살다 가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역시, ‘말이 쉽지..’ 그런 생각부터 들지만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 ‘욕망’이 꿈틀거리는 한, 절대로 그건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지요?
‘없는 것’에 휘둘리며 “고해” 속에서 어푸아푸 ‘욕망’으로 살아갈 게 아니라, 그냥 바로 앞에 ‘있는 거’ 잘 보고 거기에 맞게 살아가면 되는 거겠지요?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지성”이다, 그런 가르침 맞지요? 새들도 주변에 벌레가 적거나, 환경이 ‘아니다!’ 싶으면 거기에 맞게, 이미 낳아놓은 ‘알’도 둥지 밖으로 굴려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런 게 바로 “지성” 아니겠습니까? 그 잘난 머리로 뭘 더 도모하자니 얄팍하게 곤비한 겁니다.
아마도 소위 ‘유위’라는 것이 바로 저 ‘없는 것’으로 이어진 ‘욕망’에서 나오는 것이고, 반면에 ‘있는 것’과 “지성”으로 연결되는 게 ‘무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욕망’ 아니라면 “무위자연,”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가며 살겠지요? 그런 게 “지성” 아니겠냐는 말씀이지요. 그때는 ‘죽을 맛’ 아닐 터입니다.
그때는 ‘지 코 지가 베는 것’도 아닐 테니까요. 하지만 ‘나’가 설치는 한, ‘지 코 지가 베게 되어 있는 거’ 아닙니까! 다들, 평생을 그거 하나 못 깨치고 죽어가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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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3] “자~기! 기! 만!”
그게 바로 ‘나’가 죽도록 해대는 짓입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애지중지하고 있는 이 ‘자아’라는 게 하는 행위가 딱 그거지요? 스스로 속여먹는 짓 말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전부 다 하나 같이 꼭 그러고 사는 거지요. 이승에서는 물론이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 ‘저승’까지 가서라도, 소위 저 ‘옥황상제 왼쪽에 턱하니 앉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상 말짱 ‘헛거’지만 말입니다.
극락이니 지옥이니 천사니 악마니 몽땅 다, 사투리로 ‘망구, 지 생각’입니다. 죽고 난 뒤에 뭐가 또 있을 거라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들이 수천수만 년을 꼭 그러고 살아온 거지요? 다만 이래저래 ‘얼’은 이어지겠지만요. 그렇게 스스로를 속여 먹는 마당에, 어찌 ‘인생이 고해’ 아닐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정작 인간들은 자신에게 허여된 고귀한 “삶”을 완전히 ‘딴 판’으로 살다 가는 겁니다. 역시 항상 하는 말이지만, ‘삶을 사는 게 아니라 고해를 견디고 있는 것’이고,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거지요.’
그러면서도 정작 ‘내가 나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한평생 그냥 살아버린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철저하게 ‘빛 좋은 개살구’ 꼴밖에 안 되는 굴레임에도 불구하고, 마냥 그대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니, 이게 어찌 ‘자기기만’ 아니란 말입니까? ‘빛’이나 좋으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빛’ 좋기도 그 얼마나 전전긍긍 노심초사 아등바등해야 되는 일입니까? 그 ‘빛’ 제 아무리 좋아봤자지만 말씀이지요. 쥐뿔, 무슨 ‘의미’가 있어야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젊다는 사람들마저도 “삶”을 산다는 게 뭘까, 궁금해하지도 않거든요. 늙어서 죽어가고들 있으면서도 “도대체 ‘삶’이라는 게 뭐냐?”고 묻지를 않는 거고요. 그러니 ‘고여서 썩어가고 있는 사회’에서, 겨우 하나의 나사 역할이나 하다가 가는 거지요. 인생 시작하는 젊은이들도 이 사실을 제대로 대면하라고 배우지 못합니다. 인간이라는 게 젊으나 늙으나, 다들 스스로 속이고 있는 거지요.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들이 한결같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도 다를 게 없습니다. 참으로 저 말도 안 되는 ‘마녀사냥’ ‘종족주의’ “대학살” 다 겪고도 단 하나 배운 게 없지요? 또한 꼭 1, 2차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저 수많은 전쟁에서 그 엄청난 인간들이 도륙당했으면서도, 거기서 뭐 하나 배운 거 없다고 해야겠지요? “지난 5000 년 동안 5000 명 이상 죽어간 전쟁이 5000 번도 넘는다”고 했습니다. 외우기도 좋게 말씀이지요. 그래도 근원적으로는 전부 다 ‘나 몰라라’ 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더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는 방법 따위들이 개발된 거는 덤이고 말이지요? 역시 현재진행형이기도 하고요. 자신이 그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당연히 거기에 스스로 책임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책임’이니 하는 이런 말들 자체가 아주 생소한 겁니다. ‘내 탓이요’로 못 느끼는 거지요. 아니, ‘내 탓이요’ 자체가 이미 자기기만입니다. ‘말로만’이기도 하니까요. 아니라면, 한국 사회에 케이 가르침이 퍼져도 한참, 엄청나게 퍼졌겠지요.
