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용설명서Ⅱ-스물세 번째 이야기】
세 개의 장면으로 읽는 유럽 ⑴
철학이 만든 제국/속도전이 빚은 근대/유럽연합
프롤로그-유럽의 본질을 위한 질문
오래전 그리스와 로마를 연결하는 이유가 궁금했던 필자의 묵었던 궁금증은 동유럽 여행을 계획하면서부터 같은 이유로 다시 일었다. 독일에 도착해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통과해 체코(체코슬로바키아)와 슬로바키아를 경유하면서 독일로 다시 되돌아 나오는 여정은 분명히 서유럽에서 느꼈던 분위기와는 달랐고 역사적인 배경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가까운 근대사 때문인지 서유럽과는 결이 다른 제국의 짙은 여운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공유한 역사적 배경과 지정학적인 차이를 갖고 국경을 나누고 있지만 여전히 유럽은 하나의 나라처럼 묶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닫혀있던 동유럽이 열어준 것은 동구권이라고 눈과 귀를 닫았던 이의 눈과 귀였다. 무관심이라기보다 무식함일 수밖에 없었다. 유럽 역사에 진지하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알려고 하지 않았던 탓이 크다. 익숙한 길과 이야기는 이어졌고 가는 곳마다 화려한 크리스마스 시장은 이방인을 환영하며 큰 명절을 즐기려는 인파들로 붐볐다. 낮보다 화려한 밤의 야경을 자랑하는 유럽의 겨울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통과 중이었다.
이미 하나의 화폐인 유로로 시장은 이어져 있었고 이웃 나라의 언어가 공용어로 통용되어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을 넘었다는 공사관의 연락이 아니라면 어느 나라를 지나고 있는지 몰라도 좋았다. 체코슬로바키아로 익숙했던 이름이 나뉘어 체코와 슬로바키아라는 두 나라로 나뉘었지만 서로 적대감이나 경쟁적인 국가가 아닌, 이웃하는 나라다. 경계만 그은 인상적인, 두 나라이면서 여전히 한 나라라는 이야기는 인상적이었다. 동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한 나라로 꼽히는 나라가 체코와 슬로바키아다. 체코에서 아침을 먹고 여행을 즐기고 슬로바키아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국경을 넘어 독일로 넘어가는 일정에 환호성을 지르면서도 아무도 왜 좋은지를 따지지 않은 일정이었다. 모두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부러움과 놀라움.
궁금증의 또 하나는 유럽이 하나의 나라라면 중심은 어디일까. 영국일까. 프랑스일까. 아니면 독일일까. 다행인 것은 중심 국가는 세우기 어려워도 유럽을 잇는 출발점이 되는 기원 도시는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로마다. 고대의 중심도시이면서 제국으로서의 로마는 이미 고유명사이고 소크라테스로 대변되는 철학을 그리스가 품었다. 그리스의 문명을 최고로 알고 그 문명의 전도사였던 알렉산더가 원정을 나섰던 세계가 유럽이었다. 알렉산더의 꿈은 로마가 이룬 셈이다. 문명과 문명을 섞고 나라와 나라를 경계를 두되 나라의 주권을 구속하는 상위국가로 군림했던 로마를 그리면 오늘날의 유럽연합 (EU; European Union)이 된다.
