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대교회찬송
기독교는 헬라와 로마문화권 속에 있던 유대교를 배경으로 발생하였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 400여개의 회당이 있었다.
1.성전
a. 잘 짜여져 있다.
b. 제사장과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성가대가 담당하였다.
c, 악기도 사용(A.D. 2번째 예루살렘 성전파괴로 예배 시 악기 사용 금지):기교적
d.사제들에 의해 산 제물로 예배를 드림
2.회당
a.평신도들이 주도하는 예배의 장소
b.말씀 중심의 예배
c.성가대가 없었으며 악기도 사용하지 않음: 단순
d.회중들은 시편을 노래함
1. 시편
1)시편: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로 내려오면서 사용하던 찬송가(회중찬송용, 개인적 기도용,
특별한 행사용)-시편 찬양은 보통 제창이었지만 구조적으로는 교창.
예수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에 부른 찬양: 시편 113편, 118편.
2)전체150편 중 5권, 각권마다 짧은 송영으로 끝난다,
1권(시1-41편)
2권(42-72편)
3권(73-89권)
4권(90-106권)
5권(107-150권):대 송영
3)헬라문화의 영향
구약성서가 헬라어로 번역되고 신약성서가 헬라어로 쓰여 지므로 문학, 철학 등 문화의 중심임을 알 수 있으며 교회의 언어로서도 300여 년간 쓰여 졌다. 히브리 시문학 형식의 특징인 평행법을 사용하였다.(사상리듬이 주도적 역할):교송법, 응답송
교송법: 두 그룹의 성가대가 교대로 부르는 형식
응답송: 독창자와 회중이 응답하여 부르는 창법
초기 헬라어 찬송은 평행법, 대귀법, 교송법 같은 히브리 시형을 모방한 시적인 산문형식을 따르다가 점차 고대 헬라시의 운율형식(약약강조 anapaestic 이나 약강조 iambic)으로
씌여졌다.
초기동방교회와 중세 서방교회로 계승되었으며 회중들은 아멘이나 할렐루야 와 같은 짧은 말로 응답하며(신명기 27:14-26) 시편 136편의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와 같이 후렴 귀절을 불렀으리라 여겼다.
초기 기독교의 세계는 헬라어권의 동방교회와 라틴어권의 서방교회가 주도하였다.
4). 다수의 시편에는 표제가 붙어있다.
알다스헷의 곡조: 시편57,58, 59, 75(이사야65장8절)-민요
요낫 엘림 르호김: 시편 55편6-7
스미닛: 시편6
알라못: 시편46-여성들이 부름
구약영창
영창(canticle):신앙고백의 노래로 쓰였던 성구
최초의 구약영창은 출애굽15장에 나오는 모세의 노래
이사야의 노래(사26:9-21), 한나의 찬송(삼상2:1-10), 요나의 노래(욘2:2-9)
하박국의 노래(합3:2-19)
신약찬송
경험을 노래하고 싶어 함.
성탄을 노래한 세편의 찬양시
1.누가복음1:46-56 마리아의 찬송
2.누가복음1:67-80 사가랴의 찬송
3.누가복음2:27-32시므온의 찬송
신약성서의 교회음악관을 가장 중요하게 나타내고 있는 말씀은
바울의 골로새서 3장16절과 에베소서 5장 19절이다.
초대교회 찬송은 주후70년 성전이 허물어진 다음 기독교인에 대한 핍박이 심해지므로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게 됨에 따라 많은 유태의 관습, 의식, 예식이 폐지되었다.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드리지 않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간에 적대감은 더 높아져 갔으며 사제도 종이나 대리인이 아니라 신의 은총을 전달하는 매개자 역할을 하게 되고 기도서를 만들고 음악을 추가시켜 회중예배에 비중을 두게 하였다. 헬레니즘 문화가 로마제국 전체에 영향을 끼쳤고 1918년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두루마리‘가 초대교회에서 부르던 찬송가의 음악적 특징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증거이다.
4세기 초 교회에 대한 그리스 문화의 영향력이 수그러지고 서방교회의 언어가 라틴어로 바뀌었다.(6세기말 전교회의 언어가 라틴어로 바뀜)
콘스탄티누스황제는 330년 제국의 수도를<비잔틴>으로 옳기고 이때부터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리.-로마교황청의 교권이 크게 성장- 예배의식에 교창을 도입하고 시편 영창을 회중이 책임지게 만들었다.(두개의 소 합창단): 교대로 부르다가 할렐루야 같은 반복 구에서 함께 노래하는 형식을 취했다.
독일찬송
엄격한 의미에서 독일찬송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생긴 독일 개신교회의 회중찬송을 의미하지만 독일어로 된 찬송은 이미 종교개혁 3,4세기 이전부터 독일에 나타났었다.
1. 종교개혁이전의 독일찬송
종교개혁 이전부터 독일 사람들은 모국어로 된 찬송을 불렀으며 종교개혁 당시 루터는 이미 독일어로 된 찬송을 가지고 이를 근거로 복음을 담은 개신교회의 찬송을 만들 수 있었다.
2.종교개혁과 루터의 코랄(chorale)
1)종교개혁이란?16세기에 가톨릭교회의 부패상에 대하여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올바른 신앙관을 세우고자 독일을 중심으로M, Luther와 스위스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J, Calvin 과U, Zwingli 등이 일으킨 종교개혁 운동이다.
