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르나도 파오르 감독의
<나자리노 Nazarino Cruz and Wolf, 1975>
이제 갓 태어난 나자리노라는 이름의 아기를 안고
그의 어머니가 한탄하며 마을을 배회한다.
이유는
그녀의 남편과 여섯 명의 아들이 강물에 쓸려 모두 목숨을 잃는 참사가 발생한데다
이제 막 일곱번째 아들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마침 작품의 오프닝에서는
웬 마녀가 그녀의 일곱번째 아들은
늑대가 될 운명이라며 낳아서는 안된다는 말을 들려준 참이다.
막 아기가 태어났지만
마을 사람들은 모두 문을 잠그고 이 모자를 회피한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게봉된
아르헨티나 영화 <나자리노>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비극으로 시작된다.
어느덧 건실한 청년으로 장성한 나자리노.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으니만큼
마을 사람들은 그가 언제고 늑대로 변할 것이라는
마녀의 예언은 우스갯소리로 여기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나자리노 앞에 그리셀다라는 여인이 쿵, 하고 나타난다.
영화는
단 한마디의 대사도 없이 순식간에 열렬히 사랑에 빠진 두 주인공의 모습을 담아 낸다.
오늘의 관객입장에서 보자면
너무 심하게 비약된 시나리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불러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만들어진지 무려 50여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말이지만
<나자리노>는 대단히 독특한데가 있는 작품이다.
오프닝에서 카랑카랑하게 들려오는 마녀의 저주는
대번에 세익스피어의 <맥베스>같은 희곡을 연상케 만드는데,
이후의 대사는 대단히 연극적으로 절제되어 있는 편이다.
그래서
당시에 만들어진 작품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뮤직비디오 형식을 차용하고 있는 작품에 가깝게 느껴진다.
오늘날의 뮤직비디오는
현란한 안무장면을 보여주는데 치중하는 편이지만
지난 90년대에 즈음만 하더라도
고도로 압축된 줄거리가 있는 뮤직비디오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물론 이는 미국에서 크게 흥한 MTV의 영향 탓이지만
한편의 영화 예고편처럼 느껴지는 뮤직비디오를 접한 적이 있는 분들이시라면
이 작품도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하아...
1970년대에는 이렇게 데이트를 했단 말입니다!
뭐, 나자리노도,
그리셀다도 행복해 보이니까 보는 이도 행복해지는 것 같다.
에... 영화 속의 러브신을 보면서 와! 하고 감탄한 장면이다.
가만,
블로그에 이런 장면을 올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압도적인 이미지의 수중 키스신도 등장한다!
수중 키스신이 나오는 영화라면....
<블라인드 데이트 Blind Date>에서의 브루스 윌리스와 킴 베이싱어,
<스플래쉬 Splash>에서의 톰 행크스와 다릴 한나,
<천녀유혼 倩女幽魂>에서의 장국영과 왕조현의 달달달한 장면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압도적이기로는 단연 <나자리노>다.
이런 과감한 장면을 굳이 올리는 이유는,
영화 속의 러브신을 보면서
정말로 와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아 본 것이 난생 처음이기 때문이다.
지난 1970년대라면
이런 장면은 삭제된 채 개봉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수중 키스신 하나만으로도
극장에서 이 작품을 접한 관객들은
평생 잊지 못할 명장면을 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뜬금없이 루시퍼의 아들래미라는 진짜 악마도 등장한다.
이 악마는
나자리노의 부친과 여섯 형제를 저승에서 만난 적이 있고,
그들로부터 나자리노의 운명을 듣고는 주의깊게 살펴본 모양이다.
악마는
나자리노에게 사랑에 빠지면 피가 들끓어 올라 늑대가 될 것이며
이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운명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는
사랑을 포기하면
일곱대의 마차에 담긴 은금보화를 모두 주겠다고 하는데...
물론 나자리노는 이 유혹을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린다.
뭐, 오늘날이라면
주먹만한 금덩이 하나만으로도
사랑이고 나발이고 모조리 팽개쳐 버리겠지만
아무래도 옛날 옛적 영화라 그런지
은금보화를 내세운 악마의 유혹 따위는
사랑에 빠진 젊은 청춘 앞에서 무용지물이다.
어느 보름달이 떠오른 날 밤,
나자리노는 정말로 늑대로 변해 버린다.
그날 밤
마을의 양떼가 늑대에게 습격을 당하고
앙치기는 목숨을 잃는 대형참사가 발생한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모여서 늑대사냥에 나서는데...
