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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무일도 스크랩 2014년[가해] 8월 8일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BABY 추천 0 조회 51 14.08.07 14: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8월 8일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아침기도

 

8월 8일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저녁기도

 

8월 8일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끝기도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 

 

1170년경 스페인의 칼라루에가에서 태어났다. 팔렌시아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오스마 대성당의 참사 위원이 되었다. 알비주아 이단을 거슬러 행한 설교와 자신의 모범적 생활로써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이 일을 수행하고 계속하기 위하여 많은 동료들을 모아 설교회(도미니코회)를 세웠다. 1221년 8월 6일 볼로냐에서 세상을 떠났다.

 


도미니코회 역사의 여러 자료에서
(Libellus de principiis O.P.: Acta canonizationis sancti Dominici: Monumenta O.P. Mist. 16, Romae 1935, pp.30ss.,146-147)

 

그는 하느님과 더불어, 하느님에 대해 말했다

 

그의 생활의 거룩함과 그 마음속에 타오르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미루어 보아 도미니코는 은총의 뽑히운 도구임이 틀림없다. 그는 언제나 꿋꿋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성격은 연민이나 동정심으로 마음이 움직일 때 외에는 아무 변함이 없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기쁨 마음은 얼굴 표정을 기쁘게 만든다."라는 말이 있듯이 도미니코는 인자하고 기쁜 표정을 통하여 자기 영혼의 평온을 드러내 주었다.


그는 어디서나 말과 행동으로 자신이 복음의 사자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낮에는 자기 형제들과 동료들을 대할 때 그보다 더 명랑하고 소탈한 사람이 없었고 밤에는 그보다 더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말이 적고 과묵한 편이었다. 그리고 입을 열 때는 기도 중에 하느님과 더불어 대화하거나 아니면 하느님에 관해 형제들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형제들에게도 이렇게 하도록 권고했다.


도미니코는 기도 드릴 때 하느님께 특별히 청하는 것 한 가지가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으로 하여금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게끔 해주는 그 열렬한 사랑을 하느님께 구했다.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하여 자신을 송두리째 바칠 때만 자신이 그리스도 신비체의 참된 지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모두 바치신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고 싶어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오랫동안 깊이 생각한 후 하느님의 감도를 받아 마침내 설교 형제회를 세우게 되었다.


저술과 강론을 통해서 자기 형제들이 신구약 성서를 끊임없이 연구하도록 권고했다. 언제나 성 마태오 복음서와 성 바울로의 서간들을 가지고 다녔으며, 거의 외울 정도로 열심히 읽고 연구하였다.


두세 번이나 주교로 선임되었지만 그때마다 거절했다. 주교직을 갖기보다 자기 형제들과 함께 가난하게 살아가기를 더 원했다. 일생을 통해서 내내 흠 없이 순수성을 간직했다. 신앙을 위해 매맞고 몸이 산산이 찢기우면서 목숨을 바치기를 열렬히 원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도미니꼬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전심 전력으로 사도적 생활 양식을 따라간 사람을 알았습니다. 그 사람은 천국에서 사도들의 영광을 함께 누리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42. 수도회 창설자편 (4) 성 도미니코(상) 

 

복음의 진리 열정적으로 설교

이단 맞서 정통 교리 전파
설교자회 도미니코회 창설

 

 

12∼13세기의 교회는 제2차 3차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이단자」들의 척결을 논의할 만큼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교리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여러 가지 이단 운동으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특히 가타리(Cathari)파 같은 경우는 프랑스 남부 지방에 광범위하게 퍼져 기사 귀족 영주 심지어 일부 성직자들까지 추종자가 생기는 현상을 빚었는데 이들은 교회를 부정하고 마니교에서 주장하는 이원론을 믿으며 교계제도의 불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순회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모았다.

 

이들의 세력 확장은 교회는 물론 국가의 질서마저 무너뜨리는 우려를 낳게 했고 심지어 이단 조사를 위해 파견된 교황 사절이 암살되고 알비(Albi) 지방의 가타리파를 근절할 목적으로 십자군이 조직돼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도미니코수도회(일명 설교자 수도회, Ordo Praedicatorum)의 창설자 성도미니코(Dominicus 1170∼1221)는 프란치스코 성인과 함께 12∼13세기 교회 쇄신에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로서 그는 당시 교회를 위협하던 가타리파 등 이단에 맞서 교회 정통 교리를 전파했고 수도회 설립 역시 그러한 참된 신앙을 적극 수호하고자 하는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스페인 북부 칼라루에가(Calaruega)에서 출생한 도미니코는 사제였던 삼촌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성직 교육을 받았으며 교육 중심지로 유명한 팔렌치아에서 문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성인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들에 의해 성직의 길을 걷도록 키워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자들은 자녀를 가지면 일찍부터 결혼 생활을 할 것인지 성직자로서의 삶을 살 것인지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독실한 신앙을 가졌던 이들에게는 성직을 준비하는 자녀를 두는게 큰 기쁨이었다.

