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국회의사당터
현재 서울시 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안중근의사 기념관, 백범광장 등이 있다
♤ 국회의사당
1945년 8월 15일 군국주의 일본의 패망으로 이땅에 미군의 군정통치가 2년여 이어오다가 1948년 5.10 총선으로 구성된 제헌국회는 첫 집회를 1948년 5월 31일, 군국주의 일본의 민족억압의 상징인 조선총독 부 건물인 중앙청 중앙홀에서 개원식을 거행하였다
2년여 가까이 사용하던 총독부 의사당은 2대 국회가 개원되자마자 발발한 6.25전쟁으로 피난길에 오른다
남으로 남으로 밀리는 전세에따라 대구문화극장, 부산문화극장과 경남도청 무덕전을 회의장 등으로 전전하던 국회는 휴전이후 태평로 시민회관 별관에 자리잡고 제7대 국회때 까지 30여년간(1975년까지) 사용하게 되었다
그후 태평로의사당의 협소함과 민의의 전당인 국회를 신축하자는 집권부의 의지에따라 1959년 제4대 국회때는 남산에 의사당건물을 신축하는 건립안이 채택되었다
기반작업에 착수하여 4·19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육군 공병단이 건설에 투입되는 등 건설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으나 박정희 소장의 5.16군사쿠데타로 중단하 게 된다
1966년 2월 국회의사당 건립위원회가 구성되어 오늘날 여의도 의사당을 세운 모체가된다
당시 의사당 후보로는 사직공원, 종묘, 신문로 서울고등학교부지, 필동의 수도방위사령부 등 10여곳을 선정하여 타당성 조사를 하게 된다
그후 1968년 4월 여의도 양말산 일대 10여만평을 의사당건립 적합지로 선정한후 2년 여에 걸쳐 종합설계를 완성하게 되었다
1969년 7월 17일 21주년 제헌절을 맞아 기공식을 갖게된후 1976년 9월 1일 준공식을 갖게 되었다
♤ 옛 어린이회관 (서울시 중구 소파로 46, 회현동1가 100-177)
조선신궁이 있던 시절 신궁으로 올라가던 계단이 있었을 자리로 추정되는 급경사 계단의 왼쪽에 서있는 이 건물은, 애초 박정희 정권 때 어린이회관으로 세워진 건물이다
육영수 여사가 관리·운영하는 육영재단을 설립한 것은 1969년 4월 4일의 일이다
이후 한 달 뒤인 5월 5일 어린이날, 신문들이 일제히 ‘동심의 궁전, 여기는 우리들 세상, 동양 최대의 어린이 회관’이라 칭송해 마지않던 어린이회관 기공식이 치러졌다
대한민국 최초의 어린이회관으로서 1969년 5월 5일 공사를 시작하여 1970년 7월 25일 개관하였다
개관 후에는 몰려든 관람객들로 인한 기물 파손, 인력 부족 등 운영상의 문제로 3일 만에 휴관하기도 했고, 불편한 계단, 유용한 공터의 부족 등이 문제로 제기되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어린이들이 주로 이용하였고, 과학오락실이 가장 인기가 있었다고 조사되었다
남산 어린이회관은 1974년 7월 국립중앙도서관의 이전으로 문을 닫기까지 총 297만여 명, 일일 평균 2,500여 명이 이용하였다
1988년에 국립중앙도서관이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이 들어섰다
현재 건물 내에는 서울시 과학전시관에서 운영하는 분관으로서 지하층과 지상 1, 4, 5, 6층에는 수학과 과학 학습을 위한 시설이, 2, 3층에는 교육연구정보원 에서 운영하는 지구촌민속교육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 안중근의사 기념관 (서울시 중구 소월로 91, 남대문로5가 471)
안중근의사 기념관과 상(像)은 그를 기리는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서 설립하였다
안중근의사 숭모회는 안중근을 추모하는 단체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단체는 1963년 친일파 윤치영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윤치영)는 일제 침략전쟁을 찬양해 총독부로부터 훈장을 받기까지 한 인물이다
