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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현동에 위치한 특이한 디자인 건물의 2층 작업실. 실내가 훤히 보이는 창, 보통 우리가 쓰지 않는 판두부용 틀을 이용한 정리함, 방 한켠의 밥말리의 브로마이드, '나는 영어선생님이 아닙니다' 라고 쓰여 있는 오토바이 헬멧, 벽에 붙여놓은 큰 사이즈의 길거리에서나 볼 수 있는 주황색 볼록거울 등....
대개 사람의 방을 둘러보면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다고 했던가? 그러나 그 작업실을 꾸민 이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 듯 했는데... 작업실에서조차 동양에 대한 호기심이 엿보이는 디자이너 시모네 칼레나를 만나보았다. 동경의 공모전에 잠시 들렸다가 한국내 지인의 초청을 받아 이태리 ELASTICO 한국지사의 리더로, IDAS(국제디자인대학원) 교수로 한국 디자인계에 몸담은지 이제 2년. 이방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우리나라 디자인계, 그리고 반대로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이 해외진출을 위해 노력해야 할 점 등을 들어고자 한다.
유럽인으로 아시아에서 일을 하게 되기까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다. 아시아에서 처음 느낀 것은 신선함과 참신함이다. 기존의 유럽문화권에서 가지고 있던 잘못되었다고 여기던 방식이 아시아에서는 자연스레 받아들여지고 있는 게 있었다. 단순한 예로, 세로쓰기로 된 책과 책장을 왼쪽으로 넘기는 등의 역발상 이라고나 할까? 또 서양에서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던 동양인 특유의 예의바름이 나를 붙잡았는지도 모른다. 늘 새롭고 다양한 것을 경험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동양에 대한 호기심은 한국에서 일을 해보고 싶게 만들었다.
건축을 전공했는데, 뮤직비디오, 제품디자인, 교육 등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여러가지를 해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텐데.... 학교에서는 디지털미디어디자인을 가르치고 있고 비즈니스에 있어서는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요즘 같은 퓨전 프로젝트는 전공 한 분야에 집착해서는 이뤄내기 어렵다. 생명체는 한 가지 기능에만 파고들면 그 기능수행에 있어서는 완벽해지지만, 다른 환경이나 큰 변화가 생기면 자연 안에서도 도태되기 마련이듯이, 비즈니스에 있어서 매니저의 역할이 단지, 회계만 할 줄 알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전과정에 걸쳐 역할을 이행할 수 있어야 한다. 퓨전 프로젝트의 수행은 디자이너에게 그저 스쳐 지나가는 유행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디자인은 어떤 것도 구분하지 않는다. 멀티미디어의 발달로 다양한 분야가 섞인 것이 디자인이고, 순수와 디자인이라는 경계 및 동서양의 구분도 사라지고 있다. 프로젝트를 하는 데 건축이라고 해서 도면만 잘 그리면 되는 시대는 지났고, 본인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애니메이션, 핸드스케치, 3D등 모든 분야를 총동원해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내 경우는 서양인으로서 동양에서 일하려면 클라이언트와 말이 안 통하니까, 프리젠테이션을 하면서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곤 한다. 통역이나 글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뮤직비디오를 통해 음악 없이도 시뮬레이션과 시각적 리듬감을 주어 내가 디자인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려는 것으로, 공감각적인 면을 강조해서 리듬과 비트를 눈으로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어떤 프리젠테이션이라도 한 가지 미디어만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일을 진행해본 경험으로 비춰, 이방인으로서 본 우리나라 디자인계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태리와 한국 모두 디자인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은 같지만, 그 가치가 가진 뜻이 다르다. 이것은 디자이너의 측면과 클라이언트의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우선 디자이너 측면부터 보면, 한국은 좋은 디자인이 나오면 팔아야 한다는 경제적 가치를 우선시 하는 것 같고, 이태리에서는 좋은 디자인이 나오면 디자이너의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해서 자신이 소유하려는 경향이 짙다. 클라이언트를 비교해서 보자면, 이태리의 경우 클라이언트가 시시콜콜한 것까지 관여하다 보니 디자이너로서의 자유는 제약을 받지만, 그만큼 의뢰인의 감정이나 의견교환이 많아지고 결국 결과물에 있어서 디자이너와 의뢰인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게 된다.