 

성인의 탄생과 관련해서는 특별한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환한 빛의 등불을 입에 문 강아지 한 마리가 품속으로 들어와 그 등불로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태몽을 꾸었는데 이는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의 등불로 인해 죄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쳐 예수님께로 인도할 위대한 설교자를 잉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또 성인은 이마에 반달 모양의 상징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그 어머니가 꾸었던 꿈처럼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 속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빛을 비추어 줄 것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공부를 마친 도미니코는 고향 교구 오스마(Osma)주교좌 성당의 참사위원이 됐는데 참사위원이란 중세 유럽 주교좌 성당에 있던 제도로 성당 중앙 제단 주변에서 매일 규칙적으로 성무일도를 바치면서 중요한 일을 함께 결정하는 사제들을 말한다.

 

이를 시작으로 공동 생활을 하게된 도미니코는 외교 사절로 덴마크 등 북부 유럽을 다니면서 이단 운동에 위협받고 있는 교회 현실을 목격할 수 있었고 그로인한 심각성을 체험하게 됐다.

 

이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이단에 대응키 위한 시토회 설교 수사회에 합류한 도미니코는 9년 동안 이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설교자회 창설을 구상했다. 이단의 위협에 빠진 교회를 구하기 위해서는 사도들과 같은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수도회가 필요하다는 절감에서다.

 

그가 구상한 수도회는 절대 청빈에 바탕을 두면서도 세속 가운데 살며 사람들의 회개와 개종을 촉구하기 위해 어느 곳에라도 갈 수 있는 적극적인 수도회였다.

 

1215년 툴루즈(Toulouse)에서 첫 회원을 모집하고 풀크(Fulk) 주교 허락하에 활동에 돌입한 도미니코는 1216년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단체를 인준하는 교황 문서를 받음으로써 공식적인 수도회 기틀을 마련했고 그 다음해 교황청에서 발행한 공문을 통해 명실 공히 설교자 수도회로 인정을 받았다.

 

당시 교회 상황에서 설교를 할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주교들에게 제한돼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이같은 교황청의 관심은 수도 생활안에서도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그간 교회가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목 형태를 선보이는 것이기도 했다.

 

증인들에 따르면 도미니코는 어느 곳을 가거나, 누구와 함께 있거나, 항상 사람들을 격려하는 말을 했고 또 많은 교훈적인 이야기들로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었다. 어디에서나 말과 행동은 복음의 삶을 사는 사람다웠다.

 

1233년부터 시작된 그의 시성 절차에서 증언자로 나선 사람들은 『그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끊임없이 열렬히 기도했으며 또 밤새도록 기도하곤 했는데, 때로는 상당히 시끄러워서 그의 신음소리와 울음소리에 형제들이 잠을 깨기도 했다』고 전했다.

 

도미니코는 교회와 복음의 진리에 열렬하고 헌신적이었으며 아울러 여러 가지 운동이나 공식적인 교회의 한계선 너머에 있는 참 가치들에 대해서는 민감한 사람이었다. 다감한 성품을 지녔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는 달리 의지가 강하고 통솔력도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진다.

 

[가톨릭신문, 2004년 12월 19일, 이주연 기자]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43. 수도회 창설자편 (4) 성 도미니코(하) 

 

(그림설명)

그림은 이단인 알비파에 대항한 성 도미니코의 열성을 표현한 「불타지 않는 기적의 책」.

 

가난실천하며 순회설교 헌신
교구 지원 안받고 가난 선택
끊임없이 기도하며 성서연구

 

 

1215년 툴르즈 교구내 법적 설립을 인준 받은 설교자들의 수도회는 한편 풀코 주교로부터 「항구성을 띤 설교자들의 직무」를 맡게 됐고 도미니코와 회원들은 이에따라 순회 설교에 헌신하는 진정한 수도 공동체를 건설하는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설교자들의 수도회 첫 공동체는 교구로부터 설교에 투신할 수 있는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됨으로써 개인적인 가난만을 실천했다. 그러나 5년여가 지난후 수도회는 이같은 고정적 수입을 거절하고 공동체 전체의 엄격한 가난을 채택했다.


교회내 전문가들은 이러한 도미니코의 결정이 1218년 포르치운쿨라에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만났던 것에 깊은 연관을 두고 있다고 풀이한다.


프란치스코가 지식과 문화에 매이지 않고 좀 더 철저하고 근본적인 가난에 집중했다면 도미니코는 가난을 중요시하면서도 학문적이고 문화적인 양성과 준비에 더 역점을 두었다는 평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가난한 순회 설교 모습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대문호 단테는 이러한 도미니코의 영성에 대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연인」(L’amoroso drudo della fede cristiana)이라는 묘사를 남기기도 했다.