그 세계를 정치적인 나라로 통일한 로마가 국교로 세운 종교인 가톨릭이 종교의 본질에서 퇴색은 되었지만 지금까지 이어지는 세계 종교 전쟁의 씨앗을 품은 나라가 되었다. 로마가 확장하고 잇댄 길을 따라 이어진 도시와 국가의 도로와 교회는 서로 닮아 있었고 그들이 만든 제국의 길은 세계로 연결되어 있었다.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로 이어진 제국의 길이 헝가리와 체코를 열등한 국가로 만들며 오랫동안 제국의 이름으로 그들의 근대를 합리화했던 것이다. 알렉산더와 로마의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다시 눈에 들어온 ‘연합하는 유럽’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이름으로는 두 개의 명사로 나뉘었어도 하나의 고유명사다. 이미 세계의 중심이고 기둥이었다. 고대 이집트를 포함한 그리스와 로마가 품은 지중해 문명이 유럽의 출발점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아프리카 대륙에 속한 이집트를 유럽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로마시대 이집트의 위치가 지정학적으로 그리스 북쪽에 위치한 마케도니아계 그리스인 세운 프톨레마이오스왕조였으니 이집트의 원류는 유럽계이다. 아프리카에서 바다 너머가 유럽이지만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가 서로 오가며 나눈 유명한 사랑 이야기로 가까운 지정학적 거리를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유럽 문명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품은 지중해에서 출발하고 있었고 지중해는 문명의 요람으로 문명을 싣고 나르는 가교로 충분한 역할을 해낸 교통로였다. 지중해를 에워싼 나라만큼 다양한 문명을 탄생시키고 충돌하면서 확장시키고 병합과 융합을 이루면서 서양세계를 아우른 문명의 원천이 되었다. 그 용광로 안에 다른 문명들을 녹이고 재생산하는 과정으로 통일을 이룬 제국의 원형 로마가 있다.
유럽제국의 원형을 찾아 나선 길은 철학의 길이었다. 철학은 정치를 도우면서 도시의 확장과 지적인 힘을 축적했고, 지성의 폭발적인 힘은 속도를 입고, 그 속도는 정치력에 힘을 보태며 다른 이들을 병합하는 근대화의 속도를 입혔다. 여전히 유럽과 미국이 만든 근대의 속도에 휩쓸리는 현장에 놓인 지구촌이다. 유럽을 읽는 첫 장면은 근대화의 포문을 열고 로마제국을 만든 철학이다.
근대의 속도를 입은 로마제국–로마에서 로마로 잇는 제국의 길
달궈진 용광로를 통과한 지중해 문명은 시간이 갈수록 가속도가 붙었다. 멈출 수 없는 가속도는 문명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지중해 문명을 통합하겠다고 나선 로마제국의 그칠 줄 모르는 확장 욕구가 만든 제국의 속도를 유럽의 문명이 이어받고 유럽화의 본질인 근대문명을 낳았다. 근대문명 딜레마의 본질은 속도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이 하늘을 난 라이트형제의 발동기를 난 비행기가 등장한 이래(1903년) 인간이 달에 착륙(1969)하기까지 66년이 걸렸다. 인류를 속도전쟁으로 몰아간 것은 무엇일까.
근대를 이끈 국가들이 미국을 선두로 유럽국가임을 부인할 수 없고 속도전에 맞물린 경제전쟁은 좀 더 ‘빨리’와 좀 더 ‘많이’에 집중했고, 결과는 수치로 완성되었다. 누가 조금 더 빨리 완성하고 조금 더 많이 가지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운 세계질서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힘의 논리와 빠른 속도에 가치를 두기 시작했다. 여기서 근대라는 파도의 원류를 만든 그리스 로마시대가 품었던 제도적이고 계획적인 정치 원형이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부르고 모은다. 그곳에 가면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모이는 것이다. 그렇게 도시는 만들어졌고 힘의 결정체 국가는 탄생했다. 같은 뜻을 가진 자들과 같은 생각을 하는 자들이 정치를 위해서 모이고 학교를 세우고 같은 신을 만나기 위해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사람이 모이면 이야기가 시작되고 힘이 생긴다. 힘을 결집하고 더하기 위한 원정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고 모인 이들이 같은 이유로 뜻을 모았다. 정치가 인간들의 질서에 간섭하기 시작했고 권력을 쥐기 위해 정치가 필요했다. 로마는 최적의 장소였으며 권력을 집중하고 지키기에 적합한 도시였고 나라였기에 힘이 모이기 시작했고 질서유지와 정치를 위해 사유를 법으로 다투어야 했다. 그렇게 철학자들의 사유가 정치를 돕기 시작했다. 철학자의 사유와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고대 정치의 장이다.
