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2099]蘇軾(소식)-獄中寄子由(옥중기자유)제1수
(옥중에서 동생 자유에게 부치다)
獄中寄子由(옥중기자유)제1수
옥중에서 동생 자유에게 부치다
소식(蘇軾·1037∼1101)
聖主如天萬物春,
小臣愚暗自亡身.
성주여천만물춘
소신우암자망신
百年未滿先償債,
十口無歸更累人.
백년미만선상채
십구무귀갱루인
是處青山可埋骨,
他年夜雨獨傷神.
시처청산가매골
타년야우독상신
與君世世為兄弟,
更結來生未了因.
여군세세위형제
재결내생미료인
성군은 하늘같아 만물을 소생시키는데,
소신은 어리석고 어두워 스스로 망치네.
백 살도 못살고 목숨 빚을 갚아야하네,
열 식구 돌아갈 곳 없어 남의 누를 더하네.
어디든 청산에 내 뼈 묻으면 되지만,
어느 해 밤비 내리면 홀로 상심하리니.
세를 이어 너와 함께 형제 되어,
못다 한 인연 다음 생에 다시 맺어 보자구나.
이하 경제포커스
[금동수의 세상읽기] 한가위를 보내며(41)
기사승인 21-09-24
한가위를 보내며(41)
매년 돌아오는 명절(名節)이라서 별로 감흥이 없어질 때도 되었지만
그래도 인간사 별 다른 게 없어 한가위를 맞아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풍성한 가을을 맞아 사랑하는 식구들과 오손도손 모여서 조상님께
차례(茶禮)를 올리고, 성묘도 하면서 보내는 것이 우리네 모습이었다.
하지만 코로나로 지난해부터 연속 두해에 걸쳐 가족이 모두 모여
차례를 지내지 못하고, 성묘나 벌초도 간소화하는 추세이다.
싫던 좋던 만남의 기회가 줄었다. 그러자니 자연 가족 친척 간의
얼굴 보기가 소원(疏遠)하다. 수 천리 먼 길 떨어져 있지도 않은데 말이다.
추석의 보름달을 보면서 소원을 빈다지만 둥근 달을 바라보면
북송(北宋)의 소동파(蘇東坡 : 蘇軾 1037~1101)가 생각난다.
그는 관료이자 문장가로 당송 팔대가(八大家)에 아버지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3부자가 포함되었다.
그가 1076년 산동성의 밀주(密州 : 현 제성시) 태수(太守)로 있을 때
중추절을 맞아 밤새 마시면서 동생 소철을 생각하며 지은 사(詞)가
<수조가두(水調歌頭)·명월기시유(明月幾時有)>이다.
수조가두란 당시의 유행가의 가사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수양제(隋煬帝)가 황하의 운하를 건설하면서 지은
<수조가(水調歌)>에서 비롯되어 중국의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된 것이 477명의 작가에 1,129편에 달한다.
원회곡(元會曲), 개가(凱歌), 대성유(臺城游), 강남호(江南好) 라고도 불린다.
이렇듯 수조가두는 많은 문인의 사랑받는 장르였지만,
소동파의 형식이 전범이다. 그는 주로 낭만주의적 색채를 나타냈고,
주희(朱熹)는 도학적 내용을, 육유(陸游)는 우국과 애국의 표현을 나타냈다
. 소식의 <명월기시유(明月幾時有)>가 가장 명작으로 꼽혀 현재까지
회자되고 있으며, 마오쩌둥(毛澤東)도 이를 즐겨서 혁명을 위해
장강(長江)을 헤엄쳐 건너는 <유영(游泳>과 정강산(井岡山)을
다시 오른 <중상정강산(重上井岡山)>을 지었다.
현대에도 리펑(李鵬) 전 총리의 딸 리샤오린(李小琳)이 2015년에
중국 전력여왕의 자리에서 물러나며 <임향강(臨香江)>이란
수조가두를 지어 전력회사에 걸었다.
우리나라는 고려말 이제현(李齊賢)을 필두로 많은 문인이 썼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도 <사향(思鄕)> 등 9수의 수조가두를 지었다.
소동파의 작품을 보면 다음과 같다.