“죽으나 사나 산다는 게 ‘죽을 맛’인데,” 우선 그것부터 고치지 않는다면, 그 이외의 다른 모든 짓들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삼포’도 문제고 ‘오포’도 문제고 ‘칠포’도 문제 아닌 건 아니겠지만, 더 근원적인 문제에 눈길을 돌리지 못하면, 무슨 짓으로 어떻게 살아본들 그 얼마나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그 ‘관계’들이 하나같이 다들 ‘자기기만’이자 ‘속임수’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뭐 하나 제대로 굴러갈 수 있단 말이겠습니까? 시대의 화두, 친일매국노 후손들에게 계속 정권을 맡기자는 소리가 아니지요? 적폐청산 하지 말자는 소리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 이전에 정말, 그 어떻게 살아도 삶에 의미가 없다면, 그것부터 곰곰이 곱씹어봐야지요. “홍익인간” 건국이념이 없었다고 한들, 만들어내서라도 가야 할 판입니다. 올바른 가치를 기성세대가 안 가르쳐주었다면, 스스로 찾아서라도 알아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인간으로서 꼭 그렇게 해보라고 크리슈나무르티 그 분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이 퍼져가는 일만 해도, 앞 세대 누구 몇 사람만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그나마 지금은 훨씬 더 활성화되었겠지요? 최소한 무슨 모양이라도 좀 갖추어졌을 것입니다. 앞 세대 사람들도 미국이고 영국이고 인도고 간에, ‘도장을 몇 말’씩 찍어가며, 그 어디어디로 ‘유학’들 엄청 많이 갔다 오지 않았습니까?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크리슈나무르티 가르침을 접해본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을까요? 소문이라도 풍문으로라도 들어봤을 거 아니겠습니까? 거기서도 다를 스스로를 속인 겁니다. 그러니 ‘배워서 등쳐먹는 세상’이라는 소리도 있는 거겠지요. 꼭 그런 거 아니라도, 서슬 시퍼렇게 ‘각하를 지키는 것이 국가를 지키는 것’이기까지 했으니 더 무슨 말이 안 나왔겠습니다만, 지금이라도 뭔가 좀 꿈틀거리는 모습이 보여야 맞는 것 같은데도, 겨우 있는둥마는둥 불쌍한 꼬라지 인문학도 하나 생매장시켜놓고도 그예 아주 죽이겠다고 저렇게 설레발 치고들 있으니······.
이런 말들 역시, ‘촛불혁명’ 아니었다면 여전히 단 한마디도 못 할 처지입니다. 번역 · 게시하는 것도 누구 눈치봐가며 꼭 무슨 죄짓는 기분으로 이어왔겠지요. 어쨌거나 그냥 잠시 생각해보십시다. 이 세상에서 돈 · 명예 · 지위 · 권력 따위로 그 뭔가가 된다고 한들, 그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기껏해야 ‘나’ 좀 내세우는 짓밖에 더 됩니까? 실제적으로 세상에는 하나도 보탬이 안 되는, 단지 제 ‘기분’ 좀 좋은 듯한 일일 뿐입니다. 수천번 수만번 되풀이되는 그대로 ‘빛 좋은 개살구’ 꼴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딱 그거 하나 때문에 인간들이 다들 평생을 쌈박질로 보내는 거거든요. ‘삶’을 ‘전투’로 보내는 겁니다. “인생은 전쟁”이고요. 개인들 끼리, 국가 사이에, 민족 간에 두루 말입니다. 항상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몰라서 잔뜩 긴장하고 살아야 하고 말이지요. 그게 인간 세상이 숭배하는 소위 저 ‘가치’들의 실상 아닙니까? 부풀려서 하는 말이 아니라, 가까이 꼭 그런 모임도 널려 있고 말씀입니다.