도미니코의 관심은 오로지 「사람들의 영혼을 해방시키고 구원해 줄 진리를 만인에게 전파하는 것」이었고 수도회를 세운 목적은 이단에 맞서 자발적인 가난과 겸손을 통해 선포되고 증명되는 설교로 사람들을 설득, 참된 신앙을 지키는 위한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설교자들의 수도회는 신앙적 위기를 느끼고 있던 그리스도교 내부를 재생시키는 의미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


교회사가들은 가난을 지체없이 진실하게 회복시키는 것, 또 가난을 다시 회개의 징표가 되게 하는 것이 당시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가 보였던 업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특별히 도미니코는 학문적이고 대중적인 설교를 계획했고 대학 설립의 큰 흐름 속에서 수도회의 탄생을 계획했다.


도미니코가 자신의 영적인 사상과 관련해 저술은 남기지 않았지만 특별히 「마태오 복음」 「바오로 서간들」 「요한 카시노의 사막 교부들 담화집」을 애독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른 성서들 역시 필독서였고 특히 시편은 그의 기도 생활에서 언제나 묵상하고 인용되는 영적 참고서였다.


그는 마태오 복음과 바오로 서간의 내용을 다 외울만큼 항상 소지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사막 교부들 담화집 역시 성인이 수도생활 초기부터 지니고 다녔던 것이었다.


그러한 바탕속에서 도미니코가 후대에 남긴 영적 유산은 무엇보다 그가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이었다는 것.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에 대해서만 말했다』는 유명한 말처럼 도미니코는 열정적으로 하느님 현존 안에서만 생활했으며 이는 그가 보여준 침묵의 유일한 근거였다.


또한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그같은 기도는 끊임없는 하느님 탐구,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됐다. 학자들은 『도미니코가 한평생 혼신을 다해 설교했던 것은 그리스도가 선포했던 올바른 신앙의 진리 바로 그것이었다』고 밝힌다. 그의 진리에 대한 사랑과 열망은 성경의 끊임없는 연구 안에서, 이웃들을 향한 구원과 성화에 대한 사랑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도미니코는 또한 가난하고 겸손한 순회 설교자로 살며 신학적 차원의 청빈을 실천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물질적 부를 가진 이들의 선두에 서서 그리스도의 가난을 설파했다면 도미니코는 지성인들을 대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삶 자체로써 가난의 복음을 선포했다.


신학자 철학자 법률가 등 또 다른 분야의 권력가들이 나타나던 시기에 그는 유럽을 순회하며 복음적인 삶의 체험과 신앙의 체험으로 복음을 살고 전하는 진리의 설교가, 은총의 설교가였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사랑」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 성모 마리아처럼 오로지 구세주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 삶과 성덕과 활동의 목표를 걸었던 도미니코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듯 도미니코회는 「설교자들의 모후」 「거룩한 묵주기도의 모후」라는 호칭이 있을 정도로 도미니코회는 성모 신심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천국에서 성모의 스카풀라 안에 보호돼 있었던 도미니칸들에 대한 환시, 스카플라의 기원, 끝기도 후 성수 축성 등으로 부터 전해오는 성모님에 대한 사랑 등은 현재까지도 도미니칸 전례와 영성의 특성으로 남아있다.


당시에 보편화되었던 예수 그리스도 생애 신심에 큰 영향을 받았던 도미니코는 그런만큼 깊은 예수 신심을 지니고 있었다. 소위 「도미니코 성인의 9종류 기도방법」으로 알려진 기도법에는 그의 신심이 잘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다.


겸손하고 가난한 설교가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재현하려 애썼던 도미니코는 살아있을 때는 단순히 형제들중 한 사람으로, 또 죽어서는 형제들의 발 아래 묻히기를 원했다.


1221년 8월 6일 「살아서 보다 죽어서 더 많은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볼로냐의 니콜라스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한 도미니코.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도미니칸들에게는 이때 도미니코가 남긴 약속을 기억하며 부르는 노래(O Spem Miram)가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


『오 놀라운 희망이여 죽음의 순간에 당신을 위해 울고 있던 형제들에게 당신이 주신 그 희망은 당신이 가신 후에 하늘에서 더욱 그들에게 도움이 되어 주실것이라는 약속이었나이다. 오 아버지 당신 말씀을 이루어 주소서.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당신의 전구로써 우리를 도와주소서』

 

[가톨릭신문, 2005년 1월 9일, 이주연 기자]

 

성 도미니코의 9가지 기도 방법

 

1. 크게 절을 하면서 하는 기도

 

 

2. 바닥에 엎드려서 하는 기도

 

 

3. 편태 - 피의 기도

 

 

4. 무릎을 꿇었다가 일어나면서 하는 기도

 

 

5. 손으로 하는 기도

 

 

6. 십자가 모습의 기도

 

 

7. 두 손을 앞으로 올리고 하는 기도

 

 

8. 앉아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는 기도

 

 

9. 걸으면서 하는 기도

 

 

 

[그리스도교 영성사] 도미니코 수도회 영성(1)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

 

 