명월기시유(明月幾時有) 파주문청천(把酒問青天)
/ 밝은 달이 언제 떴는지 술잔 들고 푸른 하늘에 물어보네.
부지천상궁궐(不知天上宮闕) 금석시하년(今夕是何年)
/ 하늘 궁궐 있을지 모르지만 오늘 저녁은 무슨 해이던가.
아욕승풍귀거(我欲乘風歸去) 우공경루옥우(又恐瓊樓玉宇) 고처불승한(高處不勝寒)
/ 바람 타고 돌아가고 싶어도, 옥루 높아 추위를 못 이길까 두렵도다.
기무농청영(起舞弄清影) 하사재인간(何似在人間)
/ 일어나 그림자와 춤추며 노니니 어찌 인간 세상에 있는 것과 같으랴.
전주각(轉朱閣) 저기호(低綺戶) 조무면(照無眠)
/ 붉은 누각 돌아 창문 아래로 비추니 잠 못 이루겠네.
불응유한(不應有恨) 하사장향별시원(何事長向別時圓)
/ 딱히 유감도 없을 텐데 무슨 까닭으로 이별할 때면 둥근 것인가.
인유비환이합(人有悲歡離合) 월유음청원결(月有陰晴圓缺) 차사고난전(此事古難全)
/ 인생에는 희비와 만남 이별이 있고, 달에는 밝음과 그늘,
둥금과 이지러짐 있으니, 이런 일은 예로부터 온전하기 어렵네.
단원인장구(但願人長久) 천리공선연(千里共嬋娟)
/ 다만 그대와 오래도록 천리 밖이라도 함께 달을 즐기길 바라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중추절이 되면 소식(蘇軾)의 수조가두를 즐겨 불렀는데,
현대에 와서는 <첨밀밀(甛蜜蜜)>로 유명한 대만 출신 가수 덩리쥔(鄧麗君)이
이를 리메이크하였고, 중국 본토가수 왕페이(王菲)도 불렀다.
홍콩의 허안화(許鞍華) 감독은 <명월기시유(明月幾時有)>를
제목 삼아 항일 투쟁과 문화계 인사의 보호를 그린 영화를 제작했다.
주인공 곽건화(霍建華)가 극중에서 소동파의 이 수조가두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소동파는 아버지 소순의 영향으로 학문이 높아 과거에 본인은 장원,
동생은 차석으로 연방급제(聯榜及第)를 하였다.
그는 시문서화(詩文書畫)에 능통하여 한 시대를 풍미하였고
<적벽부(赤壁賦)> 같은 천고의 걸작과 일화를 많이 남겼다.
소동파는 한 평생 관직과 유배, 옥고를 번갈아 치르면서도
수많은 문학예술 작품을 창작했다. 문학 작품은 차치(且置)하고
그의 그림 <목석도(木石圖)>, 일명 <고목죽석도(枯木竹石圖)>
또는 <고목괴석도(枯木怪石圖)>는 2018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670억원에 낙찰되었다. 2013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그의 글씨 <공보태의(功甫泰議)>는 90억원 가량에 낙찰되었으나
진품 시비가 일었다. 우리나라에는 작고한
서예가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이 소장하던
<백수산불적사유기(白水山佛跡寺遊記)>가 있다.
그는 문화예술 만이 아니라 음식과 술에 대해서도
수많은 레시피(Recipe)를 만들어 요즘으로 치면
최고의 세프(Chef)요 먹방의 스타였다.
하긴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을 몰아내고 상(商 또는 殷)나라를
세운 개국공신인 이윤(伊尹)도 뛰어난 요리사였고,
전설상의 황제 복희씨(伏羲氏)도 요리사 비슷했다.
황저우(黃州) 유배 시절에 먹을 것이 부족해서 개발한 음식이
오늘날의 동파육(東坡肉)다. 그 당시 중국 중상류층들은
소고기, 양고기를 주로 먹었고, 하층민들은 돼지가 흔했지만
조리법이 마땅치 않아 먹지를 못했다. 유배살이가 하층민과 같았던
소동파가 돼지고기를 술에 재워서 간장과 갖은 양념으로 오래도록
은근히 조리하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나중에 항주의 목민관으로 근무할 때 서호를 준설하여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아 백성들의 칭송을 얻었다.