‘촛불정신’이라는 것이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 가슴이었으면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게 무리 · 민중 · 시민이 되는 한, 그 길은 무리가 가는 데까지밖에 못 간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반드시 더 가보는 ‘개인’들이 나와야지요. 자유롭게 그래서 그렇게 이리도 가보고 저리도 가보고 해야, 사람 사는 세상이 좀 더 다양하고 풍요로워질 것 아닙니까? 그러는 과정에서 누군가 하나 둘 진짜 “사랑”이라 불리는 “그것” 또는 말씀 그대로 “나를 만나는 사람 만세!” “크리슈나무르티”도 만나볼 수 있을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나 비록 ‘세계사에 유례가 없다’고는 해도, 과연 ‘촛불정신’이 세상의 저런 도토리 키재기 가치들을 넘어설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라면 ‘세계사에 유례가 없다’는 찬양에도 뭐 그리 우쭐할 거 하나도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절대로 ‘촛불정신’을 폄훼하자는 게 아닙니다. 오로지 ‘촛불’로 시작된 ‘혁명’을 이어가자는 거지요. 시작은 있으되 끝은 없는 “저 위대한 혁명”으로 말씀입니다. 그런 거 저런 거 아니라면, 오늘날 “대멸종”의 위기에 대처하는 것 자체만 해도 아주 벅찰 지경 아닙니까? 저 ‘서구’ 따라가서는 절대로 문제 안 풀립니다. “5차 대멸종”까지 ‘주종은 다 살아남지 못했다’ 했으니, 아주 분명한 “인간멸종”의 말세! 여전히 그 길로 자꾸만 더 가야 쓰겠습니까? “인간이 좀 인간다워야지요.” 더구나 여기는 “홍익인간” 하자고 “나라”를 세웠다는 거 아닙니까! 오늘날 세계정세에 ‘그딴 소리 할 거 없다.’고요?
꼭 그런 거 아니라도, 저런 정신, 그 얼과 마음씨, 몽땅 다 까먹어버리고 백년원수니 천년원수니 하면서 어깨도 제대로 못 펴고 살아온 꼬라지 아닙니까? 그럼에도,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스스로 자신을 속이면서, ‘자기기만’으로 한평생 다 보내고 나서, 그 끝에서도 제 스스로 속이는 줄도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안 그런 척,’ 또는 힐끔힐끔 ‘남들 다 그렇게 가는 거니까,’ 나도 그냥 그렇게 가겠단 말일까요?
진실로, 그딴 식으로 살아오지 않았다는 겨레 아닙니까? ‘핏속’에 녹아도 있을 그 마음씨.. 참, 안타까운 사연이야 있겠지만, 그 ‘고운 마음씨’들이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고조선 때만도, 단군께서는 치세 후에 “신선”이 되셨다고 했으니, 저렇게 ‘내세’ 운운하면서, ‘신의 옆자리에 않겠다’는 생각들은 아예 할 즐도 몰랐겠지요?
거창하게 무슨 ‘인류’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근원적으로 내가 괴로우니까, 내 인생이 행복하지 않으니까, 최소한 이제부터라도, 나 하나만이라도 ‘진짜로’ 좀 “행복”해보자, 그런 얘기지요. 내가 불행하고는 세상이 행복할 수도 없는 겁니다만. ‘이기주의’는 이런 데서나 좀 써먹을 일이지요?
그러자니 지금 ‘나’를 불행하게 하는 이 모든 ‘소도구’들을 싸그리 다 내다버릴 일이지요. 그러니 먼저 그 ‘소도구’들이 어떤 건지, 어떻게 나를 몰아대는지 세세히 봐야만 되는 일이고요. 그게 “알아채기(awareness)”라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그거 잘 안 되는 이유 역시 ‘자기기만’ 때문입니다. 절대로 “행복”일 수가 없는, 그 “욕망”과 “쾌락”에 빠져서는 습관적으로 자신을 속이기만 할 뿐이니까요.