하지만 한국의 클라이언트들은 일을 맡기면서 가끔 이태리적 시각으로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한다. 그러나 정작 그런 주문대로 이태리 감각을 강조한 작품을 보여주면 클라이언트들은 다시 "한국에서는 상황이 달라요"라는 말로 이태리 스타일로 해달라는 요구를 한다. ㅍ즉, 클라이언트가 뭔가 새로운 것을 원하고는 있는데 정작 새로운걸 보여주면, 다른 프로젝트나 프로덕트에서 비슷한 것을 찾곤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기존의 것을 개량하는 것이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새로운 디자인을 시도한다는 것을 겁내고 있는 것 같다. 결국 클라이언트와 피드백의 부족으로 디자이너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있지만, 결과에 가서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의 클라이언트의 가장 큰 특징이 피드백이 없다고 했는데, 피드백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피드백은 더 좋은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정이다.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가 많은 의견교환이 있어야 서로 시행착오 없이 만족할 수 있는 디자인이 나올 수가 있고, 이것은 디자인과정이 끝난 후에도 마찬가지다. 대개 디자이너는 제안과 디자인을 해주고 대가를 받으면 그 과정은 끝나고, 설치는 클라이언트가 하게 된다. 하지만 디자이너로서는 설치부터 최종결과에 이르기까지 진행상황을 알 수가 없다. 문제는 피드백이 없다보니 가게마다 색이 변경되는 등의 디자인의 아이덴티티가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피드백은 스케치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프로세스에서 광범위하게 필요한 것인데, 아무래도 피드백이 부족한 이유는 빠른 시간 내에 일을 완성하려는 조급함이나, 동양의 예절에서 우러나오는 것 일수도 있다. 클라이언트는 디자이너에게 이런저런 의견을 내세우고, 고치자고 하는 것을 디자이너에 대한 예의가 어긋나거나 일에 간섭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디자인을 위해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솔직히 우리나라에서 고비용을 감당하면서 해외에 디자인의뢰를 한다는 것은 이미지 개량을 위함도 있지만, 해외에서 디자인했다라는 홍보효과도 무시할 수 없는데? 국제적 감각을 위해서 해외 디자인업체에 일을 의뢰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물론 국내에서의 홍보효과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정 받는 디자인이 나와 서양으로 역수출할 수 있다면 해외업체에 의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요즈음 서양에서 동양의 호기심은 점점 늘어나면서 동서양의 경계가 많이 허물어졌다. 이럴 때 반대로 동양의 디자인 회사들이 해외에 진출하거나 디자이너들이 해외에서 자리를 잡는 것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의 유학과 함께 현지에서 직장을 잡는 일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이 해외로 진출하려고 한다면 무엇을 가장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첫째, 자기 문화에 대한 이해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즉, 근본을 잊지 말고 본인의 문화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한다. 둘째, 상대방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익숙해져야 한다. 셋째, 각 국가마다의 터부, 즉 금기를 이해하고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된다. 물론 언어적 문제의 해결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터부를 이해해야 한다고 했는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아직 한국이라는 곳에 배우는 중이지만, 내가 한국의 금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머니로서의 여성지위, 연령대로 확연히 구분되는 문화권, 그리고 한국문화 어디에나 존재하는 위, 아래라는 식의 예의범절 등 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의범절은 디자인의 발전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와 달리 이태리의 경우, 마피아 세력의 부정부패가 심해서 학교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아주 심각하다. 게다가 사회가 너무나 가족 중심이기에 마피아 세력 또한 가족관계처럼 서로 아주 심하다. 즉, 이태리에 진출한다라고 하면, 이태리의 금기는 마피아다. 그 마피아라는 금기를 깨려고 하면 금기가 깨지는 것이 아니라 해외에서 온 디자이너만 힘들게 되는 것 같이 각 국가마다 가지고 있는 금기를 깨려고 하는 것은 성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학생들에게 예절이 디자인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국 학생들에게도 클라이언트와 같은 문제점이 존재한다. 역시나 교육에서도 나타나는 피드백의 부족을 말한다. 이 피드백의 부족을 나는 예의를 강조하는 문화가 많이 반영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IDAS에서 디자인을 가르치면서 내가 본 것은 한국 정부는 학생들에게 '국제적인 디자이너'가 될 것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반복이나 순환을 좋아하고, 공동체적 성향이 강해서 순환의 일부가 되어있을 때 존중 받고, 시스템에 도전하면 문제시 되는 것 같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예의는 인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와 학생이라는 지위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이라는 것이 ABCD의 순서가 있어서 가르치는 게 아니라 아이디어가 있을 때 교수와 프리젠테이션, 브레인스토밍 등을 통해 더 좋은 디자인이 나올 수 있고, 자신의 디자인 신념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데, 그냥 '예' 하고 듣고 있거나 '어떻게 고치면 될까요' 하는 식으로 교수가 말하는 것은 곧 정답처럼 지켜져야 한다는 불필요한 예절이 너무 강하다. 정작 한국의 교육시스템은 내용보다는 형식, 재능보다는 직위, 창의성보다 암기, 혁명보다는 권위를 존중하도록 장려한다. 디자이너는 자유롭게 다양한 대안을 제시해야만 한다. 하지만 아무리 학교에서 날 수 있는 방법을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학생들은 졸업 뒤 고용이 되자마자 암울한 사무실이라는 다시 한국이 당면한 현실에 갇혀 날개를 펴지 못하게 된다.
문제는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는 것인데, 빠른 시간에 해결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 사회의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 날 수 없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학생들부터 마음가짐의 변화가 무엇보다도 절실하다. 학생들부터 변해야 나중에 회사를 설립하고, 사회에 진출했을 때 또 다른 변화를 가지고 올 수 있는 것이다. 가끔 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훌륭한 디자이너가 될 수 있죠 하는 질문을 하는데, 본인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을 가장 좋아하는지, 무엇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디자인의 다양한 분야가 섞이고, 분야간의 경계는 사라지고 있다. 디자인 경영자가 되려면 개방된 생각을 가져야 한다. 한곳에서 성공하려는 생각이 아니라 어느 곳에 가서도 성공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이든 흡수할 수 있는 개방된 생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좋은 기회가 왔을 때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열정과 재능이 합해졌을 때 인정 받고 성공할 수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아시아에 관한한 교수님도 아직까지 배우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앞으로 한국에서의 계획은? 내가 한국에 있는 이유는 한국의 잠재력을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금전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잠재력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회중심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잠재력이 아니다. 아이슈타인이 상상력과 창의성이 지식보다 중요하다고 했듯이, 창의성은 무엇보다 가치 있는 잠재력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창의성을 가르칠 것을 규칙으로 정한다면, 이미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게 된다. 창의성은 지식의 주입을 통해 익숙해지게 만들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본인이 좋아하는 것에 열정을 갖고 노력할 때, 사회와 디자인계는 변할 수 있다. 나와 학생들, 클라이언트의 관계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동양에 관한 것을 배우고 또 서양의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give & take 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만 보아도 한국은 앞으로도 나에게 머무를 만한 충분한 가치를 준다.
글_임혜진(KIDP 정보컨텐츠팀) / 사진_윤행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