2)개혁음악사상:루터는 전적인 옹호자,
칼뱅은 선별주의자,
쯔빙글리는 절대거부주의자였다.
개혁시기의 찬송가의 발달은 이와 같은 두개의 큰 흐름으로 마틴 루터와 쟝 칼뱅의 교회음악관을 배경으로 독일회중찬송인 코랄과 프랑스어로 된 운율 시편가를 탄생시켰으며 코랄과 시편가를 통하여 회중찬송이 발달되었다.
3) 루터의 종교개혁과 교회음악사상
1517년 비텐베르그 성당에 95항목의 반박문을 붙임으로 개혁을 시작한 루터는 교회음악에 있어서도 개혁적으로 찬양을 사제로부터 회중에게로, 라틴어에서 모국어로 불리어 지기를 원하였다.
예배의식에 대한 그의 견해를 (미사전례, 1523)와 (독일미사, 1526)에 서술하였다.
a.미사전례: 라틴어 미사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예배의식을 거의 손대지 않은 채
채택한 형식이고 의식적인 예전음악이며 교육을 받은 지식층과 도시교회 신자 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의식으로 존속시켰다.
b.독일미사: 창의적인 것으로 가톨릭교회의 예배자료를 독일 신자들의 특수성에 맞도록 하여 서민층과 교육받지 못한 농민들을 위해 독일어 사용을 권장하고 독 일어 회중 찬송을 넣어 성가대와 회중이 적절히 나누어 부르게 하였다.
그는 “음악을 하나님의 선물이며, 영혼을 즐겁게 하고, 마귀를 몰아내며, 죄 없는 기쁨을 일으킨다”고 하였고 새롭게 번역, 수정하여 신자들이 익숙한 찬송과 성가의 곡조를 알아듣고 새로운 교회에 오히려 친숙함을 느낄 수 있게 하였다.
루터의 코랄(chorale)
루터에 있어서 1523-1524년은 가장 중요한시기로 23편의 찬송을 완성하고 생애 모두 37편의 찬송을 만들었다. 특히 유명한 찬송가로는 “내주는 강한 성이요”(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 이며 종교개혁초기 루터는 하우스만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국어 찬송을 만들 작사자가 부족함을 이야기 하고 이에 응한 많은 독일의 시인과 작가들이 참여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유타스 요나, 한스 작스, 니콜라우스 데시우스, 니콜라우스 헤르만 등이 있으며 초기 코랄 작가들은 새롭게 가사를창작하기도 했지만, 옛날 카톨릭 교회의 예전, 종교개혁 이전의 비예전 찬송 세속민요 등에서 자료를 가져다 만들기도 하였다. 16세기에 174개의 콘트라팍툼에 의한 찬양곡이 있었다.
초기 코랄의 특징
a. 생동력있는 리듬을 들 수 있는데 신앙의 찬송은 짧은 음표로 명상 찬송이나 기도의
찬송은 긴 음표를 사용하였다.
b. 소절형식(Barform, AAB)의 사용- 이것은 독일의 마이스터징거의 음악적 전통에서 온 것이다. 마이스터징거는 중세의 미네징거에서 파생하여 주로 15-16세기에 활약한 시 인, 작곡가들로써 정기적으로 모여 시와 음악의 기예를 닦곤 하였다. 소박하고 유머 스 러운 시에다 무반주 단선율 곡조를 불렀다.
루터의 가장 중요한 음악적 공헌
코랄에 있어서 독창적으로 이오니아선법을 사용한 것과 진보적인 음악이론에까지 손을 대어 중세의8개의 선법을 12개로 확대하는 것을 통해 오늘날의 장조와 단조의 조성을 낳게 하는 길을 열었다. 루터의 첫 번째 찬송가는 1524년에 출판된 “몇 편의 기독교노래”와 에르 푸르트 찬송가집이며 발터와 루프의 협조를 얻어 루터교 찬송가를 편집 출판하기도 하였다. 봘터가 출판한“비르텐 베르그 영가집”은 성가대를 위한 다성 코랄곡집이며 루터가 마지막 감수한 마지막찬송가는 120편의 찬송과 97개의 찬송곡조가 실려있는 바프스트(1545년)의 찬송가이다. 이러한 루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중찬송의 발달은 미미했으며 16세기말경이 돼서야 회중찬송이 널리 사용되었다. 회중은 무반주 유니슨으로 찬송을 부르고 성가대는 테너성부에 코랄선율이 있는 세련된 다성 합창곡을 불렀다.
17세기 독일찬송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대립으로 시작된 종교전쟁(1618-1648)은 유럽전역에 걸쳐 정치적, 종교적 싸움으로 번져 나가게 하였다. 이 전쟁으로 인한 질병과 고통이 찬송가에 그대로 반영되어 개혁초기의 객관적인 성격의 찬송이 개인적인 찬송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대상이 “우리”에서 “나”로 바뀌었고 회중찬송보다 가정에서 사적으로 부르기에 더 적절한 것이 많았다.
17세기 초 오피츠를 중심으로 일어난 독일 시문학의 순화운동의 영향을 받아 언어의 순수성과 운율을 강조하였다. 17세기의 유명한 찬송작가로는“귀하신 예수”의 헤르만, “다 감사드리세”의 게르하르트등이 있으며 리스트(1607-1667)는 680여편의 찬송과 영가를 작사하였지만 대부분 사적인 용도를 위해 만들어 진 것이다. 17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독일찬송가는 크뤼거의 “Praxis Pietatis Melica(음악을 통한 경건의 훈련)”로 1736년까지 45판이 나왔으며 1300 여 편의 찬송이 수록되어 있다.