그 제방이 지금까지 있는 소재(蘇堤)이다.
백성들이 감사의 선물로 바친 돼지를 잡아 황저우에서 개발한
레시피로 요리하여 백성들과 나눠 먹으면서 요리법을 전파한 것이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그가 쉬저우(徐州)에서 홍수를 극복하는데
고생한 백성을 위한 답례 음식인 회증육(會贈肉)에서 유래했다는 일설도 있다.
그가 지은 <식저육시(食猪肉詩)>를 보면
동파육의 탄생 상황이 잘 들어나 있다.
황주호저육(黃州好猪肉) 가천여분토(價賤如糞土)
/ 황주의 돼지고기 좋은데, 가격은 썩은 흙처럼 싸다네.
부자불긍흘(富者不肯吃) 빈자불해자(貧者不解煮)
/ 부자는 먹지 않고, 가난한 자는 조리법을 모르네.
만저화(慢著火) 소저수(少著水) 화후족시타자미(火候足時他自美)
/ 물을 적게 잡아 약한 불로 천천히 익히면 저절로 맛있게 되지.
매일조래타일완(每日早來打一碗) 포득자가군막관(飽得自家君莫管)
/ 매일 아침 한 주발이면 온 집안이 배부르니 누가 상관하랴.
그는 동파육뿐만 아니라 송황탕(松黃湯)도 직접 만들었고,
그가 개발했다고 전해지는 동파사진(東坡四珍)은
회증육(回贈肉) 즉 동파육과 개구리 요리인 금섬희주(金蟾戱珠),
닭요리인 오관계(五關鷄), 술에 재운 새우인 취청하(醉靑蝦)로 유명하다.
술로는 만가춘(萬家春), 나부춘(羅浮春), 동파주(東坡酒) 등을 직접 만들었다.
술과 음식에 관한 책인 <진일주법(眞一酒法)>, 동파주경(東坡酒經)>을 저술했다.
동파주경에는 누룩 제조법, 양조법을 비롯한 다양한 요리법이 수록되어서
중국요리의 교범 정도로 여겨진다.
동파육에서 연유된 건지는 몰라도 중국요리에서
소고기나 양고기, 닭고기 등은 동물 표기를 하지만 돼지는
그냥 육(肉) 한글자로 표기한다.
그는 또한 목민관으로 있을 때는 누구보다 솔선해서
백성들을 보살핀 것으로 유명하다.
약관이 조금 지난 나이에 산시성(陝西省) 기산현(崎山縣)의 태수로 있었다.
오랜 가뭄으로 모든 백성이 고통 받고 있을 때 기우제를 지내고
마침내 흠뻑 비가 내리자 희우정(喜雨亭)을 짓고 희우정기(喜雨亭記)를 썼다.
밀주태수(密州太守) 시절에는 가난으로 성 밖에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관아에서 고아원처럼 기르면서 부잣집에
입양을 시키기도 했다. 항주에서 근무할 때는 지역 유지들로부터
받은 뇌물성 재물을 활용하여 <안락방(安樂坊>이라는
관민합동 병원을 세워 환자를 치료하고, 직접 약을 조제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약값은 염가인 1문(文)에 불과했다고 한다.
서주(徐州)의 홍수 방지와 항주의 서호 범람을 막은 것도
모두 목민관으로서 엄청난 치적이었다.
소동파는 일평생 3명의 여인과 삶을 같이 했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성이 왕씨(王氏)고 하나같이 현모양처였다.
훌륭한 배필을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백년해로를 못하고
세여인 모두 일찍 떠나보내고 비통해 했다.
첫째 부인 왕불(王弗)은 3살 차이로, 그의 스승이었던
향공진사(鄕貢進士) 왕방(王方)의 딸이었다. 왕방이 가르치던 제자를 모아놓고
집근처 연못의 이름을 짓도록 하여 최수작(最秀作) 제자에게
딸을 배필로 맺어주겠다고 했다. 소동파가 손뼉을 치면 고기들이 뛰노는 걸 보고
환어지(喚魚池)라고 지었다.
