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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省墓)
고 은
아버지, 아직 남북 통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일제시대 소금 장수로
이 땅을 떠도신 아버지.
아무리 아버지의 두만강 압록강을 생각해도
눈 안에 선지가 생길 따름입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두만강의 회령 수양버들을 보셨지요.
국경 수비대의 칼날에 비친
저문 압록강의 붉은 물빛을 보셨지요.
그리고 아버지는
모든 남북의 마을을 다니시면서
하얀 소금을 한 되씩 팔았습니다.
때로는 서도(西道) 노래도 흥얼거리고
꽃 피는 남쪽에서는 남쪽이라
밀양 아리랑도 흥얼거리셨지요.
한마디로, 세월은 흘러서
멈추지 않는 물인지라
젊은 아버지의 추억은
이 땅에 남지도 않고
아버지는 하얀 소금이 떨어져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남북 통일이 되면
또다시 이 땅에 태어나서
남북을 떠도는 청청한 소금 장수가 되십시오.
"소금이여", "소금이여"
그 소리, 멀어져 가는 그 소리를 듣게 하십시오.
-<문의 마을에 가서>(1974)-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참여적, 민족적, 기원적, 서사적, 회상적, 추모적
◆ 특성
* 비감어린 탄식의 어조
* 상징적 소재를 통해 주제의식을 드러냄.
* 그리움이 느껴지는 회상과 추모의 어조
* 기원적이고 독백적인 어조를 통해 통일에 대한 염원을 표현함.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아직 남북 통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 분단의 현실
* 일제 시대 소금 장수 → 남과 북을 연결하는 매개체
* 아버지의 두만강 압록강 → 분단으로 인해 가볼 수 없는 아버지의 삶의 공간
* 눈 안에 선지가 생길 따름입니다. →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분단의 현실이
원통하고 한스러움을 의미
* 두만강의 회령 수양버들 → 평화롭고 생동감 넘치는 이미지
* 국경 수비대의 칼날에 비친 / 저문 압록강의 붉은 물빛
→ 공포스러운 살풍경. 회령 수양버들과 대비되는 모습.
물빛이 붉은 것은 국경 수비대에 의해 압록강이 피로 물들었기 때문임.
'칼날'의 섬뜩한 이미지와 '붉은 물빛'의 강렬한 색채 대비를 통해 당시의
공포를 잘 표현함.
* 모든 남북의 마을을 다니시면서 ~ 밀양 아리랑도 흥얼거리셨지요.
→ 일제 강점기에 남북을 자유롭게 오가며 소금을 팔던 아버지의 모습
* 서도 → 황해도와 평안도를 통틀어 이르는 말
* 서도 노래(북쪽의 노래) / 밀양 아리랑(남쪽의 노래)
* 하얀 소금 → 아버지의 삶을 지탱하게 해 준 소중한 정신적 가치
이 땅의 민중(백의민족)들과 함께 나누었던 삶의 애환
남과 북을 연결시켜주고, 부패하지 않게 해주는 존재의 의미
* 남북을 떠도는 청청한 소금 장수가 되십시오. → 진정한 민족 동질성의 회복을 염원
* 소금이여, 소금이여 → 직접 인용과 청각적 심상을 통해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함.
◆ 제재 : 소금 → 그 자체가 부패하지 않을뿐더러 다른 것이 썩지 않게 하는 힘을 가진
것으로, 시련의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를 지탱해 주던 힘이나 정신적 가치를 의미함.
남과 북을 연결해주고 하나로 만들어주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함.
◆ 화자 : 아버지 산소에 성묘 간 아들
◆ 주제 : 망국과 분단의 현실에 대한 한, 민족의 화합과 통일에 대한 염원
[시상의 흐름(짜임)]
◆ 1 ~ 5행 : 분단된 조국 현실에 대한 한탄(현실 인식)
◆ 6 ~ 20행 : 남북을 오가며 소금을 팔던 아버지의 모습과 분단의 한(과거 회상)
◆ 21 ~ 25행 : 분단의 극복과 민족 화합에 대한 염원(미래 소망)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죽은 아버지를 추모하는 아들의 마음을 통해 민족의 화합과 통일에 대한
염원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성묘를 가서 아버지께 아직도 남북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고드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외형적으로 소금 장사는 아버지의 생계의 수단이지만,
'소금'은 어려운 시대를 지탱하게 하는 어떤 정신적 가치로까지 상징된다.