중세기 교회가 낳은 위대한 성인들 중의 한 분은 스페인에서 출생한 구즈만의 도미니코(1170?-1221)이다. 도미니코 수도회의 창설자인 그는 일찍이 오스마 주교좌의 의전 사제로 활동하였다. 그 단체는 사도행전 4장 32~33절(초대 교회의 공동생활)의 내용에 따라 개혁된 삶을 살았다. 그는 세 차례나 그 단체의 원장으로 선출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디다쿠스 주교와 함께 북부 유럽을 여행하면서 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활동하고 소동을 일으키던 무리들을 보았다. 거기서 그는 그 당시 교회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을 올바로 가르쳐 참 교회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그의 사명처럼 여겨졌다. 그리하여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명을 받아 프랑스 남부를 중심으로 이단들(알비파와 왈도파 특히 카타리파)에 대항하고 설교로써 그들의 잘못을 깨우쳐 본 교회로 돌아오게 하였다.


1207년경에는 몇 명의 동지와 함께 순회 탁발 설교가로 활동하였다. 그의 이상은 루가 복음 9장 1~6절, 10장 1~12절(열 두 제자의 파견)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의 이상은 오스마의 주교와 교황 사절들의 지지를 받았고 마지막에는 교황의 후원까지 받았다. 알비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미니코는 끝까지 그의 활동을 지속시켜 나갔다.


1206년 프루일에서 도미니코는 알비파에서 본교회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수용하는 여성들의 공동체를 세웠다. 이 공동체는 이후 도미니코의 설교를 위한 기초가 되었다. 수도회의 공식 명칭은 「설교자들의 수도회」(Ordo Praedicatorum; 줄여서 O. P. )였다. 이를 공적으로 공포하는 선언문은 이렇게 되어 있다. 『알려져 있는 대로 우리 수도회는 처음부터 설교와 영혼 구원을 위해 설립되었으며 우리의 노력은 일차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이웃 사람들의 영혼에 유익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거룩한 독서와 육체 노동을 대신하는 거룩한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고 이를 위하여 침묵을 강조하였으며 거룩한 진리에 대한 연구가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하여 간결하고 활기찬 성무일도를 창으로 바쳤다. 그들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규칙을 도입하고 프레몽트레의 전통을 엄격히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한 이유는 그 당시 새로운 수도회 설립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제4차 라테란 공의회의 13항을 엄격히 지키자는 데 있었다.


그 후 도미니코의 활동을 세 단계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수도회의 조직을 완성하여 수도자들을 툴루즈와 바리, 볼로냐, 마드리드 그리고 로마로 파견하는 것이었다. 파리의 신학대학과 볼로냐의 교회법 대학은 이 수도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탁발 수도회는 복음적 가르침과 동질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수도회 헌장을 보완하여 발전시켰다. 두 번째 단계는 그가 로마에 체류할 때 교황과 교황청은 그에게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므로 수도회 발전의 시기로 보여진다. 그는 사방으로 여행하면서 설교하였고 형제들을 격려하면서 공동체를 세워나갔다. 롬바르디아에 여섯, 프로방스에 넷, 프랑스에 넷, 토스카니아와 로마에 셋, 스페인에 아홉 개가 설립되었고 설교단은 영국, 독일, 헝가리, 스칸디나비아에 가서 일하였다. 도미니코는 여성들을 위한 공동체들도 설립하였다. 세 번째 단계는 그의 열성적인 사목 활동이다. 그는 설교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동유럽의 야만인 쿠만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우고릴노 추기경과 더불어 북부 이탈리아에서 활동하였다. 이는 그가 알비파 이단에 대항하여 일할 때와 같은 것이었다. 그의 지나친 활동은 그의 죽음을 앞당기고 말았다.


그의 활동을 통해 그의 성덕을 볼 수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뛰어난 분이었다. 항구한 기도생활과 밤을 새워 기도하기도 한 그는 하느님의 사랑에 매혹된 수도자였다. 그는 감정이 풍부하여 기도할 때와 미사를 봉헌할 때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의 극기 생활 또한 많은 이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중세기에는 극기생활이 강조되었다. 수도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으므로 그도 극기와 단식에 몰두하였다. 심지어 그는 맨땅에서 잠을 자기도 하였다. 그리고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정은 예외적으로 놀라왔다. 사제로서 그는 교회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예리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독자적으로 활동하지 않았고 제도권과 일치하여 활동하였다. 이단자들을 대항하여 올바른 가르침을 민중에게 펼쳤고 그들을 올바른 신앙에로 돌아오게 하였다. 훌륭한 설교자가 되기 위하여 기도에 몰두하고 연구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묵상하고 연구하는 것은 그와 동료들의 중요한 일과였다. 그것은 기도한 바를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만든 수도회는 가난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이것은 복음의 정신을 사는 것으로서 사도들의 삶을 본받는 것이었다.


도미니코가 귀천하자 그의 무덤은 공경의 장소가 되었고 돌아간지 13년 후에 성인이 되었다.