마침 왕불도 작명행사 소식을 듣고 이름을 지어 보내니
우연의 일치로 이를 본 모든 사람들이 천생배필이라고 했다.
왕불의 문재(文才)는 소동파와 떨어져서 시댁에 살던 시기에 있었던 일화가 잘 말해준다. 소동파의 여동생 즉 시누이가 올케 왕불을 골리려고
대련시구(對聯詩句)를 짓자고 했다.
그러면서 “수수간서심사한(嫂嫂看書心思漢)
/ 올케는 책을 보며 한나라를 생각하네.”라고 했다.
표의문자인 한문은 뜻이 여럿이다보니
‘한(漢)’은 한나라는 뜻도 있지만 사내라는 뜻도 있어서
낭군이 없어 딴 사내를 생각한다고 놀린 것이다.
그러면 밖으로 나가버리자 왕불도 지지 않을 새라 이렇게 읊었다
. “매매박일수차음(妹妹迫日手遮陰)
/ 시누이는 해가 겁나 손으로 막아 그늘지게 하네.”
사실 날 일(日)자는 태양을 뜻하지만 중국인들은 이 글자를
욕설(성교)로 사용한다. 해설하면, ‘시누이는 성교가
무서워 손으로 음부(陰部)를 가리네.’ 정도로 의역할 수 있겠다.
왕불도 소동파 못지않게 음식을 잘 만들었는데 특히 식해(食醢)를 잘 만들어서
그가 즐겨 먹었다고 한다.
소동파가 요즘의 필화사건 즉 문자옥(文字獄)인 오대시안(烏臺詩案) 사건으로
옥에 갇히면서 아들에게 형세가 불리해서 죽을 상황이면 마지막 사식으로
식해(食醢)를 넣으라고 했다. 식해는 아내 왕발을 그리워함이다.
아들이 돈을 구하기 위해 잠시 이웃 친척에게 옥바라지를 맡기면서
그런 사실을 말하지 않아 식해를 사식으로 넣었다.
옥에서 죽을 상황이라고 느낀 소동파가 절명시(絶命詩) 두수를 지어
동생 소철(蘇轍)에게 보냈다. 그중 한편이 다음과 같다.
성주여천만물춘(圣主如天万物春) 소신우암자망신(小臣愚暗自亡身)
/ 성군은 하늘같아 만물을 소생시키는데, 소신은 어리석고 어두워 스스로 망치네.
백년미만선상채(百年未滿先償债) 십구무귀갱루인(十口无歸更累人)
/ 백 살도 못살고 목숨 빚을 갚아야하네, 열 식구 돌아갈 곳 없어 남의 누를 더하네.
시처청산가매골(是處青山可埋骨) 타년야우독상신(他年夜雨獨傷神)
/ 어디든 청산에 내 뼈 묻으면 되지만, 어느 해 밤비 내리면 홀로 상심하리니.
여군세세위형제(與君世世爲兄弟) 재결내생미료인(再結來生未了因)
/ 세를 이어 너와 함께 형제 되어, 못다 한 인연 다음 생에 다시 맺어 보자구나.
현모양처 였던 왕불이 결혼 11년 만에 죽자 소동파는
고향의 어머니 무덤 곁에 묻고 묘역에 3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해 왕불에 대한 사랑을 표했다.
죽은 그녀를 꿈에서 보고 <강성자·기몽(江城子·記夢)>를 지었다.
두 번째 부인은 첫 부인 왕발의 사촌동생 왕윤지(王潤之) 였다.
21살의 나이에 10년 이상 차이나는 사촌 형부를 남편으로 맞아
25년을 내조하며 살다가 46살에 세상을 떴다.
이 때 남긴 시가 <접연화(蝶戀花)>이다.
셋째 여인은 정식 부인이 아닌 첩으로 왕조운(王朝云)이었다.