경건주의 시대의 독일 찬송
30년 전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경건주의 신앙운동은 17말 절정에 이르렀다. 1670년 할레에서 스페너에 의해 창설한 “신앙동지회”는 생명력 없는 형식주의, 교리주의에 대항하여 깨끗하고 실제적인 종교경험과 경건을 강조하였다. 루터교 찬송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 시기에 가장 유명한 찬송가는 후라이링하우젠의 찬송으로 그는 유니슨으로 부르고 한 개의 건반악기로 반주할 것을 주장하였다. 750편의 가사와 250개의 곡조가 수록되어 있으며 후라이링하우젠 찬송가집의 특징은 바로크 음악의 가장 두드러지고 기본적 요소인 통주저음과 숫자저음의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의 곡중 어떤 곡은 기악적 요소가 두드러졌고 멜로디의 장식음이 많았으며 즉석편곡연주나 멜로디장식을 요구하고 있다.
18세기 독일 찬송
18세기 가장 유명한 찬송 작시자는 벤야민 슈몰크 인데 경건주의에 속한 자는 아니지만 실제적인 신앙생활을 다루고 있지만 고교회파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12권의 찬송가를 출간하였고 900편이상의 찬송을 작사하였다. 오늘날 가장 많이 불리고 있는 “내주여 뜻대로”(찬431,개294,새602, 합291) “아름다운 시온성아” “영원한 빛 예수” 등이다. 슈몰크의 본을 따라 보수적인 루터교회의 찬송 작사자 가된 너이 마스터의 대표적 찬송“천성 길을 버리고” 등이 있다. 바하(1685-1750)가 교회음악 전체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컸지만 회중찬송에 기여한점은 보잘것없었다.
바하시대에는 경건주의와 세속음악의 대두로 회중음악은 쇠퇴하고 오르간과 성가대의 비중이 커졌다. 개신교음악의 코랄의 역할은 매우커서 코랄 칸타타, 코랄 모테트, 등의 합창곡과
코랄 변주곡 등의 오르간 곡의 기초가 되었다.
!) 18세기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영향
18세기 복음주의적인 찬송가로 웨슬리찬송가 가사를 마음대로 바꾼 화이트필드의 찬송가가인기가 있었다. 18세기 대부분의 비국교도의 회중찬송은 왓츠의 찬송이 지배적이었으나 웨슬리나 톱레이디, 화이트휠드 등의 찬송도 같이 사용되었다. 18세기 영국국교회에서는 찬송부르는 것이 공인되지는 않았지만 왓츠의 시편가가 점차 “새번역” 시편가 대신 사용되었다.
영국국교회의 복음주의적인 찬송가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이 있는 것은 1779년에 출판된 가난한 사람들의 <올리찬송가>이다. 이것은 뉴우턴이 교구목사로 근무하던 올니회중을 위한 찬송가로 대부분 수공업에 종사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종교교육의 방편으로 찬송을 사용하였다. 영국교회에서 찬송 부르는 것이 정식으로 공인된 것은 1820년 <코테일>의 찬송가이며 몽고메리와 켈리는 18세기와 19세기의 과도기에 위치하면서 18세기의 복음적 찬송에서 19세기의 성공회 찬송으로 넘어가는 중간적인 역할을 하였다.
2) 19세기 낭만주의의 영향
18세기 말경에 대두되기 시작한 낭만주의의 운동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활짝 꽃피기 시작하였다. 낭만주의는 문학, 예술, 음악, 철학 등의 분야에 변화를 가져왔는데 고전주의 구속에 대한 반동으로 이성과 보편성을 강조하던 객관성애서 감정ㄱ하 개성을 중시하는 주관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낭만주의 정신은 찬송저작에도 영향을 주어 문학적으로 순수하고 높은 수준의 시적 작품이 나타나게 되었다. 19세기 접어들면서 찬송은 교육적 실용적 목적보다 교회의 정상예배를 위한 찬송들이 많이 나왔으며 문학적인 면에서 순수한 시적 감정의 표현으로 된 질이 높은 찬송시가 나오게 되었다. 19세기 낭만주의의 대표작가로는 수준이 높고 교회력에 따른 예배음악으로 곡을 쓴 히버를 들 수 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성공회 교회에서처럼 회중들은 <스턴홀드와 홉프킨스>의 시편가를 부르고 있었고 예배는 성공회의 교회력과 기도서에 기초하여 짜여져 있으므로 매주일 예배에 맞는 찬송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히버는 성공회의 교회력에 따라 매주일 지정된 복음서와 서신과 관련된 찬송을 작사하기 시작하였다. 히버의 찬송은 문학적 표현에 있어서 서정적인 높은 수준의 작품일 뿐만 아니라 성공회의 교회력에 다른 매주일과 성일의 예배를 위하여 씌여졌다는 것이 큰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히버의 찬송은 “보통운율”, “장운율”, “단운율”의 테두리를 벗어나 당시의 리듬과 시적 구조를 그의 찬송에 사용하였다. 세속음악에서의 낭만주의 운동은 찬송가 곡조에도 반영되었고 가디너의 곡집에는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등 유명작곡가의 작품에서 딴 찬송곡조를 찬송가에 도입하였다.