고대를 대표하는 철학자인 소크라테스(BC470~BC399)의 제자로 유명한 플라톤은 지적능력으로는 스승을 능가하는 철학자였다. 바른 도덕 정치가 필요하다고 믿었기에 자신의 소신을 밝혀 쓴 책이 《국가》이다. 통치자는 철학자가 되든지, 아니면 철학을 해야 한다는 ‘철인정치’를 주장했다. 이상주의와 관념철학의 대부다운 발상이었다. 그의 신념이 기초가 된 교육 이념에 도덕을 겸비한 정치철학이 자리하게 되는 시점은 훗날 교육을 통한 근대정치의 정치 모태가 된다.이들이 경험한 정치 이념은 빠르게 다가온 직접 민주정치였다.제국보다 먼저 인류가 경험한 민주주의다. 그것을 정치에 이용한 로마의 정치는 근대화의 원형을 간직하면서 발달과정을 거친다.
로마를 지킨 것은 유물과 유적만이 아니다. 묵묵히 오롯이 긴 시간을 받아내고 견딘 길이었다. 로마가 진격한 제국의 길이 시작이었고 길 위에서 탄력을 받은 제국은 속도를 더하며 제국의 역사를 써 나갔다. 문명에 문명을 잇댄 주체인 사람은 갔고, 영광의 흔적은 흐트러졌지만 길은 온전히 남은 로마였다. 로마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언덕 위에서 바라다본 시내의 전경은 폐허인 채로 찾아드는 객을 맞았고, 뚜렷한 길만으로도 여전히 살아있는 역사를 전하고 있었다. 제국의 터가 아닌 예술과 사유의 터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문장은 참이다. 유구한 역사의 시간은 보이지 않지만 온전하게 남아 있는 로마의 도로와 길은 여전히 세계로 향한다. 제국으로서 로마는 없지만 세계의 철학과 인문학의 뿌리로 로마는 대체불가능한 도시다. 그리스와 더불어 하나의 명사로 남은 도시, 로마에서 제국으로 향한 가속도는 붙었고 그 길이 만든 것이 오늘의 유럽이다. 이제는 그 시작을 보기 위한 많은 이들을 그곳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우리가 길과 길 사이를 새로운 것으로 채울 동안에도 그들은 고집스럽게 길을 지키고 있었다. 그 길 끝에 만나는 두 번째 장면은 철학이 정치를 만나는 극적인 장면이다.
뛰어난 고대 철학자가 외친 자유-직접민주주의의 맹아
역사에서 배운 근대사회의 특징으로 꼽는 민주주의의 근원은 고대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에서 찾아야 한다. 기원전에 이미 정치에 도입한 그들의 정치가 얼마나 앞서 있었는지 대할 때마다 놀랍다. 지금과는 다른 모습의 온전한 민주주의는 아니었지만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지향하는 원형이 있었기에 민주주의의 발전이 있었다. 오랫동안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발달해 온 민주주의가 현재도 진행형이라면 그 당시의 원형은 뛰어난 민주주의 형태다.
근대화를 가속화한 유럽에서 정치의 원형인 ‘직접민주주의’가 탄생하는 여정을 살펴보면 군주정치에서 공화정으로 정치형태가 바뀌지만 다시 500여 년을 지속하던 공화정체제도 원로원과 황제에 의한 공동통치 형태의 원수정시대를 거치며 ‘팍스 로마나’*시대를 거친다. 그러나 이도 제국이 붕괴되면서 함께 무너진다. 이러한 과정을 놓고 보더라도 ‘직접민주주의’를 이미 기원전에 싹틔웠던 그리스 정치의 뛰어난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이마저도 유럽의 이야기여서 아시아에서는 끝까지 이러한 과정을 겪을 기회가 오지 않았기에 여전히 아시아는 아쉬운 일일 수밖에 없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민주주의 형태의 정치가 아닌 사상이 들어오기까지 아시아에서는 여전히 왕정이 이어지고 그나마 일본이 메이지시대에 이르러 의회에 민주주의가 도입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민주주의에 입문하게 되는 아시아는 늦어도 너무 늦은 세계 흐름에 합류였다. 민주주의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그리스의 정치역사가 세계민주주의의 초석으로 인정받는 이유를 보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실현과정에서 드러난다. 그만큼 쉽지 않은 정치와 민주의 동거다. 자유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던가.