그녀는 가난으로 어릴 때부터 노래를 부르는 기녀로 생활했지만
총명하고 학문을 알았다. 소동파가 황주통판으로 쫓겨나 있을 때
만나서 집으로 데려왔다. 마침 전에 걸인(乞人) 여아를 기르고 있었는데
이 아이가 왕윤지의 친동생으로 밝혀지자 왕윤지가 은혜도 갚을 겸
26세 연상의 소동파를 성심껏 모셨다. 투옥과 유배 생활 등으로 힘들 때
모든 첩들이 떠나갔지만 왕윤지 만큼은 끝까지 곁에서 모셨다.
그렇지만 그녀도 소동파가 예순이 되던 해에 세상을 등졌다.
그녀를 위해 <서강월·매(西江月·梅)>를 지었다.
연일 온갖 미디어에서 여당 대선 후보자의 대장동 개발사건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민간개발이니 공영개발이니 떠들면서
정작 대장동 원주민이나 분양받은 주택 소유주들에 대한 배려는 없다.
비리는 최대한 신속하게 파헤쳐서 엄단해야 국민의 바른 심판이 가능하다.
지자체 개발사업의 전범이 소동파의 서주(徐州) 홍수방제 사업과
항주의 서호(西湖) 준설로 만든 소제(蘇堤) 사업이다.
그때 만든 제방이 천년을 무탈하게 이어져 오면서 봄이면 수양버들과
물안개로 절경을 자아내어 소제춘효(蘇堤春曉)라는 십경(十景)을 이룬다.
공영개발이든 민간개발이든 폭리를 취하기 앞서 후세에게 두고두고
편익과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소동파의 정신을 배워야 바른 정치인이다.
금동수 전 KBS 부사장
이하=동아일보 입력 2023-04-21 03:00
돈독한 형제애[이준식의 한시 한 수]〈209〉
성군의 은덕 하늘 같아서 만물에 봄기운 가득한데,
이 몸만은 우매하여 스스로를 망쳤구나.
제 명도 못 채우고 죗값을 치를 처지,
여남은 가족 갈 데 없으니 네게 누가 되겠지.
어느 청산에든 내 뼈야 묻히겠지만,
언젠가 밤비 속에 너 홀로 상심하고 있으리.
너와 함께 세세손손 형제가 되어,
다음 생에 또다시 긴긴 인연 맺었으면.
聖主如天萬物春, 小臣愚暗自亡身.
百年未滿先償債, 十口無歸更累人.
是處青山可埋骨, 他年夜雨獨傷神.
與君世世為兄弟, 更結來生未了因.
―‘옥중에서 동생 자유에게 부치다
(獄中寄子由·옥중기자유)
제1수·소식(蘇軾·1037∼1101)
수도 변경(汴京) 어사대(御史臺)의 옥중에 갇힌 시인은 생애 마지막임을 예감하고
아우 소철(蘇轍)과 처자식에게 시 2수를 남긴다.
이 시는 그중 첫 수로 죽음 직전에 쓴
이른바 절명시(絶命詩)라 더없이 암울하고 절절하다.
당시 그의 죄목은 시문을 통해 조정을 비판함으로써 민심 이반을 조장했다는 것.
부패나 역모 따위와는 거리가 먼 정치적 갈등이 야기한 재앙이었다.
일종의 필화 사건인 셈이다.
군왕의 은덕이 온 세상에 가득한 지금,
아우야, 내 처신이 우매한 탓에 이제 죽을 처지가 되었구나.
나야 무덤에 들면 그만이지만 나 대신 여남은 가족을 돌봐야 하고,
홀로 남아 상심이 클 너를 생각하니 한없이 마음이 무겁구나.
그래도 내 마지막 바람은 우리의 인연이 대대손손 이어졌으면 하는 거란다.
가족 부양의 책임을 떠넘기는 죄책감, 외로이 남을 아우 걱정.
그러면서도 끈끈한 인연을 거듭 다짐하는 형제애가 애틋하다.
그 후 동파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우가 형의 죄 갚음으로 자기 관직을 내려놓겠다고 상소했고,
개혁파를 이끌었던 정적(政敵) 왕안석마저 사죄(赦罪)를 청원하자
신종(神宗)은 결국 ‘하늘 같은 은덕’을 베풀었다.
시 또한 절명시의 운명에서 벗어났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