3)옥스퍼어드 신앙부흥운동의 영향
1830년 영국성공회의 부흥운동인 <옥스퍼어드운동>으로 성공회의 예전에 대한 정화작업이 일어났으며 성직자들은 중세의 수도생활을 부활하여 개인적인 경건과 금욕생활을 강조하게 되었다. <기도서>는 중세 가톨릭 교회의 <성무일과서>에 비추어 수정되었고 중세의 예전적 찬송이 도입되었다. 옥스퍼어드 운동이 영국찬송가에 미친 가장 중요한 영향은 <고금찬송가>의 출판이었다. 노벨로에 의해 초판이 출판된 고금찬송가는 영국의 국가적인 명물로 여어를 사용하는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영국국교회의 공인된 찬송가가 되지는 못하였다.
4) 빅토리아시대의 찬송
빅토리아 여왕이 1837년 왕위에 오를 때 옥스퍼어드운동은 그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빅토리아시대는 번역찬송과 창작찬송이 홍수를 이루었으나 이렇다 할만한 것이 없었으며 1870년무디와 생키에 의한 부흥집회에서 미국의 복음찬송이 가는 곳마다 성공을 거두며 영국에 소개되었다. 1892년에는 찬송가학자인 쥴리안의 <찬송가학사전>의 출판으로 회중찬송의 발달은 절정을 이루었다.
5) 20세기 찬송
20세기찬송에 사회적 의식이 나타났으며 1906년의 <영국찬송가>는 학문적 높은 수준을 강조하고 있어 이후의 영국미국찬송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 세 번째로 완전히 수정된 <고금찬송가>가 1950년에 출판되었고 1951년에 출판된 <회중교회의 찬송가>에는 음악편집자인 티만의 우수한 곡조들이 수록되었다. 1961년에 나온 침례교 찬송가에는 복음송가가 수록되어 있어 생키와 영국에서 있었던 빌리그레함 부흥집회의 영향을 볼 수 있다. 1965년에는 성공회찬송가<The Anglican Hymn Book>이, 1971년에 출판된 <New Catholic Hymnal>새 가톨릭 찬송가에는 광범위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가사와 곡조들이 수록되어 있고 흥미있는 새로운 찬송들도 많이 나타나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라우틀리는 “영국 찬송제작의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이시기의 찬송작가들은 신선한 현대적인 어휘와 문체를 사용하였다.
미국찬송가
1)미국초기의 시편가
1564년 불란스 개신교도 위그노 이민자들에 의해 시편가가 인디언들에게 전해졌고 2세기가 지나도록 원래의 시편가 곡조를 그대로 보존하였다. 영국 시편가가 미대륙에 처음 소개된 것은 1579년 북부 캘리포니아 연안에 도착한 드레이크경 일행에 의해서였으며 1607년, 제임스 타운의 정착자들은 “구역시편가”를, 1620년 매사츄세츠주 프리머드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화란을 거쳐 오면서 <제네바 시편가>의 화란역을 접하게 되었고 히브리 학자인 에인스워드가 출판한 영어 시편가를 가지고 들어왔다.
2)베이시편가
미국대륙에서 출판된 최초의 시편가는<베이 시편가>이며 베이(Bay) 연안의 거의 모든 청교도들이 사용하여 일명<베이 시편가>라고도 하였고 이 시편가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으며 뉴잉글랜드 지방과 팬실배니아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셀럼 교회에서는 1667년에, 프리머드 교회에서는 종래 사용하던 에인스워드 시편가 대신 베이 시편가를 사용할 것을 결정하였다. 1762년까지 베이 시편가는 27판을 거듭하였으며, 초판은 다시 인쇄되어 1754년까지 20여 판이 넘게 출판되었다.
3)인디언을 위한 시편집
원주민들을 위한 선교사업이 일찍부터 시작되었는데, 인디안을 위한 사도라고 불려지는 엘리오트는 1661년에 케임브리지에서 인디언 언어로 된 시편가 (Wame Ketoohomal Uketoohomaongash David)를 출판하였으며 1663년에는 인디안 언어로 된 성서를 출판하였다.
4)시편가의 개선 노력
시편가를 부활시키고 회중의 찬양태도를 개선하기 위해, 일단의 젊은 교역자들이 개혁을 추진하였다. 우선 회중으로 하여금 기억에 의존하여 노래하는 습관을 버리고 악보대로 노래하는 습관을 가지게 하였다. 이러한 운동을 ‘신식, 정식 찬양 및 악보대로 부르기’로 불렀으며, 그 반대되는 개념은 ‘구식, 보통 찬양 및 외워부르기’였다. 올바른 가창법에 대한 계몽으로 도시에서는 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갔으며 회중찬송의 질도 점차 개선되어갔다. 18세기 중엽 후에는 음악학교를 위한 “가창학교(singing school)”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들 학교를 위한 가창교본과 노래책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시편가의 퇴보를 극복해보려는 노력이 젊은 목사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터후쯔는 <시편가 가창입문>을, 심슨은 <올바른 가창법>을, 출간하여 악보를 제대로 읽으며 곡조를 바르게 부를 수 있도록 개선을 시도하였다. 1716년에 출판된 라이온의 곡조집 <하늘의 노래>에는 영국과 미국의 시편과 곡조, 찬송곡조, 성가곡들이 수록되어있다. 상당수가 4성부 합창곡으로 되어있으며 18세기 말경에 가서 매우 유행하게 된 찬송 스타일(후가풍의 곡조)이 처음으로 수록되어있다.