 

[가톨릭신문, 2002년 5월 5일]

 

[그리스도교 영성사] 도미니코 수도회 영성(2)

 

성 도미니코가 세운 수도회의 특징은 전통적인 수도회의 정신을 살면서도 교회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었다. 그것은 수도회를 일정 장소에 국한시키지 않고 규칙을 통해 인적 구성을 갖는 데 있었다. 수도회의 삶이 특정한 장소에 묶이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교회를 대상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도 통일성을 유지하여 복음적 정신으로 일하는 것이었다. 각 단체의 원장(prior)은 각 단체에서 뽑았으며 지역의 장은 원장들이 모여뽑았고 총장은 지역 총회의 대표들이 뽑았다. 그러므로 수도회의 최고 기구가 법적으로 최고 기관이 되므로 전체적인 통합에는 문제가 없었다.


성 도미니코는 형제들에게 수도자로서 좋은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는 서원을 통하여 성직수도자로 살았고 규칙에 따르는 엄격한 삶을 사는 수도자로서 사도들을 본받았다. 사도적 삶이란 엄격히 말해 주 예수님과 함께 살던 사도들의 생활을 의미한다.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의 정신을 배우고, 배운 것을 밖에 나가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도미니코는 사도적 삶을 근본적으로 살았다. 그의 이상과 삶의 모범은 동료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사실 창설자의 언행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새로운 설교 수도 공동체는 사도들을 모방한다는 사명감에 젖어 있었다. 주님과 함께 지낸 사도들이 밖에 나가 사람들을 가르치고 돌아와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을 이들은 본받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검소한 삶을 이상으로 삼았으므로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다. 가난한 그리스도, 가난한 사도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만을 따라나선 사도들이 사방을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한 삶의 모습은 그들의 이상이었다. 이들의 가난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무소유」로 살아가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었다.


그 당시 교회를 등진 이단자들은 자신들이 사도들을 본받는다고 주장하였다. 「사도적 삶」은 자신들의 전유물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사실 피에르 발도아는 장사를 하여 모은 많은 재산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고 군중에게 설교를 하고 다니면서 자기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모아 리용의 가난한 자들이라고 떠벌리면서 교회의 부패상을 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 도미니코는 이들의 주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도 사도들을 본받아 순회 설교자로 등장한 것이다. 이런 유의 삶은 분명히 그 시대에 부응한 삶이었고 새로운 양식의 수도 공동체였다.


또한 이들은 설교를 잘 하기 위해서 학문 연구를 중시하였다. 이리하여 공부하는 수도회로 이름이 나기 시작하였다. 회원들의 일부가 파리, 볼로냐, 쾰른, 옥스퍼드 등지에서 교수로 활약하게 되었고 그들의 영향력은 실제로 대단하였다. 대표적 인물은 성 대 알베르토와 그의 제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이들은 설교와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선교에도 치중하였다. 1232년부터 유럽 북부와 동유럽까지 이들에게 선교활동이 맡겨졌고 아시아와 동양에까지 그 사명이 확대되었다. 우리 시대의 위대한 학자 턱웰 교수는 자신이 속한 설교자 수도자들을 가난한 설교자들, 교육받은 설교자들, 사도적 설교자들, 순종적인 설교자들, 적극적인 설교자들 그리고 개혁 설교자들이라고 평하였다. 사실 이 수도회는 성경에 등장하는 사도들처럼 가난하게 살면서 적극적으로 이단에 대적하여 구원의 진리를 열심히 편 설교자들이었으며 상부의 지시에 순종하는 설교자들이었고 이를 위하여 기도와 학문으로 무장한 설교자들로서 13세기이래 금세기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수도회이다.


13세기는 도시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으므로 자연 경제에서 화폐 경제로의 이행은 농업경제에 기반을 둔 경제 구조가 초기 자본주의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설교 사목은 도시민들을 겨냥할 수 있었다. 이들의 영혼 구령에 대한 설교 사목은 점점 더 확대되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시민들은 이들을 환영하였다. 이들의 정열적이고 유식한 설교는 군중들을 사로잡았고 탁발수행도 좋게 받아들여져 신자들의 호응도 높았다. 그러자 자연적으로 기존 세력(기득권)과의 마찰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개종자들을 환영하였고 여성 개종자들을 많이 돌보았다. 이 사목은 13세기 여성 운동이 교회 안에서 확고한 지위를 얻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여성 수도 공동체가 생겨난 계기가 되었다. 사실 도미니코는 제2회인 여성 수도회를 창설하고 재속 신자들의 제3회도 조직하였다.


도미니코 성인의 생애에서 무시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영성은 성모신심이다. 성모신심의 중요한 표현은 로사리오 기도이다. 이 기도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성 도미니코가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신심적인 전통에 의하면 성인이 알비파 이단자들 가운데서 일하고 있을 때 성모님이 발현하셔서 로사리오를 주시면서 이를 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로사리오 기도를 열심히 하면 사도직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약속하셨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이 기도가 급속도로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가톨릭신문, 2002년 5월 12일]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도미니코 수도회(상) 
 
사진말 - 도미니코 수도회의 본질적인 수도 생활 요소는 초대 교회 사도들의 생활을 모범으로 삼으면서 관상생활과 연구생활, 공동체 생활 및 복음삼덕, 사도직 활동 등두하는 것이다.
 