산다는 게 땀 뻘뻘 휘청휘청 엄청 “고되면서도,” 스스로 속이기를 ‘이딴 건 고된 거 아니다!’ 무슨 버릇처럼 그러다가 마는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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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3] “인간이 되어보자” 하는 저 젊은이들
사회라는 게 좀 훈훈해야 말이지요. 글쎄요, 작년 이맘때까지는 소위 저 “혁명”이라는 단어에 힘이 좀 들어가 있는 것 같았으나, 한 해 더 묵은 지금 혁명은 이제 서서히 그 불꽃이 사그라든 듯합니다. 권력의 핵심부 인간들부터 삐걱거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거기서 벌써 ‘기강해이’라나 그딴 소리가 나올 수 있는 건지, 대관절 무슨 마음으로 그 자리에 앉아들 있는 건지, 정말로 한갓 무슨 점령군 따위 심뽀들인지, 저래서야 이십 년 아니라 오십 년 정권 이어 잡는다고 한들, 저 “끝이 없는 위대한 혁명”은 딴 나라 얘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야 어찌 “우리나라 좋은나라” 되겠습니까! 하기사 행정부 관료들을 두고 “대통령 말도 안 듣는다.”고 하는 판이니, 과연 여기서 얼마나 더 나아지겠습니까? ‘교육부 장관’만이 아니라 “대통령”도, 관료들이 “뺑뺑이” 돌리는 자리라고요? 비록 한갓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여기서 왜 이런 넋두리 비슷한 소리까지 나오는 건지, 제 스스로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걸까요? ‘지가 뭐라고······.’ 그런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합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우리 갈 길이나마 한발두발 가야겠습니다. 얼마 전에도 ‘자기기만’이라는 항목으로 게시한 게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토록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도 까마득히 모른 척하고 살아들 가는 겁니다. ‘쾌락’ 아니면, ‘욕망’ 아니면, ‘나’의 발광 아니면 산다는 게 이런 꼬라지일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 평생을 짜다라 의미도 없이 ‘이런 꼬라지’로 살다 죽는다는 게 뻔한 사실인데도, 그딴 게, 이딴 게 “생의 의미”라고 빡빡 우기니까, 그게 바로 자기 스스로 속이는 겁니다. 다시, 사실은 ‘빤’한데도 ‘나 몰라라!’하고 있는 거니까, 그게 어찌 자기기만 아니란 말이겠습니까? 이 대목에서도 저기 ‘저 사람들’ 행태들이 괘씸하지만 넘어가기로 하고요. 아니, 왜, 저 친일수꼴들한테 꼬투리 잡힐 짓을 해댄단 말일까요? 제발, 도로 “니가 해 봐라!” 소리나 안 나오기를 바래야겠습니다. 각설. 저는 그런 거 아니라도 무지 조심해야만 할 처지입니다. 여전히 누군가 뭐 하나만 삐끗해주기를 바라고 있지 않겠습니까. 며칠 전에도 야밤에 ‘무슨 술을 사겠다고······.’ 한밤중에 불려서 나갔더니 ‘여자’까지 불러놓고 말씀이지요. ‘이 무슨 짓이냐..’ 하고 나무랐더니, “여자 바꿔주겠다!”고.. “한국외국어대학교” 내 저 부패한 무리들과 똑 같지요?
저승이니 하는 따위들이 진짜 있는지 없는지 알 수도 없는 판에, ‘분명히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스스로 속이고 있다는 증거 아닙니까? 서양 철학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라는 것 자체가 도무지 이해 안 되는 처지입니다만, 어째서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저 고양이가 왜 고양이가 아니란 말일까요? 무슨 ‘고양이 이데아’가 따로 있다는 말이었지요? 뭐, 그딴 거야 어쨌거나, 왜 이다지도 ‘믿음’을 강요한단 말이겠습니까? 꼭 이데아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저승이니 지옥이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겠습니다. 같은 차원이지요. 왜 그런 것들이 이토록 엄청난 무게로 인간들을 짓누르고 있을까요? 다들 그 지독한 무게를 그저 견디고 있는 거잖습니까! 그래서도 ‘불쌍하다’고 하는 거겠지만요. 그게 단 하나 “욕망” 때문이라는 말씀 아닙니까? 이 알량한 ‘나’의 발광은 언제나 “욕망”이지요? 거기에 무슨 사랑이 있겠습니까. 왜, 이런 것들마저 찬찬히 곱씹어보지도 못하게 가르친단 말일까요? 이 어찌 길이길이 ‘쌓여온 폐단’ 아니겠습니까!