5)대각성운동의 영향
1734년 메사추세츠 노담톤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전개된 대각성운동은 영국의 부흥사, 화이트 필드가 1739-1741년까지 미대륙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함으로 더욱 열기를 띠게 되었다. 합리주의의 팽창과 문화적 혼란의 와중에서 발생한 이 운동은 개인적인 회개의 경험을 특히 강조하였다. 그의 부흥집회에서는 언제나 열렬한 찬송이 뒤따랐고 왓츠와 웨슬리의 찬송을 주로 부르게 하였다. 이것은 미국의 시편가 시대에서 찬송가 시대를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교회에 왓츠시대를 열게 해 주었다. 찬송가는 회중교회, 감리교회, 보수파교회에서는 인기가 있었지만, 장로교회에서는 새로운 찬송의 도입으로 대논쟁이 100여 년간 계속되었으며, 1741년에는 구파와 신파로 갈라지는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구파는 주로 시편가만 고집하고 신파에서는 “새번역시편가”나 왓츠의 시편가를 지지하였다. 1802년 장로교 총회에서는 드와이트의 왓츠 찬송가를 정식으로 공인하였으며, 1831년에 최초의 공인 장로교 찬송가가 나오게 되었다. 대각성운동의 영향으로 침례교회에서도 왓츠의 찬송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800년 제2의 종교적 각성운동인 대부흥운동이 서부 캔터기지방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장로교 부흥사 맥그리드가 당시 가장 죄 많은 지역으로 알려졌던 캔터기 주의 로산 카운티에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찬송은 설교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였는데, 대부분 손뼉을 치며 발을 구르면서 열광적으로 불렀다. 부흥운동은 언제나 새로운 찬송을 탄생시켰듯이, 서부의 대부흥운동은 캠프집회 찬송을 낳았다. 당시는 찬송가가 부족했으므로 대부분 책 없이 외워서 불러야 했고 새로 배워야 했기 때문에, 왓츠나 웨슬리의 찬송 중에도 복잡한 찬송은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1) 찬송의 내용은 죄인의 구원에 대한 것이 많았으며 찬송의 구조는 가장 흔한 형태인 발라드스타일을 주로 채택하였다. 곡조는 단순하며 민요조로서 후렴이나 합창이 반드시 붙여졌고 반복이 많은 것이 특징이었다. 1850년 이후에, 장로교회에서의 캠프집회는 급격히 격감했고, 1825년까지 주로 감리교회가 이를 주도하였다. 침례교회는 장기집회로 변화되었고 오순절 성회에서는 20세기 초까지 캠프집회를 계속하였다.
6)19세기 미국찬송
19세기 초기에 일어난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교파적인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영적인 힘은 신앙생활의 여러 부분에 나타나게 되었다. 교파적인 사업이 활발하여짐에 따라 교파별 찬송가 출판도 활발히 일어났다.
1827년에는 미국 성공회의 찬송가가 <Hymns of The Protestant Episcopal Church of The United Stats America>나왔고 왓츠, 도드리지, 웨슬리 등 18세기의 영국 찬송들이 대부분이며 뉴턴, 쿠우퍼, 몽고메리, 히버 등의 찬송과 이 찬송가의 편집자인 뮐레베르그와 온더돈크의 찬송 등 212편이 수록되어있다. 1821년에 출판된 감리교 찬송가 <A Collection of Hymns for The Us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는 대부분이 챨스 웨슬리의 찬송으로 되어있고 미국에서 나온 찬송이나 당시 감리교인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있던 캠프집회 찬송은 하나도 수록되어있지 않다. 회중교회 찬송가로는 <프리머스 모음집, 1855년>과 <안식일 찬송가, 1858년>가 출판되었다. <플레이마우스 콜렉션>은 뉴욕 부르클린에 있는 프리머스 회중교회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1374년의 많은 찬송이 수록되었는데 복음적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다. <플레이마우스 콜렉션>은 가사와 악보가 같은 면에 수록된 최초의 찬송가이다. 미국 루터교회 초기 찬송가로는 <A Hymn and Prayer Book>과 <Church Book>이 널리 사용되었는데, 미국에서 루터교 코랄은 다른 교파에 별로 영향을 주지 못했다.
1857년에 있었던 미국의 극심한 경제공황으로 인한 무질서와 부폐적 상황에서, “제2의 대각성운동”으로 알려진 신앙부흥운동이 1857년에 다시 나타났다. 초교파적인 연합기도회로 나타난 이 부흥운동으로 복음적 찬송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1872년 무디와 생키의 영국에서의 부흥집회는 성공적이었고, 생키가 사용한 노래들이 영국에서 1923년까지 8000만부나 팔릴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1875년부터 블리스는 무디와 생키와 같이 미국의 주요 도시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는데, 이들의 복음찬송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복음찬송의 곡조는 음악회에도 영향을 주었고, 거리에서, 집에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일상적인 노래가 되었다. 이들 노래 중에는 블리스의 ‘하나님의 진리등대’, 크로스비의 ‘저 죽어가는 자’, 생키의 ‘양 99마리’가 있다. 가장 많은 복음성가를 작사한 사람은 맹인 여자 작가 크로스비이다. 그녀는 대부분의 생을 뉴욕시에서 살았는데, 8000여 편의 복음찬송을 작사하였다. 그녀의 찬송은 브레드버리, 루트, 도온, 로우리, 생키, 스웨니, 커크페트릭 등 당시의 유명한 복음찬송 작곡가들의 곡조로 되어있다. 엠메트와 휘스터가 세속 음악에서 미국인에게 준 영향을, 종교음악에서는 생키와 블리스가 유용하게 적용하였던 것이다.