'소금'은 통일을 향한 정신적 가치를 품고 살아가려는 화자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며, 또한 화자의 노력을 유발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고은이 초기의 '허무'시에서 중기의 '역사'시로의 변신을
보여준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1974)에 수록된 작품이다.
이 시는 시인이 사회적 · 역사적 책무를 절감하고 민중적 각성의
시인으로 변신하면서 내놓은 작품의 하나이다. '아버지'를,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방랑의 길에 올랐던 우리 민족의 총체적인 얼의 상징으로 보고
이 시를 이해하고 감상하는 실마리를 찾으면 될 것이다. ·
◆ 더 읽을거리
이 시는 평생을 소금 장수로 살면서 이 땅 한반도를 떠돌다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모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형식적으로 이 시의 모든 표현들은 아버지의 산소에
성묘를 간 아들의 생각 또는 말인 것이다. 이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소금 장수로 살다가, 분단 이후 세상을 뜬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에
아버지는 모든 남북의 마을을 오가면서 소금을 팔았다. 분단 이전이니
자유로이 남북을 오갈 수 있었던 것이다. 분단 이전의 젊은 시절에
그는 두만강의 회령 수양버들을 보았고, 압록강에 비친 저녁 노을을 보았다.
서도(황해도와 평안도) 지방도, 남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도 마음대로
오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에도 이 땅의 수많은 민중들과 이 '아버지'는
당연히 그 나름의 아픔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아픔은 민족적인 것이기도 하고,
계급적인 것이기도 했다. 자유로이 남북을 오갈 수 있었다고 말했지만 거기에는
식민지배 아래에서 겪던 민족적 아픔이라는 것이 너무도 강하게 있었을 터이고,
그 아픔은 제국주의 일본뿐 아니라 악덕 지주와 고리대금업자,
친일 고나료 등 같은 민족으로부터 당하는 이중의 착취와 억압에 기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때 아버지가 '모든 남북의 마을을 다니시면서'
한 되씩 팔았다는 '하얀 소금'은 장돌뱅이인 아버지가 이 땅의 민중들과 함께
나눴던 삶의 애환이자, 또한 민족에 대한 소박한 애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런 애정을 더 이상 우리 민족이 나눌 수 없게 된
분단 시대가 되자 아버지는 하얀 소금이 떨어져서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시는 시간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가운데 부분인 6행에서 20행까지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 강점기를 살아간 아버지의 삶과 민족애를 회상하는
부분이다. 일제강점기를 살아간 아버지의 삶과 가치관을 떠올릴 때, 아직도 남북이
통일되지 않은 이 분단 상황은 '눈 안에 선지가 생길', 즉 눈에 굵은 핏발이 설 정도로
원통하고 한스럽다는 것이다. 이 두 부분은 분단 이전의 과거와 분단의 현실을
대비시켜 이 땅의 아픈 현실을 더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 부분인
21행에서 25행까지는 외형상, 아들이 아버지에게 드리는 위로의 말로 되어 있다.
분단의 상황을 한탄하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시인은, 남북이 통일된 뒤에는
자유롭게 남북을 왕래하는, 아무런 한도 품지 않은 그런 소금 장수로 다시
이 땅에 태어나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시인은
통일에 대한 염원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그 날이 왔을 때 아버지에게 외치라는
'소금이여'라는 '멀어져 가는 그 소리'는 통일된 그 날의 기쁨과 행복을 청각적으로
형상화한 표현인 동시에, 군사 독재 치하에서 억눌려 있는 민중의 소망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작가소개]
고은 : 고은태 시인, 전 대학교수
출생 : 1933. 전라북도 군산
데뷔 : 1958년 시 '폐결핵'
수상 : 2017년 제4회 이탈리아 로마재단 국제시인상
2015년 제2회 심훈문학대상
경력 : 2015.07 세계한인지식재산전문가협회 회장
2014.09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평화친선대사
작품 : 도서, 공연, 영화, 기타
본명은 고은태(高銀泰)로 1933년 8월 1일,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난 한국의
전직 시인이다. 단국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8년부터는
문예창작과 석좌교수로 재직했으나 #, 2017년-2018년 미투 운동 때 수십년간
상습적으로 성폭력을 자행해 왔다는게 밝혀져 모든 분야에서 제명되었다.
