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십니다
- 예수의 신성을 증거해야 할 당위성
1요한 2,3-11; 루카 2,22-35 /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2023.12.29
오늘 복음은 시메온의 찬미가를 전합니다. 그는 늙은 나이에 이르도록 메시아를 기다려온 인물로서 예수님께서 태어날 당시에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가 태어난지 여드레가 되던 날에 산모의 정결례와 아기의 봉헌예식을 드리러 성전에로 올라갔습니다.
산모의 정결례 규정은 레위기에 나옵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여자가 아기를 배어 사내아이를 낳았을 경우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된다. 월경할 때와 같이 부정하게 된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아기의 표피를 잘라 할례를 베풀어야 한다”(레위 12,1-3). 여기서 산모가 부정(不淨)하다는 표현은 여자의 몸이 가장 취약할 때 다른 이들과 접촉하지 않음으로써 감염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전통 풍속에서도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새끼줄을 꼬아서 빨간 고추를 끼워서 만든 금줄을 쳐서 다른 이들의 접근을 막았었습니다. 그러므로 산모의 정결례란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는 규정에 따라서 부정한 상태 즉 위생상 취약한 처지를 벗어나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음을 알리고자 하는 예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의 부모가 평소에 유다교의 율법에 충실한 평균적 유다인의 삶을 살았음을 보여줍니다. 나중에 장성하신 예수님의 공생활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당시에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율법주의적 처신이었음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첫 아기를 봉헌할 때 바치는 예물은 봉헌자의 살림 형편에 따라 일 년된 숫양이나 염소 한 마리 또는 산비둘기 한 쌍이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도록 되어 있었는데(레위 5,6.-7 참조),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가난했던 탓으로 비둘기를 바쳤습니다.
이 가난한 봉헌을 위대한 메시아의 봉헌으로 알아본 사람은 노예언자 시메온이었습니다. 루카는 이 사람을,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로서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루카 2,25ㄴ)고 전합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아기 예수님에게서 메시아의 기운을 알아차린 시메온은 감격에 겨운 찬미를 올립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시메온의 찬미가로 알려진 이 축복의 기도 안에 하느님께서 알려 주신 예수님의 운명과 미래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 아기의 탄생은, 오랜 세월을 기다려 메시아를 출현시킨 이스라엘 백성의 영광이며 또한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세상의 죄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나라에로 들어가는 길이 열리는 계시의 빛을 비추리라는 위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고 “하느님의 구원을 보았다.”(루카 2,30)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는 메시아를 기다려온 신심깊은 유다인들 즉 아나빔의 마음을 대변합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며 바치는 성무일도 끝기도에서 시메온의 노래를 바치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 신앙고백을 계승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요한이 권고하는 대로, 이러한 고백을 바친다는 것은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이며 따라서 그분처럼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두고 그분의 정체와 미래의 운명을 알아본 시메온은 분명 예언자적인 안목을 지니고 있었고, 그 안목은 그분의 영광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분이 짊어지시게 될 십자가의 운명까지도 내다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다.”(루카 2,34ㄴ)는 예언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는 그분만이 아니라 그분을 따르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계시는 그렇게 해서 빛을 비추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메온은 이러한 그분의 운명에 따라 아기 어머니가 받게 될 고통까지도 알려주었습니다.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루카 2,35)이라는 예언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성모 마리아께서 받으실 고통은 또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감내해야 할 고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이 알려주는 사건을 묵주의 기도를 바치면서 환희의 신비 제4단에서 기억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요셉과 마리아를 따라서 우리 자신의 봉헌을 새롭게 되새기고자 함입니다. 하느님께 봉헌된 우리의 삶이 교회에게는 영광이 되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계시의 빛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인 요한 1서는 사도 요한은 예루살렘에 머물며 아직 소아시아에 가기 전에, 바오로의 뒤를 이어 에페소 공동체를 사목하던 티모테오로부터 이단 신앙인들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하려고 부탁을 받고 100년경에 써 보낸 서간 세 통 중 첫째 편지입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요한서간집 해제’, 정양모)에 따르면, 요한의 서간이 쓰여진 배경은 이러하였습니다.
서기 68년과 70년에 이스라엘 젤로데파가 주동이 되어 로마제국에 항거하고자 했던 독립전쟁의 결과로, 예루살렘의 도성과 성전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유다인들은 110만여 명이 살육당했으며 10만여 명이 포로가 되어 로마로 끌려가는 대참변이 벌어졌었습니다. 이 무렵 간신히 소아시아로 피신한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그리스도교에 입교한 이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그리스적 사유방식에 영향을 받아 강생의 신비를 부인하며 정통 그리스도 신앙을 훼손하는 이단사상 주창자들에게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이단사상에 정면으로 맞서는 한편, 에페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소아시아의 교회 신자들에게 정통 신앙을 전해 주고자 하였습니다.