7)20세기의 찬송
20세기 미국 찬송가에는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미국 찬송가 사상 어느 시기보다 잘 편집된 찬송가들이 출판되었다. 각 교파의 찬송가들은 다른 교파의 찬송가와 경쟁하거나 비교하는 식으로 만들지 않고, 오직 각 교파의 예배형식, 찬송가의 전통, 교인들의 문화적, 경제적 배경을 고려하면서 편집되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1933년에 출판된 장로교 찬송가는 교회음악가 디킨슨이 편집한 것으로 “음악가의 찬송가”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질이 높은 찬송들이 수록되어있다. 이 찬송가는 널리 사용되었지만, 복음적인 장로교회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8)현대 미국 찬송
현대 미국 찬송가의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예배에 대한 개념의 변화가 반영되어있다는 점이다. 신자의 공동예배의 의미가 점차 새롭게 인식되고 강조됨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임박한 마지막 심판을 강조하던 이전시기의 찬송과는 달리,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노래가 많이 나타났다. 또한 “약속된 나라”를 동경하던 표현에서 이 세상에서의 풍부한 삶을 간구하여 수동적이며 경건한 기독교인의 생활태도보다는, 적극적인 봉사와 인류의 복지를 위한 생동력있는 생활을 강조하게 되었다. 왓츠나 웨슬리의 찬송은 당시의 문학적 표현이 현대교인들에게 진부하고 의미가 별로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급격히 쇠퇴되고 있는 현상을 보여주며 19세기 영국 옥스퍼드운동의 찬송들은 예전적인 교파나 비예전적인 교파에서 모두 광범위하게 채택되어 사용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현대의 교파 찬송가는 교파적인 특색보다는 기독교의 풍부한 음악적 유산과 전통에서 폭넓게 자료를 택하고 있으며, 교파를 초월한 보편적인 찬송가의 성격을 띠고 있다. 로마 가톨릭의 전유물처럼 생각되었던 단성성가가 개신교 찬송곡조로 많이 채택되고 있으며 회중찬송에 유니슨창법이 새롭게 등장하고 복음성가도 루터교나 장로교 등의 찬송가에 채택되는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영국과 유럽의 민요조에서 따온 찬송곡조가 많이 사용되고 흑인영가도 현대찬송가에 수록되어 사용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136거기 너 있었는가, 518신자 되기 원합니다)또한 19세기 말의 복음성가를 계승하는 현대적 복음성가가 피터슨이나 케이더에 의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노래는 19세기 복음성가의 가사나 음악적 스타일과 비슷한 점이 많은데, 직설적이고 단순한 가사라든지 일반 대중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부르기 쉬운 대중적인 곡조로 되었다. 1960년 중반기부터 미국에서는 청소년들의 음악적 취향을 따른 민요와 팝음악적 요소가 병합된 <청소년 뮤지컬>이 많이 나타났고 1970년대에 와서는 간단한 기타코드반주로 된 민요와 팝스타일의 영가들이 많이 나타나 특히 청소년들의 집회에 널리 사용되었다. 현대의 미국 찬송은 과거의 어느 시기보다도 다양한 음악적 경향을 보여주며, 좀더 의미 있는 회중 찬송을 위한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찬송가의 역사
한국에 정식으로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한 것은 1885년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라>가 인천에 입항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왔을 때 이미 개신교 신자들이 있었으며 부분적이나마 한글로 된 성경이 유포되고 있었다. 이것은 만주 우장에서 전도를 하던 스코틀랜드 장로회 선교사<로스>목사와<맥킨타이어>목사의 영향이었다.
로스목사의 한국어 선생이 된 이응찬은 1876년 맥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 사람으로는 최초의 개신교인이 되었다. 당시 의주사람으로 만주를 왕래하던 인사 중에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등이 모두 만주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그 중 백홍준은 1883년 의주로 돌아와 전도를 시작하였다. 1889년 언더우드가 의주에 갔을 때 세례 받기를 지망하는 신자 백여명을 보았다고 했다. 의주사람 서상륜도 만주에서 로스목사에게 세레를 받고 로스목사를 도와 한글 성서번역에 착수하여 1882년에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출간되었다.1882년 수신사 박영효와 같이 일본에 갔던 이수정은 일본에서 1883년 세례를 받아 개신교 신자가 되었으며 1884년 마가복음서를 발간하였다. 언더우드는 이것이 최초의 성경인 줄 알았지만 이미 한국에는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한글 성서가 배포되어 읽혀지고 있었다.
1887년 선교사에 의해서 최초로 설립된 새문안교회에 14명의 신도가 참가하였는데 이들 중 13명이 이미 서상륜을 통해서 신자가 된 사람이었고 백홍준과 서상륜이 최초의 장로로 선택되었다.
1) 찬송가가 최초로 발간된 것은 1892년 감리교 선교사 조지 허버 존스(George Herber Jones)와 루이스 로드웨일러(Louis G. Rothweiler)가 펴낸 수형본의 소책자인『찬미가』는 전곡이 27편이고 모두 번역 찬송가로 당시 불려졌던 찬송가를 수집하여 편집한 것으로 악보 없이 가사만으로 된 찬송가였다.