다들 하나같이 정작 인간으로서 내면이 ‘풍요롭게’ 산다는 게 뭔지는 전혀 모르는 채로 그저 겉모습 치장하기에만 바쁜 겁니다. 그것도, 물질적으로야 무지무지 풍요로워졌다고 해도 그게 꼭 “행복”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으면서도, 그냥 거기서 ‘나 몰라라!’ 하면서 게기고 있는 것이고 말씀이지요. 각자 그런 모습부터 스스로 봐야 최소한 문제가 뭔지라도 알게 될 터이지만, 아예 보지도 않으니, 문제가 뭔지부터 함흥차사 감감무소식이란 겁니다. 그런 마당에 무슨 “인생”이 제대로 풀린단 말이겠습니까? 그렇게 마냥 ‘겉모습’이 ‘인생’이라고 우기고 있을 터이니, 피차 대화가 안 되는 거겠지요. 그래서 또 애들 가르치는 문제가 제일 크다는 말씀이겠고 말씀입니다. 애들은 아직 저다지 굳어버리기 전이니까요. 그리고 우리들 다 가고 나면 당연히 저들의 세상이니까요. 대한민국, 이런 세상, 어떻게 조금이나마 고쳐서 물려줄 수는 없겠습니까?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게 바로 그런 거 아닙니까? 여태까지 참 비참하고 엉망진창으로 굴러온 대한민국, 그나마 좀 그럴듯하게 만들어서 물려주자, 그런 거 맞지요? “촛불”을 들고 “횃불”을 들고, 심지어 쇠스랑 괭이 죽창까지 들었던 이유가 그런 것으로 이어지는 거 아니었습니까? 결국은 자기들만 묵사발 · 죽사발 · 개밥통 다 되어나갔지만 말씀입니다. 어제는 또 발전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한 사람이 죽었답니다. 그것도 야밤에 혼자 일하다가, 게다가 몇 시간이나 지나서 ‘발견’되었다고 하지요? 왜 이다지도 너무 자주, 하루걸러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걸까요? 서울 강남 어디는 또 빌딩이 무너지게 생겼다고도 합니다. 이런 사건들을 저 ‘자기기만’에 갖다 붙일 계략은 아닙니다만, 어쨌거나 개인 각자가 ‘자기기만’에 빠져 있다면, 사회 전체가 ‘속임수 천국’이 될 것은 마땅한 이치겠습니다. 문득 그 옛날 수강생 하나의 푸념이 떠오르는군요. ‘너무나도 망가져버린 세상,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망망하다.’고 했던가 그랬었지요. 그 시작이 바로 솔직하게 ‘내 모습’ 찬찬히 보아나가는 것입니다.
“자기기만” 가지고 얘기를 이어간다고 해도 아마 끝이 없겠지요?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지만, 우리들 인생 자체가 이미 속임수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 아닙니까? 빤히 “고해”로 살아들 가면서 ‘행복’한 척 “고해” 아닌 척하려니까, 그 근본부터 속임수일 수밖에요. 인생이라는 게 왜 이리 서글플까요? 그러면서도 또 ‘안 그런 척’ 엄청 치장을 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제시하는 저 모든 ‘가치’라는 게 꼭 그렇게 치장하는 도구들 아니겠습니까? 돈 · 권력 · 지위 · 명예 따위들로 대표되는 그런 것들 말씀입니다. 그런 것들 잔뜩 지니고 있다고 해서 인생이 고해 아닌 게 아니지요? 내면에 ‘갈등’만 안 일어나도 산다는 게 이렇게 엉망진창은 아닐 것입니다. ‘갈등’이 없다면 한껏 풍요롭고 행복하겠지요. ‘갈등’ 없다는 게 바로 “고요” 아니겠습니까? 생각이든 사물이든 간에, 이것저것 사이의 ‘마찰·갈등’ 아니면 인생이 왜 ‘고해’란 말이겠습니까? ‘갈등’만 없으면 바로 “고요”입니다. 거기가 “극락”이고 “천당”이지요.
본문 말씀은 결국 “욕망”이 문제다, 그 말씀입니다만, 저 “욕망”이 있는데 어찌 ‘갈등’이 안 일어나겠습니까? 욕망 자체가 이미 두 가지 상태의 마찰입니다. 지금은 ‘이런 데’ 나중에 ‘저렇게 되려’고 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두 다리 걸친 것이 ‘욕망’이고, 그 양다리 사이의 마찰이 ‘갈등’ 아닙니까? 그러니 ‘욕망’이 없어야 ‘갈등’이 안 일어날 것이고, ‘갈등’이 없어야 인생이 좀 평온하고 고요할 것입니다. 그게 “행복” 아닙니까? 최소한 그쯤은 되어야 거기서 “지성”이 일깨워지는 거겠지요. 그게 아니라 맨날천날 ‘나’한테 휘둘리며 살아가는데 어찌 “지성”을 입에 담기라도 하겠습니까? 모름지기 ‘욕망’이 아니라 “지성”으로 살아갈 일이지요? 그게 “사람이 좀 된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역시 ‘말로만’이라면 아무 소용 없겠습니다만요.
부디, 이 얼렁뚱땅인 나라, “대~ 한! 민! 국!” 아이들이나마 저렇게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슨 인공지능이니 4차산업혁명이니 그런 것들이 시시하단 얘기가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되어보자” 하는 마음씨의 저 고운 젊은이들이기 때문에 말씀입니다. 그런 ‘고운 마음씨’로다가, 다음 세대 저 ‘인공지능’을 부리게 해야지요.
그게 안 된다면, 기어이 ‘기계’한테서, “저 인간은, 노비로도 쓰지 마라!” 소리나 들을 게 뻔하지 않습니까? 꼭 그런 인간이 알고리즘, 프로그램 짜서 만들 거니까요. 또 아니면, ‘기계’ 스스로, 지 알고리즘 지가 짜겠지요. “인간은 대대로 노비로만 삼아라.”면서.. 서구열강 무슨 “인종주의”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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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1] ‘망구 지 생각’이라서 말씀이지요
여전히 ‘말투’가 거칠지요? 글쎄요, 뭔가 그런 ‘잡스런 것’들이 마음에 또아리를 틀고 덕지덕지 눌어붙어 있다는 말이겠지요. 안 그러면 왜 말투나마 거칠겠습니까.