사랑에 빠지면 늑대로 변한다는 전설은
어딘지 폴 슈레이더 감독의 <캣 피플 Cat People>을 연상하게 만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워낙 오래된 영화라 그런지
이 작품을 보면 묘하게 이후의 몇몇 영화들에 영향을 끼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 적지 않다.
마을 사람들을 피해 숲속에서 밀월을 나누는 두 사람.
하지만
이들을 향한 마을 사람들의 추적은 집요하고,
마침내 그리셀다가 유산하는 참사가 발생한다.
그리셀다의 부친이 딸을 안고
슬픔에 잠겨 마을 사람들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대목은
이 작품에서 비극이 가장 극대화되어 있다.
얼핏보면
너무 감정이 복받쳐 있는 상황으로 받아들이기 쉬운데,
이 작품에서는
그리셀다가 임신한 상황에 대한 설명이 턱없이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 그녀가 유산한 상황이라는 것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그녀의 치마로 유추할 수 있는 정도다.
작품의 엔딩에 이르러
악마와 다시 재회한 나자리노.
이 대목은
의외로 상당히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대목이기도 한데,
악마의 대사를 통해 이 작품의 진짜 주제의식이 확 드러난다.
창조주로부터 생겨나라는 한마디 말에 의해
그냥 생겨났다는 악마는,
지금까지 사랑이라는 것을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존재다.
이 작품에서
악마는
사랑이 부재한 세상에서의 기나긴 세월에 지쳐,
나자리노를 시험해 본 것이다.
악마 마저 사랑을 갈구하는
가냘픈 존재로 묘사되는 이 작품의 시나리오는
확실히 오늘날에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사랑지상주의가 아로 새겨져 있다.
다시 늑대로 변해버린 나자리노.
저 멀리서 그리셀다가 달려 온다.
물론,
늑대도
그녀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한다.
카메라에 필터를 씌워
대낮을 밤처럼 보이게 촬영된 장면이지만
순백색의 원피스를 입고
어둔 숲속을 늑대와 함께 달리는 그리셀다의 이미지는
그대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레전드 Legend>의
한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존 부어맨 감독의 <엑스칼리버 Excalibur>,
제인 캠피온 감독의 <피아노 Piano>
같은 작품에서도 그랬지만
사랑을 갈구하며 숲 속을 질주하는 여인의 이미지는
금단의 사랑을 향해 폭주하는 여성의 원초적인 감정이 실려있어
그 자체만으로 큰 감동을 자아낸다.
보통의 경우 금단의 사랑의 끄트머리에는
파괴적인 비극이 뒤따르기 마련이지만
칼릴 지브란이 그러지 않았나.
사랑이 그대를 부르면 그
끄트머리에 헤아릴 수 없는 낭떠러지가 버티고 있다 하더라도
주저없이 달려 가라고.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나자리노>는
50여년 전에 만들어진 뮤직 비디오라는 느낌으로 감상하면
지금도 그리 나쁘지 않은 작품이다.
물론 50여년이라는 시차가 있으니만큼
여기저기 촌스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옛날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원시적인 에너지가 담겨 있는 것은 또다른 장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오늘날의 사랑은
옛날 옛적의 사랑에 비해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오늘날의 젊은 커플들에게
이 작품 속의 악마가
펑, 하고 나타나서
자, 은금보화와 연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이 글을 쓰는 사람이 너무 앞서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백이면 백,
모두가 돈을 선택하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오늘날 사랑에 빠진 열혈남녀를 구경하기 힘들어지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정치 사회 문화 종교 예술 철학 기타 등등에 관한
모든 창조의 근원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랑이 사라짐으로써 창조가 사라지고,
창조가 사라짐으로써 모든 것이 소멸되어 가는 시대,
아주 오래된 영화 한 편은 의외로
오늘을 반추하게 만드는 시간을 갖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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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자리노' OST-Soleado/When a child is born -Michael Holm(마이클 홈)
2023.02.24.영화 '나자리노'를 혹시 보셨나요? 1975년에 만들어진 아르헨티나의 영화인데요. 우리나라에서는 1976년에 개봉하여 많은 관객수를 동원하였다고 합니다. 35만명이라고 하는데 그 당시 영화관 수에 비하면 엄청난 관객 수일 것 같습니다. 저도 이 영화는 영화관에서 본 것 같기도
첫댓글 [영화 감상] "나자리노 Nazarino Cruz and Wolf,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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