민주주의의 원형 격인 직접민주주의는 주민이 대표자를 통하지 않고 소속된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자신의 의사를 반영시키는 정치형태다. 고대 그리스에서 BC 8세기경부터 ‘폴리스’라는 도시국가 성립했는데 이후 BC 5세기경, 아테네에서 국민에 의한 직접민주정치의 실현이지만 여전히 노예제도와 주민 전부가 참정권을 갖는 것이 아니어서 지금의 민주주의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게다가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었고, 남자들도 시민권이 있는 사람들만 직접민주정치에 참여하지만 그 시민권마저도 엄격한 계급이 존재했다. 계급의 벽이 20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형태와 이름을 달리해 지구촌에 지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오래전 투표로 공동체의 의사를 결정하는 의회제 민주주의 장치를 만들었던 그곳에서 철학의 자유가 왕성했던 이유와 겹치는 부분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철학의 도시는 여전히 왜 아테네일까. 민주주의의 ‘역사歷史’적 의미를 창출한 도시로서 아테네는 이미 철학도시의 이미지가 확고하다. 단단한 이성으로 세운 견고한 성, 사유의 자유를 담당한 철학이 자리매김하기까지 만만치 않은 정치의 개입이 있었고, 학문으로 상아탑을 일군 발달과정에 담긴 이야기 속에도 패러독스paradox(역설)는 숨어있다. 순탄하지 않은 철학의 시작으로 얻은 사유의 자유였지만 그것을 키운 것은 철저하게 개입한 정치였다.
스승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고 죽자 외유를 끝낸 플라톤이 아테네로 돌아와 세운 학교가 아카데메이아(아카데미의 어원)이다. 철인정치哲人政治를 이상으로 여겼던 플라톤의 고민은 ‘어떻게 사는 삶이 바르게 사는 삶인가’였다. 그의 저작인 《국가》에서 바른 정치가 필요하다는 소신을 밝혀 쓰고 있다.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 그는 통치자는 철학자가 되어야 하든지 아니면, 통치자는 철학을 해야 한다는 ‘철인정치’를 주장했다. 그렇게 그는 학교에서 철학으로 정치를 하는 자들을 육성하고자 했다. 이상주의와 관념철학의 대부다운 발상이었고, 신념으로 교육의 이념에 정치철학이 자리하게 되는 시점이다.
소크라테스의 뛰어난 제자이자 이상주의자 플라톤에게도 뛰어난 제자가 있었다. 학문을 비롯하여 각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철학과 신학을 두루 섭렵한 천재학자요, 철학가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누기도 한다. 스승 플라톤을 신처럼 존경했기에 ‘악인들은 스승을 칭찬조차 해서도 안 된다’고 강경하게 스승을 옹호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을 비판하고 그의 논리를 반박하기도 하는데, 그의 말을 빌리면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로서 한층 더 경건한 일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조심스럽게 변명한다. 철학자가 천직인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제자 때문에도 유명세를 치른 인물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 인물이다.
어릴 적부터 알렉산더는 철학에 관심과 열심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42세에 마케도니아의 13세 알렉산더의 스승이 되어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BC343) 스승의 가르침에 감복한 알렉산더는 자신의 꿈은 권력이나 영토를 넓히는 일보다는 선을 아는데서 남보다 뛰어나고 싶다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모든 업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도 정치와 엇나갔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사망 후에 쫓기는 몸이 되기도 한다.