이러한 역설은 초대 이사장에 그치지 않고 이은상, 백두진 등 이후 이사장들도 친일시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로 이어져왔다
안중근 의사상 역시 친일 조각가 김경승이 조각한데다 가(1974년) 건립비용을 낸 사람 중에도 친일 전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백범 김구상 못지않은 부절적 하다하여 2010년 10월 22일 재건립되었다
박정희는 '민족정기(民族精氣)'가 아닌 '민족정기 (民族正氣)'라는 엉뚱한 휘호를 남겼다
♤ 백범상(像) (서울시 중구 회현동1가 100-115)
백범 김구상을 조각한 김경승은 미술계의 대표적인 친일전력자 중 한 명이다
김활란이나 김성수 등 친일인사들의 동상을 제작하는 동시에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이순신 장군상(경남 진해)이나 백범 김구상(남산)과 안중근 의사상(남산) 까지 만든 김경승이고 보면, 그렇게 부적절한 캐스팅 이 따로 없다
왼쪽(바라보는 기준) 뒤의 글씨는 이광수가 윤색?한 백범일지의 '나의 소원'이고,
오른쪽 뒤의 글씨는 이은상이 쓴 김구 약력이다
그리고 동상 받침돌 오른쪽에는 박정희의 글씨가 새겨져있다
완전히 친일파에 포위당한채 방치되어 있는 백범 선생님은 편안하실까?? ㅠㅠ
그나마 위안이라면 장개석(중화민국총통)의 건립기념 글이다
한양공원
백범광장에서 소파로를 따라가다 보면 서울미래유산 으로 지정된 한양공원비가 서울 중구 소파로 57 남산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100여m 올라간 지점에 무심히 서 있다
차를 타고 남산을 드라이브하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외진 곳이다
비석보호용으로 보이는 사각 돌기둥 3개가 꼽혀 있다
한양공원은 기록이나 사건 목록에 없는 이름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1908년 남산 기슭 30만평을 무상임대받아 조성한 위락시설이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10년 공원 입구에 표지석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885년 불과 19가구 89명에 불과하던 국내 일본인 수가 1905년 러·일전쟁 승리 후 1986가구 7677명으로 불었다
열도에서 건너온 일본인 가족용 놀이터였다
앞면에 새겨진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는 네 글자는 고종의 친필글씨이다
1910년이면 끈 떨어진 권력이지만 황제의 글씨를 함부로 길거리에 세우지는 않았을 터인데 왜 친필을 내렸을까
남산땅을 야금야금 잠식한 채 곳곳에 신사와 공원을 세우는 것을 보다 못한 고종이 이곳이 조선땅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지명이 들어간 비석을 하사한 게 아닌가 추측해 볼 뿐이다
한양공원은 공원 구실을 못했다
일제는 공짜로 얻은 땅에 13만평 규모의 조선신궁을 짓기로 하면서 무성하던 소나무를 송두리째 뽑았다
그리고 1918년 공원을 폐쇄하였다
해방 이후 행방이 묘연하던 비석은 2002년 케이블카 승강장 근처 철조망 안쪽 풀숲에서 발견됐다
비석 뒷면은 곰보딱지처럼 무참하게 정으로 쪼여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다
비석을 세우는 데 돈을 댄 친일 부역자의 명단이라는 설이 난무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조선신궁 건립 10주년 기념으로 발간한 사진집인 ‘은뢰’에 실린 비문 뒷면 사진을 통해 문구 대부분이 해독됐다
전체 내용은 일본인 경성거류민단장이 쓴 평범한 ‘한양공원기’에 불과했다
한양공원비는 홀로 남산의 불행했던 과거를 품고 비바람 앞에 서 있다
♤ 비석 뒷면 전문(全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