이래저래 환갑진갑 다 지나고 허송세월 가운데 새삼 느껴지는 겁니다만, “생각은 시간”이니까 그 ‘생각’ 아닌 거라면, 세상만물 가운데서도 그 으뜸이 바로 ‘몸’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분명 ‘맘’보다는 ‘몸’이 더 근원적이라면 어떨까 싶습니다만. 어쨌거나 건강이라는 걸 두고 봐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몸’이기도 하겠습니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그 ‘몸’을 참 많이도 혹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 주제에 인생으로 무슨 대단한 일 했다고.. 크게 보면, 인간이라는 게 다들 저 ‘맘’ 때문에 ‘몸’을 온전하게 대접할 수가 없는 꼴로 살아들 가는 거지요? 오로지 지 ‘맘’ 때문에 지 ‘몸’을.. 이게 참으로 예삿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냥, 되는 대로 살다 죽을란다..’ 그러고 있는 꼴입니다. 제 모습 말씀이지요. 다른 이라고 그리 다를 리도 없겠지요?
그러나 이런 거 저런 거 다 두고라도, 과연 이 세상 누구라서 저 ‘욕망’에서 진짜로 해방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그가 그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더라도, 한반도 정계 재계 교육계 예체능계 등등 적재적소에서 톡톡히 “지성”을 행사하며 살아갈 수 있을 터입니다. 그러기 전에 각종 조직종교의 포교·선전·선동에 포섭당해버리지만 않는다면 말씀이지요. 여기서도 “진리는 조직할 수 없다.”는 말씀을 안 꺼내올 수가 없는 내력이겠지요? 역사적으로나 신화적으로나 진짜배기 그런 사람들은,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그저 ‘산’ 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것으로 설명되고 맙니다. 그것도 누군가 ‘신선’을 바로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스토리 전개보다는, 기껏해야 ‘나무꾼’ 비슷하게 등장할 뿐이었지요? 그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재수 좋은 경우가, 사냥꾼한테 총 맞은.. 그 사슴 만나는 기적 아니었습니까? 그것도 범죄라고 생각도 못 하는 것 같은 ‘절도’ 끝에 우째우째 ‘선녀’ 만나는 행운이 오는 거였으니까, 두루뭉실 아무래도 저 ‘욕망’이 군데군데 좀 개입을 해야 될 것도 같습니다. 각설.
일단은 모든 인간들 관심이 “‘나’ 부풀리기,” “자아확장”에 있으니, 저런 말씀이 귀에 솔깃하게 들릴 리가 없습니다. 평생을 ‘나’ 내세우려고 또는 ‘나’로부터 도망치려고 저렇게 이렇게 아등바등 전전긍긍 노심초사하는 것밖에 모르고 살았는데, 순간순간을 그렇게 살고 있는데 뭐가 어떻게 된들, 오히려 그게 ‘자기기만’이거나 말거나 아니겠습니까? 기나 마나, ‘나’를 내세워서 세상이 그럭저럭 제대로 굴러가게 되는 거라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세상 모든 불행의 씨앗이 바로 그 ‘나 내세움’ 때문이라서 말씀이지요.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한평생 스스로 속고 속이며 살다 가는 게 소위 “인생”이라고 거창하게 떠들어대는 거라는 생각에 다다르면, 도대체 인생이라는 것이 허망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제 아무리 ‘인생은 나그네길’이라고 읊조린들, 내 신세 “하숙생”이라고 노래로 불러본들, 그런 하소연들이 과연 어디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일까요? ‘공수래공수거’라고 한자말을 끄집어 내봐도 역시 딱 그 처지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거기서 한 발 더 떼어볼 생각들을 못 하는 겁니다.