이 당시에 이 소아시아 지역은 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영토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해양 식민 활동을 활발히 하던 그리스의 영향력이 남아 있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소아시아로 불리면서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그리스적 사유방식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따라서 그리스의 다신교 풍습과 로마의 황제숭배 풍습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요한의 편지에 따르면, 그 이단자들은 교회를 떠났으며(1요한 2,18-19), 성실한 교우들을 유혹하고 있었습니다(1요한 2,19; 2요한 10). 그들은 ‘그리스도의 적’(1요한 2,18.22; 4,3; 2요한 7)이며, ‘거짓말쟁이들’(1요한 2,22)이고, ‘거짓 예언자들’(1요한 4,1)인가 하면, ‘속이는 자들’(2요한 7)입니다. 이들은 하느님께로부터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태어났으며, 속이는 영의 인도를 받고 있었습니다(1요한 4,5-6). 이들은 영지주의의 이분법적 사조에 물들어 그리스도론과 윤리와 종말론에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관점에서는 그리스나 로마의 다신교가 부질없는 우상숭배로 보이고 황제숭배는 더욱 더 터무니없는 우상숭배로 보이지만, 고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의 눈에는 한낱 사람이었던 예수를, 더군다나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과 어울리다가 정치범으로 낙인 찍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를 신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굶주린 짐승의 먹잇감으로 내어주거나 십자가에 매달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함으로써 그리스도 신앙을 말살하고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를 부인하는 악행을 서슴없이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천5백여 년이 지난 후 그리스도 신앙이 본격적으로 아시아인들에게 전해졌을 무렵에는 선교적 상황이 아주 달랐습니다. 마호멧이나 조로아스터 같은 예언자나, 부처나 공자 같은 성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온 아시아인들은 유럽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오랜 종교 전통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에서 파견된 그리스도교 선교사들도 예수님을 서양의 성현으로 소개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이러다 보니 그분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이시고 역시 신성 (神性)을 지니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이 가려져 버린 것입니다. 게다가 그리스도교는 서양인들의 종교라는 이미지마저 굳어져 버렸습니다.
이렇듯이 예수님의 신성이 묻히고 서양 외래 종교라는 이미지만 남은 것이 지난 시절 아시아 선교 역사의 커다란 패착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 “사실 세상의 구원자께서 아시아에서 태어나셨지만, 지금까지 이 대륙의 백성들에게는 대부분 제대로 알려지지 않으신 채 남아 계심은 커다란 숙제이자 수치입니다. 여기에 아시아 교회의 사명이 있습니다”(‘아시아 교회’).
이 선교 사명에 대하여 교황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교회의 신앙은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선물인 동시에 더 많은 아시아인들과 나누어야 할 선물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우리가 유일한 구세주로 선포하는 예수님께서는 인간 본성을 충만히 소유하시고 이 땅 위에서 사셨던 하느님이십니다.
둘째, 그분께서는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보잘것없는 이들과 가깝게 지내셨으며,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기에 그들을 진실로 복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죄인들이 자신의 죄스런 처신에서 돌이켜 하느님께 돌아온다면 그들을 위한 자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식탁에 마련되어 있음을 확신시키시면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병자, 절름발이, 맹인, 귀머거리와 벙어리들이 모두 그분과 접촉하여 용서와 치유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어부, 세리, 열혈당원 그리고 율법을 모르는 이들과 또한 여성들과 같은 사회 주변부 사람들을 가장 가까운 동료들과 협력자들로서 선택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놀랍고도 모든 것을 감싸 주시는 사랑으로 결합된 새로운 가족이 창조되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으로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아시아인들에게 선물처럼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 아시아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사명입니다.
셋째, 그분의 존재가 위에 언급된 바처럼 공생활 중에 베푸신 은총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비록 배척을 받아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성령으로 믿는 이들 안에서 현존하시면서 살아계실 때와 똑같이, 시공의 한계에 제약을 받음이 없이 하느님의 은총을 보여 주고 계시기 때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야말로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아시아의 동료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하는 선물입니다.”
교우 여러분! 시메온 예언자가 아기 예수님을 축복하며 찬미한 대로, 그분은 모든 민족들에게 계시의 빛이십니다. 이 진리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극소수에 불과한 아시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 도성에는 태양이나 달이 비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주며 어린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만국 백성들이 그 빛 속에서 걸어 다닐 것이며 땅의 왕들은 그들의 보화를 가지고 그 도성으로 들어올 것입니다”(묵시 21,23-24).