1974년 대한민국 최초의 진보 문인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설하여
활동하였으며 또한 1987년 음악, 미술, 공연, 문학 등 진보적 문화예술계 전체를
아우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을 창설하여 초대 공동의장을 맡았다.
1982년, 그의 나이 49세에 이상화와 결혼해 화제가 되었으며,
이듬해인 1983년, 그의 나이 50세에 딸 차령을 얻었다.
2018년 미투 운동 때 최영미 시인에 의해 과거 상습적인 성추행 행각이 폭로되면서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다. 서울시는 2월 28일 고은을 기리기 위해 3억 원을 들여
서울시청사에 조성한 만인의 방을 즉시 철거했으며, 기타 다른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기념 사업도 모두 취소되었다. 국내 대표 문인단체인 한국작가회의의
상임고문직에서도 사퇴하고 탈퇴했다. 다만 이미 수여된 은관 문화훈장 및 한신대학교의
문학 명예박사 학위 등은 박탈되지 않았다.
고은은 성추행 의혹을 부인하며 2018년 7월 25일에 최영미 시인을 상대로
10억 7,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1심 및 2심 소송에서 모두
패소하였다. 그는 2019년 11월 8일에 내려진 2심 판결 이후 대법원 상고를
포기하고 은거하며 간간히 글을 발표하고 있다.[3]
3. 생애[편집]
일제강점기 시절인 1933년[4] 군산 미룡동 용둔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한 이름은 '타카바야시 토라스케(高林虎助)'였다.
훗날 고은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존경받아야겠어요. 우리가 아는 그 시절의 작가들이 대부분 조선 이름을
썼던 게 아닌가 하는데요?"라는 질문을 받자 최남선, 이광수의 예를 들며 반박하기도 했다.
군산고등보통학교(군산고등학교)에 다닐 때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6.25때 고은의 일가친척들은 대부분 좌익 활동을 했으며 당숙은 인민위원장이었다.
고은 일가는 6.25 당시 용둔리 일대의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고,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 원수 사이가 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이 퇴각하자 고은은 군산에서 도피하여 선유도로 피신했다.
이후 중공군이 참전하여 1.4 후퇴로 국군과 UN군이 밀려나자 선유도에서 나와
군산으로 돌아왔다. 당시 무성영화의 변사(당시의 성우 겸 나레이터)를 하려고 했으나
처음 상영회에서 너무 떨어서 잘린 적도 있다고 한다. 또 인맥을 통해
군산북중학교에서 잠깐 교사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군과 UN군이 다시
재반격을 시작하여 치고 올라가자 다시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6.25 도중에 '고은'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51년 봄에는 두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때 귀에 청산가리를 부어 고막이 손상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6.25 전쟁 중이던 1951년[5]에 군산 동국사에서 기승(奇僧) 혜초(慧超)를
은사로 모시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승려 생활을 하면서 참선과
수양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승려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폭음을
일삼았다고 거리낌없이 말하기도 했다. 1953년에는 혜초 스님에게 소개받아
경남 통영 미륵섬 미래사를 찾아가 당시 불교계에서 가장 명성 높은
고승 효봉 스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고은의 삶에서 '효봉 스님의 제자'란
칭호는 두고 두고 이름값이 되었다.
고은이 승려 시절에 법명을 받은 과정이 불확실하다. 어디에서는 고은이 처음
은사로 모신 혜초 스님으로부터 중장(中藏)이란 법명을 받았는데,
나중에 효봉 스님의 제자가 된 뒤 일초(一超)란 법명을 다시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디에서는 혜초 스님이 처음부터 '일초'란 법명을 주었고,
'중장'은 혜초 스님의 법호[6]였다고 한다.
1957년 효봉 스님이 초대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추대되자 스승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불교신문〉을 창간하고 주필이 되었다.
1958년 11월 〈현대시〉에 조지훈의 추천으로 〈폐결핵〉이,
서정주의 추천으로〈천은사운〉 〈봄밤의 말씀〉, 〈눈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을 냈다.