“교육의 역할.” 결국 문제는 아이들부터, 인생 시작 그 시절부터 ‘삶의 근원’에 대한 가르침이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그런 가르침 없이 스스로, 그야말로 참된 인생 “길”을 찾아가는 아이들이 생기기는, 또 그야말로 저 나무꾼 ‘절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겠고 말씀이지요. 설령 그런 마음을 내보는 이가 있다고 해도, 역시 결국에는 ‘조직’에 포섭되어버리고 고작해야 ‘일종의 서비스업’ 종사자로 전락하기밖에 더 됩니까? 거짓말 안 보태도, 부풀리지 않아도, 분명히 ‘수천 년’을 꼭 그렇게 굴러왔습니다. 그 점에서는 오늘날 동양·서양 똑같아서 별 차이도 없지요? 글쎄요, 이게, 도저히 안 되는, 여전히 참으로 꿈만 같은 일일까요? 그러나 바야흐로 인류는, 지구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절체절명의 ‘인류세’에 도달한 거 아닙니까? 지질학적으로도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오늘날 분명히 그럴 수 있는 “성인의 시대”를 맞이한 것입니다. 인류사 수천 년 만에 완전히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참으로 복 받은 ‘기회’지요. ‘기적’도 이런 “기적”이 없는 시대입니다.
인간에게도 그렇고 자연에게도 물론인데, 그렇게 가장 필요하고도 절실한 일에, 대한민국에서는 그 누가 얼마나 어떻게 관심들이 있을까요? 역시 처음 하는 소리도 아니지만, ‘홍익인간’을 건국이념으로 한다는 박달민족, 흰옷 입은 사람들의 “교육”에서조차 그다지 관심 있어 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자신에게 “이로울 리”가 없는 조직 “종교”에서 저런 가르침에 관심을 가지겠습니까, 하물며 권력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에서야 더 말할 게 없겠지요? ‘닐러므삼하리요.’ 정권을 바꿔봤자, 대표자 한 사람 잘 뽑았다고 해봤자 뭐가 된단 말이겠습니까? 삼천리 금수강산 방방곡곡, 처처에 이런 사정 저런 사연 없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하필 대한민국 아니라도 어떻게 인간들이 알아먹든 말든, 저런 말씀 한 마디 두 마디 평생토록 아니 할 수가 없으셨을 터이니.. 수고로운 줄도 모르셨겠고요. 아마도 참으로 “행복”하게 살다 가셨겠지요. 어떤 “종교”의 수장도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했다지만, 아마도 그 “행복”이 서로 다른 건가 봅니다. 자기 ‘조직’으로 세상은 망가지는 건데, 그게 무슨 “행복”이겠습니까? 역시 ‘자기기만!’
지구촌 자체가 다 망하게 생겼다는 둥, 인류세(Anthropocene) 시작이 산업혁명이라는 둥, 제 아무리 어두운 시절이라고는 해도, 어떻게 가물에 콩나듯이라도 하나 두나 “진리의 말씀”을 ‘듣는 이’가 생기기는 생길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나아가 저러한 말씀들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저’ 하는 마음에도 걸맞아서, 고조선 이전부터 이어져 왔을 이 흰옷 사람들 ‘얼,’ 또는 그 ‘민도’에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을 미치게 될 수는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한테 전혀 그런 의도가 없다고 해도 말씀이지요. 글쎄요, 이미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그런 의도가 바닥에 깔려 있는 건 아닌지나 모르겠고요. 그나마 집착이나 미련이라도 없다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나 하나야 세상에서 뭐가 어찌 되어도 좋다.”고 좀 ‘아닌 것 같은’ 말도 중얼거리곤 하지만, 역시 글쎄요, 과연 얼마나 실속이 있을는지.. 그래도, 그게 그 어떻다 해도, ‘될 일’이라면 되고야 말 것이고 ‘안 될 일’이라면 무슨 ‘용빼는’ 재주라고 해도, 될 일이 아니니까요. 끝내 스스로 위안 삼아 중얼거리는 말, ‘이게 어떤 일인데..’
좀 다른 얘기 같습니다만, 코로나 전세계적인 역병 시절, 대한민국이 뭔가 좀 잘 해나가는 게 있다고 해도, 소위 치사량 ‘국뽕’ 유투브 등, 구태여 그런 걸 들춰내서 막 자랑 꺼리로 삼아야 하는지.. 오히려 못 나고 안 되고 못 하고 매끄럽지 않은 것들을 건드려서 조금이나마 더 나아지게 해야 하는 거 아닐는지.. 그렇게 바람직한 게 하나라면, 꼴랑 저런 자랑꺼리 들추는 건 열에 백에.. 마구 쏟아내는 것으로 보여서 말씀입니다. 정치에서는 완전히 반대지요? 그래서 ‘야당’이라는 게 있는 것이기도 하겠고 말씀입니다. 물론, ‘잘 하는 거’ 더 잘 하게 해줄 수 있으면, 그것도 바람직한 행동이 되겠지만요. 대한민국 정치가 어련하겠습니까? 소위 ‘언론’이라는 것도, 저 ‘정치’보다 나은 게 단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람직한 언론인이 없는 건 아니겠습니다만, 그 대부분은 소위 ‘자본,’ 돈에 얽매여 있을 뿐입니다. 잘은 몰라도, ‘언론의 역할’ 운운해쌌지만, ‘독립언론’이라고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 대부분이 과연 얼마나 “언론” 역할 제대로 해내는지, 전혀 그런 것 같지가 않아서 말씀입니다. ‘기레기통’이라는 말까지 생겼지요? 여튼 끝내 제 자신을 문제 삼기부터 해야겠지요.