2) 최초의 규모를 갖춘 악보찬송가는 1894년에 장로교에서 언더우드의 『찬양가』이다. 128페이지에 117편의 찬송이 수록되었고 4성부 악보가 첨부되어 있는데 일본에서 인쇄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왓츠(13편)와 웨슬리(7편)의 찬송을 비롯한 18, 19세기 영국계 찬송60편과 블리스(P.P. Bliss)의 찬송 5편을 포함한 19세기 미국찬송20편 등 영국과 미국의 복음적 찬송이 주축을 이루고 있고 한국인 찬송 7편(4, 29, 38, 61, 93, 113, 115장)이 수록된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찬양가>의 대부분은 중국어 찬송에서 따오거나 번역한 것이어서 난해한 점이 많았다.
<찬양가>의 곡조는 대부분 영국과 미국의 찬송곡조로 되어 있으며 독일코랄이나 시편가 곡조는 거의 채택되지 않았다. <찬양가>는 원래 장.감 양선교부에서 합동찬송가를 편집하기로 합의하고 감리교 존스와 장로교의 언더우드가 편찬위원으로 위촉되었는데 존스목사가 미국에 돌아가서 일년 남짓 머물렀기 때문에 지연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긴 언더우드가 단독으로 출판하였던 것이다. 이를 못 마땅히 여긴 감리교에서<찬양가> 사용을 전면 거절하였다.
<찬양가>는 남쪽 장로교에서만 주로 사용하고 감리교에서는 존스과 로드웨일러 공편으로 1892년 <찬미가>를 수정, 보충하여 81편의 찬송을 수록하여 1895년에 <찬미가>를 발간하여 사용하였다. <찬미가> 제 10장의 애국가는 1896년 배제학당 학생들이 독립문 정초식 때 부른 애국가인데 일명 <무궁화>로 되어 있으며 <올 랭 사인 Auld Lang Syne)곡조로 되어 있다. 현행애국가의 작사자인 윤치호의 <찬미가,1905>는 을사조약으로 한국이 일본에게 강탈당하던 해였다. 감리교의 <찬미가>와 같은 이름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감리교의 발행이 언급되지 않고 재판(1908)으로 끝났다.
목차에 한문목차와 한글 목차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중국 찬송가의 영향을 볼 수 있다.
1886년 선교사에 의해서 설립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에서는 처음에 영어찬송을 그대로 가르치다가 점차 한두 줄씩 번역하여 부르기 시작하였다. 1891년 이화학당에서 성악과 오르간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경신(1886), 정신(1887), 영화(1890)등 기독교계 학교에서 도 설립 초창기부터 음악과목(창가라고 했음)이 있어 주로 찬송가를 번역하여 가르쳤다. 이러한 번역찬송은 1888년경부터 나오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3) 언더우드의 <찬양가>가 공인되지 못한 채 서울지방에서만 사용되다가 장로교회의 공인 찬송가로 출간 된 것이『찬셩시』이다. 1895년에는 리이(Graham Lee)와-기퍼드(Mrs. M. H. Gifford) 부인 두 사람에 의해서 출간되었다. 악보가 첨부된 것은 1905년에 처음 출간되었기 때문에 그전에는 여러 곡조로 불리어졌었다. 이리하여 1896년에는 <찬양가>, <찬미가>, <찬셩시> 3개의 찬송가가 사용되었다.
4) 그 후 장로교와 감리교 두 교파 사이에 공동용 찬송가를 만들자는 의견으로 배위량부인(Mrs. W. M. Baird), 민로아(F.S.Miller)목사, 벙커(D. A. Bunker)였으며 요꼬하마 인쇄소의 화재로 1908년 이 세 찬송집을 합해 『찬숑가』가 발행되었다. 266편의 찬송이 수록되어 있으며 곡조가 없이 가사만 수록된 것으로 곡조<찬숑가>는 출판비관계로 피득 목사내외가 사적으로 출판하였다. 1908년부터 1930년까지 22년간 43판 발행에 874,500부나 간행되었다.
5) 그러나 1911년 성결교 측에서 『부흥가, 160편』를 출간하였고
6) 1919년 감리교 측에서 이를 증보하여『신정복음가, 210편』를, 1930년『부흥성가, 255편』를 발행하였다. 구세군에서는 1912년에<구세군가 251편>을 발간하였고 천주교에서는 1924년에 <죠션어셩가>를 발행하였다.
7)1924년 예수교 연합공의회는 그 첫해의 사업으로 <신정찬송가, 314편>를 발간하였다. 이 곡의 반수 이상이 <찬숑가>에서 온 것이다. 70편이 청년 찬송에서, 한국인 창작 찬송6편, 편집위원장은 아펜셀라였다. <신정찬송가>는 우수한 가곡을 많이 편입한 것과 어귀가 음악의 억양에 어울리는 것, 주조음이 원곡대로 된 것, 가사의 번역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된 것 등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7) <신정찬송가>는 원래 장, 감공용으로 Tm기 위해 만든 것인데 여러 가지 이유로 이것을 선택하지 않고 1932년 48장이 첨가 된 여러 판에도 불구하고 장로교에서도 별도로 1935년 『신편찬송가, 400편』를 발행하였다.