 
파리대학에 설교사 수도원 설립 등
대학의 신학 연구에 큰 일익 담당
 
 
설교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사명에 따라 일명 '설교자들의 수도회' (설교자회, 라틴어: ORDO FRATRUM PRAEDICATORUM [O.P.] )라고도 불리는 도미니코회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요약대로 "진리를 관상하라 그리고 전한다"(contemplari et contemplata aliis tradere)를 모토로 한다. 밤낮으로 하느님의 계시된 진리를 공부와 기도로 알게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설교와 가르침으로 전한다는 뜻이다.

도미니코회 창설자인 도미니코(1170~1221)는 12~13세기 교회 쇄신에 특별히 많은 업적을 남긴 성인인데 도미니코회 설립도 그러한 성인의 노력과 무관치 않다.

그는 당시 교회안에 뜨거운 감자로 등장해 있던 알비파 이단의 오류에 맞서 이단을 대적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대 교회에서 처럼 청빈한 삶속에서 정통 교리를 적극적으로 전파하는 설교 수도회의 창립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런 맥락에서 도미니코는 1216년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회칙과 프레몽트레 수도회 규칙을 토대로 절대 청빈에 바탕을 두는 가운데 세속안에 살면서, 사람들의 회개와 개종을 촉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느곳이라도 달려 갈 수 있는 적극적인 도미니코회 수도회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스페인 북부 칼라루에가에서 태어나 수석 사제였던 삼촌으로부터 일찍부터 성직 교육을 받았던 도미니코는 10년여 동안 팔렌치아에서 문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오스마 대성당 참사회 회원을 거쳐 1198년경부터 공동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디에고 주교와 함께 외교 사절로도 활동했던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알현을 계기로 알비파 이단을 막기위한 시토회 설교 선교회에 합류하게 됐고 9년여 동안의 활동을 통해 설교자회 창립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1215년 툴루즈에서 첫 회원을 모집하고 교구내에서 수도생활을 하며 설교를 시작했던 도미니코는 마침내 1216년 교황 호노리오 3세때 세계적인 설교자들의 수도회로 도미니코 수도회의 공식 승인을 받았다.

도미니코 수도회의 본질적인 수도 생활 요소는 초대 교회 사도들의 생활을 모범으로 삼으면서 관상생활과 연구생활, 공동체 생활 및 복음삼덕, 그리고 규칙 준수와 사도직 활동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 요소들은 세상 모든 영혼들의 구원이라는 목적을 위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도미니코 수도회만의 독특함을 형성해 왔다.

회원들에게 연구는 의무이며 그 목적은 복음화다. 또 '설교자회'라고 하는 만큼 설교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중요 목표와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데 여기서 설교의 의미는 관상적 체험과 기도에서 비롯되는 설교, 그리스도교의 교의적 성격을 보존하기 위한 진리탐구에서 비롯되는 설교, 믿음을 지켜주는 개인적 공동체적 가난에서 비롯되는 설교 등이다.

도미니코 성인은 수도회 공식 설립후 파리 대학에서 설교사 수도원을 설립하는 등 대학의 신학 연구에 큰 틀을 제공했으며 특히 대도시와 교육 중심 도시에 수도원을 세움으로써 수도회가 지향하는 이념을 실현시켰다.

그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도미니코는 선종하던 해에 서유럽 8개 관구에 500여명의 수사들과 60여개의 수도원을 지켜볼 수 있었으며 1300년 경에는 500여 수도원에서 1만여명의 수도회원이 활동하는 비약적인 성장세가 이어졌다. 도미니코는 1234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됐다.
 
[가톨릭신문, 2004년 11월 7일, 이주연 기자]
 
 
도미니코 수도회(하)
  
 
사진말 - 현재 한국 도미니코회의 활동은 각 본당 미사집전 및 강론, 영성지도, 피정지도 등이며 1475년 창립된 평신도 신심단체 「로사리오회」와 「토마스 아퀴나스 청년회」 지도 등을 맡고 있다.
 
 
진리 수호와 설교통한 복음화 사업위해
소공동체 모임 활성화 등에 앞장설 계획
 
1216년 교황 호노리노 3세에 의해 공식 수도회 인정을 받은 도미니코회는 창설자 성 도미니코가 살아있을 때는 물론 사후에도 수세기를 거치며 세계 곳곳에 진리 수호와 설교를 통한 복음화 사업에 헌신했다.

'정통 신앙의 파수꾼'이라는 명칭을 얻었던 도미니코회는 십자군 원정시 군인들에 대한 격려 설교로부터 교회내 도서 검열까지 그만큼 여러 역대 교황들로부터 다방면의 협조 요청과 임무를 부여 받았다. 종교 재판이라 불리는 이단 심문 재판의 재판관도 도미니코회 회원들이 맡은 경우가 많았다.