제자와 스승의 길은 달랐고 당시 정치권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적대감이 깊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신을 모독했다는 정치적인 죄명으로 배심원들 앞에 서는 것을 피해 떠나며 아테네인들에게 남긴 말은 ‘아테네인들여, 철학에 두 번씩이니 죄를 짓지 않기를(첫 번째는 소크라테스)’였다. 소크라테스는 택하지 않았던 추방령을 소신껏 택한 것이었다. 살아서 영화보다 죽음 뒤에 칭호와 명성을 얻는 영웅이 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다. 역사가들은 스승을 닮지 않은 제자이자 또 다른 영웅,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를 유럽의 큰 족적 헬레니즘 문화를 창출한 인물로 꼽는다.
헬레니즘–철학의 지붕으로 세계를 덮은 알렉산더
일찍부터 스승의 가르침과는 결이 다른 세계정복과 지배의 꿈을 안고 있던 알렉산더는 그 포부를 일찍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지중해 연안과 유럽을 넘어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점령하고 세계를 하나의 제국으로 만들고, 아프리카 동북부에 자기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 수도에서 세계를 지배할 뜻을 세운다. 그가 품은 원대한 뜻은 모든 야만적인 문명을 몰아내고 그리스 사상과 예술과 철학을 모든 점령지에 보급해 하나의 광대한 정신세계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리스 사상과 예술과 철학으로 채운 하나의 세계였다. ‘헬레니즘’의 탄생이다.
‘헬레니즘’이란 그리스어로 원래 그리스인 자신을 지칭하던 말이다. 역사가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이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정복한 비그리스 지역의 그리스 문화와 식민화의 확산을 일컫는 말로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알려졌다. 그는 1833년 자신의 저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역사》에서 고전 그리스 문화를 동경하던 알렉산드로스가 정복 사업과 광범위한 지역에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는데 그리스적 문화와 정신과 동방 정신이 융합한 범세계적 문화를 헬레니즘 문화라 이르게 된다.
그는 페르시아를 점령하고 인도에까지 군대를 진출시켰는데(BC327년) 부하 장병들이 전쟁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에 뜻을 바꾸어 회군한다. 돌아가면 점령한 모든 지역을 통치하는 일에 몰두하기로 생각을 바꾼다.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뜻이 이루어졌다면 세계는 하나의 지붕을 덮은 국가가 될 수 있었을까. 역사에서 쓸 수 없는 ‘만약’이라는 전제가 허락된다면 한 번쯤은 묻고 싶은 질문이기도 하다.
회군하던 중에 알렉산더는 역병을 얻게 되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고 그가 정복한 나라들은 이전 국권을 회복하기에 힘쓰게 되면서 철학의 도시 아테네도 재건에 힘쓰게 된다. 이때 도망자였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도 아테네를 떠나 마케도니아로 돌아오게 되지만 그다음 해에 죽음을 맞는다. 정복 군주 알렉산더의 죽음과 함께 유럽은 지각변동을 겪게 되는데 가장 극심한 변화를 겪게 되는 학문의 세계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된다.
그리스의 아테네가 중심이었던 철학과 학문과 예술 분야는 세계 각지에서 다른 성향의 학문으로 다시 출현하는 성향을 띠었지만 그 내용은 역시 그리스적이었고 아테네 철학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철학의 본고장이 아테네였고 학문의 발상지가 아테네였기 때문이었다. 세계를 아우르는 보편적 철학이었던 셈이지만 뿌리는 같은 학문의 세계지만 다른 갈래로 지평을 넓힐 기회는 줄어든 것이다. 그러한 철학과 학문을 뒷받침할 사회적 여건이나 정신적 분위기는 이미 파괴되었고, 플라톤의 이상주의는 자취를 감추려는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불리한 것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위대한 스승을 만날 기회나 가능성이 줄어든 학문의 세계였다.