그건 그것대로 문제 아닌 건 아니지만 그것에서 더 확장이 되면, ‘세상’이라는 것은 참 정말 그야말로 ‘요지경’이라서 저런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를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를 나날이 ‘배척’ ‘배제’ ‘열외’시키려는 심보들이고, 끝내 ‘압박’ ‘핍박’ ‘고립’ ‘매장’으로 나아가곤 하는 거 아닙니까? ‘살육’ ‘도륙’ ‘제노사이드’ ‘홀로코스트’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말씀입니다. ‘세상’이라는 것은 그렇게 참으로 엉망진창으로 조직되어 있는 것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 꼭 그런 식으로 굴러온 것이고, 그나마 “민주주의가 대안이다.”는 얘기들을 하고 있지만, ‘권력’ 자체가 본래 ‘자기들만은 것’이었던 인간들은 그런 말 한마디도 제대로 가갸거겨 발음도 못 하게 짓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비 리그’는 아니라 해도, ‘그들만의 리그’라든지 핵피아 관피아 교피아 철피아 쇠피아 따위 ‘무슨무슨 피아’ 얘기는 오히려 너무 지엽적인 세부항목이겠지요? “자유”를 얘기해보자 하는, 제 개인적인 처지에서도 하루하루 가해져오는 그런 압력이 심해지고만 있습니다. 은근히 무섭기까지.. ‘요지경세상’은 세월이 갈수록 더 ‘요 지경’으로 변해 가겠지요?
그런저런 사정들을 인간들 각자 인생살이 ‘자기기만’과는 완전 별개로 다룰 수도 없지 않습니까? 끝내 내가 이래서 세상이 이런 거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세상 모든 인간들이 꼭 그러고 산다고 해도, 소위 “종교”에서만은.. 빼박 그래서 안 되는 경지 아니겠습니까? 구태여, 아무리 봐도 ‘말로만’일 뿐인 듯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저’ 하거나 말거나, 우짜든지 간에 딱 저런 차원에서 애들에게 “행복하게 살아라.”하고 가르쳐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다못해 ‘부디.. 너희들은 나처럼 살아버리지 마라!’ 하고 가르쳐야만 하겠습니다. ‘내’가 요지경 속에서 요 지경으로 살아버리는 거니까, 그런 선생, 그런 아빠처럼 살지만 않는다면 세상이나 인생이나 간에 ‘요 지경’은 아니겠지요. 설령, ‘아름다운 옥으로 만들어진 연못’은 무슨.. 작은 통에 색종이 찢어 넣고는 바늘구멍 뚫어놓은 주제에 말씀입니다. 요지경이라는 게 절대로 긍정적인 의미일 수가 없지요? 모름지기 “교육” 이념으로서 “홍익인간”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유례가 없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그게 “종교”의 본령이기도 하겠지요?
별로 환영해주지도 않는 하찮고 변변찮은 글, 대한민국 누구 시킨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 하나 기다려 읽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 글, 주저리 하소연 같기만 해서 쓰다 말다 냅두다 하고 이 아까운 세월만 축내고 있을 따름입니다. 바다는 가깝지만 세월 섞어 낚시해볼 생각도 없고요. 그래도 한번씩, 어떤 때는 ‘말이 좀 달라집니다만’이라거나 ‘문득 든 생각입니다만’ 따위를 내걸고 그냥 쭈욱 갈겨지는 날도 있습니다만, 기어이 저렇게 ‘해꼬지’나 안 당하면 다행한 일이라서 그다지 ‘힘’ 나는 일도 아니고 말씀입니다. ‘천하지대본’의 바탕이라도 되어 있었어야 하겠거늘, 그 기본적인 노동을 배운 적도 없어서 말씀입니다. 배우나 마나 한 퇴기 논밭이 있을 리도 만무하고 말씀이지요.
아마도 이런 말은 핑계요 변명이겠지요? 그러구러 생각나는 구절 하나.. ‘이링공 뎌링공 하야 나즈란 디내 와숀뎌..’ ‘오리도 가리도 업슨 바므란 또 엇디 호리라.’ 젊은 날, “청산별곡” 여덟 수는 또박또박 다 외웠었는데, 이제는 문득문득 입에 붙은 한두 구절 읊조릴 수 있을 뿐이군요. 정확한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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