성인들이 많이 배출된 수도회로도 이름을 알리고 있는 도미니코회는 토마스 아퀴나스, 대(大)알베르토, 교황 비오 2세 등과 함께 일본에서 순교한 16명의 회원과 베트남서 순교한 60명 회원이 각각 시성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인디안의 수호자'로 전해지고 있는 바르톨로메 데 카사스도 도미니코회 출신이다.

1587년 도미니코회는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성 로사리오 관구'를 설립,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하였거나 교회가 뿌리 내리지 못한 지역의 복음화에 매진하게 된다. 처음부터 선교를 지향했던 창설자의 이념이 구체화된 사례이기도 했다.

성 로사리오 관구가 주 활동 대상 지역을 필리핀 및 동양으로 삼았던 점에서 한국 교회와의 인연도 여기서 비롯됐다. 조선 선교를 위해 일본에서 준비중이던 복자 성 도미니코의 요한이 조선 땅을 밟지 못하고 순교한 것. 이후 재불 화가로도 유명한 김인중 신부가 도미니코회에 입회하게 됨으로써 한국과의 끈이 재개됐다.

한국 교회 진출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1982년 개최된 도미니코 수도회 아시아 총회를 통해서였다. 성 로사리오 관구를 통해 한국 진출에 대한 관심이 표명되자 로마본부 책임자가 3개월여에 걸쳐 한국을 순방했고 1987년 열린 아시아 총회에서 한국 선교가 성 로사리오 관구에 공식 위임됐다.

이후 한국 진출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서울대교구의 초청을 받아 1990년 한국 교회에 첫 선교사를 파견한 도미니코회는 1992년부터 한국인 지원자를 모집하게 되었고 1994년 서울 미아리에서 수도원 축복식을 가졌다.

현재 한국 도미니코회의 활동은 각 본당 미사집전 및 강론, 영성지도, 피정지도 등이며 1475년 창립된 평신도 신심단체 '로사리오회' 지도와 '토마스 아퀴나스 청년회' 지도 등을 맡고 있다.

특히 로사리오 신심회는 성 도미니코가 성모 마리아께 대한 특별한 사랑을 말과 모범으로 가르쳤던 것을 모범 삼아 회원 알라노 드 루페(1428~1478)가 1475년 설립한 평신도 신심단체이며 토마스 아퀴나스 청년회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라 참된 진리를 갈망하는 젊은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생긴 청년회다.

한국 도미니코회는 앞으로 순회설교, 기도 모임, 평신도 지도자 양성, 소공동체 모임 활성화 등에 주력할 예정이며 도미니코 가족 형성과 로사리오 신심 보급을 주된 활동으로 펼쳐나갈 계획이다.

한편 도미니코 수도회 가족들로는 1206년 도미니코 성인이 여성들을 위해 설립한 관상수도회와 1280년 설립된 재속회 등이 있다. 도미니코 수도회 전체 회원수는 80여개국 7000여명 정도다.
 
[가톨릭신문, 2004년 11월 14일, 이주연 기자]

 

 

[금주의 성인] 성 도미니코(St. Dominius, 8월 8일) 
행동하는 복음 설교가
가난하게, 순례하며 복음 실천, 설교자수도회 창설
 
 
1170~1221. 스페인 칼라루에가 출생. 사제. 도미니코수도회 창설자.
 
성인 이름은 '하느님께 속하다', '하느님께 봉헌하다'는 뜻이다.
 
성인은 자신의 이름처럼 어렸을 때부터 사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성인 친척 중에 사제가 있었기에 도미니코 성인이 사제의 길을 걷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부모 또한 독실한 신자여서 성인이 사제가 되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며 기쁘게 도왔다.
 
그의 어머니는 도미니코를 임신했을 당시 특이한 태몽을 꿨다. 환한 빛을 입에 문 강아지가 품속에 들어오더니 그 빛이 온 세상을 비췄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설교자 탄생을 알리는 것이었다.
 
성인은 사제가 된 뒤 이단이 횡행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며 살기로 결심했다. 말로만 하는 설교는 아무런 힘이 없음을 깨닫고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하게 순례하며 몸소 실천한 복음을 전하는 설교를 택했다.
 
1215년 자신과 뜻을 같이할 이들을 모은 성인은 1217년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설교자수도회' 인준을 받았다. 이것이 도미니코수도회의 시작이다.
 
성인은 이후 회원들과 함께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헝가리 등 유럽 곳곳을 돌며 하느님 말씀을 전했다. 그는 늘 사람들을 격려하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며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기도할 것을 요청했다.
 