철학의 체계성은 단편적인 내용으로 바뀌었고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이론적인 학설보다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윤리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게다가 진리를 탐구하기보다는 지혜롭게 사는 방법이 문제였고 당시 사회에서 가치 있는 것은 처세술로 환원되는 경향이 만연하게 되면서 학문은 높은 교양으로 만족하는 풍조로 바뀌게 된 것이다. 특출하거나 위대한 철학자가 아니라 몇몇 사상가들이 모여 한 학파를 형성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이러한 여건 속에 출현한 여러 철학사조 가운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속된 학파가 스토아 철학**의 계통이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대중적 호응을 받으면서 BC 300년경부터 로마 말기까지 계승되는 철학파로 제논이 창시자이다.
제논(BC366~264)은 아테네에서 가르친 소아시아의 학자로 알려져 있다. ‘스토아’라는 이름은 ‘벽화로 장식된 전당’이라는 뜻으로 그 곳에서 강의를 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스토아 철학의 전통은 소크라테스의 극기와 자족을 지향했지만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학파가 아닌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을 따른 윤리학파를 따른다. 제논은 학교를 세웠지만 고령의 나이에 자살한 것으로 되어있다. 현자의 삶을 포기한 스승으로 남은 제논이다.
2대와 3대를 거치며 바빌로니아의 디오게네스에 이르러서 그 학교의 위치를 로마로 옮긴 것으로 되어있다. BC155년의 일로 철학의 중심지가 아테네에서 로마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는 시기다. 그리스의 정치적 위치와 아테네의 세력이 약화된 반면 새로 등장한 로마가 이미 정치에서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고 학문도 정치적인 배후를 필요로 하는 사업적 배경의 중심이동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국 로마가 넘어서지 못한 것과 갖지 못한 것은 아테네를 능가할 정신적 유산과 학문적 저변이었다. 그렇게 로마는 그리스 문화를 품은 제국이 되었다. 제국의 영역은 견고했고 정치적으로 주변 국가들의 주권을 구속하는데 성공했다.
교황vs황제-침묵의 시대로 진입한 유럽
로마제국이 융성했던 시대에 로마인의 지배를 받았던 세계로 ‘팍스 로마나’는 로마의 세계제패를 아우르는 말이다. 로마는 이시기를 거치며 다시 세계를 하나의 용광로에 몰아넣는데 AD392년에 국교로 기독교를 채택하면서 국가를 대리하는 황제의 권한이 교황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렇게 정치는 종교를 통합하며 같이 갈 수 없는 협력의 길을 제시하지만 유럽을 다시 뜨거운 정치와 종교의 권력투쟁의 시대로 진입하게 되는 시작이다.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는 황제와 새로운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한 교황의 힘겨루기는 황제의 굴욕으로 기록하고 있다. 중세를 상징하는 ‘카노사의 굴욕’이다. 종교가 세속으로 환속하는 계기를 제공한 사건이다.
교항에 맞서다가 로마제국의 홍제 하인리히 4세가 파문당한 뒤, 1077년에 교황이 머물던 북이탈리아의 카노사성에 찾아가 사흘간이나 눈 속에서 떨며 사면을 청했던 유명한 중세 역사의 한 장면이다. 이 사건은 황제의 권위보다 교황이 종교적인 지위가 우세했음을 전적으로 보여준다. 엄격한 기독교의 규율을 강요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성직자 임면권을 가진 로마황제 사이에서 일어난 성직임명권 투쟁이 계기가 되었던 사건(1075)으로 교황이 종교적 권위를 방패 삼아 황제를 협박하고 압박하던 것으로 이러한 흐름을 타고 11세기 말에서 13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교황권은 절정에 달하게 된다.
군사력이나 정치적인 힘이 모자라는 것도 아닌데 황제가 교황에게 밀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종교적인 우위를 이용한 교황의 권위는 모든 인간이 따르는 절대적인 권위였기 때문이고 정치적인 황제의 주위에 선 사람보다 신의 대리인이 교황의 주위에 선 사람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무력을 갖춘 황제라도 종교통치력을 갖춘 교황에게 맞설 수 없는 구조가 이어지면서 중세는 긴 터널을 지나며 이어졌다. 유럽의 중세가 변혁점을 맞는 시기는 한참을 흐른 후에 인간 본연에 대한 회의와 종교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다.