8) 해방 후에는 초교파적으로 합동 찬송가 편집이 추진돼 그 동안 다르게 사용하여 오던
9) 장로교의 『신편찬송가』, 감리교의 『신정찬송가』, 성결교회의 『부흥성가』를 한 권의 찬송가로 묶어 총 568장으로 된, 조국의 해방과 함께 장, 감, 성 세 교파에서 한국 교회 사상 처음으로 한국인의 손으로 통일된 『합동찬송가』를 1949년 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통일찬송가>는 새로운 편집이라기 보다는 세가지 찬송을 하나로 묶어 놓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사의 중복이 많고 종래의 복음 찬송, 부흥성가가 그 주축을 이루었다. 한국인의 창작찬송도 결여되어 있으며(합 195, 486 두장) 단지 해방의 기쁨으로 급하게 만들어져 결함이 많았다. 그러나 하나로 통일된 찬송가로 찬송을 부르는 교인들의 감격은 커서 1967년 <개편찬송가>가 나오기까지 20판이나 재판되었다.
10) 그러나 이 찬송가를 발행한 후에도 1950-60년대 교회 분열 과정에서 예장 고신 측과 합동측이 1962년 『새찬송가』를 펴내 사용했다. 발행은 팀밋숀(Team Mission)의 “생명의 말씀사”였다. <새찬송가>는 <신편찬송가, 1935)를 기초로 구미 각국의 우수한 찬송을 첨부하여 원작을 직접 번역하는 것으로 독일찬송(새15, 17, 48, 79, 181, 191, 391)과 일본찬송(새192, 566, 580, 597 등)새로운 찬송이 많이 소개 되었으나 한국 찬송은 결여되어 있다.
11) 그 후 한국 찬송가 위원회가 1967년『개편찬송가』를 발행했으나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앞의 두 찬송가와 함께 세 종류의 찬송가를 사용하는 한국 찬송가 분열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로서 교파의 분열은 찬송가의 분열을 가져왔다. <개편찬송가>에는 한국인 창작찬송 27편을 포함한 600편의 찬송이 수록되었고 성결교단의 특색 있는 복음찬송 20곡을 후에 부록으로 첨부하였다. <개편찬송가>는 종래의 한국 찬송가가 선교사들이 전도의 목적으로 사용했던 복음가, 부흥가들로 주축을 이루고 있었음에 비하여 예배찬송과 교회의 의식에 관계된 찬송을 많이 보강하므로 부흥중심의 경향에서 예배 중심의 찬송가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0년 동안 <합동찬송가>에 익숙한 교인들에게 고치지 않아도 좋을 가사를 고쳤다, 좋은 찬송가가 빠졌다 는 등, 불만이 많았다.
12) 그러다가 1970년대 후반 한국 기독교 100주년을 앞두고 찬송가 통일에 대한 여론이 일어 진보·보수 교단(성공회와 가톨릭)이 참여하는 찬송가공회에서 <통일 찬송가>를 발행해 1984년부터 오늘까지 한국교회의 공동 찬송가로 사용하고 있다.
총558편 중 80%이상이 미국, 영국의 번역찬송이며 특히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미국의 전도집회. 부흥회노래인 복음찬송(Gospel Hymn)이나 복음성가(Gospel Song)가 260여편으로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인의 창작찬송은 17편으로 김연준, 나인용작곡의 찬송곡(92장, 272장)이 새로 첨부되었다. 이러한 <통일 찬송가>도 전문성이 결여되고 표기방법이나 작사자, 작곡자, 작곡자표시에 오류가 많으며 예배를 위한 좋은 찬송이 너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13) 한국 가톨릭교회는 2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서 통일성가집<가톨릭성가>를 1985년에 출간하였다.<공동체성가집>,<새 전례 성가집>, <정선가톨릭성가집>에서 100곡정도, 기타 수도회 고유 성가집에 수록된 곡과 새로 작곡된 80여곡을 합하여 총398편이 수록되어있다. 한국인이 작사한 것이 49편, 한국인 작곡이 126편으로 개신교 <통일찬송가>에 비해 한국인의 곡이 상당수 수록된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14) 한국 찬송가공회(공동회장 김활용 임태득 목사)는 ‘21세기 찬송가’에 대한 최종 수정작업을 벌여 연내 발간한다는 방침을 재확인하고 ‘21세기 찬송가’ 시제품에 대한 이견을 모두 수렴한 후 16∼18일 새 찬송가에 대한 최종 수정작업을 벌인다. 김우신 총무는 5일 “검토할 분량이 그다지 많지 않을 경우 연내 발간한다는 것이 공회의 기본 입장”이라고 밝혔다.
공회측은 19일 오전 11시 서울 발산동 사무실에서 열리는 임시 임원회에서 올해 내 발간 여부를 최종 결정, 각 교단에 ‘21세기 찬송가’ 사용 안을 올해 정기총회에 상정해 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었다.
공회측은 올해 상반기 발행을 목표로 전문위원 측에 발행 시기를 앞당겨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반면 일부 전문위원들은 충분한 검토를 위해 발행 시기를 늦춰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지난 공청회에서는 ‘21세기 찬송가’ 시제품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 이어졌다. 그러나 공회측은 “잘못을 지적한 곳도 몇 군데 있었지만 그동안 검토와 수정작업에서 이미 나온 지적도 상당 부분”이라며 공청회 결과를 다소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21세기 찬송가’는 국내 곡 90여곡, 외국곡 530여곡 등 모두 620여곡이 수록될 예정이며 ‘21세기 찬송가’가 발간되면 현재 사용 중인 통일찬송가는 더 이상 발간되지 않는다. 찬송가 단행본은 통일찬송가 교환 전례에 따라 1권에 한해 무료로 교환해준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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