1962년 종단의 징계를 받아 승복을 벗고 환속했다. 징계 사유는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훗날 고은은 4.19 혁명 정신에 자극을 받아 승단의 개혁을
주장했다가 종단의 정치보복성 징계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신문 기사에도 나와 있듯이 고은의 환속은 성추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종단의 최고 어른이 자신의 스승이었던 효봉 스님이었기 때문에
고은이 정치적인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는 주장은 그리 설득력이 높지 않다.
환속 이후 1963년 봄 고은은 목포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에서 그의 생애에서
세 번째로 자살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다. 자신을 물속에 수장시킬 큰 돌과
로프를 가방 속에 숨기고 제주행 배를 탔다가 술을 마시고 잠든 후 깨어보니
제주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후 고은은 1963년부터 1968년까지 4년여 동안
제주도에 거처를 마련하고 은거 생활을 했다고 한다. 1968년 제주도에서
가짜 고은 사건이 터졌다. 고은을 사칭한 '가짜 고은'이 지역 유력자의 딸과
사기 결혼을 했다는 것.
1968년 수필집 〈인간은 슬프려고 태어났다〉를 냈는데, 수필집에서 자기 스스로를
'성(聖) 고은'이라고 신격화하여 사회적 이목을 끌었다.
1970년 짧은 시집 〈세노야〉를 펴낸 뒤, 한동안 작품을 내지 않고 번역가로 활동했다.
이무렵 고은은 북한산 계곡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 시도를 했다가 근처에서
훈련하던 예비군들이 그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등단 이후 1970년까지 발표된 그의 시들은 허무의 정서, 생에 대한 절망,
죽음에 대한 심미적인 탐닉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당시 그를 두고 흔히 허무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그 뒤 1974년부터 그의 시는 경향이 크게 달라지게 된다. 고은은 1974년 저항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을 발표한 이후 시대상황에 대한 비판과 현실에 대한 투쟁의지를
적극적으로 담는 저항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70년대 중반부터 갑자기 성향이
완전히 바뀐 것에 대해 고은 본인은 "이쪽으로 흐르던 물이 다른 쪽으로 급격하게
돌아서 흐르기 시작한 것"에 비유했다. 이후 그는 70년대 최고의 저항시인으로
꼽히게 되면서 반독재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아래 항목 참조)
1983년 중앙대학교 영어과 이상화 교수와 결혼한 뒤 부인의 직장이 있는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에서 멀지 않은 안성 대림동산 전원주택 단지에서 살았다.
2013년 수원시의 구애로 안성을 떠나 수원 광교산 자락으로 이주했다.
이에 광교산 일대 주민들이 특혜 및 혈세 낭비라는 이유로 시위를 하며 논란이 되었다.
아마 본인들 거주지 주변의 개발제한구역 해제를 위해 애먼 고은을 타겟으로 삼은 듯
한데 성격 상 수원을 떠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수원시 측에선 난감하게 여겼다.
그리고 실제로 떠나게 되면서 주민들은 욕을 엄청 먹는 중이었다. 참고로
저 구역은 장안구 상, 하 광교동으로 영통구에 속한 광교신도시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4. 정치적 행보[편집]
1958년 등단 이후 고은은 1970년대 초반까지 쭉 순수문학만을 지향해왔다.
그러다가 1974년을 기점으로 갑자기 저항시인으로 변모하여 반독재 투쟁에
앞장 서게 된다. 일부 문헌에는 1971년 3선 개헌 반대 때부터 고은이 반독재
운동에 앞장섰다고 쓰여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에 대해 고은 본인은
훗날 3선 개헌 당시 자신은 '허무'에 빠져 '무각성적'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1974년 저항시인으로 변모한 이후 고은의 행적을 보면 반미, 친북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정작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민주화,
반독재 활동은 생각보다 비중이 크지 않다. 사실 고은의 반독재
민주화 활동을 보면 반미, 친북, 친미성향 정부에 대한 반정부 활동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운동권 반미주의 측면에서 고은은 독재자인 카다피,
김정일에게 찬사를 보낸 바 있기 때문에 반독재, 민주화 운동가라고 부르기에는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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