고대 그리스시대에는 분리되어 있고 영역이 분명했던 종교와 정치가 뒤엉키게 되면서 그 둘의 영역과 권위 다툼은 치열하게 전개되는데 국교가 된 기독교의 신은 유일신으로 하나뿐인 절대자이자 창조주이기 때문에 인간의 위치보다 영성세계의 주인인 신의 세계가 우위를 차지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차원이 다른 세계를 인정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인간의 합리성과 명석함, 노력해서 만들어내는 자유로운 발상을 지원하는 창의력은 억압을 받기도 했던 시기는 역사가 기록하는 시간으로도 긴 천년의 시간을 박제 당하게 되는데 침묵의 시대로 일컫는다. 유럽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 꿈틀대기 전까지 유럽이 잠긴 채 흐른 시대였다.
철학 위에 집을 지은 종교-치열한 과도기, 중세
중세를 학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150년경에서 르네상스의 붐이 일고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1500년경까지 그 안을 메운 철학적 내용도 비중이 작지 아니할 터이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중세는 기독교가 주류를 이루었던 기간이었기 때문에 철학적인 가치의 평가절하로 빈곤한 시기를 맞는다. 중세 전기를 교부敎父철학이라고 말한다. 성직자를 가리키는 말인 교부들이 중심이 되어 사상과 철학을 좌우했던 시기에 연구되던 학문이 플라톤 철학은 중세 중반까지 근간을 이루며 이어졌고 그 선두에 선 이가 아우구스티누스(354~430)다. 중세 초기의 기독교에서 여전히 중심인물인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초대교회 교부 중 하나이며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창설자로 교부철학의 대명사로 불린다.
철학의 흐름은 중세 후반에 방향을 전환된다. 오히려 중세 후반부는 기독교(가톨릭)를 축으로 하는 철학이 그 중심을 이룬다. 그것이 ‘스콜라 철학’이다. 학교 교육과 연결되는 학문이라는 뜻이지만 여전히 교계의 지도자들이 대표를 이룬다. 이 시기에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독점적으로 연구되기에 이르고 기독교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접목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대를 맞는다. 스콜라 철학의 중심인물에 선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 초기의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다르게 가톨릭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꼽는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에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프로테스탄트는 토마스와 거리가 생기게 된다. 이후 가톨릭 철학의 대표되는 인물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앞세우게 된 종교가 철학 위에 집을 짓는다. 암흑의 시기라는 말은 정치와 타협한 종교계의 일탈과 과오를 탓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긴 터널을 지나는 중세는 8세기부터 17세기까지 중세 유럽에서 이루어진 신학 중심의 철학. 가톨릭교회의 부속 학교에서 교회 교리의 학문적 근거를 체계적으로 확립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기독교 변증辨證의 철학이 주를 이루고 여전히 고대 철학의 전통적 권위를 빌려 주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원용하여 학문의 체계를 세우려 했지만 내적 과제도 적지 않아서 신앙과 이성, 종교와 철학에 대한 고민이 깊어 교리와 논리의 문제는 늘 시대를 관통하고 있었다. 흐름이 보이지 않는다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갑지기 흐름이 깨지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중세를 흔든 복병은 오랫동안 잠재되어 힘을 키우고 있었다.
*팍스 로마나: 기원전 1세기 말에 아우구스투스가 내란을 수습하고 제정을 수립한 때부터 약 200년간 지속된 로마의 평화
**스토아 철학: 기원전 4세기 말에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Zenon)이 창시한 철학의 한 파. 금욕과 극기를 통하여 자연에 순종하는 현자(賢者)의 생활을 이상으로 내세웠다. 후에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 등이 이를 완성했다.
첫댓글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