성인은 1221년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청빈과 겸손을 강조하며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탁하며 살 것을 강조했다. 성인은 1234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평화신문, 제1030호(2009년 8월 2일), 박수정 기자

 

[영성의 향기] 수도회 창설자를 찾아서 - 성 도미니코
 
도미니꼬 수도가족 설립 
 
말만 잘한 강론은 ‘귀’에 남지만 말씀을 전달한 강론은 ‘마음’까지 전달된다. 설교가 자신의 하느님 체험과 성실한 기도 생활에서 우러나온 강론은 비록 눌변일지언정 심금을 울린다. 필요한 때 적절한 한 마디의 말은 좌중에 기쁨을 던져주고 닫힌 마음을 활짝 열게 한다. 우리 속담에 ‘천냥 빚도 갚는다’고 했다.
 
올바른 설교를 통해 영혼 구원의 봉사자가 되려고 했던 성 도미니코(1170-1221)는 ‘설교가들의 수도회’라고 불리는 성 도미니꼬 남녀 수도회와 관상 수녀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도미니코에게 복음을 전하는 ‘말의 설교’보다 더 앞섰던 것은 복음대로 살아감으로써 가르치는 ‘행동의 설교’였다.
 
도미니코 성인은 교회에 많은 이단들이 등장했던 12세기에 스페인의 칼레루에가에서 태어났다. 부모로부터 깊은 신앙과 동정심을 물려받은 그는 어릴 적부터 훌륭한 종교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발렌시아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 공부를 했다. 사제 서품을 받은 뒤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도 규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오스마 성당의 참사위원으로 일했다.
 
1203년 디에고 주교와 함께 긴 여행을 했던 도미니코는 프랑스 툴루즈에 머물렀을 때 이단에 빠진 여관 주인과 논쟁이 붙게 된다. 그는 확신에 찬 웅변으로 진리를 설파함으로써 그를 회개시켰고 이 사건으로 도미니코는 자신의 성소를 분명히 인식했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단자들에게 속아 오류에 빠지는 것을 몹시 안타깝게 여겼던 그는 북유럽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싶었다. 그러나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도미니코를 프랑스로 파견한다.
 
그 후 도미니코는 프랑스 남부에서 활동하면서 삶의 모범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말로만 설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판단, 스스로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가난하게 사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와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자 1216년 수도회를 설립했다.
 
복자 요르단은 도미니코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강직한 영혼의 소유자로 애처로움이나 동정심으로 마음이 움직일 때를 제외하고는 한결같았다. 마음은 늘 평화롭고 고요했으며, 그것은 기쁨과 부드러움으로 표현됐다. 그의 규칙은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과 함께 우는 것이다. 그는 이웃 모두를 사랑했으며, 말과 행동이 전혀 모순되지 않아 모든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다.”
 
도미니코는 수도자들에게 단순과 가난의 덕행을 강조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대함이 남달랐던 모친의 영향을 받아 그 역시 천부적인 동정심을 갖고 있었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직접 그 고통에 동참하고자 했던 그는 발렌시아 대학 재학 시절,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책을 모두 팔기도 했다. 그에게 가난은 빈궁이나 결핍이 아니었다. 부자들이 차지하기 어려운 하늘나라(마태 19,23 참조)에 이르는 지름길이었다. 그는 수도자들에게도 “서로서로 형제들간에 사랑하라, 겸손하라, 청빈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영적인 보화를 만들어 가도록 하라”고 역설했다.
 
아울러 도미니코는 인간의 외적인 면을 보지 않고 내면을 응시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내면으로는 눈멀고 병든 영혼들을 가여워했다. 그러나 그의 영성이 결코 안으로만 파고드는 소극적, 은세적인 성격을 띤 것은 아니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는 선교적이고 사도적인 영성을 동반했다. 따라서 그는 가르치기 위해 공부하고 연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그를 존중했다. 그는 겸손을 가르치면서 겸손하지 않고 정결을 말하면서 정결하지 않고 청빈을 가르치면서 부유하게 사는 거짓 설교자들과는 달랐다. 도미니코 성인은 자신이 말한 대로 살았다. 그리고 그 말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이었다.
 
또한 도미니코는 참된 설교가는 걸인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전하려는 말씀은 기도로써 하느님께 청하고,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육신의 음식은 인간에게 겸손되이 탁발을 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참된 설교가라고 보았다.
 
도미니코의 설교는 항상 기도로부터 힘을 받았다. 그는 기도와 설교,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기에 회원들에게 “언제나 하느님께 관하여, 아니면 하느님께 이야기하라”고 말했다. 1221년 선종한 뒤 13년 만에 성인품에 오른 그에 대해 주위 사람들은 이렇게 증언했다. “낮에는 자기 형제들과 동료들을 대할 때 그보다 더 명랑하고 소탈한 사람이 없었고, 밤에는 그보다 더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이 없었다.”
 
도미니코 성인은 “입술이 더럽다”(이사 6,5)고,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한다”(예레 1,6)고 말씀을 전하기 두려워했던 이사야와 예레미야 예언자의 부르심을 상기시킨다. 또한 하느님은 언제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영혼을 은총의 도구로 사용하셨음도 기억하게 한다.
 
[평화신문, 1996년 8월 4일, 남기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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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14-08-08&stype=mi1

육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14-08-08&stype=mi2

구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14-08-08&stype=mi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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